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적 예배드림
기독교 예배의 정체성은
본질상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전인적인 신앙 고백적 경배행위입니다.
성경이 예배의 성격을 '신령과 진정'(요 4:24)으로 제한시키고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요 4:23)고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여기서 신령과 진정이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나와 무슨 관계가 있으며,
왜 예배를 드려야 되는지에 관한 구속의 도리를 성경을 통해 정당하게 깨닫고 신앙하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심 직한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는 성령의 내적 조명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만이
감사와 감격과 경외의 심정을 담아 참 된 예배를 드릴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때문에 구원받은 사실의 전제와 이로 인한 신앙 고백적 감동과 기쁨이 선행되지 않는 한에는
어떤 종교적 기교와 치장과 동기부여적 상황연출을 시도한다 해도,
예배 참석자의 감정을 자극해 종교적 감흥과 종교적 삼매경에는 빠지게 할망정
결코 예배의 본질로서 성령의 감동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 및 알현,
그리고 경배'(히 12:22-23)의 경지까지는 결코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신령과 진정(진리)으로 예배를 드리는 '경배자'가 돼야지
결코 손님과 관객의 신분으로 '참관자'가 돼서는 아니 될 줄 압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드리는 행위'이지 '보는 행위'가 아닙니다.
따라서 예배는
시종일관하게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위해 집중돼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역사만이 존귀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의 성경적 예배에서는
예배의 분위기를 고양시키는 어떤 형태의 작위적 연출도 허락될 수 없었던 것이
역사적 개혁교회의 예배전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연출은 사람을 의식한, 사람 중심의 예배로 전락될 수 있는 위험성이 다분히 내포돼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불신자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다면
저들은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로 인해
하나님께 드리는 신성한 예배를
단순히 연극을 관람하듯이,
음악회나 뮤지컬을 감상하듯이,
그러나 다소 종교적인 거룩한 감정을 작위적으로 부추기는 심정으로 참석하게 될 뿐입니다.
이는 진정한 의미의 예배행위일 수 없습니다.
기독교적 종교행위일 뿐입니다.
따라서 다양한 예배양식의 도입은
그것이 제아무리 종교적인 거룩성으로 치장한다 해도 시청각적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인해
영적 예배의 본질을 구현해 내는 일에는 한계가 있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예배의 본질을 왜곡시킬 위험성에 노출될 뿐입니다.
'열린 예배'라는 용어의 표현 속에
이미 하나님 중심의 영적 예배의 본질인 진리성과 진정성이 약화돼 있을 뿐 아니라,
지극히 사람 중심의 볼거리 예배로 전락된 경향서이 강력히 암시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찐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1-12).
http://cafe.daum.net/remnant7000/9Eh/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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