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순교자 명단
강 준 의 목사
1893년 6월 26일 평북 선천에서 출생.
조선기독교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 만주에서 선교사역을 하였고 귀국하여 300만 부흥전도회를 이끌며 목회 하던 중 패퇴하던 공산군에게 연행옥고, 몸이 결박된 채 심한 매를 맞으며 1950년 9월 20일 목이 매달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복음을 전하였으며 손과 발목이 잘린 시체로 발견되었다.
김 대 홍 집사
1898년 6월 11일 전북 김제군에서 출생했으며, 1937년 기독교를 받아들여 1940년에는 집사로 안수 받았으며, 그 후 금형교회를 설립하였다.
6·25때 교회를 떠나지 않고 지키다가 1950년 7월 12일 공산군에게 연행되었으며, 고문 끝에 생매장되었다.
김 상 찬 장로
1892년 4월 15일 경남 고성군에서 출생했으며,진주성경학교를 수료하고 성곡교회 장로로 봉 사하였다.
6·25때 공산군이 교회당을 비우라고 하자거절했으며, 1950년 8월 10일 살해되었다.
순교 장면을 목격한 부면장이 예수 믿고 가족이 성곡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김 창 화 교사
1915년 1월 9일 평북 의주군 피현에서 출생했으며, 1946년 월남하여 영락교회 중등부와 서울 사대부속중학교에서 기독학생회 지도교사로 활동하였다.
6·25때 공산당의 인민재판에 회부되었으며,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기도하는 자세로 1950 년 8월4일 살해되었다.
노 명 갑 집사
1920년 1월 8일 평북 의주에서 노문곤의 장남으로 출생.
파란곡절 많은 상황 속에서도 신앙 지켜 공산당에게 장인 이재규 목사와 함께 흉기에 맞아 순교했다.
노 형 래 집사
1923년 7월 28일 충남 서천에서 출생했으며 배재학교를 졸업한 후 부친 노승우 장로와 함께 한성교회를 개척하였다.
6·25가 일어나면 공산군이 강요하는 배교를 끝까지 이겨내면서 1950년 8월 살해되었다.
노 홍 균 전도사
1915년 6월 26일 전남 영암군에서 출생하였으며,목포 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서호교회를 개척하였다.
6·25전란 당시는 목포노회 파견전도사로 해남군구림리교회를 담임하고 있었으며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신앙지조를 굽히지 아니하며 1950년 8월 24일 뒷산으로 끌려가 마침내 몽둥이로 타살되었다.
도 복 일 목사
1914년 경북 경산에서 출생. 감리교 만주신학원을 졸업하고 만주연합교회 목사로 시무하다 해 방된지 1년 후 귀국하여 당진교회를 시무하였고1950년도에 삽교로 옮겨 시무하면서 6·25전란 으로 흩어지다 남은 교인들을 돌보며 교회를 사수하다 동년 9월 21일 패퇴하는 공산군에 의 해 삽교천뚝방에서 총에 맞아 순교하였다.
류 상 덕 집사
1891년 6월 10일 전북 김제에서 유정백의 장녀로 출생.
1941년부터 예수를 믿어 독실한 성도로써 6·25때 만경지서에서 둔기에 맞아 숨졌다.
림 호 연 장로
1883년 4월 17일 괴산에서 출생했으며, 충북 덕촌교회에서 장로로 봉사하던 중 6·25 전란을 만났는데, 교회를 떠나지 않고 신앙을 지키다가 청주형무소에 수감됐으며, 1950년 8월 14일 공산군에게총살되었다.
문 준 경 전도사
1891년 2월 전남 신안 출생.
성결교 성서 학원을졸업, 중동리교회에서 교역하였다.
일제 말기에 기독교 탄압으로 고난을 겪었으며,해방 후에는 섬사람의 폭행으로 수난 당하였다.
6.25때 목포 정치보위부로 연행되어 10월 5일 살해되었다. 1966년 중동리 해변에 순교비가 섰다.
박 기 천 전도사
1920년 4월 2일 경북 금릉군에서 출생했으며, 가천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 6·25를 만났다.
8월 27일 주일의 지방의원 선거를 거부하자 공산당에 의해 1950년 9월 당그레산 밑으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박 동 춘 집사
1918년 5월 22일(음) 전북 정읍군 태인면에서 박찬국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박현철의 전도 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일제 탄압으로 인하여 공직을 사직하고 신앙생활에 몰입하였으 며 고등성경학교를 거쳐 매서로 활약하며 전도인의 사명을수행하던 중 공산당에 의해 체포 되어 정읍경찰서유치장에서 옥고중 불에 타 순교하였는데 그의 나이 33세였다.
박 복 수 집사
1915년 3월 23일 김제군 봉지면에서 박윤경의 아들로 출생.
금평교회 집사로 시무중 공산당에 의해 찬송 부르며 순교했다.
박 봉 진 목사
1890년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했으며, 성결교 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여주 하리 교회와 철원교 회에서 목회하였다.
일제 치하 신사참배 반대로 1941년 12월 철원 경찰서에 구금되었고, 1944년8월15일 고문에 못이겨 숨을 거두었다.
박 상 건 목사
1897년 1월 14일 개성 출신으로 장로회 신학교를졸업한 후 청주제일교회를 시무하면서 신사 참배반대로 옥고를 겪었다.
6·25때에는 서대문 형무소 교도목사로 있으면서 공산기관 정치보위부에 연행되어 고문으로 숨졌으며, 아들 박영희 장로도 1950년 8월 1일 납치되었다.
박 석 현 목사
1897년 전남 진도군에서 출생했으며, 나주읍교회를 거쳐 광주 양림교회를 시무하였다.
1950년 7월 23일 침입한 공산군에 의하여 장모와부인, 그리고 외아들 원택과 함께 가족전부 가 연행되어 고문 끝에 살해되었다.
박 영 근 목사
평북 철산에서 출생했으며, 1932년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철산동문교회에서 공산 치하 주 일선거를 반대하였다.
6·25 당시 풍천교회를 시무하면서 공산당이 회의장소로 교회당을 비우라고 강요하자 거절하고 아들 박춘산 집사와 함께 총살되었다.
배 덕 영 목사
1901년 12월 곽선병 목사의 아들로 경기도 차주에서 출생했으며, 연희전문과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스카렛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북한 공산 치하 성화신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강당에 김일성의 사진을 못 걸게 하였고, 기독 교도연맹 위원장 수락을 거절하여 1946년 12월 16일 연행되었고, 1950년 10월 평양감옥에서 총살되었다.
배 영 초 전도사
1908년 4월 14일 평남 용강군에서 출생.
1925년농업전문학교를 졸업. 향리에 명덕중학원을 설립,기독청년운동과 육영사업을 병행하다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1946 년 6월 감리교 강서 지방 문동교회 전도사로 신앙절개 굳게 지켜 기도하던 시무현장에서 공 산당에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서 옥고중 패퇴하는 공산군이 감옥에 불을 질러 학살되었다.
백 봉 렴 전도사
1906년 8월 12일 평북 의주군에서 출생했으며,신의주 제2교회에서 믿음이 자라 장로회신학교 에입학하였고, 신사 참배 거부로 투옥되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석기장교회를 개척하였고, 남가좌교회를 목회하였으며 1945년 9월 중국 공산군 에게 교회 뜰에서 총살되었다.
백 인 숙 전도사
1917년 평북 신의주에서 출생했으며, 평양여자신학교와 일본 요꼬하마여자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주기철 목사를 모시고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수난을 겪었다.
6·25가 일어나기 며칠 전 공산당에게 장수은 전도사와 함께 연행되어 살해되었다.
서 두 성 목사
1920년 2월 11일(음) 경북 영주군 풍기에서 출생. 서울 신학교를 졸업, 배임교회 목사로 시무하며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고 교회를 사수하던 중 패퇴하는 공산군에 의해 수원 근교 야산에서 무참히 살해되었다.
