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학

[스크랩]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곱 마디

수호천사1 2017. 5. 20. 22:41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곱 마디



1. 용서를 간구하심


십자가 형벌의 가혹한 육체적 고통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아주 힘들게 마지막 몇 마디를 남기셨다.성경은 오직 일곱 마디의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말씀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어 가면서도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통제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한 마디 한 마디 모두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앞으로 두 주일 동안, 예수님의 못박히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것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그가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들을 자세히 살펴 보려고 한다. 오늘 우리는 ‘용서를 구하시는 그의 간구’로 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용서를 구하시는 간구. 십자가에 달려 있으면서 그리스도는 그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비를 구하셨다. 누가는 갈보리에 십자가가 세워진 후 곧바로 군인들이 그의 옷을 나누려고 제비 뽑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께 그들의 용서를 구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그들이 거기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두 행악자를 하나는 예수님 우편에 하나는 예수님 좌편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눅 23:33-34)

라일(J.C. Ryle)은 “이 말씀은 아마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계실 동안에 하신 말씀이거나, 혹은 십자가가 세워지자마자 하신 말씀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대한 대 제사장께서 위대한 희생제사의 보혈을 흘리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중보 기도를 시작하셨다는 값진 설명이다.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고, 그의 처형을 기뻐하고 손뼉을 쳤지만, 예수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취할 행동과는 완전히 다르게 반응하셨다. 그의 원수들을 협박하거나, 저주하거나, 비난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죽음을 둘러 싼 수 많은 일들에 대해서 대 제사장적인 중보를 하신 것은 자신을 죽인 살인자들을 대신해서 제사장의 중보를 하신 것인데, 이것은 구약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이 중보의 행위는 십자가의 모든 의미를 요약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7)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 이르면 그를 죽이는 살인자들을 저주하거나 욕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께서 사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에게 천둥과 같은 심판을 내리기를 원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오로지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가지셨다. 그분은 죄의 값을 치르시기 위해서 죽어가셨다. 그리고 고통이 절정에 달했던 순간에도 그분의 마음은 자비로 그 마음을 가득 채우고 계셨다.

무지하다고 해서 죄를 사면받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악하게 행동했고, 자신들이 악을 행한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빌라도 자신도 예수님의 무죄를 증언했다. 산헤드린 지도자들도 예수님에게 뒤집어 씌울 합법적인 죄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군인들과 군중들도 마찬가지로 불의가 행해진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지만, 모두가 이 일을 즐기며 동참하였다.

갈보리에서 예수님을 조롱했던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이 행하셨던 기적을 목격한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그가 이러한 방법으로 죽을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결코 모르는 상태에서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르고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변명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못 박는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욱 사랑했기에 영적으로 무감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이 죽음으로 몰아 넣은 그 분이 세상의 빛인 것을 알지 못했다.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전 2:8) 예수님의 기도는 어떻게 응답 되었는가? 많은 방법으로 응답 되었다. 그 첫번째 응답은 예수님 옆에 달렸던 강도의 회심이었다. (눅 23:40-43) 바로 이어 예수님을 매달은 군인들 중의 하나였던 백부장의 회심이다 (47절). 다른 응답들은 그가 매달린 사건 후 몇 주일 후 그리고 몇 달 후에 일어난 일들이다. 특히 오순절날 수 많은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회심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손뼉을 치고 그분의 십자가 밑에서 야유를 보냈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6:7을 보면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나중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였다고 한다. 자비의 증표였다. 하나님의 지름길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그를 죽인자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셨다고 해서 십자가 사건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즉각적이고 조건없는 용서를 보장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의 중보기도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과 구세주로 모시며 돌아올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이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이켜 하나님에게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구하는 자들에게만 용서가 주어졌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사랑하는 독생자를 죽인 자들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실 것이었다.

