예수 말고 다른 것을 공급하는 목사와 교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우리는 구두쇠가 아니고, 매정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궁핍하고, 가난하고, 결핍된 사람들을 보내실 때에
우리는 기꺼이 그들을 도우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충분한 지혜가 있다면 그들의 필요를 효과적으로 채워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 결핍된 사람들에게 공급해주는 우리의 공급은,
우리 자신을 아는 데에 아주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들에게 공급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면,
내 안에 채워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줄 수가 없지만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많이 줄 수 있고,
적게 가진 것은 적게 밖에 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에게 나누고, 공급하고 있는 것들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지니고 있는지 하는 것이 확인이 된다 이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돈을 공급하고 있다면 내게 돈이 있다는 말이고,
사람들에게 육적인 것들을 제공하고 있다면 내게 육적인 것이 있다는 말이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제공하고 있다면 내게 기쁨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미가 자녀에게 젖을 먹이려면 젖이 있어야 하듯이,
우리가 사람들에게 공급해 주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 사람들은 가난하고, 결핍 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먼저 사람들을 진단해 봅시다.
사람들은 결핍되어 있고, 궁핍하며, 가난한 상태입니까?
이 질문에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대답 할 수 있습니다.
육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사람들은 전혀 결핍이 없고, 궁핍하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고,
아주 풍성하고, 부요하고, 흘러 넘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육적인 것들을 공급해 줄 필요가 전혀 없고,
사람들도 육적인 것들을 우리로부터 공급받고자 하는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육적인 것들을 들고 사람들에게 나아가면 사람들은 반가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귀찮게 생각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육적인 면에 있어서는 교회가 더 궁핍합니다. 더 가난하고, 더 결핍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히려 교회가 세상의 도움, 세상 사람들의 공급을 받아야 할 처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돈이 더 많습니까? 먹을 것들을 누가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까? 생활 용품을 누가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물질적인 것들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다니요! 이것이 제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보다 더 많은 물질을 가지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물질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로 이것은 코미디입니다.
우리는 매우 가난합니다. 그래서 매주 간식을 사먹는데 절약해야 하고,
주일학교 아이들을 위해서 해주고 싶은 것들도 다 못해줍니다.
우리는 매주 예산이 공급되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지만 세상과 세상 사람들은 부자입니다. 우리보다 훨씬 부자이고, 부요하고, 풍성합니다.
돈이 우리보다 많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우리가 변변찮고, 전혀 시답지도 않은 살림거리(수세미나, 세제, 오이 같은)들을 들고 그들에게 나아가면 그것이 앞뒤가 맞는 이야기입니까?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의 진리 때문이 아니라, 넌센스 때문에 받는 비웃음 말입니다.
수박장사에게 수박을 사들고 가는 것과 같은 넌센스는 이제 그만 버려야 합니다.
■ 모든 인간은 궁핍하다
그렇다면 다시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정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매우 결핍되어 있고, 궁핍하며, 가난하고, 굶주려 있다고 말씀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네, 정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중간 결론은 이것입니다. 교회에 무엇이 필요하냐 이것입니다.
목사에게, 성도들에게, 장로들에게 무엇이 필요하냐 이것입니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교회는 사람들의 결핍과 궁핍과 가난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는 사람들의 결핍과 궁핍과 가난을 깨달을 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눈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에 결핍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결핍되어 있고, 가난하고, 궁핍하고, 굶주려 있습니다.
생명에 대하여 그러하고,
빛에 대하여 그러하고,
사라에 대하여 그러하고,
위로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결핍 되어 있고, 가난하고, 궁핍한 상태입니다.
이 결핍을 볼 줄 아는 눈이, 교회와 목사와 성도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눈이 오늘날 한국교회와 목사와 성도들에게는 없는 것 같습니다.
만약에 이 눈이 한국교회와 목사들에게 있었다면,
교회들의 사역이 지금처럼 물질적인 것들을 동원하거나,
육적인 프로그램들과 설교들로 채워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물질적인 것들이나 육신을 만족하게 하는 것들을 더 많이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교회가 사람들의 결핍과 궁핍과 가난의 상태를 볼 줄 아는 눈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없거나 아니면 아주 적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전도한다며 나가서 물질적인 것들을 주는 것은
육신의 눈들은 밝지만 영혼의 눈은 매우 어둡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고,
물질이 많고 넉넉한, 부자교회가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매우 가난하고 궁핍하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심히 가난하고, 궁핍하고, 결핍되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찌 예수를 주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고, 물질적인 것들을 공급하는 데에 시간과 열정을 쏟는 일을 스스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의 진짜 결핍, 예수에 대한 극심한 결핍과 궁핍을 보았다면 교회와 목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공급할 것입니다.
