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교회란 무엇인가?
1. 서론
이 글의 목적은 신약성경이 교회를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한 용어들을 통해 현실적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배우고, 이에 근거해서 오늘날 한국 교회 갱신을 위한 성경적 원리와 지침을 제시하는데 있다. 만약 이런 작업이 없다면 그저 주위에서 보는 잘못 된 교회들의 외양만 보고 따라가기 쉬우며, 그러한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비 신앙적인 행태들을 답습하기 쉬울 것이다.
신학 하는 목적이 결국 교회를 바르게 섬기려함에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작업이 목회를 준비하는 신학도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과정일 것이며 필자처럼 교회를 개척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 없이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오늘날 많은 한국교회들이 기업화되어가고 있음을 마음아파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바로알고 자신을 점검하는 이 작은 작업에 의미와 가치를 둔다.
필자는 먼저 신약성경에서 처음 “교회”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마태복음의 구절을 간단히 살펴본 후에, 신약성경에서 교회의 본질을 어떤 용어로 표현하고 있는가를 고찰할 것이다.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기독론적인 측면에서, 신론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종말론적인 측면에서 교회에 대한 표현들을 정리함으로써, 현실의 교회가 마땅히 드러내어야 할 교회로서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현실의 교회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와 어떤 차이를 보이고 있는지 점검할 것이다.
이 방법은 교회의 건강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바람직한 성경적 도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성경적 잣대에 비추어서 현실의 교회를 진단해보고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있는지 선명하게 밝혀준다면 다시 건강해지기 위해 어떤 부분에 더 주력해야 할지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작업 이후에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기초로 해서 갱신해야 할 구체적인 부분들에 대한 간단한 논의를 첨부하고자 한다.
2. 교회의 주체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베드로가 드렸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 그 자체는 결코 아니다. 래드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창조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고, 하나님 나라의 도구가 되며, 하나님 나라를 수호한다. 교회가 없이 하나님 나라가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없이는 교회가 있을 수 없지만 이 둘은 서로 구분되는 개념인 것이다. 교회는 그 존재와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가장 강력하게 증시하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종말론적 공동체다.
이 구절은 교회에 대한 중요한 몇 가지 진리를 던져주고 있다. 첫째, 이 구절은 교회론이 바른 기독론에 근거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둘째, 이 구절은 교회를 세우는 주체가 “주님”이심을 보여준다. 교회는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세워졌고, 지금도 유지되어 가고 있는 공동체다. 지금도 교회를 모으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요한계시록에는 교회 공동체가 완전한 숫자로 채워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모으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심에 있어서 결코 실패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필찬이 잘 지적한 것처럼 부패한 교회의 모습으로 인해 패배의식에 깊이 빠져드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교회를 세우는 주체가 주님이신 것을 믿는다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부패한 교회를 보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좀 더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교회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 막연히 긍정적인 기대를 하자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말과 의식에 있어서 교회를 세우시고, 모으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시는 주체가 주님이시라는 진리를 굳게 붙잡고 희망을 가질 때 무기력하게 탄식만 하지 않고 변함없이 주님께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교회를 지칭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약명칭인 Qehal-Yah-weh에서 이끌어 낸 말이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일반적인 하나님 백성 개념에 근거해서 교회 개념을 제시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에클레시아는 단지 한 가지 의미로만 쓰이고 있지는 않다. 바울의 경우만 보아도 이 용어를 지역교회(골 4:16, 15; 고전 1:2; 고후 1:1), 전체로서의 공교회(엡 1:22; 3:10, 21; 5:23-32; 골 1:18, 24), 그리고 종교적 모임(고전 11:18; 14:19, 28, 34, 35)의 의미로 혼용하여 사용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의미로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바울이 이 용어의 구약명칭이 담고 있는 사상에 동의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구약의 하나님 백성과 신약의 하나님 백성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백성들로서의 믿지 않던 이스라엘을 언약 백성 됨에서 배제하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다. 아브라함의 자연적 후손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불연속성이 있다. 한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였듯이(출 19:5) 교회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이다(벧전 2:9). 하나님의 백성이라 이 표현 속에 구속사적인 개념이 있다는 점에서 연속성이 있다. 리델보스는 “성도들”, “택하신”, “사랑하는”, “부르심을 받은” 등 교회에 대한 명칭들이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참 백성의 연속과 구현으로 명시된 호칭들이라 말한다.
