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자료

[스크랩] 창세기 개관

수호천사1 2016. 11. 11. 14:08

창세기 개관

 

 

창세기 서론


이름: 창세기는 헬라어로 “기원“ 또는 “발생“이란 뜻이다. 사실 신약에서 마태복음 1장 1절 같은 경우는 발생이란 단어가 세대로 번역되었다. 창세기는 세대 내지는 기원의 책이다. 실제로 창세기에는 열 세대가 나오는데, 이는 하늘들과 땅(2:4), 아담(5:1), 노아(6:9), 셈(11:10), 데라(11:27), 아브라함(17:5), 이스마엘(25:12), 이삭(25:19), 에서(36:1), 야곱(37:2)등이다. 이 책은 전 성경을 위한 못자리이다. 이 책은 우리들에게 우주의 기원, 인간의 역사, 죄, 구원, 희생, 가족, 전쟁, 문명, 결혼 등을 기록해 준다.


저자: 모세가 “오경(五經/ The Penrateuch)“이라고 불리우는 처음 다섯권의 책을 썼다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헬라어 “penta“ 다섯/ “teuchos“ 책들). 물론 창세기의 사건들이 발생했을 때 모세는 살고 있지 않았으나 성령께서 모세로 하여금 그것을 기록하도록 지시하셨다(벧후 1:20-21).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하여 기록한 이 책들을 모세가 기록했다고 믿으셨으며(요 5:45-47)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훌륭하고 충분한 권위있는 증명이 된다.


목적: 창세기를 읽으면 처음 열 한 장은 상세하지 않고 총괄적으로 기록되었고, 12장부터 그 나머지 부분은 네 사람의 생애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창세기 개요에서도 다루겠지만 첫 부분(1-11장)은 총괄적으로 인류를 다루며 인간과 죄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고, 후반부(12-50장)는 이스라엘을 특징적으로 다룬다. 특히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생애가 다루어진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때 이 책의 목적은 인간과 그 죄의 기원,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구원을 설명하는 데 있다.


이 책의 중심 사상은 하나님의 선택(divine election)이다. “천지(天地)“에서 시작되어 하늘이 아닌 땅을 택하여 다루고 있으며, 그리하여 이후부터는 계속해서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주제로 등장한다(하늘과 하늘의 백성인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서는 신약, 특히 바울을 기다려야 한다). 땅을 택하시고는 천사들(타락한 천사들을 포함하여)을 건너 뛰어 인간을 다룰 것을 택하신다.


아담의 많은 아들들 중에서 하나님은 셋(4:25)을 택하신다. 셋의 많은 자손들 중에서(5장) 하나님은 노아를 택하시고(6:8), 노아의 가족 중에서 셈(11:10)을, 그리고 데라(11:27)를, 마침내는 아브라함을 택하신다(12:1). 아브라함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었으나 이삭이 선택된 씨(21:12)였다.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의 축복을 받을 자로 야곱을 택하셨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선택이다.

그 누구도 이 선택된 자들의 이런 영광을 누릴 자격은 없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와 더불어 창세기는 또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섭리를 예증하고 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를 의심하였지만 하나님은 그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다스리시며 통치해 오셨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실패하였다면 수십 세기 후에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메시야는 없었을 것이다.


창세기와 계시록: 창세기에서 시작한 것이 계시록에서 완성된다.


창세기                                 계시록

천지창조/1:1                    새하늘과 새땅/계21:1

사탄의 첫 인간 공격/3:1- 이하   사탄의 최후공격/계20:7-10

낮을 다스리는 태양/1:16         태양이 필요없음/계21:23

어두움과 밤/1:5                 그곳에 밤이없음/계22:5

바다가 창조됨/1:10              더는 바다가 없음/계21:1

동산의 강/2:10-14               천국의 생명강/계22:1-2

인간과 땅의 저주/3:14-17        저주가 더는 없음/계22:3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3:24       낙원으로 회복된 인간/계22:1- 이하

생명나무금지/3:24               생명나무가 인간에게 개방됨/계22:14

⑩니므롯이 반역하고             ⑩적그리스도와 바벨론이

바벨론을 세움/10:8-10            심판받음/계17-19 장

⑪아담의 결혼/2:18-23            ⑪어린양의 결혼/계19:6-9

⑫뱀의 몰락이 약속되다/3:15      ⑫뱀의 몰락이 성취되다/계20:10"




창세기 개요


1. 총괄적으로 본 인간의 역사/1-11장


천지창조/ 1-2장

아담과 그의 가족/3-5장

-인간의 타락/3장

노아와 그의 가족/ 6-11장

-홍수/ 6-10장

-바벨의 반역 /11장


2. 상세히 본 이스라엘의 역사/12-50장


아브라함/12:1-25:18(아들을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

이삭/ 25:19-26:35(신부를 취하는 외아들)

야곱/ 27:1-36:43(육과 영의 대결)

요셉/ 37:1-50:26(하나님의 통치의 섭리)


창세기의 그리스도


1.창조의 말씀-창 1:3/요 1:1-5/고후4:3-7

2.마지막 아담-롬 5/고전 15:45

3.여자의 씨-창 3:15/갈 3:19/갈 4:4

4.아벨-창 4/히 11:4/히12:24

5.노아와 홍수-창 6-10/ 벧전 3:18-22

6.멜기세덱-창 14/히 7-10

7.언약의 자녀, 이삭-창 17/갈 4:21-31

이삭은 기적적인 탄생, 죽으려는 의지, 상징적인 부활(히 11:19), 신부를 취함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8.어린양-창 22:7-8/요 1:29

9.야곱의 사닥다리-창 28:12-/요 1:51

10.요셉-창37-50장

형제들에게 거부받고 아버지의 사랑하시는 자요, 온당치 않게 고난을 당하도록 되어 있었고, 나중에 형제들에게 용납되었고, 지배하는 자리에 올려졌다.


창세기 1장 

창조-창세기 1장-


이 장의 깊이와 풍성함을 간단한 연구 개요로 다 전개할 수는 없으므로 주요 진리들로 제한하기로 한다.


1. 창조주

어떤 과학자나 역사가라도 “태초에 하나님이... “라는 구절을 증명할 수는 없다. 이 간단한 서술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무신론자를 논파하고,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자를, 여러 신을 섬기는 다신론자를, 모든 것이 신이라는 범신론자를 논파한다. 이 구절은 물질은 영원하며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유물론자, 그리고 창조와 역사의 배후에 신의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치는 운명론자를 논파한다.


이 장에서 하나님의 인격성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가 말씀하시고, 보고, 이름을 지으시고, 축복하시기 때문이다. 진화론자는 물질이 “저절로 존재케“ 되었고, 생명도 “우연히“ 발생하였으며, 모든 복잡한 형태의 생명체는 낮은 형태로부터 “점진적으로 진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우리는 같은 종(種)안에서의 변화(이를테면 말이나 집고양이로의 발전)를 인정하지만 한 종류의 피조물에서 다른 종류로와 변화를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왜 우주를 창조하셨는가 ?

자신에 무엇을 덧붙이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아무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창조는 하나님을 제한하게 된다. 왜냐하면 영원한 분이 시간과 인간의 역사 속에 자신을 제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말씀이 분명히 밝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저술가(Author)요, 지탱자(sustainer)요, 창조의 목적이라는 점이다(골 1:15-17/계 4:11). 살아계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자연이라는 책을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하신다(요 1:1-5/시 19 참조).


창조는 하나님에 관해 무엇을 계시하고 있는가?

창조가 계시하는 것은-

그의 지혜와 능력(욥 28:23-26/잠 3:19)

그의 영광(시 8:3-9)

그의 능력과 하나님되심(롬 1:18-21)

대수롭지 않은 존재인 인간에 대한 사랑(시 8:3-9)

그의 섭리로 돌보심(사 40:12- 이하)이다.

우리 주님은 지상에 계실 때 꽃들과 새들에게서 조차도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운 손길을 보았다.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이란 이름은 “엘로힘“(Elohim)이다.

창조에 연관된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 이름의 어원은 “엘“(E1)로서 “능력, 강함, 탁월성“을 뜻한다. 창세기 2장 4절에 “여호와 하나님“(Lord God)이란 말이 나오는데 원문의 “여호와 엘로힘“aehovah Elohim)을 번역한 것이다. “여호와“는 언약과 연관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의 백성과 그를 연결시키는 이름이다. 이것은 모세에게 가르쳐 준 이름으로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출 3:14-15)이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시며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2. 창조

우주의 원창조(original creation / 1:1)는 사탄의 타락(사 14:12)이전의 일이며 하나님의 수제품(인간을 일컬음)이 타락하기 전의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창세기 1장 1절과 1장 2절 사이에 “간격“이 있음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2절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게...되었고“라고 읽을 수 있겠다. 이사야 45장 18절은 하나님이 땅을 “공허한 중에“(히브리어-“형태가 없이“)창조하시지 않았음을 진술한다. 그러므로 땅의 혼돈된 상황은 심판을 받은 결과임이 분명하다. 에스겔 28장 11-19절은 원창조 시의 가장 높은 피조물인 루시퍼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고 이로 말미암아 심판을 초래했음을 암시해 준다. 사탄은 창세기 3장에서 벌써 활동하므로 그의 타락은 그보다 먼저 생겼을 것이 분명하다. 이 말은 곧 창세기 1장의 창조 활동들은 사실상 몰락한 우주의 회복이란 뜻이 된다. 만물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 가운데 있다. 아래 도표는 창조의 6일 동안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나를 설명하고 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 조성하심    하나님이 조성하신 바를 채우심

첫째날/빛의 창조(3-5)             네째날/광명(비치는 광명들, 14-19)

둘째날/궁창과 물(6-8)             다섯째날/새와 물고기(20-23)

세째날/땅과 식물(9-13)            여섯째날/동물과 인간(24-31)

일곱째날/하나님이 쉬셨다-안식일



하나님은 하늘에 광명들을 두시기 전에 빛이 있게 하셨다.

“궁창“이란 단어는 “넓게 펼쳐져 있음“ 또는 “팽창“의 뜻으로 우주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창조에 있어서조차도 분리의 원칙이 적용됨에 유의하자. 즉,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에서 빛을 나누시고 땅에서 물을 나누셨다(고후 6:14-18). 또 한 가지 주목할 일은 각 생물은 “각 종류에 따라“ 재생산하도록 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점진적인 진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시가 없다. 우리는 여러 종류의 가축의 새 품종을 개량할 수는 있으나, 소(牛)로 순록(馴鹿/ 사슴의 일종)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인간은 창조의 면류관이다.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의 회의“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 장면에 인간을 데려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쓴“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몇몇 천사들이 이미 하나님께 반역하였음과, 인간도 물론 그러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그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첫 인간을 “그의 형상을 따라“ 빚으셨다(형상이란 물론 인간의 인격성(지, 정, 의, 자유)을 가리키는 말이며 육체적인 모습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과 골로새서 3장 10절을 보자. 인간은 땅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게 되었으며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왕이다. 그러므로 사탄의 공격이란 말이 설명된다. 전에는 사탄(루시퍼)이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시퍼가 우주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면 다음으로 그는 인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시도할 것이며, 그는 성공을 거두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통치의 자리를 잃었다(시 8/히 2:5-18). 그러나 이 통치권은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다시 주어졌다(롬 5장 참조). 지상에 계실 때 예수는 물고기(눅 5/마 17:24- 이하), 새(마 26:74-75)와 짐승들(마 21:1-7)을 다스리심을 증명하셨다(계 1:5-6 을 읽자).


인간의 식성은 본래 채식성이었으나 창세기 9장 3-4절에서 변했다. 사도행전 10장과 복음서 전체의 가르침으로 볼 때 어떤 식으로나 식성을 제한하는 것은 폐지된다.


3. 새 창조


고린도후서 4장 3-6절과 5장 17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영적인 새 창조를 이루심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바울은 이 새로운 창조를 예증하기 위해 창세기의 창조 사건을 이용한다.


인간은 완전하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우주가 그러했듯이 죄로 인해 타락했다. 인간은 “혼돈과 공허“ 속에 죄인으로 태어나며 그의 생애는 목적이 없고 공허하며 흑암 중에 있다.


성령은 죄를 깨닫게 하시는 자신의 일을 시작하신다(창 1:2).

구원은 반드시 주님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며 어떤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령은 말씀을 사용하신다.

“비취어 깨닫게 하신다“(시 119:130)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구원은 있을 수 없다(요 5:24). 히브리서 4장 12절은 말씀하시기를 마치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물과 땅을 나누셨듯이 말씀은 “쪼개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다.


그리스도를 믿음이 생명을 준다 !

이것은 제 3일에 땅이 나타난 것으로 예증된다. 이것은 실제적인 부활이다. 죽음을 벗어난 생명이다. 제 3일에 이 일이 발생했음에도 큰 의미가 있으니 곧 부활의 날이다.


이제 믿는 자는 “각기 종류대로 열매를 맺고“ 번식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영적인 의미로)

믿는 자는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천국의 빚을 지니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왕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다스린다“(롬 5:17-).


아담이 옛 창조의 머리였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새 창조의 머리이시다. 그는 마지막 아담이시다(고전 15:45-49). 구약은 “아담의 세대들의 책“이며(창 5:1), 저주로 끝난다(말 4:6).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들의 책“(마 1:1)이며, “다시 저주가 없으며“(계 22:3)로 끝맺는다."


