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직한 예배의 방향
- 바람직한 예배의 주체로서 성도의 관점에서
1. 예배의 참된 주체인 성도 각인
1.1 종교개혁과 회중예배
모두가 알다시피 종교개혁의 핵심은 구원관에 있다. 오직 성도 각인의 믿음으로만 구 원에 이를 수 있다는 진리, 타인의 믿음이나 자신의 여타 공로로 충족될 수 없음이 선언 되었고, 그 위대한 재발견은 돈과 권력으로 부패한 교회를 깨웠던 것이다. 여기에 동반된 혁명적 실천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라틴어와 헬라어로 보존되어 사제들에게만 독점되 던 성경말씀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민중에게 배포한 것이었다.
누구나 하나님의 뜻을 깨 달아 알고 행할 수 있는 실질적 기회를 제공하였고, 사제들의 독점적 교리 해석에서 벗 어나 성도들의 일상에서 숨 쉬는 말씀으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성가 대에게만 주어졌던 찬양이 회중의 손에 넘겨진 것이었다. 회중 찬양집의 발간과 예배에 의 적용은 예배의 형식과 그 의미의 공유에 있어서도 혁명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적 미사 안에서 몇 마디 교송으로 머물렀던 회중의 역할이 확대되었고, 원한다면 개인이 별 도의 찬양을 드릴 수도 있게 된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만인제사장이라는 의미는 본인 의 구원의 문제를 넘어서서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라는 하나님과의 쌍방교제 즉, 예배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한국교회의 성도 개개인이 이 중요한 개혁의 열매를 그리 절실 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말씀에 대해서는 차치하고서라도 찬양에 대해 서는 상당히 수동적으로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주보에 번호가 게재된 찬송가를 따라 부르 고 예배 안에서 각 순서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1.2 회중예배의 공동체성
이 관점을 청년목회현장의 찬양문화로 옮겨보면 유사한 수동성을 관찰할 수 있다. 일 단, 선곡권의 불균형이다. 찬양의 내용은 주로 인도자가 정해온다. 팀은 순서를 따라 연 습하고, 보통 메들리로 소화할 수 있거나 연주 중 한음 정도 조성을 올려서 연주할 수 있게끔 몇 곡 단위로 묶여지기 마련이다. 이 과정에 전체 공동체의 의견수렴이나 합의의 장치는 기대하기 힘들다.
그리고 주로 새로운 곡을 접하는 과정이 다른 예배거나 음반이 기 때문에 그곳에서 연주된 방식과 리듬, 화성 진행을 따라하기 마련이고, 악기의 편성도 엇비슷해진다. 대부분 서구적인 화려한 연주방식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작 곡의 원류를 한 단계 더 좇다 보면 되려 단순하고 정갈한 모습이었음을 발견하는 일도 적잖다. 더욱 맘을 힘들게 하는 것은 근거불명의 멘트와 곡 해석 및 적용이다. 곡과 곡 사이에 무언가 회중을 격려하는 몇 마디를 길든 짧든 덧붙여야 할 것만 같은 찬양인도자들의 부담은 아 마 다른 리더들의 모습 속에서 자연스레 전이된 것이리라. 다소 즉흥적으로 추가하는 곡 의 의미들도 그 진의를 왜곡할 우려가 농후하다.
한편 인도자들이 찬양 중 회중에게 몸 을 사용하게 도전하는 것은 찬양운동 초기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 당시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배하고자 두 손을 들고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행동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신앙적 표현이었고, 손뼉을 치며 일어서 기쁨을 표현하는 것도 잠자는 영혼 을 깨우는 몸부림이었다. 우리가 몸짓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이유는 몸짓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전심(全心)으로 예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며 자연스러운 동화이기 때문이다. 그 러나 몸짓이 남발되고 있는 요즘에는 도리어 그 몸짓이 전인격적 예배를 방해하는 의무 감이나 습관으로 인한 부산물이라면, 인도자는 이러한 몸짓을 격려하기보다 자제시켜야 하는 것이 맞다.