리델보스에 따르면 “택하심”은 원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던 방법, 즉 하나님이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자신에게로 부르시고,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여 자기편에 세우신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에드윈 브럼은 “택하신 족속”이라는 칭호가 교회를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을 강조하는 용어라고 말한다. 칼빈은 교회를 “선택받은 무리”로 묘사했고, 이 선택을 교회의 기초로 보았다. 이 택하심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의 뜻으로 된다. 즉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지혜와 행위를 넘어서서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택하심의 특성에 의거한다.
우리가 교회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를 선택하신다. 소비자 중심의 시대에 교회도 자기 취향에 따라 골라서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 발전과 욕구 충족이 이루어질 수 있는 교회가 선호된다. 교회가 자기 성취를 통한 성공의 수단이 되어지고 있으며 헌신을 회피한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이 많이 강조될 필요가 있겠다.
4.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 27절에서 고린도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σϖμα)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몸은 지역교회를 의미하지 않고 기독교 전체 교회를 뜻한다. 베커는 몸의 비유가 바울로 하여금 전통적인 에클레시아 개념이 충분히 언급하지 않는 특성을 강조하게 한다고 했다.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기독론적인 측면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와의 교회와의 관계, 성도와 성도의 관계가 매우 역동적이며 밀접한 생명 관계로 연합되어 있음을 잘 표현해주는 비유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에 역사적 깊이를 주며 그것을 보충한다. 한편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의 실재적 존재와 성격을 표현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진정한 아브라함의 씨인 모든 사람의 통일체라고 표현한다. 실제로 성경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들”로 표현하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가 통일된 하나의 유기체임을 말해준다. 교회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교회는 한 몸이라는 유기체적인 통일성 속에 다양한 지체들을 가진다. 따라서 교회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통일성을 구현하는 모습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이는 보편교회만이 가져야 할 모습이 아니라 지교회가 갖추어야 할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교회의 통일성은 몸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할 때만이 가능할 것이다. 바울을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서 “몸”과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개념을 사용하며,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개념을 더 확장하고 “몸과 머리”의 관계에 대한 표현들을 사용한다.
이점에서 동질성의 원리를 강조하는 교회성장 학의 이론은 성경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상업적인 발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져야 건강할 수 있다. 또한 위성중계를 통한 “인터넷 예배”는 유기체로서의 성도간의 교통을 깨뜨리기 때문에 마땅히 지양되어야 할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교회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무교회주의가 고상해 보일지라도 성경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몸의 각 지체를 살펴보면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를 위해 일한다.
이 사실은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이 성도의 바람직한 태도가 아님을 보여준다. 물론 교회가 개인의 삶에 유익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유익을 추구하려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성도들은 그리스도 몸의 한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자기의 은사를 사용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헌신과 희생과 봉사와 충성의 자세가 필요하다. 헌신과 봉사는 조직과 단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지체의 한 부분으로서 마땅해 행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내가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교회아’를 가진 바람직한 자세라고 할 수 있겠다. 나아가 교회가 한 몸이라는 개념은 개교회주의도 극복해야 할 문제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한 몸이라는 사실은 다른 성도와 또 다른 교회와 지체의식을 가져야 할 것을 가르쳐주는데, 교회가 기업화되면 지체의식대신 경쟁의식을 가지게 된다. 이필찬은 요한계시록이 한 번도 한 개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으며 교회 전체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잘 지적하며, 대교회들이 개교회주의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5. 성전으로서의 교회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표현되었던 성도들을 성전으로 표현한다. 이 성전은 아직 미완성의 성전이다(엡 2:21,22). 구약시대에 성막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임마누엘하시는 분이심을 의미했다. 이것은 참 성전의 그림자였는데 예수님은 성육신을 통해 그림자의 실체를 나타내셨다. 이제 건물로서의 성전 개념은 사라진 셈이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새 예루살렘에도 성전 건물이 없다. 이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자신이 친히 성전이 되시는 까닭이다.
