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2

[스크랩] 요한 웨슬리의 구원론

수호천사1 2017. 10. 10. 11:55

요한 웨슬리의 구원론



목 차

Ⅰ. 서 론
Ⅱ. 구원론의 역사신학적 배경
1. 루터적 배경
1) 루터의 구원론
2) 웨슬리의 루터 비판
2. 칼빈적 배경
1) 칼빈의 구원론
2) 웨슬리의 칼빈 비판
3. 알미니우스적 배경
1) 복음적 신인협조설
2) 은총의 낙관주의
4. 동방교회적 배경
1) 복음적 신인협조설
2) 신앙과 선행
3) 점진적 성화
4) 완전
5. 어거스틴적 배경
1) 선재적 은총
2) 은총의 양면성
6. 영국 성공회와 로마 천주교회적 배경
7. 뮌쳐적 배경
1) 뮌쳐의 구원론
2) 웨슬리와 뮌쳐의 구원론 비교
8. 역사신학적 배경에 관한 종합과 분석




Ⅰ. 서론

웨슬리는 종교개혁가 루터, 칼빈, 뮌쳐의 구원론의 요소들을 모두 종합적으로 수용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기에만 모무르지 아니하고 동방 교부들, 알미니우스주의, 어거스틴, 성공회, 로마 천주교회 사상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구원론으로 체형화함으로, 종교개혁가들 중에 가장 종합적이며 가장 에큐메니칼적인 구원론을 만듦으로써 종교개혁 구원론을 완성한 신학적 대가임을 본 연구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출판된 웨슬리 신학 저술들이 대부분 조종남 교수나 한영태 교수 같은 조직신학자들에 의해서 씌어졌기에 웨슬리 사상의 역사 신학적 배경과 역사신학적 위치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웨슬리 신학의 진면목은 역사신학적 배경 속에서 드러난다. 루터와 갈빈과 어거스틴과 비교할 때에 비로소 웨슬리 사상의 독특함과 위대함이 잘 나타날 수 있다. 필자의 전공 분야가 역사신학이고 그 중에서도 종교개혁이기에 역사신학적 배경, 그 중에서도 종교개혁사상적 배경 속에서 웨슬리의 구원론적 업적과 공헌을 제대로 밝혀 그의 구원론과 신학 사상이 역사신학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증명하고자 한다.

Ⅱ. 구원론의 역사신학적 배경

1. 루터적 배경

1) 루터의 구원론
루터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본문이 롬 1:17이다. 그 구절 전반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iustitia)는 능동적인 의(active rigtheousness), 곧 심판하시고 정죄하시고 저주하시는 의로만 생각하였다. 그 무서운 심판 앞에 죄인인 자신의 모습 때문에 큰 절망, 죽음에 이르는 병(Drankeit zum Tode)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는 가운데 그 뜻이 전혀 다른 것을 발견하였다. 죄인을 무서운 공포와 절망에 빠뜨린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해방되는 순간을 경험한 것이다. 능동적인 의(active righteousness)가 아니라 수동적인 의(passive righteousness), 곧 무조건 용서하시고, 받아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의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루터의 서재가 ‘탑의 경험’(Tumerlebnis) 이라고도 부른다.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시는 엄청남 용서의 은총ㅇ르 믿기만 하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수동적으로 낯선 손님 같은 의(aliena iustitia)에서 그리고 바울의 롬 1:17에서 발견하게 되었다고 그의 라틴어 저술 편집 서문에서 고백한다.
그래서 롬 1:17을 전에는 가장 미워하였는데 이제는 가장 사랑하게 되었으며 파라다이스(paradise)의 문이 되었다고 표현한다. 인간의 능동적인 선행과 노력은 아무런 효과가 없고, 인간의 이성으로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는 중세 스콜라주의적인 사변도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온전히 발견할 수 없으며, 오직 십자가의 은총을 믿을 때에만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한다. “우리의 신학은 오직 십자가 뿐이다”(crux est sola nostra theologia)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자신의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임을 1518년 ‘하이델베르그 논쟁’(Heidelberg Disputation)에서 밝히고 있다.
또한 이 십자가의 은총-성령의 역사-은 말씀 안에서(in the Word), 말씀을 통하여(through the Word), 말씀과 함께(with the Word) 우리에게 다가온다. 말씀 이외의 신비적 체험, 곧 꿈과 환상을 통하여 오지 않는다고 본다. 성령의 역사는 말씀을 통하여 일어난다고 이해한다. 바로 이 점에서 한국의 다미선교회와 같은 주관적 신비적 체험 중심의 신앙 운동을 비판받아야 한다.
루터는 바로 십자가 신앙을 통해 중세인을 자유하게 하였다. 율법과 선행의 무거운 짐에서 자유하게 하였다. 고해성사의 짐에서 자유하게 하여 모든 평신도도 제사장으로서 직접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게 하였고, 신부만 떡과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고 하여 평신도는 떡만을 먹게 하였던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켜 모든 평신도도 포도주를 마실 수 있도록 해방시켰다. 그리스도의 피가 평신도들의 죄를 위해서도 흘려진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둘 모두를 주셨으니 당연히 둘 모두 평신도들에게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어려운 라틴어 예배 의식의 노예에서 벗어나 평신도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독일어 예배 의식으로 바꾸었고, 미사에서 자유하여 설교를 듣는 청각적 예배로 개혁하였다. 또한 신부만 성경을 라틴어로 읽던 모든 모순에서 평신도도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쉬운 독일어로 번역하여 평신도 성경 읽기의 해방 운동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평신도도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성직자들도, 결혼할 수 없었던 포로 상태에서 해방시켜 수도사와 수녀들이 결혼할 수 있도록 소개하기도 했다. 마지막 하나 남은 수녀를 남자들에게 소개하다가 상대자가 없자 자신이 결혼하였다. 이러한 자유와 해방 운동은 철저히 십자가의 은총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신앙의인화(justification by faith)에 기초하여 미신과 타부와 맹종과 형식과 율법과 고행과 금욕에서 중세인을 해방시킨 것이다.
루터는 그 유명한 “기독자의 자유”에서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것은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를 중요하게 여긴다. 복음을 믿음으로 얻은 자유는 방종과 향락의 기회로 사용되어서는 안되고 성령의 노예가 되어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종노릇을 해야 한다. 변증법적 성격으로 크리스천의 본성을 루터는 설명한다.
루터는 롬 8:17,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를 강조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의 짐을 지는 예수의 제자가 될 것을 주장한다. 참 신학자는 책을 읽고 명상하고 사변하는 데서 만들어지지 않고 삶과 죽음, 비난당함과 고난 당함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강조한다. 루터는 라이프찌히(Leipzig) 논쟁(1519) 이후, 죽음이 엄습하는 것을 느끼고 어직 십자가만을 붙잡과 십자가 위에서만 그의 신학을 수립하였다. 본 회퍼는 이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값비싼 은혜(costly grace)라고 풀이한다. 루터가 수도원에서 안일하게 기도하고 명상하는 수도사적 경건(cheap grace)에 머무르지 않고 수도원 문을 박차고 나와서 세속 속에서, 역사 속에서 종교개혁 운동의 십자가를 지기로 결단한 것은 값비싼 은혜의 결단이라고 이해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너무 값싼 은혜-축복과 형통-만을 추구하며,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르는 값비싼 은혜를 무시하고 있다. 또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ㅈ러규 속에서도 침묵하시고, 외면하시고 숨어 계신 하나님(Hidden God: Deus Absconditus)은 숨어 계시는 방법으로 현존하신다(Hidden presence of god: Deus Revelatus in Deus A-
bsconditus). 십자가라는 옷을 입고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 숨어 계신 하나님으로 현존하신다. R. Regin Prenter는 “모든 선한 것들은 십자가 안에 그리고 십자가 아래 숨어 있다”(omnia bona in cruce et sub cruce abscondita sunt)고 루터를 해석한다.
하나님의 자비는 하나님의 진노 속에 의존적으로 계시된다. 하나님의 분노와 자비가 동시에 계시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분노 중에는 두 가지가 있다. 형벌의 분노(ira severitas)와 자비의 분노(ira misericordiae)이다.
십자가는 자비의 분노다. 다만 신앙만이 계시된 분노를 나타내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의도를 식별한다. 신앙이 아닌 인간의 이성-중세 스콜라주의의 영광의 신학(theologi- agloriae)-은 이 것을 식별하지 못하고 형벌의 분노와 자비의 분노를 혼동한다는 것이다. 영광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강함과 영광과 능력 속에서만 계시되기를 원하고, 십자가 안에서의 포기와 패배-궁극적으로 승리하는-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루터는 해석한다.
루터는 또다른 변증볍적 해석으로 십자가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곧 ‘하나님의 속성에 낮선 행위’(opus alienum)와 ‘하나님의 속성에 속하는 행위’(opus proprium) 이다. 사랑의 하나님의 속성에서는 도저히 분노하고 정죄 하실 것 같지 아니하나, 그렇게 정죄하고 분노하시는 것은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기 위함이다. 결국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보이시기 위해 하나님답지 않은 행위를 보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부당하게 정죄 당하고, 연약하게 창피 당하고, 어리석게 패배 당하고, 철저히 죽음을 당하셨다. 바로 그 치욕스러운 십자가의 스캔들 속에 하나님의 의와 영광과 지혜와 능력과 구원이 숨어 있는 방법으로 계시되었다.
인간의 모든 지혜와 능력이 끝장나는 십자가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역사하기 시작한다. 루터는 “마리아 찬양”(Magnificat) 주석에서 눌린 자, 겸손한 자, 비천한 자, 가난한 자,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 부자를 낮추시고, 심판하신다고 해석한다. 여인 마리아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혁명적 선포가 외쳐졌다고 루터는 해석한다: “인간의 강함이 끝나는 곳에, 하나님의 강함이 시작된다. 억눌림이 끝날 때, 위대한 강함이 약함 아래 숨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어 준다.”
바로 이 루터의 해석에서 몰트만은 그의 저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Der Gekreuzigte)을 전개한다. 몰트만은 엘리비젤의 “밤”에 나타난, 숨어 계신 하나님을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연결짓는다. 원인 모르게 죽어가는 유태인의 죽음 속에서 지금도 신음하고 계신느 삼위일체 하나님을 해석한다. 재판을 받기 위해 보름스 국회로 가는 루터의 결단의 클라이막스에 십자가의 신학(Theollgia Crucis)이 서 있다고 몰트만은 해석한다.

