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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명의 추억

수호천사1 2018. 2. 6. 11:02

제명의 추억

    

I

이글은 최근 대구지역에서 연속적으로 행해진 일부 보수교단의 소장파 목사들의 제명사태에 관한 보고서다. 비록 최근에 일부 목회자들의 입에서 안식일, 십일조(헌금), 그리고 주초의 문제가 거론되었을 뿐이지, 사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복장, 화장, , 영화관람, 음악과 악기의 사용과 목사의 권위, 설교, 인사, 행정, 재정에서의 목사의 무소불이의 권한을 포함하여 그러한 주제들은 교회 내에서 차마 입에조차 거론하기 힘든 금기(taboo)로 여겨져 왔다. 이러한 강력한 타부는 노회와 총회의 결정과 권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이렇게만 본다면, 한국기독교는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금지와 억압의 종교로 여겨질만 하다. 사실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 때문에 수많은 핍박과 어두움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가?


최근 한국 보수 장로교회의 모태(母胎)라고 불릴만한 대구지역에서 합동측과 고신측 목사들이 잇달아 제명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2002년 예장고신 동대구노회에서 제명된 박상현 목사를 필두로, 2003년에는 박길현 목사(예장고신), 이근호 목사(예장합동), 이광호 목사(예장고신)가 노회의 교적에서 삭제되는 불명예를 얻게 되었고 예장고신의 동대구노회는 2년 사이에 3명의 목사들을 제명시키는 기염(氣焰)을 토했다.

이들의 제명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주제들(안식일, 십일조, 주초, 불신자와의 결혼, 교단헌법의 문제점의 제기)에 대한 성경적이고 교단헌법적이고 목회자적인 언행과 반성 없는 태도들 때문이라고 발표되었다.


이러한 제명에 대한 일부 성경상의 관행적 해석들이 그에 대한 근거들로 제시되긴 했지만, 이들이 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은 고신교단에서 발행한 예배지침서(“주일성수는 인류의 당연한 의무[23]; “십일조는 입교인의 의무로 소속교회에 드려야 한다”[315])와 목사고시에서 행한 임직서약의 위반이다.

사실 다시 문제가 된 주제들은 한국교회에서 한동안 관행적으로 복음의 핵심요소로 이해되었고 공공연히 규칙으로 교리로 승격되는 절차를 이미 겪었다. 사실 비성경적이고 비신학적이기 때문에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내용과 구조와 신학들이 그 얼마나 많이 있던가!

 

II

이광호 목사의 경우에는 그가 신문과 책자에서 다루었던 음주문제, 주일성수문제, 십일조문제, 혼인문제에 관하여 신앙상담한 내용들을 문제로 삼았다. 문제가 되었던 이광호 목사의 글들을 간단히 살펴보자.


우선 이광호 목사의 십일조관이다. 특히 그의 글들에서 이광호 목사는 십일조가 율법주의의 측면에서 행해질 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교인은 십일조가 형식주의가 될 수 있고 기독교인의 재정사용에 대한 적절한 교훈이 될 수 없음도 언급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교회가 율법주의적으로 헌금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도 제기한다 

우리시대의 십일조는 율법에 따른 의무조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하는 것이 의무완성이 될 수 없으며 그것을 자랑삼을 일도 아닙니다.... 지금껏 처럼 앞으로도 십일조 생활에 충실하기를 바랍니다(얼큰이 선생의 질문에 대한 답변 중에서).


현재의 십일조 제도는 한국교회의 특징입니다. 달리 말하면 세계에 흩어져 있는 건전한 교회들 가운데 십일조 연보를 제도로 정해두고 있는 교회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화란이나 호주, 미국, 영국 등 서구에 있는 개혁교회들에서는 십일조 제도가 없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 성실한 성도들은 십일조 연보를 열심히 하고 있는 우리 보다 훨씬 요긴하게 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적, 혹은 의무적이 아니어도 이웃을 위해서, 그리고 선교사들을 위해서 연보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위한 연보에 힘을 쓰되 교회가 성도들로부터 모아진 돈을 잘못 사용하거든 교회에 십일조를 하지 말도록 당부합니다. 온 교인들이 십일조를 열심히 하기 때문에 교회가 부자의 모습을 띠게 되면 달리 연보가 필요한 곳을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개인이나 교회가 돈이 필요 이상으로 많아지면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돈의 능력을 경험하기 시작하여 성경이 경고 하는 바 돈을 따를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물질주의화 된 것은 결국 돈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부터 였습니다...십일조 연보를 할 때 의무적으로 하지말기를 바랍니다....연보를 하는 의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게 잘 사용하느냐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한번 돈 내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성도들의 연보가 어떻게 쓰이는가에 대한 선한 살핌은 훨씬 어렵습니다. 그러니 어린 교인들은 돈만 내고 마는 쉬운 길을 택하려 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출석하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렵고 정 성도님의 힘이 필요하다면 그곳으로 보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가는 교회의 재정이 어렵다면 그 교회에 연보를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양쪽 모두 어렵다면 적절히 갈라서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쪽 다 부자처럼 되어 있다면 십일조를 양쪽 교회에 내지 말고 재정적으로 정말 어려운 참된 교회를 찾아서 내어도 될 것입니다(** 성도의 질문에 대한 답변 중에서).

 

음주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성경을 통해 우리가 전반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술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는 집사님에게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한국교회에는 술 문제 때문에 신앙의 근본적인 것을 잘못되게 오해하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술을 마시고 마시지 않고 하는 것이 마치 경건의 기준이라도 되는 듯이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경건의 직접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성도라 하면서 술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올바른 신앙인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 술을 입에 대지 않지만 부정직한 행동을 하거나 남을 멸시하여 교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올바른 신앙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후자가 훨씬 무서운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김 집사의 질의에 대한 답변 중에서).

