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학

[스크랩] 기독교 상담 심리학의 정체

수호천사1 2017. 12. 11. 19:58

기독교 상담 심리학의 정체

 

 

사람들은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것을 성경에 뿌리를 두고 성경적인 내용을 체계화시킨 학문으로 오해한다. 기독교 심리학은 단순한 성경적 상담을 체계화한 학문이 아니다. 일반 심리학의 체계에 기독교라는 이름만 붙인 것이다. 로버트 로버츠Robert C. Roberts에 의하면 “기독교 심리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의 분야는 전통적인 심리학 자료들에 대한 개념적이고 임상적인 탐구를 기독교적으로 하는 것이라.”라고 말하고 “그것은 심리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하다.”고 말한다.(각주참조) 그리고 그는 “기독교 심리학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지만 만약 책임감 있게 통합을 실천한다면(기독교와 심리학을) 이미 기독교에 내재되어 있는 심리학의 자원들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개념들과 실천들이 일반 심리학으로부터 무엇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의 기준을 제시하여 줄 것이라고 말한다.(각주참조) 이 주장에서 나타나는 것을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것이 일반 심리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과 심리학자 중에 기독교인이 그 주축이 되어서 기독교와 심리학의 통합을 모색하는 가운데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기독교 상담 심리학의 정체가 일반 심리학에 이름만 바꿔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지금 기독교 심리학이 각 신학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담당 교수들은 기독교를 믿으면서 일반 심리학을 전공한 심리학자, 즉 기독교 심리학자들이다. 이들은 기독교 심리학이 순수한 성경적 상담이 아니라 일반 심리학에 이름을 바꾸어 입힌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기독교 심리학을 지지한다. 인간의 학문이고 사탄의 학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 왜 그런 이율배반적인 행동들을 하는 것일까? 이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종교인에 불과하다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진리가 비진리와 타협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필자가 경험한 사례를 하나 사용하기로 한다. 진화론자들과 창조론자들의 TV토론 가운데 나온 일이었는데 상당히 시간이 지난 사례이다. 두 시간이 넘는 토론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토론자들 모두가 현직 교수들이었고 미국 유학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토론은 열띤 공방이었다. 진화론을 주장하는 입장이나 창조론을 주장하는 입장이나 모두 팽팽하게 끝이 났다.

 

필자에게 묘한 여운을 남게 한 일은 토론이 끝난 후에 일어났다. 사회자가 짓궂은 질문을 토론자들에게 던졌다. 교회를 다니느냐는 질문이었다. 창조론을 주장하는 교수들은 모두 흔쾌히 교회에 다닌다고 말하였다. 그 다음 진화론을 주장하는 교수들에게 질문을 하였다. 그때 토론자가 모두 열 명이였고 진화론을 주장한 교수가 다섯이었는데 다섯 명 모두가 신실한 기도교인이라고 답하였다. 필자는 이 장면이 삼십 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지워지지 않는다. 진화론을 주장한 교수들의 양심은 어떤 것일까?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화론을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들의 삶에서 무엇이 양심을 거슬러서 말하게 할까? 교수라는 자리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일일까? 저들은 왜 양심의 소리를 듣고 펜을 꺾지 못할까?

 

기독교 심리학자들은 자신들이 프로이드를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프로이드를 거역하는 것은 심리학자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 심리학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안다. 저들도 양심의 소리를 분명히 듣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펜을 꺾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서라는 것 말고는 다른 설명이 안 된다. 교수라는 사회적인 지위와 생계수단으로서의 직업 등 복잡하고 심란한 여러 가지 삶의 문제가 얽혀있기 때문이다. 양심을 따라 펜을 꺾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담자 중에서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상담의 방향을 제시하는, 이율배반적인 삶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저들의 삶에 전능하신 하나님은 없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마 6:34, 각주참조) 성경의 말씀은 안중에도 없다.