2) 웨슬리의 루터 비판
웨슬리는 바로 이러한 루터의 의인화와 십자가 신학을 그의 신학의 기본적 전제로 삼는다. 실상 웨슬리를 변화시킨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사건을 루터의 로마서 서문이었다. 이 체험 이후로 웨슬리도 루터처럼 신뢰하는 믿음(fiducia)으로 바뀌었으나, 이 체험 이전에는 웨슬리도 종교개혁 신앙 이전의 루터처럼 지적으로 인정하는 믿음(assentia)으로 구원 얻기를 열망하였다. 또한 회심 이전의 웨슬리는 종교개혁 신앙 이전의 루터처럼 많은 선행과 공적을 쌓음으로써 구원에 이르기를 열망하다가 루터처럼 철저히 절망하게 되었다. 옥스퍼드 신성구락부 시절 1723년 4월부터 클레이튼(Mr. Clayton)의 제안에 따라 수요일과 금요일마다 금식하고, 몰간(Mr. Morgan)의 제안에 따라 일주일에 1~2회씩 감옥을 방문하기도 하였고 가난한 자, 병든 자, 외로운 사람들을 방문하여 구제 활동을 펴기도 하였다. 웨슬리는 “오직 한 책의 사람”으로 성경을 사랑하였고, 신성구락부는 “성경벌레” 혹은 “성경 크리스천”(Bible Christians)이란 별병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런 열심을 통하여 구원을 확신하기보다 좌절에 빠졌고. 신성구락부의 핵심 회원인 몰간이 지나친 열심히 정신 질환을 일으켜 죽음으로써 “슬픔의 아들들”이란 비난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는 미국으로 가는 항해와 영국으로 돌아오는 항해에서 두 번씩이나 풍랑을 만났는데. 그 때마다 웨슬리 자신은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으나 찬송과 평안한 마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모라비안 평신도들의 신앙 자세에 크게 자극 받았다. 그의 모라비안 친구 목사 스팡겐버그(Gottlieb Spangenberg)가 웨슬리에게 “당신은 예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인류의 구세주”라고 대답했다. 다시 스팡겐버그가 “당신의 구세주임을 믿느냐?”고 물을 때, 웨슬리는 “제발 나의 구세주이기를 바란다”(may be)라고 확신이 없이 불확실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합키(Sophy Hopkey)와의 사랑에도 실패하였다.
그런 절망과 좌절의 상황 속에서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이트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는 그 날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나는 나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움을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를,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내 모든 죄악들을 제거하셨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인간 이성이나 선행의 공적도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바로 이런 루터적 신앙 체험이 일어나게 될 때, 홀랜드(William Holland)-웨슬리와 뵐러가 중심이 되어 만든 페터 레인 신도회(Fetter Lane Society)의 창립 회원-로 주측되는 모라비안 청년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하여 마음 속에서 역사 하시는 변화를 설명하고 있었다. 물론 학자에 따라서는 웨슬리의 회심은 영국 성공회적인 회심이라고도 해석하고, 청교도적인 회심이라고도 해석한다. 그러나 그의 일기에 나타난 사실에 있어서나, 고백에 있어서나 그의 회심은 루터적. 모라비안적 회심임을 표현해 주고 있다. 그의 구원론의 출발은 철저히 루터적. 종교개혁적 전통에 서 있다.
그러나 웨슬리는 루터의 의인화 사상에만 머무르지 아니하고 더욱 발전시킨다. 루터는 죽는 날까지 성도는 ‘용서받은 죄인’ ‘의로워진 죄인’ ‘용서받고 의로워졌으나 죄 지을 가능성이 있은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임을 주장하였으나. 웨슬리는 imputation(extra nos) 뿐 아니라 impartation(in nobis)까지도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의롭다고 법적인(forensic)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의로운 사람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우리의 본성마저도 하나님의 형상을 힘입어야 한다. 따라서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행동해야 한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루터에게 선생은 의로워진 크리스천에게 자동으로 나타나는 좋은 열매이다.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이요, 좋은 나무에서 저절로 선행의 열매가 맺힌다고 루터는 해석한다, 따라서 루터는 믿음을 강조한 로마서는 평가 절상하고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평가 절하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야고보서도 중요시 하였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은 로마서의 믿음을 전제한 행함이란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75세 때,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에 얻은 것이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인정받은 것-야고보서가 주장하는 대로-은 100세 때 낳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칠 때의 행위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은 로마서의 믿음을 전제한 행함이요, 바울이 로마서에서 비판한 것은 믿음 이전의 행함이라고 웨슬리는 해석한다.
웨슬리는 루터적 모라비안주의를 공격하는 그의 논문, “Thought on the Imputed Righteousness of Christ"에서 그리스도의 전가하시는 의는 전혀 어떤 성결도 요구하시지 않고, 욕망과 온갖 부정결함을 제거하는 어떤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웨슬리는 이런 교리는 율법폐기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두려워했다. 웨슬리의 논적이었던 허비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신 이래 어떤 성도도 율법을 성취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웨스리는 이러한 율법폐기론은 하나님을 죄의 창조자- 죄 짓게 만드는 분-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의에 동참하는 것은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이 갱신되고 하나님의 형상, 곧 의로움과 성결함에 동참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완전한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본성의 파트너이며 동참자가 된다. 웨슬리는 말했다: "당신의 완전한 본성의 파트너로 나를 당신 안에 있게 하소서. 새로운 죄 없는 피조물로...” 오직 사랑만이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함을 확신시켜 준다.
웨슬리에게 선행은 구원의 확신을 위해 필요하다. 구원을 확신하는 한 가지 방법은 영적이고 신비적이다. 곧, 성령이 인간의 영에게 확증시켜 주는 신비적, 영적 체험이다. 그러나 구원을 확신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선행이다. 또한 선행은 구원의 완성을 위해 필요하다. 구원의 시작은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구원의 완성은 선행으로 이루어진다고 웨슬리는 해석한다. 그리고 선행은 구원의 풍성함을 위해 필요하다. 선행을 하는 것은 신앙이 성장하고 있음을 뜻한다. 웨슬리는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말한다: "선한 생활은 사랑에 의해 역사하는 참 신앙과 분리될 수 없다.” 또한 웨슬리는 크리소스톰이 말한 것처럼 “신앙은 선행으로 가득차 있다. 인간이 믿자마자 그는 선행으로 존경받게 될 것이다”고 한다. 웨슬리는 완전한 사랑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과 Joseph Benson에게 보낸 편지에서).
웨슬리는 성령의 열매의 풍성함을 크리스천의 완전과 동일시한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준다. 성령은 우리를 모든 거룩함으로 인도한다. 우리를 신적 본성의 참여자로 만든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에게 속하였고, 영원한 행복에 이를 수 있음을 증거해 준다.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증거로부터 솟아 나온다. 최고의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다.
성령은 우리 속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 예수의 영적 신부로 성화 시킨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 “하나님의 포도원에 관하여”(On the God's Vineyard)에서 한편으로 로마 천주교회가 성화를 강조한 반면 의인화에 무관심하였다고 비판하면서, 또 한편으로 루터는 의인화를 강조한 반면 성화에는 무관심하였다고 비판한다.
힐데브란트는 이렇게 웨슬리가 루터와 루터주의자들을 비판한 자료들을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 특히 웨슬리는 평생 모라비안주의자들과 논쟁하였다. 모라비안의 센터인 헤른후트를 방문한 후 그들의 정숙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모라비안들과 함께 시작한 페터 레인 신도회에서 분열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진젠돌프와 웨슬리 사이에 완전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진젠도르프는 루터의 ‘simul justus et peccator'에 입각하여 죽기전에 인간의 본성이 변화되는 완전(ingerent and imparted righteousness)이 불가능하며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완전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웨슬리는 은총의 낙관주의(optimism of grace)에 근거하여 죽기 전에도 가능함을 강조하였으며,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완전이 아니라 모든 성도도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질 뿐 아니라 성도 자신의 본성 안에서도 거룩하고 완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진젠도르프는 성화는 의인화와 동시에 순간적으로 주어진다고 주장한 반면, 웨슬리는 순간적으로 뿐 아니라 점진적으로 성화된다고 하였다. 또한 모라비안 목사로 페터 레인 신도회에 와서 일했던 몰더 목사와 웨슬리 사이에 ’수동적으로 전가되는 거룩함‘(imputation)과 ’능동적으로 본성이 실제적으로 변화되는 거룩함’(impartation)의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몰더는 성례전은 믿는자들만을 위한 성만찬임을 주장하였으나, 웨슬리는 믿는 자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이 된다고 강조한다. 또한 몰더는 거룩함은 수동적으로 전가됨으로 다가오기에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한 반면, 웨슬리는 imputation 될 뿐 아니라 impartation되어지기에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pursuit of holiness)고, 다시 말해서 순간적으로 부어질 뿐 아니라 계속적으로 점진적으로 변화되어진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웨슬리는 성만찬 뿐 아니라 기도, 성서 읽기와 듣기 등도 은총의 수단이 됨을 강조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다음에는 성화의 은혜를 받는 수단이 될 뿐 아니라, 신앙의인화 이전에도 성만찬, 기도, 성서 읽기와 듣기가 신앙의인화 은총을 받는 수단이 된다. 선재적 은총으로 이런 열심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는 열심을 내듯이 이런 열심히 마음의 문을 열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열심이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믿음은 어디까지나 은총으로 다가오는 선물이다. 이 선물인 믿음의 은총이 오기까지 가만히 정숙 속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사모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믿음 이전의 행동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은총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라비안주의나 루터 신학은 이를 거부한다. 신앙의인화의 은총이나 성화의 은총을 위해서는 가만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라비안주의를 웨슬리는 그의 설교들 “The Means of Grace," "The Spirit of Bondage and Adoption"에서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뵐러를 중심으로 하는 모라비안들과 함께 시작한 페터 레인 신도회가 분열할 수밖에 없었다. 웨슬리는 감리교도들을 데리고 나와 런던에서 감리교신도회(Methodist Society)를 따로 1740년에 시작하였다.