손 양 원 목사
1902년 손종일 장로의 장남으로 경남 함안에서출생했으며 장로회신학교를 졸업, 나환자 애양 원교회를 시무하였다.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5년간옥고를 치렀으며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으로 두 아들을 잃었으나 범인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아 "사랑의 원자 탄"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6·25때 공산군에게 총살 순교하였다.
신 석 구 목사
1875년 5월 3일 충북 청주군에서 출생, 감리교 목사로 서울 수표교회를 시무하면서 33인 민족 대표로 2년반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 직후 3·1절 방송 사건으로 북한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었으며, 반동결사회 조직의 혐의로 진남포 중앙교회 사택에서 연행되어 1950년 10월 10일 총살되었다.
오 계 환 장로
1912년 10월 7일 전북 고창에서 신앙의 가정 오병권의 2남으로 출생하여 보통학교를 졸업, 바 쁜농사일을 하면서도 교회봉사를 우선하는 철저한신앙의 소유자이다.
1949년 10월 2일 장로가 되었고, 6·25동란중 교회를 떠나지 않고 지하실에서기도하면서 사수 하다 후퇴하는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1950년 10월 7일 용성리 마을 뒷산에서 심한 고문 끝에 생매장되었고, 그의 부인 김금이 집사와 4살난 아이, 9개월된 태아까지 학살되었다.
오 병 길 전도사
1897년 3월 29일 전북 고창군에서 출생. 숭일학교를 거쳐 광주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양월리 용산,흥덕, 동호교회의 전도사로 시무하였고, 6·25동란중 지하실에서 예배드리던 중 공산당 의 습격으로세부자가 함께 연행되어 동 9월 9일 죽창에 찔려숨질 때까지 신앙절개 굳게 지켰 다.
오 주 환 집사
1922년 9월 10일 전북 고창군에서 출생.
그의 부친 오병길 전도사와 함께 지하예배실에서 기도중 산당에게 체포되어 돌에 맞고 죽창에 찔려1950년 9월 9일 "이 못난 아들도 하나님 나 라에갑니다. 내 영혼 받아 주소서 아멘."하고 숨을 거두었다.
윤 임 례 집사
1894년 7월 5일 고창군 신림면 무림리에서 출생. 맏아들 김용은의 전도로 예수를 영접하고 천 원교회를 섬겼으며 두암교회를 개척, 충성하였는데1950년 10월 19일 공산당이 두암부락을 습 격하여 대창과 칼과 흉기로 학살하는 현장에서 칼에 찔려숨질 때까지 복음을 전하였는데 두암교회 마루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악당들이 지른 불구덩이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창 현 영수
1898년 8월 15일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에서출생.
그는 평원교회를 열심히 섬겨 30세에 영 수가 되었고 13년 동안 말씀의 증인으로 봉사자의사명에 충성하던 중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평원리뒷산으로 끌려가 "죽어도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다."라고 고백하는 동시에 총성과 함 께 구덩이에 매장되었다.
이 현 속 장로
1896년 12월 12일 경남 함안에서 출생. 진주배돈교회 전도사로 시무중 신사참배 반대로 1940 년 8월 19일 체포되어 사천 및 부산 북부경찰서를 전전하며 형언할 수 없는 모진 고문을 당하 였으며 계속되는 회유와 악형에도 신앙절개 굳게 지켜 1945년 5월 평양형무소 옥고현장에서 하늘나라로 향했다.
임 인 재 장로
1900년 황해도 황주군에서 출생, 세브란스의전을 거친 의사로서 1938년부터 양매교회 장로로 교회봉사는 물론 애국단체장으로도 활약하였는데 공산당에 의해 유치장에서의 심한 고문에 도 신앙을지켰다.
1950년 8월 8일 새벽 해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총살되었다.
장 석 팔 장로
1894년 6월 15일 충남 예산에서 출생했으며, 1933년 장로가 되어 응봉교회에서 봉사하였다. 해방 후 응봉면장, 국민회 회장 등으로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던 중 6·25를 만났다.
교인명단을 제출하라는 공산군의 요구를 거절하여 1950년 9월 11일에 돌에 맞아 숨졌다.
1976년 응봉교회에 순교기념비가 섰다.
전 계 원 조사
1912년 3월 경북 안동에서 출생했으며 경안노회조사로서 신사참배를 반대, 옥고를 치렀고 장 로 호신학교(남산)졸업한 년도에 6·25가 일어나 교회와 교인을 두고 피난을 떠나지 않고 순교를 결심, 섬기던 산정현교회(남산)를 사수하다 7월 16일 교회부근이 격전지가 되었을 때 폭파되었다.
전 덕 기 목사
1875년 12월 8일 서울 정동에서 출생. 1897년 성동교회에 엡윗 청년회를 조직하여 민족운동, 선교활동을 전개, 1907년 민족운동의 요람자인 상동교회 담임목사로 목회하며 민족운동 및 소외된 자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헌신하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겪 으며 심한 고문에도 신앙을 사수하였고 "주여! 이 죄인을 구하소서, 나는 천사와 더불어 돌아 가노라."라는 유언을남기고 1914년 3월 23일 숨을 거두었다.
조 경 의 장로
1891년 11월 2일 서울 서대문 밖 동막에서 출생.
1910년 3월 25일 YMCA 영어학원을 졸업하 였으며 1926년 6월 동막교회에서 장로가 된 후 대한성서공회에 3년 대한예수교서회에 11년 간 근무한 바 있으며 6·25동란으로 핍박받는 교회를 사수하며 경영하던 약방에 찾아온 공산 군에게 전도하다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후 모진 고문 끝에 1950년 8월 4일 총살되었다.
조 석 훈 목사
1905년 9월 황해도 송화에서 출생했으며,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은율군 누리 교회목사로 시무하였다.
6·25때 교회를 떠나자 아니했으며, 1950년 10월 15일 공산당에게 총살되었다.
순교자 유족회 초대 회장인 조용택 목사의 부친이다.
조 용 학 영수
1904년 7월 13일 경남 양산읍에서 출생했으며,1928년 3월 7일 경남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울산언양교회에서 전도사로 일을 보았다.
그 후 진해군 진영읍 교회 영수로 봉사하던 중 신사참 배를반대하여 일경에 체포된 후 모진 고문으로 1940년 8월 14일에 숨을 거두었다.
주 기 철 목사
1897년 11월 25일 주현성 장로의 아들로 경남웅천에서 출생했으며, 오산학교와 연희전문을 거쳐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 신사참배를 반대하였으며, 평양산정현교회에서의 "일사각오"의설교는 유명하다.
전후 7년 간의 옥고 끝에 1944년 4월 21일 숨을 거두었다.
순교자유족회 부회장이었던 주영해 장로의 부친이다.
주 삼 식 전도사
1908년 10월 24일 전남 목포시 옥암동에서 아버지 주경환의 3남 1녀 중 3남으로 출생했다.
목포고등성경학교를 입학과 동시 무안 임성교회(현 목포시 옥임 교회)를 개척하며 목회 중에 1950년 3월 장로회신학교(서울 남산소재)를 입학하여 재학 중 6·25사변으로 1950년 8월 4일 옥암동 섬너리에서 예수선생이라는 죄명으로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인민재판을 받은 후 총살형으로 순교했다.
최 명 길 목사
1907년 전남 신안군에서 출생했으며, 1944년 조선신학원을 졸업하였다.
1950년 7월 23일 목사로 시무 하던 목포 연동교회를 공산군에게 빼앗기자 교인들과 삼호민둥 근섬으로 가 예배를 드리다가 체포되었다.
1950년8월 1일 몽둥이로 타살되었으며, 김계수 장로도 함께 순교하였다.