 

주일성수에 대한 그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일요일을 주일로 지켜야 함을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요일(Sunday)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법적인 규정 때문이라기 보다는 성경이 보여주는 직접적인 전통과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대한 이해 때문입니다(** 학생에 대한 답변 중에서)


...오늘날 주일성수를 하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원하심' 보다는 자기 생각'이 기준이 되어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들은 주일날 하루 종일 교회당에 가서 시간을 보내면 그것이 곧 주일 성수라 오해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넥타이를 맨 정장을 하고 교회의 각종 부서에서 어느 정도 책임을 가지고 분주하게 교회당에서 시간을 보냈으면 그것을 주일성수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위 주의 일에 충성을 다했다는 자기인식 때문이겠지요...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는 특히 목사나 장로 등 교회의 지도자들이 더욱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밖에서 돈을 쓰지 않고 오락을 즐기지 않고 주일 하루 종일 교회당에서 시간을 보내는 목사나 장로도 주일 성수를 제대로 하지 않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주일 오후에 공부를 하는 것과 운동을 하는 일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얼마나 올바르고 분명한 신앙인들이냐 하는 점입니다...주일성수의 외형적 법칙을 규정하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차적인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교회가 해야 할 우선적인 일은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함으로써 말씀에 참여하는 삶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각 성도들의 삶의 방편들이 모두 다른데 그런 것을 형식적으로만 획일적 법제화하여 요구한다면 그것 자체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까요?(** 학생의 질문에 대하여)

 

불신자와의 결혼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불신 결혼 자체가 권장할만 한 일이 아니며 그것을 자기합리화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그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만일 자제분이 그 처녀와 결혼을 하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부 드리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무조건 반대하시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무조건 반대하게 되면 자제분은 물론 상대 처녀도 마음에 심한 상처를 입게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혼인을 하게 되면 한 평생 마음에 서운함을 간직하며 살아야할 부담을 가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자제분이 악의나 나쁜 동기를 가지고 결혼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인격을 존중하는 가운데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그 처녀를 구원의 반열에 세워두고 있을지 혹은 그녀를 통해 성도님의 가정에 대한 특별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나그네님의 질문에 대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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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전에 제명된 목사들의 주장과 비교해 볼 때, 이광호 목사가 이전에 제명된 목사들보다 더 과격한 이론을 제시했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그동안에 그러한 주제들에 대해서 여러 곳에서 발표된 이광호 목사의 견해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며 성경적이고 목회적 상황 속에서 이해될만한 것들이었다.

게다가 박길현 목사가 증언하듯이, 이광호 목사가 소위 주일성수잘하고 십일조잘 내는 목사이며 그러한 교회의 담임목사라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당사자(이광호 목사, “교단 내에서 좀 더 자유로운 본질적인 신앙을 회복하자는 의미를 교단 어른들이 못마땅해 하는 것 같다. 순수하게 신학적인 문제보다는 정치적인 성격이 강한 것 같다”)나 주위의 사람들의 직접적인 평가(최재호 기자, “몇몇 정치목사가 그들의 눈 밖에 나서 사사건건 원리적인 적용을 주장하는 이 목사를 제거해 내려는 의도로 저지른 교권의 횡포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나 노회의 결정과 해석에 대한 부당성을 지속적으로 지적하는 일부 고신교단 목사들(이세령, 성희찬, 황대우 등)의 논조도 이러한 일련의 노회의 결정들이 신학적으로 별 문제가 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꼬투리를 삼고 정치쟁점화하여 그를 괴씸죄로 제명하고 있다고 질타(叱咤)한다.

심지어는 이광호 목사의 제명에 대한 박길현 목사의 글에서 언급되었듯이, 이러한 일련의 제명사태의 배후에는 “(이광호 목사의 견해처럼) ‘율법이 아니라 은혜대로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내라고 한다면 누가 지금처럼 꼬박꼬박 많이 내겠는가?”라는 일부 정치권 목사들의 숨은 의도에 대한 의구심조차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이광호 목사의 제명과 관련되어 절차상의 하자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서, 성희찬 목사는 한 인터넷 게시판에서 동대구노회가 내린 이번 결정이 그리스도의 치리를 대신한 교회 회의로서 그 권세를 바르게 사용하였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제명 결정의 최종 근거로서 제시된 것은 헌법(교리표준이 아닌, 관리표준에 속한 예배지침), 지난 총회 결정(52/53) 이었지, 성경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 역사에서 흔히 나타났던 신앙고백주의 혹은 헌법지상주의의 한 모습으로서 심히 우려되는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그는 교회회의의 결정이 성경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 결정은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인의 신앙과 생활의 법칙을 실천하는데 도움을 주는 정도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성 목사는 치리회의 결정은 규칙조항이나 신앙고백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근거가 제시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예배지침에 의존한 노회의 결정은 헌법지상주의 혹은 신앙고백주의의 전형이라고 규정한다. 성 목사는 결론적으로 그러한 논리에서 보면 올바른 권징의 사용보다는 남용이라고 말한다.


