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이 말하는 진정한 성례는 무엇인가?
"모세 율법의 성례는 그리스도를 예시했지만, 우리의 성례는 바로 그리스도를 말해준다." - 존 칼빈
성례 = 'Sign'(회고록, 언약) + '도장'(인, 싸인)
1. 성례란 무엇인가?
성례 즉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전통 의식인 '성만찬과 세례'를 이승구 교수는 "그리스도인이 연례적인 성례에 참여한 후, 신앙이 성장하거나 확신하여 믿음을 강화하는 일이 정체된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심각한 경고에 앞서 신앙이 퇴보하는 자들은 성례가 없다고 한들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며 살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라고 말한다.
"교회가 성장하려면 성례를 자주해야 한다"는 이승구 교수의 말에 대한 의미를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다면 성례란 무엇인가? 또 해야 될 이유나 매주 혹은 매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가? 필자도 '성례'라는 단어에서 품어져 나오는 짙은 종교적인 색체가 낯설게만 느껴지긴 하다.
성례의 본질에 앞서 우선 칼빈이 말하는 성례란 "우리의 약한 믿음을 붙들어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선한 뜻을 나타내시고 확증해 주시는 일의 외적 표시이다"라는 말을 남긴다. 쉽게 말해 우리의 믿음을 보강시켜주는 믿음의 비타민이라고 해야 할까? 과연 이러한 믿음의 비타민과 같은 성례라는 그 무엇이 우리의 믿음을 높여 주는가? 비타민이 신체를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듯, 믿음을 건강하게 하는 성례는 과연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2. 성례와 언약 관계
성례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 창세기에서 시작되는 그 유래를 찾아보아야 한다. 몇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창세기 17장에 구약의 할례를 제정한 구절이자 구약 성례의 모범이 되는 대표적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이를 보며 성례의 의미를 하나하나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구약의 '아브람(높은 아비)'에게 나타나 시작된다.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많은 무리의 아비)으로 바꾸면서 이름의 목적보다 큰 의미,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나라 대표자가 될 것이고 이는 그들을 영원히 구원의 반열에 올려 놓으려는 하나님의 지상 목표를 세우는 데 공조한 셈이다.
원래 창세기 12장부터 시작된 그 언약들은 전체적으로 아담의 후손을 세우고, 이는 다윗의 가지(후손)를 통해 예수까지 이어지는 마지막 구속 사건의 장황한 일대기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아브라함과 함께 약속을 시작한 하나님은 그와 약속의 내용을 가르쳐주고 이를 지키게 한다. 그 내용은 바로 아브라함 후손에 대한 구약의 징표이자 의무인 '할례의 행위', 남자의 전유물인 양피 혹은 표피 제거를 말한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표징 혹은 표(Sign)'인 것이다.
이승구 교수는 언약은 "반드시 양쪽(two party)이라는 2명의 계획된 자들로서 언약의 관계와 대상이 수반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언약 주체와 언약자 간의 언약을 내용으로 하는 계약서와 같은 "그 언약 안에 맺은 표징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성례라는 언약의 표(Sign) 즉 '구약의 언약에 대한 약속'과 동시에 도장이라는 '인'이 함께 들어있어야 된다"라고 계약과 도장으로 성례 유례의 시작과 완성을 알리고 있다.
성례의 시작인 언약은 반드시 내용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해 인 혹은 도장을 찍으면 이제 비로소 그 내용의 효력이 발생하고 서로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는 의무가 생기게 된다. 만약 계약서 안에 아무 내용 없이 도장만 찍혀있다면 계약 의무적 측면에서 아무 소용없듯이 내용 없는 언약 역시 무용지물과 마찬가지다. 이제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바로 '계약서의 내용'과 같은 '언약' 안에 할례의 행위이자 '인 혹은 표(Sign)'로서 효력이 발생하기에 이른다.
이승구 교수가 말하는 '약속'을 하고 '인'을 친다고 할 때, 약속은 구약의 약속이자 언약에서 출발하고, 신약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라는 '인'을 쳐준 것이며 신약의 예수가 이루어 놓은 구속사는 이제 우리의 전부를 말한다. 그럼으로 이제 신약 시대를 지난 오늘날 더 이상 무언가 더해지거나 빠지는 내용이 없는 'Sign'으로 계시와 새 언약의 확고한 내용과 그 효력이, 표에 도장을 사용함으로 성립되게 된 것이다. 계약서의 내용을 다시 수정하려면 하나님에게 다시 허락을 맡아야 하지만 이제 신약의 계약은 새언약으로서 완료되었다고 예수는 말하고 있다.