2. 칼빈적 배경

1) 칼빈의 구원론
칼빈은 인간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어떤 가능성도 배제한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하나님의 능력과 뜻-에 의해서만 인간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한다. 마치 토기장이가 한 그릇은 귀하게, 한 그릇은 천하게 그 뜻대로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 모든 인간 구원의 가능성이 달려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칼빈은 어거스틴의 구원받을 자의 예정(single predestination)을 발전시켜 한 걸음 더욱 나아가 구원받을 자의 예정과 멸망받을 자의 예정도 말하는 이중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을 말한다. 따라서 칼빈에게서 인간의 의지는 노예적이며, 성령이 없으면 자유가 없다. 마치 인간 의지는 두 기사 앞에 놓인 짐승 혹은 말과 같은 존재로서 성령이 타면 천국으로, 악령이 타면 지옥으로 달려간다.
그런데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통치를 말하면서도 행동주의적 성화 신앙을 강조한다.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 누가 하나님의 예정에 들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행동주의 신앙이 나오게 된다. 따라서, 칼빈의 “기독교강요” 전체를 읽어보면 예정론보다 성화론이 더욱 강조된다. 역사신학자 제베르그(Reinhold Seeberg) 나 워커(Williston Wagker)도 그렇게 강조한다. 칼빈은 우리의 성화의 채찍질로서의 율법의 적극적 열할, 곧 제 3의 용법(tertius usus legis)을 강조한다.
거기에 비해 루터는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제 1의 용법)만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까닭에 칼빈은 성도가 율법의 요구에 따라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속 직업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인 줄 알고 그 직업 속에서 확신을 얻으려고 하였다. 또한 그 직업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뿐 아니라 그 직업을 천국으로 만들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금욕적 직업 생활은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 자본주의가 발전한 나라들을 모두 조사해 보니 칼빈주의 신앙이 강한 나라들임을 막스 베버(Max Weber)는 증명하였다(“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칼빈의 성화는 사회적 성화 운동으로까지 발전한다. 곧 제네바 시를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신정정치의 사회로 만들고자 하였다. 많은 시련과 역경을 겪으면서 (개 이름을 “칼빈”이라고 짓기까지 모욕을 당함), 인내를 갖고 사회적 성화 운동을 실천했고, 저속한 노래를 금지시키고 카드놀이도 금지시키며, 76명을 귀양보냈고 58명을 처형시켰다(간음죄, 칼빈 모독죄, 혹은 Michael Servetus의 삼위일체 부인죄 등을 이유로).
루터는 두 왕국설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오른손 왕국(교회)과 왼손 왕국(국가)의 정교 분리를 강조했고,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독재 권력에도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칼빈은 교회의 주인도 그리스도요 국가의 주인도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였다. 곧, 세속국가도 그리스도의 뜻을 거스려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통치가 교회와 국가 속에서 모두 실현되는 역사의 목표를 희망하였다.
정치적 왕국이 단순히 의식주에 관계된 현실 생활에만 관심 갖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거룩하게 경건하게 존경받을 만하게 살도록 관심 가져야 하고, 하나님에 의해 국가가 세워졌기에 국가는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봉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똑같은 하나님의 권위와 통치가 시민법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칼빈의 구원론과 정치윤리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아주 중요하다. 국가의 권위에 대한 복종의 문제에 있어서 두 가지의 예외를 칼빈은 주장한다. 첫째로, 최고 통치자(왕) 밑에 있는 관리들은 백성의 이익을 위해 변호하고 백성들을 대변해야 한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뜻과 법에 어긋난 모든 것은 복종해서는 안된다. 칼빈은 신앙의 문제 뿐 아니라 정치의 문제에 있어서도 통치자가 그리스도의 뜻을 거스를 때 복종새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예로써 예레미야, 다니엘, 나단, 사무엘, 호세아 등 선지자들을 언급한다. 교회는 예언자적 사명감으로 불의한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국가가 하나님의 말슴대로 발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사회적 성화 신앙과 저항 정신은 메리 여왕에게 항거했던 존 녹스, 히틀러 정권에 항거했던 디트리히 본회퍼 등에게로 이어졌다.
이러한 칼빈의 정신은 한국 교회의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도 계속 살아서 숨쉴 수 있다. 한국 교회가 루터식 경건주의 영향을 받아 왔기에 비정치화 하려는 신앙적 입장이 초창기 선교사부터 현대 보수적 교회 지도자들에게 계속 전해져 내려왔다. 이런 의식 구조가 칼빈의 정치윤리에 의해서 거듭나고 갱신되어져야 한다.