박길현 목사이 목사를 제명한 것은 분명한 헌법위반이다. 양심을 따라서 복음 정신을 가지고 가르친 것을 규례를 들어서 억압하고 그를 추방한 것은 헌법정신 위반이다. 그리고 모든 규례들은 이 모법의 정신에 준해서 시행되어야 하며, 이 모법정신과 배치되는 규례가 있다면 그것은 위헌이요, 이것과 배치되게 강요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헌법위반자다라고 주장하면서 일방적이고 경직된 성경이해를 규칙에 첨가하고 그 첨가된 규칙에 따라 신앙적 양심을 규제하고 판단하는 것을 교조주의라고 규정한다. 또한 목사가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제명을 당하게 되는 것이 과연 행정건인가? 이것은 일종의 추방이다라고 말한다. 이점에 대해서 이세령 목사도 유사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가 보기에 이광호 목사가 기존에 제기했던 이해들이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그가 오랫동안 교단내외의 아픈 곳을 지적하고 교단개혁을 위하여 바른, 쓴 소리를 많이 했기 때문에 이번에 이광호 목사의 발언을 문제삼아 신학적으로도 문제될 것이 없고 교단정치의 측면에서도 무리가 많은 채로 그를 정치적으로 제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의혹과 반박과 문제제기, 심지어는 공개질의에도 불구하고 이광호 목사의 제명결정 이후로 그가 속했던 동대구노회나 고신교단내에 별다른 변화의 조짐은 찾아보기 어렵다. 단지 뉴스앤조이의 최재호 기자의 지속적인 취재와 실로암교회(www.siloam-church.org)와 기독교보(www.kidokkyobo.com)와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www.kts.ac.kr) 게시판에서 지속적인 공방이 지속되고 있을 뿐이다.

지금도 그가 담임목사로 봉사하고 있는 실로암 교회측이 노회에 이광호 목사 제명 결정에 관한 노회 회의록 사본과 전권 위원회 노회 보고 내용 사본을 요청하고 이광호 목사의 신학사상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신학교수회의 공식의견을 요청한 상태다. 이광호 목사의 견해와 고신신학의 핵심인 고려신학대학원 교수들이 그들의 십일조, 주일관을 밝힌 것과 별 차이가 없음이 밝혀진 이후에도 이광호 목사의 제명사태이후 그 누구도 공식적인 의견이나 행동을 취하고 있지 않는 것은 과거의 사건들을 통해서 볼 때 오히려 정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제 이 사건은 이전의 일련의 (이광호 목사 자신도 우려하듯이)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의 관심과 논란의 수면에서 가라앉을 전망이다.

 

III

절차상의 문제도 문제려니와 이 모든 문제는 정치적 차원에서 해결되는 것보다는 본질적인 문제에 우선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이러한 연구가 일련의 제명 사건의 쓴 뿌리를 제거할 수 있는 길이다. 우리 앞에 신학적으로 교회사적으로 논의하고 토론해 보아야 할 문제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한국교회의 전통이나 다수결 혹은 힘있는 자의 우격다짐으로 결정될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는 또한 대화와 타협의 정신으로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로 서로를 인정하고 용납해주는 일이 필요하다. 사실 비기독교권에 똘레랑스(tolerance)라는 좋은 전통이 있다면, 기독교의 전통에서는 아디아포라(adiaphora)가 있다.

똘레랑스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뜻한다. 즉 이것은 강요나 강제 대신 토론하고 상대를 설득시키려고 노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가능한 가치관이다. 또한 똘레랑스란 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된 자유를 의미한다. 약자에 대해 똘레랑스를 요구함으로써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힘의 논리나 대다수의 논리가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도 존중받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아디아포라(adiaphora)라는 용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란 의미를 갖고 있으며,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동역자였던 필립 멜랑흐톤(Melanchton)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화해를 위하여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것(이신칭의, 성직자의 결혼, 미사를 더 이상 공로적인 희생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과 타협이 가능한 것 사이의 구분을 규정하였다. 멜랑흐톤에 따르면, 후자는 복음에 있어서 비본질적인 것, 그리스도인의 자유로 타협이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자유와 관용의 정신은 토마스 스타키(Thomas Starkey)에 의해서 영국으로 도입되어, 성경이 구체적으로 강제하거나 규정하지 않는 부분들은 구원과 관련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인의 양심을 속박하거나 기독교 신앙의 정통성의 잣대로 판단될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되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방임을 조장하거나 복음의 본질 자체를 훼손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그 어느 곳에 도사리고 있겠지만, 일종의 가이드라인으로서 그 한계를 규정지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신앙과 양심의 속박 받지 않을 자유의 정신은 장로교교단헌법에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물론 현재 문제가 된 주제들이 아디아포라적인 요소들이라는 것은 교회사가 증명하는 바이며 특히 주일성수나 십일조의 경우에는 한국적인 정황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진리는 독선과 권위주의와 혼돈되기 싶지만 그것은 진리로 오해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에 진리에 대한 타협 없는 추구와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관용과 존중, 그리고 토론의 문화가 아쉽다.

 

IV

필자가 최근에 대구지역에서 발생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이러한 일련의 목사제명사건들을 다시금 언급하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결책을 찾아보려 했던 의도는 단 한가지다. 화성지역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에서 서태윤 형사역을 맡았던 김상경 씨가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에 동감하기 때문이다.

목사들의 제명사건들에 대한 지속적인 언급은 피해자들과 관련자들에게 해결책도 없이아픔과 좌절의 기억만을 떠올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겠지만, “기억 자체가 응징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과거사에 대한 반복이 아닌, 문제해결을 위한 최소한의 끊임없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성기문 교수/복음과 상황, 20041월호]

http://biblefactory.tistory.com/248?category=375362



              이광호 목사의 제명 사건을 대하면서

 

나는 먼저 이 목사와 비슷한 문제로 똑 같은 제명을 당했던 자다. 그런데 똑 같은 사건을 이광호 목사가 당한 것을 보면서 착찹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설마 했는데, 신문에서 이목사의 사건을 읽고나니  분통과 아울러 말씀의 원리대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분통은 고신이라는 현실은 여전히 인본주의적인 정치적 사고방식이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요, 말씀의 원리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의를 따르려는 자는 핍박을 당한다는 원리가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혹 있을지 모르겠다. 나의 경우에도 정치적으로 해석하여서 내가 너무나 융통성 없이 정치적인 적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목사의 제명은 이런 해석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건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목사는 나에 비하면 부딪혀서 싸우거나 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깨달은 바를 성실하게 가르치고 전하려고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구 경북신학교에서도 오랫동안 함께 교수를 했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또 제명을 당했으니 내 속에서 끓어오르는 말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이 말은 삼자들이 볼 때는 참으로 주관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경북노회와 동대구 노회에서 그래도 십수 년을 함께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간의 상황을 알고 생리를 아는 사람으로 이런 말을 하려고 한다는 것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말씀을 듣지 않는 교직자들

