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로이드 존스와 워치만 니의 근본적인 차이 | ||||||
[ 이단연구 / 김홍기 ] 지방교회(위트니스 리) 교리 비판 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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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기 목사 / 밴쿠버필그림교회 담임, 글로벌기독교이단연구원장
마틴 로이드 존스(1899-1981)와 워치만 니(1903-1972)는 동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둘은 매우 상반된 신학과 목회 철학을 가지고 사역을 했다. 로이드 존스는 복음주의 정통 개신교의 범주 안에서 사역을 했다. 반면에 니는 정통 개신교의 교파를 죄악시하여 지방교회를 창시하고 사역을 했다. 로이드 존스는 WCC를 진리의 타협 위에 세워진 운동으로 판단하고 강력히 반대했던 반면, 니는 중생한 자라면 어느 누구와도 교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이드 존스는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이 비진리와 타협하는 교파들에서 나와 진리 위에 굳게 세워진 복음주의 연합체를 만들기를 원했지만, 니는 정통 개신교인들이 분열의 죄의 상징인 그들의 교파들을 떠나서 자신이 창시한 지방교회에 합류하도록 적극 추진했다. 로이드 존스는 역사적인 개신교 교파들 안의 죄들을 거부했으나 교파들 자체의 합법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반면에 니는 개신교의 정통 교파들을 죄악으로 간주하고 붕괴시켜야 할 악한 불법적인 조직으로 보았다. 이 글은 로이드 존스와 워치만 니의 이러한 극명한 차이를 조명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분리와 일치에 관한 마틴 로이드 존스의 균형 잡힌 가르침 마틴 로이드 존스는 지난 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들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의 전기(John Peters, Martyn Lloyd-Jones Preacher)의 뒷면에 수록된 다음과 같은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아마 20세기의 최고의 영국의 설교자였을 것이다.” 그의 설교의 영향력은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로이드 존스의 전기 작가인 존 피터스에 의하면, “역사적인 교파들 안에서 전통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이나 그의 주장의 지성적인 힘이나 그의 설교의 열정적인 웅변을 존경했다”(Ibid., 86). 로이드 존스는 성경을 정확하고 깊이 있게 강해했던 탁월한 설교자였다. 그는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딤후 2:15)라는 말씀에 전폭적으로 순종했던 설교자였다. 그는 성령의 은사에서 비롯된 탁월한 분별력과 부단한 연구와 정통 교리를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쳤으며, 그가 전한 설교를 몸소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그의 삶과 사역의 모든 것을 성경의 진리를 기준으로 삼아 판단했는데, ‘그리스도인의 일치(Christian unity)’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진리’와 ‘교리’(진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가르침)를 떠나서는 그리스도인의 일치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존 피터스는 로이드 존스의 이러한 관점을 다음과 같이 적는다. “그는 진리와 교리의 한 쌍의 영향력에 의해 조성되지 않은 일치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엄밀하게(precisely) 또한 단호히(emphatically) 거리를 두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명백한 진술들(statements)이나 명제들(propositions)로 분석되거나 표현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신비적’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Ibid., 86).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신앙고백과 신조는 단순히 ‘분열적 종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신조를 ‘진리를 표현하는 불가피한 방도’로 여겼을 뿐 아니라 ‘참된 진리와 거짓된 진리를 분별하는 필연적인 수단’으로 여겼다. 1962년 12월 영국에서 개최된 청교도 컨퍼런스에서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우리는 신앙고백(Confessions of Faith)을 굳게 믿는다. 우리는 신조(Creeds)를 확고하게 믿는다. 현재 우리를 기독교 교회(Christian church) 안에 있는 다수로부터 구별해 주는 것이 바로 거기[신앙고백과 신조]인 것이다”(Iain H. Murray, David Martyn Lloyd-Jones, The Fight of Faith 1939-1981, 433). 로이드 존스는 성경을 정확하고 깊이 있게 강해했을 뿐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말씀을 증거한 위대한 설교자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굳게 신봉한 설교자였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사도 바울은 이 구절에서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워지고, 하나님의 능력은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 임한 설교를 통해 임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설교자에게 임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로이드 존스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것은 성령이 특별한 방법으로 설교자들 위에 임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능력의 접근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설교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성령으로 권능을 부여하심으로 설교자가 그의 설교를 사람의 노력과 수고 이상이 되도록 들어올리게 하심으로 설교자가 성령에 의해 사용되며 성령이 역사하시는 통로가 되는 위치에 이르게 하시는 것을 뜻한다(D. Martyn Lloyd-Jones, Preaching and Preachers, 305). 