 

 창세기 2장


1. 첫 안식일(2:1-3)


“안식“이란 단어의 뜻은 단순히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지쳐서 쉬지는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시 121:4). 그보다는 그의 창조의 사역을 멈추셨다. 그 임무는 이제 완성되었다. 그는 피조물들을 축복하셨고(1:22), 인간을 복주신 다음(1:26), 이제 안식일을 축복하셔서 특별한 날로 정해 놓으신다. 여기서는 인간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명령은 없다. 사실 아담이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안식일은 아담에게 첫 날이었다.


안식일은 출애굽기 20장 8-11절에 이르기까지 구약에서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이 구절에 보면 하나님은 특별한 언약의 표시로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주셨다. 이방인들에게 안식일을 주었다는 말은 성경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시편 147편 19-20절은 구약의 모세, 율법이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유배를 당한 한 가지 이유는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이었다(느 13:15-22).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는 율법시대였기 때문에 그는 안식일을 지키셨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바리새인들의 규율을 따르지는 않으셨다(막 2:23-28).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최종적으로 이스라엘과 결별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온전해지기까지는 안식일에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한 주의 첫 날(일요일/ 主日)은 교제와 예배를 위한 특별한 날이었다(행 20:7/고전16:1-3/계 1:10). 그 첫 날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고(마 28:1/요 20:1) 새로운 창조를 이룩한 그의 사역의 완성을 기념하는 날인 것이다(고후 5:17). 두 개의 특별한 날들, 안식일과 주일(the Lord's, Day)은 서로 다른 것을 기념하므로 이를 혼동하지 말아야 하겠다.


안식일                            주일

옛창조의 완성(육적)                새 창조의 완성(영적)

이스라엘에게만                       모든 신자에게

노력해서 얻는 구원을 말함:     은혜로 얻는 구원을 말함:6일간 일하고 쉼을 얻음          

 

먼저 하나님을 만나고 다음으로 그를 위해 수고함히브리서 4장에 보면 구약의 안식일은 장차 올 안식의 왕국을 모형으로 보여 주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가지는 영적인 안식을 상징함을 알 수 있다.

골로새서 2장 13-17절은 안식일이 율법의 “그림자“에 속한 것이며 은혜의 충만한 빛에 속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만일 누가 안식일에 예배드리려 한다면 그래도 좋다. 그러나 주일(主日)에 예배하는 신자들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갈라디아서 4장 9-11절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율법주의의 속박으로 되돌아가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로마서 14장 4-13절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연약한 양심과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표시임을 암시해 준다. 물론 안식교인이나 재림교인이 토요일에 예배하는 것을 더 좋아하면 그렇게 해도 좋으나 우리가 일요일을 특히 강조한다고 해서 비난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로마서 14장이 다루고 있는 전체의 논점이다."

 

창 2:4-14      "2. 첫 동산(2:4-14)


성경 역사는 네 개의 동산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에덴-죄가 들어온 곳

2) 겟세마네-그리스도께서 죽음을 괴로워한 곳

3) 갈보리-그가 죽어 장사지낸 곳(요 19:41-42 참조)

4) 천국의 낙원(계 21:1- 이하)


이 부분에 이르러서 모세는 하나님이 첫 부부에게 주신 첫 가정을 설명한다. 여기서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사건에 포함시키지 않은 보다 상세한 일들이 나오는데 이 일들은 보충적인 사건들이지 모순된 사건들은 아니다. 5절은 하나님이 땅의 경작을 돕기 위해서 인간이 필요했음을 시사한다. 인간은 마치 토기장이가 진흙을 빚듯 “만들어“ 졌다.(formed /렘 18:1 이하에 나오는 단어와 같음) 남자는 동산 밖에서 창조되어 동산에 있게 하였던 반면에 여자는 동산에서 창조되었다. 남자는 동산을 아름답게 가꾸고(손질하고), 보호할(지킬/ 이 말은 사탄의 공격을 암시한다) 책임이 있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생활과 행복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으며 모든 것이 좋고 즐거운 것들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풍성함 가운데 동산의 생활을 즐기도록 허락하셨다.


두 나무는 중요하다.

3장 22절에 보면 생명나무는 인류에게 생명을 유지시켜 준 것으로 되어 있다(계 22:2 참조). 아담이 범죄한 후에 생명나무를 먹었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 모든 인류에게 전해지지도 않았을 것이며(롬 5:12- 이하) 그리스도가 인간을 구속하려고 죽지 않아도 되었다. 지식의 나무(선악과)는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며 그 과일을 먹는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뜻하고 죽음의 형벌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이 나무가 무슨 나무였는지는 모르나 분명한 것은 아담과 하와가 그것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창 2:15-17    3. 처음 법(2:15-17)


아담은 죄를 범한 일이 없는 완전한 피조물이었다. 그러나 범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아담을 통치권을 가진 왕으로 만드셨다(1:26- 이하).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다른 것을 다스릴 수 없다. 따라서 아담은 시험을 거쳐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이 강압이 아닌 자신의 자유의지로써 그를 사랑하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이 법은 완전히 정당하고 의로운 것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동산에서 자유스러움과 풍성한 식량을 누리고 있었으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않아도 되었다.

창 2:18-25    "4. 첫 결혼(2:18-25)


창조의 모든 일은 “심히 좋았다“(1:31). 다만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았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이 구절은 결혼의 근거가 된다.


결혼은

1) 동반자를 제공하는 것이며

2) 종족을 이어가는 것이며

3) 서로 도와 최선을 이룩하기 위한 것이다.


“돕는 배필“이란 성경대로라면 “그를 위한 배필, 곧 그의 필요에 대처하는 배필“이어야 한다. 이 동반자는 동물계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 사실로 보아 이성이 없는 피조물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 사이에 고정된 큰 간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최초의 여자를 만드실 때 첫 남자의 살과 뼈로 만드셨으며 그 곳을 “살로 대신 채우셨다“(21절). 22절에 나오는 “만드시고“라는 단어는 사실상 성전을 세운다고 할 때의 “세운다“는 뜻이다. 하와가 아담에게서 만들어졌음은 인류 종족의 단일성과 여자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다. 하와가 남자의 발에서 만들어져 짓밟히거나, 남자의 머리에서 만들어져 지배하거나 하지 못하게 남자의 심장 근처에서 만들어짐으로 남자의 사랑을 받도록 되었다는 말은 흔히 지적되는 말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데려오는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었는데(2:19), 이는 첫 인간이 지성과 언어와 말을 가졌음을 나타낸다. 그는 자기 신부의 이름을 “여자“(히브리어로는 “Ishshah“이며, “남자“를 뜻하는 “Ish“와 관계되어 있다)라고 이름지었다. 이처럼 그 이름이나 본질로 볼 때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속한다. 모든 결혼식이 하나님에 의해 행해진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는가. 그러면 모든 가정이 지상의 천국이 될 것이다.


물론 이 사건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그림이다(엡 5:21-33).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인간이 그의 옆구리를 열어 젖힘으로(요 19:31-39) 교회를 탄생시키셨다. 그가 인간의 본성을 입으심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본성을 입게 되었다. 하와는 아담의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만족케 하신다. 디모데전서 2장 11-15절은 아담이 의지적으로 금지된 과일을 먹었으며 하와가 속은 것처럼 속은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그는 기꺼이 죄인이 되어서 그의 신부와 함께 머물고저 했던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기꺼이 우리 대신 죄를 입으시어 우리가 그와 함께 영원히 있도록 하셨다. 그 사랑과 은혜가 놀랍기 그지없다! 이 장면에서 하와는 죄가 들어오기 전에 창조되었음도 주목하자. 이처럼 우리는 창세 전에 선택을 받은 것이다(엡 1:4).


자세히 보면, 이 구절들에서 에베소서에 나타나 있는 교회에 대한 세 가지모습을 볼 수 있다.

1) 하와는 신부이고(엡 5:22-33)

2) 아담의 몸의 일부이며(엡 2:22/엡 4:16- 이하)

3) 세움을 입었으니, 곧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교회를 암시한다(엡 2:19-22)."


   

창세기 3장 

   인간의 타락

 

1. 유혹(3:1-6)


1) 유혹자

하나님은 죄를 만드신 분이 아니시며 인간을 범죄하도록 시험하지도 않으신다. 우리는 앞서 사탄이 창세기 1장 3절 이하 이전에 죄에 빠졌음을 보았다. 그는 처음에 아름다운 천사였으며, 하나님의 창조를 기뻐하였으나(욥 38:4-7), 그의 죄가 창조 세계를 타락시켰다(사 14:12-17/겔 28:11-19). 사탄은 뱀의 모습으로 하와에게 왔으며 자기의 본성을 결코 나타내지 않았음에 유의하자.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은 속이는 뱀이고 4장에서는 살인하는 자이다(요 8:44).


2) 표적

사탄은 하와의 마음을 목표로 삼았고 그녀를 속이는데 성공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일부분이다(골 3:9-10). 그러므로 사탄이 마음을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이다. 사탄은 거짓말을 사용하는데, 그 자신이 거짓말장이이며 거짓의 아비이다(요 8:44).


3) 전술

마음이 하나님의 진리를 붙잡고 있는 한 사탄이 우리를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이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자 마귀의 거짓말이 통할 여지가 생겼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을 일으켰으며(3:1)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였고(3:4), 다음으로 자기의 거짓말로 대신하였다(3:5). 사탄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손상시키려 하는 것에 유의하자. 사탄은 하나님이 저들에게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막고 계신다“고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고 그의 사랑에 의문을 일으킬 때 우리는 사탄의 손에 놀림을 당하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과 같이 되어 !“라는 말을 꺼내 유혹을 상당히 훌륭한 것으로 만든다. 사탄 자신이 “가장 높은 분과 같이“(사 14:14)되고 싶어했다. 수십세기 후에는 그리스도에게 자기를 하나님으로 섬기면 “세상 모든 왕국들“을 주겠다고 제안했다(마 4:8).


4) 비극

하와는 마귀에게 처소를 제공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마귀)와 대항해야 했다. 이렇게 대화하는 동안 아담이 어디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하와는 “임의로“(freely)라는 말을 빼고 3장 2절을 말했고 “만지지도“란 말을 첨부하여 3장 3절의 말을 했으며,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죽을까 하노라“로 변경시켰다.

6절에서는 육신의 정욕(먹음직도 하고)과, 안목의 정욕(보암직도 하고)과, 이생의 자랑(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을 보게 된다(요일 2:15-17 참조).

혼자 죄를 짓는 것은 어렵다.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이 다른 사람과 죄를 나누어 가지게 한다. 아담은 고의적으로 죄를 지어 세상을 심판 가운데 던져 넣었다."

 

2. 저주(3:7-19)


1) 내적(7-13절)

즉각적으로 순수함과 영화로움을 상실하고 죄책감을 느낀다. 그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벌거벗은 것을 감추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자기 노력이란 옷을 허락지 않으셨다(21절). 이보다 더한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싶은 욕망을 잃은 것이다. 하나님이 접근하시는 것을 듣고 숨었다 ! 죄의식, 두려움, 수치심이 불순종하기 전에 그들이 즐겼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깨뜨린다. 또 한가지 주목할 것은 남자가 여자의 핑계를 대고 여자는 뱀의 핑계를 대듯 자기 방어가 커가고 있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죄의 비극적인 내적 결과들을 본다.


2) 외적(14-19절)

뱀이 전에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어다니는 짐승이 아니었던 것같다. 이 단어는 총명과 영화를 암시한다. 그러나 이 피조물이 사탄에게 양보하였고 유혹에 동참했으므로 심판과 저주를 받아 흙 속의 낮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여인의 심판은 임신과 출산의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것이다(딤전 2:8-15). 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남자와 결혼한 그리스도인 여자는 아이들을 낳는 데 특별한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고 암시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남자에게 내려진 심판은 일하는 것이다.

낙원 대신 황폐가, 동산에서 다스리는 기쁨 대신 밭에서의 땀과 노역을 얻게 되었다. 일이 하나님의 형벌은 아니다. 일에 죄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2:15). 형벌은 일할 때의 땀과 노고이며 자연의 방해이다. 죄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이 저주를 받고 속박을 받게 되었다(롬 8:15-25).


3) 영원히(15절)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복음이다. 여인의 씨(그리스도)가 최종적으로 사탄과 그의 씨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기쁜 소식이다(갈 4:4-5/3:15- 이하). 이 지점으로부터 흐름이 나뉘어진다. 사탄과 그의 가족(씨)은 하나님과 그의 가족에게 대항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 사이에 적개심(대립)을 부으시고 사탄이 지옥에 던져질 때 전쟁이 절정에 이를 것이다(계 20:10).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가라지의 비유를 다시 살펴보고 사탄에게도 하나님처럼 그 자녀들이 있음에 유의하자.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아벨을 죽이는데 요한일서 3장 12절에서는 가인이“악한 자에게 속하였다“고 했다. 즉 마귀의 자녀인 것이다. 구약은 대립하는 두 씨들의 기록이고 신약은 그리스도의 출생과 십자가를 통하여 사탄을 이기신 승리의 기록이다."

 

3. 구원(3:20-24)


아담이 들었던 유일한 복음은 하나님이 3장 15절에서 하신 말씀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믿었으며 구원을 받았다. 그가 그 말씀을 믿은 줄을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아담이 그 아내의 이름을 “생명“ 또는 “생명 수여자“의 뜻을 가진 “이브(Eve)“라고 지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가 죽을 것이라고 하셨고 930년 후에 육신적으로 죽었다. 그러나 그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됨으로 영적으로도 죽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여인에게서 구세주가 탄생할 것을 약속했으며, 아담은 이 약속을 믿어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은 죄의 육체적인 결과를 변경시키지는 않으셨으나 영원한 결과인 지옥(hell)은 면제시키셨다.


가죽 옷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지는 구원을 상징한다.

