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해설
I. 서론 (1-3장)
1) 예수의 계시
요한계시록은 이해하기에 대단히 어렵다. 낯선 단어와 사건들이 많이 언급되고, 수다한 상징어들이 나열되며, 또한 구약의 직접 인용과 모티브 사용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계시록은 이해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계시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1:1). 계시는 숨겨짐이 아니라 나타남이다. 계시는 감추는 것을 위하지 않고 밝히는 것을 위한다. 요한계시록이 계시인 이상, 이것은 독자들을 놀라게 하거나 두렵게 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은 독자들과 멀리 떨어져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요한계시록이 모든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시키기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처음부터 이해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정신을 우리에게 심어줌으로써 시작한다. 그러므로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 (1:3)고 말한다. 또한 계시록은 끝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정신을 다시 환기시킴으로써 마친다.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22:7). 그래서 이 책의 예언은 인봉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22:10).
2) 아시아의 일곱교회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이다.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1:4). 요한계시록은 역사적인 사실성 위에 기록되었다. 이것은 결코 공간과 시간을 무시한 소설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적절한 영적 교훈을 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왜 주님은 하필이면 이 일곱 교회를 선택하여 영적인 교훈을 주시는가? 이 일곱 교회가 발탁된 이유는 아마도 이 교회들이 다른 모든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단점들을 고루 대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일곱 교회를 대표로 하여 그 당시의 모든 교회를 상대하고 게신 것이다. 하지만 이 일곱 교회를 상대한 영적인 교훈은 그 당시의 교회들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니다. 이 영적인 가르침은 역시 전세대의 모든 교회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여기의 일곱 교회는 이후의 온 세계 교회의 대표적인 성격을 지닌다. 예수의 계시가 사도 요한을 통하여 교회에게 전달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질 교회의 운명에 관한 엄청난 사건을 예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교회의 어떤 형편에 관심이 주어지는가?
3) 환난에 동참
요한 계시록의 주제 중의 하나는 핍박을 받는 교회, 그러나 이기는 교회이다. 계시록을 쓰고 있는 요한 자신도 핍박을 받고 있다. "나 요한은 너희의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다" (1:9). 이것은 도미치안 (Domitian 81-96) 황제 때에 일어난 기독교 박해의 한 결과인 것 같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네로 (Nero 54-68) 시대에 한번 크게 일어났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방화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들은 짐승의 털을 꿰매어 입고 개들에게 찢김으로써 죽임을 당하는 중에도 조롱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불태움을 당했다. 다른 이들은 날이 저물자마자 밤을 밝히는데 사용되었다. 네로는 자기의 정원들을 이 구경거리를 위해 허락하였다" (C.Tacitus, Annales XV 44). 그런데 이에 못지 않은 박해가 도미치안 황제 때에 다시 있었다. 사도 요한은 이 박해시에 밧모 섬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그런데 요한의 편지를 받고 있는 교회들도 역시 핍박을 받고 있다. 서머나 교회의 "환난과 궁핍"을 주님께서 아셨고, 또 이후에 어떤 고난이 있을 것을 알려 주셨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 몇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라" (2:9-10). 버가모 교회에서는 주님의 충성된 종인 안디바가 죽임을 당하였다 (2:13). 이외에도 요한계시록의 전반에 걸쳐 박해의 모습이 언급된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을 본다 (6:9). 수많은 성도들과 선지자들이 피를 흘렸다 (16:6). 큰 음녀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였다 (17:6).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 당하였다 (20:4).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이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이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구석구석에 증거되고 있다. 우리는 이 승리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II. 흰옷을 입은 자들 (4-7장)
1. 하늘의 보좌 (4-5장)
계시록 4장은 1장 9절이하에 이어지는 큰 단락이다. 이 두 단락에서 같은 단어들이 반복되고 있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1장에 나오는 "성령에 감동" (1:10), "큰 나팔소리" (1:10)가 4장에서 다시 반복된다. "큰 나팔소리" (4:1), "성령에 감동" (4:2). 사도 요한은 1장에서는 성령에 감동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는데, 4장에서는 성령에 감동하여 하늘 세계를 본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4:1). 이제 요한이 본 하늘 세계는 두 방식으로 설명된다. 하늘 세계가 한편으로는 성부 하나님 (4:2-11)을 중심으로 설명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 (5:1-7:17)를 중심으로 설명된다.
1) 성부 하나님
먼저 성부 하나님에 관하여 언급된다 (4:2-11). 여기에 하늘이 구성된 모습이 묘사된다. 하나님의 보좌 (4:2)를 중심으로 4생물 (4:6)과 24장로 (4:4)가 둘러있다. 4생물은 아마도 천사들의 대표 같은데 이들은 겔 1:4이하와 겔 10:20에 언급된 4생물과 동일하다. 이들이 사자, 소, 사람, 독수리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힘과 섬김과 지혜와 빠름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이들은 사 6:3에서와 같이 삼거룩송을 부른다. 24장로는 구속받은 만민을 상징하거나, 구속받은 성도들의 대표인 것 같다. 이들 앞에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선택받은 14만 4천이 선다 (14:3). 그리고 이 모든 외곽에 수가 만만이요, 천천인 많은 천사들이 둘러 서있다 (5:11). 이 순서는 후에 몇 차례 다시 진술된다 (5:6,8,11,14; 7:11은 다름!). 또한 하나님의 보좌를 무지개가 둘렀고 (4:3), 보좌 앞에는 일곱 등불 켠 것 (4:5)과 수정 같은 유리바다가 있다 (4:6).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보면 구약시대의 성소의 구조와 유사하다.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고 (출 26:31-33), 이를 두 그룹이 싸고 (출 25:20), 삼색실 (청 靑, 자 紫, 홍 紅)로 된 성막이 있으며 (출 26:1,31), 성소에는 일곱촛대 (출 25:31, 26:35)와 떡상 (출 25:23,26:31) 이 있고, 성소의 마당에는 물두멍 (바다)가 있다 (출 30:18) [솔로몬의 성전에 대하여는 왕상 6장이하와 대하 2장이하를 참조]. 이 하늘의 모습은 우주의 중심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준다. 사도 요한에 의하면, 우주는 지구를 중심하지도 않고, 태양을 중심하지도 않는다. 바로 하나님이 중심이시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우주가 구성된다. 하나님이 온 우주를 통치하신다! 모든 것이 보좌에 앉으신 주님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는다.
2) 예수 그리스도
이어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언급된다 (5:1-7:17). 예수 그리스도이신 어린양이 보좌와 네 생물 및 장로들 사이에 계신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들려있다.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해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겨있다. 그러나 이 인봉을 떼고, 책을 펼 자가 없다. 하나님의 뜻을 알 길이 없다. 이에 사도 요한은 큰 울음을 터뜨린다. 장로 중의 하나가 말한다. "울지 말라,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다" (5:5). 이분이 바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서 일곱인으로 봉해진 책을 취하신다. 이때 어린양을 위하여 4생물과 24장로들이 새 노래로 노래하고 (5:9-10), 이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노래하고 (5:12), 만물이 노래한다 (5:13). 이 노래들은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승천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의한 우주를 다스릴 권세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명백히 언급한다. 하나님은 어린양을 통하여 우주를 다스리신다.