그러면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 함께 하는 설교는 사람들을 어떻게 믿음 안에서 세우는가? 로이드 존스는 성령으로 충만한 설교를 접한 청중의 영적 변화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들은 꽉 붙잡히고 진지해지며 죄를 깨닫고 감동을 받으며 겸손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죄를 깨닫고, 다른 사람들은 하늘로 들리움을 받으며, 그들 중 아무에게나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다. 그들은 즉시 매우 특별하고 예외적인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기뻐하기 시작하고 점점 더 많은 가르침을 원한다. 그들은 사도행전에 있는 사람들과 같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기’를 원한다.”(Ibid., 324-25) 로이드 존스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및 일치’와 관련하여 ‘참된 진리’ 및 ‘바른 신학’과 ‘정통 교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또한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만이 사람들의 ‘믿음’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는 참된 신앙의 보존 및 그리스도인의 참된 일치는 오직 ‘진리’와 ‘영적 생명’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확고하게 주장했다. 로이드 존스의 이러한 견해는1967년7월 3일에 개최된 웨스트민스터 휄로십(Westminster Fellowship) 모임에서 행한 그의 설교에 잘 반영되어 있다. 심지어 16세기와 17세기의 자세한 진술들(statements)조차 믿음을 보호해 줄 수 없었다. 당신은 종이 위에 쓰여진 진술들로 결코 신앙을 보호할 수 없다. 당신은 종이 선언문(paper declarations)으로 정통을 지속시키는 것을 결코 보장할 수 없다. . . . 첫째로, 교제를 위한 소원을 창조하는 것은 영적 생명, 즉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인 것이다(행 2:46). 이것이 초대교회의 일치의 제일 요건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콜라주의 혹은 정통주의(scholasticism)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 생명에 기초하지 않은 신학에 대한 관심은 위험하다. . . . 그러한 것이 바리새인들의 입장이었고, 그 이후로 많은 사람들의 입장이었다. (Iain H. Murray, David Martyn Lloyd-Jones, The Fight of Faith 1939-1981, 545) 로이드 존스는 균형 잡힌 설교자였다. 그는 정통 신앙의 보존과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위하여 ‘정통 교리’의 중요성뿐 아니라 ‘영적 생명’의 필수불가결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둘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의 주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의 일치를 강력히 강조했고, 그 일치의 기초가 되는 진리의 범주를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둘째로, 바르게 정의되고 이해된, 분열(schism)의 심각성. 분열은 이차적인 문제들(secondary matters) 때문에 근본적인 것들(fundamentals)에 동의한 사람들 중에 존재하는 분리(separation)를 의미한다. 이것은 신약에서 지속적으로 정죄되었다. 우리가 일치를 보존하기 위한 불타는 소원을 가지지 않는 한 우리는 위험한 입장에 처해 있는 것이다. (Ibid., 546) 로이드 존스는 이처럼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의 일치를 강력히 호소한 반면, 신학적 자유주의들과 타협하는 교파로부터 복음주의자들이 떠날 것을 강력히 종용했다. 존 피터스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는 복음주의자들이 함께 참여하도록 요청했다. 또한 그가 보기에 타협적인 교파들로부터 그들이 떠날 것을 요청했다. 그는 오직 이 방법을 통해서만 복음주의자들이 진리를 실제로 붙들고 지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단순히 숫자만을 위한 관심이 아니라 믿음과 교리와 행실에 있어서의 연합(alliance)을 말하는 것이다. 그의 결론적인 주장의 부분은 이러한 극적인 호소를 포함했다. . . . 우리는 숫자가 아닌 진리에 관심이 있다.( John Peters, Martyn Lloyd-Jones Preacher, 88)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교파를 떠날 것을 강력히 종용한 로이드 존스의 위와 같은 주장은 그 당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의 주장은 영국 교회 안의 다수에 의해 무시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를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그의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로이드 존스의 단호한 자세를 보며 우리는 당시의 영국 교회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실로 그 당시의 영국 교회는 전체적으로 매우 자유주의화했었고 진리를 타협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말라버린 무화과 나무 같은 영국 교회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진리를 타협하는 역사적인 교파들로부터 이탈할 것을 요구한 로이드 존스의 주장은 그러나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설교자들의 황태자로 일컬어지는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이 이미 19세기 말에 행동으로 옮긴 주장이었다. 스펄전은 당시 영국의 침례교 연맹(Baptist Union)이 자유주의화할 때 항거의 표시로 단호히 그 연합체를 탈퇴했다. 또한 20세기 초 미국의 고명한 장로교 신학자인 존 그레샴 메이첸 (John Gresham Machen)이 행동화한 주장이었다. 메이첸은 함께 하는 보수주의자들과 더불어 당시 자유주의화하던 교단에서 나와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 및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했다. 