 

한국인이면서 한국을 팔아먹은 매국노가 있었다. 제자이면서 스승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가 있었다. 이처럼 기독교인이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한, 그렇고 그런 어쭙잖은 인간들도 있었다. 이제는 기독교 상담자들, 기독교 심리학자들의 정체를 물어야 할 때이다. 하나님의 교회에 사탄의 것을 들여다 놓고 그것을 이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저들의 정체가 무엇인가? 심리학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탄의 학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의 입장을 옹호하고 고수하는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것은 단지 교수들에게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상담 심리에 관련된 책들을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추천하고 권장하는 목사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목회자들은 기독교 상담이 사람을 모으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것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만약, 기독교 상담이 사람을 모으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당장 기독교 심리학을 교회에서 버릴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위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하는 사람들이다. 영의 실재를 만나서 하나님만을 위하는 사람들이라면 세상의 학문인 심리학은 처음부처 교회에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분별력이 살아 있다면 사탄의 이론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들여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 심리학자들은 기독교 심리학이 교회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를 알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심리학이 교회에서 맥을 못 추는 이유를 두 가지만 거론하고자 한다. 그 중 첫 번째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기독교 심리학자들이 알지 못하는 이 부분, 정확히 표현하면 그들이 알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은 그들이 기독교인이라고 말은 하지만 바울과 같이 영의 실재를 만나지 못하고 이론적인, 지식적인 이해를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때문에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동행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도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무리 용을 써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인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고유의 방법으로 일하신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는 세상의 것을 섞지 않으신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이 원리를 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도와주는 것은 없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자원으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신다는 것이다. 세상의 방법을 섞어서 쓰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쓸 만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가져다 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계획한 것들은 철저히 버려진다는 것을 하나님과 일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세상의 학문이자 하나님을 거역하는 학문인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방법들을 가져다가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은 신앙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이 안 되어 있는 것이다. 몰라도 한참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영의 원리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간의 영혼이 영과 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과 그 기능이 각자 다르다는 것에 대하여 무지하다. 영혼에 대한 설명은 논점을 벗어나는 주제이기 때문에 약하기로 하고 저들이 무지로 인해 간과하고 있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이 문제인지만 살펴보기로 한다.

 

영적인 문제는 혼적인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 심리학에서 어떻게 해도 설명하지 못하는 난제들이 이것을 방증한다. 죄의 문제, 상처받은 기억을 치유하는 문제, 용서의 문제, 분노의 문제, 우울의 문제, 자살의 문제 등은 심리학에서 지금까지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난제들이다. 이 난제들은 모두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저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난제들은 그들이 말하는 자아, 즉 soul, 혼의 영역으로는 접근이 안 되는 문제이다. 저들은 soul을 영혼으로 부르고 있는데 soul은 영혼이 아니라 혼이다. 영은 spirit이다. 영과 혼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조명되어야 한다. 성령님의 조명과 체험을 통한 경험적 지식으로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영혼에 관한 지식이다. 세상의 학문을 고집하는 심리학자들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지식의 범주이다.

 