2. 일곱 인의 개봉 (6-7장)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일곱 인이 차례대로 떼어진다 (6:1-8:2). 처음 네 개의 인을 뗄 때에는 어느 정도 규칙을 따라서 사건이 벌어진다. 4생물 중의 하나가 "오라"고 말하고, 이 말에 따라 각각 흰 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과 그 탄 자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분명히 슥 1:7-11, 6:1-8의 내용을 새로운 방면으로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들은 모든 시대의 교회에 영향을 끼치는 핍박과 시련을 상징한다. 전시대에 걸쳐 행해질 교회에 대한 핍박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있을 성도들에 대한 핍박의 요약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항상 핍박을 받아왔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단순한 심판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다양한 핍박을 의미한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성도들은 핍박을 당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서 다섯 번째 인을 뗐을 때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 (6:9)로 인하여 죽임을 받은 자들인데 제단아래서 큰 소리로 탄원한다. 이들은 땅에 거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 어느 때까지 연기되는지 탄원한다. 이때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마찬가지로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잠시 쉬라고 한다. 이들에게 "흰옷"이 주어진다.
1) 첫째 인
처음 나타난 것은 흰말과 그 탄 자이다 (6:1-2). 이 사람은 일견하기에 계 19:11이하의 백마를 타신 그리스도와 동일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가리키기보다는 그리스도를 흉내내는 미혹자를 가리킨다. 후의 다른 세 말 탄자는 모두 불행가져오는 자들이므로 이 첫 번째도 역시 같은 이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말탄 자는 계 19:11이하에 나오는 그리스도와 크게 다르다. 계 19:11이하에 보면 백마를 탄 그리스도는 많은 면류관을 쓰시고,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온다. 하지만 여기의 흰말을 탄 자는 단지 한 면류관을 가지며, 활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도 더욱 결정적인 차이는 그리스도는 분명하게 "충성과 진실" (19:11),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 (19:16) 라는 이름을 가지시지만, 여기의 흰말을 탄자는 이름이 없다. 그는 이름을 감춘다. 그는 그리스도를 흉내내는 미혹자일 뿐이다. 그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흰말을 탐으로써 성도들을 미혹한다. 성도들이 이 순결로 가장한 미혹자에게 사기를 당한다. 사탄은 "온 천하를 꾀는 자"임을 주의하라 (11:9).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 (고후 11:14). 그는 면류관을 씀으로써 권세잡은 자로 등장하며, 성도들은 이 위엄에 의하여 미혹을 당한다. 그는 활을 가지고 능력을 행하여 성도들을 미혹한다. 그는 승리의 권세를 가진 듯이 보인다.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한다. 그는 실제로 몇번이나 성도들과 싸워서 이긴다 (11:7, 13:7). 하지만 진정으로 이기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5:5). 주의하라, 그리스도보다 미혹자가 먼저 온다! (마 24:5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는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마태 24: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이것은 성도들에 대한 종교적인 핍박이다.
2) 둘째 인
두 번째로 나타난 것은 붉은 말과 그 탄 자이다 (6:3-4).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이것은 국가 간의 단순한 전쟁을 의미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해지는 종교적인 박해 즉 싸움보다는 죽임을 당하고 희생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들에 대한 정치적인 핍박이다. 정치에 의하여 성도들이 받는 핍박을 의미한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 평안히 존재하도록 두지를 않는다. 어둠은 빛을 미워한다 (요 3:20). 세상의 정치는 성도들을 미워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해치도록 자극한다. 이것은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는 모든 시대의 정치가 추구해온 정책이다. 성도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이들은 "큰 칼"을 받았다. 이때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인들은 순수한 의미에서 순교자이다.
3) 셋째 인
세 번째로 등장하는 것은 검은 말과 그 탄 자이다 (6:5-6). 그는 손에 저울을 가졌다. 식량이 대단히 비싼 값에 매매된다.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이다. 이것은 기근과 흉년 때문에 생긴 식량의 부족상태를 가리킨다고 할 수가 없다. 식량이 넉넉하더라도 이러한 불건전한 매매는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13:17 참조). 단지 어떤 조건이 문제시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물건을 사는데 큰 곤혹을 얻게 된다. 경제생활에 곤경이 온다. 이것은 경제적인 핍박을 의미한다. "성도들은 그들이 가진 바 신념에 충실하기를 고집하기 때문에 직장이나 사업, 또는 전문분야에서 쫓겨나는 사례가 얼마나 흔했던가?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있어 주일에 일하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더 낮은 임금을 주는 다른 직장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부양해야 할 가정이 있다. 그 가정에 사치나 행락이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Hendriksen). 이들도 넓은 의미에서 순교자이다. 모든 성도들이 실제로 죽임의 순교를 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외의 순교적인 희생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경제적인 핍박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4) 넷째 인
네 번째로 등장하는 것은 청황색 말과 그 탄 자이다 (6:7-8). 그의 이름은 사망이며, 그 뒤에는 음부가 따른다. 그는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을 사용한다 (겔 14:21의 내용과 같음).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한 가지 때문에 받게될 고난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땅에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다. 전쟁, 기근, 전염병, 수해 (獸害)가 올 때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나쁜 대접을 받는다. 모든 시대의 성도들은 재해를 만나게 될 때 세상사람들보다 훨씬 악하게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 성도들이 이 같은 핍박을 받게 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6:9-11)?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예수에 대하여 "증거" 하기 때문이다 (6:9). 핍박받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에 대한 증거 때문이다. 이것은 사도 요한 자신의 경우에도 그렇고 (1:9), 여기 제단 밑에서 탄원하는 영혼들에게도 그렇고 (6:9), 이후에 천년동안 왕 노릇할 성도들에게도 그렇다 (20:4). 만일에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도 않고,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지도 않는다면 이러한 핍박은 있을 리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에 대한 증거를 하는 것 그 자체가 세상에서 구별된 자들임을 나타낸다. 하나님께 속하고 세상에 속하지 않았음을 보인다. 여기에 섞임이 없으며, 타협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가 어둠을 사랑하는 땅에 속한 사람들에게 도전이 된 것이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그들의 본성을 찌른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그리스도인들의 증거로 인하여 세상은 흔들리고, 세상은 이 증거를 견디지 못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에게 핍박을 가한다. 영적 전쟁이 일어난다. 성도들이 당하는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핍박은 이후에 더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이 핍박의 영적인 이유도 설명될 것이다 (12-13장).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핍박에 대하여 침묵하시는가? 아니다. 아직 여섯째 인이 남아 있다 (6:12-17). 여섯째 인을 뗐을 때에 땅에 대한 심판이 실행된다. 일월성진과 지구에 변동이 있고,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종과 자주자가 숨는다 (19:18 비교).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이 상징은 한 가지의 교훈, 즉 교회를 핍박하던 세상에 대해 쏟아 붓는 최종적이고 완전한 하나님의 진노는 실로 두렵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Hendriksen). 이 심판은 일곱 나팔에서 더욱 자세하게 묘사된다.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백성은 보호되어진다 (7:1-8).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심판은 보류된다. "하나님의 종들"은 일반적으로 신구약의 모든 성도를 가리킨다 (1:1, 2:20, 10:7, 11:18, 19:2,5, 22:3,6). 신구약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들이다. 그런데 특히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인맞은 자들의 수는 14만 4천이다. 이것은 완전수로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원받은 자들의 총체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처음 익은 열매" (14:4)라고 불린다.
우리는 교회의 이 모든 핍박보다 먼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의 사역이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에 대한 묘사가 교회의 환난과 시련에 대한 말씀보다 앞서 나온다. 만물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어린양의 다스림 가운데 있기 때문에 성도들은 환난 중에서도 전혀 두려워할 것이 없다.