게다가, 분리에 관한 로이드 존스의 주장은 20세기 중반 미국의 보수적인 침례교회들에 의해 실천에 옮겨진 것이었다. 그 당시 미국의 남침례교연맹(Southern Baptist Convention)이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 아래에 놓였을 때 몇몇 보수적인 남침례교회 지도자들은 SBC를 탈퇴하고 다른 보수적인 침례교회 지도자들, 예를 들면 보수적인 독립침례교회 지도자들과 더불어 여러 개의 새로운 연합체들을 이루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국제성서침례친교회(Baptist Bible Fellowship International)이다. 진리와 타협하는 교단에서 탈퇴하라는 로이드 존스의 주장에 대하여는 역사적인 평가가 엇갈린다. 미국 교회의 예를 들어 보면, 미국의 남침례교연맹(SBC)을 떠나서 새로운 단체들을 만든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SBC에 그대로 남아 활발하게 보수주의 운동을 벌인 다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SBC를 나와서 후에 BBF(국제성서침례친교회)를 만든 사람들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미국에서 가장 큰 교회들과 주일학교들을 세우는 일을 선도했다(참조. Elmer Towns, America’s Fastest Growing Churches & World’s Largest Sunday School). 그리고 이들이 세운 신학교(Baptist Bible College)에서 미국의 종교적 권리(religious right)의 대부로 잘 알려진 제리 팔웰(Jerry Falwell) 목사가 훈련을 받고 나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미국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활발한 정치 참여를 이끌어 내었다. 제리 팔웰 목사는 또한 세계의 개신교 대학 중 가장 큰 대학인 리버티 대학(Liberty University)을 설립하기도 했다(리버티 대학은 현재 SBC 소속임). 반면에 SBC를 지킨 사람들 가운데 당시 SBC의 대표적인 목회자였던 월리 크리스웰(W. A. Criswell) 목사와 같은 분들은 SBC 안에서 보수적인 새로운 신학교(Criswell College)를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며 SBC 안의 다른 보수주의자들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보수주의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오늘날 SBC는 건강한 보수주의로 극적으로 회귀했다. 이것은 SBC가 미국에서 가장 큰 개신교 교단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까지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개신교 교단들 가운데 보수주의로 다시 돌아온 교단은 오직 SBC 하나뿐이다. 이런 면에서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이고, SBC를 지킨 보수주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위업을 이루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며, 보수주의의 회복을 위한 그들의 확고부동한 의지와 강렬하고 지속적이며 공격적이고 전략적인 투쟁 및 인내와 수고에 대하여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 자유주의 신학과 타협을 하는 개신교 교파들로부터 탈퇴하라는 로이드 존스의 주장은 이처럼 역사적으로 구현된 여러 긍정적인 실례들을 통해서 그 정당성이 입증될 수 있다. 그의 주장은 또한 분명한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훼이스신학대학원(Faith Theological Seminary)의 게리 코헨 교수는 성별(聖別: Biblical Separation)에 관한 성경적 교훈을 다음과 같이 잘 정리해 주고 있다. 신약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특별히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명령한다(요 13:34,35). 그러나 신약은 또한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 16:17). 이단에 속한 사람을 멀리하라(딛 3:10).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마 7:15).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지지 않고 나아오는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요이 10,11). 다른 복음을 가져오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하지 말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며, 그들 중에서 나오라(고후 6:14-7:1). 이에 더하여 마태복음 13장에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다음과 같이 부르셨다. “지옥 자식”(15), “외식하는 자들”(13, 15,23,25,27, 그리고 29), “어리석은 자들과 맹인들”(19).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한 자들”(25).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자들”(28), “뱀들과 독사의 새끼들”(33). 지옥의 멸망으로 향하는 자들(33). 맹인 된 인도자들(24). “선지자들을 죽인 자의 자손”(31). . . . 그리스도인들이 상호 간의 사랑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될 정도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매우 진지하게 사랑해야 하고(요 13:34,35),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을 저주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해야 하지만(마 6:44), 그들은 또한 거짓 선지자들과 이단들과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다른 복음과 다른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들로부터 분리하는 행동을 보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러한 분리는 이러한 행동을 하는 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행동, 즉 회피, 거부, 멍에를 벗어버림, 관계를 단절함, 교제하지 않음, 집에 들이지 않음, 그들을 향한 경계하며 주의하는 자세, 그러한 거짓된 무리들뿐 아니라 그러한 거짓 신자들과 거짓 교사들이 그에 상응한 종말을 맞이하기를 바라는 것 등을 포함한다(롬 16:17; 딛 3:10-12; 고후 6:14-7:1; 요이 10,11; 마 7:15; 갈 1:8-9).