최 봉 석 목사
1869년 1월 7일 평남 평양에서 출생했으며,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고 "예수 천당"의 외침 으로 전도의 권능이 있어 "최권능"목사라는 이름이 더적합하다.
1939년 신사참배 반대로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1944년 40일 금식기도를 마치고 하늘나라 로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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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순교자 명단
[목사(38)]
50여 명 무심천에서 피살
郭京漢(곽경한·60) 9월24일 청주형무소에서 피살. 일제시대에는 괴산, 보은, 청원 등지에서 목회하였고 광복 후 청주형무소의 목사로 재임했다. 6·25 전쟁 후 공산군에 체포되어 청주 내무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공산당은 郭목사를 비롯한 50여 명을 결박하여 청주 무심천으로 끌고 가 집단 살해.
金邦昊(김방호·56) 전남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염산교회 목사. 10월27일 염산면 옥실리 장병태의 집에서 부인 김화순과 자녀 등 7명이 피살. 이때 염산교회 신도의 과반수가 넘는 77명이 피살되었다.
金炳球(김병구·40) 전북 정읍군 신태인제일교회 목사. 「기독교대백과사전」은 공산군이 체포하여 살해한 뒤에 연못에 내던진 것으로 되어 있다. 정부의 「피살자명부」에는 金炳珠(김병주·49) 목사가 8월6일 신태인읍 연정리에서 피살, 「피납치자명부」에는 金炳九(김병구·49)라는 기독교인이 8월6일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연지리에서 납북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두 같은 사람인데 이름과 나이가 다르게 기재된 것이다.
金炳燁(김병엽·43) 전북 정읍군 신태인제일교회 목사. 「피살자명부」에는 金炳華(김병화) 목사가 8월6일 완주군 신태인읍 연정리에서 피살로, 「피납치자명부」에는 같은 사람이 납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김병엽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한편 「기독교대백과사전」과 「한국기독교회사」(김수진, p.346)에는 6·25 전쟁 후 공산군이 물러간 뒤에 패잔병들로 조직된 빨치산들에게 1950년 10월10일 새벽에 피살된 것으로 되어 있다.
金相俊(김상준·27) 9월28일 강원도 횡성읍 北川里(북천리)에서 피살.
金洙鉉(김수현·56) 광복 후 부안읍교회와 진도읍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6·25 전쟁 후 진도읍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수문 밑 바다에 수장되었다.
金禮鎭(김예진·53) 서울 후암교회 목사. 8월2일 11시경 서울 신당동에서 여러 명의 북한군이 연행하여 군용차로 납북하였다. 김예진 목사는 정부가 6·25 직후에 조사한 피살자명부에 수록되어 있고, 「기독교대백과사전」에도 8월2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미아리 골짜기에서 피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956년에 적십자사에서 납북상황을 신고토록 했을 때에 가족들이 「납북」으로 신고했다. 가족들은 혹시라도 납북된 상태로 북한에 억류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운 희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金允實(김윤실·34) 서울 북창동 공동교회 목사. 8월11일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9월22일 피살.
金正福(김정복·61) 장로교 목사. 소록도교회에서 나환자를 대상으로 목회하던 중 6·25 전쟁 후 체포되어 고흥 내무서에 감금되었다가 공산군이 후퇴하던 9월28일 애국청년 30여 명과 함께 고흥읍 뒷산에서 피살. 공산군이 쇠창으로 찔러 죽여
金宗仁(김종인·51) 전남 법성포교회(장로교) 목사. 9월29일 공산군에 끌려가 어느 무밭에서 독살당하였고 부인과 두 딸, 한 아들을 포함한 교인 24명도 순교.
金鍾漢(김종한·45) 전북 만경교회(장로교) 목사. 김제군 백산면 신기리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다가 1950년 같은 군의 만경교회에 부임. 9·28 수복과 함께 후퇴하던 공산군은 김종한 등 교인 15명을 김제 내무서 뒤뜰 우물에 생매장하였다. 이때 금산교회 장로 조기남, 주교 교사 김윤철, 대송교회 장로 정기봉을 비롯하여 김형배, 하치오, 김성두, 권태술 등을 죽였고 대창교회 목사 안덕윤을 잔인하게 창칼로 찔러 살해.
金周鉉(김주현·41) 전북 완주군 삼례후정교회 목사. 9월27일 전주 내무서 뒤뜰에서 몽둥이에 맞아 피살. 「피살자명부」에는 7월27일 전주형무소에서 피살된 것으로 적혀 있다.
都福日(도복일·37) 충남 당진교회 삽교교회 목사. 9월21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삽교 근방에서 피살.
朴錫炫(박석현·52) 광주 양림교회(장로교) 목사. 9월27일경 장모인 전도사 羅玉梅(나옥매), 부인 金貴南(김귀남), 아들 박원택과 함께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에서 피살.
朴淵瑞(박연서·62) 대한기독교서회 목사. 대한기독교서회 편집부장을 지냈다.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었다가 8월1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피살. 9월19일 피살설도 있다.
裴永石(배영석·46) 전남 강진읍교회 목사. 8월6일 강진읍 장터에서 피살.
白南鏞(백남용·54) 복음교회 목사. 과도정부 입법위원을 지냈고 전북 김제에서 목회했는데 공산군 점령 치하에도 예배인도를 계속하다가 8월28일 연행되었다. 9월27일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피살.
孫良源(손양원·50) 전남 여수 나병원 애양원교회(장로교) 목사. 9월13일 애양원에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 구치되었다 28일 미평공동묘지에서 조상학 목사와 함께 피살.
安德允(안덕윤 또는 德潤·53) 전북 김제군 죽산면 대창리교회 목사. 일제시대 2년 5개월 동안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 1950년 9월27일 대창리교회 앞 들판에서 공산군이 쇠창으로 찔러 죽였다.
元昌權(원창권·51) 전남 영광읍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이 진주한 후 피난 가다가 열한 살 난 아들과 임신 7개월의 부인이 함께 피살.
劉東熙(유동희·44) 「피살자명부」의 제주도 피살자에 등재되어 있다. 1950년 7월4일 평양 정치보위국에서 피살되었는데 어떤 경위로 평양에서 피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본적이 대동군 시족면 호남리이며 주소는 강동군 원탄면 송오리인 것으로 보아 북한 출신으로 월남하여 제주도에 거주하다가 국군을 따라 북한에 갔다가 피살된 것으로 추측된다.
심한 매를 맞고 피살
柳允洙(유윤수·51) 1950년 9월27일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인교동에서 피살.
李用善(이용선·45) 전남 구례읍 교회 목사. 공산군이 후퇴한 이후 1950년 12월9일 순천노회에 참석하고 귀가하던 중 지리산에 숨어 있던 공비들에게 피살.
李龍仁(이용인·38) 목사. 1950년 10월7일, 전남 영광군 춘남리 설도에서 피살.
李載珪(이재규·50) 전북 황등교회(장로교) 목사. 1950년 7월26일 오후 5시 전북 익산군 황등면 황등교회 사택에서 내무서원 2명에게 연행 납치된 후 변영수(장로), 안인호(집사), 이성권(청년회장)과 함께 피살.
李鐘德(이종덕·67) 충남 강경교회(침례교) 목사. 9월28일 공산군이 납치하여 금강 강변에서 총살.
林鍾憲(임종헌·44) 전북 고창읍교회 목사. 10월25일 고창읍내에서 피살. 「한국기독교회사」에는 9월28일 오후 2시 고창읍 뒷산에서 총살로 기록.
全仁善(전인선) 서울 남창동교회(장로교) 목사.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
鄭仁泰(정인태·34) 전남 무안군 몽탄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에게 교회당을 빼앗기고 고향인 함평으로 내려갔다가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10월24일 죽창에 찔려 피살. 그의 아버지 정재련(전도사)도 같은 해 12월6일 함평에서 공산군에게 피살.