3. 흰옷을 입은 자들 (7:9-17)
사도는 갑자기 구원받은 구약성도의 총체 외에 큰 환난에서 나오게 될 성도들의 전체를 본다. 이들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에만 제한되지 않고,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중에서" 뺀 자들이다.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이것은 전 인류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것은 본래 복음의 대상이었는데 (14:6),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가운데서 사람을 구별없이 구원을 얻을 기회를 주셨다. 철저하게 무차별적인 구원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11:9), 사탄의 하수인인 바다 짐승의 다스림을 즐거워하기 때문에 (13:7) 구원에는 조건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 조건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는 것이다 (7:14).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예수의 피로 산 자들 (5:9) 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다. 이들은 "흰옷"을 받아 (6:11), 입고 있다 (7:9). 이들은 예수의 피로 씻어 의롭게 된 자들이다. 철저하게 선택적인 구원이다. 이들은 구원을 받은 후에 "큰 환난"(7:14)을 겪은 자들이다. 이 큰 환난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 일어나는 교회에 대한 모든 공격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 "이것은 환경에 따라 일어나는 그러한 종류의 환난이 아니라, 사탄의 대행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의로 가해지는 공격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 환난을 피하지 않고 뚫고 나간다. 이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다 (7:14). 이들은 환난을 이긴 자들이다! 이들에게는 이제 다음과 같은 은혜들이 주어진다. 그들은 하나님 보좌 앞과 그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신다. 그들은 다시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뜨거운 상치도 않는다. 어린양이 목자가 되시어 그들을 생명 샘으로 인도하며, 하나님께서는 눈물을 씻기실 것이다 (21:3 이하 참조). 이들은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7:9)이다. 셀 수 없는 큰 무리라는 것은 유명한 성도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사람으로서는 이름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모든 성도가 여기에 참여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신다! 이들은 승리와 기쁨을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어린양 앞에서, 구원이 인간의 공로로는 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찬송을, 모든 천사들이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아멘"을 말할 수 밖에 없는 찬송을 부른다 (7:10):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III. 성도들의 인내 (8-14장)
1. 성도들의 기도 (8:1-5)
그러면 성도들에 대한 이같은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환난의 배경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영적인 배경이 있다. 요한은 이제 이 영적 배경에로 우리의 관심을 돌린다. 하지만 그는 우선 환난받는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서술한다. 환난받는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억은 무엇보다도 기도응답으로 나타난다. 환난 중의 성도들은 기도를 한다. 하늘의 장면에서 4생물과 24장로들이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는데,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고 하였다 (5:8). 환난 중의 성도들이 많이 기도한다. 그래서 성도들의 기도는 많은 향이라고 표현된다. 환난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이에 못지 않게 기도가 많다. 환난이 크면 클수록, 성도들은 더욱 많이 기도한다. 금향로에 담긴 향연이 성도들이 기도와 함께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다 (8:4).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즐겨 받으신다. 기도는 향이기 때문이다! 향은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기뻐하심을 의미한다. 기도가 향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만큼 즐겨 받으신다는 것이다. 이제 향로에는 단 위의 불이 담겨지고 땅에 쏟아진다. 기도와 향을 담았던 금화로가 이제는 진노의 불을 담는데 사용된다 (박윤선, 191).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셨고, 땅에 내리는 심판은 그 기도의 응답이다. 기도할 수 있다는 것,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있다는 것, 이것은 환난 중의 성도에게 이미 큰 위로가 된다. 이 사실은 성도들이 환난 중에서 얼마나 많이 기도해야 할 것인가를 알려준다.
2. 일곱 나팔 (8:6-11:18)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에 대한 심한 심판이 진행된다. 처음 네 가지의 나팔재앙은 지상적이며 물리적인 성격을 지녔다. 그리고 나중 세 가지는 영적 능력으로 말미암는 성격을 지녔다.
잠시 여기에서 계시록의 구조에 대하여 살펴보자. 계시록을 이해하는데는 "4"라는 숫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1. 하늘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4생물, 24장로, 14만4천 등이 둘러싼다. 2. 계시록의 중요한 사건들로 교회, 인, 나팔, 대접 (교인나대)가 나오는데, 이것들을 장별로 구분하면, 2장-3장에서 일곱 교회들에 대한 이야기, 4장 (또는 5장)부터 인에 대한 이야기, 8장부터 나팔에 대한 이야기, 16장부터 대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며, 20장부터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3. 그런데 이처럼 일곱씩 짝을 이루고 나오는 사건들 가운데, 처음 4개와 나중 3개는 다시 그룹을 이룬다. 즉, 일곱 인에서는 처음 4 인이 말과 말탄자들이 짝을 이루어 나중 3 인과 구별되고, 일곱 나팔에서는 처음 4 나팔이 땅 (地), 바다 (海), 강 (江), 해 (日)에 대한 심판으로 짝을 이루고, 나중 3 나팔은 세가지 화로서 짝을 이루어 구분되며, 일곱 대접에서는 처음 4 대접이 위의 처음 4 나팔과 마찬가지로 땅, 바다, 강, 해에 대한 심판으로 짝을 이루고, 나중 4 대접은 영적인 사건을 다룸으로써 구별된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일곱 교회에 대한 구분인데, 계시록의 장 (章)을 나눈 분이 처음 4 교회는 2장에 두고, 나중 3 교회는 3장에 두어 구분했다는 점이다.
이 재앙들의 모티브는 출애굽시의 열 재앙과 비슷하다. 우박과 불 (8:7, 출 9:24), 물이 피가 됨 (8:8, 출 7:19), 어두워짐 (8:12, 출 10:21), 황충 (9:3, 출 10:12). 이 재앙의 중요한 목적은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다. 그래서 출애굽의 재앙이 단지 애굽인들에게만 내렸듯이, 여기의 재앙도 단지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9:4). 그런데 이러한 재앙의 궁극적인 목적 중의 또 하나는 사람들이 배신적 (背神的)인 행동을 그치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다 (9:20-21). 과연 그들은 이러한 심판 앞에서 회개하고 돌아올 것인가?
1) 처음 네 나팔 (8:6-13)
처음 네 가지의 나팔은 땅, 바다, 강, 일월성진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진다. 땅이나 바다 뿐 아니라, 전 세대를 통하여 강과 샘들도 이 행악자들을 대적할 것이다. 그러나 나중 세 가지의 나팔은 더욱 중한 심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의 큰 소리로 도입된다.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소리를 인함이로다" (8:13)고 말한다. 음산한 분위기가 가일층 강조된다.