(Gary G. Cohen, Biblical Separation Defended, 60-61) 요컨대, 로이드 존스는 정통 신앙의 보존과 그리스도인의 일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원리를 신봉하고 가르치며 실천했다. 첫째, 정통 신앙의 보존과 그리스도인의 일치는 ‘진리 위에 기초’해야 한다. 둘째, 진리를 정확히 분별하고 공유하기 위하여 ‘정통 교리를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 즉 정통 신앙의 보존과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위하여 성경적인 정통 교리에 기초한 신앙고백 혹은 신조는 불가결하다. 셋째, 정통 신앙의 보존과 그리스도인의 일치는 ‘영적 생명 위에 기초’해야 한다. 넷째, ‘근본적인 진리(fundamentals)를 공유’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차적인 문제(secondary matters)로 인하여 분열하지 말고 일치해야 한다. 다섯째,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진리를 ‘타협하는 교파들을 떠나’ 진리 위에 서 있는 복음주의자들과 ‘연합’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를 죄악과 동일시한 워치만 니의 신성모독적(神性冒瀆的) 가르침 워치만 니는, 마틴 로이도 존스와는 정반대로, 신조(creeds)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니가 신조를 전적으로 거부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배타적인 플리머스 형제회와의 교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멜튼에 의하면 니는 그들과 교류하면서 “종종 교파나 교파주의 그리고 다른 교회들에 대한 가혹한 생각들(harsh ideas)을 나누었다”(J. Gordon Melton, An Open Letter Concerning the Local Church, 26). 이러한 “가혹한 생각들” 속에 신조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니는 신조와 교파를 함께 묶어 생각하기 때문이다. 니는 기독교의 여러 신조들에서 아무런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가 보기에 신조는 사람들의 가르침에 불과하다. 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성경이 아니라 신조이다. 왜냐하면 신조는 다만 사람이 믿는 도리를 서술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워치만 니, 기독도보 3, 87). 그런데 신조는 과연 니의 말처럼 ‘사람이 믿는 도리’에 불과한 것인가? 성경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명문화했는데 “다만 사람이 믿는 도리를 서술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인가? 정말 성경적인 신조는 성경적인 가치와 권위가 전혀 없는 사람이 만든 교리와 신학에 불과한 것인가? 니는 성경적인 신조의 양면성을 균형 있게 강조하지 않는다. 신조의 성경적이며 효용적인 가치는 전혀 인정하지 않고 신조의 인간적인 측면만을 부각시켜 집중적으로 비판한다. 니에 의하면, “개신교의 신조들은 복음의 근본적인 교리들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만 이것도 사람의 가르침(man’s teaching)이다. 그들이 무엇을 말하든지 신조들은 사람으로부터 비롯된다” (Watchman Nee, The (Set 1) Vol. 05: The Christian (3), Chapter 3, Section 7). 개신교의 신조들이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니의 말은 부분적으로는 맞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적인 신조들의 성경적이며 효용적인 가치를 의도적으로 완전히 부정한 것이다. 위와 같은 니의 진술은 그의 가르침의 불균형의 약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니가 신조에 관해 한 말들을 전반적으로 살펴 보면 신조에 관한 그의 관점이 부정 일변도인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신조는 사람들의 가르침으로서 교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한다. 니의 다음과 같은 말을 보라. 만일 신조가 필요한 것이었다면 하나님의 지혜가 틀림없이 오류가 없는 신조를 하나 예비해 주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히 그러한 것을 잊지 않으셨을 것이고 교회로부터 그러한 것을 감추어 두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러한 신조를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은 그러한 신조가 쓸모 없는 것(useless)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Watchman Nee, The (Set 1) Vol. 05: The Christian (3), Chapter 2, Section 7) 니가 말한 것처럼 과연 개신교의 신조들은 무익하고 쓸모 없는 것들인가? 이것이 객관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주장이란 말인가? 역사적인 ‘웨스터민스터 신조’(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가 무익한 것이 정말 사실이란 말인가? 미남침례교회에 의해 제정된 ‘침례교인들의 신앙과 메시지’(Baptist Faith and Message)가 참으로 쓸모없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 정당한 주장인가? 각 교회들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한 신조들이 아무 소용이 없는 쓰레기와 같은 것들에 불과하다는 말이 사실인가? 니의 주장대로 신조가 이렇게 쓸모 없는 것이라면 지방교회는 왜 신조를 글로 표명했는가? 비록 “지방 교회 신앙 요약”(교회성장신문편집부, 지방 교회들 보도 편람, 24-31)이라고 이름을 붙여 놓았지만 정통 교회의 신조의 내용과 형식을 그대로 모방해서 작성하지 않았는가! 지방교회의 신조는 워치만 니가 다음과 같이 말한 신조의 정의에 그대로 부합한다. “사람들은 왜 신조들을 원하는가?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단순하고 분명한 교리들의 개요를 가지기 원하기 때문이다!”(Watchman Nee, The (Set 1) Vol. 05: The Christian (3), Chapter 2, Section 7). 