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신약

[스크랩] 참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교회

수호천사1 2018. 1. 22. 09:40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교회

(11:1-36)

 

11:1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신 것은 아닙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나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11:2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엘리야를 두고 하신 말씀을 알지 못합니까? 그가 이스라엘을 고발하여, 하나님께 이렇게 호소하였습니다.

11:3 1)"주님, 그들은 주님의 예언자들을 죽이고, 주님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나 혼자밖에 없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 찾고 있습니다." 왕상 19:10; 14

11:4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2)"내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칠천 명을 내 앞에 남겨 두었다" 하셨습니다. 왕상 19:18

11:5 이와 같이, 지금 이 시기에도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

11:6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은혜는 이미 은혜가 아닙니다.3)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다음 내용이 더 첨가되어 있음. '그러나 행위로 된 것이면, 은혜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행위는 이미 행위가 아닙니다'

11:7 그러면 무슨 결과가 생겼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찾던 것을 얻지 못하였지만,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완고해졌습니다.

11:8 성경에 이렇게 기록한 바와 같습니다. 4)"하나님께서 그들에게는 혼미한 영을 주셨으니, 오늘까지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29:4; 29:10

11:9 다윗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5)"그들의 밥상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고 덫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걸려 넘어지고, 보복을 받게 하여 주십시오. 69:22; 23

11:10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서 보지 못하게 되도록 하여 주십시오. 그들의 등이 언제나 굽어 있게 하여 주십시오."

11:11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져서 완전히 쓰러져 망하게끔 되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의 허물 때문에 구원이 이방 사람에게 이르렀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1:12 이스라엘의 허물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고,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 사람의 부요함이 되었다면, 이스라엘 전체가 바로 설 때에는, 그 복이 얼마나 더 엄청나겠습니까?

11:13 이제 나는 이방 사람인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방 사람에게 보내심을 받은 사도이니만큼, 나는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11:14 나는 아무쪼록, 6)내 동족에게 질투심을 일으켜서, 그 가운데서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하고 싶습니다. , '내 혈육'

11:15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심이 세상과의 화해를 이루는 것이라면, 그들을 받아들이심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삶을 주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1:16 맏물로 바치는 빵 반죽 덩이가 거룩하면 남은 온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그러합니다.

11:17 그런데 참올리브 나무 가지들 가운데서 얼마를 잘라 내시고서, 그 자리에다 돌올리브 나무인 7)그대를 접붙여 주셨기 때문에, 8)그대가 참올리브 나무의 뿌리에서 올라오는 양분을 함께 받게 된 것이면, 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를 가리키는 말,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를 가리키는 말

11:18 9)그대는 본래의 가지들을 향하여 우쭐대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10)그대가 우쭐댈지라도, 11)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12)그대를 지탱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를 가리키는 말,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를 가리키는 말,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를 가리키는 말,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를 가리키는 말

11:19 그러므로 "본래의 가지가 잘려 나간 것은, 그 자리에 내가 접붙임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하고 13)그대는 말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를 가리키는 말

11:20 옳습니다. 그 가지들이 잘린 것은 믿지 않은 탓이고, 14)그대가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십시오. 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를 가리키는 말

11:21 하나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끼지 않으셨으니, 접붙은 가지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넘어진 사람들에게는 준엄하십니다. 그러나 15)그대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이 16)그대에게 인자하게 대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17)그대도 잘릴 것입니다. 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를 가리키는 말,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를 가리키는 말,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를 가리키는 말

11:23 그러나 믿지 않았던 탓으로 잘려나갔던 가지들이 믿게 되면, 그 가지들도 접붙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수 있습니다.

11:24 18)그대가 본래의 돌올리브 나무에서 잘려서, 그 본성을 거슬러 참올리브 나무에 접붙임을 받았다면, 본래 붙어 있던 이 가지들이 제 나무에 다시 접붙임을 받는 것이야 얼마나 더 쉬운 일이겠습니까? 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를 가리키는 말

11:25 19)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한 비밀을 알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이러합니다.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해진 대로 있으리라는 것과, , '형제들'

11:26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20)"구원하시는 분이 시온에서 오실 것이니,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못함을 제거하실 것이다. 59:20; 21; 27:9(칠십인역)

11:27 이것은 그들과 나 사이의 언약이니,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11:28 복음의 관점에서 판단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러분이 잘 되라고 21)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택하심을 받았다는 관점에서 판단하면, 그들은 조상 덕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 '원수가 되었지만'

11:29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

11:30 전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던 여러분이, 이제 이스라엘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11:31 이와 같이, 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러분이 받은 그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자비하심을 입게 될 것입니다.

