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예배와 명칭
1. 축하예배(祝賀禮拜)
왜곡된 예배 중에 그 첫 번째가 축하 예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축하예배는 사람을 위한 대표적인 인본주의 예배이며, 동시에 예배대상, 예배목적, 예배내용에 있어 혼합주의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축하(祝賀)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좋은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뜻으로 인사함’이라 되어 있지만 축하는 축하받는 사람을 높여주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박수는 영광을 돌리는 것). 그러므로 “홍길동 당선 축하예배”라고 할 때 그 축하는 홍길동이의 당선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동시에 홍길동이를 높여주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2. 추모예배(追慕禮拜), 추도예배(追悼禮拜)
그동안, 추모예배 또는 추도예배가 제사의 대체 기능을 하면서 기독교는 불효한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고, 가정의 화목에 기여하고, 전도에 좋은 영향을 끼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를 할 수 있다고 여겨 집입니다. 그러나 추모(추도)예배가 하나님 앞에서 참된 예배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하나님만을 위한예배, 하나님만을 높이는 예배,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참된
이런 추모예배가 과연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일까요? 예배는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만을 높이며.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가 될 때 참된 예배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 예배학자들은 다 휴가를 갔습니까? 크리스천 기자들 중에는 예배에 대한 안목을 가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말입니까? 이러한 왜곡된 예배에 대해서 그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비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은 한국교회에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추모예배는 축하예배와 함께 사람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배이며, 사람을 위한 내용들로 채워진 혼합주의 예배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런 것은 하나님을 위한 예배가 아니라 사람을 위한 추모행사(event)일 뿐입니다.
2010. 08. 22(주일). 오후 3시. 서울의 모 교회에서 “故 안모 목사 순교 60주년 기념예배”가 있다는 광고가 8월 19일자 신문에 실렸었습니다. 순교는 매우 귀한일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기념을 할 만 한 일입니다. 또한 마땅히 기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념할 일이 있으면 기념행사를 하던가 아니면 감사예배를 드려야지, 왜 사람을 기념하는 행사를
굳이 예배라는 이름으로 진행하는지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기념예배는 매우 다양하게 진행되는 혼합주의 예배입니다. 축하예배나 추모예배는 다 사람을 높여주고, 사람을 위하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예배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축하예배는 산사람을 위한 것이며, 추모예배는 죽은 사람을 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념예배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위하는데 같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즉 산사람을 위해서 기념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죽은 사람을 위해서 기념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를 위하여 보이는 기념비를 세웠지만 “기념예배는 바로 보이지 않는 기념비를 세우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념예배는 마땅히 감사예배로 드려져만 한다고 봅니다. 기념예배에서 간과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념할만한 일이나 업적을 남길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기념할 만한 사람이 되었고, 기념할 만한 일을 하고, 기념할 만한 업적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간과되고 사람의 업적과 공로만을 보며, 그것을 앞세우고 기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업적이나 공로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하며, 감사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앞에 성도의 마땅한 자세라고 여겨집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사람을 매장(埋葬) 하거나 화장(火葬)하는 일을 장사(葬事)라고 하며, 장사를 지내는 일이나 그런 예식을 장례라고 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이러한 장례의식과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많은 예배들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운명(殞命)하고 나면 “임종(臨終)예배”를 드리고, 염습(殮襲, 보통 염이라 함)을 하기 전에 “입관(入棺)예배”
를 드리며, 화장이나 매장을 하기위하여 떠나기 전에 “장례예배(영결예배, 발인예배, 고별예배, 출관예배, 천국환송예배)”를 드리고 장지에 도착하여 매장을 하기 전에 “하관예배”를 드리고 매장을 하면 장례의 모든 절차가 끝이 나게 됩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다시 “추모(추도)예배” 또는 “위로예배”를 드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장례가 끝나기 까지 공식적으로 4~6회 정도의 예배가 진행되며, 그 사이에 장례식장에서 수차례의 예배를 진행합니다. 기독교의 장례가 거의 유교적인 절차와 비슷하게 진행되며, 그 절차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장례는 죽은 사람을 매장하거나 화장을 하는 하나의 장례의식일 뿐이지 예배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영결[永訣]은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서로 영원히 헤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영결예배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서로 영원히 헤어지는 예배, 영원히 헤어지기 위한 예배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서로 헤어지는 것, 이별하는 것이 어떻게 예배가 된다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산사람이 이혼을 하면서 예배를 드리면 이혼예배가 된다고 하는 것과 같은 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발인[發靷]은 장례를 지내러 가기 위하여 상여가 집에서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발인예배는 장례를 지내기 위하여 시신이 집에서 떠나가는 예배라는 뜻입니다. 장례를 지내기 위하여 시신이 집에서 나가는 것이 어떻게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까? 발인은 장례식의 하나의 절차입니다.