지방교회의 창시자 니는 신조가 쓸모 없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니의 후예들은 왜 ‘쓸모 없는 신조,’ 게다가 (니의 가르침에 의하면) ‘교파주의를 뜻하는 신조’를 책에다 버젓이 올려 놓았는가? 지방교회는 니의 신실한 제자들인가 아니면 창시자의 얼굴에 침을 뱉고 있는 못난 제자들인가? 왜 이런 위선과 모순 속에 살면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잘못되었다고 정죄하는가? 지방교회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아는가 모르는가?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니는 개신교의 신조는 사람들의 가르침에 불과한 것이고 아무 쓸모 없는 것이라고 신조를 부당하게 폄하한다. 그러나 신조에 대한 니의 경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신조는 사람들이 성경을 떠나도록 만드는 경향을 품고 있다고 주장한다. 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신교의 모든 신조들과 규약들과 헌법들과 조직의 헌장들은, 문서로 되었든 혹은 말로 된 것이든, 사람들을 성경으로부터 이탈시키는 경향이 있다”(Watchman Nee, The (Set 1) Vol. 05: The Christian (3), Chapter 2, Section 7). 모든 신조들이 사람들을 성경으로부터 이탈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이 말이 과연 정당한 말인가? 이러한 주장이 과연 상식적인 판단에서 나온 말인가? 아니, 어떻게 이토록 균형 감각이 없는 비논리적이고 몰상식한 발언을 감히 할 수 있단 말인가? 개신교의 여러 탁월한 영적 지도자들이 신조의 효용적 가치에 관해 전혀 오해를 했단 말인가? 그래서 그 결과로 그들이 여러 신조들을 만들었단 말인가? 한 가지 예를 들어 판단의 준거로 삼아보자. 지금으로부터 38년 전 미국의 시카고에서 성경에 관한 믿음에 대한 중요한 회의와 선언이 있었다. 필자는 수년 전에 이 중요한 선언을 번역해서 인터넷에 게시했는데, 아래의 글은 필자가 그 선언을 소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시카고 선언 (1978)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함 및 신약교회의 설립의 기초석이다. 우리는 성경의 무오성을 확실히 믿고 견고히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다.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시카고 선언’은 이런 영적이며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작성되었다.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시카고 선언’(The Chicago Statement on Biblical Inerrancy)은 1978년 ‘성경의 무오함에 관한 국제 협회’(The International Council on Biblical Inerrancy)가 후원한 회의에서 약 300명의 미국의 복음주의 학자들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이 선언은 성경에 관한 자유주의적인 경향과 성경의 고등 비평 및 로마 카톨릭의 주장에 반대하여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입장을 보호하기 위해서 고안되었다. 이 성명서 작성에는 제임스 보이스(James Montgomery Boice), 노먼 가이슬러(Norman Geisler), 프랜시스 쉐이퍼(Francis Schaeffer), 칼 헨리(Carl F. H. Henry), 제임스 패커(J. I. Packer), 로버트 스프로울(R. C. Sproul)과 같은 당대의 최고의 권위 있는 복음주의 학자들과 지도자들이 참여했다. 시카고 선언은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최근의 역사적인 선언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위에 적힌 웹 사이트 주소를 클릭하면 선언 혹은 신조의 전부(분량이 그리 많지 않음)를 읽어볼 수 있는데, 이 선언은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바른 이해를 참으로 간결하고 분명하게 적어 놓아서 누구든지 쉽고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정리해 놓았다. 성경의 무오성이 심각하게 도전을 받고 있는 이 시대에 이런 선언이 나왔다는 것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가! 이 선언을 읽고 나면 성경이 얼마나 귀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는 주님의 말씀에 교회가 순종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가! 당대 최고의 권위 있는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숙의하는 가운데 지혜를 모아 당대와 후대의 정통 교회를 위해 참으로 값진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선언 혹은 신조’를 남겨준 것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인가! 그런데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이런 선언(혹은 신조)이 사람들을 성경으로부터 이탈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워치만 니는 화성에서 온 사람인가? 어떻게 이처럼 비논리적이고 몰상식하고 허위에 찬 주장을 하여 정통 교회의 정당하고 적법하며 필수적이고 중차대한 사역을 폄하하며 훼방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가? 니가 이처럼 비논리적이고 몰상식하게 교회의 신조들을 비판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즉 신조는 소위 교파주의의 전유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니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보라.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개신교의 다른 신조들은 개신교는 종파주의 (sectarianism)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 외에 다른 신조를 만드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성경적이라 해도 담을 쌓는 것이고 다른 견해들을 가진 사람들을 차단하는 것이다. “당신이 우리 중 하나가 아니라면 가서 다른 종파를 세우시오.” 