11:32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않는 상태에 가두신 것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11:33 하나님의 부유하심은 어찌 그리 크십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어찌 그리 깊고 깊으십니까?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려 알 수 있으며,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길을 더듬어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11:34 22)"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았으며, 누가 주님의 조언자가 되었습니까?" 40:13(칠십인역)

11:35 23)"누가 먼저 무엇을 드렸기에 주님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41:11

11:36 만물이 그에게서 나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기를 빕니다. 아멘.

 

1 하나님의 주권과 이스라엘의남은자들

 

1)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

 

사도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은 배도한 집단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도 아무런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반성은 커녕 저들의 악행을 스스로 정당화 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를 더욱 핍박하기에 열중했다.

 

비울은 유대인들의 그런 잘못된 관행에 대해 누구보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가운데서 그것이 점차 이스라엘 민족의 본질적인 의미조차 무시하는 보편적 사고로 변해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구속사역을 위해 특별히 조성하신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마땅히 얻어야 소중한 의미와 교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마저 멸시를 당하는 분위기가 되어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마땅히 비판해야 내용과 소중하게 받아들여야 내용을 분별해야 됨을 말했다. 그는 우선 자기 자신이 유대인의 혈통을 지니고 있는자임을 강조했다.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베냐민 지파에 속해있는 바울은 신약시대의 교회가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의미를 올바르게 깨달 함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배도한 이스라엘 백성을 엄히 심판하시지만 모든 사람들을 통째로 버리시지는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배도의 극치를 이루었던 아합 왕이 통치하던 엘리야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그것을 설명했다.

 

선지자 엘리야가 배도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했다. 그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의 제단을 헐어버렸으며 엘리야만 홀로 남았는데 이제 자신의 목숨마저 찾아 죽이려 한다고 말했다(왕상 19:10; 11:3), 이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엘리야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답변은 전혀 의외의 내용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고발을 받아들여 저들을 심판하시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 칠천 명을 남겨 두었음을 말씀하셨다(왕상 19:18; 11: 4)엘리야가 자신이 처한 일반적인 정황에 따른 시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보았던 것과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달랐던 것이다.

 

바울은 그때의 형편을 예로 들면서 바울 당시도 그때와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당시 극도로 배도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택된 남은 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11:5), 바울은 여기서 일반 윤리적인 성실함을 유지하는 유대인들이 많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남겨진들이 많이 있음을 언급했다.

 

사도 바울은 배도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남은 자들이 있는 것은 그들의 종교적인 선한 행위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것임을 강조해 말하고 있다( 11:6). 만일 유대인들 가운데 남은자들이 저들의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보호받게 되었다면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가 없음을 말했던 것이다.


2) 하나님의 복과 저주

 

 하나님의 구원은 창세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전적인 예정에 달려 있다. 바울은 그점을 매우 강조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스스로 종교적인 것을 추구했기 때문에 저들에게 은혜가 베풀어진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만이 은혜를 입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도리어 하나님 보시기에 완고하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복음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폐쇄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이 구약시대부터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예언되어 왔음을 언급했다. 그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사야서 6 9, 10절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예수께서도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직접 언급하시면서 복음이 가지는 폐쇄성에 관해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있도다"( 13:14-16)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복음을 깨달아 알아듣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

창세전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녀들 이외에는 아무도 말씀을 올바르게 깨달아 없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도리어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깨닫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막으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을 보고 말씀을 들어 깨닫는 성도들이 진정으로 있는 자들이다.

 

이는 구약시대부터 줄곧 예언되어 왔으며 예수님은 물론 신약시대의 여러 사도들이 그와 동일한 증거를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허락하신 복음은 결코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소유할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자들만이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사도 바울은 또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구약에 기록된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고 있다( 11:9). 다윗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무리들에게 무서운 심판이 임하도록 기도하고 있다. 그것은 저들에 대한 무서운 저주를 비는것이다.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몇이 되게 하소서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 69:22,23)

 

다윗은 하나님께 배도한 자들을 증오하며 저주를 벌고 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서 성공하여 부유한 자들의 풍요로움이 하나님을 찾는데 방해가 되며 저들이 평안하고 즐거운 삶을 사는 것이 자기 스스로의 참된 삶에 몇이 되게 해달라며 간구했다. 세상의 풍요로움과 평안함이 자기의 눈을 가려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며 자기 몸을 지탱하고 있는 허리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간구하고 있다.

