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축원(祝願)과 축도(祝禱)의 문제
고등부을 담당하고 있는데 얼마전 멜로 이런 글이 왔습니다..
참으로 무엇인가가 잘못된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어떻게 답해주어야 할지요......
축원
아무래도 축도, 축원, 축복의 의미를 잘 모르는 분들이 많으셔서 이렇게 전체메일로.... 축도는 목사님만이 할수 있는건 아닙니다.
찬미예수2000을 만드시고 월간쪽지 낮해밤달을 제작하시는 최용덕선생님께서 쓰씨고 그의 쪽지 1999년 4월호에 실린 '축원'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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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청소년 집회 인도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항상 동행하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라는 말을 했다가 집회 후 어느 장로님께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이것 봐요, 최 선생. 당신은 목사도 아닌 평신도인데 어떻게 '축원한다'라는 말을 쓸 수 있소? 그건 목사님들만이 쓸 수 있는 말이라는 거 몰랐소? 앞으로 조심하도록 하시오." 그래서 그 다음날 같은 모임에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항상 동행하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합니다"라고 기도를 했더니 아무 탈이 없었습니다. 언제쯤 발행했던 낮해밤달지인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서도 인사말 말미에 "축원합니다"라는 표현을 썼다가 일부 독자들로부터 '경고'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글쎄요. 남들이 말리는데도 굳이 싸워가며 "축원합니다"라는 말을 계속 써야겠다는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그렇지만 우리가 상식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이 한 가지는 좀 언급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조심스럽게 말씀을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이(사실은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입니다) '축원(祝願)'이라는 용어를 뭔가 좀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축원'이라는 단어는 무슨 특별한 말이 아닙니다. 한자 '祝'은 '빌 축'자이며, '願'은 '원할 원, 바랄 원'자입니다. 다시 말해 '축원한다'라는 말은 순 우리말 '빌고 원한다' 라는 말과 꼭 같은 뜻의 한자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국어사전에는 '축원'이라는 단어에 대해 이렇게 풀어놓고 있습니다. 축원(祝願): 신불(神佛)에게 자기의 뜻을 아뢰고, 그것을 성취시켜 주기를 비는 일. 잘 되게 하여 달라고 바라며 비는 일.
그런데 보십시오. 목회자가 아닌 제가 기도를 할 때 "빌고 원합니다"라는 표현을 쓰면 아무도 이의(異議)를 제기하지 않다가 "축원합니다"라는 표현을 쓰면 그만 눈이 휘둥그레져서 "당신이 뭔데 그런 말을 쓰느냐?"며 호통을 치십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요? 꼭 같은 의미의 말인데 순 우리말로 풀어서 말하면 문제가 안되고 한자어를 쓰면 문제가 되다니 말입니다.
'축원(祝願)'이라는 말과 비슷한 뜻의 한자어로 우리가 많이 쓰는 말이 있는 데 바로 '기원(祈願:빌 기+ 원할 원)'이라는 말과 '기도(祈禱:빌 기+ 빌 도)'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기원합니다"라는 말이나 "기도합니다"라는 말이나 다 "축원합니다"라는 말과 꼭 같이 "빌고 빕니다" 혹은 "빌고 원합니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영어로도 이 세 가지는 꼭 같이 'pray'로 번역됩니다.