만약 하나님의 교회가 모든 중생한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성경에 어떤 신조들을 더한다면 그것은 이미 종파(sect)인 것이다. (Watchman Nee, The (Set 1) Vol. 05: The Christian (3), Chapter 3, Section 7) 니의 위와 같은 견해를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시카고 선언’에 적용해 보면 이러하다. 시카고 선언은 성경의 무오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성경의 무오성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차단하기 위해 쌓아둔 담이다. 이 담은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사람들과 성경의 무오성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르고 분열시킨다. 따라서 이것은 종파주의이다. 그리고 니는 다음과 같이 ‘종파주의’ 혹은 ‘교파’를 ‘죄악’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여하튼 ‘몸의 분쟁’은 죄악이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죄악과는 분별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또한 필요한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깨어 있기만 한다면, 그가 전에 있었던 교파와 합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스스로 심판하고 열심을 내는 것은 초기의 형세이며, 마지막에 가서는 교파(혹은 다른 조직)의 죄악을 보게 되고, 마음 속에는 당연히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면 자연히 이 죄악을 버릴 것이다. (워치만 니, 기독도보 3, 93)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시카고 선언’ 같은 귀한 사역을 종파주의로 정죄하는 니의 이러한 극단적인 편견을 보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당대 최고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심사숙고한 끝에 나온 위대한 결과를 죄악으로 규정하는 니의 위험하고 유해하기 짝이 없는 판단은 정죄 받아 마땅하다. 신조를 교파주의의 죄악의 산물로 본다면 먼저 지방교회가 작성한 신조(“지방 교회 신앙 요약”)부터 죄악으로 정죄하라! 한편으로는 신조를 죄악으로 정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조를 내세우는 지방교회는 정녕 위선과 혼돈의 큰 바벨론이 아닌가! 정통 교회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수행한 거룩한 사역을 죄악으로 규정한 신성모독적인 니의 견해가 정통 교회를 음녀로 규정한 신천지의 이만희의 견해와 다른 것이 과연 무엇인가! 마틴 로이드 존스는 진리를 타협하는 사람들로부터의 성별(聖別)을 주장했다. 여기서 진리를 타협하는 사람들은 캔터베리 대주교(영국 국교회의 수장) 마이클 렘지(Michael Ramsey) 같은 사람을 포함한다. 렘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천국은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곳이 아니다 . . . 나는 오늘날의 어떤 무신론자들을 거기서 만날 것을 기대한다”(Iain H. Murray, David Martyn Lloyd-Jones, The Fight of Faith 1939-1981, 428).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진리를 타협하는 사람들로부터 성별(聖別)하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니의 비성경적인 주장에 의하면 이러한 분리 주장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종파주의의 죄악’이다. 그런데, 진리를 위한 성별(聖別)이 어떻게 죄악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고린도 교회의 육신적인 죄인 ‘당 짓는 것’과 진리를 위한 ‘성별’(聖別)이 어떻게 동일할 수 있는가? 이는 죄악과 거룩함도 분별하지 못하는 지극히 어리석고 몰상식한 생각이 아닌가! 이는 또한 거룩함(聖)과 죄악(惡)을 동일시하는 반(反)성경적인 개념이 아닌가! 빌리 그래엄이 첫 번째 ‘전도를 위한 세계대회’(World Congress on Evangelism)를 로마에서 개최하고자 했을 때 마틴 로이드 존스를 직접 찾아가 대회장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둘이 만난 자리에서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약 그가 그의 캠페인을 위한 일반적인 후원을 중단한다면 . . . 자유주의자들과 로마 카톨릭이 [빌리 그래엄과 함께] 연단에 오르게 하는 일을 중단한다면 . . . 나는 전적으로 그를 지원하고 대회장을 맡을 것이라고 말했다”(Ibid., 440). 마틴 로이드 존스는 여기서 자유주의자들과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성별(聖別)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빌리 그래엄은 복음의 진리를 타협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신복음주의(New Evangelicalism)의 사역 철학이요 전략인 침투(infiltration)의 개념을 실용주의적으로 자신의 사역에 적용했다. 그는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복음의 진리를 타협함이 없이 그러나 복음의 진리에 관한 일치가 없이, 자유주의자들과 로마 카톨릭과 교제하며 함께 일했다. 그래엄은 자유주의자들과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지원을 이끌어 내고자 그들을 공개 석상에서 칭찬하고 추천하며 심지어 전도대회를 통해 얻은 결신자 카드를 자유주의자들과 로마 카톨릭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래엄의 행보는 따라서 많은 복음주의자들의 혼동과 반발을 유발했고, 이로 말미암아 어떤 복음주의자들은 빌리 그래엄을 비판하고 그의 사역을 후원하기를 거부했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래엄에 대한 로이드 존스의 비판의 핵심을 이안 머레이는 이렇게 적었다. 빌리 그래엄은 복음의 진리에 있어서의 일치가 없이 그리스도인의 일치에 관한 에큐메니칼 아이디어에 굴복했다. 그리고 그의 본보기는 필연적으로, 마틴 로이드 존스의 말을 빌리면, 복음주의자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사람들의 확신’을 흔들어 버리는 일에 있어서 하나의 영향력이 되었다.”(Ibid., 440-441) 그렇다면 로이드 존스는 빌리 그래엄에게 자유주의자들과 로마 카톨릭으로부터의 성별(聖別)을 주장한 것 때문에 종파주의자로 낙인 찍혀야 하는가? 