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란 무엇인가?
1. 시작하는 말
2. 교회의 본질
1) 교회의 정의
(1) 교회개념에 대한 혼동
교회는 매우 친숙하면서도 또한 매우 자주 오해되는 주제이다. 이러한 오해는 교회라는 용어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데 그 원인이 있다. 때때로 그것은 교회당, 즉 건물의 의미로 사용된다. 어떤 때는 신자들의 특별한 조직체의 의미로 사용된다. 이처럼 교회라는 용어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됨으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혼동 외에도 보다 깊은 차원의 혼동―교회의 기본적인 본질에 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인한 혼동―이 있다.
이러한 이해 부족은 기독교 사상사를 볼 때 그 어느 시기에도 교회에 관한 교리가 다른 교리들만큼 직접적으로 충분히 논의되고 연구된 적이 없었다는데 그 원인이 있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세계 교회 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첫 번째 회합에서 게오르그스 플로로프스키(Georges Florvsky)신부는 교회론이 신학 이전 단계(its pretheological phase)조차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기독론과 성령론은 A.D. 4세기와 5세기에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대한 교리는 중세시대에, 구원에 관한 교리는 16세기에 각각 신학자들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교회론에 관한 관심이 모아진 적이 없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회의 본질에 관한 관심이 에큐메니칼 운동(ecumenical movement)이 시작되면서 중요한 신학적 이슈로 떠올랐다. 그런데 교회연합운동의 과정에서 발생한 교회론에 대한 관심은 교회의 다른 실체들, 예를 들면 급속한 사회 변화와 교회와의 관계,세속 사회에서의 교회, 교회와 재결합, 선교 등과 같은 필요에 의한 접근이기 때문에 정확한 교회의 본질을 정리하기는 역부족이다. 교회의 정체성(identy)보다는 교회의 사명에 더 많은 관심이 모아지는 것이다.
(2) 교회에 관한 경험적 정의
오늘날 교회론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사회, 주변 환경의 변화와 같은 경험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은 20세기 철학, 특히 형이상학(metaphysics)과 존재론(ontology)을 기피하는 현상에 연유한 것이다. 사물의 이론적인 본질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물의 사실적인 가치에 더 의의를 둔다. 그래서 현대 신학의 관심은 교회의 본질―‘교회란 무엇인가?’, ‘ 교회란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다는 교회의 구체적인 표현(enbodiment)―‘교회는 시대적으로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본질적인 면에서 교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인 면에서 교회를 생각하는 실존주의적 해석이 공공연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교회는 이미 완성되고 실현된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요 과정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어떤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일종의 프로젝트, 즉 계속되는 과업(a continuing task)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많은 교회 연구들은 조직신학이나 성경적 접근 보다는 역사적 접근을 시도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역사가 ‘교회란 무엇인가?’를 말해줄 것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의 교회가 자신의 교리에 대해 진정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사회과학적 분류방법들을 교회 연구에 적용하도록 유혹받고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한스 큉(Hans Kung)이다. 그는 본질과 현상은 서로 다른 것으로 보았으며, 본질은 반드시 현상을 나타나야 하는 것으로 본질을 무시한 현상이 비실제이듯 현상을 무시한 본질 역시 비실제라고 했다. 특별히 교회에 대한 정의가 역사에 따라 달라짐을 지적하면서 교회의 본질은 불변하는 플라톤적 이상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교회의 역사 안에 있다고 하면서, 현실 교회는 비단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역사가 발생하는 가운데 존재한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론은 불변하는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체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교회사와 교의사와 신학사의 관계 속에서 본질적으로 역사의 제약을 받는다고 했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교회사적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순수한 복음을 향한 열정보다는 비본질적인 것에 우선했던, 그래서 굴절된 역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스 큉은 교회의 성직화 역사를 가장 대표적인 실례로 들고 있다. 원래 성경
에는 평신도라는 말이 없었는데 3세기경부터 교회가 교권화 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의 라오스(laos)가 라이코스(laikos),즉 평신도(문외한, 국외자)란 대치되었는데 이것은 성직자 위주의 그릇된 교회관이라고 주장한다.