그럼으로 구약과 신약의 성경에 수록된 그러한 내용이라는 것에 수반된 'Sign', 즉 언약의 확증인 '도장'으로서 확증된 '성례'의 신호탄을 알리고 있으며 이는 바울의 말대로 "그(아브라함)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 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주장한 근거를 보여주는 셈이다.
예수가 부활함으로 '인'에 대한 확증이 '언약의 표'와 '믿음의 기둥'로써 '할례'가 더욱 더 한층 세련된 의미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과 더불어 이러한 믿음의 기둥이 계속 자라나야 한다. 칼빈은 성례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함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만드는 행사이다"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3. 성례 기능과 믿음의 확장
칼빈은 "성례의 기능 중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 눈앞에 두고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성례에 대한 의도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연관되어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확실한 증거를 보여 하나님의 은혜를 한층 더 보여주는 것으로 그분의 뜻을 확고히 하려는 피조물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성례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라고 말한 이승구 교수는 이러한 의미를 더욱 더 확장하여 "어느 사람이, 즉 믿지 않는 자가 떡과 포도주를 먹었으면 그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다만 그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을 가지고 예수의 살과 피를 기념하여 그것을 기리면서도 그러한 과거의 반성을 토대로 한 '믿음의 성숙과 확장'이라는 타이틀에 애정을 쏟아 붓지 않는다면 늘 예수가 기념한 성찬이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세례 역시 성례의 명령에 대한 의미가 퇴색될 것은 분명하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존 칼빈 역시 "곧 성례를 '우리 믿음의 기둥'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눈에 보이는 말씀(언약의 표)으로써 믿음의 기둥이 서 있는 것이고 이 또한 '거울'로써 풍성한 은혜와 열매를 보게 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십자가 보혈, 부활이었고 그것을 보여준 것이 '성례' 혹은 '표'로써 믿는 자들에게는 늘 열려 있는 문이 된다.
이러한 성례는 바로 우리의 믿음을 섬기도록, 다시 말해 그 믿음을 기르고 연습시키고 증대시키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효력 발생과 아울러 확증이라는 말로 나타내는 이러한 '인'은 우리의 언약으로 시작된다. 행복하게도 예수는 우리를 잘 알고 있기에 우리의 내부적 혹은 외부적인 면에서 나타난 은혜의 표시로 선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성례의 반론
첫째, 성례에 구태여 참여하지 않아도 믿음이 증대되지 않는가?
여기서 우리는 칼빈이 초판을 저술할 때 성례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한 마디 따끔하게 논쟁하려는 그의 심리적 상태를 볼 수가 있다. "우리의 믿음이 좋은 것이라면 더 좋게 될 수가 없을 것이라 한다"라는 그의 말을 들어보면 당시 칼빈이 공격하고자 했던 그들은 자신만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생각을 고치려고 하고 있는 듯하다.
이승구 교수가 말하길 "하나님의 약속('성례'와 '언약의 표')은 이해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 하나의 의미는 "하나님의 성례를 지키고 새로운 의를 이루게 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또한 그가 가르쳐준 성만찬을 통해 더 보탬으로, 언제나 그것으로 인해 믿음이 증대될 수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 성례를 통해 믿음이 증대된다면 성령은 헛되이 주셨다?
성령은 우리에게 어두움을 조명할 수 있는 시야를 주셨다. 그 기능으로 인해 우리는 성령의 빛이 없이는 너무 어두워 볼 수가 없고 감각이 둔해지기에 이른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이라는 단어도 예수가 주었지만 어둠을 밝히 보여주는 '성령의 조명'이 도와주사 우리는 성령에 의해 움직이는 '능동적 신앙'이 되며 또한 성령에 의거하여 개인의 노력이 수반되는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수동적 신앙'까지 발돋움 친다.
성례의 지침도
말씀(언약의 표 'Sign'의 가르침과 지도 ⇒ 성례의 강화 ⇒ 성령의 빛
칼빈이 말하는 것으로 주께서 우리를 그분 자신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지도하신다는 것이 하나요, 그는 말씀을 성례로서 확고히 하신다는 것이 둘이요, 우리의 지성을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며 또 우리의 마음을 여사 말씀과 성례가 확실히 자리매김함으로 들어오게 하는 게 셋이라는 순서대로 주장하고 있다.