피가 흘려져야 하고 죄인 때문에 죄없는 생명이 희생되어야 한다. 그들은 나뭇잎으로 죄와 수치를 가리려 했다(3:7). 그러나 이러한 선한 행위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늘날도 받지 않으신다 !


성경에서 옷은 흔히 구원의 상징이다.

탕자가 집에 돌아오자 깨끗한 옷으로 입혀졌다(눅 15:22). 이사야 61장 10절과 스가랴 3장을 보자. 자기의(自己 義)와 선한 행위라는 옷은 더러운 옷(사 64:6)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가리려 하셨음에 유의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수치에 대한 감정을 인준하셨다. 사람들이 이것을 거꾸로 하여 나체로 돌아가는 것은 타락의 징표인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표준은 항상 “품위있는 복장“에 있다.


22-24절은 이상한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그들을 동산에서 몰아내셨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생명나무에 대한 권리를 상실했다. 그들이 먹었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육체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었다. 이 말은 죄로부터 인간을 구하기 위하여 구세주가 오셔서 죽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된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낙원에서 쫓아냄으로 그의 은혜와 자비를 나타내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 곳에 두신 검이 그 길을 막았다. 이 말은 “검 같은 불꽃“이라고 번역할수도 있다. 즉,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말해주는 하나님의 불이다.이제 우리는 로마서 5장을 펴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이 모든 것을 역전시켜 하나님 앞으로 가는 “새로운 생명의 길“을 어떻게 우리에게 열어 놓으셨나를 알아보아야 한다. 비교한 것을 유의해서 살펴보자.


첫 아담                    그리스도-마지막 아담

흙으로 만들어짐                  하늘로부터 오신 주(主)

완전한 동산에서 시험받음-배부름  광야에서 시험받음-배고픔

사탄에게 짐                      사탄을 이김

낙원에서 쫓겨남-도둑             죽어가는 도둑에게 낙원을 열음

죄, 죽음, 심판을 초래             의, 생명, 평화를 가져오심

아내를 사랑하여 고의로 죄를 지음  그의 교회를 사랑하셔서 고의로

죽으시고, 죄를 짊어지심


로마서 5장에는 여러 번의 “더욱“이란 말이 나오는 서술들이 있다(9, 15, 17, 20절).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아담이 있던 곳으로 보낼 뿐만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보다 더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께 왕같은 제사장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 !"


창세기 4장 

    가인의 길

이 장에서의 주연은 가인이다. 네 가지 다른 면으로 그의 성격과 행동이 나타나 있다.


1. 예배자(4:1-5)


4장 1절에는 하나님이 3장 15절에서 하신 약속과 3장 20절에 나오는 아담의 믿음이 둘 다 나온다. 하와는 새 생명을 세상에 가져왔고 그가 약속된 씨인줄 알았다. “내가 한 남자 - 주님을 얻었다“고 번역할 수도 있다. “가인“은 “얻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선물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다. 아벨은 “헛됨, 부질없음“이란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떠난 생명의 무익함을 암시하며 또는 가인이 그 씨가 아니었음에 대한 하와의 실망을 나타낼 수도 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일의 분할을 보게 된다. 가인은 땅에 헌신했고, 아벨은 양떼에 헌신했다. 하나님은 앞서 땅을 저주하셨는데(3:17) 가인은 그 저주와 동일시되곤 있다.


예배를 드리는 지정된 장소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둘 다 주께 제물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천사들이 길을 지키는 생명나무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3:24). 히브리서 11장 4절은 아벨이 믿음으로 제물을 가져왔음을 시사하고 로마서 10장 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가르친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의 가족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 분명하다. 그중에는 3장 21절에 나오는 피의 희생도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9장 22절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피흘림이 있어야만 한다고 진술한다. 그런데 가인은 저주받은 땅에서 피흘림이 없는 제물을 가져왔다. 그의 제물이 진정이었을 수도 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고 대속의 희생을 의존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은 불로 응답하셔(레 9:24) 아벨의 제물을 태우셨을 것이지만 가인의 제물은 제단 위에 놓여있다. 가인은 경건함과 신앙에 대한 형식을 갖추고는 있었지만 그 능력은 부정했다(딤후 3:5). 요한일서 3장 12절은 가인이 마귀의 자녀였음을 보여주는데 이 말은 육에 속한 거짓된 의(義)를 뜻하는 것으로 이는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의(義)가 아닌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의(自己義)를 내세우는 바리새인들을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불렀으며 아벨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문책했다(눅11:37-51). 유다서 11절은 “가인의 길“이 피없는 종교의 길이며 의로워지려는 노력과 자기 의에 근거한 종교임을 말한다.

오늘날 세계에는 두 가지 종교만이 있다.

그리스도와 그가 완성하신 일을 의존하는 아벨의 신앙과.

선한 행위, 그리고 인간을 기쁘게 하는 종교적 행사와 프로그램에 의존하는 가인의 종교이다.

하나는 천국으로, 다른 길은 지옥으로 인도해 간다!"

 

2. 살인자(4:6-8)


야고보서 1장 15절은 죄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점 커져서 죽음에 이른다고 경고한다. 가인도 그랬다. 실망하고, 화가 나서, 질투하고, 마침내 살인한다. 마음의 증오가 결국 자기 손으로 살인하도록 이끌어 갔다(마 5:21-26). 하나님은 그의 믿음없는 마음과 타락한 안색을 보았다. 하나님은 죄가 들짐승처럼 웅크리고 가인을 멸망시키려고 기다림을 경고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하나님이 경고하고 계시다. 슬프도다, 가인이 유혹의 들짐승을 키우고 문을 열어 주어 들어오게 하였도다! (7절을 “죄의 제물이 문에 엎드리느니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의로운 제물을 가져올 또다른 기회를 주려 하심을 암시한다).

그러나 가인은 경고를 명심하지 않고 그의 동생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고는 냉혈(冷血)의 마음으로 그를 죽였다. 가인은 마귀의 자녀였고(요일 3:12),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살인자였다(요 8:44).

3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인간이, 4장에서는 인간에게 죄를 짓는 인간이 나온다."

 

3. 방랑자(4:9-16)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이 두 질문은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질문으로 그 의미는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죄는 언제나 드러나기 마련이다(가인처럼).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려고 해도 결국 드러난다. 아벨의 피는 복수해 줄 것을 호소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는 평화와 용서를 외친다(히 12:24). 하나님은 앞서 뱀과 땅을 저주하셨는데 이제는 가인을 저주하신다.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다른 말로 하면 가인이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효력을 주지 않으며,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어야 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도망자, 방랑자가 되어야 했다.


가인은 자기 죄를 회개하지 않았으며, 대신 자책과 실의를 나타냈다.

그의 부모가 그러했듯이 하나님을 비난한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그는 천국에서 거부를 당하고 땅에게 거절을 당한다! 그는 저주를 받아 안식을 잃었는데 이는 믿음으로만 치유될 수 있다.

가인의 공포와 절망에도 유의하자.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은혜로 하나님은 가인을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약속을 증명할 표(mark)를 주셨는데, 문자로 된 표를 주신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가인에게 확신을 가지도록 하신 것같다. 놀라운 은혜이다!

하나님은 왜 가인을 풀어 놓으셨나 ? 한 가지 이유가 있으니, 가인은 하나님의 은혜와 죄의 비극적인 결과에 대한 “걸어다니는 설교“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인간과 대단히 유사한 모습이다. 휴식이 없고, 절망하고 그리고 좌절한다!


가인은 그의 남은 생애를 방랑하며 보냈는가?

아니다! 그는 정착하여 도시를 건설했다! 우리는 여기서 “문명의 기원“을 본다. 하나님의 영적인 선물을 대신하여 인간이 만든 대용품이다."

 

4. 건축가(4:17-26)


“놋“이란 “흩어지는 것“ “방랑하는 것“의 뜻이다. 가인이 선택한 바로 그 땅이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방랑하고 있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면전을 떠나갔다(3:24). 그에게는 피의 종교가 필요치 않았다. 가인은 그의 누이들 중의 하나와 결혼한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 때 쯤에는 아담의 자손이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5:3 은 130년이 지났음을 시사한다). 아브라함은 그의 이복 누이와 결혼했는데 가인이 그의 친 누이와 결혼하지 못했을 이유는 없다. 특히 그 때는 죄가 인간의 몸에서 그 댓가를 치루기 전의 시대였다. 그의 아들의 이름인 “에녹“은 “창시“라는 뜻으로 새로운 출발을 나타내고 있으나, 하나님 없는 출발이다.


인간적인 관점으로 평가할 때에 가인의 자손들은 탄복할 만한 사람들이다. 야발(“방랑자“)은 농업 기술을 발견했고(20절), 유발은 “문화“ - 음악을 창시했으며, 두발가인은 금속 산업을 처음으로 개발했다. 외양으로 볼 때, 가인의 “도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일들을 거절하셨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25절에 보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또다른 씨 - “셋“을 주시는데 이는 약속된 아벨의 씨 대신 주어진 씨이다. 하나님은 가인의 족속을 개조시키려 하지 않고 저들을 거부하신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홍수 때에 저들을 폐기처분하실 것이다. 가인의 족속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리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을 때, 셋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아와 다시 예배를 시작하고 있다(26절).


오늘날의 문명은 본질상 가인적이다.

오늘날의 문명도 농경, 산업, 예술, 큰 도시, 그리스도의 피를 믿지 않는 종교 등을 지니고 있으며 이 또한 가인의 옛 문명과 같이 멸망을 받을 것이다. 라멕같이 살인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있으며, 결혼의 신성한 약조를 무너뜨리는 사람들도 있다(라멕이 했던 것처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를 거절하고 인간 자신의 자원을 의지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지나가 버리는 “세상의 제도“에 속하지 않으며(요일 2:15-17), 관여하지도 않아야 마땅하다.


● 라멕의 전언(message / 23-24절):이 구절이 좀더 명확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 다 똑같이 해석하지도 않는다.

라멕은 가인 편으로 아담의 칠대 손인데 하나님의 비위를 상하게 했던 반면에, 셋 편으로 아담의 칠대 손인 에녹(5:21-27)은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히 11:5). 가인의 계통은 셋 계통의 참된 신자들로부터 이름조차 본뜬다(에녹-에노스/ 이랏-야렛/ 므후야엘-마할랄렐/ 라멕-라멕). 라멕이 어떤 젊은이에게 상해를 입어 자기 방어로 그 공격자를 죽였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이 이 엄청난 살인죄를 지은 가인을 위해 보복해 주신다면, 자기 방어를 위해 사람을 죽인 라멕을 위해서 이를 변호해 주실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두발가인이 놋과 철로 무기를 처음 발명해냈으며, 라멕은 그의 부인들에게 자랑삼아 무기를 시위했을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히브리어의 동사는 미래로 번역할 수도 있다. 즉, “나에게 상해를 입히는 사람은 누구나 목을 벨 것이며 하나님의 보호는 필요없다. 이 무기로 나 혼자서도 칠십 칠배로 보복할 수있기 때문이다“라고.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첫번째의 오만한 도전이며 전쟁 행위이다."


 

창세기 5-8장 

      

홍수/ 창세기 5-8장


이 장들에서는 홍수와 노아의 믿음을 다룬다. 여기 나오는 모든 영적인 보화를 캐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 역사에 있어 중요한 이 사건에 대해 네 가지면으로 제한하여 공부하기로 하자.


1. 역사로 본 대 홍수


1)대 홍수의 사실성은 창세기 기록으로 증명되며 동시에 그리스도와(마 24:37-39/눅 17:26) 선지자들(사 54:9), 그리고 사도들(벧전 3:20-/벧후 2:5/3:6)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모든 고대 문명은 창세기 사건과 비슷한, 홍수에 대한 상세한 전설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 준다. 공상적인 신과 여신들이 개입된 이 이야기들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 내려오며 대 홍수의 본래 역사가 와전(訛傳)된 것인듯하다.


2)홍수의 목적은 6장 5-13절에 언급되어 있다. 인간은 타락하게 되었고 땅은 죄악이 관영했으며, 하나님은 인류를 멸망시킬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시작에 앞서 반드시 심판과 죽음이 있게 마련이다. 상세한 것은 후에 공부할 것이다.


3)홍수의 순서는 기록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아담의 창조를 1년으로 계산하면 노아는 1056년에 태여났다. 창 6:3 절에 보면 하나님은 노아에게 120년 동안 전도하며 방주를 짓도록 하셨는데(벧전 3:20), 그가 이일을 시작할 때는 480세가 된다.(7:11) 이 해가 1536년이다. 대 홍수는 노아가 600세 때에 닥쳤으며 1656년이 되는 셈이다. 1657년의 둘째 달, 27일에 노아와 그 가족은 마른 땅을 다시 밟았다.(8:13- 이하) 성경에 기록된 날짜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월10일/ 방주로 들어감(7:1-9)

-2월17일/ 홍수가 닥침(7:10-11)

-3월26일/ 비가 멎음(7:12)

-7월17일/ 방주가 머무름(8:1-4)

-10월1일/ 산꼭대기가 보임(8:5)

-11월11일/ 까마귀와 비둘기를 보냄(8:6-9)

-11월18일/ 비둘기가 가지를 가져옴(8:10-11)-11월 25일/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음(8:12)

-다음해 1월 1일/ 노아가 방주를 엶(8:13)

-2월27일/ 방주를 떠남(8:14- 이하)


1656년이란 햇수와 아라랏 산에 방주가 머문 날짜의 중요성을 후에 공부할 것이다.