2) 나중 세 나팔: 세 가지 화 (9:1-11:18)
(1) 첫째 화
첫째 화는 다섯번째 나팔과 함께 시작된다 (9:1-12). 이때 하늘에서 떨어진 별 하나가 보인다. 이것은 틀림없이 패배한 사탄의 모습을 가리킨다. 눅 10:18에서 주님은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말씀하셨다. 그에게 무저갱의 열쇠가 주어졌다. "주어졌다"라고 함으로써 사탄이 활동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한도내에서 할 뿐임을 나타낸다 (박윤선). 본래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19). 하나님께서 사탄을 이용하시어 사람들을 심판하신다. 하지만 사탄은 이 열쇠를 빼앗기고, 이 열쇠는 하나님의 천사에게 주어지게 될 것이다. 결국에 사탄은 자신이 사용한 무저갱에 던져지고 갇힘을 받고 만다는 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20:1-3). 이 무저갱으로부터 연기가 올라와 해와 공기를 어둡게 한다. 이것은 악한 사상이 세상에 퍼트려져 진리가 흐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박윤선). 또한 이 연기가운데로부터 무시무시한 형상을 띈 황충들이 나온다. 이것들은 악한 사상을 가지고 모든 비성도 (非聖徒)들의 영혼을 멸망케 하는 군대인 동시에 겸하여 거짓 선지의 무리를 상징한다. 이것들은 대단한 세력으로 사람을 괴롭힌다. 인간의 영혼에 악한 사상을 주입시켜 병들게 만든다. 그리하여 멸망으로 이끌고 간다. 왜냐하면 그들의 임금의 이름이 히브리어로 아바돈, 헬라어로 아볼루온이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이 장면의 끝에서 갑자기 히브리어와 헬라어 단어를 하나씩 언급한다. 이것은 언어에 의한 상징이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언어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계시록을 읽는 성도들에게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배우라고 말하려는 것인가? 요한이 자신의 히브리어와 헬라어 실력을 과시하려는 것인가? 사도 요한은 독자의 무식이나 자신의 유식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러한 언어적 상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언어적 감각으로 아주 분명하게 의미를 전달하려는 것이다. 히브리어의 아바돈과 헬라어의 아볼루온은 멸망시키는 자라는 뜻이다. 언어적 감각으로 독자들은 황충들의 임금의 성격을 단 한 마디로 대단히 인상적으로 알게 된다. 하지만 황충들의 괴롭힘에는 시간적인 제한이 있다. 단지 다섯달 동안이다 (9:5,10).
(2) 둘째 화
둘째 화는 여섯번째 나팔과 함께 시작한다 (9:13-21). 이때 큰 강 유프라데스에 결박된 네 천사가 놓인다. 이들은 년 (年), 월 (月), 일 (日), 시 (時)를 의미한다. 이 심판은 전쟁에 의한 것을 말한다. 어떤 특정한 시대의 전쟁이 아니라, 온 시대를 걸쳐 일어나는 전쟁이다. 그러나 전쟁의 시간도 모두 하나님의 권한에 놓여져 있다. 하나님께서 온 시대에 걸쳐 일어나는 전쟁들의 년과 월과 일과 시를 정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육적인, 영적인 모든 분야에 재앙을 내리심으로써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들을 끊임없이 징벌하신다. 그런데 이처럼 성도를 핍박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 제한적인 것은 무엇을 위함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이 회개하지 않는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한 이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20). 이들은 계속해서 십계명의 두개의 기본 사상을 범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범죄에서 떠나지 않는다 (20).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우상을 섬긴다. "금, 은, 동, 목, 석"으로 만들어진 우상에게 절한다. 이들은 우상을 만드는 재료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함으로써 사람에 대한 범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21). 성도를 핍받하던 세상은 이제 회개하지 않는 세상이 된다. 11장에서 바로 이 회개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더욱 자세한 묘사가 나온다. 세상이 얼마나 완고한지를 보인다.
A. 환난의 원인 (10:1-11)
사도 요한은 회개하지 않는 세상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기 전에 성도가 왜 핍박을 받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게 된다. 성도의 고난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사도 요한자신의 경우를 들어 성도의 고난을 설명한다. 요한은 거대한 천사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책을 가져다가 먹는다. 이것은 입에는 꿀 같이 달지만 (겔 2:9이하, 3:1참조), 배에는 쓰다. 성도의 고난은 복음때문에 오는 고난이다. 복음은 달고 영광스럽다. 이것은 시편기자가 노래한 것과 같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맛보다 더 하니이다" (시 119:103). 하지만 그 복음을 받은 후에는 반드시 쓰린 고난이 온다. 성도가 고난을 받는 것은 복음을 먹은 자이기 때문이다. 먹은 후에는 쓴 고난이 따른다. 실제로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 섬에 유배를 당하였다 (1:9). 하지만 성도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다시 전도하게 된다. 요한은 이 책을 먹은 후에 계속해서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예언할 사명을 받는다.
B. 외식적인 기독교인 (11:1-2)
하지만 복음에 의한 고난은 외식적인 기독교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 사실을 성전 측량이 잘 보여준다. 사도 요한에게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지만, "성전 밖의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한다 (11:2). 전자는 참된 교회, 즉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거하고 있는 성도들을 말한다 (Hendriksen). 복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산 속에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에 의하여 측량되어진다. 척량은 소유의 회복이나 소유의 확보를 의미한다 (박윤선). 후자는 교회와 관계하고 있으나 참된 성도가 아닌 자들을 가리킨다. 이름 뿐인 그리스도인들이다. 하나님 앞에 보이러 오는 자들이다. 마당만 밟을 뿐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빌면,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함과 같다 (사 1:12). 이들은 세상적인 것들을 환영한다. 복음을 따라 살려고 하지도 않으며, 더군다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지도 않는다. 복음대로 살려하기에 고민하지도 않으며,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을 각오도 없다. 이들은 오히려 세상과 짝하여 그 안에서 살고 세상의 친구들과 향락을 즐긴다. 세상적인 사고방식에 자극을 받고 감동한다. 세상적인 생활방식에 매력을 느끼며 파묻힌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산 밖에 있다. 하나님의 자로 측량되지 않는다. 이들은 세상사람들에 의하여 마구 침범될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외식성도들에게 다양한 즐거움을 제공할 것이다. 세상은 모든 최신 문화를 이용하여 성도를 미혹한다. 현대의 문화를 마음껏 즐기라고 말한다. 현대인의 삶에서 뒤쳐지지 말라고 속삭인다. 그리스도인은 현대의 문화를 만끽하면 안되느냐고 질문을 던진다. 세상이 수다한 방법으로 이들을 유혹할 것이다. 사상으로, 향락으로, 물질로, 음란으로 유혹할 것이다. 그래서 참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조금 덜 현대적인 삶을 살 필요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산 속에 있음 - 하나님의 소유임 - 에도 불구하고 고난에 놓이게 될 것이다. 거짓된 성도들이 세상의 유혹을 받을 때에, 참된 성도의 모임은 고난의 현장에 놓이게 될 것이다. 성전 밖 마당과 함께 "거룩한 성"이 이방인에게 짓밟힌다. 하지만 여기에도 시간적인 제한이 있다. 이것은 단지 마흔 두 달 동안 될 뿐이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참된 성도들은 고난에서 허덕이고만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이 기간동안도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말한다.