그래서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왜 "빌고 원합니다"라는 말은 괜찮지만 "축원합니다"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고 하시는지 말입니다. 국어학적으로는 물론이요 신학적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혹시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요? 이것은 마치 일반 신도들은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써도 되지만 "감사(感謝)합니다"라는 말은 목사님들만 써야 된다 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이거 혹시 '축복 기도'는 목사님들만 하실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아주 괴상망칙한 기독교 교리(?)에서 비롯된 가르침은 아닙니까? 오, 만에 하나라도 그렇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축복(祝福)'이 무엇이며 '축도(축복기도)'를 목사님들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왜 비성경적인 그릇된 가르침인가에 대해선 지난 1997년 1, 2월호에서 이미 함께 나눈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의 '목사님들만'이 구약시대의 '제사장'에 해당한다고 믿는 것이나, 오늘날의 교회 '예배당'을 구약시대의 '성전'과 동일하다고 말하는 만큼이나 위험하고 경악할 만한 지식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일 자체의 의미를 훼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위한 축복(祝福)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오직 목사님들께만 있다는 그 생각은 아주 비성경적인 교리요 사상입니다. 성경은 그런 가르침을 결코 지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른 이들을 축복할 수 있다고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복을 비는 기도를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권한이 만약 극소수의 일부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있다고 가르치는 분들이 있다면 그들은 필시 뭔가를 크게 오해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일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초보적인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축원'이라는 말을 혹시라도 '목사님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라고 말씀하시는 분 가운데 위와 같은 오해에 근거해서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그런 분들은 다시 한 번 이에 대해 살펴보셔야 할 것입니다. '축원'이라는 말은 무슨 특별한 신학적인 용어가 아니고 그저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용어일 뿐인 것입니다. 혹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라고 치더라도 그 말이 목사님들만의 전용(專用:?) 용어라고 말하는 그 자체가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목사님들만'이 쓸 수 있는 '말(言語)'도 있을 수 없거니와 '목사님들만'이 올라갈 수 있는 자리나 장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약 그런 것을 주장하려 한다면 우리 기독교(개신교)는 다시 종교개혁 이 전의 세대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어쩌면 구약시대로 돌아가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런 문제 때문에 중세 종교암흑시대에 종교개혁의 불이 붙었던 것입니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또 다른 '시비거리' 하나를 끄집어내려고 합니다. 개신교의 공적인 예배 마지막 순서엔 목사님들께서 담당하시는 '축도'라는 순서가 있습니다. 이 '축도'에서 문제가 되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는, 앞에서도 언급 드렸듯이 '축도는 반드시 목사님들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이요, 두 번째로는 축도의 '본문 내용'에 대해서요, 세 번째로는 '두 손을 들고 하는 축도는 목사님들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축복이 맞느냐, 축복기도(축도)가 맞느냐 같은 국어학적 문제가 있습니다만, 관례상 아래에선 축도(축복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첫째 사항에 대해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축복기도'는 목사님들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느 누구를 위해서든 하나님께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비는 기도, 즉 축복기도(축도)를 할 수 있는 권한과 의무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복을 비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권한'인 동시에 '의무'입니다.
혹 어떤 이들은 예배 때의 '축도'와 일반적인 '축복 기도'는 같은 것이 아니고 서로 신학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지는 행위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물론 분명히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차이'라고 것은 축복, 즉 복(福)을 비는(祝) 행위의 주체가 서로 다르다는 그 점이어야만 할 것입니다. 교회의 공적 모임을 마칠 때 하는 축복기도(축도)는 당연히 그 모임에 참석한 신자들을 영적으로 양육하고 가르치는 지도자, 특히 목회자들께서 담당하셔야만 하는 일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그것은 가르치고 양육하시는 지도자로서의 '권리, 권한'인 동시에 '의무'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우리 신자들은 우리를 영적으로 가르치고 양육하시는 분이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아뢰시는 '축복기도'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기도'에 관한 하나님의 뜻과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신자들이 목회자님들의 축복기도를 거절할 이유가 한 터럭만큼도 없습니다. 거절하는 사람만 손해(?)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를 영적으로 양육하고 가르치시는 지도자에 의한 축복기도, 다시 말해 목사님들의 축도는 성경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다른 축복기도와는 틀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축복의 기도는 '목사님들만'이 하실 수 있다고 말한다면 문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 축복의 기도는 이 세상의 어떤 그리스도인이든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를 위해서도 복을 빌라고 모든 이들에게 엄히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복을 빌라"고 하셨을 때는 우리가 그렇게 했을 때 그 기도를 들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한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두 손을 들고 성도들을 위해 축복 기도를 할 때 목사님들이 복을 내려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의 두 손끝에서 하나님의 복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목사님은 단지 하나님께 그 기도를 아뢰는 분일 따름입니다. 복(은총)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는, 물론 수평적인 상호간의 축복도 많이 언급되고 있지만, 특별히「상대적으로 위에 있는 권위자」가 아래 사람을 위해 하나님의 복을 비는 축복기도가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직계 자손들에 대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축복기도(창48:12-49:28), 백성들을 위한 지도자의 축복기도(신33:1-창27:27), 아래 사람을 위한 위 상관의 축복(수14:13) 등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이러했다면, 예수께서 오셔서 제사장과 일반인, 남과 여, 주인과 노예, 인종과 인종, 빈부와 귀천의 모든 벽을 허무신 신약시대인 지금, 엄연히 한 지역 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전도사님들은 자신이 양육하고 가르치는 신자들을 위해 공식적으로 하나님께 복을 비는 기도를 드릴 '권한'과 '의무'가 없을까요? 꼭 담임 교역자가 아니시더라도 교회 내의 한 부서를 이끌고 가시는 교역자나 교사들은 자신이 담당하여 양육하고 가르치는 학생들이나 신자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는 권한과 의무가 없을까요?