4)방주는 배라기보다는 삼(杉)나무로 만들어 역청을 발라 물에 뜨게 한 상자였다. 24규빗이라면 600피트 길이에, 100피트 너비, 60피트 높이가 되며, 18규빗이라면 450 X 75 X 45피트가 된다(1피트=30cm). 어느 경우든지 방주는 모아진 각종 동물들과 식량을 싣고 노아의 가족을 태우는 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당시에 동물이 몇 종이나 있었는지는 모른다. 6장 20절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로 동물들과 인도해 왔음을 시사하는 것에 유의하자. 방주는 삼 층이며, 지붕에 창문 하나가 있었거나 꼭대기 층에 빙 돌아가며 창이 있었고(6:16) 문은 하나였다.


5)홍수가 발생한 것은 비가 오고 땅 아래서 물이 분출했기 때문이었다(7:11). 기후 상으로 큰 비가 오고 땅 표면에서는 물이 터져나오는 무시무시한 상황을 잘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조수의 파도가 일며 이런 분출이 뒤따랐다. 창 2:5-6 절은 비가 오는 것이 지구에서는 처음 있었던 일임을 시사함으로써 노아의 믿음을 훨씬 돋보이게 한다.


2. 모형으로 본 홍수


방주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놀라운 구원의 상징이다. 이것은 인간이 발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것이다. 구원에는 한 길 외에는 없으며 방주에도 문은 오직 하나 있었다. 방주는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말해 준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으로 태어나셔야만 했다. 6장 14절에 나오는 “역청으로 칠한다“는 단어는 구약에 나오는 “속죄“(또는 보상:atonement)와 같은 단어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을 방주(7:2)로 초대하셨다. 그들이 들어오자 그들이 안전하도록 문을 닫으셨다(7:16). 방주는 인류만 구원했을 뿐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동물들도 구원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어느 날 죄의 속박으로부터 피조물을 구해내실 것이다. 방주는 심판으로부터 저들을 구원하였으며, 그리스도는 장차 올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다. 베드로전서 3장 18-22절은 방주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짓는다.

물이 옛 세상을 장사지냈으나 노아는 새 생명으로 부활하였다. 홍수의 순서를 조사해 본다면 방주가 7개월 째의 17일에 아라랏 산에 머물렀음을 알게 될 것이다. 히브리인의 달력은 첫 달이 10월이다. 따라서 7개월 째라면 4월이 되는데 4월 17일은 우리 주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이다(유월절 후 3일, 출12:1-3)! 4월은 유월절이 있어 종교행사의 첫째 달이고, 10월은 공식달력의 첫 달로 남아 있다.


노아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나타내는 흥미로운 상징이다. 그의 이름은 “안식“이란 뜻인데(5:29)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며(마 11:28-30),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신다(갈 3:13).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불러 구원을 이루셨으며 그리스도는 세상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다. 노아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모든 일에 순종하는 데에 신실하였고, 예수는 “나는 언제나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일들을 한다“고 말씀하셨다. 노아는 홍수를 거치면서도 안전하게 인도함을 받았고, 그리스도는 고난의 홍수를 거쳐서(시 42:7) 승리를 이룩하셨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그의 가족과 함께 새 창조의 머리가 되었으며, 그리스도는 무덤에서 나와 새 창조의 머리요 새 가족의 아버지가 되셨다.


노아와 에녹은 모두 이스라엘과 교회를 나타낸다. 노아는 심판을 통과하여 안전하게 보호되었고 이와 마찬가지로 144,000명과 유대인의 남은 자들은 환난을 통과하여 이 땅에 왕국을 세울 것이다. 에녹은 심판이 임하기 전에 휴거되었고(5:21-24/히 11:5)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가 세상에 부어지기 전에 휴거될 것이다.



3. 예언으로 본 홍수


그리스도는 휴거가 있기 전의 시대와 환란의 때가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눅 17:26/마 24:37-39). 우리는 오늘 날 “노아의 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구 폭발“을 통해 사람들이 번성하는 것과(6:1) 온갖 종류의 도덕적 타락이 관영하며(6:5), 강포(폭력/ 6:11/6:13)가 충만하며, 기술과 산업이 발전하고(4:16-22) 살인을 하고도 가책을 받지 않으며(4:23-24), 참된 신자는 극소수임을 본다(6:8-10). 그러나 명심할 것은 “노아의 날들“이 증거(전도)의 날들도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하나님은 에녹에게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셨고 그는 사람들에게 이를 전파했다(유 1:14-15). 실제로 에녹은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로 지었는데 그 이름은 “그가 죽으면 오리라“는 뜻이며, 므두셀라가 죽은 후에 심판이 임했다. 그는 687년에 태어나서 969년을 살았다. 그가 죽은 1656년은 홍수가 임한 바로 그해였다! 달리 설명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세상에 969년이란 은혜의 해들을 주시고 마지막 120년 동안에 노아가 전도하며 방주를 준비하게 하셨다(창 6:3/벧전 3:20). 오늘날, 하나님은 심판이 오고 있다고 사람들에게 경고하신다(벧후 3장 - 물이 아닌 불로). 그러나 듣는 이가 적으며 믿는 이는 더욱 적다.


4. 실용성으로 본 홍수


1)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벌하신다. 그가 새 것을 세우시기 전에 옛 것은 죽어야 한다.

2)하나님은 인간들을 경고하신다. 그러나 결국, 그의 인내는 끝나고 심판이 온다.

3)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동일하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은혜를 통해서만 사람들을 구원하신다(6:8 ,믿음을 통하여, 히 11:7).

4)진실한 믿음이 있는 곳에는 적극적인 순종이 있다(6:22/7:5).

5)노아와 그의 가족이 이런 사악한 세상에서 분리되어 살기란 어려웠다. 그러나 하나님이 저들을 도왔고 또한 저들에게 보상하셨다.

6)6:1-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들을 가리키는 말이거나 또는 셋의 가족을 뜻하거나 간에 얻는 교훈은 같다. 하나님은 타협과 반역을 문책하시며 구별된 성도에게 상을 주신다."


 

창세기 9-11장 

  노아의 언약


창세기 9장 



1. 하나님의 노아와의 언약(9:1-17)

언약이란 단어는 “자르는 것“의 뜻이다. 왜냐하면 서약의 행위는 곧 제물을 자르는 일로써 성립되어지기 때문이다(창 15:9- 이하). 노아를 통하여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약속을 세우시는데, 그 말들은 오늘날에도 유명하다.

언약의 근거는 희생제물의 흘린 피에 두었으며(8:20-22) 이는 새로운 언약이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에 근거하는 것과 같다.


언약의 내용은

1)하나님은 홍수로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

2)인간은 동물의 고기를 먹어도 좋으나, 피는 먹지 말 것(레 17:10- 이하 참조).

3)인간과 짐승들 사이에 두려움과 공포가 있을 것과,

4)주요한 형벌의 원리로서의 인간의 정부(롬13:1-5 참조)를 보여 준다.


언약에 대한 맹세로서 하나님은 무지개를 세우셨다. 이 말은 무지개가 그 때 처음 나타났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세우실 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셨다는 뜻이다. 무지개는 햇빛과 큰 비로 말미암아 생기며 그 색채는 “하나님의 각양(여러 색) 은혜“(벧전 4:10)를 생각나게 한다. 무지개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며, 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를 갈라 놓은 깊은 구멍에 다리를 놓은 것을 상기시킨다. 무지개는 에스겔 1장 28절과 요한계시록 4장 3절에 다시 나온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언약이 노아 후에 오는 노아의 “씨“와 맺어진 것이며, 오늘날 우리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중한 형벌(9:5-6)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인을 보복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지만(4:15), 이제는 살인자를 벌할 책임을 인간에게 주신다."


창 9:18-29  


2. 가나안에 대한 노아의 저주(9:18-29)


죄-

600살이 넘은 단련된 성도가 이 죄와 수치에 빠졌다. 그는 젊은 탕아가 아니었다. 히브리 말로는 노아가 고의적으로 옷을 벗어 부끄러운 행동을 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무절제함과 불순전함은 언제나 함께 다닌다. 홍수 이후로지상에 생긴 새로운 대기(大氣)의 상태가 포도주를 발효시킨 것이며 노아는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을 몰랐다고 그를 변호해 주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들의 죄에 변명을 대는 일을 허락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 편에서의 세번째 실패이다. 인간은 에덴에서 불순종하여 추방당했고, 온 땅을 부패시켜 홍수가 임하게 했으며, 이제는 부끄러운 술주정꾼이 되었다. 이는 6장 5절과 8장 21절의 성취가 아니겠는가! 설상가상으로 함(Ham)은 자기 아버지를 존중하지 못하고 도리어 노아가 한 일을 “즐겁게 떠벌였다.“


저주-

노아는 함이 한 일을 알고 그 유명한 저주를 발하였다(이는 창세기에 나오는 세번째 저주이다- 3:14-17/4:11). 그가 함의 막내 아들 가나안(10:6)을 저주한 사실로 보아 이 죄에 아버지와 함께 이 소년이 관련되었음과, 아버지의 죄를 아들에게 씌우심을 알 수 있다. 가나안과 그의 자손들은 그 형제들의 종의 종이 되어야 했다. 10장 15-20절에는 이 민족의 이름들이 열거되어 있다. 그들이 결국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노예가 되었음은 뻔한 일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셈족은 유대인들이며, 그 종족이 10장 21-32절에 열거되어 있고, 11장 10-26절에서는 아브라함에게까지 그 혈통을 이어간다. 야벳의 후손들은 이방인들이다(10:1-5). 창세기 15장 13-21절과 10장 15-20절을 연관시켜 읽어보자.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어떻게 여러 종족의 구분이 이루어졌는지를 보이려는 것이 아니고 사도행전 17:26이 가르치듯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한 혈통“으로 지으셨음을 말하고 있다.


축복-

노아는 유대인(셈)들을 축복하고 가나안인들을 종으로 준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야벳)에게 널리 퍼지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나(영적으로 말하면) 저들은 유대인의 장막에 거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이를 설명한다."


창세기 11장 

   3. 하나님께 대항하는 니므롯의 동맹(11:1-9)


독재자(10:6-14)-

니므롯은 구스의 아들이며 함의 손자로서, 그의 이름의 뜻은 “반역“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굉장한 폭군이요, 최초의 독재자였다. “사냥꾼“이란 말은 동물을 사냥한다기보다는 인간을 사냥한다는 뜻이다. 그는 바벨론 제국의 창시자이며 바벨탑의 건설을 주도했던 계획의 창안자였다. 역사는 니므롯과 그의 아내가 “어머니와 아이“로 둘러싸인 새로운 종교를 창설했음을 알려 준다. 상세한 내용은 히스롭(Hislop)이 지은 “두 바벨탑“이란 책에 나온다. 성경에서의 “바벨론“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종교적 혼란을 상징한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항하며 요한계시록 17-18장에 나오는 “큰 바벨론“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음을 본다.반역-

하나님은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셨다(9:1/9:7/9:9). 그런데 인간은 바벨론 지역인 시날 평지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10:8-10).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고의적인 반역이었다. 그들은 “동방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는 저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등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연합하여 도시와 탑을 건설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께 반대하여 연합을 계속 유지해 가는 것이요, 자신들의 이름을 내는 것이었다. 이 모든 움직임은 계시록 17-18장에 나오는 바벨론을 중심한 인간(그리고 사탄)의 그리스도께 대한 최종적 반항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세계 교회와 세계 조직을 통해 연합되어 적그리스도에게, 곧 최후의 세상 독재자에게 이끌려 가지만, 저들의 계획은 좌절될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가 “하나의 세계“란 개념으로 급진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U. N.이나 세계 교회 연합(W. C. C.)등의 활동 덕택이다.


심판-

하나님은 그들이 반역을 계획함을 알고 그들을 심판하셨다. 하나님은 또다른 회의를 열어(1:26/3:22) 일군들의 언어를 혼란시켜 그들이 함께 일할 수 없도록 만들 것을 결정하신다. 이것은 심판인 동시에 사실상 자비의 행위이었다. 만일 그 계획을 계속 진행시켰다면 보다 무서운 심판이 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벨“이란 이름은 히브리어의 “바랄“이란 단어에서 유래되었는데 “섞다 또는 혼란시킨다“는 뜻이다. 아람어로는 바벨이 “혼란“을 의미한다. 이 장면은 인류의 여러 언어의 기원을 설명한다. 오순절은 바벨 사건을 역전(逆轉)시킨 것이라고 흔히들 지적한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진정한 영적 연합이 있었으며, 다른 말을 사용했으나 이해했고, 그 일로 인하여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


창 11:10-32 

4.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심(11:10-32)


10장 21-32절에는 셈의 가계(家系)가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가 이 계보를 뽑은 것은 아브라함이 그 계획에 어떻게 적중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에게까지 계보를 끌어 간다(11:26). 우리는 여기서 또하나의 신적 선택에 대한 증거를 보게 된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 함과 야벳을 우회하여 셈을 택하시고, 셈의 다섯 아들들 중에서는 아르박삿(11:10)을 택하셨으며, 데라와 세 아들들 중에서는(11:26) 아브라함을 택하셨다. 이것이 히브리 민족의 시작이 된다. 이 명단에서 “에벨“이란 이름에 유의하자(10:21/11:14).


창세기 12장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을 떠나“라고 이미 말씀하셨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11장 31-32절의 기록을 보면 아브라함이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아버지를 뒤에 두고 떠나는 대신 그와 더불어 함께 갔으며, 그 순례가 하란에서 지체되었는데, 데라는 거기서 죽었다. 우리의 반(半)순종이 시간과 보화로 댓가를 치루게 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보냈어야 할 시간을 잃었으며 아버지도 잃었다. 이 여행의 다음 단계에서 아브라함은 롯을 함께 데리고 갔으나, 그도 버리고 갔어야 했다(13:5-14).