2) 웨슬리의 칼빈 비판
물론 웨슬리는 칼빈 사상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칼빈의 율법의 제 3의 용법은(tertius usus legis) 웨슬리에게 영향을 주었다. 칼빈 신학에 기초한 청교도 신앙의 집에서 자란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철저한 칼빈주의적, 청교도주의적 교육 방법으로 자녀를 길렀다. 하나님의 뜻에 자기 의지를 죽이고 복종하도록, 부모에게 철저히 복종하도록 훈련시켰으며, 다섯 살만 되면 주기도문을 가르치고 규칙적으로 어학을 공부시켰다. 수산나는 이러한 영적, 도덕적, 가정적 훈련(discipline)을 청교도적 정신에서 배운 것이다. 후에 “감리교도”라는 별명도 철저하게 규칙을 지키고 규칙적인 경건 훈련을 힘쓰는 것을 비난하는 데서 나왔을 정도로 웨슬리는 어려서부터 평생토록 규칙의 사람, 훈련의 사람이었다. 그는 60년 이상을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한 규칙쟁이였다. 옥스퍼드 신성구락부 회원들은 시간이 바뀔 때마다 기도하고 시편을 낭송하며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금식하는 규칙쟁이들이었다. 또한 1725년 이후 경건 생활을 점검하기 위해 평생 일기를 쓴 사람이다.
웨슬리는 또한 칼빈의 율법의 제 3이 용법을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그의 글 속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의 설교 “신앙으로 세워지는 율법” Ⅰ.Ⅱ, 그리고 “본성, 자연, 소유, 그리고 율법 사용”(The Original Mature, Property, and Use of Law)에서 율법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3편에 달하는 그의 산상수훈 강해 설교들이 성화의 과정에서 율법의 교훈이 적극적으로 필요함을 강조한다.
셀(George Croft Cell)은 이러한 웨슬리의 칼빈 신학적 수용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나 알미니우스주의의 신인협조설을 거부하고 강하게 칼빈적 원죄론과 신앙의인화와 성화에 더 가깝다고 해석한다.
웨슬리가 받아들인 인간의 신앙 체험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서 칼빈적이라고 분석한다. 심지어 셀은 웨슬리의 구원론이 하나님은 모든 것(100%),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것(0%)으로 집중되어진다고까지 해석한다. 인간의 모든 선행도 모두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이해하였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물론 셀은 웨슬리가 루터와 칼빈의 신앙의인화와 카톨릭의 성화를 종합한 에큐메니칼 신학적 공헌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완전 사상을 칼빈적 예정 사상에 예속시킨 것이라고 왜곡되게 해석하였다.
이런 셀의 해석은 웨슬리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카페지(Allan Coppedge)는 그의 책 John Wesley in Theological Debate에서 강조하고 있다. 카페지는 셀이 웨슬리의 예정론 비판을 언급하지 않고, 웨슬리의 신학을 칼빈주의 속으로 끌어들인다고 비판한다. 셀은 웨슬리를 monergistic(하나님 100%, 인간 0%)하게 해석하였다고 카페지는 지적한다. 오히려 웨슬리는 신론적 차원에서는 monergistic하지만 인간론적 차원에서는 synergistic(하나님 100%, 인간 100%)하게 해석하였는데 이것을 선재적 은총(prevenient grace)의 개념으로 종합하였다고 카페지는 해석한다. 인간 구원의 과정에서 하나님이 먼저 주도권을 갖고 은총으로 다가오면 인간이 자유의지로 응답할 수 있다는 복음적 신인협조설(evangelical syne-
rgism)이다. 이 복음적 신인협조설은 인간이 먼저 주도권을 갖고 구원을 위한 선행을 실천하면 하나님이 은총으로 찾아오신다는 펠라기우스나 반 펠라기우스와는 다르다. 펠라기우스에게 있어서 자유의지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본성적 자유의지라면, 웨슬리에게 있어서 자유의지는 선재적 은총으로 회복된 자유의지이다. 또한 카페지는 셀이 칼빈의 예정 사상과 웨슬리의 완전 사상의 차이를 전혀 몰랐음을 비판한다.

3. 알미니우스적 배경

1) 복음적 신인협조설
위에서 칼빈주의와 다른 입장을 취한 알미니우스주의를 살펴본대로 웨슬리는 알미니우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알미니우스적 자유의지론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인간의 선행을 가능케 하는 자유의지는 본성적-자연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선재적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펠라기우스나 중세 천주교의 반 펠라기우스주의의 자유의지론-본성적으로 자유의지를 갖고 태어남-과 다르다. 웨슬리에 있어서 인간은 모두 원죄를 갖고 태어났다. 그런데 성령의 선재적 은총으로 믿는 성도나 안 믿는 자연인들 속에도 부분적인 자유의지의 회복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한다. 이 선재적 은총은 자유의지 뿐 아니라 양심과 종교성으로도 나타난다. 이 선재적 은총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총-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수 있는 것을 뜻한다. 또한 구원의 은총을 열망하는 열심과 사모하는 마음도 의미한다. 그리고 의롭다 함을 얻고 거듭난 성도라도 자유의지 때문에 타락할 수도 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계속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따라서 성령의 은총의 주도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적 응답과 참여에 의해 구원이 완성된다. 이러한 웨슬리의 복음적 신인협조설은 동방교회의 Gregory of Nyssa와 John Chrysostom의 영향, 서방 교회의 Augustine의 영향과 함께 James Arminius의 영향 등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이 알미니우스적 자유의지론은 칼빈의 불가항력적 은총론을 거부한다.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인격적 응답과 책임적 결단을 무시하고 거부할 수 없도록 불가항력적으로 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알미니우스적인 자유의지론은 또한 칼빈의 제한된 속죄론을 비판한다. 곧, 제한속죄론은 그리스도의 보혈이 제한된 사람, 예정에 들어 있는 사람만을 위한 속죄의 은총을 부여한다고 보지만, 알미니우스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이 만인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만인속죄론을 강조한다. 또한 칼빈의 무조건적 예정을 비판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믿는가 혹은 안 믿는가라는 믿음의 조건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예정된 성도들은 하나님이 끝까지 타락하지 않도록 지키신다는 칼빈주의적 견인의 은총을 비판하면서, 성도라 할지라도 자유의지 때문에 타락할 수도 있다고 해석한다.
웨슬리는 이러한 알미니우스적 선재적 은총론을 받아들여서 선재적 은총인 자유의지에 의하여 구원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 수도, 열지 않을 수도 있으며, 구원받은 성도라도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완성할 수도 있고 다윗의 실수처럼 타락하고 떨어질 수도 있다고 해석한다.

2) 은총의 낙관주의
웨슬리는 알미니우스의 영향으로 성화의 완성(Perfection 혹은 entire sanctification)이 죽기 전에 가능하다고 웨슬리는 해석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죄악성의 깊이로는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은총의 높이가 크시기에 크신 은총으로 지상의 완전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절대적 완전은 죽음 후에 영화(Glorification)에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지상의 완전은 의식적인 죄(voluntary sin)는 범하지 않지만 무의식적인 죄(involuntary sin)의 가능성은 남아 있고, 무지(ignorance), 실수(mistake), 유혹(temptation) 연약(weakness)의 상태는 남아 있기에 상대적 완전이다. 그리고 완전은 정착된 상태가 아니고 계속적인 과정(continuous process)속에 있다.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계속 달려가는 것이 완전이다.