선지자들의 글을 읽다가 보면 옛날 사람들이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고 항거하고 핍박하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선지자 예레미야 때도 마찬가지였다.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가 망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선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다. '이제라도 회개하고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면 재앙을 내리겠다고 한 뜻을 돌이키겠다' 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하나님은 이미 성전을 황폐하게 하고 예루살렘 성을 온 세상의 저주거리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성전과 성의 멸망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망하지 않도록 기회를 주시겠다는 말씀이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이 말 듣기를 거부하였다. 오히려 이런 말을 전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이려 했고, 또 같은 말씀으로 예언했던 선지자 우리야를 애굽에서 끌고 오기까지 하여서 죽였다. 당시에 왕이였던 여호야김이 직접 그를 칼로 쳐 죽였다. 얼마나 죽이려고 한에 맺혔으면 애굽에 도망 간 사람을 사람들을 보내어서 잡아오게 하여서 왕이 칼로 죽였을까!(렘26장)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너무나 완고하게 거절하고 하나님께 대항하였다.

이런 식의 하나님에 대한 대항은 선지자 시대뿐만이 아니다. 이것은 성경 역사의 한 주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의인 아벨이 불신앙의 형 가인에게 맞아 죽었다. 형 가인은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자가 아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들었었고, 그런 중에 아벨을 죽였다. 하나님의 경고에 의도적으로 도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저주의 말씀이 임하여 왔을 때 자기의 죄에 대한 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다고 항변하였다. 끝까지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의 완악한 세계를 구축하여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에녹성을 짓고 타락한 세계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홍수 시대의 패역한 세상을 가져왔고, 마침내 심판을 받았으나 그 정신은 함과 그의 아들 가나안에게서 두더러지게 나타났다. 죄악은 인간의 마음에 뿌리를 박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이 있는 한 또 꽃을 피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도래된 세상이 바벨탑을 지은 세대였다. 그리고 이 세대의 정신은 모든 인간들의 정신이었다. 이런 가운데서 이끌림을 받아서 나온 아브라함과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런 정신 속에 빠져서 살았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등장하는 하는 것이 가나안 땅에 거하던 족속들이었다. 이들은 후에 하나님의 군대로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멸을 당하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어서 심판을 받았던 것이다. 하나님을 대항한 인간은 진멸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 사건은 보여준다.
이런 시기에 하나님의 군대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중요한 교훈을 빠뜨릴 수 없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런 사람들을 진멸하고 몰아내지 않으면 이스라엘도 이들의 길을 밟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들에게 진노하시던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내릴 것이라는 경고였다. 이스라엘도 이들과 동화되고 타락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의 말씀이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타락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들을 경고하고 일깨우기 위해서 무수한 선지자들을 보내었다. 하지만 그들은 선지자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그 따위 말을 하지 말아라. 왜 우리를 헐뜯고 저주하는 듣기 싫은 말을 하느냐'고 하면서 선지자들을 잡아서 때리고, 옥에 가두고, 죽였다. 이런 일을 이스라엘이 망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대에도 여전히 계속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마23:35)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자기 시대에도 이런 배도의 사건이 계속될 것을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의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마23:34)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역사에서도 반복되었다. 스데반의 죽음이 이런 죽음이고, 바울이 고난 받은 이유가 주로 유대교도내지 유대교적인 기독교도들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종들이 핍박을 당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핍박을 가한 자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우맹이요 소경들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대개가 교직자들이었다. 백성들을 동원하여 이용하려는 정치적인 종교꾼들이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말씀이고, 자기들이 만든 인간의 규례만 절대적인 것으로 살아 있었다. 적어도 이광호 목사의 제명도 이런 맥락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 것 같다.

교리와 교조주의자들의 구별

교리란 성경을 근거로 해서 만든 것이다. 신앙의 뼈대를 제시하여 믿는 바가 무엇인지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교리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을 어떻게 믿는 것인지를 믿는 자로 하여금 인식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리는 성도로 하여금 그것에 비추어서 바른 믿음에서  빗나가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잘 못 된 가르침을 구별하며 대항하게 한다. 그래서 성도는 이단과 거짓 종교의 가르침에서 바른 믿음을 지키게 된다. 교리가 이런 역할을 하기 때문에 교리는 중요하다.
그러나 교리가 성경의 원리를 가능한 바르게 제시하여 따르게 하기 위여 정리한 것이라면, 교리는 성경을 해석하고 정리한 것이지 성경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교리는 성경을 해석해 놓은 인간의 작업의 산물이요, 이와 달리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절대적인 것이요, 교리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리는 항상 성경 말씀에 준해서 만들어지고, 성경 말씀에 따라서 가르쳐야 하며, 성경 말씀에 복종해야 할 위치에 있다. 이론상 이것을 부정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신 교단 내에서만 하더라도 실제적으로는 지도자들이 두 부류로 나누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즉 표면적으로는 교리를 성경처럼 절대시하는 한 부류가 있다. 이런 부류를 교조주의자라고 해도 잘 못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 부류는 교리가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왜냐하면 현재 고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교리의 더러는 아직도 논의하고 해석해 보아야 할 부분이 상당히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부적인 해석과 가르침에서는 목사 개인의 양식과 해석에 맡겨 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특히 핵심적인 교리 외에 예배 모범과 같은 것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핵심적인 교리야 그래도 수천 년 동안 토론되고 정리되어 온 것이지만 예배 모범 같은 것은 그렇지 않은 성격의 것이 많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런 부분들에 관하여서는 성경적인 원리를 연구하고 논의해야 될만한 부분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의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면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다. 하지만 교조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용납하지 않는다. 만들어져 있는 교리와 각종 조례들이 성경인 양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교리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과 교조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것과 분명한 구별을 할 필요가 있다.