죄를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용서가 주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을 미워하고 믿음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은 비록 예수님이 용서를 구했다 하더라도 자동적으로 죄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백부장이나 십자가의 강도, 제사장들, 또 군중 속의 사람들 처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구하신 기도의 응답으로 넘치는 자비를 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기도는 예수님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는 증표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서 큰 소리로 기도하셨다(요11:42)

그들의 죄는 너무나 흉악한 것이어서, 만일 증인들이 예수님이 자신을 죽인 살인자들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듣지 못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저지른 죄는 용서 받지 못할 죄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구하신 용서는 모두에게 값없이 주시는 것이다(계 22:17). 사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신다. 돌아 온 탕자의 아버지는 용서하시기를 즐겨하시는 하나님의 생생한 모습이다. 하나님은 모든 죄인이 그와 화목하게 되기를 원한다 (고후 5:20; 겔 18:3-32; 행 17:30 참조). 하나님은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만일 그 약속이 생명을 만드신 바로 그 주인을 죽인 사람마저 용서하시는 것이라면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더 풍성한 것을 받겠는가?



2. 구원의 약속


여러분은 기도의 응답을 즉시 받았다는 이야기들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궁핍한 가족이 있지도 않은 음식에 감사하는 기도를 드렸고 어떤 사람이 음식을 가지고 문을 두드렸다. 은행 구좌에 돈이 한푼도 없는 사람이  도와주시기를 기도하고 나서 바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수표를 받았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두번째로 하신 말씀은 그를 죽인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 제일 처음으로, 즉각적으로 영광스럽게 이루어진 것을 알려준다. 이는 그 용서가 얼마나 자비롭게, 심지어 전혀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자에게까지도, 주어졌는지 보여준다.


조롱에서 참회로


점차 고통의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리스도를 조롱했던 두 강도 가운데 한 사람이 그의 마음의 변화를 일으켰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바꾸게 했는지는 언급이 없다. 아마 강도는 자비를 구하는 예수님의 기도를 듣고, 이 기도가 자신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알고서,용서를 구하고 싶은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돌리게 했던지 간에 그것은 놀라운 기적이었다.

십자가 상의 강도는 이 장면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람들보다 가장 악한 사람이었다. 그와 그의 동료는 일생동안 도둑질과 사람을 해치는 일을 하던 범죄자이었다. 그들은 죽어 가는 순간에도 얼마남지않은 힘을 그리스도를 조롱하는 일에 사용할 정도로 악이 뼈속까지 가득찬 사람들이었다. 회개한 강도가 결국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는 것이 없느니라”(눅 23:41)라고 하며 동료를 나무란 것으로 보아 그들도 그의 무죄함을 알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중 한 사람이 회개할 때까지, 어쨋든 그 둘 다 조롱과 저주를 퍼부었었다.

그러나 한 강도의 조롱은 침묵으로 바뀌었고 그 침묵은 회개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강도의 마음은 완전히 바뀌었다. 모든 고통과 욕설을 묵묵히 참으시며 그에게 고통을 가하는 사람을 전혀 비난하거나 욕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그 강도는 가운데 십자가에 매달린 이 사람이야 말로 그가 주장하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회개하였다는 증거는 그의 행동이 즉각적으로 바뀐 것으로 알 수 있다. 조롱하는 그의 입술이 그리스도를 향한 찬양으로 바뀐 것이다.

먼저 그는 죄 속에 있는 그의 동료를 질책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을 상당한 보응을 받은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0-41)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받아 마땅한 형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으신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 시선을 돌리고 그분을 주님으로 인정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42절)

그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왕으로 고백하는 순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말씀 하신 두번째 말씀이 뒤따랐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