(3) 교회사에 나타나는 교회의 모델들
가. 제도로서의 교회(Church as Institution)
가장 오래된 모델로 교회는 가시적 조직, 구조 특히 교회의 직분 자들에 의해서 권위나 권한이 집중된 유형이다. 눈에 보이는 권위에 집중되어 있는 교회의 유형이다. 기관의 교회는 교황, 감독, 성직자들, 중세시대에는 집사들이 교회의 모든 가치를 결정하고, 권위는 상향식 권위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의 모든 가치는 거부된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관에 출석하고, 제도화된 교회치리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제도화된 교회의 성찬, 성례,치리를 받아야 한다. 로마 가톨릭과 같은 교회로 전통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결속력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시대의 변화에도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반면에 전통에 거부하거나 모델을 지지하는 교리에 반대되는 입장에 대해서는 단호하다. 그리고 모든 권위가 성직자들에게 집중되어 있으며 폐쇄적이다.
나. 교제와 관계로서의 교회(Church as communion and fellowship<Outside of Structural Church>
모델 ‘가’의 대립되는 모델이다. 교회는 사람들의 교제이다. 물론 하나님과 교제하는 무리라는 의미에서 인간들의 교제로 보는 것. 하나님과 교제하고 인간들이 교제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 모델은 인간에게만 관심을 둔다. 16세기 한 기류로 나타난 종교개혁의 제세례파(Anabaptist Movement)와 급진주의적 개혁과 그리고 직통계시와 개인계시를 중요시한 신령주의자(Spiritualist)들과 Para church movement에 의해 생겼다.
이 모델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이미지의 의의를 새롭게 했으며 특히 하나님과 그 성도들 사이의 영적 교제에 대해서 상당한 공헌을 했다. 그리고 제도적 교회가 갖고 있는 모순을 극복하게 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영적 차원만을 강조하여 제도적이며 물리적인 은사들에 대해서는 무지하게 만들었고, 현실 교회를 넘어선 하나님나라의 개념을 약화시켰으며, 오히려 제도적인 교회들의 타락을 방관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으며 자기들만의 연합을 강조한 나머지 일종의 지하교회의 형태로 변절되어 역사적 과제와 사명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었다.
다. 성례로서의 교회(Church as Sacrament)
이거스틴이 가장 처음 제창한 모델로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제도나 교제가 아니라 성례를 통해서만 그리스도께 인도되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아퀴나스(Thomas Aqinas)에게서 더욱 체계를 갖추어 7성례가 되었다.
이 모델은 성례의 의의와 가치에 대해서 일깨워주었지만 성도 개인의 인격적인 교제와 말씀의 역할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성례를 집례하지 못하는 일반 성도들은 자연적으로 수동적으로 되었다.
라. 사자로서의 교회(Church as Herald)
말씀이 기본이 되어 교회를 하나의 전달자로 규정한다. 전달자는 그 특정 메시지를 누구에게 받아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전달하는 것으로 본 모델이다. 이 모델은 하나님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고 하나님나라를 섬기는 것이 교회의 역할로 본다.
이 모델은 성경적 토대 위에 교회를 세울 수 있으며, 교회가 가진 정체성(복음전파)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강하게 나타나므로 겸손, 회개, 개혁 등이 교회에 일어난다. 그러나 교회를 설교 듣는 단체로 아니면 단순히 전하는 단체로 약화시킬 수 있다.
마. 종으로서의 교회(Church as servant)
이 모델은 가장 늦게 나타난 것으로 ‘교회는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는 기관으로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이 곧 교회다’라고 주장한다. 월터 라우센부쉬를 대표로 자유주의에서 채택한 교회의 모델이며 교회는 타자를 위한 공동체라는 입장이다.
이 모델은 봉사신학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하였고,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동기유발을 갖게 했다. 그러나 성경적 기초가 약화되었으며 복음화보다는 인간화(Humanization)가 우선될 수 있는 약점을 갖고 있다.
2) 교회에 관한 어휘 정리
church(Kirche)란 단어는 “주님께 속한(belonging to the Lord)”이라는 의미를 가진 큐리아코스( κυριακόs )라는 헬라어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에클레시아( έκκλησία )라는 신약성경의 헬라어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교회개념은 두 가지 배경, 즉 고전헬라어의 배경(에클레시아)과 구약성경의 배경(카할 ל , 에다 ה ע )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에클레시아는 세속적인 의미에서 단순히 사람들의 모임 혹은 집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연합(union)보다는 업무상의 모임(business meetings)의미가 강한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구약성경의 배경인데 카할은 어떤 집회의 소집 및 모이는 행위와 관련된 용어로 모임의 구성원을 가리키기보다는 모이는 행위의 발생을 가리키는 용어다.