갈등의 발생 원인

고신 동대구 노회에서는 벌써 나름대로 성경적인 목회에 관심을 가진 3명의 목사가 차례로 제명을 당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교조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획일적인 강포를 일삼기 때문이다. 해석하여 만들어 놓은 규범을 성경 말씀인 양 주장하면서 그것을 율법적으로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없는 이단처럼 취급하면서  강포를 일삼기 때문이다.
과연 제명이 된 목사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사람들인가?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을 부정하는 사람들인가? 개혁주의라는 용어가 워낙 넓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개혁주의에 대한 통일된 정의도 되어 있지 않는 상태에서 이들이 개혁주의를 부정한다고 할 수 있는가?  물론 제명된 목사들도 다 똑 같은 신학을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름대로 개혁주의 정신을 가지고 목회를 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이번에 제명된 이광호 목사로 말하면 적어도 주일을 안식일로 지킨다거나 십일조를 한다거나 하는 데는 다른 어떤 교회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그것을 실행하는 정신이 율법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율법인 성령 안에 있기 때문에 은혜와 감사로 한다는 해석이 부가될 정도이다. 같은 헌금을 하고 날을 지키지만 어떤 정신으로 하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초점의 차이가 있다.
이런 데도 그를 문제 있다고 우기면서 제명으로 처리하였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은 처음에 문제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 문제로 삼은 것은 어떤 성도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이 성도가 질문한 것은 술 문제였다. 이것을 그는 성도에게 교리적인 강요로 받아들이라고 하기보다는 현실적으로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였고, 그리고 그것을 멀리하는 것이 신자로서 당연한 것이라는 취지로 설명을 하였다. 본인도 이것을 읽었다. 그 글 속에는 신자가 술을 먹어도 좋다고 하지 않았다. 거룩한 사람이기 때문에 먹지 않는 것이 신자의 삶을 위하여 너무나 좋은 것이라는 취지로 글을 쓴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것을 문제로 삼아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어서 몇 차례 심문을 했고, 이 번에는 십일조와 주일 문제까지 덮어씌워서 제명으로 처리했다. 현재의 헌법에 규정해 놓은 대로 앵무새처럼 따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제명처리의 이유였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 교조주의자들의 전횡적인 폭력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들의 경직성 속에 이미 배태되어 있는 결과이지만 이것은 그들의 전횡적인 폭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믿음보다는 정치적인 사고방식

여기에는 정치적인 사고방식이 배경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후배는 선배보다 똑똑해서는 안되며, 선배가 해 놓은 것을 무조건 순종하고 따라야지 다른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전제군주적인 의식이 깔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후배들이 노회에서 말을 하지 못하고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은 전통이 되다시피 한 압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 번 찍히면 평탄하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니 선배가 후배에게 배워야 하겠다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신학적으로 또는 성경 지식적으로라도 후배를 언제나 지배해야 하겠다는 전제군주적인 생각이 깔려 있다. 때문에 후배가 좀 다른 시각을 가지고 말을 한다면 그 의견을 제안하도록 하고, 다른 사람들이 함께 연구해서 토론을 하도록 하고, 나아가서는 신학교 교수들의 견해를 경청하면서 더 낳은 이해를 위해서 노력하도록 하는 겸손한 자세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로 노회가 모여서 연구발표하고 논의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노회는 그저 행정적인 문제와 씨름하면서 회의 순서와 행정을 따지는모임이다. 어쩌다가 질문되는 성경적인 문제는 항상 개 교회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식이다. 그러면서 선배라고 후배를 자기들의 이해와 지식으로 통제하려고 하고 있다.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시야가 개혁주의 내에서도 얼마나 발전하고 있는 지에 대하여서 관심을 가지고 배우려고 하지 않고, 옛 것을 가지고 통제하려고만 하고 있다. 이것은 엄청난 지적 오만이며, 무지한 행동이며, 교만한 독선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이지만 그 해석은 계속해서 열리고 발견되고 발전된다는 사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믿는 것이란 결국 성경의 동일한 말씀이라도 해석해서 따르는 것이란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해석의 시각은 어느 정도 새로워지는 것이 정상이다. 어느 정도라 함은 그래도 한계성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나은 시각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인식이 없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은퇴한 교수들이 후배나 제자가 강의하는 강의를 들으면서 질문도 하고, 조언도 하면서 서로 배우면서 이해를 공유한다는 말을 듣고 있다. 여기에는 자기와 다른 해석을 할지라도 다 같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종이면, 서로가 은사 받은 대로 깨닫는 것이 다르지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모든 것을 유익하게 사용하리라는 믿음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좀 다르더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결국은 주님이 이런 차이를 통하여 영광 받으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겸손하게 논의하고 배워가는 것이다.
주님을 믿는다면 주님을 믿는 사람 특히 같은 개혁주의 신학을 가진 사람도 믿어야 옳다. 이런 사람들의 다양한 은사에 대하여 일일이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성령을 전제적으로 통제하려는 것이다. 은사는 이런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배우려는 데서 교류가 이루어지고 이해가 커진다. 이렇게 하여서 얼마든지 공동적인 이해나 건설적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되는 것이다. 이런 자세로 문제를 다룬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목사들도 교인들을 이해시키면서 기다리면서 자기의 견해를 유보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밟으려고 하지 않고 통제만 하려는 것은 믿는 자 안에 일하시는 성령을 믿기보다는 인간의 교만한 마음의 폭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정치적인 사고방식이다. 모든 일을 진리보다는 정치적으로 파악하고 덕과 실을 따져서 해결하려고 하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항상 이런 인본주의적인 폭력 속에서 자유롭게 일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폭력을 연단의 용광로로 삼아서 세워져 가기 때문이다.

