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전쟁

[스크랩] 종교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수호천사1 2017. 10. 21. 22:52

종교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종교전쟁이란, 넓은 의미로는 종교에 관계되어 일어난 모든 전란을 지칭한다. 하지만, 서양사상(西洋史上)의 용어로서는 유럽에서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후반에 걸친 종교개혁을 계기로 신﹡구 양교파의 대립으로 야기되어 국제적 규모로 진전된 일련의 전쟁을 가리킨다.

1. 넓은 뜻의 종교전쟁

①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 남프랑스의 알비﹡툴르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쳤던 이단 알 비주와파에 대한 교황 이노센트 3세의 응징요구를 받고, 이를 진압한 알비주아 십자군 (Albigeois 十字軍).
② J.후스 체코의 종교개혁가 ·가톨릭 신학자의 처형 후, 로마교황의 요청에 따라 신성로마황제가 파견한 십자군과 보헤미아 의 후스파(派) 사이에 벌어진 후스전쟁(1419∼36).
③ 루터의 종교개혁 후, 지킹겐, 후텐 등을 지도자로 하는 독일의 기사(騎士)들이 트리에르 대주교(大主敎)를 습격한 뒤 반격을 받아 무너진 기사전쟁(1522).

 

 

 

[1] 슈말칼덴동맹과 전쟁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정책에 대항하기 위한 동맹으로, 1531년 2월 헤센 백작,
작센 선거후(選擧侯)를 비롯한 그리스도교 제후와 마크데부르크, 브레멘 등의 도시 사이에
6년 기한으로 체결되었다.

1535년 다시 10년간 연장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안할트, 포메른, 뷔르템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하노버, 함부르크 등의 도시도 가맹하여 독일 그리스도교 세력의
대부분을 포함하게 되었다. 이에 황제는 종교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슈말칼덴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그리스도교측은 대패를 당하고
동맹도 해체되었다.

 

 

[2] 위그노전쟁

 

1562∼1598년 프랑스의 종교내란.
위그노란 프랑스 칼뱅파 프로테스탄트(신교도)의 별칭이다. 15세기 말 시작된
지리상의 발견은 서유럽의 경제생활에 큰 변동을 가지고 왔으며, 봉건영주제가
무너지자 소농민(小農民), 소생산자(小生産者)층에서도 독립 기운이 감돌았다.
여기에 칼뱅 교의(敎義)가 구체제(舊體制)에 대한 변혁을 고취시켰다.

칼뱅파의 교의는 프랑스 경우 서민에서 궁정·귀족에게까지 퍼져 갔다.
따라서 기즈공(公)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파에 대하여, 프로테스탄트도 부르봉과
콩데공(公) 등을 지도자로 무장봉기하여, 30여년 동안 내란이 전개되었다.
앙리 2세의 왕비이며 샤를 9세의 섭정인 카트린드메디시스가 왕권을 보전하고
신구(新舊) 양파의 세력균형을 꾀하기 위하여, 프로테스탄트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것이 내전(內戰)을 더욱 격화시켰다. 프로테스탄트 출신으로 프랑스의 왕위에
오른 앙리 4세의 정치력에 의해 수습되었다.


[3] 네덜란드 독립전쟁

 

에스파냐의 속령(屬領)인 네덜란드의 홀란트, 위트레흐트등
북부 7주가 1572∼1609년에 본국과의 항쟁에서 독립을 쟁취한 전쟁

중세 이후 네덜란드 지방은 모직물공업과 중계무역으로 번영하여 도시는 광범한
자치권을 소유하며 자유의 바람이 넘쳐 있었고, 종교개혁 이후에는 북부 여러 주에
칼뱅파(派)의 신교도가 급증하였다. 1556년 에스파냐 왕위에 오른 펠리페 2세가
가톨릭교회의 수호자임을 호언하면서 네덜란드 지방에 대한 신교파의 탄압을
강행하였으며, 도시에 대해 중세(重稅)를 부과하고 상업을 제한하며 자치권을
박탈하면서 본국의 재정수입의 증대만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학정에 대항하여 북부는 물론 남부 여러 주의 가톨릭교를 신봉하는 시민계급까지 참여한 항거운동이 1566년부터
전개되었다. 이때의 지도자는 봉건 대귀족 출신인 에그몬트 백작과 호른 백작 이었다.

이럴 즈음 군사적 독재권을 수임받고 정예병 1만명을 인솔하여 1567년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부임해온 알바공은 프로테스탄트(신교도)에 대해 잔악한 탄압을 가하였다.
소위 "혈(血)의 평의회(評議會)"라는 심문소(審問所)를 개설하여 지도자인 에그몬트와
호른 등을 비롯한 8,000명 이상을 종교재판(宗敎裁判)으로 처단하였다.
또 알바공은 상류귀족과 부유한 시민계급의 재산을 몰수하고 무역에 중세를
부과함으로써 상업활동이 마비되어, 매뉴팩처의 기능은 정지되고 실업자가 증가하였다.
알바공의 이러한 공포정치(恐怖政治)로, 시민들은 속속 영국, 독일 등으로 망명하였는데
그수가 10만을 헤아렸다.