이는 성령의 인도에 의거하여 순서대로 반복 순환하게 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례가 혹은 성례만이 믿음을 주지는 않는다. 성령의 말씀을 주어야 진정 믿어지고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성령이 그 토대가 되어 말씀하셔야 하는 것과 그분의 인도하는 인격체로서 우리를 감동하실 수가 있다는 설명의 토대가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된다.
5. 성례의 오해
성례에 '그 어떤 맹세들'을 하라고 하지 않았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에도 자꾸 우리가 무언가를 만족하거나 이룩하려는 인간의 행위로서 성례를 강조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고 이승구 교수는 교회의 현주소를 꼬집고 있다. 성례로서의 선물을 선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그것을 양도하는 못난 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실정이 오늘날 기독교의 현주소이다.
천주교 교부들이 사용한 "사크라멘트(sacrament, 예수 그리스도가 제정한 성례 의식)"라는 다소 종교적 색체가 농후한 단어를 들고 나온다. 칼빈은 "나는 정말 많고도 명백한 논증을 통해 교부들이 '사크라멘트'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에는, 그 성례가 거룩하고 영적인 일들의 표징이라는 뜻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뿐이었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그 단어에 조금 불쾌한 듯 내비친다.
어거스틴은 "성례를 하면 은혜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 성례 자체는 그리스도의 주신 예식이자 '표'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처럼 성례 자체가 무언가 힘을 주는 것으로 착각하거나 혹은 그러한 예식이 비밀스러운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신비로운 역할이나 마술은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다.
"카톨릭은 성례가 구원이다"라고 하는 오해가 불거지면서 그 당시 어거스틴의 말을 오용하게 되어 잘못 빚어지기도 한다. 결국 칼빈은 "고대의 저술가들의 글 속에서 읽어볼 수 있는 부적절한 성례 예찬론이 또한 영혼들을 미혹했다"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6. 성례의 진정한 의미
유대인들에게도 성례가 존재한다. 유대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성례적 측면에서는 달랐으나 표시하고자 하는 바는 동일했고 보이는 현상, 즉 가시적 양상은 달랐으나 그 영적인 능력이 일치함은 바로 성경 전체를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 키이다.
어거스틴 역시 성례의 원칙은 '십자가'라는 것에 대한 분명한 근거가 카톨릭에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본질적인 증거는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 느끼고 깨달아 알게 하고, '물'로서 세례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의미로, '피'는 예수의 보혈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그 십자가를 말하고 있는 언약의 표시이다.
성례가 'Sign' 즉 언약의 표이자 도장이라는 언약의 확증으로 인함을 시작으로 신앙이 우리에게 믿음으로 성숙하지 못하거나 믿음과 사랑에 식어진다면 다시 한 번 점검요소로서 성례하기 전에 우리의 마음을 살펴야 할 것이다.
연례행사로서 성례를 기념한 제네바 교회에서 매주 성례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칼빈을 내쫓을 때의 사유는, 매주 해야 하다 보니 예배 하기 전 주부터 성도들의 신앙과 삶을 살펴야 하는 불편한 진리를 성도와 교회가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는 반드시 성례를 하기 일주일 전부터 자신의 삶과 신앙을 교회와 성도들 간의 그러한 상태를 매번 확인하여야 했기에 자칫 잘못했다가는 성도의 신앙을 아주 형식적으로 만들게 되거나 자신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기 싫어하게 되는 끔찍한 사태를 부른다는 것을 교회와 성도가 알았던 것이다.
예배를 매주 드려 형식으로 치우쳐 감사와 은혜가 메마르는 것을 참지 말고, 성례가 제대로 준행되어 자신을 거울처럼 돌아보고 날마다 내면이 메마르지 않도록 살펴야 한다. 그런 강화된 성도의 신앙과 믿음을 통해 늘 성장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예수님은 보고 싶어 할 것이다.
"Sacraments, ordained of Christ, are not on ly badges or tokens of Christian men's profession; but rather they are certain signs of grace, and God's goodwill towards us, by the which He doth work invisibly in us, and doth not on ly quicken, but also strengthen and confirm! our faith in Him."
(예수 그리스도가 명령한 성례들은 오직 그리스도인의 고백에 대한 '교환권'이나 '인식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믿음을 확신하고자 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극하게 하는 것으로, 우리 내면에서 눈에 띄지 않게 역사하는 것에 의거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호의'이자 은혜의 그 어떤 사인이기도 하다.) - 미국 감리교 감독교회 조항들 중 일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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