보증된 축복


그 어떤 죄인도 그렇게 확실한 구원의 확신을 받은 적이 없다. 이 가장 자격없어 보이는 성도는 즉각적으로 그리고 조건없이 주님의 천국으로 들어갔다. 이 사건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보여 주는 가장 확실한 본보기 가운데 하나이다. 이 사람은 구원을 얻을 만한 공로가 전혀 없었다. 사실 그는 어떤 공로를 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고통 중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얻을 만한 공로를 세울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강도는 절망적인 그의 상황을 알고 “나를 기억하소서”(42절)라며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자비를 구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절망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자비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요청했다. 그의 태도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고 한 세리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 두 사람이 영생을 얻고 천국으로 영접된 것은 다른 사람의 공로 덕분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완전한 용서와 영생의 확신을 주셨다. 이것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성경의 진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예수님은 죽어가는 강도에게 그가 받을 자격이 없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약속하심으로써 그가 지금껏 저질러 온 모든 악행을 덮어 주셨다. 예수님은 그가 스스로 자신을 위해 속죄나 고해 성사나 어떤 종교적인 의식을 행해야만 한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는 연옥에 가지 않았다. 만일 그러한 곳이 있다면, 그리고 반드시 연옥에서 믿음을 키워야하는 교리가 진리라면, 이 사람은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받은 용서는 완전하고 공짜이었고 즉각적이었다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것이 그리스도가 한 말씀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 말은 강도가 들어야 할 말씀의 전부이기도 하였다. 그는 여전히 말할 수 없는 육체적인 고통 속에 있었지만, 그의 영혼의 비참함은 사라졌다.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그는 죄의 속박으로 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그에 옆에 계신 구세주께서 그를 위해 죄를 짊어 지셨다. 그리고 강도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 옷 입었다. 곧 그들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강도는 에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3. 어머니를 부탁하심


그리스도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그의 관심은 자기 자신이나 그에게 필요한 것들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서, 얻어 맞고, 피흘리며 죽어 갔지만, 그의 초점은 그의 하나님께서 이루셨던 일에 있었다. 우리는 이 마지막 일곱 마디의 말씀들을 통해서 이것들을 살펴 본다.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어머니를 위해 어떻게 준비 하셨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어떤 어머니도 원하지 않는 장면


십자가 근처에는 예수님의 원수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가 체포되고 산헤드린으로 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이 예루살렘에 떠 돌던 그날 아침에 그를 사랑하는 친지들은 그에게 달려 왔다. 요한복음 19:25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 19:25)

어떤 학자들은 요한이 단지 세 여인만 언급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모와 굴로바의 아내 마리아를 동일한 인물로 본다. 하지만 예수님의 모친과 이모가 마리아라는 같은 이름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보다 요한은 세 사람의 마리아와 (예수님의 모친, 글로바의 아내, 막달라 마리아) 함께 네번째 인물(마리아의 자매)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여인은 아마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였을 것이다. 요한은 26절에서 그의 복음서에서 항상 자기 자신을 표현할 때 사용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말하며 자신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나타내고 있다. (요 21:20-24참조)

예수님이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 본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큰 고통이었을 것이 틀림없지만, 예수님의 어머니이었던 마리아보다 더 힘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수년전 예수님의 탄생을 보고 늙은 선지자 시므온이 그녀에게 말했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눅 2:34-35)

시므온이 말한 칼이 그의 첫 아들의 죽음을 지켜 보는 그녀의 마음을 찔렀다.

그녀는 예수님을 어릴 때부터 양육했다. 그녀는 그가 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다. 그녀가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을 때, 주위의 사람들은 야유와 조롱을 그녀의 아들에게 퍼 봇고 있었다. 예수님은 피를 흘리며 수척한 모습으로 무력하게 십자가 매달려 있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의 고통을 지켜 보는 것 뿐이었다. 이러한 광경은 그의 어머니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쳐 울부짖지 않았고, 두려움으로 도망치지도 않았으며, 끔찍한 장면을 보고 넋을 잃고 쓰러지지도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의 이러한 용기는 본이 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슬퍼하는 그녀를 보셨다. 그리고 그가 십자가에서 하신 세번째 말씀은 그의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애정 어린 사랑을 나타낸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 19:26-27)

예수님께서 “보소서 아들이니이다”하신 말씀은 자기 자신을 가르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아마 그는 요한을 향해 머리짓을 하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장차 닥아올 마리아의 안위를 걱정해서 그녀를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노년의 마리아를 돌보는 책임을 요한에게 맡기신 것이다.


특별한 관계


이것은 아름다운 몸짓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말해 준다. 비록 그는 가장 극심한 고통을 당하며 죽어가고 있었지만,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셨다. 사랑의 왕이신 예수님은 곁에 서 있는 이들의 세상적인 필요를 걱정하셨다. 비록 그는 구속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십자가 사건 중에도 그는 한 여인 그의 어머니를 기억하고 그녀의 필요를 준비해 주셨다.

