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종교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지혜

수호천사1 2017. 2. 1. 20:51

종교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지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단히 고백하는 삶)

1. 들어가면서

오늘날 세계 도처에 팽배되고 만연된 자유주의 신학사조의 창궐(猖獗)은 성경의 절대가치와 규범적 기능에 심각한 도전을 불러왔으며, 급기야 현대를 살아가는 절대 模痔?대중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내린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과 종교 다원주의(Pluralism in Religion) 사상과 맞물려 시대를 선도하는 보편적인 사상으로 추앙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특별히 종교 다원주의 사상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기독교만이 아닌 다양한 타종교를 통해서도 궁극적으로 당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에(Missio Dei:하나님의 선교), 결국은 어떤 종교를 믿든지 간에 기독교가 지향하는 최종적인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보편 구원론적 관점을 지향합니다. 때문에 모든 종교는 교리의 차이를 극복해 관용의 심정을 가지고 연합과 일치를 통해 인류의 영육간의 현안문제를 더불어 해결하는 일에 공동의 관심사를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관점이 인류의 공존과 번영을 위한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적 박애주의를 고취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성경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사상이 비성경적이며 비기독교적인 가치관이요 세계관인 것으로 인해 쉽게 수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각한 도전을 불러일으킨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제기된다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인본주의가 만연되는 곳에서 상대적으로 신본주의는 심각한 도전과 방해를 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절대다수가 공유해 추구한다고 그것이 항상 진리를 대변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모습이 그랬습니다(마23장). 구약의 민수기서에 기록된 가데스 바네아 사건의 전말(顚末)이 그랬습니다(민13-14장). 중세 카톨릭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으로 말미암는 대중주의나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따른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성취된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마10:29-31, 6:10, 롬11:36). 곧 성경에 의한, 성경으로 말미암는 절대가치를 추구하는 삶의 방식 말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자세를 일컬어 계시의존 사색 신앙적 삶의 자세라고 정의했습니다. 세월이 변하고 시대가 바뀌어도 자연의 법칙은 결코 변개되지 않듯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권위와 그 절대적 가치는 모든 시대를 망라해 유일한 신앙과 삶의 척도요 규범으로 기능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으로 말미암는 종교다원주의가 팽배돼 상대적 가치가 오히려 절대가치를 능가해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현 시대를 살아감에 있어서 참 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자세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천국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취할 삶의 자세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삶’이라고 지적합니다(마6:33). 이는 다른 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명령을 생명의 도리로 지켜 행하는 삶’을 가리킵니다(전12:13). 이제 그 구체적 내용을 살펴봅니다.

2. 펼치면서

첫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우리의 ‘천상적 정체성’(heavenly identity)을 늘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다시 말해 성도는 여전히 세상이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자들이지만 본질에서 천국을 향해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천국의 언약백성이요 하늘나라에 소속된 자들이란 깊은 인식과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삶의 자세 말입니다. 이런 의식을 늘 갖고 살아갈 때에 현실 속에서 ‘나그네와 행인’(벧전2:11)의 심정을 잃지 않게 되며 보다 적극적으로 천상지향적인 삶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거듭난 새 생명 안에서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함으로 구습에 종노릇하던 옛 사람의 행실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 사람의 인격을 보다 풍성히 구현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된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모습이라 확신합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 지향적인 삶입니다.

이는 달리 미래지향적이며 종말론적 삶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성경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구속경륜의 결국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에 집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고, 이들을 통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시는 가운데 우주적 보편의 교회로서 곧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려는 전 우주적 경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총체적 삶의 목표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으로 표출돼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already) 도래해 현재적으로 역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가시적이고 인격적이며 물리적으로 실현될 것이 약속된 나라입니다(not yet, 계21:1, 고전15:19, 고후4:18).

셋째, 계시 의존적 삶입니다.

이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종합적이면서도 체계적이고 동시에 일관성과 통일성을 갖고 숙지하며 거기에 의존해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1)삼위 일체(one nature, three persons)적 유일신 사상을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이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정체성(the Godhead)과 관련해 본질에서 한 분으로 존재하시면서(One God) 동시에 세 분의 위격(the Father, the Son, the Holy Spirit)으로 역사하고 계심을 총체적 관점에서 고백하는 신앙자세 입니다(롬1:7, 히1:8, 행5:3-4). 이런 사실은 특별히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세상 역사 속에서 성취되는 과정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에베소서 기자는 이런 사실을 언급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 구원 계획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완성 및 성령님의 구원 적용으로서 인침과 내주(indwelling)의 사역을 소상하게 소개합니다(엡1:4-14).