그런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 있을 수 있습니까? 비록 목사 안수를 받지는 못했지만 엄연한 목회자로서 양 무리들을 돌보는 일을 다른 목사님들과 마찬가지로 감당하고 계시는 전도사님들이 자신이 돌보는 양떼들을 위해 목자(牧者)로서 축복의 기도를 하나님께 아뢸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궤변이 아닌가 말입니다.
성경은 그런 식으로 축복 기도의 권한을 특정인들에게 제한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만약 우리 교회들이 그렇게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면 이는 '사람이 만든 전통이나 관례'에 의해서일 뿐이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가르침은 아닌 것입니다. 전도사님들은 공적인 예배 때 신자들을 위한 축복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이상한'교리입니다. 그것은 개신교 기독교의 이야기는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 동안 이 문제를 쉬쉬하여 온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아니, 어쩌면 다들 정말 그런 줄로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많은 전도사님들께서 마침내 목사 안수를 받으시고는 이제 드디어 목사로서 강단에 섰을 때 가장 설레고 가슴이 떨리는 때가 언제냐고 질문을 해 보면 많은 분들이 "마침내 축도를 할 수 있게 된 그 순간"이라고 말씀들을 하십니다. '마침내' 성도들을 위해 복을 빌 수 있게 되었다는 그 사실로 인해서 그토록 흥분이 되고 감격이 되신다?????
우리는 갑자기 마음이 서글퍼집니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면 전도사님들은 목사가 되시기 전에 분명히 양무리들을 양육하고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그들을 위해 복을 비는 기도를 공식적으로 하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그게 말이 되는 이야깁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남을 위해 하나님의 복을 비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하고 특별한 권한이라고! 설령 그것을 '특권'이라고 말할 수 있더라도 그 특권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특권이 아닌가 말입니다.
누가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하나님이십니까? 예수님이십니까? 바울 사도나 베드로 사도셨습니까? 우리가 알기로는 위의 그 어떤 분도 그렇게 가르치신 분이 없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목사님들만이 다른 이들을 위해 축복(祝福:복을 빎)의 기도를 하나님께 아뢸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참으로 깜짝 놀랄 만큼 무지(無知)한 일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목사님들의 축도의 본문에 관한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목사님들께서 공적인 예배 마지막에 회중(會衆)을 위해 하나님께 아뢰는 축복의 기도 내용은 흔히 "…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하시는 성령님의 감화, 교통(?)하심이 … 들에게 함께 있기를 축원하옵나이다(혹은, 있을지어다)"라는 방식으로만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오해입니다. 이 또한 성경적인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한 가르침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형식으로만 회중들이나 신자들을 축복하라는 권고나 명령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을 결코 타협하거나 양보할 수 없는 절대 진리인 양 알고있는 분들이 있다면 이 또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목사님들은 한결 같이 이런 방식의 축복기도만을 하시는 것일까요? 이런 축도 내용은 바로 신약성경 고린도 후서 마지막 장인 13장 마지막 절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지역의 여러 교회들에 회람용 서신을 보내면서 편지 말미에 이렇게 적었던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교제, 사귐 혹은 감화)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God, and the communion of the Holy Ghost, be with you all. Amen." (고후13:13)
* 참고: 위 한글 본문은 개역본. 영문은 KJV. 본문 중 한글개역성경의 '교통'이라는 이상한 번역이 있는데 이의 원어는 '코이노니아'로 이에 대해 다른 번역 성경들(공동번역, 한글킹제임스, 현대인의성경 등)은 '교제, 사귐, 친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또, 작은 글씨로 표기한 '있을지어다-be' 라는 말은 성경 원문에는 없는 동사인데 원문이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라는 기원문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다른 번역성경에선 "있기를 바랍니다(원합니다)"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구절이 전통적으로 공식적인 축도문으로 채택이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우선적인 이유는, 이 구절에 삼위일체의 하나님(성자, 성부, 성령)이 다 언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삼위의 하나님께서 각각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름대로의 깊은 신학적 이유로 이 성경 본문이 공식적인 축복기도의 본문으로 채택된 데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할 것입니다.