히브리서 11장 8-19절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요약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어디로(where)가야 하는 것인지 모를 때 믿었고(11:8), 어떻게(how)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를 때에 믿었으며(11:11), 왜(why) 그래야 하는지 모를 때 믿었다(11:17-19)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다시 강조하지 않으면 안될 일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한 것이 그의 업적(공로)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었다. 그는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의 시민이었고 하나님이 자신을 그에게 계시하시지 않았더라면 불신자로 죽었을 것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자녀들이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에 이르러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었고 세상에 큰 축복이 되었다."


창세기 12-13장 

   아브라함의 소명

 

이 장은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모험의 하나인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보(行步. walk)로 시작된다. 그의 본래 이름은 아브람(높으신 아버지)이었는데 아브라함(열국(대중)의 아버지)으로 바뀐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편의상 친숙한 이름을 사용하기로 하겠다. 대 홍수가 타락한 문명을 파괴시켰으나 곧 또다른 문명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하나님은 세상에 구세주를 보낸다는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먼저 한 사람을 부르셨다. 이 사람은 셈의 혈통에 속했고(11:10- 이하) 유대민족의 아버지(조상)였다. 이 한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은 온 세상을 축복하려고 계획하셨다 !

 

창세기 12장 

1.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응하다(12:1-9)


언약(1-3절)-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으나(행 7:2-4) 아브라함은 그의 아버지가 죽기까지 하란에서 지체했다(11:27-32). 하나님은 완전한 분리를 요구하시며, 죽음이 분리를 성취한다면 죽음조차도 불사하신다. 그의 소명은 전적으로 은혜이며, 주의 선하심에 기인한 전적인 언약의 축복들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땅과 큰 이름과 큰 민족, 온 세상에 끼칠 축복이다. 아브라함이 이 약속들을 받아들이는 데는 대단한 믿음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그와 아내는 늙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11:30). 하나님의 입술에서 “내가 하겠다“(I will)라는 말이 반복됨에 유의하자. 아브라함이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하실 것이었다. 하나님이 이 약속들을 성취하신 것은 물론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땅을 차지하고(더 얻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은 성경과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줌으로 모든 민족에게 축복을 끼쳤으며, 아브라함의 이름은 유대인들과 모슬렘(회교도)과 그리스도인들과 불신자들로부터도 존경을 받고 있다. 바벨의 사람들은 스스로 큰 이름을 얻고자 했으나 실패했다(11:4).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했고 하나님이 그에게 큰 이름을 주셨다 !


타협(4-6절)-

“롯이 그와 함께 갔다.“ 이것이 제 2의 실수였다. 롯의 아버지 하란은 죽었으며(11:28), 아브라함은 자기 보호 아래 그 젊은이를 데리고 갔는데, 이는 기쁘지 않은 문제거리들만 만들어 주었다. 후에 하나님은 족장생활로 그의 계획을 전진시키기에 앞서 아브라함으로부터 롯을 분리시켜야만 했다. 하란으로부터 가나안까지의 긴 여행에 대해서는 기록된 것이 없다. 그러나 이여행을 마치기까지는 믿음과 인내가 필요했던 것은 분명한 일이다. 아브라함은 부유한 사람이었으나 그의 부(富)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 장벽이 되지는 않았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세겜, 즉 “어깨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신자들이 “어깨가 있는 곳“에 산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 “그 아래에 영원한 팔이 있는“ 곳이다 !


3)신앙고백(7-9절)-

순종은 언제나 더 큰 축복으로 인도한다. 이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더욱 확신을 주신다. 아브라함은 그 땅에 사는 이방인들 앞에서 자기 믿음을 고백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믿음으로 가는 곳마다 장막을 치고 재단을 쌓았다(13:3-4/13:18). 장막은 하루에 한 번 언제나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순례자임을 말해주며, 제단은 제물을 가져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자를 말해 준다. 아브라함이 거했던 장소에 유의하는 일은 흥미로운 일이다. 벧엘(하나님의 집)은 서편에 있었고 동쪽에는 아이(폐허 더미)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세상(폐허더미)에 등을 돌리고 “하나님의 집“을 향하여 여행하고 있었다. 13장 11절에 보면 롯은 하나님의 집을 등지고 동쪽으로 여행하여 세상으로 돌아간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게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장막과 제단을 잃는다."


창 12:10-20 

2. 아브라함이 믿음에서 퇴보하다(12:10-20)


실망(10절)-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에 기근이 들다니 ! 순례자들에게 이 일은 얼마나 큰 실망이겠는가 !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지 땅을 신뢰하는지를 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들의 믿음에 대한 시험이었다. 그들은 그곳에 머물러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 애굽으로 내려갔다. 아마도 롯이 제안했을 것이다(13:10). 애굽은 세상을 상징하며 자기를 신뢰하는 생활을 나타내는 반면, 가나안은 믿음과 승리의 생활을 상징한다. 애굽은 탁한 나일강에서 물을 대며 가나안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선한 비를 받았다(신 11:10-12). 아브라함은 장막과 제단을 버리고 세상을 신뢰했다!(사 31:1 참조)


속임(11-13절)-

하나의 죄는 또다른 죄로 이끌어 간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애굽을 믿었고 이제는 그의 아내로 말미암아 보호받을 것을 믿는다. 창세기 20장 13절은 사라에게 아브라함과 똑같이 죄가 있음을 명백히 밝힌다. 20장 12절은 그 “거짓말“이 사실은 반(半) 진실이었음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의 이복동생이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또는 약속된 씨의 안전보다는 자기 자신의 안전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같다. 만약 사라가 후궁들의 처소에 계속 있었다면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성취하실수 없었을 것이다. 장막과 제단이 없는 아브라함은 세상의 사람들처럼 행동했다(시 1:1-3).징계(14-20절)-

믿는 아브라함이 믿지 않는 왕에게 문책을 당해야 하다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 사라에 대한 진실을 알기 전에 바로는 아브라함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개입하여 거짓말이 폭로되자, 바로는 그에게 떠날 것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과 혼합하여 타협하려는 그리스도인에게 그것은 얼마나 비참한 선언인가 ! 어떤 이가 “믿음이란 꾀를 부리지 않고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얼마나 아브라함에게 필요한 교훈인가 ! “네 죄가 너를 찾아 낼 것을 명심하라.“ 롯은 세상과 더불어 삶으로써 그가 보여주어야 할 간증을 잃었다(19:12-14). 베드로도 원수의 불 곁에 앉아 있다가 증언할 수 없게 되었다."


창세기 13장 

  

3.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돌아오다(13:1-4)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행복할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을 저버린 바로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죄를 뉘우치고 잘못을 시정하는 것, 이것이 회개요 고백이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계속 머물렀다면 자기 죄를 회개하지 못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장막과 제단의 장소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주님을 부를 수 있는 곳, 그래서 축복을 받는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바른 원리이다. 간증을 잃을 수 밖에 없는 세상으로는 가지 말아야 한다. 제단과 장막을 세울 수 없는 곳은 경계 밖에 있는 곳이다 !

아브라함의 회복으로 그의 모든 불순종이 원상태로 돌아온 것같이 보일런지 모르나 그렇지 못하다. 물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용서하셨고 그와의 교제를 회복하셨지만 애굽 여행의 슬픈 결과들을 간과하실 수는 없으셨다.


시간의 낭비 - 그들이 주님을 떠난 주간들은 잃어버린 것으로서, 다시 얻을수 없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간증을 잃음 - 아브라함이 바로를 속이고서도 그에게 참되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하나님을 직면했을 때,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보잘 것 없는 간증으로 해서 많은 영혼들이 지옥에 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는가 !


하갈 - 사라의 여종이 애굽에서 따라와(16:1- 이하) 그 가족에게 말할 수 없는 문제를 야기시켰다. 물론 그녀에게 아기를 낳으라는 제안은 사라가 했지만 하갈의 존재가 육적인 죄를 내도록 도왔다. 우리가 애굽(세상)에서 가져온 것들은 결국 우리를 괴롭히는 원인이 된다. 우리는 세상을 십자가에 못박고, 세상이 십자가 형에 처해졌음을 확신하자.부(富) - 소유의 증가가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 사이에 다툼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게 했다.


롯 - 이 젊은이는 애굽의 맛을 개발하였다(13:10). 아브라함이 롯을 애굽에서 빼내 오기는 했지만 롯에게서 애굽을 빼낼 수는 없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젊은 그리스도인을 잘못 인도한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12장 8절에 보면 롯은 아브라함의 장막과 제단을 함께 나누었는데 롯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는 장막만 가지고 있었으며 제단은 없었다(13:5). 롯이 소돔에 마음이 끌려서 도덕적이고 영적인 난파로 종말을 고한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창 13:5-롯의 선택/ 창세기 13장 5절-14장 24절


이제 우리는 롯의 타락과 실패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다룬다. 베드로후서 2장 7-8절이 없었다면 롯이 구원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조차 의심했을 것이다. 그는 심판의 불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세상적인 신자의 예표이다(고전 3:11-15). 구원은 받으나, 불 가운데 받는 것같다!


1. 대결(13:5-7)


롯은 육으로 행하고 아브라함은 영으로 행했다. 이것은 항상 갈등을 일으킨다. 외적인 원인은 증가된 부(富)에 있었고, 참된 원인은 롯의 불신앙과 육욕에 있었다. 그리스도는 분리하는 분이시다(요 7:43/9:16/10:19). 그가 오심으로 같은 가족 사이에도 다툼이 일어난다(눅 12:49-53).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 일이 얼마나 짐스러웠겠는가 ! 그 땅에 사는 이방인들에게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간증이었겠는가?


창 13:8-18  

2. 선택(13:8-18)


사람은 그가 선택하는 것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롯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유의해 보자.


그의 교만(8-9절) - 젊은이는 손위 사람에게 순종해야 마땅하다(벧전 5:5). 그런데 롯은 자신을 아브라함보다 앞세운다. 아브라함은 얼마나 은혜로운 사람이었던가 ! 평화롭게 지내려고 얼마나 고심했겠는가(시 133편)! 아브라함의 관심은 좋은 간증을 유지하는데 있었던 반면에 롯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롯은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그의 불신앙(10절 상) - “눈을 들어“ 그는 믿음으로 살지 않고 보이는 것으로 살았다. 롯이 하나님께 의뢰했다면 소돔이 멸망될 일정표에 들어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통찰력을 믿고 부유하고 사악한 도시를 택했다.


그의 세속성(10절 하) - “애굽 땅과 같았더라.“ 이것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 롯은 육신에 따라 행하며 세상의 것들을 위해 살았다. 소돔 주위의 땅은 롯에게는 물이 넉넉하고 기름져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사악했다(13절). 불신자들은 오늘날 세상에 희망의 닻을 내리고, 어느 날 불로 세상을 멸하실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는 그리스도인을 비웃는다(벧후 3장).


그의 이기심(11절) - 롯의 성공은 주로 아브라함의 친절에 기인한 것이었으나, 이 젊은이는 관대한 삼촌을 떠나 자신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택하려 한다. 물론 하나님은 롯과 아브라함을 갈라 놓으시길 원하셨다(12:1). 그러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고통스러운 분리였다.


그의 경솔(12절) - 처음에 롯은 소돔을 바라보았고, 다음으로는 소돔을 향해 이동하였으며, 얼마되지 않아서(14:12/13:1) 소돔에 살고 있었다(시1:1 참조).  11절은 롯이 동쪽으로 여행했다고 말한다. 그는 빛과 동행하지 않고 어두움을 향해갔다(잠 4:18).


롯이 주께로부터 멀어져 가는 동안 아브라함은 더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롯은 세상의 벗이 되어가고(약 4:4),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 되고 있다(약 2:23).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눈을 들어(10절, 14절 참조) 온 땅을 보라고 하신다 ! 세상에 속한 사람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요청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것을 요청한다. 롯은 땅의 일부를 취했으나 아브라함은 땅의 전부를 받는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최상의 것을 주신다(마 6:33).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씨를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시지만 롯의 가족은 소돔에서 멸망되거나 동굴에서 더럽혀진다(19:12-38). 17절은 신자가 하나님의 약속 위에 발걸음을 내딛어 믿음으로 약속들을 요구해야 함을 명백히 밝힌다(수 1:3). 롯은 그의 제단을 잃었으며 머지않아 그의 장막도 잃을 것이었다(19:3).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때도 장막과 제단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믿음으로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한 보상이다."


창세기 14장 

 

3. 포로(14:1-12)


고고학자들은 성경상 최초의 전쟁 기사인 이 사건의 역사적 정확성을 확고히 제시하고 있다. “아므라벨“은 고대에 명성을 떨친 “함무라비“인 듯하다. 롯이 소돔으로 옮겨 갔을 때(12절), 그는 “온 땅의 심판“(18:25)으로부터 면할 수있는 자리에서 빠져 나갔으며, 그 결과를 감수해야 했다. 그는 첫째로 세상과 짝하고(약 4:4), 세상을 사랑했다(요일 2:15-17). 다음으로는 세상에 순응하고(롬 12:2), 마지막으로는 세상과 함께 심판을 받는다(고전 11:32). 롯은 소돔이 평화롭고 자신을 보존할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돔은 전쟁과 위험이 도사린 장소로 변했다.성도들이 갑작스럽게 “세상의 포로“가 되는 일은 드물다. 그들은 점차로 위험한 장소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롯에게 있어서는 애굽을 자기의 기준으로 삼았을 때,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보는 것으로 행할때 시작되었다. 그는 경건한 삼촌보다는 세상 사람들을 더 좋아했고, 하나님의 장막보다 소돔의 집을 더 좋아했다. 그 결과, 그는 포로가 되었다 !"