한 가지 지적을 덧붙이자면 지체들을 향한 사랑 고백이 담겨있는 곡들로 서로를 바라 보며 노래하게 하는 방식에 대해서이다. 대부분의 찬양인도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모종의 의무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아니 회중들의 적절한 반응에 만족감을 느끼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작정 따라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사람들의 기질은 각양이고 이 중에는 내성적인 기질에다 스킨십이나 눈맞춤을 힘들어하는 이들도 많다. 이런 이들이 교제송의 상황에 놓이게 되면 시선을 어디에 놓아야 할 지, 잡힌 손을 어떻게 뿌리쳐야 할 지 몰라서 내심 진땀을 빼는 경우도 허다하다.
결과적으로 자칫 이 들은 예배 현장에서 소외당한 소수로 예배의 언저리만 맴돌 것이다. 온전한 예배를 위해 사람들 간의 벽을 허물겠다는 시도가 오히려 벽을 쌓게 하는 결과를 낳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하다.
각양 공적 예배에 있어 자신이 예배에 대한 전문가라고 생각하며 회중을 보란 듯 이 끌어 갈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예배학 박사님이 그럴 수 있을까? 확언할 수 없다. 예 배의 진정한 주체는 성도 각인이며 그 대상은 분명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예배의 대상을 누군가가 대신할 수 없듯이 예배의 주체 또한 누군가가 대신할 수 없다. 공적인 회중예 배에서 역할은 맡은 사람은 한시적 기능으로 그 곳에 서있을 뿐 항구적 권위를 지닌 이 는 아니다. 예배와 찬양을 인도하는 자는 성도 각인에게 기능적인 역할을 위임받아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회중의 필요와 하나님의 마음을 연결하는 중요한 위치임에 분명하 지만 모종의 권위나 신적 능력을 발휘하는 자리가 아닌 것이다.
언제나 예배 가운데 소외받는 이들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성품이 왜곡 받지 않도록 하는 깨어있는 청지기인 셈이다. 아마 기대하기는 이러한 예배가 정착된다면 더 이상 예배인도자 (Worship Leader)라는 개념은 생경한 단어가 될 것이다. 찬양인도자도 마찬가지다. 이 제는 성도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돕는 예배섬김이(Worship Servant)라는 정의가 더 적실 한 표현이 될 것이다. 물론 성도 각인의 예배 역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섬김의 제사 (Worship Service)가 되어야 할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2. 어깨너머 보고 배우는 예배의 명암
2.1 예배를 훈련받은 적 없는 회중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기본정신이 함축되어 있는 수레바퀴 예화를 잠깐 예로 들어보 자. 물론 이 내용 자체에 이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예화에는 신앙의 기본이 잘 요약 되어 있고 일면 진실을 증거하는 양질의 농축 이미지이다. 중심되신 그리스도, 말씀과 기 도, 전도와 교제, 순종하는 삶으로 구성된 이 구도는 언뜻 보면 완벽한 듯하다.
필자도 후배들에게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소개하고 훈련으로 초대할 때 이 비유를 여러 번 사용했다. 그러나, 이곳에는 예배와 찬양이라는 개념은 잘 보이질 않는다. 기도와 말씀이 라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의 개념과 순종하는 삶 안에 함축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네비게이토 회원들의 라이프스타일은 예배와 찬양, 그것도 공동체적 예배와는 다소 거리 가 있어 보였다.
한 가지 더 살펴보자면, 한국기독학생회(IVF)의 사역전략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소 그룹운동]을 다룬 [소그룹운동과 교회성장(IVP간)]에서, 작은 교회로서 소그룹의 기능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핵심적인 4대 요소로서 [예배]와 [선교], [공동체적 교제]와 [양육]이라고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의 모습을 빌어 요약해주고 있다. 이 네 가지 요소 중에 [예배]라는 관점이 소개된다는 것은 수레바퀴 비유보다는 진일보한 셈이다.