문제는, 예배 마지막 순서에서 목회자가 신자들을 위해 축복할 때 '오직 이 성경 본문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할 경우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성경 본문이 신자들의 공식적인 모임의 마지막 축복기도문으로 매우 적합하긴 하지만, 이것이 오직 유일한 축복기도문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교회들의 하나의 약속이요 기준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에 근거한 하나님의 '명령'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목회자 개인에 따라 얼마든지 이 성경본문과 같은 방식을 취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설령 누가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게 문제가 되어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 방식을 취하자고 약속은 하였더라도 그 약속은 지고(至高) 불변(不變)의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또 상식적으로라도, 하나님의 복을 비는 데에 있어 이 성경 본문의 축복만이 유일한 최고의 복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 축도문의 기록자이기도 한 사도 바울도 이런 방식의 축복기도는 열 세 개 서신 가운데 오직 고린도후서 마지막에서만 사용했을 뿐 다른 열 두 개의 서신에는 각기 다른 문장으로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빕니다). 아멘. (Now the God of peace be with all you. Amen.)" (롬15:3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빕니다)." (롬16:20, 살전5:28,살후3:18)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바랍니다)." (고전16:24)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과 함께 있기를. 아멘." (갈6:18, 빌4:23, 몬1:25)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가 있기를." (엡6:24)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대의 심령에 함께 계시며,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으시기를(Grace be with you)."(딤후4:22,골4:18,딤전6:21,딛3:15)
한편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강이 있기를. 아멘 (벧전5:14)" 라는 축도로 서신을 마쳤습니다.
이렇게 마지막 축도문들을 같이 놓고 볼 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한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다른 이들을 위해 간단한 압축적인 말로 복을 빌 때는 그 내용이 거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안(평강)'과 '은혜'라는 사실이요, 두 번째로는 왜 고린도후서13:13절의 이 성경 본문을 오늘날 공예배에 있어 목회자의 공식적인 축도문으로 정하기로 약속이 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사한 다른 축도문에 비하면 더 짜임새가 있고, 또 삼위(三位)의 하나님이 다 언급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모든 바울의 축도문들을 두루두루 함께 살펴본 후에 확실히 알 수 있는 또 다른 한 가지 사실은, 결코 바울은 고린도후서 13장 13절과 같은 방식의 축복기도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한편, 축도의 순서에 있어서도 우리는 굳이 공예배의 '마지막'에 해야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은 편지의 '마지막'에서는 물론이고 '서두'에서도 유사한 내용의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합니다." (롬1:7)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합니다." (고전1:3,갈1:3,고후,엡,빌,골,딤전,살후 1:2, 살전1:1, 딛1:4, 몬1:3)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딤후1:2)
어디 그 뿐이던가요? 편지의 서두와 마지막은 물론이요,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은 매우 구체적이고 다양한 내용의 축복기도를 편지 중간 중간에도 쓰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여러분들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롬15:13) "나는 무릎을 꿇고 하늘과 땅에 있는 대 가족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성령님을 통해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하게 하시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계시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기반을 다져 모든 성도들과 함께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폭과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알고 하나님의 모든 풍성하신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엡3:14-21) "내가 기도합니다. 여러분들의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여러분들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빌1:9-11) "우리가 여러분들을 위하여 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영적인 지혜와 총명으로 여러분에게 그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채워주시기를, 그래서 여러분이 주님을 믿는 성도다운 생활을 하여 모든 일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점점 자라기를." (골1:9-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로 우리에게 영원한 위로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위로하시고 강하게 하셔서 여러분이 언제나 선한 일을 하고 선한 말을 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살후2:16-17) "주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살후3:5) "이제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항상) 여러분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Now the Lord of peace himself give you peace always by all means.) 주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살후3:16)