저들이 이런 난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영의 문제를 혼적인 지식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영과 혼은 차원이 다르다. 하나님은 창조의 영이시고 사탄은 피조된 타락한 영이다. 사탄이 주는 고통의 문제, 즉 심리학에서 다루지 못하는 난제들은 영의 문제이지 영을 보조하는 혼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들은 영과 혼의 능력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혼적인 능력을 영적인 능력으로 착각하고 혼을 영혼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혼의 능력이 영의 능력 못지않게 대단하다는 것은 성경의 기록이 증명한다.(각주참조) 그러나 혼적인 능력과 영적이 능력은 차원이 다르다.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능력이 영의 능력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영의 능력을 몇 가지 살펴본다. 홍해가 갈라진 사건,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온 사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사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사건, 여리고성이 무너진 사건,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 갈멜산 전투 사건, 굶주린 사자의 입을 막아 다니엘을 구한 사건, 풀무불에서 열기를 빼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살리신 사건,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던 사건, 부활 사건 등 이런 사건들은 혼적인 방법을 가지고는 증명할 수 없다. 과학적으로 불가능함이 믿음으로 가능한 그 믿음의 실체를 경험했을 때 이해가 되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불가능함이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그런 일을 하는 실체가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시면 볼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영적인 문제를 혼적인 학문으로 해결해 보려고 시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독립된 인격의 주체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 온전한 의지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일하실 수 없다는 영의 원리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세상적인 학문의 우월감과 영적인 무지가 저들의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영에 대한 정보들이다. 저들은 경험할 수 없는 정보들이다. 바리새인들이 눈으로 볼 수는 있었지만 행할 수 없었던 그 능력들이다.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뛰게 만들었다. 심리학으로는 절대로 앉은뱅이를 뛰게 할 수 없다. 귀신들려 미친 사람을 심리학으로는 절대 치유할 수 없다. 영의 실재를 만나지 못하고 살아계신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영의 실재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혼으로는 접근이 안 되는 일인 것이다. 심리학을 가지고 축사가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축사나 신유 사역을 행하기 위해서 인식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기적들을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하고 세상적인 방법들은 버려져야 한다. 심리학을 들고 있으면서 축사를 원하는 것은 사막에서 물을 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정리를 한다. 기독교 상담 심리의 정체는 일반 심리학에 기독교라는 이름만 붙여놓은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것만으로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들은 모두 거룩해야 한다. 구별되어야 한다. 어떤 것도 섞이면 안 된다. 독이든 사과는 결국 사람을 죽게 만든다. 혼합되면 안 된다. 이방신과 기독교는 섞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보다 더 사악한 사탄의 학문이 기독교계를 장악한 것이다. 심리학은 교회에 들어와서도 안 되고 심리학과 신학이 섞여서도 안 된다. 기독교는 이론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체이다. 하나님 그 자체이다. 하나님은 연구 대상이나 분석 대상이 아니라 만나야 할 대상이고 인격적 교제의 대상이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는 하나님 고유의 능력을 사용하시지 세상의 것을 섞어 쓰지 않으신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도 세상에 빼앗기지 아니하신다. 기독교 심리학을 주장하고 고집하는 자들은 조만간에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적절한 표현이 있어 인용한다.

 

“심리학은 우리가 지금까지 신앙이라고 말해왔던 그런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상담 및 심리치료의 여러 학파들은 행복한 삶과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꿈을 제공하고 있다. 이런 것들을 전수받은 후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경배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써 얻어지는 평안을 가로채 버리고, 이제는 시그문드 프로이드(Sigmund Freud), 칼 융(Carl Jung), 칼 로저스(Carl Rogers), 알버트 엘리스(Albert Ellis), 베르너 에르하르트(Werner Erhard) 그리고 이러한 심리학적 권위를 가진 자들의 제단 앞에 경배함으로 얻어지는 위안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각주참조)

 

또한 사상가이면서 과학철학자인 칼 팝퍼Karl Popper의 말을 인용한다. 그는 시그문드 프로이드Sigmund Freud를 포함한 다른 심리학자들에 의해 조직화된 심리학의 이론들에 대하여 “이러한 학문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고 있지만 과학이라기보다는 태고의 신화에 가까운 것이 사실이고 그 결과는 천문학보다 점성술에 가까운 것이 바로 이 이론들이다.”(각주참조)라고 말한다.

 

기독교 심리학, 성경적 심리학, 기독교 상담 심리학, 성경적 상담 심리학, 내적 치유 등으로 이름 붙여진 모든 것들이 일반 심리학의 아류작亞流作들이다. 양의 탈을 쓴 늑대들, 이것이 기독교 상담 심리의 정체이다. 분별력을 요한다.

 

심리학이 교회에 자리 잡으면서 드러나는 문제점들

 

심리학이 교회 안에 자리 잡으면서 드러나는 문제는 진리와 비진리간의 충돌에서 나타나는 괴리 현상이다. 교회에 들어와서는 안 될 사탄의 학문에 들어오면서 악한 영들의 본색이 드러난 것이다. 충돌에서 빚어지는 괴리 현상은 대부분 상담 과정에서 나타난다. 심리치료는(내적치유, 상담치유) 일종의 정신 상태의 치유인데 정신 건강 운동은 자아를 핵심적인 삶의 가치를 중심에 놓는다. 심리학에서는 모든 치료의 핵심으로 자아를 강조한다.(각주참조) 제프리 보이드Jeffrey H. Boyd는 “자아라는 세속적인 단어는 성경에서 ‘영혼soul’이라는 단어와 가장 정확하게 부합된다.”고 말한다.(각주참조) 그러나 번역과정에서 영혼으로 번역된 soul은 혼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인간의 구조는 영혼과 육으로 이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영과 혼과 육으로 삼분되어 있기 때문이다.(살전 5:23, 外 각주참조) 심리학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난제는 영적인 부분에 대하여 전혀 손을 대지 못한다는 것이다. 혼의 영역도 혼이 영을 돕는 부분에 이르면, 즉 혼과 영을 구분하기 힘든 영역에 이르면 해결할 수 없게 된다.