趙興植(조흥식·37)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장로교 전도사이며 8월21일 빨치산에게 붙들려 간 후 팔치골에서 피살」. 한편 「피납치자명부」에는 목사로 기록되어 있고 「10월20일 전북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에서 납북」.
崔感恩(최감은·46) 위의 유동희 목사와 같은 경우이다. 「피살자명부」의 제주도 편에 등재되어 있는데 10월12일 평양 동창리 63번지 자택에서 피살되었다. 어떤 경위로 평양에서 피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崔明吉(최명길·44) 전남 목포 연동교회(장로교) 목사. 8월 초순 목포 건너편 둥근섬에서 예배를 보기 위해 교인 20여 명과 배를 기다리던 중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영암군 삼호분주소로 연행되어 그곳에서 심한 매를 맞고 피살.
黃德柱(황덕주 또는 德周·47) 공주형무소 형목. 감리교 목사. 8월20일 강원도 원주 내무서에서 피살.
[소속, 납북 일자 또는 장소가 확실치 않은 목사]
金仁善(김인선) 장로교 목사. 서울에서 목사로 재직하던 중 피살.
劉鍾鶴(유종학·63) 명동교회(감리교) 목사. 공산군이 납치 살해하였다.
이종도 제주도 제1대 목사.
임인재 전남 해제 중앙교회 목사.
전병무 경북과 울릉도에서 활동한 목사.
[전도사(24)]
高永昊(고영호·27) 전북 익산군 낭산면 호암리 낭산교회 전도사. 9월29일 낭산면 방공호에서 피살.
金奎興(김규흥·59) 전도사. 9월14일 인천경찰서에서 피살.
金鳳河(김봉하·33) 충남 문산교회 전도사. 「피살자명부」에 7월31일 대전형무소에서 피살로 되어 있는 金鳳洞(김봉동)과 같은 사람으로 추정된다. 「피납치자명부」에는 7월23일 충남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에서 납북.
羅玉梅(나옥매·50) 전남 영암군 상월교회 전도사. 일제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4년 5개월간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9월27일경 광주 양림교회 목사인 사위 朴錫鉉(박석현)과 딸 김귀남, 외손자 박원택 그리고 다른 교역자와 함께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에서 피살.
文俊卿(문준경·59) 전남 신안군 임자성결교회 전도사. 10월7일 전남 신안군 후증도 중동리 백사장에서 피살.
朴惠源(박혜원·37) 전도사. 8월13일 춘천형무소에서 피살.
吳秉吉(오병길·54) 전북 부안군 백산면 평교교회 전도사. 9월9일 공음면 내무서 뒤뜰에서 피살. 이튿날 같은 장소에서 두 아들과 며느리도 처형당했다. 이때 집사 김영해 등 덕암교회 교인 22명이 집단 피살.
李光年(이광년·34) 전북 고창군 대산면 사거리교회(장로교) 전도사. 10월16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피살. 「한국기독교회사」에는 고창군 공음면 덕암교회 전도사로 기록.
李德奉(이덕봉·51) 충남 금산군 수영리교회(장로교) 전도사. 9월22일 금산 비름고개에서 피살.
李馬太(이마태·31) 전북 정읍군 영원면 영성교회(장로교) 전도사. 9월25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27일 피살.
鄭在鍊(정재련·64) 전남 함평 구봉교회(장로교) 전도사. 12월6일 함평에서 공비들에게 피살. 피살된 전남 무안군 몽탄교회 목사 鄭仁泰(정인태)의 아버지.
趙龍擇(조용택·48) 전남 곡성군 옥과교회(장로교) 전도사. 전남 화순군 화학산에 피신하다가 9월29일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피살.
朱三植(주삼식·54) 전남 무안군 삼향면 옥암리교회(장로교) 전도사. 7월30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혹심한 고문에 시달리다가 마을 뒷산에서 피살.
池漢永(지한영·41) 전남 여천군 율촌면 장천교회 전도사. 9월28일 미평공동묘지에서 조상학,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피살.
[소속, 납북 일자 또는 장소가 확실치 않은 전도사]
김대업 전남 해제 중앙교회 전도사.
金仁奉(김인봉·37) 전남 영암군 순회 전도사. 공산군에게 붙잡혀 피살. 장인은 피살된 장로 박병근.
김인재 전남 광주 선교부 전도사.
魯洪均(노홍균) 전남 영암군 서호교회, 매월교회 전도사.
朴淳信(박순신) 서울 영등포 목동교회 전도사. 공산군 패잔병에게 발각되어 피살.
申德哲(신덕철·4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전도사.
신복균 전남 강진군 해남읍교회 전도사.
오교남 전남 진도 벽파교회 전도사.
鄭連行(정연행·62) 전남 옥구군 혜성교회 전도사.
조상학 경남 하동군 하동읍교회 전도사.
[장로(33)]
전세 불리해지자 학살
姜聲振(강성진·59) 전북 만경교회 장로. 9·28 수복 때 후퇴하던 공산군에 의해 목사 김종한 등 교인 15명과 함께 피살.
金桂洙(김계수·51) 전남 목포 연동교회 장로. 8월 초순 최명길 목사와 함께 체포되어 피살.
金東欽(김동흠·33)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시무 장로. 10월6일 밤 공비에게 붙들려 월출산 기슭에서 피살.
金斗炳(김두병·45) 전주 중앙교회 장로. 전주 광장에서 열린 인민재판에서 심한 구타를 당했으며 9월27일 전매국 창고에서 피살. 한편 정부의 「피살자명부」에는 이름이 金斗煥(김두환)으로 되어 있다.
金相天(김상천·54) 전북 완주군 봉동면 제내리교회 장로. 전세가 불리하자 공산군이 소방서 창고에 우익청년을 포함하여 50여 명을 감금하였다가 9월27일 집단 살해.
金容善(김용선·45) 전남 담양읍교회 장로. 10월5일 담양읍 남산 기슭에서 공비들에게 피살.
金應洛(김응락·45) 서울 영락교회 장로. 9월 영락교회에서 피살.
金在俊(김재준·49) 충남 금성군 금성면 상가리교회 장로. 8월22일 금성면 화림리 구주바위 골짜기에서 장로 김희식과 함께 피살.
金正鉀(김정갑·42) 「피살자명부」에는 金匹鉀(김필갑)이라는 장로가 8월23일 피살로 되어 있고, 「납북자명부」에는 金正鉀(김정갑)이 8월5일 전북 부안군 상서면에서 납북으로 되어 있다.
金鍾五(김종오·33) 「피살자명부」에는 8월12일 대전형무소에서 피살. 「피납치자명부」에는 9월7일 납북.
金平國(김평국·71) 전남 영광군 묘량교회 장로. 9월18일 묘량교회 뜰에서 인민재판을 받고 가족 8명과 같은 교회 신도 김윤환의 가족 18명이 집단 피살. 「피살자명부」에는 金平局(김평국)이 9월10일 묘량면 신천리에서 피살로 기록.
金顯慶(김현경·44) 전북 완주군 봉동면 제내리교회 장로. 9월27일 같은 교회 장로 김상천과 함께 9월27일 소방서 창고에서 피살.
金揮男(김휘남·33) 전북 임실군 관촌면 관촌장로교회 장로. 8월25일 관촌면 광장에서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피살. 「피살자명부」에는 金體男(김체남)이 7월27일 관촌면 사선대에서 피살.
金熺植(김희식) 충남 금산군 군복면 외부리교회 장로. 8월22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금성면 화림리 구주바위 골짜기에서 장로 김재준과 함께 피살.