말하자면 바울은 '축복 기도'에 있어서도 너무나 자유로운 분이셨던 것입니다. 하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복을 비는 데에 있어 교리적인 오류만 없다면 순서가 무엇이 중요하며, 횟수가 무엇이 중요하며, 그 내용의 문구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였겠냐는 말입니다. 하물며 초대 교회의 사도적 사명을 계승하고 계시다는 오늘날 목회자들께서도 그들의 양 무리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간청할 수 있는 복이 어찌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그 내용 뿐일 것입니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 오늘날 목사님들의 축도문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언제나, 아무리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더라도 우리가 '그것에만 절대성을 두고, 그것에 얽매일 때' 생깁니다. 신자들 가운데는 목사님들이 그와 같은 방식 외의 축복기도를 하나님께 아뢰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있기도 합니다. 어느 장로님께서 "예배 마지막의 목사님 축도를 안 받고 예배당을 나가면 그날 예배가 무효다" 라는 경악할 만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성자 성부 성령의 순서가 뒤바뀐 것 때문에 심각하게 호통을 치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물론 삼위 하나님의 순서에 담긴 나름대로의 신학적 의미를 모르는 바 아니나, 따지고 보면 이런 논쟁도 결국 고린도후서 13장 13절 축도문에만 너무 매달리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이 부분에서도 얼마나 자유로우셨던가 말입니다. 앞에서 열거한 수많은 축도문들을 살펴보면 바울 자신은 무엇이 앞이냐 뒤냐를 우리처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를 않았던 것이 아주 분명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바울이 13개 서신의 서두와 마지막에 쓴 서로 비슷한 이 문구들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을 때나 신자들끼리 모임을 시작할 때 혹은 헤어질 때 나누었던 '관례적'인 하나의 인사에 불과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짧은 인사에 담긴 의미는 매우 크지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토록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렸던 바울이 축복 기도에 있어서도 결코 그 무엇에 매이지 아니하였던 데에 비해, 오늘날 우리는 엉뚱하게도 바울의 한 축도문에 너무도 견고하게 매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린도후서 13장 마지막절의 이 축도문을 지나치게 '숭배'하고 있다는 증거가 또 하나 있습니다. 앞에서 이제 막 목사 안수를 받으신 전도사님들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분들이 목사 안수를 받으신 직후 이제 '마침내' 예배 마지막에 축도를 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하시고는 겪으시는 어려움 중 하나가 '축도 내용'을 제대로 암기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목사 안수를 앞두고는 그 축도문을 외우느라 무척 애를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막상 강단에 서서 예배 마지막에 축도를 하려고 하면 앞이 캄캄하고 축도문이 생각이 나지 않거나 문장의 순서가 뒤바뀌어서 당황하곤 하신답니다.
보십시오. 이런 것을 보면 그 분들이 목사 안수를 받기 이전에는 평소에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축복기도를 자신의 양 무리들을 위해 하나님께 드려본 적이 없으셨음이 분명합니다. 참 이상하지요? 왜 전도사님들은 그토록 '완벽하다는' 이 축도문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축복한 적이 없으셨던 것일까요?
하긴 어떻게 '전도사가 감히' 고린도후서 13:13절을 그대로 인용하여 성도들을 축복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 전도사님이 예배를 인도한 후 마지막에 강단에서 그저 두 손을 아래로 모으고라도 "지금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귐, 감화(感化)가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라고 기도하셨다고 말입니다. 아마도 그랬다가는 난리가 날 것입니다. 혹 그 전도사님, 멱살이 잡혀서 강단 아래로 끌려 내려오게 되시진 않을까요?
목회자이신 전도사님들도 그러실진대 하물며 우리 같은 일반 신자들이 어떻게 평소에 이 구절로 서로를 축복할 수가 있을 것입니까? 이 구절은 목사님들만의 성역(聖域)인 것처럼 깊이 인식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성자, 성부,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사랑과 사귐(코이노니아)의 복을 목사님들 외에 다른 교역자나 신자들은 서로 빌 수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이냐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실이 결코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누가 그렇게 가르쳤냐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결코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결코 없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람이 만든 가짜 신학이거나 그릇된 전통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건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 번째 문제는, '두 손을 들고' 하는 축도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있어서도 도무지 납득하기 힘든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축복의 기도를 할 때 두 손을 높이 드는 것에 대해 교회 지도자들께서 나름대로 제시하시는 '신학적' 의미를 우리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과연 이 부분에 있어서도 오직 '목사님들만'이 두 손을 들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 반복해서 서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은, 과연 그것이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느냐는 바로 그 점입니다.