그리고 이 일로 말미암아 그는 “몸의 분쟁”의 죄를 지은 것인가? 천만에 말씀! 그러나 워치만 니의 비성경적인 교리에 의하면 로이드 존스는 ‘종파주의자’이고 “몸의 분쟁”의 죄악을 범한 악한 죄인이다. 니가 말한 바와 같이 로이드 존스는 “모든 중생한 사람들[빌리 그래엄을 포함]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워치만 니의 교리는 이처럼 진리를 위한 성별(聖別)을 종파주의의 악(惡)으로 정죄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사실상 죄악으로 정죄한 것이다. 니의 비성경적이고 비논리적인 가르침은 거룩함(聖)을 죄악(惡)과 동일시하는 신성모독적인 맹독성(猛毒性) 교리인 것이다. 아래의 내용은 필자의 지난 글에서 발췌한 것으로서, 위와 같은 니의 교리가 그의 후계자인 위트니스 리와 그의 후예인 지방교회에 미친 악영향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니와 리와 지방교회의 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해 내용을 일부 변경하기로 한다. 미국의 버지니아 주 린치버그 시에 위치한 리버티 대학(Liberty University)은 전세계의 개신교 대학 중 규모가 가장 큰 기독교 종합대학이다. 이 대학은 재학생 약 2만 명과 온라인 학생 약 10만 명을 포용하는 거대한 기독교 교육 기관이다. 세계 굴지의 이 크리스천 대학은 그러나 미국 버지니아 주의 중부의 한 소도시의 한 젊은 침례교 목사와 그가 섬기는 교회(Thomas Road Baptist Church)와 더불어 겸손하게 시작되었다. 1956년 봄, 침례신학교(Baptist Bible College)를 갓 졸업한 약관22살의 젊은 목사 제리 팔웰(Jerry Falwell)은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 시에서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가던 중 가족을 만나기 위해 고향인 린치버그 시를 잠시 방문한다. 이 때 훗날 팔웰 목사의 부인이 될 마슬 페이트를 포함한 35명의 장년 성도들이 팔웰을 만나 함께 린치버그 시에서 교회를 개척할 것을 종용한다. 이들은 근처의 한 침례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다니던 교회의 담임목사에 대해 불신과 불만을 품었고(이 경우는 충분한 정당성이 있었음), 그 결과 그 교회로부터 ‘분리해’ 나와 다른 교회를 개척하려던 사람들이었다. 팔웰은 이들이 교회를 개척하는 일을 6개월 간 도운 후 본래의 계획대로 애틀랜타로 가서 교회를 개척할 생각을 한다. 팔웰의 계획은 그러나 기존 교회의 분열을 원치 않는 ‘국제성서침례친교회’(Baptist Bible Fellowship International) 지도부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친다. 팔웰은 결국 ‘국제성서침례친교회’를 탈퇴하고 1956년 6월 린치버그 시에서 교회를 개척한다. 팔웰이 ‘분리해서’ 나온 35명의 성도들과 함께 개척한 이 교회는 몇 주 안에 라디오 방송사역을, 6개월 후에는 텔레비전 방송사역을 시작하면서 일취월장으로 성장하여, 1970년대 초에는 미국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교회 중 하나가 되었다(참조. Elmer Towns, America’s Fastest Growing Churches & World’s Largest Sunday School). 팔웰은 그의 자서전에 이처럼 적는다. “1971년까지 우리는 매주 수많은 문서들을 배부했다. 그 결과 동년에 린치버그 시의 5만 4천 명의 주민들 중 10%가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캠벨 카운티 인구의 다른 20%가 우리의 예배에 정규적으로 참석하게 되었다”(Falwell, An Autobiography, p. 326-27). 그가 설립한 교회는 현재 7천 석을 갖춘 예배당에서 매 주일 오전 두 차례 예배를 드리며 폭발적인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팔웰과 그의 교회는 1971년 교회당 건물 등을 사용하면서 리버티 대학의 모체인 린치버그 침례교 대학(Lynchburg Baptist College)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의 스토리는 이 시대의 세계선교를 위한 ‘성령의 또 다른 위대한 역사의 기록’이 된다. 1976년, 팔웰은 미국의 종교적 권리 운동의 모태가 된 ‘도덕적 다수’(The Moral Majority) 운동을 시작하여 미국의 교회들의 종교적 권리를 신장시키는 일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그래서 2007년 팔웰이 소천했을 때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는 팔웰을 특별 기사로 다루며 그를 미국의 ‘종교적 권리의 대부’(the father of religious right)라고 칭했다. 오늘날 제리 팔웰 목사를 통해서 ‘성령이 이루신 위대한 사역’을 ‘종파주의의 죄’와 ‘몸의 분열을 꾀한 죄악’과 ‘영적 음행’으로 규정하고 경멸하는 사람은 두 사람과 한 집단을 빼고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워치만 니에 의하면 팔웰 목사가 기존의 교회에서 이탈한 사람들과 더불어 침례교회를 개척한 일과 그 이후의 사역은 ‘종파주의’(침례교회)이고 ‘몸의 분열’을 가져온 죄악이다. 이와 같은 니의 주장에 더하여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주님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을 취함으로 교회를 교파화하는 것은 영적 음행이다(DCP, A Defense of the Gospel, p. 98). 모든 분리들과 교파들은 큰 바벨론 안에서 완성된다(Ibid., p. 100). 모든 교파와 모든 이름은 분리이다(Ibid., p. 102). 그들이 속해 있는 교파들의 조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교파의 조직들은 적절한 교회의 삶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을 파괴하는 사탄적인 조직을 세우기 위해 사탄에 의해서 사용되어 왔다(Ibid., p. 99). 팔웰과 그의 교회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분리해서’ 개척했고 ‘성령의 도우심 속에 성장’했다. 그들의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이를 웅변한다! 그들은 성경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의 표현’을 ‘침례교회’로 표현했다. 자신들의 교회를 다른 교회들 및 교파들과 차별하고 그들과 담을 쌓기 위하여 침례교회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조를 침례교회라는 명칭으로 표명한 것이다. 침례교회는 존 칼빈이나 존 웨슬리 같은 창시자가 없다. 침례교회들은 믿음의 고백을 중심으로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그들의 ‘이름’은 곧 그들의 ‘신조’인 것이다! 