1572년에 들어서면서 네덜란드인(人)의 반항운동은 독립전쟁의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에스파냐의 지배층으로부터 고이젠(거지들)이라 불린 신교도(칼뱅파)를 중심으로 하여
처음에는 해상에서 에스파냐의 은선단(銀船團)을 습격하더니, 급기야는 오라녜공
빌렘을 지도자로 하여 다수의 귀족과 상.공업자, 농민들이 합세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576년에는 남북 여러 주가 브뤼셀동맹을 성립시킴으로써 독립전쟁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본래부터 종교적으로 대립해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이해관계를
달리한 남.북 양주의 불일치(不一致)는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여기에다 새로 부임해
온 총독 파르마공(公)의 이간책이 주효하여 1578년 남부는 에스파냐에게 굴복하였다.
그러나 홀란드 등의 북부 7주는 1579년 위트레흐트동맹을 결성하여 항전을 계속하면서,
1581년 7월 독립을 선언하고 윌리엄을 초대 총독으로 하는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을
설립하였다.

1584년 윌리엄이 가톨릭교도에게 암살된 이후에도 항전을 계속하던 중,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격파되어 국제적 지위가 하락되고, 재정적으로
궁핍한데다 펠리페 2세가 사망함으로써(1598),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은 결정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펠리페 3세가 즉위한 이후 1609년 에스파냐와
12년간의 휴전조약(休戰條約)을 체결하였다. 휴전이 만료된 이후 전쟁은 재개되었으나,
결국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에서 국제적 승인을 얻음으로써 독립전쟁도 종식되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영국의 청교도혁명, 미국의 독립전쟁, 프랑스의 대혁명에 선행한
시민혁명(市民革命)의 승리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4] 30년 전쟁

 

1618∼1648년 독일을 무대로 그리스도교와 가톨릭교 간에 벌어진 종교전쟁
사상 최대의 종교전쟁이며, 최후의 종교전쟁으로 그 기간은 대체로 4기(期)로 구분되는데
전반의 2기는 종교적 색채가 짙고 후반의 2기는 정치적 색채가 짙다.

① 제1기(1618∼1620) : 독일의 그리스도·가톨릭 양교도 간의 반목은 1555년에 있었던
아우크스부르크화의(和議) 이후에도 그 응어리가 가시지 않아, 17세기초 양파의
제후(諸侯)들은 각기 그리스도교 연합과 가톨릭교 연맹을 결성해서 대립하였다.
이와 같은 정황 속에서 1617년 가톨릭교도인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의 왕위에 올라
가톨릭 절대 신앙을 강요하려 하자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619년 페르디난트 2세가 황제가 되자 보헤미아인들은 팔츠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 5세를 국왕으로 받들고 이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1620년 바이서베르크 싸움에서
패배하여 프리드리히 5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고 보헤미아의 그리스도교도들은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② 제2기(1625∼1629) : 진작부터 독일에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4세는 이를 기화로 영국 및 네덜란드로부터 군자금을 얻어 1625년 그리스도교군의
총수로서 독일에 침입하였으나 황제군의 장군 발렌슈타인과 틸리에게 패배하여 1629년
양측은 뤼베크 조약으로 화해하였다. 이에 따라 황제는 배상령(賠償令)을 내려
종교제후(宗敎諸侯)의 영지(領地) 회복과 루터파(派)의 공인(公認)을 선포하였다.

③ 제3기(1630∼1635) : 그러나 이듬해 스웨덴왕 구스타브 2세가 그리스도교를
옹호하고 프랑스의 후원을 얻어 다시 독일에 침입하였다. 스웨덴군은 황제군을
라이프치히전투에서 격파하고 틸리를 전사시켰으나 1632년 뤼첸전투에서 구스타브 2세도
전사하였다. 이후에도 스웨덴군은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패배를 거듭하여 1634년
황제군 사령관 발렌슈타인이 모반혐의로 암살되자 1635년 황제와 그리스도교군의
작센 선제후 사이에 프라하 화의가 성립되었다.

④ 제4기(1635∼1648) : 프라하의 화의 직후인 1635년, 1631년 이래 배후에서 그리스도교
세력을 밀었던 프랑스가 전면에 나서서 독일에 출병하고 에스파냐에도 선전을 포고,
스웨덴과 연합전선을 폈다. 전쟁은 일진일퇴의 전황 속에 끌어가다가 1637년 황제위를
계승한 페르디난트 3세는 전세의 불리와 국내 제후들이 오랜 전쟁으로 시달려 1641년
종전을 제의하였다. 1644년부터 열린 강화회의는 지지부진하다가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이
성립되어 30년간의 종교전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로써 독일 제후국 내의 가톨릭·루터파, 칼뱅파는 각각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였다. [펌]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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