창 14:13-24 

4. 정복(14:13-24)


비록 장막에 거하긴 했지만 경건한 아브라함은 안전한 장소에 있다! 롯이 곤경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은 관대한 처분을 내려 그를 구출하러 간다. 타락한 사람을 도울 능력이 있는 사람은 구별된 신자들뿐이며, 타락한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돌아갈 곳은 신실한 성도에게로 뿐이다. 이 장에서 아브라함은 검으로 롯을 구하며 19장 29절에서는 기도로 그를 구한다(18:23-33).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를 위해 기도해 줄 만큼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적을 정복했으며 이 일을 위해 193km를 갔다(요일 5:1-4 참조).


승리한 후에 아브라함은 소돔의 왕을 만남으로 보다 더 큰 유혹에 직면한다. 대체적으로, 사탄은 우리가 영적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을 때 즉각적으로 유혹해 온다. 사탄은 그리스도께서 세례(침례) 받으신 후 광야에서 그를 만났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의 믿음의 위대한 사역을 이룬 후 두려움에 차서 도망쳤다(왕상 19장). 소돔 왕은 아브라함과 협정을 맺기를 원했고 소돔의 부(富)를 받아들이라고 타협을 청했으나, 아브라함은 거절하였다. 애굽의 부(富)는 실패의 원인이었음이 밝혀졌으며 소돔의 부(富)는 더 악한 것임이 분명했다. 아브라함이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주신 모든 영광을 빼앗아 갈 이 교묘한 유혹에 빠졌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한 것은 자신이 이 일을 모면하기 위해서이지 믿음과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소돔에서 롯과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소돔의 상품을 즐기려했을 것이다.“ 그러하다면 아브라함은 자기 간증을 잃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소돔 왕을 무시했으나 살렘 왕은 존중하였다. 히브리서 5-7장에 보면 멜기세덱(의로운 왕)이 하늘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살렘(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는 그의 의(義)를 통하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다. 이 일은 십자가에서의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소돔 왕에게 유혹을 당할 바로 그 때 멜기세덱을 만난 것은 얼마나 큰 격려가 되겠는가! 왕과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실수 있으시다(히 4:16).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제사장직을 맡을 수 있게 한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만나서, 먹이고, 축복하였다. 놀라운 구세주가 아니신가!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바침으로 그를 높였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십일조에 대한 첫번째 예증이다. 이는 또한 모세의 율법에 제시된 십일조보다 훨씬 앞서 생긴 일이다. 히브리서 7장 4-10절은 이 십일조가 그리스도(모형으로서)에게 바쳐졌음을 시사하며, 오늘날 신자들이 주님께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아브라함의 본을 따르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세상의 부를 거절하였으나 자신의 부를 주님과 나누었으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풍성하게 축복하셨다!

이 전투와 위험했던 밤이 롯으로 하여금 정신이 들도록 했을까 ? 슬프게도 그렇지 못했다. 19장 1절에 보면 그는 즉시 소돔으로 돌아갔다.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행 4:23) 롯의 마음은 소돔에 있었으므로 그의 몸은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창세기 15-17장 

이삭에 대한 약속

 

이 장들은 신약에,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도달하는 영적인 진리를 풍성하게 캐어낼 보고(寶庫)이다. 12장 1-3절에서 하나님은 그의 약속들을 요약하셨고, 13장 14-18절에서 이 약속들을 확대하셨다. 그런데 이제는 언약의 약속들을 보다 충분히 밝히신다. 이 언약은 아브라함의 아들과 오게 될 약속된 씨 곧,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으며, 또한 가나안 땅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세우신 놀라운 계획을 다룬다.

 

 

창세기 15장 


1. 언약의 내용(15장)


배경 - 아브라함은 이제 막 왕들을 멸하고(14장), 소돔 왕의 큰 유혹을 물리쳤다. 이제는 하나님이 그를 격려하실 차례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그를 필요로 할 때 우리에게 오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14:18)!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방패)가 되시며 예비(상급)가 되신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 아브라함은 소돔 왕에게 보호를 받거나 그가 제공하는 재화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아브라함은 그가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 가지고 있었다.


탄원 - 아브라함은 상을 원하지 않고 상속자를 원했다! 그는 이제 85세였고 아들이 태어나기를 10년 간 기다려 왔다. 아들이 없으면 그의 모든 유산은 청지기 엘리에셀에게 돌아갈 것이었다. 12장 2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라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이루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신과 청지기를 바라보던 자리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게 하심으로 그 탄원에 응답하셨다(5절). 6절은 성경의 핵심 구절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And he said AMEN to the Lord, and He put it to his account for righteousness-갈3:16/롬 4:3 / 약 2:26). 아브라함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율법을 지켜서 받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례를 행함으로 받은 것도 아니다. 그가 할례를 받은 것은 99세 때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희생 제물 - 구원은 희생 제물에 근거를 두며, 언약은 피흘림을 요구한다. 그 시대의 관습으로는 계약하는 쌍방이 제물로서 죽인 동물들의 쪼개진 지체 사이를 걸어감으로 협정이 이루어졌다. 9절에 나오는 희생 제물 모두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희생 제물을 드리고 사탄(새들,마 13:19)을 쫓는 수고를 했으나, 아브라함이 잠들기까지는 실제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제물의 조각들 사이를 걸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나님 만이(17절) 조각들 사이를 걸으셨다. 이 언약은 전적인 은혜이며 주께만 의존하는 것이었다. 아담처럼(2:21) 아브라함은 죽음 같은 깊은 잠에 빠졌고, 하나님을 도와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보증 - 아브라함은 확신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지 알고 싶어했다(8절).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필요에 응하신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다. 이에 대한 확실한 보장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의 개요를 말씀해 주셨다. 곧, 이스라엘의 애굽 체류, 애굽에서의 고난, 4대 째에 구출될 것(출 6:16-26)과 약속된 땅을 소유하게 될 것 등이다. “이 땅을... 주노니“(18절)란 하나님의 말씀에 유의하자. 12장 7절에서처럼 “내가 주리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란 곧 그의 실행이시다.

이 장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최소한 일곱 가지의 단어 내지 문구 즉, “여호와의 말씀“ “두려워 말라“(1절) “상급, 후사와 유업“(3,7절) “믿으니, 의로, 여겼다“(6절)에 주목하자. 이 장에서는 아들이 아니면 후사가 될 수 없고(롬 8:16-17) 믿음이 없이는 의로워질 수 없으며(롬 4:3) 약속이 없으면 확신할 수가 없고, 고난이 없이는 축복이 없음을 보여 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별들을 보게 되기에 앞서 날이 어두워야만 했다."


창세기 16장 

 

2. 언약을 시험하다(16장)


하나님이 언약을 하셨으니 하나님이 성취하실 것이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은 다만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뿐이었다(히 6:12). 슬프게도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 15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행사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의 아내의 말을 듣고 불신앙을 나타냄으로써 성령으로 행하기를 멈추고 육신으로 행하기 시작했다. “믿음이란 꾀를 부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 둘은 하나님이 계획을 성취하도록 도와드리려 했다. 이 일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녀를 주기 위해 늙기까지 기다려야만 하셨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 자신이 죽어 있어야 했다(히 11:11-12). 2절에 보면 사라는 3녀의 아기를 못낳는 형편에 대해 하나님을 탓하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잘 대해주시지 않음을 넌지시 비친다(3:1-6). 그녀는 세상적인 방법을 취하여 애굽인 하갈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이 모든 꾀는 실패한다. 육체의 일(갈 5:16-26), 곧 질투, 원한, 증오, 교만, 다툼이 나타난다! 사라는 주님께 “책임을 전가“하려 한다(5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그 책임을 돌린다(6절). 육신이 지배하도록 허락할 때 그 가정에는 무서운 분위기가 조성된다.하나님은 그 결합을 인정치 않으셨다. 하나님은 하갈을 “사라의 여종“으로(8절) 부르신다. 구약에서 주의 천사(여호와의 사자)가 언급된 것은 이것이 첫번째이다. 이 분은 다른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하갈을 돌보시며 사라에게 복종하라고 지시하시고, 그녀의 아들이 들사람이 될 것이나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을 약속하신다. 이삭이 태어나자 이스마엘을 위하여 양보할 자리는 없었고 쫓겨나게 되었다(21:9- 이하). 이스마엘은 열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고(25:13-15), 그 자손들은 세기를 내려오며 유대인들의 적이 되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뜻이다(11절).

갈라디아서 4장 21-31절은 사라는 새 언약의 상징이며 하갈은 옛 언약의 상징이라고 가르친다. 하갈은 노예였고, 옛 언약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다(행 15:10). 사라는 자유로운 여인이었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갈 5:1-이하). 이스마엘은 육신으로 낳았으며 그를 다스릴 수가 없었다. 율법은 육신에 호소하지만 육을 다스리거나 지배할 수는 없다. 이삭은 성령으로 태어났고 약속의 자녀(갈 4:23)로서 자유를 즐겼다. 사람들이 율법으로 돌아가 스스로 육신의 노예가 되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추방당한 반면 이삭은 법적인 상속인이었다. 율법이란 결코 영속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여기 나오는 실제적인 교훈을 놓치지 말자. 우리가 하나님보다 앞서 갈 때는 반드시 문제거리가 있게 마련이다. 육신은 하나님을 돕기를 매우 좋아하나, 참된 믿음은 인내를 나타낸다(사 28:16). 믿음과 육신을, 율법과 은혜를, 약속과 자기 노력을 섞어서는 안된다."


창세기 17장 

 

3. 언약의 상징(17장)


이 장에 나오는 사건과 이스마엘의 출생 사이에 13년의 침묵이 흐른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신에 대해 죽음으로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 그들의 삶 가운데 펼쳐지도록 기다리셔야 했다. 하나님은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엘샤다이)“, “모든 것에 넉넉하신 분“(cod Almight-El Shaddai/ the all-Sufficient One)으로 계시하신다. 이 장에 나오는 “내 언약“이란 말이 반복되는 것에 유의하자. 언약의 성취는 하나님께 달려있지 인간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다. “내가 하겠노라“는 문장이 반복되는 것에도 주목하자.


새 이름들 - “아브람“은 “높으신 아버지“(hish father)란 뜻이고 “아브라함“이란 “대중(大衆)의 아버지“(father of multitude)란 뜻이다. “사래“는 “다투기를 좋아하는“의 뜻인 반면에 “사라“는 “공주“를 뜻한다. 그들의 새 이름들은 바야흐로 그들의 집에 입주하게 되는 새로운 축복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을 택하여 왕과 여왕이 되게 하신다!새로운 징표 -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할례에 대한 첫 언급이다. 구약의 어느 곳에서도 할례가 인간을 구원한다고 가르친 곳은 없다. 할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언약의 외적인 징표이다. 이것은 마음의 내적인 할례를 받은 사람들을 상기시킨다(신 10:16/신 30:6/렘 4:4/롬 4:10/갈 5:6). 이 의식(儀式)은 생후 제 8일에 실시되는 것이며(12절), 8은 부활의 수(數)이다. 말하기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유대인들은 육신의 의식을 의존했고 내적인 실제를 의존하지는 않았다(행 15:5). 오늘날 신자들은 새 언약 안에 있으며 참된 할례를 행하는데(빌 3:1-3)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영적인 체험인 것이다(골 2:9-15). 죄의 몸(옛 본성)은 제거했으며 이제는 육체로 살지 않고 성령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


17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웃음은 믿음의 즐거운 웃음이고, 사라(18:12)의 웃음은 불신의 웃음이었다. “이삭“은 “웃음“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물리치시고 이삭과 그의 씨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신다. 그러나 은혜로써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위한 특별한 축복을 정해 두셨다."

 


창세기 18-20장 

소돔과 죄

 

이 장에는 세 가지의 방문이 나오며 각각 영적인 교훈을 전해 준다.

 

창세기 18장 

1. 아브라함을 방문한 그리스도(18장)


17-22절에 보면 세 사람의 하늘에서 온 방문객 중의 하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이 명백히 나타난다. 3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말에도 유의하자. 이 장의 큰 주제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사귐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기 때문이다(약 2:23). 19장에서 우리는 세상의 친구인 롯을 볼 수있다.


그리스도와 아브라함의 친교(1-8절)

이 구절은 그리스도와 신자간의 사랑의 교제를 나타낸다. 아브라함은 마므레에 있었는데 그 말은 “비옥“(肥沃:fatness)이란 뜻으로, 그는 하나님의 충만한 축복을 즐기고 있었다. 장막은 그의 순례의 생애를 말해주며, “오정 즈음“이란 그가 빛 가운데 행하고 있음을 나타낸다(요일 1장). 그가 서두름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사랑의 열의를 증명해 준다. 그는 그리스도를 편안히 모시기 위해 아낌없이 제공한다. 바울은 에베소서 3장 1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라고 기도한다. 직역하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정착하셔서 집에 계시듯 편하시게 하고“가 된다. 그리스도를 집에 계시듯 편히 모신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교제하시기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모른다 !


