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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경건을 잃어버리는 이유

수호천사1 2018. 2. 23. 08:11
[ 박봉수 목사 설교 ] 경건을 잃어버리는 이유
2018년 02월 21일 (수) 10:54:04박봉수 목사 pspark@sdja.or.kr

박봉수 목사 / 상도중앙교회 담임

본문 / 디모데전서 6장 3-10절             

  
▲ 박봉수 목사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말세적 현상들이 가득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고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패륜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음란문화가 창궐하고 성범죄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동성애도 모자라 동성결혼까지 합법화하자는 흐름이 점차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물론 이런 말세적 현상을 심각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보다 더 심각하게 지적하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딤후 3: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말세적 현상이 일어날 때, 그리스도인들이 큰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2-5에 말세적 현상 19가지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맨 마지막에 가장 심각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경건한 사람들이 경건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세적 현상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경건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죄악이 넘쳐나서 말세적 현상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 물론 분노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두 번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경건의 문제입니다. 특히 경건한 사람들이 경건을 잃어버리는 것을 가장 심각한 문제로 여기고 계십니다.

이것은 창 18장의 소돔과 고모라 사건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말세적 현상이 가득해서 멸하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후에 태도를 바꾸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안에 의인이 남아있는지 여부를 확인하셨습니다. 의인이 10명이라도 남아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않으시려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보시는 말세적 현상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이 경건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으신 사람들이 죄짓고 말세적 현상을 보이는 것은 그러려니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이 경건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분노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경건을 잘 지켜내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사회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세적 현상이 점점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 더 심각한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을 잃어버리고 있는 점입니다.

  
▲ ⓒpixabay.com / fotshot / hands-459442_640

참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에서 떠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아졌습니다. 정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을 잃어버리고 있고,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경건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들과 교우들 그리고 지인들의 경건을 잘 보살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때문에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게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때문에 이 땅이 심판을 면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경건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경건이란 무엇일까요? 우선 말뜻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경건은 한자어 공경 ‘敬’과 공경 ‘虔’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경건이란 공경하고 또 공경하는 것 다시 말해서 극진히 공경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말 사전을 보면 경건을 이렇게 풀이해 놓고 있습니다. “공경하는 자세로 삼가고 조심함.”

이렇게 볼 때 우리말에서 경건의 핵심은 공경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공손히 받들어 모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경건이란 하나님을 공손히 받들어 모시는 것을 말합니다.

미국에서 목회하는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미국교회에 집회를 하러 방문했다고 합니다. 교회 가까운 곳에 호텔이 없어서 그 교회에서 마련한 한 교우의 가정에 머물게 됐답니다. 그 교회 목사님께서 그 가정을 참 경건한 가정이라고 소개를 하시더랍니다.

그 집에 가보니 거실 중앙에 “이 집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다.”라는 글이 붙어있더랍니다. 그리고 거실과 붙어있는 방에 “예수님의 방”이라고 적혀있더랍니다. 예수님의 방은 무슨 용도로 쓰느냐고 물었더니 가족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거나 기도하고, 혼자라도 성경을 잃거나 기도하는 용도로 쓴다는 것입니다. 식탁에 가보니 상석을 예수님의 자리로 비워두고, 늘 기도한 뒤 예수님께서 식탁에 함께 하심을 믿고 식사하더랍니다.

친구 목사님은 며칠간 이 집에서 머물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눈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경건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경건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공손히 받들어 모시는 것입니다. 예배 때만이 아니라, 가정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공손히 받들어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 장로교의 기초를 놓은 칼뱅은 경건의 신학자로 불립니다. 경건에 대해 가장 깊이 있는 가르침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분은 1538년 출판한 요리문답서에서 경건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진정한 경건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두려움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은 회피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이다. 참된 경건이란 오히려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며, 주로서 두려워하고 경외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의로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거역하는 것을 죽음보다도 더 무서워하는 신실한 감정이다.

이 말을 비롯한 칼뱅의 가르침 속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선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고 우리는 그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깨달음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두려움이 참된 경건의 기초라는 점입니다.

다음으로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분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이 참된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을 죽음보다 더 무섭게 생각하며 사는 것이 참된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칼뱅은 우리가 하나님을 공손히 받들어 모실 때 그 마음속에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 두 가지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신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경건을 잃어버리는 이유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왜 이렇게 중요한 경건을 잃어버리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 영적인 무지 때문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을 잃어버리는 우선적인 이유는 영적인 무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하룻강아지’라는 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이 말은 ‘하릅강아지’가 세월이 흘러 변형된 것입니다. ‘하릅’이라는 말은 옛 우리말에서 1년 된 짐승의 나이를 셀 때 쓰던 단위입니다. 그러니까 하룻강아지라는 말은 태어난 지 하루 밖에 안 된 강아지가 아니라, 태어난 지 한 해가 된 강아지를 말합니다.