 

다윗은 지금 세상의 일반적인 모든 인간들이 아니라 입술로 하나님을 부르면서 실상은 배도한 자리에 빠져있는 악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있다. 배도자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그것을 통한 인생을 즐기면서 마치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축복인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자랑하고 있는 것들이 도리어 자기인생의 올무와 몇이 된다.

 

우리는 바울이 인용한 다윗의 시면을 통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이는 우리 시대도 다윗의 시대나 바울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 안에 있는 많은 거짓 지도자들과 교사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핑계대며 얻은 종교적 자랑거리를 대단한 공로라도 되는 내세우지만 그것이 저들의 영원한 삶에 올무가 되고 덫이 되고 있다.

 

하지만 악한 종교 지도자들은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으며 어리석은 기독교인들은 저들을 숭앙하며 그들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의 자녀라 하면서 세상의 풍요로움을 부러워하며 그것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리를 깨닫게 성도들은 하나님 분만이 진정한 복의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이상 타락한 세상을 탐하지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것들은 물거품 같은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종교를 앞세워 자랑하는 세상의 풍요로움과 평안함이 도리어 위험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된다. 풍요로움이 위험할 있다는 의미는 그것을 통해 세속적인 만족을 얻게 되는 것과 연관된다. 성도가 성숙해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에 대한 선명한 이해를 하게 됨을 뜻한다.

 

그러므로 성숙한 성도들은 아무에게나 무분별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속적인 복을 빌지 않는다. 또한 그틀은 하나님께서 복주실 자와 저주하실 자를 구별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선명한 인식자체를 버리지 않는다. 복을 벌어야 자들에게 복을 벌며 저주받아야 자들에게 저주를 벌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지닌 인간인 우리로서는 그에 대한 정확한 구별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말씀이 교훈하고 있는 원리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판단이나 취향에 따라 무분별하게 아무에게나 축복을 벌어주는 기복행위는 미신적인 종교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복과 저주를 어떻게 빌며 노래해야 할까? 신약시대의 교회는 이를 위해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시편을 통해 기도하며 노래한다. 시편에는 복의 노래와 저주의 노래가 조화롭게 섞여 있다고 말할 있다. 우리는 시편의 노래를 입술로 고백하면서 계시적 의미에 참여한다. 즉 그것을통해 하나님의 복과 저주가 순종하는자들과 대적하는 자들에게 임하도록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결코 인간들의 종교적인 노력과 특별한 행위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됨으로 인해 선민으로 부름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기하게 된다고 했다( 11:11).  하나님께 저항히는 이스라엘의 범죄가 도리어 악한 세상에 놀라운 복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들에게 풍성한 복을 제공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1:12) .

 

바울은 그점을 언급하면서 이방인들을 위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이 제자리를 회복하게 된다면 그들에게 임하는 풍성함이 얼마나 크겠느냐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이스라엘 민족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앞에 기록된 내용들을 함께 생각해 진정한 의미는 저들 가운데 남아있는 선택된 자녀들과 배도한 민족에 대한 그의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2. 이방인의구원

  

1)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

  

자기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민족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예정하신 자신의 뜻과 신실하신 성품에 따라 선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게 된다. 따라서 구속사의 중심에 있던 유대 민족뿐 아니라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많이 있을 것은 당연하다.

 

사도 비울은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 라고 분명히 언급하면서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긴다고 말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라고 칭하는 것은 단순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자라는 의미일까? 그렇다면 바울은 이방인들에게만 복음을 선포하고 유대인들에게는 복음을 선포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자신은 유대인들을 안타깝게 여긴다는 말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구원에 있어서 아무런 본질적인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이방인의 편에서 변호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는 유대인의 혈통을 가지고 이방 지역에서 출생한 자로서 하나님의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특권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물론 바울뿐 아니라 다른 사도들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민족성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차별이 없음에 대해 증거한다. 하지만 이방 지역의 배경을 지닌 바울은 그들보다 더욱 열정적으로 이방인을 변호하며 그에 저항하는 유대인들과 맞서 싸웠다. 바울은 자신의 그런 사역을 두고 이방인의 사도라 말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가 것은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도리어 유대인들을 위해서임을 분명히 언급했다(11:13,14). 이방인을 변호하는 그의 사역을 통해 유대인들로 하여금 시기가 나게 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로 말미암아 유대인들 가운데 자신을 되돌아보며 하나님 안에서 구원받게 성도들이 있다는것이다.