하지만 IVF의 각종 소그룹과 LGM(Large Group Meeting : 전체집회)에 국한해서 판단한다면 이 [예배]라는 요소도 그리 확연히 자리 잡지는 못했다고 보인다. 시간적으로나 관심 면 에서나 [말씀]이 대부분의 가치를 차지한다. 게다가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이해 수준에서 [예배]는 그 본질적인 의미보다는 주일 오전을 비롯하여 교회건물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 련의 집회에 참여하는 행위로 새겨지기가 십상이다. 아무도 감히 이 예배를 개인과 소그 룹이 부정기적으로 행하는 경배의 행위를 지칭하거나 그 중심에 하나님을 찬미하는 행위 를 상정하지는 않았었다.
대학시절 훈련받았던 죠이선교회의 제자훈련 커리큘럼 역시 예배와 찬양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묵묵부답이었다. 그 부분은 그저 전체모임 때 앞에 서서 밝은 표정으로 모두 가 노래하도록 격려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어깨 너머로 배우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배려였을 뿐이다. 이따금 소위 '관심자'들을 위해 방학 중 수련회에 특강 정도만을 제공했던 것이 공식적인 과정이었다. 되돌아보건대,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고 통독하고 공부하고 적용하는 노력만큼 찬양과 예배에 대한 실제적인 훈련의 과정이 동반되었었다면, 나와 이웃과 교회와 사회와 세계를 품고 중보하는 기도를 배울 때 그 모든 것의 주인되신 하 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몸에 밸 수 있었다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예배와 찬양에 특화된 선교단체로 예수전도단을 손꼽는다. 필자 역시 이 단체의 교육과정 중 일부에 참여했고 많은 유익을 얻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한 두 단 체가 찬양과 예배에 특화된 은사를 발휘한다는 현상이나 구도 자체가 무언가 비뚤어진 한국교회 예배인식의 현주소를 증거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경향은 사랑의교회와 국제제자훈련원의 [평신도를 깨운다]도, 온누리교회와 두란도 서원의 [일대일제자양육]도, 나들목교회의 [풍성한 삶의 기초]라는 제자양육교제에서도 반 복된다. 말하자면 한국교회 안에서 예배에 대해서(공동체적 예배든 개인적 예배든) 성도 들을 훈련하는 공식적인 커리큘럼은 없었다고 자인하는 것이 정직하다.
2.2 예배를 평가하고 기획한 적이 없는 지도자
언제나 하나님의 현현을 맛보는 예배를 소망한다면 목회자는 예배의 각 순서자들과 늘 지난 예배에 대해 돌아보고 다음 예배를 위해 준비하는 시간을 별러야만 한다. 그리 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 공동체의 체질과 필요를 아는 자원들의 예배를 위한 인력으로 성장하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기회를 제공하여야 한다. 결국 성도 각 개인의 영혼을 하나 님과 직면하도록 인도하는 최초의 책임은 교역자들과 예배위원들에게 있음을 주지하고 이를 위해 시간과 재정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설교 한편 준비하는 데에는 며칠을 끙 끙대면서, 예배 자체는 늘 하던 대로 관성을 좇아 진행하는 목회자는, 그가 끙끙대며 준 비한 설교가 회중들에게 왜 공명되지 않는지 잘 모를 확률이 크다. 아마도 그가 또다시 설교에만 매달린다면 예배는 더욱 더 화석화될 것이다. 아마도 성도들은 언제고 수십 분 동안 찬양의 능력을 체험하며 믿음의 선조들이 가꾼 예배의 전통과 신비를 온전히 드러 내면서 성도들과 예배의 진수를 함께 맛볼 수 있는 이가, 바로 그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 씀을 대언하는 풍경을 고대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 현상은 대학가의 선교단체 간사나 리더 사이에서도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전체모 임의 메신저나 각 소그룹의 장은 영적인 리더십이 있는 이들을 세우고 배치하면서, 정작 많은 이들에게 정서적 영적 영향력을 가진 찬양인도자와 예배인도팀의 경우에는 그러한 성숙 차원의 고려보다는 노래나 악기 좀 한다는 이들을 세워서 모임이 추구하는 성숙과 변화에 종종 역기능을 가져오기도 한다. 