교회에 왜 이런 정신적 지적 교만이 전제군주적인 폭력을 일삼게 되었을까? 이 근본은 복음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라고 필자는 진단한다. 예수와 함께 죽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란 태어난 이후부터 살아오는 중에 이런 저런 열등 의식이 쌓이게 되어 있다. 여기서 계급의식과 지배의식이 생겨나고 또한 소유의식이 형성된다. 이런 의식을 갖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런데 이런 의식은 한 마디로 죄인인 옛 사람의 속성이다.
따라서 복음을 알고 나면 이런 것도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 모두가 육에 속한 것이요, 이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온통 죄악덩어리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 복음이다.  따라서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이러한 인간성 자체도 죽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복음은 이런 인간성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으로 인식하게 하고 그래서 쓰레기처럼, 똥처럼 버리게 하고, 추구를 포기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한 가운데 교직자가 되었으니 이전 세상에서 가졌던 갖은 욕망을 교회 안에서 이루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헛된 것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헛된 추구는 복음과 배치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복음을 바르게 전하려는 사람은 자기들과 다른 사람 또는 위험한 사람으로 여기게 되고 따라서 폭력의 대상으로 삼게 된다. 정신적 지적 전제군주주의는 이런 현상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근본 문제는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죽은 자존심과 열등의식과 거기서 발로되는 계급의식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옛 사람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진리보다는 체제보호주의

이목사를 제명하면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목사는 신학자의 학자적 양심에서 그런 주장들을 펴온 것으로 이해한다. 수 차례 그에게 말한 것처럼 독립교회를 하라고 권하고 싶다. 스스로 교단을 탈퇴하고 소신껏 복음을 전하고 자신의 신학을 펼쳐가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말 속에는 모순이 들어 있어 보인다. 적어도 이목사가 반복음적인 사람이거나 또한 같은 주님의 지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적어도 개혁주의 신학을 가지고 신실하게 목회와 가르침을 실행해 온 양식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한다면, 왜 교단 안에서 같은 주님의 지체인 교회로서 인정할 수 없느냐는 것이다. 만약 이목사가 반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진리를 가감하거나 하여서 진리 자체를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사람이라면, 아예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면직을 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학자적인 양심을 가지고 소신껏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라고 인정한다면 교단을 탈퇴시켜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목사가 고신의 뿌리 신학과 거리가 멀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정통 고신의 사람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에도 고신의 개혁주의적인 신학 전통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바로 이해하려고 애쓴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목사를 제명시키려고 한 사람들이 오히려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신학적으로도 잡종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째서 이런 사람들이 고신의 뿌리 신학을 추구하려는 사람을 제거하려고 하는가? 내가 알고 추론하는 한 그것은 소위 이목사 신학이 반복음은 아니지만 자기들이 추구하는 이상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목사는 십일조를 잘 하는 사람이며 그 교회 성도들도 십일조를 잘 하고 있다. 그런데 이목사 식으로 율법으로가 아니라 은혜로 하는 십일조라고 가르친다면, 누가 십일조 하겠느냐를 우려를 하고 있으며, 은혜와 감사하는 가운데서 주일을 지킨다면 누가 주일에 교회에 오겠느냐를 우려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의 목소리가 필자의 귀에까지 들린다.
이것은 성도에게 주어진 믿음을 참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발상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하니 헌금 작게 나오는 것이 염려되고, 출석률이 염려되며, 따라서 소위 목회 계획이 차질을 빚을 것이라는 염려를 하게 되는 것이다.  진리보다는 체제 보장이 급선무라는 말이다.
왜 자기의 체제와 이상을 진리 앞에서 내려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가? 체제와 제도와 이상은 진리를 섬기며 진리를 향하여 있는 것들이지, 이런 것들이 진리를 지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사람 앞에서 성공보다는, 사람 앞에서는 실패할지라도 주님 앞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하는가?
물론 사람 앞에서도 성공해야 주님 앞에서도 성공이라는 도식을 가지고 있으니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구약부터 성경의 구속 역사를 따라 가 보라. 사람 앞에서 성공의 가능성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부름 받은 이스라엘의 타락과 남은 자를 생각해 보고,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를 맞았던 자들이 어떤 자들이며. 그를 죽였던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오순절 이후 신약 교회가 어떻게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며,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 교회가 얼마나 영적으로 쇠퇴하였으며, 많은 형식적인 개종자들 때문에 기독교가 얼마나 이교화되었던 것을 생각해 보고, 그 이후에 당연히 따라오는 중세의 타락상을 생각해 보라. 중세의 타락상 때문에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죄악이 성경 말씀을 막았던 가를 생각해 보라. 이런 죄악이 다 기독교 세계 내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리하면 사악한 인간의 죄성 앞에서 성공을 말할 수 없는 것이 십자가를 따르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만큼 인간이란 죄악스럽고 사악한 것이란 사실을 성경의 역사를 통하여 깨닫는 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인간의 자아 성취욕이요, 이것을 지지해 주는 것이 실증주의 철학이라는 것을 알만 한 사람이면 다 알고 있는 바가 아닌가?
이러한 사고방식은 고신 총회에도 지배적이다. 시끄럽게 할 만한 것은, 물밑에서 공작을 하여서 수면으로 떠오르지 못하도록 해버린다. 고신을 흠집내고, 분렬시킨다 싶고 교회 운영에 문제를 일으킨다 싶은 문제는 아예 논의 자체를 막아버리는 풍조가 지배적이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는 총회 차원의 문제가 아예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고신은 은혜롭게 순교자의 후손인 양  자부한다. 이런 속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자, 복음에 순수하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적인 힘을 가진 자에게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자가 희생된다. 전체를 위한 소수의 희생양을 묵인하는 셈이다. 지극히 정치적인 사고라고 어찌 말할 수 없겠는가? 하지만 순교자는 적어도 진리 문제에 예민했던 사람들이었다고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진리보다는 정치적인 안정과 체제 보신에 예민하여 있다.