사라의 불신앙의 고백(9-15)

이삭의 출생은 웃음과 관계가 있다. 이삭이란 이름의 의미는 “웃음“이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실 것이란 소식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신앙으로 즐겁게 웃었으나(17:15-18) 이 때 사라는 육적인 불신앙으로 웃는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하시기에 너무 어려운 일이라도 있단 말인가?“ 누가복음 1장 34절에 나오는 마리아의 믿음을 주목해 보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How shall this be!). 사라는 “내게 어찌... 있으리요?“(How can it be!)라고 말하고 있다. 이삭이 출생했을 때에야 사라는 영적인 즐거움 가운데 웃었다(21:6-7).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을 신뢰하심(16-22절)

천사들이 소돔으로 떠나갔으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기 위해 뒤에 남으셨다. 놀라운 장면이 아니겠는가 ! 그리스도는 그의 친구에게 아무 것도 숨기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 15장 14-15절을 보면 그의 친구에게 자기의 뜻을 나타내시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들이 있다. 시편 25편 9-14절을 읽고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 곳에 주어진 모든 환경에 대처하는지 보자. 아브라함은 소돔에 살고 있는 롯보다도 소돔에 대하여 더 잘 알고 있었다. 구별되어 성경을 읽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무신론적인 교수보다도 세상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 있다!


롯을 위한 아브라함의 관심(23-33절)

이 젊은이의 세속성과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롯에 대해 놀라운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변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변론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즉 하나님이 어떻게 사악한 사람들과 함께 의인을 멸망시킬 수 있으신가?(갈보리에서 하나님은 사악한 사람들 대신에 의로우신 한 분을 벌하셨다.)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얼마나 지속적이고 신중하게 중재를 벌이고 있는가 ! 열 명의 신자만 찾을 수 있어도 하나님은 온 성을 용서하실 것이었다. 19장에서 보면 롯의 가족은 아내와 두 딸을 합하여 네 명이지만,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까지 해서 여섯이 된다. 그가 사위를 비롯해서 최소한 4명만이라도 더할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그 온 성읍을 남겨두셨을 것이다. 롯이 얼마나 큰 실패를 범하였는가!"


창세기 19장 

2. 롯을 방문한 천사들(19장)


그리스도는 저들과 같이 가지 않았다. 세상으로 타락한 사람의 집에서 그는 “집같은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베드로후서 2장 7-8절은 롯이 구원받은 사람이었고 주님과 연합하였으나 교제가 없었고, 아들은 되었지만 친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시사한다. 그는 “불 가운데서 얻은 것“처럼 구원받았다(고전 3:14-15). 롯이 이제는 장막이 아닌 집에서 살고 있는데(3절) 제단에 대한 언급은 없음에 유의하자. 천사가 도착한 것은 저녁이고 이 장의 대부분은 밤에 발생한 사건을 다룬다. 그것은 롯이 빛 가운데 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롯은 그의 장막과 제단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영적인 기준도 잃었다. 왜냐하면 군중의 육욕을 만족시켜 주기 위하여 결혼하지 않은 자기의 딸들을 거리로 내보내겠다고 감히 제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가족에게 있어서조차 그의 말은 신뢰받지 못하고 있었다(12-14절). 이 모든 일이 어디서 시작되었겠는가? “롯이 눈을 들어...“ 믿음으로가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 행하기 시작했으며, 세상에 속한 것들을 위하여 살기 시작했다. 그는 세상적인 여인과 결혼한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녀의 마음이 소돔에 있었고 그 도시를 뒤에 두고 떠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아침, 맑고 아름답게 동이 터오르자 사람들은 일상 업무를 시작하려고 했다. 그 때 심판이 임했다. 사악한 도시들이 완전히 멸망했으며 롯과 결혼하지 않은 그의 두 딸만이 살아서 피했다. 이것은 앞으로 임할 진노의 상징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평화롭고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 멸망이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살전 5장).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하여 롯들 구해내셨다(19:29).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장차 올 진노에서 그의 교회를 구하실 것이다(살전 1:8/살전 5:9). 롯은 하나님이 진노를 퍼부으시기 전에 그외 교회를 휴거하시는 일의 예증이다.


롯의 말년은 흑암과 음탕으로 가득찬다. 동굴에서 근친상간을 저지른다. 그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도시의 집을 위해 장막을 잃었다. 그런데 마침내 동굴에 살면서 자기 딸들로 말미암아 술취하게 되었다. 이 끔찍한 사건의 자녀들 곧 모압족속과 암몬족속은 세기를 통해 유대인들의 적이 되어 왔다. 육이 영에 대항하여 싸운다. 어떤 사람이 그의 가족과 함께 어떤 장소에 정착하려 할 때 그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지 확신이 있어야 한다. 롯은 그릇된 곳을 택하였고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파멸시켰다."


창세기 20장 

 

3. 아브라함의 그랄 방문(20장)


롯은 이제 잊혀졌으나,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리로다 !“ 불행히도 이 장은 옛 죄의 반복이다. 아브라함은 또다시 그의 아내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12:10-20 참조). 가장 신앙적인 성도라 해도 사탄이 그를 넘어지게 하지 못하도록 계속 깨어 있어야만 한다.

이 죄가 반복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브라함이 자기 생활에서 이 일을 심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주님께 그 일을 고백하고 용서를 받았지만 죄를 고백하는 것과 죄를 심판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우리의 죄를 심판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죄를 보시는 것처럼 참된 빛 가운데서 그 죄를 본다는 뜻이다. 죄를 미워하고 우리 생활에서 밀어내는 것이다. 13절에서 아브라함은 이 죄가 갈대아 우르로부터 따라다녔으며 불신앙의 “옛 생활“로부터 왔음을 시인한다.


신자가 비록 죄에 빠졌다 할지라도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법정(法廷)을 괴롭히셨고 아브라함을 보호하셨다. 하나님은 그 통치자에게 “네가 죽으리니(너는 죽은 사람이라!)“라고 하셨으나(3절)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부르셨다(7절). 이 말은 믿는 사람이 죄를 지어도 좋도록 허용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비록 신실하지 못할 때라도 하나님은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딤후 2:12-13). 물론 아브라함은 그 죄로 인하여 수치와 비난의 괴로움을 당했으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신다. 실제로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했더라면 바로 그 다음 해에 이삭을 출생시킬 하나님의 계획이 깨졌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기심과 불신앙은 자기 자신의 생명과 유대민족의 장래를 거의 파멸시킬 뻔하였다. 불행히도 그들의 아들 이삭은 후에 이와 똑같은 속임수를 사용할 것이고(26:6- 이하) 똑같은 쓰라린 결과를 당할 것이었다. “믿음이란 꾀를 부리지 않고 사는 것이다.“


- 18장과 19장에 나오는 두 가지 방문을 비교해 보면 흥미있다.


아브라함                                   롯

그리스도께서 친히 방문하심       두 천사만 방문함

축복의 멧세지(이삭)               죄를 선고하는 멧세지

빛 가운데-정오                   그늘이 질 때-저녁

장막 문에서                      성문에서-소돔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롯이 하나님께 아무 영향력이 없음

힘을 얻음

소돔이 멸망하는 것을 보나        생명은 구했으나 그밖의 모든 것을

아무것도 잃지 않음                   잃음

세상에 축복을 끼침               슬픔을 가져옴(암몬과 모압)"


창세기 21-22  

이삭과 하나님의 시험


이 두 장은 아브라함의 생애에 찾아왔던 세 가지 시험에 대한 기록이다. 참된 신앙은 언제나 시험을 받는다. 왜냐하면 시험을 통해서만 우리가 어떤 종류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신앙의 시험은 성장과 승리의 기회이다.

 

창세기 21장 

1. 가족에게서 온 시험(21:1-21)


가정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가 가장 힘든 때가 있다. 아브라함은 이미 그의 아버지와(11:27-32), 조카 롯과(12-13장), 그의 아내로 말미암아(16장) 가족에게서 시험을 받았다. 여기서는 그의 두 아들, 즉 십대 후반이었을 이스마엘과(16:16) 겨우 젖을 떼었을 세 살 가량의 이삭 간의 갈등을 보게 된다. 처음에 이삭의 출생은 기쁨과 웃음을 가져왔다(21:6/17:17/18:12를 비교). “이삭“이란 이름이 바로 “웃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후 오래지 않아 이스마엘이 계속 그의 동생을 핍박함으로 대립이 생겼다. 여기 몇 가지 귀중한 교훈들이 있다.


육(肉) 대 영(靈) - 이스마엘이 육의 자녀(16장)인 반면에, 이삭은 기적적으로 출생한 약속의 자녀였다. 이삭이 그 가정에 나타난 것은 아브라함에게 힘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미 그는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였다(롬 4:19-20). 이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으로 된 것이었다. 육과 영, 옛 본성과 새로운 성품은 언제나 대립되기 마련이다(갈 5:16-24). 구원은 옛 본성을 변화시키지 않으며, 옛 본성이 향상되거나 길들여지지도 않는다(롬 6-7장 참조). 옛 본성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사랑했고 그를 곁에 붙들어 두고 싶어했다(21:11/17:18 참조). 그러나 하나님은 “내어 쫓으라 !“고 말씀하셨다. 로마서 6장은 육신을 이기는 유일한 승리는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 곧 자신이 죽었다고 간주하는 것임을 알려 준다. 옛 본성과 영합하는 그리스도인들은(롬 13:14) 반드시 갈등과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옛 언약 대 새 언약 - 갈라디아서 4장 21-31절은 이 사건이 하나님의 이스라엘과의 옛 언약과 교회와의 새 언약을 상징하는 비유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중심 사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하갈은 율법이라는 옛 언약의 상징으로서 바울 시대의 지상적 예루살렘과 동일시되었으며, 사라는 은혜의 새언약의 상징으로, 천상적 예루살렘과 동일시되었다. 이스마엘은 육으로서 태어났으며 노예의 아들이었다. 이삭은 영으로 태어났으며 자유로운 여인의 아들이었다. 이 두 아들은 율법의 노예로 있는 유대인과 은혜의 자유 아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각각 상징한다. 바울의 논점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갈(옛 언약)을 내어 쫓으라고 명령하신 데에 있다. 이는 하나님의 축복이 이삭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갈라디아서 3-4장에 기록된 바울의 논증은 이 모든 사실에 적중한다.


인간의 방법 대 하나님의 방법 -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해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길은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갈은 16장 10절에서의 하나님의 약속을 잊었다. 다른 말로 하면, 상한 심령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붙드셨으며 그가 하신 말씀을 지키셨다. 우리가 그에게 순종한다면 그는 언제나 길을 열어주실 것이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다."


창 21:22-34 

2. 이웃에게서 온 시험(21:22-34)


그리스도인들은 “외인들“(those that are without)과의 관계를 주의해야 한다(골 4:5/살전 4:12/딤전 3:7). 아브라함은 그의 이방인에게 있어서 놀라운 간증적인 인물이었다. 우물을 둘러싼 갈등은 그의 이러한 인상을 파손시킬만한 것이었으나, 그는 좋은 방향으로 해결지었다. 그가 사무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분명히 확정지었음을 유의하자.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자“(고전 14:40). 아브라함과 그의 이웃들은 적절한 선물을 교환하였고, 언약에 조인하기 위하여 적합한 제사를 드렸다. 이 계약이 이루어진 곳을 브엘세바, 곧 “맹세의 우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우물은 아브라함에게 기도와 친교의 장소가 되었다. 우리가 이웃 간에 또는 사업상 직면하게 되는 시험을 그리스도인의 방법으로 치르는 것은 중요하다(롬 12:18 참조)."


창세기 22장  

3. 여호와로부터의 시험(22:1-24)


사탄은 우리에게 있는 가장 나쁜 것을 나타내려고 시험(유혹)하지만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나타내도록 돕기 위해 시험하신다. 야고보서 1장 12-15절을 보자. 가장 극렬한 시험은 사람들로부터 오지 않으며 주께로부터 온다. 그러나 여기에는 언제나 가장 큰 축복이 따른다. 하나님은 결코 이런 방식으로 롯을 시험하치는 않으셨다. 왜냐하면 롯은 소돔과 세상이 그를 시험하는 낮은 수준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주님과 가장 가까이 동행하는 성도를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위하여 시험하신다.모형적 교훈 - 이 사건은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운 모형을 보여주는데, 그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 기꺼이 자기 생명을 내어놓는 독생자이시다. 이삭과 그리스도는 둘 다 약속된 아들들이며, 둘 다 기적적으로 태어났고(물론 그리스도는 처녀의 몸에서 죄없이 나셨다), 둘 다 아버지의 마음에 기쁨을 주었으며, 둘 다 정해진 때에 출생하였다. 또한 둘 다 그의 형제들에게 박해를 받았으며, 둘 다 죽음에 임하여 순종적이었다. 두 젊은이가 이삭과 동행하였으며 그리스도는 두 도둑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삭은 나무를 지고 갔고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 이삭은 아버지에게 질문을 했고, 예수께서도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물었다. 이삭이 생명을 구하게 된 반면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순종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렇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이삭은 “죽은 것“과도 같았으며 히브리서 11장 19절은 “비유로“(즉 상징적으로) 이삭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것이라고 말한다. 19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돌아왔으나 이삭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이것도 역시 하나의 모형이다. 왜냐하면 이 후의 기록에서 이삭은 그의 신부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24:62).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자신을 십자가에서 주시고 천국으로 돌아가셨다가 어느 날, 그의 신부인 교회를 맞이하러 오실 것이다.


실천적인 교훈 - 진실한 신앙은 반드시 시험을 받게 마련이다. 물론 하나님이 이삭의 생명을 원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원하셨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귀중한 존재였다. 하나님은 이삭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있는 우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 싶으셨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약속을 쟁취할 것을 신뢰하면서도 하나님은 신뢰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 아브라함이 이 시험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었을까? 단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한 것이다(히 11:17-19).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이 많아질 것을 약속하셨는데 이삭이 살아있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시지 않으면 이 약속은 성취되지 않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거짓말하지 않으실 것을 알았으며 변치 않는 그의 말씀을 의지했다. “하나님이 빛 가운데 말씀하신 것을 어두움 가운데서 의심하지 말라!“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지체없이 순종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행하면 적절한 때에 다음 단계를 나타내실 것이다. 요한복음 7장 17절을 보자. 하나님의 응답은 단 몇 분이라도 때 늦게 오는 법이 없다 ! 꼭 필요한 때에 하나님은 수양을 공급하셨다. 이로 인해 아브라함은 이곳을 “여호와 이레, 곧 주께서 틀림없이 하시리라“고 이름지었다.