이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바울은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상 절대적인 위치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이방인들과 회목하게 되었음을 언급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사이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으셨다. 그가 유대인들 가운데서 다시 받아들이는 백성들이 있다면 그것은 저들에게 새로운 생명이 공급되는 것을 의미한다( 11:1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무조건 버리는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있는 자기 자녀들을 부르시게 되는것이다.

 

2) 영적으로 완벽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의 의미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이방인 출신의 성도들에게 유대인들에 대해 교만한 태도를 가지지 말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개별적인 의미가 아니라 역사적 이스라엘 민족과 더불어 해석되어야 한다. 이방인들이 거룩하게 것은 특별히 선택된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에그 기초를 두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에 연관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것은 아무런 과정 없이 그냥 것이 아니라 구약에 계시되어 언약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방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것은 영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접붙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방인들은 저들 스스로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었다. 바울은 열매로서 하나님께 바쳐진 반죽덩어리가 거룩하면 전체 덩어리가 거룩하다고 말하면서 감람나무에 관한 비유를 들고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자가 되었은즉 그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 11:17,18)

 

사도 바울은 말씀 가운데서 감람나무와 감람나무를 예로 들어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감람나무의 가지 가운데 일부를 꺾어내고 자리에 감람나무 가지를 접붙인다. 그렇게 되면 감람나무의 뿌리의 진액을 감람나무 줄기가 빨아올려 그것을 감람나무에게 공급하게 된다. 35).

 

그러므로 감람나무 가지에 접붙여지게 감람나무 가지는 참감람나무의 뿌리와 줄기로 말미암아 진정한 생명을 공급받아 열매를 맺는다. 따라서 감람나무에 접붙여진 감람나무 가지가 감람나무 가지들을 향해 자신을 자랑하거나 교만할 만한 것이 없다. 왜냐하면 접붙여진 가지가 줄기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뿌리와 줄기가 접붙여진 가지들을 보전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감람나무와 감람나무에 관한 비유를 말하면서 유대인틀과 이방인들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방인 출신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역사적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진리의 진액을 공급받고 있음을 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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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이는 식물학적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가 난다. 일반적인 경우 식물학에서는 오히려 이와는 정반대라 있다. 예를 들어 사과나무나 대추나무에 접붙이기를 한다면 좋지 않은 나무에 좋은 나무 가지를 잘라다가 접붙이게 된다 좋은 나무의 가지를 잘라내고 거기에 나쁜 가지를 접붙이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은 나무의 가지를 잘라내고 양질의 나무 가지를 접붙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가지를 통해 나은 과일이 맺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본문에 나타나는 감람나무와 감람나무의 접붙이는 비유는 식물학적 개념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로 설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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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여기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특별히 조성하신 이스라엘 민족에게 둥치로서의 완벽한 개념을 부여하면서 교회에 대한 설명을 한다. 하나님께서는유대인들 가운데 믿지 않는 자들을 잘라내고 자리에 믿는 이방인들을 접붙이게 되었음을 말씀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완벽한 이스라엘을 만들어 가신다. 둥치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역사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인 측면에서 완벽해야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믿음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잘려나가게 되고 대신 자리에 믿음을 가진 이방인들이 접붙여지게 된다. 바울은 여기서 완벽한 개념으로 역사적이며 영적인 이스라엘을 언급한다. 이는 사실 매우 신비한 개념으로서 우리가 여간 주의를 기울여 이해하지 않으면 된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하면서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것이라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11:25,26)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말의 의미를 단편적으로 것이아니라 역사적 관점에서 전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여기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 받으리라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정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혈통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최종적인 구원을 받게 되는가? 만일 그렇다면 과거에 살다가 죽은 수많은 혈통적인 유대인들은 어떻게되는것인가?

 

바울을 통해 계시된 말씀은 단순히 혈통적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혈통적 이스라엘 민족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에 대한 신비한 의미를 분명히 깨달아야만 한다. 비울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구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즉 모든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즈음에서 역사적 이스라엘 민족이 모든 구원받을 성도들의 원형(原型) 된다는 사실을 우선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원형의 둥치가운데서 악한 유대인들은 잘려지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선하다고 인정받은 이방인들이 자리를 채우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인 이스라엘의 원형은 그대로 존재한다. 그들과 그들에게 접붙임을 받게 자들이 이스라엘 이며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자들은 결코 역사적 유대인들에 대해 교만할 없다. 유대인들의 불순종을 보며 그것을 자기와 무관한것으로 생각해서는 된다. 바울은 이방인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접붙임을 받은 자들은 저들에게 주어진 율법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요구하고 있다.