C. 두 증인 (11:3-14)
이 기간동안의 하나님의 교회는 두 증인으로 비유된다. 증인 이수 (二數)는 증거상 신실을 성립시키는데 요구되는 수효이다 (신 19:15). 이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 (11:4)라고 소개되는데 이것은 슥 4:11-14의 내용을 이용하는 것 같다.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를 연상시킨다. 하늘을 닫아 비가 오지 못하게 하는 것 (11:6)은 엘리야를 (왕상 17:1), 물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는 것 (11:6)은 모세를 연상시킨다 (출 7:20).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 17:3 par.). 그러나 이것은 더 나아가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율법과 선지자가 완성되었으므로, 이제 신약교회가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영적 권세를 가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 (박윤선). 교회가 영적 권세를 행사하는 동안 세상을 교회를 핍박한다. 하지만 교회는 핍박을 받을 때마다 더욱 맹렬하게 반격한다.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한다" (왕하 1:9-12 참조). 성도들이여, 최고의 방어는 공격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핍박당하는 동안 그리스도를 말하라. 복음을 말하여 세상을 흔들었기에 핍박이 온다면, 핍박받는 중에도 복음을 말하여 계속해서 세상을 흔들어라. 그리스도인은 말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침묵하는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아, 불같이 말하라! 여기 두 증인은 1260일 동안 예언을 한다. 거룩한 성에 대한 공격은 달로 (42 달), 두 증인의 예언은 날로 (1260일) 표현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달은 듬성듬성한 성격을, 날은 촘촘한 성격을 나타낸다. 세상의 교회에 대한 물리적인 공격보다 교회의 세상에 대한 영적 반격이 더욱 강하다. 두 증인은 다시 두 선지자로 일컬어지는데,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힌다" (11:10). "이것은 그들이 진정한 선지자들이었던 증표이다. 거짓 예언자는 사람에게 아첨하며 (렘 6:14, 8:11), 사람들의 죄를 바로 말해주지 아니하며, 치료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예언자는 사람들이 듣든지 말든지 죄를 책망한다 (겔 2:7, 딤후 4:2)" (박윤선). 교회의 이러한 찔러댐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 시간이 다되어, 두 증인이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인다" (11:7). 이것은 사실상 13장에 있을 사건을 미리 당겨 설명하는 것이다. 두 증인의 결국을 말하기 위함이다. 두 증인의 시체가 큰 성길에 있게 된다. 이 성은 영적으로 소돔, 애굽,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실제로 이 세상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11:9) 두 증인의 시체를 구경하며 장사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이처럼 타락하고 (소돔처럼), 성도들을 핍박하고 (애굽처럼),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마저 죽였다. 교회가 핍박을 당할 때에 세상은 즐거워한다. 세상은 기뻐하며 서로 예물을 보낸다 (11:10). 하지만 이 시간은 단지 삼일 반이다. 이 숫자에 주의하라! 이것은 42달과 1260일의 년수인 3년 반을 날로 바꾸어 생각한 것이다. 세상이 주는 핍박의 기간과 이 동안 교회가 증거해야 할 시간은 동일하지만, 그 정도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나며, 핍박 그 자체는 보다 짧은 기간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후에 두 증인은 다시 살아나고, 하늘로 올라가게 된다. 이것은 20:5의 내용이 미리 당기어 설명되는 것이다. 부활과 승천을 구경하는 자들이 (11:11,12) 크게 두려워한다 (11:11). 그때에 큰 지진이 나게 되자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며 심지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11:13).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회개하였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두려워 떨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는 회개하고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다! 그들은 다만 공포에 사로잡힌 것뿐이다. 느브갓네살 왕이 그의 생존시에 자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었다 (단 2:47, 3:28, 4:1이하, 4:34, 4:37). 그러나 이것이 그가 회개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Hendriksen). 세상은 전도를 듣고 회개하는가? 아니다. 세상은 정말로 완악하다. 그 완악의 심각한 정도는 이렇게 설명된다. 그들은 두 증인의 말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다.
(3) 셋째 화
이제 일곱 번째 나팔이 나온다 (11:15). 이것은 세 번째 화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세 번째 화가 무엇인지 설명되지 않는다. 이것은 비로소 일곱 대접의 재앙 (16장이하)에서 자세하게 묘사된다. 이것은 마지막 재앙이다 (15:1). 이 마지막 재앙인 일곱 대접이 실현되기 전에 먼저 하늘의 여러가지 장면들이 설명된다. 첫째로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난다" (11:15).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왕노릇할 것을 노래한다. 다음에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린다" (11:19). 셋째로는 하늘에 몇 가지 이적이 보인다 (12:1, 12:3, 15:1). 그 사이에 "하늘에 전쟁이 있다" (12:7).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린다" (15:5). 여기에서 성도들에 대한 환난의 영적 배경이 설명된다. 환난은 외적인 것일 뿐 아니라 내적 원인이 있다. 환난의 영적 원인은 사탄이다. 사탄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는가?
3. 성도의 인내 (12:1-15:5)
1) 여자와 용 (12장)
하늘의 이적에 한 여자가 등장한다. 이 "여자"는 구약과 신약을 통털은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한다. 우선 교회의 구약적인 모습이 묘사된다. 해와 달과 12별 (12:1)은 이스라엘의 구성인인데 (창 37:9), 여기에서는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교회를 나타낸다. 구약교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오신다. "여자가 아들을 낳는다" (12:5).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 하였다.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12:4). 그러나 이 아들은 부활 승천하신다. "이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12:5).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구약교회는 신약교회가 된다. 하지만 사탄은 이 신약교회를 그냥 두지 않는다.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12:13). 사탄이 신약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사탄은 "하늘의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신약교회는 세상에 머물되 하나님의 보호가운데 있다. "광야로 도망하매...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에 있더라"(12:6, 12:14 참조). 용 (사탄)은 이 여자를 해치기 위하여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한다 (12:15). 사탄의 물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이 세상주의의 생활인데, 곧, 염려, 탐심, 기타 여러가지 육체적 생활을 가리킨다" (박윤선). 사탄은 거짓의 물결, 혼란, 종교의 이즘 (ism), 철학적 허구, 정치적 이상향, 그럴듯한 과학적 요설 등등으로 교회를 삼키려고 애를 쓴다 (Hendriksen). 하나님의 교회는 이런 사탄의 계략 앞에서 "흘러 떠내려갈까" 주의해야 한다 (히 2:1). 그런데 사탄이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할 수 없게 되자 분노에 사로잡히여, 이제는 각 성도들을 망가뜨리려 한다 (12:17). 이들은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다 (12:17). 그런데 교회와 성도들이 핍박을 받는 시간이 "한 때 두 때 반 때"로 정해진다. 이것은 구약을 통하여 엘리야 시대의 가뭄으로 인한 고통의 시간과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왕상 17장, 약 5:17). 이 기간 동안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에 의하여 심한 핍박을 받았다. 단 7:25, 12:7에 의하면, 이것은 적그리스도의 시간이다.
2) 용의 동역자들 (13장)
그런데 용 (사탄)은 여자의 남은 자손과 어떤 방법으로 싸우는가? 그는 세 가지 방법을 고안한다. 마지막 방법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큰 음녀 바벨론이다 (14:8; 17장-18장). 여기에서는 단지 처음 두 가지 방법을 고찰한다. 사탄은 먼저 두 짐승을 고용한다. 하나는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이고, 다른 땅에서 나오는 짐승이다. 바다와 땅의 짐승들을 고용하기 위하여 사탄 자신은 바다와 땅의 경계인 모래 위에 선다 (12:17).