그는 그녀를 “여자여”라고 불렀다.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님이 그녀를 “어머니”라고 불렀던 적이 없다. 단지 “여자여”라고 부르셨을 뿐이다. 그러한 표현이 공손치 않은 표현이 아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마리아에게 단지 아들 이상의 의미를 지닌 분이심을 나타낸 것이다. 그분은 또한 그녀의 구세주이셨다(눅 1:47 참조). 마리아는 죄 없는 공동 중보자가 아니다. 그녀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만 하는 비천한 죄인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장성한 후에도 그녀에게 예수님은 주님을 따르는 다른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이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제자이었고,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었다.

그리스도 자신도 마리아를 특별히 높여 존경하는 태도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셨다.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이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라고 하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 11:27-28)라고 하시며 바로 그 사람의 생각을 바로 잡아 주셨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였기에 다른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복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그녀에게 특별한 호칭, 공동 중보자, 하늘의 여왕 혹은 중세 시대의 미신으로 마리아에게 붙인 인기있는 개념은 옳지 않은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그의 아들의 구속의 역사 속에 그녀를 같은 사역자로 생각하여 그녀를 특별한 숭배의 대상으로 높여 어떤 직함을 그녀에게 붙이는 것은 우상 숭배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모친을 어머니로 알고 사랑하고 존경했을 뿐이다. 그분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다섯번째 계명을 온전히 지키신 것이다. 자식된 자는 마땅히 늙은 부모를 돌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가 해야할 의무를 태만히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마리아를 그의 배다른 형제들에게 맡기지 않으신 것은 특별한 일이다. 마리아는 분명히 과부였다. 복음서에는 요셉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에 관련된 내용 외에는 없다. 그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즈음에 죽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은 마리아와 요셉은 정상적인 부부 생활을 가졌던을 말해주고 있다. (마 1:25) 로마 가톨릭 교회는 마리아가 영원히 동정녀의 상태이었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마리아가 영원한 처녀로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성경은 예수님에게 형제들이 있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막 3:31-35; 요 2:12; 눅 8:19-21). 마태는 그들의 이름까지 알려준다. “야고보, 사이몬 그리고 유다”(마 13:55)인데, 이들은 실제로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태어난 예수님의 이복 형제들이다.

왜 예수님은 그의 형제 중 한 사람에게 그의 어머니를 부탁하지 않으셨을까? 요한복은 7:5은 “이는 그는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비로서 신자가 되었고, 사도행전 1:14은 그들이 오순절 다락방에서 기도하기 위해 모인 무리 가운데 예수님의 형제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그러나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그들은 분명히 신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그의 어머니를 그가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던 것이다.



4.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시다


유명한 유언이 비극적 인 말 일수도 감격적인 말일 수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들의 마지막 말을 조심스럽게 선택할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마지막 숨을 거두며 어떤 지혜, 사랑, 고백 혹은 어떤 마지막 말을 할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을 지난 주말부터 준비하면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신 마지막 말씀을 살펴보고 있다. 주님은 자신이 범하지 않은 수많은 죄의 형벌로 고통 당하시면서 그의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우리가 이미 살펴 본대로 그의 말씀들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목적에 초점을 맞추며 그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신 네번째 말씀은 훨씬 더 신비롭고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지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다” (마 27:45-46).

언뜻보면 마치 예수님이 단지 시편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을 인용하신 것과 같이 보인다. 하지만 시편 22편은 십자가 사건을 예언한 말씀이다. 오히려 이 시편은 십자가에서 세상의 죄를 다 지고 돌아 가실 것을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절규를 예언하신 것이라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네번째로 하신 말씀은 시편을 단순히 인용한 것이 아니다.


왜곡된 십자가

 

어떤 주석가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를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실제로 버림을 받은 것으로 느꼈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더더욱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버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단지 성경을 인용하신 것이지 그가 마음에 진정으로 느끼신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십자가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어가고 있었다.

