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

[스크랩] 구원과 교회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수호천사1 2017. 1. 20. 15:38

구원과 교회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구원과 교회는 같은 개념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이스라엘 나라와 회복에 대한 제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앞으로 이 세상에 펼치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예고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중인이 되리라"(행 1:8)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예고는 교회를 세워 가시는 것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 본문에서 그 사실을 봅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를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그리고 사도행전 13장 48에서 주님의 생명의 복음이 땅 끝까지 이르러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렇게 하여서 천국 복음이 온 땅에 전파되면, 그래서 교회의 구성원의 수가 충만 수에 이르면, 그제야 세상은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어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구속사를 이루어 가시는 세상 역사의 진행과 그 종말은 교회와 긴밀한 관계성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에 의해서 이 땅에 교회가 세워졌을 때 그 생명의 빛을 완강히 거부하는 어둠의 세력에 의해서 교회는 언제나 환난 속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로 모시고 섬기는 신앙을 갖는 것으로 인해서 생명의 위협을 당했습니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후 오랜 시간은 평온의 시기였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때 교회는 큰 종교적 암흑기요 영적 투쟁기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원리를 보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체로서의 교회의 정체성을 잃고 있었기에 교회가 세속성을 띠고 외형만 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영적 각성의 빛을 받는 사람은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역사적 사실로서 종교개혁과 그 이후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힘겨운 영적 싸움을 잘 압니다.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원리와 교회의 본질에 눈을 뜨고서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그들은 모든 것을 잃는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일과 재산을 빼앗기고, 동네에서 쫓겨나는가 하면, 생명의 위협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어떤 고난을 당해도 견딜 준비를 할만큼 자신들이 믿는 구원의 원리와 교회의 본질을 매우 중요한 믿음의 내용으로 여겼습니다. 결코 그들에게는 그 교리가 평범한 교훈으로 여겨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구원과 교회는 동일한 개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대다수는 아무리 심한 박해가 주어져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성도의 이 가정에서 저 가정으로, 또는 기타의 비밀 장소에서 교회의 모습으로 집회를 가지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믿음이 오늘의 우리들에게서 예사롭지 않게 여겨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그때의 그리스도인들이 기꺼이 감수했던 것과 같은 고난을 겪으려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은혜에 대한 절대적인 감사와 신뢰는 교회에 생명을 걸고 그 교회를 이루며 그 교회의 생명을 지키는 것과 동일한 법입니다. 그런 것이기에 교회를 바르게 이해하고 아는 것은 곧 그의 믿음을 결정짓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관계성

다음의 물음에 답해 봅시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교회는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과거부터 이제까지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이므로 삶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고 다스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중세시대의 로마 카톨릭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이므로 최고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는 견해를 일관성 있게 가지며 왕위에 군림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 때문에 종종 교회와 세상 나라는 대립되어 서로가 절대적 권력의 우위를 차지하려고 싸운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면 우리 개신교는 어떤 입장입니까?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하는 것은 같습니다만, 그러나 그 개념과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이며 또한 미래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이때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란 거대한 조직과 제도를 갖추고 지상 국권을 쥐고 있으며 거기에 걸 맞는 크고 웅장한 건물을 지니고 있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표현에 의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이면 어느 곳에나 현존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초림하신 주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온 것과 관련하여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막 1:15)라고 말하여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자신의 행위와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으로 이해한다면, 그 나라의 현재적인 모습인 교회 또한 그 나라의 주인이신 주님의 백성인 것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닙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인간과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 되심을 고백할 때 완전히 임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도래하여 이미 우리 가운데 현존하지만 아직 완전히 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나라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완전히 임합니다. 이때까지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모습을 띱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재림으로 지상에서의 옛 모습인 교회의 모습은 벗어버리고 완전한 새로운 모습인 하나님의 나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한 신정국가의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단지 통치 개념만이 아니라 분명한 국가 개념입니다. 이것이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의미

이제 '교회'란 무엇인지 그 본질적인 의미를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교회란 말로 사용되고 있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져 어느 특정한 고립된 곳으로 있게 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특정한 목적이나 역할을 위해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소집된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 면에서 에클레시아는 교회란 말 외에 '모임'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스데반은 광야의 이스라엘을 '광야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루어진 모임이며 집회였으며, 이는 또한 교회였습니다.