(1) 첫째 짐승
첫째 짐승 (이것은 단 7장의 4 짐승의 합성체인 듯하다)은 지배하는 성격을 지닌다. 이것은 이 짐승의 모습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짐승의 모습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다" (13:2). 이 짐승은 정치를 의미한다. 사탄은 이 짐승에게 네 다섯 가지의 권세를 허락한다. 첫째로, 보좌와 함께 지배자의 권세를 준다 (13:2-3). 둘째로, 경배받을 권세를 준다 (13:4). 셋째로, 하나님을 훼방할 권세를 받는다 (13:5-6). 넷째로,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는 권세를 받는다 (13:7) [사실상 헬라어로는 여기에 권세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고 다만 비슷한 어구가 있을 뿐이다]. 다섯째로,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받는다 (13:7). 이 짐승은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적그리스도적인 정치를 가리킨다. 이 적그리스도적인 정치는 모든 악랄한 방법을 동원하여 지배권을 장악하고 자기를 경배의 대상으로 섬기게 하며 하나님을 멸시하고 성도들을 핍박한다. 하지만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세상사람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며 (13:8),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하며 환영할 것이다 (13:4) (이것은 "누가 하나님과 같으뇨" - 미가엘 천사의 이름의 뜻과 같다는데 주의할 것).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 짐승의 활동기간은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단지 "마흔 두 달" 활동할 수 있다. 같은 기간이 세 방면으로 이해되고 있음에 주의하라. 교회의 활동은 1260일로서 긴 시간으로 (12:6), 핍박자의 활동은 마흔 두 달로 짧은 기간으로 (13:5), 핍박 그 자체는 세 때 반으로 가장 짧은 기간으로 (12:14) 이해된다. 그리고 또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 짐승의 결국이 결정되어있다는 것이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며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반드시 칼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성도들이여 이 포악한 짐승의 정해진 패망에 대한 안목을 가지라. 이 영적 통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성도들이 인내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사도 요한의 저 분명한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13:10):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2) 둘째 짐승
그런데 사탄의 방법은 이처럼 포학한 정치를 이용하여 성도들과 싸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제 바다의 짐승에 이어 땅의 짐승이 등장한다 (13:11).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과 비교할때 대단히 부드러운 모습을 띈다. 그는 "새끼양 같이 두 뿔을 가지고" 있다(11). 하지만 이것은 속임수이다. 왜냐하면 그의 겉모습만 부드럽지 그의 말은 사탄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사탄은 온 세상을 꾀는 자이다 (12:9). 둘째 짐승은 "용처럼 말한다" (11). 이 짐승은 종교를 의미한다. 이 짐승은 사탄이 고안해낸 미혹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이 짐승은 사람들에게 네 다섯 가지 종교적인 일을 강요한다. 첫째로, 둘째 짐승은 사람들에게 처음 짐승을 경배하도록 강요한다 (12).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을 위한 거짓 선지자이다 (16:13, 19:20, 20:10). 말하자면 사탄의 사주를 받는 정치와 종교는 함께 길을 가는 것이다. 많은 경우 종교는 정치지도자를 우상화하는데 조력한다. 둘째로, 둘째 짐승은 큰 이적을 행한다 (13). 심지어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는 이적까지 행한다. 이러한 기가 막힌 이적행사를 통하여 미혹을 베푼다. 셋째로, 둘째 짐승은 처음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게 한다 (14). 그리고 우상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을 몇 명이 되든지 상관없이 죽인다. 네째로, 둘째 짐승은 모든 자에게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한다. 마치 하나님의 성도들의 이마에 인을 치듯이 (7:3), 이 짐승은 사탄에게 속한 자들의 이마와 오른손에 인을 친다. 사탄의 종교가 철저하게 사람들을 지배한다. 짐승이 모든 사람들에게 표를 받게 함으로써 도모하는 것은 경제의 통제이다.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13:17). 사탄의 사주를 받는 짐승이 결국 손을 대는 것은 경제이다. 왜냐하면 경제는 생활에 가장 민감하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사탄의 종교를 거부하는 하나님의 성도들은 생업에 막대한 지장을 받게 된다. 성도들은 신앙의 원리에 충성하는 동안 사거나 파는 행위까지도 하지 못하도록 억압을 받게 된다. 이러한 억압에 대하여는 교회의 역사 가운데서도, 교회의 현실 가운데서도 많은 예를 찾아볼 수가 있다. 이러한 적대행위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끊이지 않을 것이며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 올수록 더욱 증가할 것이다. 사탄은 경제의 근본을 장악하여 성결하게 사는 성도들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이 표의 내용이 밝혀져 있다. 이 표는 "짐승의 이름"이거나 또는 "짐승의 이름의 수"이다. 그런데 이 수는 다시 "사람의 수"라고 설명된다. 인간에게 속한 수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떠난 인간의 수이다. 여기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인간의 배신성 (背神性)이다. 인간의 절대성, 독립성, 만능성, 신성이 강조된다. 마치 바벨탑 사건에서 보이듯이, 사람의 이름이 강조된다 ("우리 이름을 내자", 창 11:4). 짐승은 성도들과 싸우기 위하여 배신적 (背神的)인 모든 인간을 활용한다. 이들로 하여금 경제와 시장을 점령하게 한다. 배신성 (背神性)이 그들이 한편이라는 명백한 표식이다. 하지만 총명있는 자는 그들의 배신 (背神)행위의 결국을 분명하게 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수의 의미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13:18). 그 수는 철저히 하나님의 통치를 버리고, 철저히 인간의 통치를 따르겠다는 것을 나타내는 수이다. 하나님이 우주의 중심에 계시고 우주를 다스린다는 것과 그 대권을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다는 것 (4장)을 거절하는 수이다. 그 수는 666이다. 이것은 불완전의 수이며 실패의 수이다. 인간이 그토록 사랑하는 배신성 (背神性)이란 불완전이며 실패이다. 이것을 사탄에게 속한 자들은 알지 못한다. 그는 인간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단지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자만이 알 수 있다 (13:18). 그러므로 여기에 666이란 숫자를 언급함으로써 말하려고 하는 것은 실제로 사람들이 666이라는 숫자를 이마와 오른손에 표식으로 낙인찍히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6"을 말함으로써 사탄에게 속한 자들은 인간의 능력을 자랑하여 하나님에 대해 거부적이라는 것과, 동시에 "666"을 말함으로써 인간의 배신성이 철저하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수가 기왕에 불완전과 실패를 나타낸다면, 자신들의 능력을 완전한 것처럼 자랑하는 사탄의 자녀들이 결국은 실패하되,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또 실패할 것임이 여기에 암시되어 있다. "이것은 사람의 수인데 짐승은 사람을 번영하게 하고 자랑스럽게 만들기는 하나, 그러나 결국은 실패하고 만다!" (Hendriksen). 이 짐승과 짐승의 우상과 그 이름의 표를 가진 자들의 실패는 그들이 그처럼 거역하는 하나님께서 내리실 것이기에 피할 수가 없다. 요한은 하나님에 의한 짐승의 실패를 드디어 확인하게 된다. 요한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반대로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자들, "사람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들", 14만 4천명과 함께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선 것을 보고 나서 (14:1-5), 짐승의 실패를 확인하게 된다. 세 천사가 연이어 나타나서 짐승의 실패를 확인시켜준다. 첫째 천사는 온 세상에 영원한 복음 전하는데 하나님의 심판이 그 내용을 이룬다 (14:6-7). 둘째 천사는 사탄의 하수인 중의 하나인 음녀 바벨론의 멸망을 미리 당기어 -- 이것은 17장이하에 자세히 설명됨 -- 선고한다 (14:8). 셋째 천사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의 실패를 선언한다 (14:9-12). 짐승과 그 우상을 경배하고 그 표를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신다. 섞인 것이 없는 진노이다. 순수한 진노이다. 영원한 고난이 쏟아진다. 짐승과 그 우상을 경배하고 그 표를 받은 자들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상을, 배신성 (背神性)으로 가득찬 세상을,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신적 (背神的)이기에 하나님의 성도들을 정치와 경제와 그외의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악랄하게 핍박하는 세상을, 사탄의 사주 하에 있는 세상을 하나님은 그대로 두지 않는다. 하나님은 기필코 보복하신다. 이 하나님에 대한 시각이 필요하다. 이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기" (14:12) 때문에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이여, 환난 많고 고통 많은 이 세상에서 눈을 땅에 두지 말고, 하나님에게로 돌리라. 하나님이 보복하신다. 사탄은 반드시 실패하고 만다. 두 가지의 추수가 마지막 날에 있을 것이다 (14:14-16, 17-20). 최후의 심판날에 하나님의 성도들은 천국에 들일 것이며 (14:14-17), 사탄에게 속한 자들은 천국 밖에서 고통하게 될 것이다 (14:17-20).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성도들은 어린 양의 찬송을 부르게될 것이다 (15:2-4):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주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아니하오리까? 오직 주 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운 일이 나타났으니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성도들이 인내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사도 요한의 저 분명한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느니라".