4. 동방교회적 배경

웨슬리는 동방교회의 에집트의 수도사 마카리우스(Macarius The Egyptian, 300-390), 닛사의 감독 그레고리(Gregory of Myssa, 330-395), 대설교가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7-407)등의 신학적 영향을 받았다. 아우틀러(Albert Outler)는 웨슬리의 동방교회적 배경을 마카리우스와 닛사의 그레고리에게서 찾는다. 맥코믹(Kelly Steve McCormick)은 웨슬리의 동방교회적 배경을 크리소스톰에게서 찾는다. 그가 동방교회의 영향을 받은 것을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복음적 신인협조설
하나님의 은총만으로 인간 구원이 완성되지 아니하고 인간의 자유의지적 참여로 구원이 완성됨을 강조한다. 그러나 동방교회나 웨슬리가 말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선재적 은총의 개념이다. 곧 구원의 이니시어티브를 인간이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갖고 있어서 하나님이 먼저 은총으로 다가 오시는 선재적 은총으로 회복된 자유의지가 구원에 동참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웨슬리의 선재적 은총의 개념은 동방 교부 크리소스톰의 이해와 연결되어 있다. 젊은 웨슬리는 아버지의 충고 “성 크리소스톰을 마스터하라”를 받아들인다. 베버리지는 고대 동방교회 문헌을 정리 수집한 Pandectae를 편집하였는데, 웨슬리는 이 편집을 통하여 크리소스톰을 소개받는다. 웨슬리는 옥스퍼드 일기에서 크리소스톰을 1726년 초에 읽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웨슬리는 아버지 사무엘의 충고로 크리소스톰을 마스터하였음을 표현하고 있으며, 크리소스톰의 제 1차 자료를 직접 인용하고 있다. 그는 크리소스톰의 저서 13권을 직접 읽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는 크리소스톰을 통해 구원의 신인협조설적 질서를 배웠다. 하나님의 은총의 주도권과 인간의 도덕적 책임성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구원의 질서다. 인간의 책임성을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한다. 크리소스톰에게 있어서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앞뒤 양면과 같다. 은혜가 먼저 역사하면, 자유의지는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한다. 그런데 웨슬리에게 있어서 회개만이 인간의 책임이요, 믿음은 하나님의 주시는 선물이다(엡2:8). 이 점이 웨슬리와 크리소스톰의 다른 점이다. 자유의지는 선재적 은총이요, 믿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첫 은총이다. 그러나 구원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주도권 100%와 인간의 응답 100%라는 도식에서는 같다. 또한 자유의지는 인간 본성으로 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재적 은총으로 회복된다고 보는 점에서 같다.

2) 신앙과 선행
웨슬리는 동방교회 전통으로부터 믿음으로 구원받되 그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날 때 풍성한 구원, 완전한 구원이라는 것을 배운다. 구원의 출발(initial salvation)은 믿음으로 되지만, 구원의 완성(final salvation)은 사랑의 에너지로 채워지는 믿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 의해 완성된다는 점에서 웨슬리는 동방교회적이다. 동방교회의 전통인 “훈련받는 사랑”(disci-
plined love)은 영국 성공회의 전통인 “열망하는 사랑”(spiring love)과 함께 웨슬리의 성화신학을 형성하고 있다. 사랑의 열망과 훈련을 강조한다.
웨슬리와 크리소스톰의 유사성은 믿음과 행함, 곧 사랑의 조화에 있다. 양자는 십자가의 은총은 전가되는 은총으로만 끝나지 않고,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는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의 동참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위한 사랑의 개관적 은총으로 끝날 수 없고, 우리 안에 은혜의 주관적 행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계속 역사 한다. 때문에 양자 모두 거듭남은 우리 안에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주관적 은총이요, 성령이 우리 속에서 사랑의 행위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양자 모두 믿음과 사랑을 동전 앞뒤와 같이 생각한다. 크리소스톰 신학의 주춧돌은 “사랑의 에너지로 채워지는 믿음”(faith filled with the the energy of love)이다. 웨슬리는 이런 개념을 그의 설교들 “에쿠메니칼 정신”(Catholic Spirit), "근본적 본성“(The Original Mature), ”신앙으로 세워지는 율법“(The Law Estab-
lished by Faith),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대하여“(On Working out Our Own Salv-
ation) 등에서 재조직함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발전시킨다.
크리소스톰의 경우, 신앙은 사랑 속에 삼키어져 있다. 또한 신앙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인간이 받아들이도록 힘을 북돋아 주는 사랑의 에너지를 일으킨다. 거룩한 성도의 생활은 사랑에 의해 활기있게 된 신앙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은 개신교의 신앙중심주의와 가톨길의 행위의인화 교리의 제 3의 선택이다. 이 제 3의 방법은 크리소스톰에게서 암시적으로 표현되었으나 웨슬리에게서 확실히 표현되었다. 개신교의 객관적으로 주어진 의(imputed ri-
ghteousness)와 카톨릭의 주관적으로 본성화된 의(imparted righteousness) 사이의 암시적 조화가 웨슬리의 분명한 설명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양자 사이의 차이점도 있다. 크리소스톰은 사랑을 더욱 강조한 나머지 믿음의 부산물로 사랑이 산출의 요소가 아니라 믿음이 사랑의 요소요 사랑의 심부름꾼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믿음은 종교의 문(door of religion)이요 사랑이 종교 자체(religion itself)라고 보았으나, 사랑은 어디까지나 믿음의 은총을 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며 믿음을 심부름꾼으로 부리지는 않는다. 결국 크리소스톰과 같은 동방교회 전통은 웨슬리보다 사랑과 행함을 더욱 강조하는 기독교의 도덕적 성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3) 점진적 성화
성화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고 점진적으로 계속 성장되어 가고 성숙되어 가는 과정임음 웨슬리는 동방교회로부터 배웠다. 동방교회로부터 웨슬리는 완전도 정착된 상태가 아니라 과정임을 배운다. 웨슬리는 동방교회의 성화신학적 전통을 따르기에 순간적이고 정지 상태의 성화, 서방 카톨릭적 영성과 다르다. 또한 정지 상태의 정숙주의를 강조하는 웨슬리 당시의 루터주의나 칼빈주의 영성과도 다르다. 그래서 웨슬리는 평생 카톨릭주의자들, 루터주의자들, 그리고 칼빈주의자들과 신학적 논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웨슬리는 동방교회 전통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의 파트너” 혹은 “동참자”라고 성도의 성화를 해석한다.
그레고리는 그의 글 “모세의 생애”(The Life of Moses)에서 출애굽에서 가나안 정착까지의 과정을 성도들의 성화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애굽에서의 탈출, 광야에서의 사건들은 성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영적 사건들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출애굽은 회개와 거듭남을 통해 세속 죄악의 삶을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모세의 지팡이에 의해 쓴 물이 단물이 된 것은 부활의 신비에 성도가 연합된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부활의 신비를 경험한 성도는 전보다 더욱 달콤하고 신선한 삶을 누린다고 주석한다. 외적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는 십자가의 승리를 미리 보여주는 것을 뜻한다. 그레고리의 성화의 순례는 웨슬리의 구원의 완성을 향한 순례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웨슬리는 동방교회 전통에 서 있다.