예수를 공급하는 데에 열심과 헌신을 할 것이고, 모든 시간과 노력과 마음을 동원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에 대해 결핍된 사람들의 영혼을 볼 눈이 없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들을 제공하는 데로 관심과 시간을 나누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그 빛을, 많은 목사들이 그 빛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 예수에 대해 결핍된 목사와 교회들
교회와 목사들이 사람들에게 예수가 아닌 다른 것들을 공급하고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심각한 문제 하나를 알려 주는데,
사실 교회와 목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궁핍하고, 가난하고, 결핍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에 대하여 궁핍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와 목사들이 예수에 대하여 궁핍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풍성하고, 부요하고, 충만하다면 교회와 목사가 예수 외에 다른 것들을 주려고 하겠습니까?
그 좋은 예수를 왜 아끼고 훨씬 더 못한 것들을 공급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만 있다면, 교회를 키울 수만 있다면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가리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왜 가장 좋은 극상품 포도주를 놔두고, 시디신 포도주를 내오겠습니까?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을 놔두고 왜 사람들이 시시하게 생각하는 것들 밖에 줄 수 없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이미 교회와 목사들이 궁핍하고 가난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교회와 목사들이 먼저 예수에 대하여 가난하고 궁핍하고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에 대해서 말할 것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예수에 대해서 너무나 가난하기 때문에 예수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 아주 살짝만 말하고 그 다음에는 다른 것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주 적기 때문에 그 적은 그리스도를 희미하게 전해주기 위해 물질이 동원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풍성하게 소유하고 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물질적인 것들, 육적인 것들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 무엇과도 비교 할 수 없이 더 맛이 좋고, 뛰어나며, 능력 있고, 재미있고, 황홀하며, 아름답고, 귀하고, 탁월하고, 최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너무나 적게 가지고 있어서, 나가서 전도하라고 하면 예수에 대해서는 아주 적게만 말할 뿐입니다. 아주 잠깐 1분 정도나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물질로서는 매우 부유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아주 가난하고, 궁핍한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와 목사들과 성도들의 형편입니다.
이 원인은 목사들과 신학교에 있습니다.
목사들과 신학교 교수들은 이 땅에 있을 때 영광을 받고, 존경을 받은 그 대가를 치러야합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 앉아서 영광 받고, 존경 받고, 칭찬 받는 것을 즐기면서도
그 자리에 앉은 자들의 의무와 임무의 막중함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그 자리에 세우신 주 예수의 엄중한 명령을 무시하고 무관심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그 자리는 영광도 받고 칭찬도 받지만,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았을 때에는 큰 심판을 받는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신학교수들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리고 말씀에 대해서 아주 가난하고, 궁핍합니다.
처량하기 그지없고, 누추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아주 적게만 말하고,
가르칠 것이 그들 머릿속에는 많아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이나 예수를 중심으로 하여서 가르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설교나 강의를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온통 다른 이야기만 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고 훌륭하고 바른 목사님과 교수님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교인들을 데리고 야유회를 나갑니다.
윷놀이를 즐기고, 영화를 보러 갑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적게 가지고 있고, 적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안에 예수가 적기 때문에 예수를 적게밖에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한계인 것이고, 실제 모습인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를 주님이라 하고, 생명이라고 하고, 사랑한다 하고, 예수 중심을 외치지만,
실제로 그들은 예수를 사랑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고, 관심이 있지도 않으며, 간절히 붙들지도, 매달리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자신들의 진심을 말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들이 태평양처럼 넓은 그리스도, 하늘의 영광 보다 더 빛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많이 알고 있으면,
아니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 분이시라는 개념만 있더라도
다른 것들을 공급 해야 할 이유나 명분을 찾지 못하고 찾을 필요를 느끼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목사들이 예수를 별로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기 때문에 예수에 대해서 궁핍하고, 가난하고, 결핍이 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효과적으로 제시하고 가르치는 일에서 너무나 저조하고, 처량하고, 가련한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양들은 날이 갈수록 야위어 가고 있고,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예수를 공급하는 그 본업에 있어서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과 교회들과 장로들이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고 무식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교인들과 함께 야유회를 나가고, 윷놀이를 즐기고, 영화를 보는 것은 그 자체로는 나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교회가 할 일은 아니고, 목사가 할 일은 더더군다나 아닙니다.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환자를 데리고 영화를 보러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히 병을 고치러 왔는데 영화를 보여준다니 이 무슨 일입니까?