신약 교회 시대에 이르러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될 때는 지역 모임에 관련하여 사용되곤 했습니다. 이는 당시 교회가 온 땅에 생명의 주님을 전파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가시는 하나님의 경륜에 의한 유대인의 박해의 결과로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유대로, 사마리아로, 해외로 흩어져 각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주를 섬겨온 지역 모임인 예루살렘 교회의 지체들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 지역 모임으로서의 교회 성격을 갖는 에클레시아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이 모든 교회는 동일한 신앙에 의해서 한 몸이 되며, 공동의 목적과 목표를 향해서 나아갑니다.


이렇게 각 지역 모임의 성격을 갖는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에 의해서 구성되기 때문에 개별적인 개념의 교회의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교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각 지역 어느 곳에서 모임을 갖고 존재하던지 간에 공간을 초월하여 한 교회의 모습을 띤 우주적 교회의 특성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16장 5절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가에게 문안하면서 그들을 "저의 교회"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교회의 한 일원으로서 자기 집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만나고 모임을 갖는 곳으로 제공하고 있으며, 그렇게 해서 그 지역적인 모임이 교회의 모습을 지니고 있기에 바울은 교회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바울 서신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게"(고전 1:2),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갈 1:2) 등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각 지역에서 수많은 독립체로서의 교회들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교회는 '하나의 교회'입니다. 이는 본문에서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를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흠정역;KJV)에서 알 수 있는데, 개역성경(RV)은 흠정역의 "교회들"을 "교회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더욱 나은 번역임에 틀림이 없는 것은 유대와 갈릴리아 사마리아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서로 다른 교회가 아니라, 한 교회, 한 믿음의 형제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대표 단수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고린도전서 12장 28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라고 말하면서 바울은 하나님이 직분들을 "교회들"이 아니라 "그 교회"에 세우셨다고 언급합니다.


그런데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하늘에도 존재합니다. 그것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일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구원을 받은 '살아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구원받은 사람이 교회인 것입니다. 이는 시간을 초월하여서 교회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 했을 때 그들을 "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겠습니까?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안에서 생명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이 땅에서 죽어도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로 다시 살아날 것이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시기에 이 땅에서 아직 살아있는 자는 죽음 그 자체를 겪지 않고 산 자로 변화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에게서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생명이 왕 노릇합니다. 따라서 이미 이 땅에서 소천을 한 사람도 사실은 죽음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지고 있는 교회로 있습니다. 그들도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와 동일한 교회입니다. 우리는 그에 대한 이해를 에베소서 1장 22-23절에서 가질 수 있습니다. 거기에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그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곳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대적 언어로 번역한 것으로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고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느니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만드시고 충만하게 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여기에서 보는 대로 지상에서만 아니라 하늘에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들은, 즉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고 있는 자들은 교회인 것입니다. 또 다른 곳을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3장 6-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영원부터 예정하신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복음을 통해서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 속에 들어오게 하시는 계획을 가지셨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신 까닭은 하나님의 모든 가족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가릴 것 없이 하나가 되어 교회 안에서 굳게 연합된 것을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하나님의 가족이 된 모든 사람들, 그들이 하늘에 있건, 또는 땅에 있건 간에 그들 모두가 교회원인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하늘에 있는 자들도 교회의 개념을 가집니까? 그것은 교회는 영적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특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교회는 가시적이어서 외형적으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 독립체로서 존재합니다. 이는 마치 인간의 영혼은 보이지 않지만 모든 사람이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그 영혼은 몸과 행위와 삶을 통해 드러나는, 즉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드러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 또한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의 실재로서 실존하는 생명체인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서, 그리고 우리들이 지역 모임을 갖는 교회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를 가리킬 때는 단수로 사용되고 있으며, 가시적이며 외형적인 교회를 말할 때는 복수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할 사실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교회는 지역 교회를 통해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어떤 한 개인이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영접하고 섬기는 믿음을 가져 그가 교회의 생명체를 띠고 있다고 하면, 그는 반드시 지역 모임을 갖고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일을 도모하는 교회의 모습을 띠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적 교회는 '무교회주의자'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생명을 가진 지체들로서 그 교회의 보이는 부분의 한 지체가 되지 않으면 그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 눈에 보이는 교회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없이는 그는 사실상 영적 교회의 실체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는 그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개혁교회는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습니다. (*)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거리.천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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