4) 완전
웨슬리의 완전 사상은 동방 교회 뿌리를 가진다. 동방교회에서 말하는 신화는 웨슬리의 온전한 성화, 혹은 완전 이해로 나타났다. 웨슬리는 그의 완전 교리를 마카리우스에게서 배운다. 웨슬리는 마카리우스의 설교들을 감리교도들이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도서목록인 A Christian Library에 넣었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들에 대해 설명하는 서문을 붙이기도 하였다. 자이거는 마카리우스의 크리스천 영성의 개념은 닛사의 그레고리에게서 나왔다고 그의 저서 Two Discovered Work of Ancient Christian Literature: Gregory of Myssa and Ma-
carius (Leiden, 1954)에서 지적하고 있다. 자이거는 마카리우스의 대부분의 설교들이 닛사의 그레고리에게 빚지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닛사의 그레고리의 “성령안에서의 완전에 관하여”(Peri Teleiotetos en Pneumati)에 영향받고 있음을 말한다. 웨슬리는 마카리우스와 고레고리로부터 완전이 크리스천 생활의 목표임을 배웠다.
마카리우스와 그레고리로부터 성령의 불가항력적인 힘보다도 오히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에 대해서 배웠다. 그레고리는 “성령의 역사와 은사를 통하여”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인간의 완전에 관계되는 은혜와 선행의 상호 협조를 주장한다. 그레고리의 중심 주제는 성부와 성령의 동일본질론과 함께 영적 완전이었다. 그레고리에게 있어서 영혼은 성화 완전을 전진하는 지속적인 전진에 개입되어 있다. 성도가 완전의 과정에 높이 이르면 이를수록 참 완전의 목표는 더욱 드러난다. 그레고리는 각 성도는 완전의 과정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는 명령에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5. 어거스틴적 배경

웨슬리는 동방교회 전통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서방교회의 신학자 어거스틴에게서도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웨슬리는 어거스틴의 선재적 은총 개념과 은총의 양면성 등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1) 선재적 은총
웨슬리는 어거스틴의 예정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어거스틴의 선재적 은총 개념을 자신의 사상으로 끌어들인다. 그는 그의 설교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대하여”에서 어거스틴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다. “우리 없이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Qui fecit nos sine nobis, non salvabit nos sine nobis). 하나님은 우리의 참여와 더불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아니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지 아니하면, 좁은 길을 가지를 힘쓰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웨슬리는 강조한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선재적 은총의 개념은 어거스틴의 개념을 수용하고 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자유의지는 선재적 은총이다. 물론, 초기 마니교와의 논쟁 시에 쓴 “자유의지론”에서는 본성적 자유의지론이 강하다. 왜냐하면 타락 이전의 아담의 자유의지를 중심으로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펠리기우스주의자들과의 논쟁 시에는 선재적 은총으로서의 자유의지 개념이 강하다. 어거스틴에게서 선재적 은총은 의지를 세워주고, 자극하고, 움직이고, 후원하고, 유지시켜 주고, 강화한다.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은총과 자유의지에 관하여”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없이 일하시지만 우리가 의지할 때 우리와 협력하신다고 말한다. 물론 어거스틴은 은혜가 불가항력적이며, 가벼운 폭력으로 다가옴을 주장한다. 이 점에서는 웨슬리와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웨슬리에게 있어서 은혜는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은총의 양면성
웨슬리는 어거스틴의 은총의 양면성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루터는 어거스틴의 한 면만을 받아들였다. 맥그레스(Alister McGrath)는 루터가 어거스틴의 주관적 본성적 의(imherent and imparted righteousness)의 차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한다. 종교 개혁은 어거스틴의 재발견이요, 반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한 도적이었지만 루터는 어거스틴의 법적으로 객관적으로, 전가되고 옷 입혀지는 의만을 이해하였지, 의인으로 화하는 개념을 강조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루터는 어거스틴의 ‘낯선 의’(aliena iustitia Dei)의 개념에서 종교개혁의 슬로건인 신앙의인화와 용서받은 죄인을 발전시킨다. 어거스틴의 논문 “영과 문자”(De Spiritu et Littera)에서 루터는 전가하시고 옷 입히시는 의(aliena iustitia Dei)만을 발견했으나 웨슬리는 그 위에 우리의 본성마저도 의롭게 변하는 은총을 이해하였다. 다시 말해서 루터는 어거스틴으로부터 신앙에 의한 의인화를 배우고 있으나 웨슬리는 의인화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으로부터 사랑에 의한 성화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웨슬리는 어거스틴의 양면, 의인화와 성화, 전가되는 은총과 속성을 변화시키는 은총을 모두 살린다. 어거스틴은 인간은 인간 의지의 참여로 신적 본성에 참여할 수 있고 신적 본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주셨다고 믿는다.
삼위일체의 생명에 참여함으로 죄인인 인간이 신성해 질 수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웨슬리처럼 죽기 전의 완전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고, 완전이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성적 욕망이 죽는 날까지 계속 인간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완전은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고 죽음 이후 천국에서나 죄 짓지 않는 완전 자유가 가능한다고 믿었다.

6. 영국 성공회와 로마 천주교회적 배경

웨슬리는 옥스퍼드 시절에 심취하였던 영국 성공회와 로마 천주교회의 신비주의의 선행의인화(justification by good works)와 성화(sanctification)를 루터의 신앙의인화(justification by faith)에 의해 올더스게이트를 체험한 이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신비주의를 비판하게 되었다. 그는 신비주의를 비성서적, 비지성적, 비사회적 신앙이라는 점에서 비판한다. 신비주의는 성서의 객관적 진리보다 주관적 체험을 강조하기에 위험하고 지성적 신앙보다는 감성적 신앙에 치우칠 위험이 있으며, 공동체적 성화보다 고독하고 현실도피적이고 은둔적인 성화를 추구하기에 위험하다고 웨슬리는 비판한다. 웨슬리는 그의 산상수훈 설교 중에 “세상의 빛과 소금”에 관한 해석에서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종교이며, 고독한 은둔자의 종교로 만드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본다. 그래서 그는 속회 공동체를 통해서 사회적 경험과 훈련의 성화 생활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화와 완전 이해를 전개하는 과정에서는 성공회와 천주교의 신비가들의 사상을 다시 끌어들인다. 토마스 아 캠피스(Thomas a Kempis),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윌리엄 로우(William Law) 등의 영향을 받았음을 그는 그의 글 “기독자의 완전”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의 성화 이해와 완전 이해에서 영국 성공회와 로마 가톨릭의 신비주의적 요소가 나타난다. 곧 그리스도처럼 본성이 실제로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변한다는 사상(impartation)은 계속 견지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성화 개념은 개신교적이면서도 가톨릭적이다. 개신교적 신앙의인화에 기초한 객관적 성화의 주입과 가톨릭적 사랑에 의한 주관적 본성 변화의 성화를 변증법적으로 조화시키고 있다. 결국 웨슬리는 “성결에 이르도록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faith working by love leading to holiness)을 영국 성공회와 로마 천주교회의 신비주의로부터 배웠다.
웨슬리는 자신을 영국 성공회 목사라고 늘 생각했고 영국 성공회의 성경, 전통, 이성의 세 가지 신학 규범에다 체험을 추가하였다. 또한 영국 성공회의 39개 신조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는 영국 성공회와의 연합 정신을 염두에 두면서 “에큐메니칼 정신”이란 설교를 하였다(1749). 서로의 차이가 있음에도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정신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성서에서 벗어난 교리와 신학의 다양성을 받아들이자고 제안하지 않았다.
그가 에큐메니칼 정신을 갖고 항상 노력하는 가운데, 1794년 50명의 영국 성공회 목사들에게 인쇄된 세 종류의 편지를 보내면서 세 가지 복음적 주장에 기초한 일치를 주장하였다. 첫째는 원죄요, 둘째는 신앙의인화이며, 셋째는 마음과 생활의 성결이었다. 이 호소에 동조하는 목사들은 답장해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세 명만이 동조하는 답장을 보내왔다: Richard Hart, Walter Sellon, Vicent Perronet.
웨슬리는 죽는 날까지 자신을 영국 성공회 목사라고 생각하였고 영국 성공회와 연대하려는 노력을 추구하였다. 또한 분열을 막기 위해서 ‘감리교회’(Methodist Church) 라고 이름 붙이지 않고 ‘감리교 신도회’(Methodist Cociety)라고 이름 붙이면서 영국 성공회를 개혁하고 갱신하는 신도회로 생각하였다.