이 땅에서의 교회 공동체는 ‘이미’착공된 성전이며 ‘아직 아니’ 완성된 성전이다. 따라서 “주 안에서 성전 되어가는”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만 유일하게 성전건축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교회’라는 명칭을 예배당 건물을 지칭할 때 사용한다. 그러나 신약에서 이 용어가 사용되었을 때는 건물의 의미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교회의 건물을 성전이라 부르며, 성전건축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역시 성경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6.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교회
신양성경은 신부가 남편에 대해 복종의 태도를 취하도록 요구한다. 이 관계가 교회와 그리스도께 대하여 갖는 관계의 양상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계시록 21장 2절에 나타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교회를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사실로도 순결성은 강조된다(고전 6:16). 그러나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표현한 것은 교회가 종말의 때에 순결성을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거스리는 셈플리의 말을 인용하여 제일 먼저 요구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가 유일한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대해 정결하고 충성되게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교회는 용서받은 죄인들의 모임으로서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는 공동체다. 거룩성의 반대 개념이 세속성이다. 세속성은 계속해서 복음을 왜곡시키려 한다. 곧 세속적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순결을 잃는 것이다. 이 땅에 있는 동안 교회는 항상 세속으로부터 도전을 받는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바 되어 천상의 은혜를 누리고 있지만 동시에 이 땅에서 전투하는 교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필찬은 전투하는 교회는 요한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일관된 교회관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측면에서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7. 삼위일체적 교회
허주는 교회를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전제로 한 삼위일체적 조망 아래서 이해할 것을 강조했다. (1)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교회, (2) 그리스도 예수의 몸으로서의 교회, (3) 성령 공동체로서의 교회. 이것은 신론적 측면에서 교회의 본질을 살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관찰하면서 교회가 하나님의 영으로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 중심의 경배 공동체이며,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의 영으로 구원의 은총을 입은 예수 중심의 증인 공동체이며, 거룩하신 생명과 능력을 입은 성령 중심의 은사 공동체라고 했다. 언약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그 성경신학적 뿌리가 하나님 중심, 예수 그리스도 중심, 성령 중심, 즉 삼위일체 적이다.
그는 성경신학적 측면에서 본 21세기의 바른 ‘교회와 성령’ 운동을 위해 다음과 같이 제언 한다: (1) 바른 교회 운동은 성경에서 계시된 대로 하나님 중심, 예수 중심, 성령 중심의 삼위일체적 기원에 뿌리를 둠으로써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만나는 살아있는 예배운동이어야 한다. (2) 바른 교회운동은 성경신학적 계시에 근거할 때, 종말론적으로 성육신하신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과 주되심의 선포를 중심으로 하는 선지자적 계시운동이어야 한다. (3) 바른 교회운동은 성령으로 인침 받은 백성들과 성령의 능력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예수를 구주로 선포하는, 성령에 사로잡힌 증인/선교운동이어야 한다. (4) 바른 교회 운동은 지체로서의 성도들이 교회의 머리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연결 되어져야 하고, 그들의 은사가 충분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활용되어져야 하는 교제와 은사운동이어야 한다.
8. 기독교 강요를 통해 본 몇 가지 생각할 문제
① 무교회가 현실 교회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칼빈은 교회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는데, 우리가 교회와 연합되어 있어야 하며 성도가 서로 교통해야 함을 말한다. 특히 칼빈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존립하게 된 교회는 결코 파멸될 수 없으며, 교회의 품을 떠나서는 죄의 용서나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선상에서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멸시하지 말라고 가르치며(14), 단독으로 독서하고 명상하더라도 넉넉히 유익을 얻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집회를 멸시하고 설교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그들은 극악한 오류와 추악한 망상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16).
이것은 현실 교회가 비록 타락하고 부패하였다 할지라도 교회 자체를 붕괴하려는 자세나 분열시키는 자세, 혹은 교회가 불필요하다는 자세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말씀을 선포하고 공경하며 성례를 집행하고 있다면 비록 부족한 점이 많을 지라도 교회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22). 현실 교회에 대한 지나친 비판이나 부정적인 시각은 오히려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해롭게 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주께서는 그의 교회의 교통을 중요시하시므로, 교회가 말씀과 성례를 소중히 여긴다면 그는 그런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떠나는 교만한 사람을 배반자와 배교자로 여기신다.(23)”고 말한다.
교회의 교통을 생각할 때 ‘독립교회’도 그다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고 보인다. 다른 교회와 단절된 채 홀로 서기를 할 것이 아니라 교회는 교통을 위한 연합에도 마음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공동체 운동’도 일종의 준 교회 단체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교회와 교통하지 않는다면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것이다.
② 현실 교회에 대한 지나친 비판의 자세는 지양되어야 한다.