朴炳根(박병근·59) 전남 함평군 나산교회 장로. 8월5일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었는데 공산군이 후퇴할 때 함평읍내 향교리 뒷산 중턱에서 피살. 광주 숭일중학교 5학년이었던 둘째 아들 金圭(금규)도 공산당에게 총살당했고 전도사였던 사위 金仁奉(김인봉)도 9·28 수복 후 도피하던 공산군에게 붙잡혀 피살.
白南哲(백남철·53)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장로. 「피살자명부」에는 9월26일 부여군 홍산면 남촌리에서 피살. 「피납치자명부」에는 8월18일 납북.
邊榮守(변영수·39) 충남 부여군 황등교회 장로. 8월13일 논산군 성동면에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이재규 목사, 안인호 집사와 함께 피살.
柴美錫(시미석·44) 전북 고창군 고창읍교회 장로. 9월29일 공산군이 사형장으로 사용했던 고창읍 뒷산에서 피살.
李德奉(이덕봉·49) 전북 금산군 복수면 수영리교회 장로. 8월20일 금산 내무서에서 피살. 「한국기독교회사」(김수진)에는 8월22일 금산내무서원에게 끌려가 9월22일 피살.
李判一(이판일·53) 전남 신안군 임자도 진리교회(성결교) 장로. 10월5일 후퇴하는 공산군에게 붙잡혀 어머니와 차남, 아우 등 가족 13명이 교인 43여 명과 함께 모래사장에 생매장당했다.
鄭基奉(정기봉·34) 전북 김제군 봉남면 대송리 대송교회 장로. 9월27일 김제군 봉남면에서 피살. 「한국기독교회사」(김수진)에는 鄭奇奉(정기봉)으로 되어 있다.
鄭在浩(정재호·51) 「피살자명부」에는 8월17일 대전형무소에서 피살, 「피납치자명부」에는 8월13일 납북.
趙景宜(조경의·61) 서울 동막교회 장로. 8월4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옥사.
趙鏞錫(조용석·54) 경남 함안 사촌교회 장로. 9월17일 함안군 군북면에서 피살.
崔秉浩(최병호·77) 전남 신안군, 해남군, 장흥군 등지 교회에서 시무. 7월30일 전남 완도 관산리(조약도) 해변에서 우익진영 청년 7명과 함께 피살.
洪在棋(홍재기·76) 전북 정읍군 정읍제일교회 장로, 변호사. 9월27일 정읍경찰서 유치장에서 피살.
黃道文(황도문·55)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교회(감리교) 장로. 9월30일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개성에서 피살. 정부의 「피납치자명부」에는 10월3일 선두리교회에서 납북.
[소속, 피살 일자 또는 장소가 확실치 않은 장로]
金柳讚(김유찬·58) 경남 고성군 영오면 오서리에서 피살.
金鍾大(김종대·53) 전북 옥구군 미평 신관리교회 장로.
심은양 경북 육통교회 장로.
장석팔 충남 예산 웅봉교회 장로.
최치한 충북 영동읍교회 장로.
許詳(허상) 전남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염산교회(장로교) 장로. 제방공사 수문턱 위에서 피살.
[신학생(2)]
高光奎(고광규) 세례명 베드로. 광주교구. 9월 전주에서 피살.
全基洙(전기수) 세례명 그레고리오. 광주교구. 9월 전주에서 피살.
[집사 ·기타(41)]
영광에서 일가족 18명 피살
金永解(김영해·52) 전북 고창군 공음면 덕암교회 집사. 9월23일 가작동 뒷산에서 신도 22명과 집단 피살.
金容俊(김용준·33) 전북 전주 중앙교회 집사. 「한국기독교회사」(김수진)에는 피살로 기록되어 있으나 「피납치자명부」에는 9월8일 전북 완주군 이서면 단교리에서 납북.
金元培(김원배·39)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집사. 10월4일 월출산 아래 남풍리 저수지에서 피살.
金允子(김윤자·37)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집사. 영암군 부인회장. 10월30일 서남리에서 피살.
金允喆(김윤철·24) 전북 김제군 금산면 금산교회 주일학교 교사. 8월25일 정읍시 감곡면에서 피살.
金允煥(김윤환·27) 전남 영광군 묘량교회. 「한국기독교회사」에는 9월18일 묘량교회 뜰 안에서 인민재판을 받고 가족 18명과 집단 피살. 「피살자명부」에는 金潤煥(김윤환)이 9월10일 운당리에서 피살.
金昌化(김창화·35) 서울 영락교회 집사. 8월4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뒷산에서 피살.
盧炳在(노병재) 전남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염산교회(장로교) 집사. 제방공사 수문턱 위에서 같은 교회 장로 허상과 가족 13명이 피살.
盧龍植(노용식)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집사. 「피살자명부」에는 魯用植(노용식·53)이 10월5일 영암군 군서면 도장리에서 피살.
朴鍾海(박종해·38) 전남 진도읍교회(장로교) 집사. 피살된 목사 김수현의 아들을 피신시키려고 애쓰다가 공산군에게 피살.
徐鳳九(서봉구·22) 천주교회 급사. 7월3일 도림동 천주교회에서 피살.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
宋光植(송광식·40) 전북 익산군 망성면 무형교회(장로교) 집사.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이리 내무서에 수감되었다가 8월15일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피살. 「피살자명부」에는 宋廣植(송광식·39)이 7월28일 익산시 함열읍에서 피살.
宋炳德(송병덕·45) 전북 완주군 봉동읍 서두교회(장로교) 집사.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봉동면 소방서 창고에 감금되었다가 9월27일 교인들과 집단 피살.
李仁錫(이인석·39) 강원도 정선군 북면 여량성결교회 영수. 8월6일(또는 8월1일) 북면 분주소원에게 납치되어 춘천에서 피살.
崔泳旭(최영욱·60) 기독교인. 광주 제중병원장. 美 군정 시기에 한국인 초대 전라남도 지사를 역임하였고 1947년 「호남신문」 사장으로 언론계에도 종사하였다.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광주교도소에 투옥되었다가 총살당하였다.
池漢永(지한영·41) 전남 여천군 돌산면 군내교회 집사. 9월28일 미평공동묘지에서 조상학,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피살.
피살 일자 및 장소가 확실치 않은 집사]
고웅두 충남 오량교회 집사.
金東信(김동신)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집사.
김두환 경북 기계제일교회 집사.
김춘동(61)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문봉순(43) 전남 영암군 천해교회 집사.
박상문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朴仁在(박인재)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안수집사.
박일규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방후용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서상철 충북 청산교회 영수.
서석근(52)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申相翊(신상익·44) 전북 이리 제일교회 집사. 광주형무소에서 피살.
심만길 경북 육통교회 집사.
안인호 충남 부여군 황등교회 집사.
오죽현(77) 전남 영암군 천해교회 집사.
윤성전(7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윤임례 전북 정읍 두암교회 집사.
李一(이일·45)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이민우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임유삼(6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任子壬(임자임·45) 전남 영암군 학산면 매월리교회 집사.
鄭壽一(정수일) 충남 논산 병촌교회 집사. 같은 교회 교인 65명과 함께 피살.
조인심(6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蔡水原(채수원)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집사.
한창교 경남 거창군 덕산교회 집사.
납북 종교인들
납북된 교직자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수는 개신교 목사 74명, 가톨릭 신부가 26명이었고, 장로 5명을 비롯하여 많은 교인들이 납북되었다. 납북된 주요 교직자 가운데는 종교계의 중요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목사(77)]
새문안교회 金英珠 목사의 운명
具滋玉(구자옥) YMCA 총무 역임. 광복 후 조선기독교청년회 연합회 총무로 당선되었다가 정부 수립 후 경기도 지사 역임. 서울 종로구 누하동 187번지 자택에서 납북되어 백암산 줄기를 타고 끌려가다가 龍淵(용연)에서 약 20리 떨어진 산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權泰羲(권태희·45) 경북 출신으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문교사회위원장 피선. 납북된 후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발기인 겸 중앙위원으로 동원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인민경제대학에 재학 중이었는데 10월까지는 평양에 거주.