그에게 전가된 것은 그들의 죄의 형벌이었고 그래서 그는 그들을 대신하여 그 죄의 대가로 고통 당하고 계셨다. 그 형벌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퍼부어 진 것이었다. 신비하게도 십자가에서의 그 끔찍한 시간들 동안에, 아버지는 죄에 대한 그의 진노를 전부 퍼 부으셨다. 그리고 그 진노를 받는 분은 그의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이것이 십자가의 참된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다르게 설명하려는 사람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진실 전부를 부인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을 보이신 것이 아니다. 그는 단순한 순교자가 아니셨다.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악한 사람들에게 희생당하신 것이 아니다.

죄의 끔찍함을 보여 주기 위해 공개적으로 처형된 죄인도 아니다. 그는 사탄에게 속전을 지불하기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자유주의자들, 이단들, 혹은 그리스도교를 표방한 가짜 종교들이 수십년에 걸쳐서 설명하는 그런 이유로 달리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대속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장차 그를 믿을 모든 죄인들의 사악한 죄악을 마치 그의 아들이 저지른 것과 같이 아들을 징계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하심으로 구속받은 자들이 마치 그리스도의 의롭고 완전한 삶을 산 것처럼 대하시고 용서하실 수 있으셨다.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4,5)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9-10)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롬 8: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요일 2:2).


화목 제물


‘화목 제물’이란 하나님을 만족하시게 하기 위해 드리는 제물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원받은 죄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 위한 희생이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사 53:10).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하신 것을 보고 만족하셨다(사 53:11). 그리스도는 그의 피를 흘리시므로 화목제물이 되셨다(롬 3:24, 히 2:17).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만족시키셨던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하나님의 의로움과 하나님의 공의로움이었다. 그분이 흘리셨던 피는 하나님께 드리는 속죄 제물이었다. 그의 죽음은 인간 세상의 정의를 위해서 죽으신 것도 아니었고, 사탄에게 속전을 지불하기 위해서 죽으신 것도 아니었다. 사탄을 비롯해 어느 누구도 죄인을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요구할 권리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선택된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속전을 지불하셨다(딤전 2:6).

그리스도는 우리들을 대신해서 죽으셨으며 우리가 우리들의 죄로 인하여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를 다 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형벌은 너무나 심해서, 육신이 있는 사람이 지옥의 형벌을 영원히 받아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 쏟아진 하나님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시작도 하지 못할 정도이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이었다. 십자가에 매달려 당하는 육체적인 고통은 그 자체로도 끔찍했지만, 아버지의 아들을 향한 진노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가 섞인 땀을 흘리실 정도로 몹시 고통스러워하셨고, 또 십자가를 앞두고 그렇게 힘들어 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값을 치르는 것에 포함된 이 모든 것들을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들이 잘못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실 때에 지옥에 대한 가장 큰 두려움과 또 그 이상의 것을받으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다.

이와 같이 끔찍하고 신성한 시간에, 아버지가 자신을 버리신 것과 같았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사랑하시지 않으신 적이 한번도 없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부 하나님은 우리의 대속제물인 아들로 부터 얼굴을 돌리셨다.

십자가 위에서 과다한 출혈과 질식과 모든 고통 속에서 모든 기력을 잃은 그리스도께서 “큰 소리로”하나님을 부르신 것은 단지 시편 말씀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이것은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절규였고, 그 사실을 시편이 미리 예언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단지 이번 주일 뿐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육체적 고통과 영적 고통을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감당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를 대신하여 겪으신 한량없는 희생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5. 목마름을 호소하시다


고난 주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예수님의 칠언을 살펴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고후 5:21) 이사야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고난을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 (이사야 53:3)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다시 생각하며 죄가 없이 완전한 삶을 사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치르신 질고를 생각하며, 우리를 구원하신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께 감사와 찬양으로 겸손히 주님을 묵상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역자 주)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 마르다’ 하시니”(요19:28).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섯번째 하신 말씀이다. 운명하시기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목마름을 호소하셨다. 앞서 그리스도는 쓸개를 탄 신 포도주 마시는 것을 거부하셨다. (쓸개는 진통제 역할을 한다. 역자주) 그가 극심한 탈수로 인하여 목마름을 호소하실 때 사람들은 ‘신 포도주를 적신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서 주었다. 요한은 기록하기를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29절).