선지자들의 예민성이란?

선지자들은 보통 사람이 보기에 별 것 아닌 것을 문제로 삼아서 그 시대를 시비했다. 과부의 억울한 문제, 가난한 사람들이 일하고 삯을 받지 못하는 것, 나그네가 억울한 일을 당하여 고통스러워하는 일들과 같은 것들을 가지고 그 시대를 시비했다. 돈 많은 자들이 사치하며, 각종 화려한 장식을 하고, 연락을 즐기며, 한들한들 거리를 거니는 모양을 보고 자기의 시대를 시비했다. 내 것 가지고 내 쓰는 데, 내 성공해서 내 교회가 쓰는 데 무슨 상관이냐는 사고방식을 시비했다. 이런 사람들이 예배한다고 하는 것을 가증스럽게 여기면서 차라리 집 기둥이 무너져서 다 깔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분노의 표현이었다.
선지자들이 이렇게 분노한 것은 요즈음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만한 것들이다. 요즈음 시각으로 보면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고 많은 사람들이 생존경쟁을 하면서 살고 있는데, 작은 교회 하나가 있다가 없어지고, 몇 사람이 쫓겨나는 것쯤이야 무엇이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는 것이다. 교회라도 적자 생존의 세상이 아니냐는 생각이다. 아마도 이목사가 목회하는 교회가 300명만 되었어도 그렇게 간단하게 제명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목사는 작은 교회 목회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모든 구성원이 함께 성찬을 나누면서 교통하기에 알맞은 교회가 바람직한 교회라는 소신을 가지고 목회를 해왔었다. 이목사의 제명은 이러한 그의 소신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 작은 교회라고 경시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성경의 선지자들은 작은 문제에 예민했다. 예수님도 실은 작은 문제를 가지고 유대교 지도자들을 시비했다. 외식과 불법, 하나님에 대한 사랑 없는 것, 랍비와 선생이라 칭함을 받으며 지도자라 불리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 등이다. 이런 것들은 겉으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내면적인 문제들에 대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예수님이 정죄를 했으니 문제구나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집어내라고 하면 어려워한다. 당신도 그런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냐고 하면 화를 낸다. 자기는 적어도 그들과는 다른데 네가 왜 나를 예수 죽인 유대교도 취급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의 현대 자본주의 정신에 물들고, 실용주의 정신에 물든 사람들은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을 예수님은 시비하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많은 사건 속에서 으레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만한 일들이다. 하지만 선지자와 예수님의 눈에는 이런 것들이 그 시대의 정신을 반영해 주는 엄청난 타락의 징조로 비춰졌던 것이다.
이런 선지자와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목사 몇 명이 제명된 것이 별일 아니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런 현상에 대하여 침묵하고만 있는 신학대학원 교수들과 양식 있는 목사들과 학생들이 침묵하고 있는 것이 과연 선지자와 예수님의 시각을 가지고 시대를 살피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무엇이 두려운가? 이제 많은 젊은 제자들이 목회 선상에 있고, 자신들도 말할만한 위치에 있는데, 왜 주님의 교회의 지체가 희생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신학적인 권위를 가지고 시원히 말을 하지 않고 있는가? 신학대학원의 교수단이 그렇게 유약한가?
본인의 문제가 문제되었을 때에도 본인은 나의 문제가 신학교에 넘겨진다고 할지라도 유야무야하게 넘어갈 것이 아닌가라고 어떤 교수에게 질책한 적이 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눈치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나의 문제는 예상했던 대로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또 한 사람이 술에 대하여 상담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서 제명을 당했다. 자신이 술을 먹었다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내담자에게 술을 먹어도 좋다고 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빌미로 시비를 걸더니 결국 제명을 시켰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이것은 그들이 오래 전부터 몇 사람을 제명해야 한다고 말하던 대로 시행하기 위하여 빌미를 잡은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로 나타났다.
누가 이런 일을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믿지 아니하고, 자기들만 주님을 사랑하는 체하는 독선에 빠진 자들의 처사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신학대학원을 비롯하여서 아무 곳에서도 말하는 자가 없다. 선지자 같은 심령을 가진 이는 없으며, 예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물론 주님은 조용한 가운데서 일하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과격한 방법이 아니라 조용한 가운데서 일하시기 때문에 지금도 문제를 삼고 떠드는 것보다는 조용하게 때를 기다리는 것이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선지자나 주님은 현실의 죄악상을 보고 조용하신 분이 아니었다. 그것을 향해서 책망하셨고 시비를 걸었던 분이다. 심지어 초대받아 갔던 집 주인에게까지도 시비를 걸었던 분이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 무엇이 잘못이고 무엇이 참이라는 것을 드러내셨다. 그래서 주님도 미움을 받고 죽게 되었고, 나중에는 나사렛 괴수 이단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주님은 역사의 서글픈 현실을 결코 도외시하거나 덮고 넘어가는 분이 아니었다. 때문에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너희 중에 당파가 있어야 그 중에서 옳은 사람이 드러날 것이라'(고전11:19)고 했던 것이다.
침묵은 금이라는 말은 적어도 천국 사역에서는 맞지 않는 말이다. 말씀으로 일하시는 주님이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만약 말씀을 대언해야 할 위치에 있는 자가 말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다른 종들을 시켜서 말하게 하실 것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 자들은 주님 앞에서 책망을 받을 것이다. 주님은 자기 종들의 대언을 사용해서 자기 교회를 덕스럽게 하실 것인데 그것을 불순종했기 때문에 주님은 책망하실 것이다.      