사실 이 문제의 해결은 간사들이 찬양인도의 역 할도 왕왕 맡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간사]라는 분들도 대부분 자기가 소그룹원이었을 때, 순원이었을 때, 셀멤버였을 때 이런 방향으로 훈련받은 적이 없다. 간사로 헌신하고 나서도, 말씀을 강론하고 지체를 돌보는 훈련은 열심히 받았지만, 예배 를 인도하고 찬양 가운데 하나님을 직면토록 하는 인도자적 소양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 에게도 계발이나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이미 나름대로 관심을 가지 고 자기를 그런 방면으로 계발한 이들의 도움 아래 늘 찬양과 예배의 장에 무임승차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복음주의 지성이라고 자부하거나 분석과 비판력이 뛰어나신 분들 역시 이 분 야에 뾰족한 대책은 내놓지 못하면서 자발적 예배운동가들을 종종 열광주의자라고 치부 하는 경향이 있다. 그건 영적 은사와 지도력을 겸비한 한 인격 내에서 결합하여야 하는 문제라고 쉽게 결론지어 버리고, 스스로 그 부담을 자처하는 것은 회피하곤 한다. 이런 문제들로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할 사람들도 드문 상황이지만, 이제 예배의 내용과 형 식을 고민하는 동시에 예배의 주체인 성도 각인들을 예배자로 길러내는 일과 공동체적 예배를 기획해 나가는 지도자들의 출현을 위해서도 그만큼의 힘을 모아야 한다.
3. 성숙한 예배자를 길러내는 생태계로서의 공동체
3.1 예배훈련을 제자훈련의 일과정으로, 예배인도훈련을 리더훈련의 일과정으로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삶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나 제자훈련 커리큘럼의 기획에 있 어, 지역교회나 선교단체 그리고 단계별 훈련교재를 저술하는 그룹들이 늘 간과해왔던 것은 찬양과 예배였다. 찬양과 예배가 신앙의 본질에 포함된다는 것을 부인하는 이는 하 나도 없지만 이 가치를 어떻게 공동체의 일원들에게 공급하느냐에 대해서는 뾰족한 실천 이 없었다. 더구나 이것을 훈련의 차원으로 각색하고 각 개인의 몸에 배도록 하는 일은 누구도 나서서 해본 적이 없다. 말씀을 탐구하는 것처럼, 경건의 시간을 중시하는 것처 럼, 기도의 생활을 쉬지 않는 것처럼, 전도자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처럼 예배와 찬양은 기초훈련으로 강조되어야 하고 영적체력훈련의 기초에 자리 잡도록 커리큘럼화되어야 한 다.
같은 맥락에서 리더훈련에도 찬양과 예배를 인도하는 훈련이 배치되는 것은 당연하 다. 섬김과 돌봄의 리더십이 훈련 가운데 전수된다면, 찬양과 예배도 회중을 섬기고 돕는 방향으로 자리 잡히리라. 요컨대 작은 모임이든 큰 모임이든 영적 리더로 일한다면 찬양 과 예배에 대해서도 다른 누구에게 미루지 않고 섬김의 자세로 손수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계발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3.2 목회자 양성과정의 예배학과 찬송가학이 회중 중심으로 성육신
지역교회 목회자들이 늘 강조해온 것 중에 말 자체로 볼 때 120% 옳은 이야기 중의 하나가 "예배에 성공해야 한다."는 명제이다. 하지만 이런 맥락에서 그 분들이 예배에 대 해 회중들에게 가르친다는 내용들은 그 본질에서 빗나가고 있다. 어김없이 새벽기도회나 수요예배 주일저녁예배, 구역예배, 가정교회모임 등에 열심을 가지고 빠짐없이 참석하라 는 등의 출석강요가 대부분을 이룬다. 예배의 질은 참석자의 영성에 달려있다면서도 그 영성이 예배 안에 어떻게 교감되고 소통되어야 하는지 궁색하다.