목마름을 호소하신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가 사람이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그는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보통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모든 한계를 다 경험하셨다. 십자가에 달려서 목마름으로 고통 당하시는 시간보다 더 생생하게 이 사실을 증거하는 장면은 없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당해 보지 못한 혹독한 육체적 고통을 느끼셨다. 예수님이 엄청난 갈증을 호소하실 때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주므로 이 또한 성경 말씀의 성취를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시 69:21).

(다음의 글은 맥아더 목사님의 책 “The Murder of Jesus”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



6. 승리를 선포하시다


우리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가 있고, 오류가 없으며 충분한 문서로서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과 죽음에 대해서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그 본문만으로 그의 희생의 충분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 고통의 순간 순간들을 단지 짧은 몇 구절로 다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을 위해 담당하신 그 고통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일곱 마디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다.

오늘은 , 여섯번째로 십자가에서 승리를 선포하신 예수님의 외침의 의미를 알아보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요 19:30) 헬라어로 예수님의 여섯번째 말씀은 한 마디로 Tetelestai! 이라는 한마디 외침이었다. 누가복음 23:46은 예수님은 이 말씀을 큰 소리로”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풍성한 의미가 담긴 승리의 외침이다. 이 말씀은 단지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 끝났음을 알리는 의미가 아니라 , 성부께서 맡기신 모든 사역을 완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보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한갓 불쌍한 희생자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분은 전 우주의 역사상 가장 큰 승리를 거둔 승리자이시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완수되었으며, 죄인을 위한 구속이 이루어졌다. 그분은 결국 승리를 거두셨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대신해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계명을 완성하셨다. 완전한 속죄가 이루어진 것이다.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법이 성취되었고,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었다. 죄인을 위한 속전이 온전히 지불되었고, 죄의 빚이 완전히 탕감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죽으신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는 일만 남았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 다른 것을 더할 필요가 전혀 없다. 따라서 세례, 고해 성사를 비롯한 다른 모든 종교 의식을 예수님의 속죄 사역에 더하려고 했서는 안된다. 인간이 그 어떤 사역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어 내신 구속의 효과를 더하거나 증진시킬 수 없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공로를 세울 필요가 전혀 없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공로만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에 충분한다.

Tetelestai!  (다 이루었다)는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완전히 이루어졌다.””너희는 그 은혜로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7. 마지막 기도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가장 강력한 말씀은 아마도 그가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들일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려서 질식하는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큰 소리로 외치셨다. “다 이루었다!”. 그 짧은 한 마디 선언은 그의 삶을 마치는 것을 뜻하였지만, 그러나 그 한마디는 구세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었다. 본질적으로 “다 이루었다!” 라는 말씀은 아주 많은 일의 시작이었다.

그리스도는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신 뒤 곧이어 마지막 일곱번째 말씀을 남기셨다. 일곱번째 말씀은 성부 하나님께 올리시는 기도였다. 그분의 기도에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셨다. 그리스도의 일곱번째 말씀은 누가의 기록에 나타난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눅 23:46).

그리스도의 죽음은 여느 인간의 죽음보다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근본적으로 달랐다. 겉으로 보면 그분은 사악한 이들의 손에 의해 살해되셨다고 할 수 있지만(행 2:23), 사실 그분에게 십자가의 고통을 받게 하고, 그분이 상하는 것을 기뻐하신 분은 바로 성부 하나님이셨다(사 53:10 참조). 또한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죽음을 원하셨던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셨다. 그리스도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 놓셨다(요 10:17-18).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자신을 못박은 사람들을 원망하면서 죽으시지 않았다. 또한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기 시작한 때부터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그리스도는 자신의 주권적 의지에 의해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참아내셨다. 한마디로 그분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고통을 완전히 통제하셨다. 요한은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여 19:30)고 기록한다.

모든 일이 정확하게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대로 일어났다. 예수님 뿐 아니라 빌라도, 헤롯, 산헤드린 지도자들, 로마 군인, 군중 이 모두가 정확히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정하신 목적을 온전히 이루는데 이바지 했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조금도 흔들림 없이 모든 일을 통제하는 주권과 위엄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분을 사랑했던 자들이나 그분을 조롱했던 이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비극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의 순간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 점을 분명히 한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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