두 손을 들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해선 성경적인 근거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두 손을 높이 치켜든다는 것은,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항복'의 의미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 지식과 능력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우리의 생사화복(生死禍福)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전폭적으로 동의하는 의미에서의 표현입니다. 두 번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대한 호소와 간구(懇求)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손을 내미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혹은, 나를 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시기를 요청하는 사랑과 환영의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성경에서 어떤 특정한 분들만이 두 손을 들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성경에 보면 제사장이 백성들을 향해 손을 들고 축복했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레9:22).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람들 사이에 제사장이라는 특별한 신분이 필요했던 구약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이후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게다가 구약시대에서조차도 제사장뿐만 아니라 모든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자손들을 위해 손을 들거나 안수(按手)를 하며 축복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 아론이 백성들을 향하여 손을 들고 축복하였던 것처럼, 오늘날 목사님들께서 자신이 영적으로 돌보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손을 들고 하나님께 축복의 기도를 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목사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디모데전서 2장 8절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남자들은… 어디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 바랍니다"라는 말로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회 안에서 이런 문제를 가지고 서로 다툰다면, 그것은 차라리 이런 내용을 몰랐던 것만도 못한 셈이 될 것입니다. 사실 이런 논쟁은 별 가치가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손을 들든 말든, 손을 어떤 방식으로 들든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까? 그것은 본질(本質)에 대한 문제가 아니고 비본질(非本質)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굳이 손을 들고 기도해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법도 없으며, 굳이 회중들을 향하여 서서 두 손을 들고 축복기도를 해야만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복을 내려 주신다는 법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어떤 마음으로 얼마나 진실하게,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임하시기를 하나님께 얼마나 간절히 구하느냐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본질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군가를 축복하였다면 우리가 빈 그 하나님의 복이 그 사람에게서 성취될 수 있도록 복을 빈 쪽에서도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복을 빌어놓고 돌아서서 그 사람을 저주하고 미워한다면 그 축복기도는 없었던 것보다 못한 것입니다. 또한, 무조건 머리를 들이밀고 축복기도를 받는다고 복이 굴러 들어오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고 싶으셔도 우리가 그 복을 관리할 그릇이 되지 못하면 그 축복이 성취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뢰는 기도라면, 아무도 보지 못하는 깊은 골방에서 홀로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거나, 사랑하는 이들의 손을 붙잡고 간절히 하나님께 구할 때 어찌 하나님께서 덜 기뻐하실 것이며 더디 응답하실 것입니까? 아니지요, 아니지요.
그러므로 혹 전도사님들이나 다른 신자들이 자신들에게 목사님과 같은 '특권'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입이 나올 이유도 없습니다. 보는 데서 못하면 숨어서라도 홀로 다른 이들을 축복할 일입니다. 소리 내어서 성삼위 하나님의 복을 못 빌게 하면 침묵기도나 글로써라도 하나님께 아뢸 일입니다.