奇世福(기세복) 6·25 전쟁 중에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金庚鍾(김경종·56) 서울 후암동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한 직후인 6월28일 오전 7시 서울 용산과 삼각지 사이 노상에서 인민군에 납치되어 아오지 탄광에서 강제노역 중이라는 사실을 원산에 살던 이 아무개 장로가 가족들에게 알려주었다.
金東哲(김동철·52) 서울 서소문교회(감리교) 목사. 7월23일 서울 서대문구 서소문동 75번지 자택에서 공산당원에게 연행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金斗錫(김두석·61) 파주 봉일천교회(장로교) 목사. 9월18일 오후 9시경 서울 용산구 동자동 153번지 자택에서 민청원 3명에게 연행되어 동자동 내무서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金峠(김상·61) 종군목사. 9월12일 서울 서대문구 의주동 자택에서 납북.
金尙七(김상칠·53) 제7안식일교회 총무(목사). 7월27일 오후 5시경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590-9번지 자택 앞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동대문 내무서에 4일 동안 억류된 후 국립도서관에 있던 정치보위부로 옮겨졌다가 납북.
金聖元(김성원·68) 장로교 목사. 9월25일 전남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金誠源(김성원·78)이 완주군 일대에서 교역하던 중 납북.
金英珠(김영주·57) 서울 새문안교회(장로교) 목사. 함북 명천 출신으로 한때 총회의 정죄를 받았던 자유주의 신학의 목사. 광복 후에는 새문안교회를 개방하여 교파 통일을 위한 장로·감리교의 협의회와 초교파 기독청년운동의 진행을 위한 광장으로도 제공했다. 8월23일 오전 9시경 서울 종로구 신문로 1가 43 자택에서 연행되어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납북.
金元圭(김원규·49) 개성 감화원(소년원) 원장. 감리교 목사. 1946년부터 개성지방 감리사로 시무. 경기 개성시 관훈동 604-2. 7월6일 11시경 개성에 있는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납북. 1951년 5월 熙川(희천)까지 끌려갔을 때에는 다리를 삐어 굴신을 못 하는 상태였다.
金裕淳(김유순·69) 기독교 대한감리회 제9대 총리원 전도국 감독. 서울 북아현교회(감리교) 목사. 8월23일 오전 8시50분경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의 140 자택에 기독교민주동맹 이사장 金旭(김욱) 명의의 회의 소집장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자동차로 연행 납북.
내무서원에 연행된 후 납북
金有淵(김유연·50) 서울신학대학 교수. 서울 신공덕동 성결교회 목사. 성결교단 잡지 「活天(활천)」 주무. 한국기독교연합회 기관지 「기독공보」 주필. 1923년 6월부터 1930년까지는 동아일보 京西(경서)지국을 경영한 일도 있었다. 1945년 9월부터 신공덕동 교회(現 신덕교회)의 담임목사로 재임 중이었다. 8월10일경 서울 마포구 공덕동 111-10호 자택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이건, 최석모, 박현명, 박유연 목사 등과 함께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납북.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김성호 목사의 아버지.
金熙雲(김희운·38) 서울 중앙교회(감리교) 목사. 8월23일 오후 3시경 시내 노상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연행되어 정치보위부 지하실에 서울 지방의 목사 여러 명과 함께 감금되었다가 납북.
南宮爀(남궁혁·69) 한국인 최초의 신학박사·교수. 대한기독교연합회 총무. 8월24일 오후 11시경 경기도 독도 중곡리에서 정치보위부 고급간부 朴允模(박윤모), 崔鐸(최탁)에게 연행 납북된 후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朴萬春(박만춘·42) 대한 감리회총리원 전도국 총무. 감리교 목사. 6·25 전쟁 후 총리원을 지키기 위해 서울에 남아 있던 총리원 감독 김유순 목사 등과 함께 납북.
朴相建(박상건·54) 서대문형무소(장로교) 목사. 정부가 6·25 전쟁 직후에 조사한 피살자 명부에는 서대문형무소에서 피살로 기록되어 있으나 북한으로 끌려갔던 것이 확실하다. 7월13일 오전 11시경 서울 한강로 1가 183번지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6월28일 새벽 공산군에 의해 납북 기록.
朴璇齊(박선제·67) 경동교회(감리교) 목사. 태평양 무역(주), 국제 손해보험(주) 사장 역임. 공산군이 납북.
朴炫明(박현명·48) 성결교회 목사, 서울신학교 교수. 광복 후 교회와 신학교 재건에 앞장 서 1946년 재건총회 초대 총회장에 선출되어 3년간 시무. 8월23일 오후 3시경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5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김유순, 이건, 최석모, 박형규 목사 등 성결교회 지도급 목사들과 함께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 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8월10일 납북 기록.
朴亨圭(박형규·51) 성결교회 목사, 서울신학대학교 사감. 8월23일 오후 3시경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5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김유연, 박현명, 이건 목사 등과 함께 8월10일 납북 기록.
方薰(방훈·58) 자교교회 목사. 감리교 총리원 이사. 8월23일 창성동에서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白學信(백학신·52) 강화읍교회(감리교) 목사. 9월26일 밤 12시경 강화읍 신문리 549번지 자택에서 민청원 12명에게 연행 납북.
徐斗成(서두성·30) 경기도 용인군 외사면 백암교회(성결교) 목사. 백암중학교 교장. 7월28일 10시경 경기도 용인군 백암교회에서 보안서원 2명에게 연행되어 용인 보안서를 거쳐 수원 내무서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徐太源(서태원·46) 서울 정동교회(감리교) 목사. 협성감리교 신학교 교수. 8월23일 오후 3시경 기독교민주당원에게 연행 납북.
宋昌根(송창근·53) 한국신학대학장. 8월23일 오전 7시경 서울 중구 도동 자택에 보안대원이 와서 지프차로 연행.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북한으로 이송되었다는 사실을 함께 납북되었다가 탈출한 사람이 가족에게 알려주었다.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다. 한편 조철의 「죽음의 세월, 납북인사들의 생활실태」에는 1951년 7월 하순경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평양 근처의 대동군 문성리에 있는 산 아래 농가에 수용되었다가 사망으로 되어 있다.
宋台用(송태용·43) 서울 초동교회 목사. 1934년 성결교회 기관지 「활천」의 편집을 맡았으며 1935년 1월 창간된 「성화」의 편집 주임으로 창간에 참여. 8월27일 서울 중구 주교동 자택에서 납북.
沈明燮(심명섭·50) 감리교 목사. 대한기독교교육협회 협동총무. 8월23일 오후 9시경 서울 종로구 삼청동 35-100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3명이 와병 중인 상태에서 연행 납북.
安吉善(안길선·60) 서울 신당동 중앙교회 목사. 8월24일 오전 10시경 서울 성동구 신당동 333-80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에게 연행된 후 납북.
梁柱三(양주삼·73) 적십자사 총재, 감리교 목사. 8월23일 기독교연맹 이사장 金旭(김욱) 명의의 소집통지서를 가지고 와서 서울 서소문교회 목사 김동철과 함께 납북.
吳澤寬(오택관·63) 장로교 목사. 제헌국회의원으로 한국독립당 옹진군당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로 독립운동가, 정치인. 9월2일 저녁, 서울 종로구 혜화동 22-76 자택에서 민청원에게 연행되어 정치보위부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문공부 장관, 동아일보 사장, 기독교방송 이사장을 지낸 오재경이 장남이다.
兪世根(유세근·41) 대한성결교회 서울시 독립문교회 목사. 8월23일 오후 4시경 서울 독립문 성결교회에서 수요예배를 인도하고 교회당을 나오다가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8월10일 경성신학교 교수들과 함께 납북.