IV.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15-19장)
1. 일곱 대접 (15:5-16:21)
성도들은 환난 가운데서 인내해야 한다. 성도들을 핍박하는 사탄의 하수인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일곱 나팔 중의 마지막 나팔은 최후의 재앙을 기다리게 한다. 일곱 대접이 등장한다. 이것은 마지막 재앙이다 (15:1). 이 재앙은 하나님의 성전으로부터 나온다 (15:5-6). 이 재앙의 대상은 일곱 나팔 (8:1이하)에서와 같은 순서로 이어진다 (땅, 바다, 강, 해). 첫째 대접은 땅에 쏟아진다 (16:2). 이때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은 독한 헌데로 인하여 시달리게 된다. 둘째 대접은 바다에 쏟아지고 바다의 모든 생물이 죽는다 (16:3). 셋째 대접이 강과 샘에 쏟아지자 피로 변한다 (16:4-7). 이것은 세상사람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16:6) 피를 마시게 하기 위함이다. 넷째 대접은 해에 쏟아지고 사람들이 해의 열기로 태워진다 (16:8-9).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할 뿐이고, 도무지 회개를 하지 않는다 (16:9). 다섯째 대접은 짐승의 보좌에 쏟아진다 (16:10-11). 어둠이 들고 고통이 찾아오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훼방하고 자기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않는다. 여섯째 대접은 큰 강 유프라테스에 부어진다 (16:12-16). 이것은 여섯째 나팔에서 유프라테스가 언급된 것과 비슷하다. 유프라테스 강은 바벨론의 지경이다. 바벨론은 음녀로서 하나님의 성도들을 미혹하는 자이다. 강이 마르게 됨으로써 음녀 바벨론의 세력이 침범할 가능성이 주어진다. 그런데 이 세력을 지원하는 것들이 있다.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개구리 형상을 한 세 더러운 영이 나온다 (16:13). 용, 짐승, 거짓 선지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흉내내는 간교한 미혹이다. 그들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더러운 세 영들이 이적을 행하며 온 천하의 임금을 꾀어 전능하신 하나님과 전쟁을 하려한다. 이들은 하르마게돈에 모인다. 이것은 히브리어로 "므깃도의 산"이란 뜻이다. 구약에 보면 바락과 드보라가 가나안 왕 야빈과 군대장관 시스라를 므깃도에서 이겼다 (삿 5:19). 야빈과 시스라의 군대는 철병거 900승을 가진 강한 병력이었기에 이스라엘이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을 이기게 하시고, 가나안의 군대장관인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셨다 (삿 4:9). 이길 수 없는 듯이 보이는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전쟁에서도 온 세상의 임금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나며 세 더러운 영이 지원하여 엄청난 세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승리는 하나님께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도적같이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16:15). 하르마게돈 전쟁은 최후의 날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 16:14)에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그의 대적을 무찌르시고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전쟁이 될 것이다 (19:11이하, 20:8 곡과 마곡의 전쟁 참조). 이것은 하나님의 전승지에 대한 상징적인 명사이다 (박윤선).
여기에서 다시 계시록의 구조의 세부를 살펴보자. 인과 나팔에서는 여섯 번째 사건과 일곱 번째 사건 사이에 큰 삽입이 있다. 여섯째 인과 일곱째 인 사이에는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인맞은 자들인 십사만사천과 흰옷을 입은 셀 수 없는 무리 (7:1-17)에 대한 기술이 삽입되어 있다. 여섯 번째 나팔과 일곱 번째 나팔 사이에는 힘센 천사의 작은 책 (10:1-11)과 성전측량과 두 증인 (11:1-14)에 대한 기록이 삽입되어있다. 그런데 두 증인의 증거기간인 1260일에 대하여 일곱 번째 나팔에 대한 기술다음에 다시 한번 진술된다 (12장-14장): 여자: 1260일 양육, 핍박: 3때 반, 짐승의 활동: 42달. 하지만 인과 나팔에서와는 달리 대접에 관한 기술에서는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에 아무런 삽입이 없다. 아마도 실제로는 여기에 바벨론에 대한 심판이 삽입되었을성 싶다. 왜냐하면 음녀 바벨론은 일곱나팔에서 멸망되어지는데, 이에 앞서서 바베론의 활동이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벨론의 행위에 대한 서술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먼저 바벨론의 멸망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바벨론이 멸망되기까지의 활동을 자세히 말하게 된다 (17장-18장).
일곱 번째 대접은 공기 가운데 쏟아진다 (16:17-21). 엄청나게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떨어진다. 이때 특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게" 된다 (16:19). 그러면 이 큰 성 바벨론은 무엇인가? 이것은 이미 14:8에서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 (14:8)라고 소개되었다. 바벨론은 모든 나라와 더불어 음행을 하고, 이 결과로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 바벨론의 결국은 무엇인가? 멸망이다. 그러므로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14:8)라고 말하게 된다. 바벨론은 사탄의 세 번째 하수인이다. 바벨론은 바다의 짐승이나 땅의 짐승과 마찬가지로 성도들을 핍박하는 사탄의 협력자이다. 이제 이미 간략하게 소개된 바 있는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사실이 자세히 설명된다. 바벨론 뿐 아니라 그와 음행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놓이게 될 것이다.
2. 음녀 바벨론의 멸망 (17:1-18:24)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의 하나가 말한다. "이리 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17:1). 이것은 이후에 21:9에서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어린양의 아내를 소개하는 장면과 유사하다. 그러나 전자는 음녀이고, 후자는 신부인 것이 큰 차이점이며, 이 둘은 서로 대적자인 것이 특이하다. 더 나아가서 음녀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반면에, 신부는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있다. 음녀는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론이라는 이름을 지닌데 비해, 신부는 새 예루살렘이라고 불린다. 음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대표하지만, 어린양의 신부는 하나님에 의해 구속받은 성도들을 대표한다 (Guthrie). 땅의 임금들도 음녀와 더불어 음행을 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17:2). 음녀는 온 세상을 지배한다. 음녀는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 (17:15)을 의미하는 물위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이 음녀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다 (17:18).