에다는 주로 오경에 나타나는 것으로 절반이 민수기에 나타나는데 ‘사람들’ 특별히 ‘회막 앞에 모인 사람들’과 관계가 있다. 출 12:3에 유월절을 기념하고 애굽을 떠나야 할 회중에서 이 단어는 처음 사용되고 있다. 에다는 제의(cult)나 법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로 카할보다 더 의식적인 공동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신약에서 바울은 에클레시아란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바울에 의하면 특정한 장소에 있는 신자들의 개별적인 모임이나 그룹이 결코 전체 교회(the whole church)의 한 부분이나 구성원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행 9:31 ‘교회’, 고전 16:19 ‘교회들’). 교회는 개별적인 지역 모임들의 총합이 아니다. 오히려 개별적인 지역 모임들 하나하나가 온전한 교회이다. 각 공동체는 비록 그것이 작은 것이라 해도 전체 교회 공동체를 대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전체성을 의미한다(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교회는 전 세계에 오직 하나이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개별적인 모임 안에도 완전하게 현존한다.
성경적인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구원받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새 생명을 부여 받은 사람들 전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3) 교회의 성경적 정의
전통적인 방법은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과 같이 조직신학적인 접근이었다. 그러나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방법은 삼위일체 신론적 접근인데 이 방법을 수용하기로 한다.
(1)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라는 개념은 그들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행위를 강조한다. 구약에 하나님께서 기존의 어떤 민족(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한 민족을 실제로 창조하셨다(출 15:13,16).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신다는 개념이 더욱 확대되어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교회에 포함시키고 있다(살후 2:13-14, 살전 1:4). 하나님의 백성이 이스라엘이며 교회라는 개념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신 32:10, ‘자기 눈동자 같이 아끼신다’).
• 자신의 충성스러운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다.
•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것은 거룩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스라엘이 깨어 거룩하기를 원했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교회가 거룩하기를 원했다(엡 5:25-27,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 성경에 나오는 두 대표적인 성(바벨론과 예루살렘: 계17: 21)
(2) 그리스도의 몸
아마도 가장 광범위하고 적극적인 교회상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상일 것이다. 이 이미지가 교회에 대한 가장 완전한 정의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다.
•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함에는 아담과 하와의 관계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아담에게서 하와가 나왔듯이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임을 의미한다(창 2:18-24, 엡 5:22-32).
• 하와가 아담에게서부터 나왔기 때문에 형태만 달라졌지 그녀는 계속 아담이다. 하와가 아담의 다른 형태이듯이 교회도 그리스도의 다른 한 형태일 따름이다. 교회는 바로 곧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회를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 자체가 함께 모여져 지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교회란 ‘나’ 라는 개인에다가 ‘너’ 라는 개인을 합하여 된 것이 아니다. 교회는 박 씨에다가 김 씨를 더한 것이 아니다. 교회란 그리스도가 취해온 바로 그 부분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다. 다시 말하면 교회란 그리스도를 재료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바로 그 사람이다. 교회란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교회의 재료는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는 가치가 없고, 생명도 없으며 생존하지도 못한다.
• 교회의 모든 능력과 요소는 반드시 그리스도로부터 왔는지 점검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이것이 옳으냐? 저것이 옳으냐?’는 논쟁에 앞서 그것이 어디서부터 왔느냐 점검되어야 한다.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상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사역 동안에 인간의 육체 안에서 활동하신 것과 같이 교회는 현재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고 활동하시는 장소라는 의미가 강하다(엡1:22-23,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통치와 교회의 통치 두 가지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것을 원하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통치하는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대해서 요구하시는 것은 교회로 모든 면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상은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와 그리스도의 결합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며(골 1:18), 신자들은 그 몸의 지체들이다.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골 1:16). 몸인 교회의 머리로서 그는 또한 교회를 다스리신다(골 2:9-10)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상은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신자들 상호간의 유기체적 관계를 말한다. 성도는 단순히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의해서만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고립되거나 독립된 혼자만의 삶이 아니다.
• 바울은 몸인 교회의 상호 연결성에 대한 개념을 은사적인 측면에서 발전시키고 있다. 신자 개개인은 다른 모든 신자들과의 유기체적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고전 12장).
• 나아가서 신자들은 서로 서로의 삶에 역동적으로 개입해서 세우는 것은 필연적인 교회의 가치이다(엡 4:11-16,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이것은 단순히 사회적인 상호관련성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와 교감, 상호계발(edification, building up)을 의미한다.