그러나 니와 리 및 지방교회에 따르면 ‘불만을 품고 분리해서’ 개척하고, ‘토마스 로드 침례교회’라는 이름을 붙인 팔웰과 그 교회는 ‘종파주의자들’이고 ‘몸의 분열’을 가져온 자들이며 ‘영적 음행자들’이다. 또한 1998년 이후부터 ‘남침례교연맹’(Southern Baptist Convention)과 ‘국제성서침례친교회’(Baptist Bible Fellowship)에 동시 가입되어 있는 ‘토마스 로드 침례교회’는 이중 삼중으로 ‘종파주의자들'이요 ‘몸의 분열을 꾀한 자들’이며 ‘영적 음행을 하는 자들’이다. 이뿐 아니라 니와 리와 지방교회의 주장에 의하면 ‘남침례교연맹’과 ‘국제성서침례친교회’는 ‘종파주의’의 심볼이요 ‘몸의 분열’을 가져온 죄악의 열매이며 ‘사탄의 조직’을 세우기 위한 사탄의 도구들이다. 또한 다양한 분파의 침례교회들에 속한 전세계의 1억 이상의 침례교인들(2002년 통계)과 수십만의 침례교회들은 모두 ‘종파주의자들’이요 ‘몸의 분열’을 획책한 자들이며 ‘영적 음행자들’이다. 이것은 그러나 비단 침례교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각 교파에 속하여 특정한 교파나 특정한 교회 명칭을 사용하는 전세계의 모든 정통 개신교인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말이다. 따라서 니와 리와 지방교회는 정통 개신교회들과 그들의 교파들의 사역을 통하여 ‘성령이 이루신 위대한 역사’를 ‘죄악’이요 ‘영적 음행’이라고 모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니와 리와 지방교회의 가르침을 ‘신성모독의 죄’라고 비판한다면 누가 부정할 것인가? 마틴 로이드 존스와 워치만 니의 근본적인 차이 마틴 로이드 존스는 ‘그리스도인의 일치’는 진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복음주의자들이 진리와 타협하는 사람들로부터 성별(聖別)해서 진리 위에 선 사람들과 연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성별(聖別)과 일치의 기준이 되는 진리는 성경의 ‘이차적인 문제’(secondary matters)가 아닌 ‘근본적인 진리’(fundamentals)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준이 되는 진리는 ‘신앙고백’ 혹은 ‘신조’를 통해서 명확하게 설명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에 워치만 니는 ‘그리스도인의 일치’는 중생한 모든 사람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중생한 모든 사람을 포함시키지 않는 모든 행위나 문서를 ‘종파주의의 죄’요 ‘몸의 분열을 획책한 죄악’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니에 의하면 로이드 존스가 주장한 진리를 위한 성별(聖別)은 거룩한 동기에서 비롯되었을지라도 ‘종파주의의 죄’요 ‘몸의 분열을 꾀하는 죄악’인 것이다. 또한 진리를 간결하고 분명하게 설명한 신조는 아무리 성경적일지라도 ‘종파주의의 죄’요 ‘몸의 분열을 가져온 죄악’인 것이다. 결국 니의 비성경적인 교리에 의하면 성경대로 믿고 순종한 로이드 존스는 ‘종파주의’를 대표하는 중죄인이요 ‘몸의 분열’을 획책하는 큰 죄인인 것이다. 니의 교리는 성경의 전부가 아닌 일부를 편파적으로 취해서 임의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니의 교리는 비성경적이고 불완전할 뿐 아니라 유해(有害)한 것이다. 반면에 로이드 존스의 가르침은 성경이 말한 그리스도인의 성별(聖別)과 일치의 교훈을 균형 있게 보여준다. 따라서 로이드 존스의 신학적 입장을 어떻게 취하든지 그를 ‘종파주의자’로 혹은 ‘몸의 분열’을 꾀하는 죄인으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전폭적으로 순종하려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니는 중생을 일치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진리의 말씀을 따라 행치 않고 무서운 죄를 지은 한 고린도 성도를 교회 중에서 쫓아낼 것을 강력히 독려한다(고전 5:1-5). 성경은 여기서 성별(聖別)이 없는 일치는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로이드 존스는 진리를 위한 ‘성별’(聖別)을 기초로 일치를 추구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일치에 있어서 진리와 더불어 ‘하나님의 생명’을 강조한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일치는 성령이 주시는 소원이 없이는 불가능함을 역설한다. 즉 로이드 존스는 그리스도인의 일치에 있어서 ‘진리’와 ‘성령’을 균형 있게 강조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일치에 있어서 중생만을 강조하는 니와 명백하게 대조를 이룬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분리와 일치와 관련하여, 로이드 존스의 가르침은 성경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지만 니의 교리는 편파적이다. 또한 로이드 존스의 가르침은 성경적이므로 안전하지만, 니의 교리는 비성경적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의 가르침은 진리를 높이고 수호하지만, 니의 교리는 진리를 경시할 뿐 아니라 심지어 진리를 위한 성별(聖別)을 몸의 분열의 죄악(罪惡)과 동일시함으로 신성모독적이다. 게다가 로이드 존스의 가르침은 (성경적이므로) 정통 교회를 순결하게 보호하지만, 니의 교리는 (비성경적이므로) 정통 교회를 결국 타협과 위험에 빠뜨린다. 21세기의 정통 교회는 새로운 환경에서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해 로이드 존스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니의 비성경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신성모독적인 맹독성(猛毒性) 교리는 철저하게 비판하고 가차 없이 버려야 할 것이다! ‘진리의 기둥과 터인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딤전 3:15)는 오직 진리 안에서만 일치해야 하고, 또한 오직 진리 안에서만 일치할 수 있다. 또한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딤전 3:16)는 오직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심”(엡 4:3)으로만 하나 됨을 이룰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랑과 겸손과 인내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할 것이다.
필자 김홍기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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