(2)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세주 되심을 부단히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God-Man)을 동시적으로 시인하는 것으로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결코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음’을 고백하는 신앙자세입니다(행4:12). 이 시대에 만연돼 있는 자유주의 신학적 관점에서는 성경의 무오류(無誤謬, infallibility)성과 절대권위(absolute sovereignty)는 물론 예수님의 신성(Godhead)조차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는 본질에서 성경의 절대가치와 규범적 기능을 정면으로 부인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로 직결됩니다. 이 사상은 상대가치와 다양성 및 파격(破格)성을 적극 지향합니다. 자연히 고정관념을 거부합니다.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의 개인주의와 극단의 이기주의가 팽배됩니다. 옳고 그름의 본질의 문제 보다는 좋고 나쁨의 현실성이 강조됩니다. 이런 세태 속에서 인간의 이성과 경험이 성경의 계시를 앞지르게 됩니다. ‘만인의, 만인에 의한, 만인을 위한’ 보편적 가치가 우선적으로 고려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도 변함없이 선포합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말입니다(행4:12). 이는 모든 시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세주가 되심을 선언함에 다름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의 요지는 한결 같이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 언약의 당사자이시며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다는 사실에 집중됩니다(행2:36, 9:20).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요, 이를 부인하는 자들이 다름 아닌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성경은 밝히 증거합니다(요일4:1-3). 초대교회 당시에 이미 이들이 이단으로 정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역사 속에서 그런 망령된 사상들이 다시 재현돼 반복되곤 해 왔습니다. 오늘날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상한 일 당하듯이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저들은 처음부터 멸망 받을 이단으로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의 심판’에 처해진 자들이기에 말입니다(롬1:24-32). 다만 우리로서는 이런 배역(背逆)의 사상에 미혹되지 않도록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배가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에 무지한 사실로 인해 당대의 절대 다수가 소유해 지향하는 세속적인 시대적 풍조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해 자신도 모르게 불의와 타협하는 배도의 물결에 편승하게 됩니다. 그 결국은 하나님의 지식을 좇지 않는 것으로 인해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인 신앙으로 판정받게 됩니다(롬10:2-3, 마7:21-23).

(3)말씀의 본의에 깊이 접촉된 신앙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에 앞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What the Bible Says)를 총체적인 계시의 관점으로 밝히 깨달아 정당하게 해석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바른 해석(정통신학)이야말로 바른 신앙관 형성의 척도로 작용하기에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심정으로 그 본의를 올바로 해명하지 못하게 될 때, 죄의 왕 노릇하는 권세의 영향으로 인해 자연히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자의적인 해석과 편의적인 적용에로 치우칠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열심을 내면 낼수록 그것은 하나님의 열심을 가장한 인간의 자기열심 곧 타락한 종교심을 부추기는 데서 나와진 자의적 열심으로 나타나는바 더욱 하나님의 본의와는 무관해 질뿐 아니라 적극 하나님을 대적하는 양상을 띠고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실의 대표적인 경우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기독교로 회심하기 전 바울의 유대교적 모습입니다. 당시 바울은 유대교의 바리새적 계시관에 깊이 접촉된 나머지 기독교인들을 적극 핍박하며 체포해 죽이는 일에 앞장서는 것을 통해 자신의 유대교적 열심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빌3:5-6, 행22:1-4). 바울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신앙하고 섬기는 열심인 줄 알았습니다.