劉在獻(유재헌·46) 장로교 목사. 임마누엘수도원 부흥사. 8월15일 서울 서대문구 구기동 223 기독교 사업체인 修禱園(수도원)에서 정치보위부원이 연행 납북.
柳禎喆(유정철·46) 기독교 장로회 신남포교회(장로교) 목사. 8월21일 오후 10시경 중구 장충동 2가 162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시무 중이던 신남포교회에서 6월23일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어 평양감옥에 감금되었다가 공산군에 피살.
尹聖浩(윤성호·32) 장사동교회(감리교) 목사. 9월19일 오후 3시경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서 내무서원 수명에게 트럭에 실려 연행된 후 소식 두절.
특별회의 소집 후 납치
李鍵(이건·53) 서울신학교 교수. 성서학원장. 8월23일 오전 9시경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5번지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기독교민주동맹원 3명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김유연, 박현명 목사와 함께 8월10일 납북.
全用燮(전용섭·33) 충북 청안교회(장로교) 목사. 9월17일 12시경 청주시 문화동 수도국 밑에서 후퇴하던 북한군이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9월26일 공산군 패잔병에게 체포되어 우암산에서 피살.
全珍珪(전진규·56) 서울 성동교회(現 보문교회) 목사. 대한감리회 전도국장. 서울 동지방 감리사. 연희대학교 재단이사, 전국주일학교연합회 회장, 기독교연합회 간사. 8월23일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318-16 자택에서 납북.
田斅培(전효배·65) 서울 금호동교회(감리교) 목사. 서울 동지방 감리사. 8월23일 밤 12시경 신원을 알 수 없는 2명이 마포구 아현동 산 11 자택에서 연행하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하였다가 납북.
鄭達雄(정달웅·35) 서울 청파동 감리교회 목사. 8월3일 새벽 5시경 서울 용산구 청파동 감리교회 사택에 내무서원 3명이 와서 특별회의가 있다면서 연행 납북.
鄭致鎬(정치호·33) 서울 미암교회 목사. 8월13일 새벽 2시경 서울 돈암동 산 11번지 미암교회 사택에서 정치보위부원에게 2명에게 연행되어 돈암동의 안재홍(국회의원, 한성일보 사장, 납북) 집에 있는 방공호에 감금된 후 면회, 의복 및 식사 차입 등이 일절 거절당한 채 심야에 납북.
曺相文(조상문·53) 서울 북아현교회 목사. 8월23일 오전 8시경 서울 마포구 북아현동 9-1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3명에게 연행되어 국립도서관에 있던 정치보위부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연행 납북.
趙相學(조상학·74) 전남 여천 덕양교회(장로교) 목사. 9월27일 전남 여천군 소라면 덕양리에서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여수 내무서원이 연행하여 손양원 목사와 9월28일 美坪(미평) 공동묘지에서 살해.
曺喜哲(조희철·50) 서울 신암교회 목사. 7월23일 오전 노상에서 인민위원이 연행 납북.
강계에서 발진티푸스로 사망
朱在明(주재명·32) 장로교회 목사, 8월3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175 자택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마포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납북되어 12월에 강계까지 끌려가던 중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
朱埰元(주채원·46) 마포형무소 형목. 서울 향화동교회(장로교) 목사. 7월27일 오후 10시경 서울 마포구 아현동 468-2 자택에서 마포 내무서원 2명이 연행하여 정치보위부에 감금한 후 납북.
陳學哲(진학철·54) 장로교 목사. 7월5일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황해도지역에서 목회활동을 하다 공산군에게 피랍으로 기록.
車敬昌(차경창·51) 서울 수표교회(감리교) 목사. 6월 하순경 남하 도중에 경기 수원(또는 오산) 부근에서 내무서원이 연행 납북. 몇 년 후 월남한 어떤 여자 교인이 북한 어느 곳에 수용되어 있다는 소문을 들려주었다.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6월28일 외출하였다가 공산군에게 납북.
崔相殷(최상은·45) 서울 응암동교회(장로교) 목사. 함남도청 사무국장. 8월11일 오후 7시경 서울 종로구 원남동 147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연행 납북.
崔相鉉(최상현·61) 기독교회신학교 교수·목사. 美군정청 군정장관 고문. 8월25일 오후 9시경 서울 성북구 돈암동 482-58 자택에서 인민군 2명이 연행.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된 사실을 들었으나 그 후 소식 두절.
崔錫模(최석모·61)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1949년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총회장 피선. 8월23일 오후 3시경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1-379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이건, 김유연, 박현명 등 성결교회 지도급 목사들과 함께 8월10일 납북.
崔元初(최원초·45) 장로회 목사. 8월23일 새벽 1시경 서울 중구 장충동 2가 162번지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3명에게 연행 납북. 신안주 방면으로 끌려간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었다.
崔宗默(최종묵·54) 서울 궁정동교회(감리교) 목사. 7월 공산군 정치보위부원에 의해 납북
崔泰龍(최태용·53) 대한복음교회 목사. 국민훈련원 원장. 정부의 농민회(現 농협) 부회장.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친구 柳錫東(유석동)의 집에 은신 중이었는데 9월6일 오후 10시30분경 정치보위부원 3명이 가택을 수사하여 최태용과 유석동 등 3명을 연행하였다가 이튿날 두 사람은 석방하였으나 최태용은 목사라 하여 국립도서관 정치보위부에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감금하였다가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9월11일 공산군에게 체포된 후 피살.
許殷(허은·37) 서울 해방동교회 목사. 7월25일 12시경 서울 중구 회현동 일출아파트 자택에서 내무서원이 연행해 중부 내무서에 감금하였다가 납북.
玄碩鎭(현석진·44) 경기도 광주군 둔전리교회(장로교) 목사. 7월14일 새벽 4시경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둔전리교회 사택에 같은 마을 내무서원 4명이 친미파이며 미국의 연락자, 국군에게 식사를 대접했다는 등의 이유로 같은 교회의 장로 金德男(김덕남)과 함께 연행 납북.
[소속 및 납북 일자와 장소가 확실치 않은 목사]
金鳳圭(김봉규) 강원도 철원교회(성결교) 목사.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행방불명.
金相俊(김상준·25) 청풍감리교회 목사. 충북 단양군 홍성읍에서 납북.
金晟植(김성식·43) 경기 화성군 마도면 (같은 이름의 김성식 목사가 2명 더 있는데 나이와 주소가 달라 동일인인지 알 수 없다. 金晟植(58) 주소 경기 시흥군 중정 안양리. 피랍 장소 개성시: 金晟植(67) 주소 서울, 수원교회 목사).
金裕海(김유해) 강원도 지석교회(감리교) 목사.
金長輝(김장휘·60) 7월20일경 서울 을지로 노상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된 후 정치보위부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金鍾萬(김종만·59) 감리교 신학교 교수. 체부동교회 목사.
金珍珪(김진규·54) 목사. 서울.
金哲星(김철성) 서울 성동구 신당동에서 납북.
金泰周(김태주·63) 8월13일 10시경 서울 성북구 성북동 168-4 자택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성북 내무서에 1주일간 감금되었다가 정치보위부로 이송된 후 납북.
都柄日(도병일·37) 9월2일 충남 예산군 삽교면 석리에서 납북.
朴成萬(박성만·31) 7월18일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에서 납북.
申基俊(신기준·47) 서울 서대문구 행촌동 자택에서 납북.
劉載報(유재보·53) 서울 서대문구 자택에서 납북.
李成萬(이성만·31)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에서 납북.
張基衡(장기형·50) 7월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 자택에서 납북.
張德檀(장덕단·68) 서울 중구 회현동. 효자동교회 목사 .
全有淵(전유연·48) 8월23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자택에서 납북.