말씀의 순수한 선포와 성례의 순수한 집행을 보존하고 있는 한 우리는 다른 결점이 많더라도 그 공동체를 배척하는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25). 그리스도인은 결코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해서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분열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프로테스탄트가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분리한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바른 말씀의 가르침에서 떠났으며 성례가 미신적으로 변하여 그 순수성을 잃어버린 거짓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점에 있어서 칼빈은 “경건한 사람들은 교회의 교통을 중요시하되 교회가 부패하고 모독적인 의식으로 타락했을 경우 그런 교회를 경솔하게 따라가서는 안 된다(55)”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런 본질적인 문제를 제외한다면 우리는 현실 교회에 있어서 완벽하게 거룩한 교회란 없으며 항상 악인과 선인이 섞여 있는 상태일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 내에서의 감정적 대립과 의견차이로 인한 분열은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또한 교회의 보이는 교통에서 의식적으로 탈퇴하는 사람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34).
어거스틴의 충고가 적절한 것 같다: “시정할 수 있는 것은 인자하게 시정하라. 시정할 수 없는 것은 끈기 있게 참으며 사랑으로 애통하라. 하나님께서 시정하시거나 추수 때에 가라지를 뽑으며 쭉정이를 키질하실 때까지 기다리라” 오늘날 교회의 많은 문제들로 인해 비판을 받고 있으나 우리가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자세는, 심판하는 자세가 아니라 자기의 아픈 몸을 더욱 애절하게 사랑하며 아끼듯이 긍휼히 여기는 자세와 용서하는 마음인 것 같다. 그럴 때에 분열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③ 바른 권징의 회복이 필요하다.
권징은 말씀대로 바르게 살도록 권면하는 것과 그렇게 살지 못했을 때 죄를 회개하도록 또 그 죄가 누룩처럼 공동체에 번지지 못하도록 방지하려는 측면에서 실시된다. 교리를 전하기만 하고, 사적인 충고와 시정과 기타 보조 수단을 첨가해서 교리를 지탱하며 실천하게 하지 않는다면 각 사람이 제멋대로 행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279). 따라서 벌콥도 교리를 순수하게 지키고 성례의 거룩성을 수호하기 위하여 권징의 신실한 시행이 절대 필요하다고 말한다.
교인들의 수평이동이 많은 시대에 바른 권징을 위해서는 지역 교회간의 연합이 필요할 것이다. 다른 교회에서 이전해 오는 교인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올바른 권징의 시행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은 권징에 있어서 지나친 엄격주의를 반대 한다: “악인들과 함께 주의 떡을 나누는 것을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그들은 바울보다 훨씬 엄격하다(29)”, 성경은 “권징 시행이 지나치게 엄격해서 권징의 중심 대상인 사람이 슬픔에 압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43).”
권징의 목적은 권징 자체가 아니라 사랑이며 합법적인 회의의 결정에 의해서 행사되어야 한다(262). 칼빈은 권징의 목적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282-283): 첫째, 추악하고 부끄러운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빼앗으려는 것이다. 둘째, 흔히 있는 것과 같이 악한 사람들과 항상 교제함으로써 선한 사람들이 타락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셋째, 비루한 자기에 대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회개하기 시작하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이러한 권징은 교회 내의 영적인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도덕적 권징이지 강제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255): “교회에는 벌을 주며 강요하는 칼의 권한 즉 강제력이 없다(260).”
④ 목회자의 자세는 섬기는 자의 자세여야 한다.
교회에는 질서와 정치가 필요하다. 칼빈은 질서와 교회 정치를 폐지시키려고 하든지 또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해서 무시하려고 하는 사람은 교회를 파멸시키며 파괴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라고 했다(62). 하나님은 사람의 봉사를 통해서 교회를 다스리시기 원하시기 때문에 교회에 여러 가지 직분들을 주셨다(61-9). 각각의 공적인 직분들은 소명을 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져야 하며, 소명에 응한 사람들은 명령을 받은 일을 책임지고 수행해야 한다(70). 특히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높은 자리에 예정하신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선 그 직분을 수행할 수 있는 무기를 주셔서 아무 준비도 없이 빈손으로 임직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고 말한다(71).
이점에서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오해가 있는 것 같다. “목사는 영권이 있어야 한다.” “목사에게는 축복권이 있다”는 말들을 통해서 권세를 부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음을 본다. 목사라는 직함보다 “당회장”, “총회장”이라는 직함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현상 또한 권세가 주는 매력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형 교회에서 목사가 부목사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것을 좋게 말하며 은근히 부러워하는 경우도 보았다. 이런 현상들이 한국교회에 유독 많은 것을 보면 성경적인 배경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유교를 배경에서 발생했다고 생각된다.