• 그리스도인의 형제의 사귐은 이상(理想)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형제의 사귐은 심적인(psychic)현실이 아니고 영적인(pneumatic)현실이라는 것이다.
• 한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하나 된(통일된) 몸이어야 한다. 파벌이나 분쟁이 있을 수 없다(고전 1:10-17).
만일 우리가 진정한 교회가 되려면, 두 단계가 필요하다. 즉 그리스도를 확대시키거나, 우리 자아를 소멸하는 일이다. 우리가 중생할 때 그리스도가 확대되기 시작한다. 우리가 구원 받았을 때, 주님은 우리 자아를 소멸하시기 위하여 매일매일 우리 위에 역사하고 계신다. 어느 날인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래와 같이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계속해서 역사하신다.
“내 힘으로 할 것이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다른 지체와 더불어 그리고 다른 지체의 도움으로 협력하는 원리에 따라 된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교제의 원리를 따라 된 것이옵니다.”
•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지체들은 한 세례를 받은 한 몸이다(고전 12:12).
• 그리스도의 몸은 보편적이다. 국적이나 어떤 특별한 조건이 의미가 없어져야 한다(골3: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3) 성령의 전
교회를 처음 존재케 하신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께서 행하신 극적인 이 사건은 오순절에 일어났는데 그때 성령은 제자들에게 세례를 주시고, 삼천 명을 회개시켜 교회를 세우셨다. 그 이후 성령은 계속해서 교회 안에 거주하고 계신다.
지금 성령께서는 교회에 내주(內住)하고 계신데, 신자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개별적으로 내주하실 뿐 아니라 신자들의 모임 안에 공동으로 내주해 계신다(고전 3:16-17).
성령께서 교회 안에 거하시면서 교회에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신다. 우리는 교회에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특질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들은 성령의 본성(성령의 열매)과 동일한 것들이다. 교회에 이러한 특질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성령께서 교회 안에 활동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참된 교회의 표징이다.
성령께서는 교회에 능력을 전달해 주신다(행 1:8). 성령께서 능력을 가지고 내주 하실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제자들이 그가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4:12). 초대교회에 나타난 사건들은 이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에서 언급했지만 성령께서는 그 몸에 통일성을 부여하신다. 이것은 획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과 행위에 있어서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을 가졌던 것이 이를 의미한다(행 4:32).
심지어 모든 물질을 공동으로 사용했다. 성령께서는 그들 안에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보다 지체의식을 더욱 강하게 창조하셨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거룩하고 순결하게 만드신다(고전6:19-20).
(4) 새 예루살렘(새 하늘과 새 땅)
성경에는 4명의 상징적인 여인이 등장한다. 창세기 2장의 ‘하와’, 에베소 5장의 ‘아내’, 계시록 12장의 ‘환상 가운데의 여자’, 계시록 21장의 ‘어린양의 신부’다. 이 네 여인은 실제로 한 여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 여인의 역사가 4단계로 나뉘어 졌다는 것이다. 이 여인이 하나님의 목적 속에 들어 있었을 때 하와라고 불리었고, 구속을 받아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나타 낼 때에 교회(아내)라 불리었고, 큰 용에게 핍박을 받을 때는 환상 가운데의 여인으로 나타났으며, 장차 영원한 세계에서 완전히 영광스럽게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때는 어린 양의 아내(신부)로 나타난 것이다.
새 예루살렘이란 계 21:22에 기록된 것처럼, 어린 양의 신부로 나타나는 미래 교회의 모습이다.
새 예루살렘의 도래는 다음 몇 가지 특징들을 수반한다.
• 바벨론의 멸망이다. 음녀라고도 표현된 큰 성 바벨론의 멸망(계 17-20장)이 첫 번째 나타나는 현상이다. 바벨론은 창 11:1-9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을 생각해 볼 때 바벨론이란 인간의 의지와 노력―결과는 혼돈이지만―의 원리를 말한다.
• 하늘로부터 내려옴(2절)
• 하나님이 저희와 거하시고 저희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됨(3절)
• 처음 것은 지나감(4절)
• 이기는 자와 진 자의 구분(7-8절)
• 성곽, 성 안과 성 밖의 구분(9-27절)
3. 교회의 요소
1) 예배
2) 양육
3) 친교
4) 선교
5) 봉사
오세택 목사/두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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