사람들이 병원에 오는 이유는 병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병원에 왔는데 영화를 보여주지 않아서 서운해 하고, 시험에 드는 환자는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왔는데 육적인 재미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고 불만족에 빠지는 참된 성도, 거듭난 성도는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오히려 참된 성도, 거듭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더 풍성하고, 직접적으로 제공되지 않는 것을 인하여 한숨짓고, 눈물지고,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여주고, 야유회 데려 가는 것이 어찌 나쁜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일들은 전혀 할 필요가 없는 일들입니다.
그런 일들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목사나 교회가 지탄을 받는 일은 결단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누가 책망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책망하시거나 징계하시는 일은 더더욱이 없습니다.
인간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 인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물들거나,
유행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불편하게 생각하거나, 미흡하게 여길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나 참된 성도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입니다.
체육실 없어도 됩니다. 야유회 없어도 됩니다. 수련회 없어도 됩니다. 윷놀이 없어도 됩니다.
점심식사 없어도 됩니다. 차량 운행 없어도 됩니다.
다만 한가지는 없으면, 절대로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풍성히 깊이 전하는 것은 없으면 절대로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날마다 더욱 풍성하고 깊게 전해지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 목사는 악한 목사요, 그 교회는 악한 교회입니다.
헌금 횡령하고, 교인 사기치고, 성추행하고, 청부 살인 저지르는 목사나 교회는 얼마나 악합니까?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공급하지 않는 교회와 목사는 그 보다 더 악한, 가장 악한 부류입니다.
에수께서는 그런 목사와 교회보다 더 악한 자들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이런 차원에서 볼 때에는, 윷놀이나 야유회가 악한 것도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의 자리를 빼앗는 것은 그 무엇이라고 할지라도 악한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고,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입니다.
예수는 그 자리와 그 시간을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양보하기를 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예수의 자리와 예수의 시간을 빼앗는 자는 누구든지 주님께 대하여 불손한 자이며, 무례한 자이며, 오만한 자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져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에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에 대한 경배와 찬양과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일에 모든 시간을 쏟아야 합니다.
예수와 상관 없는 것들이 교회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예수의 장소를 다른 것에 허락 없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담임 목사라고 할지라도 예수의 공간과 시간을 다른 것에 내어줄 권리는 없습니다.
강단은 오직 예수의 말씀만 선포되는 자리여야 합니다.
강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사람의 간증이나, 인간들의 지혜나 처세술이나 방법들이 가르쳐지고, 선포되어져야 할 자리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것, 예수님의 말씀만 전해져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예수님이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강단을 말씀 선포 외에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자 하는 목사와 교회는 그 교회의 주인, 그 공간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예배 시간을 예배하는 것과 말씀 듣는 것 외에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자 하는 목사와 교회는 그 시간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연코 다른 것들에게 그 자리와 시간을 내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직 찬송은 예수님의 것이고, 예수님의 집은 기도하는 곳이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 결 론
예수는 우리가 왜 성도들 야유회 데리고 다니지 않았느냐,
왜 간식 잘 주지 않았느냐,
왜 윷놀이, 체육대회 잘 섬겨주지 않았느냐,
왜 찬양경연대회 하지 않았느냐,
왜 성탄 전야제 하지 않았느냐 하는 등의 이유로 책망하거나 내치지 않으실 것입니다.
결단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에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하지 않았느냐,
왜 전심과 전력을 다하지 않았느냐,
왜 그들의 진짜 결핍과 필요를 외면하였느냐, 왜 무시하였느냐,
하는 책망은 반드시 하실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을 주려 해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그들 안에는 은이나 금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가 많다면, 그 좋은 예수를 제쳐 놓고 다른 것을 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일들을 터무니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정말로 그런 일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세상과 물질에 대해서는 가난했지만
예수에 대해서는 부요하였고,
세상과 물질에 대해서는 결핍되어 있었지만,
예수에 대해서는 충만하였고,
세상과 물질에 대해서는 궁핍했지만
예수에 대해서는 넘쳐났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는 베드로와 요한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입술로는 예수를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그 마음은 예수에게서 한참이나 멀리 있습니다.
만일 그 상태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주님께서 그들을 영원히 궁핍한 땅으로 던지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사도행전 3장 4,6절)
[출처] 예수 말고 다른 것을 공급하는 목사와 교회|작성자 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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