 

감람나무인 이방인 출신의 성도들은 감람나무인 구약의 역사적인 언약 백성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게 된다. 감람나무에 접붙여진 돌 감람나무 가지가 뿌리와 둥치로부터 진액을 공급받듯이하나님께서 조성하신 유대인들에게 접붙여진 이방인 출신의 성도들은 그 뿌리인 역사적 유대인들로부터 진리를 공급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서 접붙임을 받기 전의 이방인의 행세를 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부터 다시 찍어 내버리실 것이라고 경고했다. 말을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 부인하는 뜻으로 받아 들여서는 된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가운데 사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말을 통해 지상의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강한 경각심을 주고자 했다

 

구약시대에 약속의 땅에 살았던 역사적 이스라엘 민족은 사도교회 시대뿐 아나라 현대에 존재하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이방인인 우리가 그들에게 접붙여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 가운데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구약성경을 통해 진리를 알아가는 것은 의미상 저들로부터 생명을 공급받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은 현대의 팔레스틴 지역과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일반 유대인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AD 70년 로마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의 유대인들에게는 이상 그와 같은 의미가 없다. 구속사적인 모든 기능이 끝난 다음의 그들은 이제 지구상에 존재하는 여러 종족과 민족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 버린 것이다.



3. 혈동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의 구원

  

구약시대의 역사적 이스라엘 민족은 세상에 존재해 모든 인간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는 세상의 다른 여타의 모든 민족들이 그런 특별한 기능을 가지지 않은 것과 비교된다. 이스라엘 민족 이외의 다른 민족들은 상호간에 일상적인 외에 달리 특별한 상관관계에 놓여있지 않다.

 

구약시대에 존재했던 숱하게 많은 여러 종족들과 현재 한민족(韓民族)사이에는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아프리카의 어느 민족과 10세기에 살았던 아메리카 대륙의 어느 민족 사이에도 서로 상관이 없다. 세상에는 없이 많은 민족과 종족들이 살고 있지만 서로간 본질적인 상관관계에 놓여 있지 않은것이다.

 

이외는 달리 구약시대의 역사적 이스라엘 민족은 세상의 모든 민족들과 매우 중요한 관계에 놓여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예외가 있을수 없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특별히 조성하신 민족으로서 언약의 민족을 모르면 구원에 대해 없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역사상의 모든 민족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졌던 언약과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과 부정적인 측면에서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방 민족 출신의 모든 성도들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직접 연관된다. 그들이 가진 언약과 율법으로 인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죄인인 자신의 모습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구약시대의 역사적 이스라엘 민족과 본질적인 의미에서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이방인으로서 구원받은 성도들로 인해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며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조상들로 말미암아 놀라운 사랑을 입게 되었음을 말하고있다( 11: 28).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다시 언급하지만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불순종의 결과로 인해 떨어져 나온 유대인들의 자리에 이방인인 우리가 접붙여지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긍흘을 입게 된것이다.

 

타락한 아담의 자손인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께 저항하여 불순종의 자리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택하신 모든 자녀들을 구원의 원형인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로 부르셨다. 모든 인간들이 불순종 가운데 갇혔던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모든 자기 자녀들에게 긍흘을 베푸시게 것이다.

 

물론 제한된 인간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모든 신비한 내용들을 확실하게 없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계획을 벌레같이 우둔한 인간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놀랍고 오묘한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갚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또는 부요와 지혜와 지식이여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3-36)

 

이러한 고백은 비단 신약시대의 사도 바울만 말했던 것이 아니다. 구약시대의 믿음의 선배들도 그와 동일한 고백들을 했으며( 11:7;36:22,23; 139:6; 40:12,13) 신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오늘날의 모든 성도들도 그와 통일한 고백을 수 밖에 없다.

 

세상에 있는 만물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오직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만물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영광이 세세토록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기원하게 된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들은 항상 고유한 본분을 잊고 죄로 오염된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믿는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상당부분 스스로 알수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죄에 빠진 인간들은 결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가질 없다. 인간들이 상상하거나 짐작하는 신은 죄로 오염된 인간들에 의해 고안된 거짓 신일 뿐이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있는 유일한 방편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기록된 성경이다. 그나마 인간 스스로 그것을 택하여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신 자라야만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다. 성경 가운데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사역에 관한 놀라운 내용들이 담겨 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 그의 놀라운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광호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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