 

본론으로 돌아와 상담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괴리 현상을 본다. 기독교는,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아를 파쇄 하여야 하고 자아를 죽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영의 능력을 살리기 위해서는 혼의 능력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심리학에서 자아의 희생은 있을 수 없다. 자아를 파괴하고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심리학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이 자아의 희생을 말하는 것은 자아의 존중이 증가하는 범위 내에서 찬성하는 것이다 심리학과 성경의 전혀 다른 원리는 상담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혼의 능력을 죽이느냐의 문제는 기독교인들의 삶에서 순종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일반 심리학에서 순종이라는 단어를 경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반 심리학은 순종이라는 단어를 결코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도들이 지금까지 교회에서 배워온 것은 순종이었다. 더욱이 거짓신앙에서는 맹종에 가까운 순종을 강요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거짓신앙의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항상 자기들이 원하는 상태에서 조종하고 통제해야 하기 때문에 맹종에 가까운 순종을 강요해왔다. 이것이 심리 상담에서는 반발의 요인으로 예민하게 작동한다. 상담자들이 치유를 위해서 강조하는 것은 자아의 존중이다. 상처의 치유를 위해서 낮은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이 희생과 봉사, 순종의 생활과는 역으로 가는 권면이 되면서 그들의 처방에 회의를 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목회자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사람을 모으기 위해 교회에서 상담을 시작하였는데 내홍이 시작된 것이다. 진리와 비진리가 충돌하여 괴리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교회에 나가면서도 심리학에 대한 관심도 없고 어떤 것이 진리고 비진리인가에 대한 의식도 별로 없다. 그러나 삶의 문제를 들고 기독교 상담을 이용하는 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 상담을 통해서는 근원적인 해결을 할 수 없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봄이 오는 것을 학자들만 느끼고 논리적으로 봄이 온다는 것을 설명하는 사람들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시골의 농부가 가장 먼저 알듯이, 평신도들이 지식적으로 무식하고 막가는 인생을 사는 것 같아도 이들은 감각적으로, 또는 본능적으로 어느 것이 진리이고 비진리인가를 안다. 그리고 “기독교 상담, 그거 아니든데...”라며 여운을 남기면서 돌아선다. 그리고 “저런 게 왜 교회에 들어왔나?”를 혼자 곱씹어 본다. 진리와 비진리의 충돌을 피부로 체험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자녀들이 사탄의 계략에 빠져서 죽게 놔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체험하는 순간이다. 이것은 심리 상담 이후 괴리 현상을 경험한 사람들의 후일담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때는 복음을 전해 듣고 영생을 얻고자 할 때가 아니라 삶의 문제가 수인의 한계를 넘을 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교회를 찾는다. 많은 세상의 문제들을 알고 교회에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제일 먼저 목회자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그 다음 교회의 전문 상담사에 의뢰하는 절차를 거쳐서 상담을 받는다. 결과는 해결되지 못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더 악화된다.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는 상담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회의를 품고 기독교 상담을 통해서는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진리와 비진리의 충돌을 감지하는 것이다.

 