1) 음녀의 모습 (17:1-6)
이 음녀는 "붉은 빛 짐승을 탔다" (17:3). 이 짐승은 13:1의 짐승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이 둘이 다같이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3:1; 17:3).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사탄도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12:3). 이 짐승의 일곱 머리와 열 뿔에 대하는 잠시 후 다시 설명된다 (17:7-12). 이 음녀는 짐승의 도움을 받아 등장한다. 짐승의 붉은 빛은 사치와 호화를 나타낸다. 이 짐승은 그 몸을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모든 이름으로 가득히 채워 장식을 하였다. 이 음녀는 휘황찬란하게 치장을 하였다. 자색 빛과 붉은 옷을 입었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몄다. 그 손에는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였다. 음녀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다른 것을 사랑하게 하는 것을 상징한다. 성도들로 하여금 정결한 신부의 자리를 버리고 더러운 창녀로 만들려는 의미한다. 이것은 영적인 간음이다. 이 음녀의 모습은 특히 두 가지를 상징한다. 하나는 외모에의 즐거움이다. 음녀의 의상과 장식에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들을 사치와 허영으로 유혹하여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도록 이끌어 내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보다 사람의 외모를 더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치장이 아니다. 사치와 허영으로 꾸민 치장이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요일 2:16)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마음에의 즐거움이다. 음녀의 손에 있는 잔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보라. "가증한 물건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다. 이것들은 사람들을 잔인함과 음란으로 유혹하여 하나님에게서 떠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잔인함에 해당하는 것으로 폭력적인 스포츠 (특히 로마시대의 노예들의 격투), 소름끼치게 하는 노래와 그림, 공포영화나 악랄한 내용의 소설 등등이다. 이런 것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명목 하에 성도들에게도 너무나 무비판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음란에 해당하는 것은 외설문학, 성 (性)을 주제로 한 잡지들, 성욕을 즐기게 하는 시설들, 난잡한 오락기구들 등등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성도들의 마음을 흔들어 경건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교회에 대한 핍박은 쓰라린 억압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달콤한 유혹으로도 온다는 것을 기억하라. 성도들은 음녀의 이 계략에 주의하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들은, 거룩한 천국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음녀의 계략에 말려들지 말고 이 세상에서 낯선 자들이 되라. 이 음녀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기" (17:6)를 소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사도 요한이 들은 바와 같은 하늘로서 나는 음성을 들으라 (18:4):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라
2) 짐승의 비밀 (17:7-18)
사도 요한이 음녀를 보고 기이히 여길때에 천사가 짐승의 비밀을 일러준다 (17:7). 이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 (17:8,11)이다. 이 짐승은 사탄의 사주를 받아 일어나 성도들을 핍박하던 왕들의 총체이다. 그러나 이 짐승은 늘 존재할 수가 없다. 핍박에는 단절이 있다 (42달의 의미에 주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승의 과거에 있다가 미래에 나타날 이러한 모습이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17:8). 여기에서 우리가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은 이 짐승이 살아계신 하나님과는 비교도 안된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이기 때문이다 (1:4,8, 4:8). 이제 제국의 총체인 이 짐승의 비밀이 벗겨진다. "지혜있는 뜻이 여기 있다" (17:9). 먼저 짐승의 머리에 대하여 해설이 주어진다 (17:9-11). 머리가 대표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것은 짐승의 모든 특징을 대표할 수 있는 한 예로서의 제국을 의미할 것이다. 일곱 머리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일곱 산" (17:9)과 "일곱 왕" (17:10)이다. 일곱 산은 분명히 로마제국을 말한다. 로마는 일곱 언덕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곱 왕은 로마의 일곱 황제를 가리킬 수 있다. 짐승의 모든 특징이 로마에 의하여 표현된다. 요한 당시의 로마는 모든 사치와 허영과 음란과 잔인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로마는 이같은 사고방식 하에서 하나님의 성도들을 핍박하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어서 뿔에 대한 해설이 나온다 (17:12-14). 열 뿔은 열 왕이다. 이들은 "실제로 지상의 영역 속에 유력한 것들, 즉 예술이나 교육, 상업과 산업, 그리고 정권들과 중심 권력층에 맹종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Hendriksen).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준다" (17:13). 이러한 모든 이데올로기가 어린양에게 대적하지만 어린양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긴다" (17:14).
3) 바벨론의 멸망 (18:1-24)
음녀 바벨론은 멸망한다. 이미 14:8에서 예고되어진 대로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선고된다 (18:1). 그러나 음녀 뿐 아니라 그녀와 음행하던 만국이, 만왕이, 모든 상고들이 하나님의 진노에 처하게 된다. 이 멸망할 음녀를 분명히 바라보기에 성도들은 음녀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기서 나와서 그 죄에 참여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18:4). 바벨론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한다. 바벨론은 심판의 하나님에 의하여 반드시 복수될 것이다. 하나님은 음녀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다 (18:5). 음녀의 불의한 일들이 조목조목 열거된다. 음녀가 성도들에게 복수한 만큼 하나님께서 음녀에게 복수하실 것이다 (18:6). 음녀의 핍박 행위대로 갑절을 복수하실 것이다 (18:6). 가증함과 음란으로 채웠던 잔에 대하여 복수하실 것이다 (18:6). 음녀의 자기 영화 추구를 복수하실 것이다 (18:7). 음녀의 자존을 복수하실 것이다 (18:7).
음녀 바벨론의 멸망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이 애통해 한다 (18:9-14). 그녀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왕들 (18:9-14)과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상고들 (18:15-17)과 선장과 선객들과 선원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18:17-19) 다 같은 목소리로 슬퍼한다.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18:10,16,19). 이들이 애통해 하는 이유는 한결같이 바벨론의 보배로운 상품들로 자신들이 치부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되었다는데 있다 (18:9,11,17,19). 바벨론의 상품들의 종류가 열거된다 (18:12-13). 귀금속, 고급의류, 호화건축자재, 최상의 음식물,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인신이 매매된다. 세상에 있는 인간들의 치부현실이 지적되고 있다. 이들은 치부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과 방법과 재료를 강구하였다. 그러나 이 슬픔은 남의 일이 아니다. 음녀와 함께 음행하던 땅의 임금들과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던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 (17:2)도 역시 어린양의 혼인잔치 때에 심판을 받게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들의 고기가 공중에 나는 새들의 먹이가 되고 말 것이다 (19:17-18). 다시 말하면, 짐승이 잡히고 그의 거짓 선지자가 잡혀 불못에 던져질 때에 그들에게 미혹당하던 자들은 모두 백마를 타신 신랑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검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고 그 고기를 공중의 새들이 먹게 될 것이다 (19:19-21). 바벨론은 맷돌 같은 돌이 바다에 던져지듯이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않을 것이다 (18:21-24). 하나님에 대적하는 것을 꾀하는 것을 일삼기만 하던 모든 것들이 제거될 것이다. 예술도 없을 것이다 (18:22). 공업도 산업도 없을 것이다 (18:22). 등불도 없어져 즐거움이 사라질 것이다 (18:23). 가정도 없어질 것이다 (18:23). 여기에서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는 어투를 사용하여 설명되는 내용들을 새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는 내용과 비교해보라. 바벨론이 이와 같이 철저하게 멸망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기 때문이다" (18:24). 바벨론의 멸망의 원인은 성도들에 대한 핍박이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들은 즐거워하라!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 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18:20). 들으라, 하늘에 울려퍼지는 이 심판에 대한 감사의 할렐루야를 (19:1-2):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어지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3. 어린양의 혼인잔치 (19:1-21)
하나님의 성도들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한다. 사도 요한에게 요구된다.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19:9). "어린양의 혼인은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과의 연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그의 백성의 의무를 아울러 잘 포괄한 개념이다" (Tenney). 이 혼인잔치에 어린양의 아내가 준비되었으니,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었다 (19:8). 이 세마포는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게 된후에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서 행하는 옳은 행실이다 (19:8).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성도들아 옳은 행실에 서라! 음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을 버리는 간음에 빠지지 말라!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아니 바로 어린양의 신부가 될 성도들이여, 지금도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음녀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 요한계시록은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핍박이 와도 변함없이 어린양의 신부로 정결하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혼인잔치를 위하여 주님이 오신다. 이제 곧 오실 주님은 그의 신부가 악한 음녀의 유혹에 빠질까 염려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이 간곡히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18:4):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라".
조병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설교. 신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아시아 일곱교회(계2:1-3:22) (0) | 2018.01.08 |
---|---|
[스크랩] ‘텅 빈 무덤’의 기독교 (0) | 2018.01.08 |
[스크랩] 요한복음 6장 63절의 말씀은 무슨 뜻인가? (0) | 2017.12.23 |
[스크랩] 다시 복음으로(롬 1:1-7) (0) | 2017.12.07 |
[스크랩] 고린도교회와 보편교회의 정체성(고전1: 1-9) (0) | 2017.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