정작 회중들은 교회력(예배력)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지하다. 아니 무관심하다. 몇몇 특별헌금절기가 되어서야 유래에 대한 설명이 설교에 등장하는 정도다. 기실 예배의 순 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예전에 대해서도 일반 회중과의 공유가 거의 전무하다. 예 배의 전통이 어떻게 세워져왔는가에 대해 제대로 알려준 적이 없다. 그저 그동안의 것을 따라하거나 외국 교회나 이웃 교회에서 좋다는 예배순서를 흉내 내기 일쑤였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예배에 접목시키려는 분들의 성과에서 그나마 그런 노력의 일부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위로가 된다.
왜 신학대학 등에서 교수되는 지식들이 예배현장에 민감하게 적용되지 못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찬송가학으로 일컬어지는 회중들의 예배음악에 대해서도 비슷한 아쉬 움이 존재한다. 한국교회 찬송가의 그간의 선곡과 편집, 물밑 정쟁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 할 여력이 없지만, 적어도 회중들이 찬송가를 어떻게 선곡하고 불러야 하는가에 대해서 그간의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주지 못한 것 같다. 즉, 이 영역에 대 해 현장의 목회자들은 그다지 돋보이는 능력도 치열한 의욕도 없는 듯하다. 교육상품으 로서 교회음악아카데미 정도의 교육이 아니라, 현장의 고민과 시행착오를 공유할 수 있 는 실질적인 부서별 세대별 예배와 찬양에 대한 웍샵들이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산발적 으로 제공되는 일부 선교단체 중심의 예배와 찬양학교 등의 과정들이 지역교회의 실질적 인 필요와 공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
3.3. 예배인도자의 외부영입을 지양하고, 교회 안에서 길러낸 일꾼을 중용하기
예배와 찬양에 깨어있다고 자부하는 목회자들의 경우, 예배에 새로운 영성을 불어넣 기 위해 음악목사 형태로 부교역자를 세우기도 하고, 젊은이들 중심의 일정 부서에 대해 서는 찬양인도자를 외부에서 영입해서 특별한 목적과 형태의 예배를 진행하기도 한다. 이 경우 단기적으로는 의도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라도 이러한 영입성 인사의 반복 은 지역교회의 예배공동체로서의 정체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다 줄 우려가 있다. 예 배와 찬양을 인도하는 이들을 성가대 지휘자나 반주자 혹은 유급 솔리스트처럼 취급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영적인 가족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예배에서 그 진실성의 잣대 중 하 나는 그 공동체의 참 공동체됨이다. 행사기획 전문회사에서 레크레이션 지도자가 출장나와서 전교인 체육대회를 돈 받고 인도해주는 경우와 우리의 예배가 동일시되어서는 절 대 안 된다. 그 교회 가족의 일원으로서 구성원들의 희노애락을 이해하고 있고 인격적인 교류가 가능한 이들이 예배를 인도하는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른바 외부 전문가들의 역할은 그 교회의 현재 사역진을 만나서 일정시간 대화를 통해 현재의 사역 에 힘을 불어 넣을까 협의하고 정보를 나누는 것 정도가 옳다. 교회가 이미 어디서 만들 어진 전문가를 단번에 재정을 투자해서 영입한다는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다. 교회는 예 배공동체이자 선교공동체, 그리고 양육공동체로서 재생산의 기능을 갖추고 있을 때 그 생명력을 유지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찬양과 예배에 대해 인도자적 위치에서 섬기는 그 룹 역시 그 공동체에서 일으켜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3.4 즉흥적 인도보다 준비된 예배기획으로 기초다지기
예배와 찬양에 관련한 항간의 오해 중의 하나는 찬양을 인도하는 이들이 준비된 순서 를 벗어나서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선곡하고 음악적인 연주력을 발휘하는 것이 성령의 인 도하심을 받는 증거라는 것이다. 물론 주변에 긍정적인 경우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런 인식은 본질적으로 성령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는다.