7. 뮌쳐적 배경

1) 뮌쳐의 구원론
뮌쳐에 의하면 성서에만 의존하는 루터의 문자적 종교는 하나님의 은총의 주입을 수동적으로 받게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뮌쳐의 민중은 역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에 참여하고 능동적으로 구원 완성에 참여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타울러의 설교들은 뮌쳐에게 성화의 유형을 제시해 주었다. 뮌쳐의 경우,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에서 자라나는 영혼은 지고의 혁명적 고난을 당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과 사는 것에 대한 바울적 가르침을 사랑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것이다. 그의 기본적 관심은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다. 뮌쳐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한 심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리스도는 형벌을 받음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분들 중 최초의 수난자라고 간주된다. 그리하여 죄인의 아ㅣㅐ인화는 신아에 의해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형벌을 받아들임으로써 성취된다. 그 자신이 율법에 의해 야기되는 고난을 통한 변혁을 느꼈기 때문에 전 세계도 연약한 피조성으로부터 강한 왕국으로 변혁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뮌쳐의 고난 신학은 종교적 경험의 권위로 집중된다. 루터적 개신교에서 잊혀진 종교 경험의 역동성과 신자들의 개인 생활의 변혁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뮌쳐는 루터를 달콤한 그리스도를 외치는 설교가로 비판했다. 그리고 자신은 고통 당하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로 생각했다. 고난을 통하여 구원의 과정은 계속된다.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외적 고난과 내적 고난이 극복될 수 있다. 그래서 뮌쳐의 구원 이해는 웨슬리와 루터가 강조한 복음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있다. 곧 계명을 실천하는 행동이다. 그것은 신비주의적 경험에서 표출되는 행동이다.
뮌쳐는 타울러의 성화론적 영성 이해의 용어를 사용했다. 그의 영성 이해의 단계는 첫째,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생각하면서 성령을 통하여 두려움을 나타낸다. 이렇게 영혼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나타난 두려움은 놀라움과 경외와 복종을 초래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이 놀라움으로 우리 곁에 오시는 것이다. 둘째, 영혼의 심연이다. 영혼의 심연은 하나님께 대한 영적 두려움을 가지는 하나님 경험의 자리이다. 영혼의 심연은 구원의 활동을 시작하는 성령의 사역을 기다린다. 셋째, 영적 죽음이다. 세속적 욕망으로부터의 분리를 통하여 그의 영혼은 비게 된다. 또한 빈 마음으로 성령이 역사하도록 내맡기고 양보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는 성령은 인간의 자아 죽음을 요구한다. 성령은 철저하게 그의 일을 성취하신다. 그런 다음 그리스도가 영혼의 심연 속에 내려오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임재와 성령 충만으로 신적 탄생이 일어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나라는 중세적 신비적 합일을 통하여 신자들의 마음 속에서 시작한다. 넷째, 영적 유혹이다. 바로 이런 영적 충만의 과정 중에 영적 유혹이 다가온다. 뮌쳐는 “구원의 확신에 이르기 전에 삶의 의욕조차 거의 상실하는 유혹의 폭풍우와 홍수가 밀려온다”고 주장한다. 이런 유혹과 시련의 폭풍우가 지난 후에 그 최후의 탈출을 시도하게 된다. 다섯째, 기대 속에 기다리는 것이다. 고어든 랍은 해석한다: “희망을 넘어선 것을 앙망하게 되고 오래 기다림으로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의지를 추구하게 된다. 이 때 그는 반석에 기초해 있으며 하나님은 멀리서 기적적으로 나타난다. 이 기다림으로 영혼은 성령의 은사들을 체험한다. 성도는 성실하게 주님의 말씀에 영적으로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세속적인 탐용을 멀리하는 기다림이다. 이 기다림은 오직 절제와 양보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헌신으로 완성될 수 있다. 여섯째, 하나님의 내주하심이다. 여기에서 기다림은 인간 영혼 속에 하나님이 내주하심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인간 영혼의 소유주이신 그리스도의 영에 아주 강하게 붙들려 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이 거하시고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다. 인간 영혼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성령의 의해 변혁되지 않으면 안되고 정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신앙의 달성을 경험하게 되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고, 하나님을 닮게 된다. 뮌쳐는 그 하나님의 내주하심을 자유라고 해석한다.
뮌쳐는 구원을 이기적 생활에서부터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나아가는 순례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루터는 뮌쳐의 사상을 로마 가톨릭의 성화 사상, 곧 인간의 노력에 의해 구원을 추구하는 것으로 비판한다. 뮌쳐는 루터의 신앙과 후기 중세 신비주의를 복합시켰다.
루터는 신비주의를 가볍게 여긴다. 신비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그의 낯선 의의 개념 때문이다. 곧 인간의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총과 선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손님처럼 낯설게 부어지는 것이다. 뮌쳐는 초기에 루터에게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을 설교했으나 점차 신비주의적, 묵시문학적 저술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사도행전과 묵시문학에 넘치게 나타나는 환상과 꿈들은 뮌쳐를 황홀경으로 몰아갔다. 비록 객관적, 성서적 근거를 제시했을지라도 그는 영적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주관적, 내적 말씀과 주관적 경험을 강조했다. 그것은 신앙의 실존적 경험이다. 그는 점차 신앙의 객관성을 배제하고 거부하기 시작했다. 뮌쳐에게 주관적, 내적 경험으로부터 감각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신앙이 나오게 된다.
뮌쳐는 독일 신비주의의 두 가지 전형적 표현들, 곧 타울러의 설교와 독일 신학에 영향을 받았다. 타울러의 기본적 관심은 하나님과 인간, 창조주와 그의 피조물의 연합과 하나됨에 있다. 타울러는 죄와 악의 근원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다만 인간 존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고만 강조했다. 말씀을 듣기 위하여 인간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 때 성령은 가르치기 위하여 강림하신다. 그리하여 타울러의 설교는 인간 존재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뜻 사이의 협동에 의해서 구성되는 신인협조설적 경향이 있다. 웨슬리가 성화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했더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자유의지의 역할을 강조한 점에서 뮌쳐와 웨슬리에게는 모두 신인협조설적 요서가 있다.
뮌쳐는 말씀/신앙의 신학적 패러다임을 성령/변혁의 패러다임으로 바꾸었다. 개인적 구원으로서의 계시 대신에 계시는 사회적 변혁으로 이해된다.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활동의 초자연적 제한 대신, 성령/변혁의 패러다임을 또한 세계와 사회를 구원 사건의 영역으로 보고 있다.
뮌쳐는 특별히 성령의 제 3시대가 폭력적 혁명의 힘으로 성취된다고 선포했다. 그는 어거스틴으로부터 루터에 이르는 시민 복종의 정통 교리를 신뢰하지 않았다. 기드온으로부터 엘리야까지 불의한 무신론에 대항한 거룩한 투사들의 예들을 뮌쳐는 발견했다. 뮌쳐는 자신을 다니엘과 동일시 할 뿐 아니라 예레미야와도 동일시 했다. 그의 성화신학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개입의 생생한 기대와 연결된 정치적, 사회적 변혁을 일으켰다. 하나의 능력 있는 사회적 신비주의가 뮌쳐로부터 태어났다.
그는 두 가지 중요한 주제-인간의 성화와 역사의 종말-를 선포했다. 뮌쳐는 기독교 신앙을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로 해석했고, 그 당시의 열광적인 선지자가 되었다. 이러한 견해로부터 그는 신정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뮌쳐는 어떤 종류의 세속적 정부도 거부한다. 그는 무정부주의자요 과격한 혁명가였다. 그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완전한 혁명과 역사적 변혁을 이룩하기를 원했다. 그는 내적 개혁과 사회적 개혁을 위해 마 13:24-30을 사용했다. 가라지는 우리의 마음의 내면적 밭에서부터 뿌리뽑히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추수 때에 사회적, 정치적 포도원에서부터 뿌리뽑히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았다.
뮌쳐는 성화를 매일의 개인적 생활에서의 자아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옛 아담은 매일 십자가에 못 박혀 영적으로 죽어야 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으로 성장해야 한다. 뮌쳐에게 의인화는 구원의 외재적 상태, 곧 믿음의인화가 아니요, 성령을 통한 현재적 내적 과정이다. 의인화는 성령의 점진적 역사, 곧 신자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내주에서 시작한다. 뮌쳐의 신학은 성령 충만으로 채워지는 인간의 영적, 진보적 하나님 경험으로 집중된다. 로란드 베인튼(Roland Bainton)과 칼 홀(Karl Hall)은 뮌쳐를 감정 혹은 경험의 수단으로 구원받은 자의 정체를 확신시킨 개척 종교개혁가라고 해석했다. 고든 럽은 또한 뮌쳐를 그의 영성과 경건주의 때문에 ‘최초의 감리교도’라고 부른다.