구약계시에 대한 오해(誤解)가 메시아 대망사상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메시아의 당사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해 십자가에 죽게 하는 극한 자기모순에 빠지게 했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비단 유대교에 속했던 당시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全) 유대교가 그랬습니다. 중세의 카톨릭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날 공룡과도 같이 거대한 제도권을 이루고 있는 개신교회 또한 이런 과오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이미 간파한 종교개혁자들은 일찍이 ‘개혁된 교회는 지속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교훈을 후대에 남겼던 것입니다. 부단한 본질에로의 회복과 구체적인 적용만이 개혁된 내용을 지속적으로 상속해 계승시켜 나갈 수 있는 첩경이라 확신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적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난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과 종교다원주의 신학이 만연돼 있는 현하의 한국교회가 보편적으로 안고 있는 고민은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의 방법의 문제보다는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바른 해석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할 줄 압니다. 바른 해석의 여부는 바른 행동 곧 바른 신앙관을 형성하는 척도로 기능하기에 말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하나님의 열심은 바른 지식의 체계에 접촉되지 않은 사실로 인해 타락한 내적 종교심을 부추겨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적극 우상숭배로 치닫게 하는 우(愚)를 범하게 할 뿐입니다. 마치 여로보암의 종교에서 발견되는 유사성(類似性)처럼 말입니다(왕상12:25-33). 거기에 외관상 구약종교로서 제반 율법적 요소들이 분명히 확인됩니다(여호와 하나님/제사장/절기 등). 그러나 내막적인 실상은 율법의 내용과 정신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황금 송아지 형상/무자격 제사장/변경된 절기 일자 등). 오히려 여로보암 개인의 정권유지를 위해 여호와의 구약종교가 철저히 사욕(私慾)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왕상12:27, 딤전6:5).

이처럼 신앙이 탐심의 도구로 이용될 때, 거기에 정당한 여호와 신앙관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가장한 우상숭배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때문에 신앙의 목적이 기복(祈福)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나는 곳에 참 된 여호와 중심의 신앙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절규하면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경고하는 배경이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호6:2, 4:6). 저들은 하나님의 존재성을 불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본의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이방의 우상처럼 사사로운 이익의 재료로 삼아 섬겼던 것입니다. 그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바른 해석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바른 해석을 통해 바른 믿음, 곧 바른 신앙관을 정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마치면서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이 시대의 인본주의의 만연은 인간의 행복과 성공적인 삶을 최우선하는 나머지, 이성(reason)이 계시(revelation)를 추월해 신앙이 도구화되어 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상대적인 가치가 절대가치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파격과 엽기가 규범(norm)을 조롱하며 비웃는 시대입니다. 급기야 하나님의 도우심이 불필요한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religionless age). 인간의 지적 능력이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머지 이런 엄청난 불경과 자만을 초래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결국 오래지 않아 과학이 신의 자리를 대신하는 시대를 맞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극한 불경과 패역의 불신앙적 사조가 팽배된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한 마디로 더욱 적극적으로 성경적 원리에 충실한 신앙관을 견지해 나가야 합니다. 성경적 가치관의 적극적인 구현으로 나타나는 기독교 세계관(Christian World-view) 말입니다. 여기서 기독교 세계관이란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세계관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 관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내용’까지를 포함합니다(이승구,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003, 16p). 왜냐하면 우리가 섬기는 절대 주권자로서 창조주 하나님은 역사의 시작과 마침이 되시는 분으로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으로 존재하시며 오늘도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히13:8, God is working even now). 이런 사실로 인해 만물과 만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섭리적으로 경영됩니다(잠3:5-6).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갈 뿐입니다(롬11:36). 사계절의 변화가 오늘도 여전하고(창8:22), 자연의 법칙이 한결 같은 이상 우리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결코 변개되지 않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시대가 바뀌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결코 변할 수 없고 변해서도 안 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기인합니다. 언약의 말씀의 불변성과 실현성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메시아 대망사상과 제반 약속들이 그 분의 성육신 사건을 통해 호리만큼의 착오도 없이 성취되었듯이 동일한 원리 속에서 그 분의 재림사건은 때가 찰 때에 어김없이 실현될 것이 확실합니다(행1:8-11, 히9:27-28). 그리고 모든 시대에 걸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소망 가운데 한결 같은 심정으로 학수고대(鶴首苦待)하던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의 약속 또한 마침내 성취될 것입니다. 바로 그날에 우리 주님께서는 그 나라의 왕의 신분으로 강림하셔서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로부터 기이히 여김을 얻게 될 것입니다(살후1:10). 이런 사실들이 분명하고 이것이 믿음으로 수납되는 한, 결코 다른 복음에 귀를 기울여 미혹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갈1:7-8). 아니 있어서도 안 됩니다. 신앙의 절개와 믿음의 정절이 더욱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계14:4-5입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