여기서 보아야 할 것은 많은 사람들이 상담을 요청할 때는 영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 한 그 해법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사탄에게 할큄을 당하여 그 해결을 받고자 교회에 상담을 청하였는데 다시 사탄에게 되돌려 보낸 것이다. 이런 목회자들에게 분별력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심리학은 교회에서 시작한 학문이 아니다. 심리학자 로버트 로버츠Robert C. Roberts는 그의 논문에서 심리학이 교회에 자리 잡은 사실에 대해 “심리학은 교회와 기독교 전통 밖의 일이므로 그것을 교회 안으로 필요에 의해서 끌어드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다.(각주참조) 심리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교회의 실체와 심리학의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정서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행동의 문제, 즉 정서적인 문제라고 불리는 주제들은 대부분 영적인 범위의 주제들이다. 현대 의학에서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등장한 우울증이나 자살의 문제, 다혈질이나 폭력의 문제 등은 모두 영의 문제이지 혼의 문제가 아니다. 심리학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할 수 없는 난제들이라는 것이다. 심리학은 인간의 만든 세상의 학문이고 혼적인 학문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상담을 받고자 하는 내담자들의 문제는 대부분 영적인 문제들이다. 영의 문제는 영으로 해결되는 것이지 자른 저급한 수준의 학문으로는 해결하지 못한다.

 

심리학이 교회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약간의 사실증명과 같은 세상 논리에 신뢰를 두고 교회는 임상심리나 상담심리뿐만 아니라 인지심리, 발달심리, 종교심리, 여성심리, 사회심리까지, 심리학의 모든 분야를 아무런 생각 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일반 심리학이 교회에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에 대한 일각의 비판을 모면하기 위해서 기독교 심리로 명칭을 변경하여 성경의 탈을 쓰고 교회에서 버젓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에 관련된 책들을 읽다보면 인간의 설득력과 논리에 참으로 놀랄 수밖에 없다. 인간의 지적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의 설득과 세상의 논리를 교회에 들여놓으면 안 된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설득과 하나님의 논리가 있다 인간의 삶의 문제를 치유하는 방법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지면 해결된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논리를 가지고 성경을 끼워 맞추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잘못된 시도였던 것이다.

 

심리학이 교회 안에 자리 잡으면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문제는 상담자의 자질 문제이다. 상담은 확고한 신앙관이 정립된 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의 삶과 행동은 그 사람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가치관이 정립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담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계시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 실정은 상담자들 모두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각주참조)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 것만을 이야기 한다.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 그분이 전부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은 사람의 힘으로 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했다.”고 말한다.(고전 2:5, 각주참조) 즉, 자신이 만난 하나님만을 말한다. 상담자는 하나님을 만나서 경험하고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상담자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는 곳으로 안내할 수 있는 힘이 없다. 이것이 상담자들이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이다. 이들은 일반 심리학에서 가르치는 교육을 받고 그 툴tool에 의해서 앵무새처럼 말한다. 이들에게 문제의 해결을 바라는 것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상담자들의 자질문제는 심각하다. 어린 미혼모들이 유아를 방치하고 유기하는 이유는 아이를 키우는 방법도 모르고 생명의 소중함도 모르는 미숙함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도 못하는 자들을 세상의 기준으로 상담자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은 엄마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애를 낳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교회에서 인식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휘튼 대학의 교무처장인 스탠튼 존스Stanton L. Jones의 말을 빌리기로 한다. 그는 “신학자들이 영혼에 대한 이론을 충분히 개발하지 않았다. 일반 사람들이 자신의 삶, 영혼에 대해서 좀 더 깊은 이해를 해주기를 원할 때 목회자들은 그들을 기독교의 평신도와 일반 심리학자에게 떠맡긴다.”고(각주참조) 말하였다. 이것은 그야말로 재앙이다. 이것은 교인들을 하나님 이외의 다른 곳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교인들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으로부터 도움을 받도록 만들고 있는데,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 곳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외에 다른 곳으로부터 도움을 청하는 것은 사탄으로부터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영의 세계는 하나님과 사탄으로 양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 속에서 사탄에게 할퀴어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교회를, 즉 하나님을 찾는데 교회의 목사라는 사람은 그를 하나님에게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에게 다시 돌려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무런 의식 없이 교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교인들을 심리학으로 안내하는 것은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내쫓고 있는 것이다.

 

“신학자들이 영혼에 대한 이론을 충분히 개발하지 않았다”는 질책에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질책도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 신학자들이 영혼에 대한 충분히 이론을 개발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영혼에 대한 이론은 인간의 혼적인 능력으로 개발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주어지고 경험되어지는 지식이라는 것을 스탠튼 존스도 놓치고 있는 것이다.

 

[회복시리즈 05. 믿는 자의 표적 中 일부 발췌 / 박찬빈 著]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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