2) 웨슬리와 뮌쳐의 구원론 비교
뮌쳐는 웨슬리처럼 성령의 내적 확증의 교리를 강조했다. 웨슬리처럼 뮌쳐는 로마서 8장을 신자들의 확증을 위한 중요 구절로 사용했다. “선택된 자는 성령의 내적 확신을 가진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 영에게 확증시켜 주기 때문이다” “성령이 그의 복을 우리에게 확증시켜 주지 않으면 아무도 복 받을 수 없다” 바로 이 점에서 웨슬리와 뮌쳐는 유사한 성화 교리를 갖고 있다. 웨슬리처럼 구원에 대한 뮌쳐의 개념은 이중적이다. 내적 신비주의와 외향적 행동주의가 뮌쳐 속으로 아주 논리적으로 조화 있는 구조 속으로 짜여 있다. 뮌쳐에게 개인 구원의 내적 질서, 곧 중세적 영성에 기초한 성화는 중요한 혁명적 행동주의가 된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외적 실현이 지상에서 창조된다. 이러한 신학 체계는 웨슬리와 뮌쳐 속에 모두 뿌리내리고 있다.
뮌쳐의 사상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의인화의 은총의 전가됨과 부어지심보다는 성령의 역사를 통한 행동주의와 본성적 변화 개념이기 때문에, 뮌쳐의 신학 체계는 성화의 본성적 변혁 개념을 강조하는 웨슬리의 것과 아주 유사하다. 웨슬리가 루터적 모라비안주의를 비판했을 때, 그 비판은 루터적 신앙제일주의와 정숙주의와 전가사상으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또한 웨슬리는 다른 한편으로 의인화의 전가되고 부어지는 은총을 무시하고 성화 은총만을 강조하는 가톨릭적 신비주의와 선행 사상을 비판한다. 웨슬 리가 의인화보다 성화를 강조했을지라도 그의 성화 교리는 강하게 의인화 은총의 부어지심에 기초하고 있고 또한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뮌쳐는 의인화에 대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뮌쳐의 신학이 은총의 내면화에 집중되는 반면에 웨슬리의 신학은 내면적 은총과 동시에 외재적 은총의 양면성이 있다. 웨슬리에게 의인화는 전가되고 부어질 뿐 아니라 본성적으로도 의롭게 되는 은총이다. 또한 성결도 부어지고 전가될 뿐 아니라 본성적으로도 성결해지는 은총이다. 바로 이 점에서 웨슬리는 뮌쳐와 다르다. 웨슬리는 신비주의의 주관적 신앙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웨슬리의 사랑의 개념은 뮌쳐에게서는 정의로 이해된다. 웨슬 리가 보았던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 방법은 정의로운 칼의 사용을 통해 구현된다. 뮌쳐가 성화의 과정에 폭력 사용을 요구하는 반면에 웨슬리의 크리스천의 완전한 방법은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비 폭력 사랑의 길이다.

8. 역사신학적 배경에 관한 종합과 분석

위에서 살펴본 대로 다양한 역사신학적 배경을 비판하고 수용하면서 웨슬리에 의해 종합되고 성숙하게 된 구원론을 총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① 웨슬리는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구원론의 뿌리인 신앙의인화에 철저히 서서 그의 구원론을 전개한다. 따라서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요, 의인화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옷 입혀집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② 그러나 그 신앙의인화가 수동적으로 전가되는 의인화로만 머무르는 루터와 칼빈의 한계를 넘어서서 성화의 과정에서 능동적으로 본성도 의로워지는 의인화로까지 웨슬리는 강조한다. 이것은 어거스틴과 동방 교부들로부터 배운 사상이다.
③ 웨슬리는 루터나 칼빈의 노예의지론의 한계를 또한 넘어선다. 하나님만이 홀로 구원을 완성하지 않으시고 인간과 더불어 구원을 완성해 간다는 신인협조설을 강조한다. 그러나 인간의 선한 본성에 의해 선행의 노력으로 구원을 출발할 때 은총이 다가온다는 펠라기우스주의나 반 펠라기우스주의의 신인협조설과는 다른 복음적 신인협조설을 강조한다. 곧 하나님의 선재적 은총이 먼저 주도권을 갖고 다가올 때 인간이 응답하고 동참함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시 어거스틴과 동방 교부, 그리고 알미니우스주의에서 영향받은 것이다.
④ 웨슬리는 루터나 칼빈에게서 무시되어 왔던 거듭남의 은총을 의인화 동시에 강조한다. 우리 밖에서 임하는 객관적 은총만을 강조하는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전통을 넘어서서 우리 안에 주관적 은총으로 체험되는 거듭남을 강조하는 경건주의 사상을 웨슬리는 받아들인다. 그러나 감정적 체험을 객관적 은총보다 더욱 강조하는 경건주의 혹은 신비주의의 열광을 위험시하고, 거듭남과 의인화의 양면을 웨슬리는 동시에 강조한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한계와 경건주의 혹은 신비주의의 한계를 웨슬리는 극복한다. 따라서 뮌쳐의 신비주의적 영성의 한계를 넘어선다.
⑤ 웨슬리는 루터가 무관심하였던 성화론을 구원론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구원의 출발-의인화-과 영적 탄생-거듭남-보다도 오히려 구원의 과정과 영적 성장과 성숙을 의미하는 성화를 더욱 중요시 하였다. 이 성화론은 어거스틴, 영국 성공회. 로마 천주교회, 동방교회 등의 배경을 재해석함으로써 발전시킨다.
⑥ 웨슬리는 칼빈의 수동적으로 전가되는 성화론의 취약점을 보충하였다. 사랑과 선행과 경건의 성화 생활이 칼빈에게서 강조되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이지 인간은 노예 의지적 상태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자유의지적 참여로 성화의 행동이 일어난다고 해석한다. 까닭에 웨슬리는 수동적 성화와 능동적 성화가 변증법적으로 조화를 이룬 성화를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참 거룩함을 닮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그래서 뮌쳐처럼 능동적 성화만을 강조하는 내면적 성화나 사회적 성화를 거부한다. 뮌쳐처럼 영적 확증과 사회적 성화를 강조하되 그것이 주관적이고 능동적인 것으로만 이해되지 않고 수동적이고 객관적인 은총의 출발을 전제한다.
⑦ 웨슬리는 구원의 완성은 믿음과 행함으로 성취됨을 주장한다. 구원의 출발은 오직 믿음으로만 되어지지만 구원의 완성은 믿음과 선행으로 되어진다고 확신한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와 야고보서를 종합하였고, 종교개혁의 신앙과(의인화) 로마 가톨릭의 선행(성화)을 종합하였다. 까닭에 개신교와 가톨릭의 에큐메니칼적 대화의 길을 열어 놓았다.
⑧ 웨슬리는 완전 교리에 의해 종교개혁 구원론을 더욱 성숙시키고 완성시켰다. 루터나 칼빈은 인간의 죄악성 때문에 죽기 전의 완전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보았으나, 웨슬리는 죄악성의 깊이보다 은총의 높이가 더욱 크심을 동방교회 입장에서 주장하는 은총의 낙관주의에 의해 완전의 실현 가능성을 강조함으로써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보다 열심있는 구원 완성의 순례자들이 되게 하였다.
⑨ 웨슬리는 사회적 성화와 희년 사상을 강조함으로 종교개혁 하나님 나라 사상의 현실성을 더욱 구체화하고 행동화 하는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뮌쳐의 묵시 문학적 종말론을 거부하고 만인사제설과 직업의 소명 의식에서 실현된 종말론을 강조하는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종말론을 보다 더 역사화하고 사회화 하는데 웨슬리의 하나님 나라 사상이 크게 공헌하였다.

 알프스의 눈동자 2013.12.01 10:12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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