과연 합법적인가?

목사를 마땅한 죄목이 없이 제명시킨 것이 과연 합법적인가?

첫째, 고신 헌법정신에 맞지 않는다.

고신 헌법은 양심의 자유를 기초로 하고 있다. 신앙고백 20장 1절에는 "신약시대 신자의 자유는, 유대교회가 복종했던 의식적 율법의 멍에로부터의 해방과, 율법 아래 있던 신자들이 보통으로 가졌던 것보다 은혜의 보좌에 더 큰 담력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의 자유하신 영과의 교제에 있어서 더욱 확장된다"고 했다.
2절에는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가 되시며, 이 하나님은 그의 말씀에 배치되는 어떤 것에서나, 혹은 그 밖에 신앙이나 예배에 관한 사람들의 교리와 계명으로부터 양심을 자유하게 하셨다. 그래서, 그와 같은 교리를 믿거나, 또는 그와 같은 계명에 대해 양심을 떠나서 순종하는 것은 참된 양심의 자유를 배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맹목적인 신앙과 절대적이며 맹목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와 이성을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신앙고백 31장 1절에는 "교회가 보다 나은 정치와 보다 나은 건덕을 위해 일반적으로 총회와 공의회라고 불리워지는 회의가 필요하다..."고 하면서(회의들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님을 주의하자) 사도 시대로부터 모든 총회와 공의회는 전체회의나 지방회의의 구별없이 과오를 범할 수도 있으며, 여러 번 과오를 범했다. 그러므로 그 회의를 신앙과 생활의 법칙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도움으로 쓰여져야 한다"라고 했다.
이것은 총회와 노회는 법을 만들어 강제로 시행하는 기구가 아니라 교회의 덕을 위해서 모인 회의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이 의논하여 결의한 것을 교회가 법으로서가 아니라 도움 즉 표준으로 삼아서 도움이 되게 사용하도록 안내하는 것임을 밝혀 놓았다. 즉 총회와 노회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므로 그것들이 결정한 것은 강요할 성격이 아님을 밝혀 놓은 것이다.
교회정치 제1장 제 1조에도 양심의 자유를 "양심을 주재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그가 신앙과 예배에 대하여 그 말씀에 위반되거나 탈선되는 사람의 명령이나 교리를 받지 않게 양심의 자유를 주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종교에 관계되는 각 항 사건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고, 각자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으므로 누구든지 이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라고 했다. 종교에 관계되는 각 항 사건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고 판단할 권리를 침해할 수 없도록 보장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정치 제 1장 제 7조 권징항목은 "치리권은 전 교회로서나 그 선정된 대표자로 행사함을 불문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전달하는 것뿐이다. 곧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대한 유일한 법칙이므로 어느 교회의 치리회든지 회원의 양심을 속박할 규칙을 자의로 제정할 권리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하신 뜻에 근거한다"고 되어 있다. 성경말씀을 따르려는 양심의 자유를 속박할 치리회가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상은 고신 헌법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를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고 있으며, 그것을 막을 어떤 법이나 규칙도 허락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 준다. 말하자면 고신 헌법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양심의 자유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정신에 비추어 볼 때, 이목사를 제명한 것은 분명한 헌법위반이다. 양심을 따라서 복음 정신을 가지고 가르친 것을 규례를 들어서 억압하고 그를 추방한 것은 헌법정신 위반이다. 그리고 모든 규례들은 이 모법의 정신에 준해서 시행되어야 하며, 이 모법정신과 배치되는 규례가 있다면 그것은 위헌이요, 이것과 배치되게 강요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헌법위반자다.


둘째, 목사 제명이 과연 행정건인가?

목사가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제명을 당하게 되는 것이 과연 행정건인가? 이것은 일종의 추방이다. 이단에게나 할 수 있는 추방이다. 이런 조치를 취하는 것을 행정적 조치로 보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이것은 누가 보아도 행정적으로 처리해서는 되지 않는 사안이다.

러므로 이것은 재판건으로 다루고,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서 기소하고, 변호하도록 하고, 심의를 거쳐서 최종 판결을 내리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기록하여서 보고하고 또 증거자료로서 남겨야 한다. 이것을 행정건으로 다룬 것 자체가 교묘한 위법이다. 이 때문에 전권위원을 해산하고 별도로 세워지는 재판부에 소명 진술하고 그 심의와 판단을 받을 절차도 밟지 못하게 된 것이 위법이다.
이렇게 볼 때 이목사의 제명은 결코 합법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소위 법을 안다는 사람들에 의해서 불법이 자행되고 있다.          

맺으면서

나는 이미 고신 교단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이다. 때로는 외로운 때도 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성경을 가지고 함께 논의하고 토론하지 못했던 풍토에서, 신앙적인 동지의식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동기라도 별로 없다는 생각을 한다. 어차피 외로움은 처음부터 우리의 삶에 배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소외는 친분과 인위적인 교제를 가지고 해결되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한 이상 외로움이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가지지 않는다. 어차피 인생은 의지할 것이 못된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2:22)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인생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길이 신앙의 길이다.


이목사도 주께서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은사를 주신 분이 또한 그의 길을 인도하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도록 하실 것이다. 이렇게 일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이라는 것을 성경의 역사가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목사에게 이 말씀으로 위로하고 싶다.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백성 중에 지혜로운 자가 많은 사람을 가르칠 것이나 그들이 칼날과 불꽃과 사로잡힘과 약탈을 당하여 여러 날 동안 쇠패하리라"(단11:32-33).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연단을 통하여 정결케 되며 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단12:10). 그러므로 용맹을 발할 것을 믿는다. 주께서 그렇게 되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부디 용맹을 잃지 말고 용투하시기를 빈다.


박길헌 목사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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