우리가 '축원(祝願)'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참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 꼭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또 목사님들을 걸고넘어지는 이야기냐? 도대체 목사님들의 권위에 그렇게 도전하는 이유가 뭐냐? 그렇게 해서 교회에 덕이 되는 게 무엇이냐? 오히려 교회를 훼파(毁破)하고 지금까지의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지 않겠느냐?"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이런 사실을 나누는 것은 목사님들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로 인해 하나님께서 목사님들께 부여하신 권위가 조금이라도 훼손되거나 깎일 이유도 없습니다. 목사님들의 진정한 권위는 위의 문제와 같은 어떤 '특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우리의 영적 스승이요 목자(牧者)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분들의 권위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다른 무슨 '특권'이 없으셔도 우리는 목사님들을 주님처럼 섬기고 존경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들은 그만한 위치의 직분자들이십니다. 문제는, 명백한 성경적 뒷받침이 없는 어떤 '특권'들을 목사님들께 자꾸 부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얻는 유익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갈릴리마을이 있는 시골 동네(어부동)에는 한 전도사님께서 담임 교역자로 계시는 작은 시골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현재 은퇴를 얼마 앞두신 백발의 전도사님께서 20여년간이나 돌봐오신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의 성도들은 지난 수십 년간 모든 예배의 마지막을 목회자의 축도 대신「주기도문」으로 마쳐왔습니다. 목사님들에 의해서만 선포될 수 있다는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의 그 축도가 그토록 귀하고 소중한 것이라면, 이 교회 성도들은 참으로 불쌍하고 가련한 분들인 것입니다. 20년간 목사님 아닌 전도사님을 영적인 지도자, 영적인 아버지로 둔 '죄'로 그 축복을 받지 못하였다니 말입니다. 어쩌다 이 교회의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그게 속이 상해서 돌아오는 길에 몇 번이고 하늘을 쳐다봅니다. 전도사님을 목자로 둔 죄로 이 교회는 남들 다 하는 성찬식도 못합니다. 성찬식을 하려면 다른 교회의 목사님을 일부러 초빙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성찬식조차도 목사님이 아니면 집례를 할 수가 없거든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의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이 시골 어부동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이 비록 목사님들께서 두 손을 들어 하시는 성삼위 하나님의 축복의 기도를 받진 못하였어도, 매주일 마다 그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교인들보다 하나님의 복을 덜 받도록 하시진 않으셨겠지요? 만약 그게 사실이고 또 그것이 전도사님을 목회자로 둔 불가피한 죄값이라면, 원컨대, 목사님들이 많으셔서 그런 축복을 너무 많이 받은 도회지 큰 교회 교인들의 몫 가운데 그들이 실수로 받지 않은 부스러기 복이라도 있거든 이곳 어부동교회로 좀 보내 주십시오. 그래서 이 불쌍하고 초라하고 무식한 당신의 백성들에게도「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제, 사귐, 감화하심이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하도록」해 주시기를 간절히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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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야야 할지.....(축원과 축도의 문제) / 이승구 교수님 답글
귀한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답하기 어려운 문제지요.
우선 몇가지 정리가 필요합니다.
1. 목사님들의 권위주의가 청산되어야 합니다. 목사님은 그 자신이 본래적인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고 주님과 그의 말씀만이 우리에게 권위를 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사님들을 존중하고 그 권위를 높이는 이유는 목사님들을 통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그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목사님들께 권위를 부여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들께서 축도하는 것도 교회 안에서 이런 것과 관련해서 주어진 오랜 전통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2. 목사님께서 축도하신다고 해서 목사님이 축복해 주는 것도 아니고, 목사님에게 축복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예배 중에 축도 순서를 설교자가 하는 것이 고착화된 것이지요.
3. 요즈음 "축복합니다"는 말이 너무 많이 오고 가는 것은 좀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좋은 말이 이상하게 사용되어서 오용되고 그 의미를 상실한 수 있기에 이런 용어가 많이 사용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한 동안은 목사님이든지 목사가 아닌 분들이든지 "축원합니다" "축복합니다"와 같은 말을 잘 사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이 용어가 참된 의미를 가지게 되었을 때 때에 맞도록 사용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므로 당분간은 누구든지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항상 동행하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용어는 본래의 의미만이 아니라, 상당히 그 단어의 영향사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용하신 글 가운데서 잘 지적하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교회의 공적 모임을 마칠 때 하는 축복기도(축도)는 당연히 그 모임에 참석한 신자들을 영적으로 양육하고 가르치는 지도자, 특히 목회자들께서 담당하셔야만 하는 일입니다.
2. 목사님들이 두 손을 들고 성도들을 위해 축복 기도를 할 때 목사님들이 복을 내려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의 두 손끝에서 하나님의 복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목사님은 단지 하나님께 그 기도를 아뢰는 분일 따름입니다.
복(은총)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신 것입니다.
목사님들만이 다른 이들을 위해 축복(祝福:복을 빎)의 기도를 하나님께 아뢸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참으로 깜짝 놀랄 만큼 무지(無知)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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