성경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직분을 주시고 권세를 주신 것은 군림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섬기게 하려 하심이다. 세상의 집권자와는 달리 하나님 나라에서는 권세를 부리려하지 않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고 낮아지라고 하셨다(마20:25-27). 이러한 말씀들에 비춰볼 때 비록 성공적인(?) 목회보다 성경적인 목회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칼빈은 “하나님만이 교회를 지배하시며, 교회 안에서 권위 또는 우월한 지위를 가지셔야 한다. 그리고 이 권위는 그의 말씀에 의해서만 행사된다(59).”고 했다.
필자는 이 견해에 동감한다. 목회자라고 해서 우월한 권위를 가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카리스마(?)로 휘어잡으려 하기보다 협의를 통해서 교회를 섬겨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목사는 협의 회장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또한 사람의 부패한 속성상 권세를 가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권세를 부리려고 하기 때문에 가능한 모든 권한들을 목사에게 집중하지 않고 분산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특정한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되고자 하는 것은 로마 카톨릭의 오류였다(128).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위는 어떤 사람에게도 양도되어서는 안 된다(129). 교회에서는 오직 말씀의 권위가 높아져야 하며, 목사가 비록 말씀을 설교로 선포하며 가르치지만 그도 청중의 한 사람으로서 말씀의 권위 아래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칼빈은 “우리에게는 섬기는 일이 부과된 것이지 주인 노릇하는 권리가 부여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당신이 예언자의 일을 하려면, 그에 필요한 것은 홀이 아니라 호미란 것을 알라(270)”고 했다.
⑤ 교회의 재산은 빈민을 위한 것이다.
칼빈은 “교회가 소유한 토지나 돈은 전부 빈민을 위한 재산이라고 하는 생각을 우리는 교회 회의의 결정과 고대 저술에서 자주 읽을 수 있다(85)”고 했다. 고대에는 사역자들이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그리고 빈민들도 무시되지 않도록 분배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해 “고대 교회 수입의 절반이 빈민에게 가던 것이 지금은 한 푼도 가지 않게 만들었다(114)”고 비판 한다. 필자가 맡고 있는 개척 교회에서는 고대의 전통을 따라 가능한 50% 정도는 구제와 선교와 장학 사업을 위해서 사용하기로 결의하였다.
또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교인들이 생긴다 할지라도 교회 건물에 대해서는 꼭 필요한 실용적인 용도 이상으로 확장하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지금은 자립조차 안 되는 어려운 형편이지만 처음부터 ‘주는 교회’가 되고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매달 소년 가장 한 가정을 돕고 있으며, 선교사 2가정을 지원하고, 장학 사업도 시작하였다. 지금은 모두 보리떡 같이 보잘것없는 액수이지만 하나님께서 이 일에 복주시기를 간구한다. 권세가 사람을 부패하게 만드는 것처럼 재물 또한 사람을 타락시키는 강력한 도구인 것을 본다. 교회든 선교회든 신학교든 재산이 많이 모이면 거의 필연적으로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처럼 이 땅의 어디든 재물이 많이 쌓인 곳은 끊임없이 좀과 동록이 발생하는 것이다(마6:19). 이 땅에 바른 교회들이 많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권세 문제와 재물 문제에 있어서 탐심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필자는 하나님을 위해 많은 사업을 하기 위해서 많은 권세와 재물을 모으려는 생각이 일종의 유혹이라 생각된다. 성경은 성을 빼앗는 것보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낫다고 가르친다(잠16:32). 이것은 성취와 업적 지향적인 세상의 가치관과 상충되는 진리의 말씀이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보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로마 카톨릭이 권세 문제와 재물의 문제에 있어서 얼마나 부패되었는가를 많은 지면을 통해 밝히고 있다.
⑥ 많은 세칙들을 만들고 절대화하여 신앙의 양심을 속박해서는 안 된다.