즉, 예배 현장에서만 성령을 인정 하고, 그 예배를 준비하고 기획하는 시공간에는 인간의 지혜만이 있다는 또 다른 이원론 과 다름없다. 성령의 역사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우발적일 수 있다는 주장은 보편적 설득력이 있지만, 더 일반적으로는 말씀에 대한 성실한 묵상과 적용, 그리고 누적된 기도 와 응답 가운데 일어나는 역사가 더욱 정직하다고 본다. 예배를 인도하는 이들은 우선 그 예배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시공간 자체가 성령에 사로잡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 역시 동일한 성령의 은사가 드러나고 열매가 맺어지는 장 이 되도록 말이다. 논리적으로도 진정 우발적인 역사란 그 우발적인 속성을 기대할 때 일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본분을 다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에 의해 벌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바르고 풍성한 기획을 위해서는 연구와 토론이 필요하고, 성숙과 발전을 위해서는 평 가와 바로잡음도 필수적이다. 그저 흉내 내기에 그치지 말고 자기 공동체를 파악하고 품 으며 매번의 예배에 차별화된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여야 한다. 그리고 카리스마를 가 진 일개인의 기획이 아니고 공동체를 중시하는 겸손한 기획이 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 가 없는 부분이다. 한 공동체의 영적 기상도를 카리스마를 가진 한 사람이 다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배의 기획 자체가 공동체적이라면 인도의 장에서도 공동체적 예배인도의 모 델이 개발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아직까지 회중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힘든 현실 을 일단 인정하더라도, 복수의 인도자 내지 연주자들의 역할을 기획 시부터 잘 분배하여 배치할 수 있지 않는가? 나아가 공동체적 예배인도의 모델과 아울러 적극적인 개발을 기 대할 수 있는 분야는, 수백 수천 명 단위의 예배보다는 많아야 백 명 내외 그리고 수십 명 단위의 예배가 대부분인 한국교회의 현실을 반영한 소규모 예배를 위한 모델이다. 이 러한 공동체적인 기획과 소규모 기획은 참석하는 회중들이 예배와 찬양에 대한 인식과 훈련이 잘 되어 있을수록 그 영향력이 배가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3.5 한 번의 멋진 예배기획보다 한 사람의 성숙한 예배자를 기르기
예배기획이라는 부분보다 더 중요한 바가 있다면 사람들에 대한 투자이다. 상투적인 강조인 듯 싶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멋진 예배가 아니라 참된 예배자라는 사실 은 너무도 자명하다. 물론 제자훈련의 원칙에 의거한 개인적인 영적 아들과 아비의 관계 로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은 회중에 대한 교육과 계몽이다.
찬양 예배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것보다 예배를 위한 소그룹을 운영하는 것이 더 시급 하고 절실하다. 두 가지를 병행할 수 있는 에너지가 충만하다면 다행이지만, 불행히도 대 부분은 찬양예배라는 [일]에 더 이끌려 다닐 우려가 크고, 소그룹 역시 예배를 위한 준비 모임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소그룹이 성장하면 크고 작은 정기 세미나를 자체적으로 열 수 있다면 좋겠고, 나아가 공동체의 영적 리더 그룹과의 협의를 거쳐 전 공동체 구성 원 모두에게 예배와 찬양에 대한 소양을 길러주는 훈련과정을 세워나가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별도의 예배공간을 벼르지 않더라도 공동체의 공적 예배의 장이 소망하는 바대로 변화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결국, 이를 위해서는 이 역할을 자처 하는 분들이 종합적인 영적 지도력을 갖추도록 계발하는 데에 투자하여야 한다. 영적 권위를 갖추라는 말이라기보다 실질적으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자질과 기술을 갖추자 는 말이다. 찬양과 예배에 대해 전문적인 역할을 할 수 있어서 사람들이 지도력을 인정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이미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가 예배와 찬양의 영역 에서도 공동체를 이끌고 섬길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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