陳令鐘(진령종·49) 7월5일 서울 뚝섬 자택에서 납북 .
崔明殷(최명은·45) 서울 종로구 원남동. 8월11일 납북.
崔榮鎔(최영용·50) 8월15일 서울 시내에서 납북.
韓致明(한치명) 납북된 후 반동종교인으로 낙인 찍혀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洪吉龍(홍길용·31) 전북 김제군. 7월25일 납북.
[전도사(4)]
金陽淳(김양순·40) 전도사. 9월27일 오후 4시경 같은 마을 교인의 집에 심방 나갔다가 귀가 중에 납북. 주소는 서울시 중구 쌍림동 119.
金麟熙(김인희·43) 장로교 전도사(助師). 북한의 종교탄압을 피해 월남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태평로 재건교회를 설립했던 재건교회 지도자. 7월20일 10시경 자하문 밖에서 납북. 정부의 「피납치자명부」에는 7월25일 납북.
朴寶(박보렴·여·54) 전도사, 독립운동가. 6·25 전쟁 후 서울대 약학대학장이었던 남편 김기우와 함께 납북.
朴文熺(박문희·50) 성결교 초기 전도사, 독립운동가.
[장로(19)]
張德櫓(장덕로·68) 서울 옥인동교회 장로. 3·1 운동 후 上海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가 광복 후 귀국하여 1949년 옥인동교회 창설.
高明宇(고명우·68) 서울 남대문교회 장로. 세브란스 의과대학 교수 겸 외과과장. 7월26일 오후 2시경 서울 용산구 원효로 3가 184 자택에서 사복청년이 납북.
金奎植(김규식·74) 서울 새문안교회 장로. YMCA 학교 교사 및 경신학교 학감, 重慶(중경) 임정 부수석. 6·25 전쟁 후 피랍되어 1950년 12월10일 만포진 부근에서 사망.
金德男(김덕남·41) 둔전리교회 장로. 7월14일 새벽 4시경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둔전리교회 사택에서 현석진 목사와 함께 같은 마을 내무서원 4명이 연행 납북.
金東元(김동원·67) 장로교 장로. 소설가 김동인의 형. 광복 후 군정청 고문을 거쳐 한민당 총무, 제헌국회 부의장 역임.
金允童(김윤동·48) 장로. 7월25일 오후 8시경 서울 마포구 만리동 세관 앞에서 보위부원 3명에게 연행되어 서대문구 당 정치보위부에 수감되었다가 열흘 뒤 구로구 서울시 정치보위부였던 국립도서관에 감금된 후 납북.
金益俊(김익준·46) 서울 마포구 신수동 신수교회 장로. 직업은 신수동회 사무소 회계사였는데 7월13일 마포구 신수동 300번지 자택에서 같은 동네 사람 2명과 함께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내무서에 감금되어 있다가 동네 사람 2명은 석방되었으나 김익준은 교회 장로이며 洞(동)청년단 부단장이라는 이유로 서대문형무소 수감된 후 납북.
金在恩(김재은·27)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목실리성결교회 전도사. 8월7일 오후 2시경 교회에서 내무서원 3명에게 연행 납북.
林壽烈(임수열·31) 강릉 성결교회 전도사. 납북 당시의 정황은 확실히 알 수 없다. 가족들은 부산으로 피난했었고 본인만 교회를 사수하겠다며 강릉성결교회에 있다가 납북당했다.
黃國祿(황국록·40) 창신장로교회 장로. 육군본부 지정 대동장유공장 대표자로 있으면서 육군 부식 및 각종 물품을 조달했다.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 김창일외과병원에서 치질을 가장하여 입원 중이었는데 8월15일 오후 5시경 성동내무서원 2명과 인민군 수명이 찾아와 연행. 성동내무서와 정치보위부를 거쳐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9월17일경 미아리를 거쳐 의정부까지 끌려간 사실을 같이 끌려가다 탈출한 사람으로부터 들었다.
[소속및 납북 일자와 장소가 확실치 않은 장로]
강준표 서울 서강교회 장로.
權相和(권상화·68) 7월5일 오전 10시경 서울 서대문구 만리 2가 294-22 자택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
金東元(김동원·44) 감리교 장로. 9월20일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에서 납북
金斗枚(김두매·43) 8월14일 전북 전주시 고사동에서 납북.
申相厚(신상후·39) 장로교 領袖(영수). 7월4일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 행주외리에서 납북.
이정진 서울 수송교회 장로.
李鍾聲(이종성·62) 8월25일 경기도 파주군 위동면 금촌리에서 납북.
李弼斌(이필빈) 서울 신암교회(장로교) 장로.
정호석 서울 서강교회 장로.
[신학생(2)]
金龍瑞(김용서·22) 장로회 신학생. 8월27일 납북. 주소는 서울 성동구 신당동 175-8.
金相振(김상진·25) 세례명 토마스. 함흥 교구 소속 신학생으로 7월 중 행방불명. 정부의 「피납치자명부」에는 9월4일 서울 중구에서 납치. 주소는 중구 충무로 2가 12.
기타 납북·피살 종교인들
[집사·기타(45)]
金炳德(김병덕·30) 서울 영락교회 집사. 8월10일 납북. 서울중앙전신국 총무과 근무.
金奉在(김봉재·29 ) 9월25일 전북 이리에서 납북. 주소는 경남 거제도
金姓女(김성녀·42 )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金成德(김성덕·41) 8월16일 중구 남산동 자택에서 납북.
金輪林(김수림·61) 8월27일 서울 중구 산림동 90에서 납북.
金榮淳(김영순·40)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金株完(김주완·30) 7월4일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 행주외리에서 납북.
金振秀(김진수·45) YMCA 근무. 8월11일 서울 종로 근처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국립도서관에 있던 정치보위부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金泰煥(김태환·39)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金翰洙(김한수·36) 7월10일 서울 중구 명동 2가 1에서 납북.
김현자 서울 신암교회 집사.
南邊植(남변식·38) 9월28일 전남 완도군 완도면 양리도에서 납북.
獨孤堂(독고당·26) 7월25일 서울 용산구 자택에서 납북.
朴寬姬(박관희·25) 7월7일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심곡리에서 납북.
朴琮奉(박종봉·42)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朴卓根(박탁근·31) 7월25일 서울 자하문 밖에서 납북.
裵春根(배춘근·35) 7월7일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심곡리에서 납북.
白桂淳(백계순·32) 9월25일 금산군에서 납북.
宋京燮(송경섭·38) 7월10일 서울 중구 명동 2가 1에서 납북.
安仁祐(안인우·40) 7월29일 전북 익산군 황등면에서 납북.
梁斗泳(양두영·36) 9월25일 전남 옥구군 계림면 유사리에서 납북.
吳吉弘(오길홍·28) 7월25일 서울 자하문 밖에서 납북.
尹得淳(윤득순·31) 7월25일 서울 자하문 밖에서 납북.
李京天(이경천·63)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李基泰(이기태·34) 7월25일 서울 자하문 밖에서 납북.
李成擇(이성택·34) 7월29일 전북 익산군 황등면에서 납북.
李壽哲(이수철·22) 8월18일 강원도 홍천면 진리에서 피살.
李周光(이주광·45)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任連用(임연용·33) 7월10일 서울 중구 명동 2가 1에서 납북.
張基衡(장기형·50) 감리교 총리원 회계. 20년대 조선예수교서회에서 문서사업 종사. 7월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 자택에서 납북.
張相善(장상선·31) 8월14일 서울 용산구 14 자택에서 납북.
張順禮(장순례·48)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張長壽(장장수·38)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張長順(장장순·33)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張宗錫(장종석·28) 9월25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鄭南奎(정남규·35) 7월10일 서울 중구 명동에서 납북
두군데 자료를 한곳에 올린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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