칼빈은 “양심은 자유를 얻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 안식을 얻을 수 없다. 양심은 한 왕이시며 해방자이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하나의 자유의 법 즉 복음의 말씀의 지배를 받아야만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은혜를 유지할 수 있다(217)”고 말한다. 이 양심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일종의 매개물로서, 사람이 아는 것을 마음속에서 떨쳐버리지 못하게 하며 그 죄과를 인정할 때까지 추궁한다(219).” 어떤 공동체의 목표나 사역을 위한 지나친 열정이 때때로 개개인 신자들의 신앙 양심까지 외면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결국은 성도 개개인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며 공동체를 부패하게 만든다. 칼빈은 카톨릭의 교회법이 양심을 노예로 만들었다고 말한다(218). 이처럼 오늘날에도 양심을 무시하면서까지 교회가 어떤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신자들의 신앙의 유익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십일조를 율법처럼 강조하는 것, 주일성수를 율법으로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닌 것 같다. 교회 안에 의식이 많아지고 믿음이 의식으로 대치되고 성도들의 자유가 감소되며 양심이 속박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짐을 진 자들을 초청하여 쉬게 하려 하셨던 그리스도와는 달리 교회가 오히려 성도들에게 많은 율법을 짐 지우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신 자를 다시 속박하게 된다. 비록 그렇게 행사한 결과로 교인의 수가 많아졌다고 할지라도 비 진리적 수단을 정당화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른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은 “준수해야 할 사항은 적어야 하고 또 덕을 세우는 것이라야 한다(253)”고 말하고 있다.
⑦ 성찬식을 좀 더 자주 시행할 필요가 있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모세의 율법에 언급된 결례들(레 11-15장)과 희생과 다른 의식들(레 1-10장)들이 폐지되고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두 가지 성례가 제정되어 현재 기독교회가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360). 세례는 할례를 대신하는 것으로 할례가 한 일을 세례가 수행한다(399). 따라서 아브라함이 언약의 표로 할례를 받을 때, 그의 가족들과 심지어 어린 이삭까지 할례를 받았던 것처럼 유아세례가 정당함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만찬의 경우는 성인에게만 행해져야 하는데, 왜냐하면 성만찬은 모든 사람에게 제공된 것이 아니라 주의 몸과 피를 분간하며 자기의 양심을 검토하고 주의 죽으심을 선포하며 그 힘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제공하신 것이기 때문이다(429). 칼빈은 성만찬의 유익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설명하기보다 느끼는 신비라고 말하며(443), 생각과 말로 다 묘사할 수 없다고 말한다(447).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공간적으로 임재 하신다는 카톨릭의 주장을 반박한다. 필자도 이미 승천하여 하늘에 계신 주님의 몸이 편재한다고 주장하게 되면 온전한 인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칼빈이 잘 반박하였다고 본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임재 하신다. 그래서 성찬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빛나며 신자들에게 풍부하고 감미로운 영적 위안을 준다(514). 그래서 칼빈은 적어도 성찬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집행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515). 심지어 “일 년에 한 번 성찬에 참여하라고 하는 이 관습은 누가 처음으로 시작했든 간에 분명히 마귀가 만든 것이다”고 말한다. 개혁에 있어서 급진적 성향을 소유했던 츠빙글리도 네 번의 성찬을 주장했다.
이에 비하면 한국 교회의 성찬식은 너무 부족하지 않는가 생각된다. 대체로 일 년에 두 번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관례다. 이것은 아직 한인 목사가 없던 시절에, 선교사들이 지방교회를 일 년에 두어 차례씩 순방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말이 있다. 미국의 교회들도 개척 시대에는 성찬을 일 년에 한두 번만 행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근래에 와서는 예전의 회복 운동과 함께 성찬에 대한 인식도 새로워져서, 매달 한 번씩 행하는 경향이다. 이점에서 한국 교회가 성찬식을 좀더 자주 거행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하겠다.
8. 결론
이상에서 필자는 신약성경이 교회의 본질을 어떤 용어로 표현하고 있는지를 고찰했다.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기독론적인 측면에서, 신론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종말론적인 측면에서 교회에 대한 표현들을 정리하면서 한국 교회 갱신을 위한 성경적 원리와 지침을 제시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잣대로서 현실의 교회를 비추어보고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 보안해야 할 부분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좀 더 세부적으로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통해서 한국 교회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점들을 집어보았다.
필자의 학문적 얕음으로 인해서 깊이 있는 논의는 할 수 없었지만 약간의 작업만으로도 성장하는 교회라는 화려한 건물 속에 감추어져 있는 오늘날 교회의 비성경적 요소들을 분별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깨닫게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시대 성경적인 바른 교회들이 세워지기를 꿈꾸며 개척교회를 섬기고 있는 필자도 그 일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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