태어난 지 한 해 밖에 안 된 강아지는 호랑이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래서 호랑이가 나타났을 때 무서워서 도망치지 않고 가까이 다가서서 까붑니다. 이런 뜻에서 이 속담은 “상대가 어떤지도 잘 모르고 철없이 함부로 덤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경건하지 못한 이유는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지 모르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두려운 분이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룻강아지처럼 하나님 앞에서 철없이 행동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함부로 덤빕니다.

사실 오늘 이 세상에는 하룻강아지 같은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철없이 행동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억지를 부리며 덤빕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한 마디로 저들이 다른 교훈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교훈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과 다른 교훈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세 가지 다른 교훈이 있어왔습니다.

하나는 무신론자들의 교훈입니다. 현대 무신론을 대표하는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을 실재하지 않는 유해한 망상(delusion)”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망상에 빠지면 미친 것이지만 집단적으로 망상에 빠지면 종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종교가 인간을 망치고 악을 저지른다고 주장합니다.

저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몰라서 저런 망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 이 세상에 선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체험을 모르기 때문에 저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둘은 이단들의 교훈입니다. 우리나라의 이단들의 공통적 특징이 하나있습니다. 바로 저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이단의 교주들 자신이 삼위일체의 반열에 올라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문선명은 예수님이 자기의 부하라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신천지의 이만희는 자기가 보혜사라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안상홍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렇듯이 이단들은 감히 교주 자신들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들의 어처구니없는 망발일 뿐입니다.

셋은 교회 안의 비판자들의 교훈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도 문제가 있고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점들을 비판하여 교회를 더욱 교회답게 세워가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교회 안에 정통교회가 오랜 세월 가르쳐온 바른 교훈에 대해 비판을 일삼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꼭 교회를 다녀야만 구원을 받는가?, 꼭 주일에 예배를 드려야만 하는가?, 십일조 헌금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는가? 등등 부정적인 시각으로 정통교회의 가르침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꾸 논쟁을 하려한다는 것입니다. 순종하고 헌신하려 하기 보다는 갈등을 조장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기보다는 덕을 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들에게서 참된 경건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경건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은 너무도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다른 교훈을 펼치기 때문에, 교회 내의 젊은 층과 지식층에게 중대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단들은 이미 200만 명이나 되는 그리스도인들을 포섭하여 넘어뜨렸습니다. 또한 교회 안의 비판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참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경건은 우리가 바른 교훈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에 대해 올바로 아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다른 교훈에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바른 교훈을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2. 영적인 간음 때문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을 잃어버리는 또 다른 이유는 영적인 간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간음을 철저히 배격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간음은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남편이 아내 아닌 여인을 이성으로 사랑하는 것, 아내가 남편 아닌 남자를 이성으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간음입니다.

성경은 영적인 간음은 더욱 철저히 배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적인 간음이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 아닌 우상을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 하나님 아닌 사람을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아닌 그 어떤 것을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6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한 마디로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경건에 큰 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각하게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중대한 영적 간음입니다. 한 남자가 아내 외에 다른 여인을 마음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자기 아내에 대한 사랑이 예전 같을 수 없습니다. 점점 아내에 대한 사랑이 식게 되고, 심해지면 아내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게 되고, 마지막에는 아내와 헤어질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돈을 사랑하게 되면 점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게 됩니다. 더 심해지면 돈 밖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게 됩니다. 그래서 경건에 심각한 위기가 찾아옵니다. 외도하는 남자가 아내 대하듯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형식만 남게 됩니다.

최근에 가상화폐 문제가 우리 사회에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가상화폐가 4차 산업혁명시대에 새로운 금융시스템으로 자리를 잡을 것이냐, 아니면 거대한 버블로 우리사회의 금융질서에 혼란을 일으키고 투기광풍으로 사회에 커다란 피해를 입일 것이냐 논쟁이 분분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가상화폐가 마약처럼 일부사람들을 황폐화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24시간 운영되기 때문에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해서 편안한 수면은 물론이고,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약처럼 중독성이 있어서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생활에 치명적으로 나뿐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을 묵상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빼앗아 갑니다. 늘 염려와 불안 속에 쫓기게 돼서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과 기쁨을 송두리째 빼앗기게 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가상화폐에 투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투기가 되지 않도록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자녀에게 온통 마음을 다 빼앗기고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지나치게 건강관리에 온통 마음을 다 빼앗기고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모두가 다 경건에 해가 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공손히 모시며 살아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두려움과 진실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모시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합니다. 이 경건을 무력화시키려는 악한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우리를 영적으로 무지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약화시킵니다. 우리에게 영적으로 간음을 저지르게 만들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약화시킵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경계하며 우리의 경건을 잘 지켜가야 하겠습니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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