그 절차에다 예배라는 이름 붙여 발인예배라고 하는 것은 뭔가가 잘못된 것입니다. 출관[出棺]이란 출상하기 위하여 관(棺)을 집 밖으로 내어 모시는 것을 말하며, 출상[出喪]이란 상가(喪家)에서 상여가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출관은 관이 집을 나오는 것이며 출상(발인)은 상여(시신)가 집에서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출관예배는 관(棺)을 집 밖으로 내어 모시는 예배라는 말이 됩니다. 장례를 지내기 위하여 시신이 집에서 나오는 것이 어떻게 예배가 된다는 것인지를 모르겠습니다. 환송[歡送]이란 떠나는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천국환송예배는 죽은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천국으로 떠나보내는 예배, 또는 죽은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천국으로 떠나보내기 위한 예배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천국으로 떠나보내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며, 꼭 천국으로 보내야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왜 예배가 되는지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죽은 사람을 천국으로 떠나보내는 것이 어떻게 예배가 되는 것입니까? 고별[告別]은 장례 때에 죽은 사람에게 이별을 알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고별예배는 죽은 사람에게 이별을 고하는 예배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지요. 죽은 사람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이 어떻게, 왜 예배라는 것입니까? 하관[下棺]은 시체를 묻을 때에 관을 광(壙, 시체를 묻기 위하여 판 구덩이)가운 대로 내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관예배는 시체를 땅에 매장하는 예배, 시체를 땅에 묻기 위한 예배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하관은 전통적인 매장 순서 중에 쓰여 지는 용어이며, 하나의 매장의식에 불과합니다. 시체를 땅에 매장하는 의식에다 예배라는 명칭을 붙인다고 그 것이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체를 땅에 매장하는 의식이 어떻게, 왜 예배가 되는 것입니까?
화장[火葬]은 시체를 불에 살라 장사 지낸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화장예배는 시체를 불에 태우는 예배, 시체를 불에 태우기 위한 예배라는 의미입니다. 시체를 불에 태우는 것이 어떻게 예배가 되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시체를 불에 태우는 것이 예배라는 말은 좀 우습지 않습니까? 말이 예배이지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납골[納骨]은 봉안을 이르는 말이며, 봉안[奉安]은 시신을 화장하여 그 유골을 그릇이나 봉안 당에 모시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납골예배는 유골을 그릇에 담아서 안치하는 예배라는 뜻입니다. 유골을 그릇에 담아서 안치하는 것이 왜, 어떻게 예배가 되는 것입니까? 추도[追悼]는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슬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추도예배는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예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생각하여 슬퍼하는 것이 어떻게 예배되는 지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추모[追慕]는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며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추모예배는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며 생각 예배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며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까?
많은 목사들이나 성도들이 아무 행사에나 예배라는 이름을 붙이고 성경을 읽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설교를 하면 그것이 예배인줄로 인식을 하고 있다는 것은 심히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 행사에나 예배라는 이름을 붙이고. 예배와 같은 내용으로 순서를 진행한다고 해서 그런 것이 다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장례예배, 영결예배, 발인예배, 고별예배, 출관예배, 환송예배라는 예배에서는 고인의 약력보고가 있으며, 업적을 말하며 기리고, 찬양하며, 조사, 추모사가 있고, 조시와 추모시도 있으며, 조가를 부르고, 심지어 천국입성을 축하한다는 축사를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장례식 행사에서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내용들이 아닙니다. 예배의 내용이 아닌 순서와 절차에서 찬송, 기도, 설교가 있다고 그것을 예배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굳이, 예배라는 명칭을 붙인다면 왜곡된 혼합주의 예배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른 예배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기준은 성격적으로 설명을 할 수 있 는가 없는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임종예배, 입관예배, 장례예배, 발인예배, 출관예배, 하관예배, 화장예배, 납골예배가 왜 예배인지를 성격적으로 설명을 할 수 없다면 그 것은 바른 예배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는 다른 혼합주의 예배와 동일하게 한 예배 안에 두개의 대상, 즉 예배의 대상(하나님)이 있고, 장례의 대상(죽은사람)이 함께 공존하며, 또한 예배의 목적과 장례순서의 여러 가지 목적을 함께 가지고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례식과 함께 진행되고 있는 여러 종류의 예배는 예배의 성격이 하나님을 위한 예배라기보다는 사람을 위한 예배이며, 죽은 사람의 장사를 치루는 것이 예배의 목적으로 하나님을 중심한 예배가 아니라 사람중심의 왜곡된 예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람의 죽음과 관련하여 예배를 드리거나 제사를 드린 일은 없습니다.
'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신약의 예배 (0) | 2017.12.27 |
---|---|
[스크랩] 예배와 직분의 상관관계는 무엇인가? (0) | 2017.12.27 |
[스크랩] 문자주의적 해석과 개혁신학 성서해석은 다른가요? (0) | 2017.12.23 |
[스크랩] 두 가지 형태의 설교 (0) | 2017.12.23 |
[스크랩] 찬양 인도자에게 (0) | 2017.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