예언적 교훈 - 이 사건은 모리아산에서 일어났으며(22:2), 이 곳은 성전이 세워진 곳이다(대하 3:1). 이삭은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하나님은 수양을 공급하셨다. 그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통하여 왔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요 1:29)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산에서 볼 것이다“라고 하였고 그리스도는 성전에 모습을 나타내셨는데 그 다음,갈보리산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요한복음 8장 56절을 보자.


교리적 교훈 - 야고보서 2장 14-26절은 믿음과 행위 사이의 관계를 논한다. 야고보는 그가 주장하는 요점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 사건을 실례로 제시한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순종으로 입증된다. 야고보서 2장 21절의 정확한 번역에 유의하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의로워진 것이 제단에 그의 아들을 바친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가?“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칠 때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때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창 15:6). 야고보가 말하려는 것은 우리가 행위로나 희생을 바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생활이 곧 구원받은 믿음을 증거한다는 것이다(롬4:1-5/갈 3:6- 이하 참조)."


창세기 23-24장  

이삭의 신부

 


이 두 장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한 장에는 장례식이 나오고 다른 장에서는 결혼식이 나오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은 “산과 골짜기의 땅“이며(신 11:11),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도 기쁨과 슬픔이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떤 경우에도 믿음으로 행했다(히 11:13-17). 23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슬퍼하며 애곡하는 상주이지만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지 않다(살전4:13- 이하). 그는 이방인 이웃들 앞에서 훌륭한 간증이 되었다 ! 사라의 장사지냄은 이방인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처음 소유한 땅이 무덤이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이상하게 보인다. 창세기 49장 31-32절은 여섯 사람이 여기 장사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복음의 멧세지가 빈 무덤을 전하는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또한 아브라함이 그의 사무적인 문제에 있어서 조심성있게 다루고 있으며 모든 일들이 “관대하고도 질서있게“ 행해지는 것을 주목하라. 믿는 사람들이 사무 상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 특히 불신자와의 거래에서 탐탁치 않게 의문의 여지를 남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는 영적인 교훈이 풍성한 24장에 중점을 두려 한다. 아브라함과 그의 종과 리브가를 통해서 세 가지 훌륭한 본을 보기로 하자.


1. 아브라함의 헌납의 모범(24:1-9)


아브라함은 이제 140세이다(25:20/21:5). 하나님은 그에게 영적으로, 또한 물질적으로 축복하셨으나, 그는 이삭의 신부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 확인하고 싶어한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그의 아들(그리스도)을 위하여 신부(교회)를 선택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위해 하나님이 적절한 여인을 제공하실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이삭은 하나님의 소유였다. 아브라함은 이전에 그를 제단에 바쳤던 일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제공하실 것임을 알고 있었다. 다른 방식으로는 약속된 씨가 결코 태어날 수 없었다.

여인은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선택되어야만 하며 이방 여인들 중의 하나여서는 안되었다. 이삭과 기꺼이 결혼하여 그의 부(富)를 나누어 가지길 원하는 아름답고 재능있는 가나안 여인들이 많았음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6절과 8절에서 아브라함이 이 사실을 강조하는데, 오늘날 우리도 이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주 안에서만“ 이 말은 고린도전서 7장 39-40절에 나오는 교훈이다. 또한 고린도후서 6장 14-18절도 읽어 보자. 부모들이 자녀들을 “사회로 밀어 넣으며“ 주의 축복으로부터 밀어내는 것은 비극이다 ! 아브라함은 이삭이 아내를 구하러 우르(Ur)로 돌아가거나 또는 가나안 민족 중에서 아내를 취하게 하기보다는 아들을 미혼으로 남겨 두었을 것이다."


창 24:10-49 

2. 종의 헌신의 모범(24:10-49)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종은 잃어버린 자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신부로 삼게 하는 일을 수행하는 성령을 상징한다. 그 종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는데 그것은 성령의 사역이 그리스도를 알리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종이 얼마나 자주 그의 주인과 주인의 아들을 언급하는지 주목해 보자. 그는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살았다. 이 장에서만도 주인이란 단어를 22번이나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성령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이 땅에서 구세주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 종은 주인의 소유를 한 몫 가지고 갔는데, 이는 마치 성령께서 오늘날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엡 1:13-14) 우리가 어느 날 영광 중에 누리게 될 거대한 부요의 작은 몫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는 것과 같다.

종은 또한 우리가 주님을 섬기려 할 때 우리에게 본보기가 된다. 이미 언급한 대로, 종은 그의 주인과 주인의 뜻만을 생각했다. 사실 그는 그의 임무를 완수하는 데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식사조차 돌보지 않았다(33절/ 요 4:31-32). 우리는 육체의 일들을 영적인 일보다 앞세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종은 주인으로부터 명령을 받았고 조금도 변경시키지 않았다. 그는 기도함으로 믿었고(사 65:24 참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섬김에 있어서 성급하고 참지 못하는 성격은 마땅치 못하다.

종은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여호와께서(순종하는)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27절/ 요 7:17).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되자, 그는 미루지 않았고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일을 서둘렀다(17절). 그 가정의 친절은 호의적이었으나 그는 자기 주인을 위해해야 할 일이 있었으므로 다른 모든 일들을 사양할 수 밖에 없었다. 종이 집으로 돌아와서 주인에게 보고를 한 일에도 유의하자. 이것은 우리가 후일에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될 때 계산을 해야 하는 것과 같다. 종이 여행을 하면서 신부를 어떻게 가르치며 신랑을 어떻게 알리는지를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스도는 성령에 대해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창 24:50-67 

3. 리브가의 결정의 모범(24:50-67)


또다시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대한 상징을 본다. 천국에서 결혼식이 있을 때 교회가 그러할 것이지만, 리브가는 순전한 처녀였다(계 19:7-8).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양떼인데 그녀가 양떼 중의 하나로 간주된 점에 유의하자(요 10:7-18).

리브가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가족과 함께 집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종의 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그녀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이삭에게로 갈 것인가? 결정을 내리는 데는 분명히 방해물들이 있었다. 오빠는 한동안 더 머물기를 원했고, 여행은 멀고 어려울 것이었다. 더구나 이삭은 정착된 집을 가지지 않은 순례자였으며,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야만 했다.

라반이 여동생에게 권한 것처럼 세상은 죄인에게 기다릴 것을 권한다(그러나 물질적인 것들을 얻을 때 라반은 서둘렀을 것이다/ 28-31절. 우리는 그가 정중한 예절로 종을 초대했는지 탐욕으로 초대했는지는 알 수 없다). 죄인들은 다른 모든 일들에는 바쁘면서도 영혼의 구원은 등한시한다. 이 시점에 이르러 리브가는 서둘렀으나(18-20, 28절) 그들은 그녀가 늑장부리기를 원한다. “여호와를 찾을 만한 때에 찾으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는 그녀의 결정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가겠나이다.“ 이 믿음의 행동(“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벧전 1:8)이 그녀의 생애를 변화시켰다. 그녀는 종의 신분에서 신부의 신분으로, 세상의 고독으로부터 사랑과 동반의 기쁨으로, 빈곤에서 이삭의 부(富)로 생애가 전환되었다. 그녀가 이삭의 모든 부요함을 보았는가? 그녀는 그에 대하여 모두 알고 있었겠는가? 아니다. 물론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보고 들은 것들이 그녀에게 가야 한다는 확신을 주었다. 오늘날 잃어버린 죄인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생긴다. 성령은 죄인에게 말씀하시며 그리스도의 일들을 보이시는데, 바른 결정을 내리기에 충분할 만큼 하신다.

(기록상으로) 이삭은 모리아산에 남겨졌었다. 왜냐하면 22장 19절에 아브라함만 홀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상징이다. 그는 우리 대신 죽으시려고 갈보리로 가신다. 그리고는 그의 신부를 기다리시기 위해 천국으로 돌아가신다. 창세기 23장에서 사라가 죽는데 이는 육신을 따르는 이스라엘이 제쳐짐을 말해 준다. 24장에서 종(성령)은 신부를 찾으러 간다. 이제 그 신부는 그녀를 영접하려고 나타난 이삭에게로 접근하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 아니겠는가! 이 일이 오늘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들이 만났을 때가 저녁 무렵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가 그의 신부를 취하러 돌아오실 때, 이 세상은 어두울 것이다.

리브가의 믿음은 보상을 받았다. 그녀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었고, 이삭의 사랑과 부(富)를 나누었으며, 하나님의 계획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떠나기를 거절했다면, 그녀는 알려지지 않은 여인으로 죽었을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창세기 25-27 

부정한 거래

 


이삭은 유명한 아버지(아브라함)의 아들이었고, 유명한 아들(야곱)의 아버지였다. 그래서 창세기를 공부할 때 “그를 빼놓기“가 쉽다. 이삭은 족장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반면, 그의 생애에서 흥미진진한 면은 다른 족장들보다 적다. 불행하게도 그의 생애의 말년은 초년에서와 같은 강한 믿음을 소유하지 못했던 것같다.

 

창세기 25장 

1. 아버지로서의 이삭(25장)


구별된 가정(1-11절) - 사라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이 결혼한 것은 교회가 들림을 받아 신부가 신랑을 만날 때(24장)의 이스라엘의 “새로운 생활“을 상징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부가된 아들들은 이삭에게 주어진 신분과 같지 않음에 유의하자. 왜냐하면 이삭은 그리스도처럼 모든 것의 상속자이기 때문이다(히 1:2). 아브라함의 죽음은 믿음이 인간에게 주는 유익을 보여 준다. 그는 평화롭게(15:15), “수가 차서“(자기 생애에 만족하며), 믿음 안에서 죽었다(히 11:13- 이하). 세상의 사람 이스마엘의 죽음과 비교해 보자(17절).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에게 남긴 유산은 얼마나 놀라운가 ! 그의 경건한 모범(18:19), 장막과 제단(26:25),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들(26:2-5). 이 영적인 축복들은 아들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부(富)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이다!


낙심한 가정(12-23절) -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이삭과 리브가에게 아들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결혼생활의 초반 20년 동안, 리브가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20, 26절). 이 영적인 심령을 가진 남편과 아내가 주님께 자신의 짐을 가지고 나아가게 됨을 보는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확실히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했을 것이며, 기도 중에 기뻐했을 것이 확실하다. 아이들은 태중에서 싸움으로써 리브가를 괴롭혔다. 그녀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약 1:5). 하나님은 그녀에게 두 민족이 태어날 것이며, 전례적인 관습과는 달리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택에 대해 절대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명확한 증거이다(롬 9:10-16). 하나님의 선택은 아이들의 행동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태어나기 전이며 아직 선이나 악을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격과 관계된 한에 있어서는 에서가 둘 중에서 보다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야곱이 선택된 사람이었다(엡 2:8-10).분열된 가정(24-34절) - 쌍동이 형제들의 모습과 기질이 서로 반대였다. 장자는 털이 많이 나서 “에서“(털보)라고 이름지었고 후에는 팥죽과 연관되어 “에돔“(붉다)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30절). 야곱은 에서의 발꿈치를 붙들고 마치 그를 붙들어 걸려 넘어지게 하는 듯 태어나므로써, “야곱 - 발꿈치를 잡는 사람“(책략을 써서 대신 들어 앉는 사람, 음모가, 사기꾼)이란 이름이 주어졌다. 야곱은 집에 머무는 조용한 사람이었고, 에서는 정력과 모험으로 가득찬 세상적인 사람이었다. 불행하게도, 에서는 영적인 인식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즐거워하기보다는 그의 육체에 음식을 공급하기를 원했다. 물론 야곱이 장자권을 얻기 위해 속임수를 쓴 것은 하나님께서 25장 23절에서 말씀하신 그의 약속을 이행하실 것에 대해 의심했음을 보여 준다. “믿음이란 꾀를 부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에서는 장자로서의 영적인 축복을 업신여겼다(신 21:17/대상 5:1-2). 그는 육신을 택했고 영을 택하지 않았다. 에서가 장막이나 제단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읽지 못했으며, 26장 34-35절은 그가 세상적인 여인들을 사랑했음을 알려 준다. 히브리서 12장 16절은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세상의, 보통의“ 라는 뜻으로서 “성전 밖에서“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프로파누스(profanus)에서 어원을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세상에서는 성공적이었으나, 하나님께는 실패하였다."


창세기 26장  

2. 순례자로서의 이삭(26장)


그는 그의 아버지가 당했던 유혹에 직면했다(1-5절/ 12:10- 이하 참조) - 이삭은 애굽을 향해 출발했으나 하나님은 은혜로써 그 여행을 중단시켜 멈추게 했다. 인간의 본성은 세대를 거쳐 내려오며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삭은 그랄에 머물렀는데, 이 곳은 국경에 접한 곳이다(10:19), 오늘날에도 많은 “경계선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이삭은 여기서 물질적인 축복을 받았으나 영적인 축복은 받지 못했으며, 그 후 그곳을 떠났을 때에야 받았다.


그는 아버지의 죄를 반복했다(6-11절) - 12장 10-20절과 20장 1-5절을 보자. 이 “반 거짓말“을 적용하였고 똑같은 결과가 왔다. 축복을 잃고, 간증을 잃고, 이방 왕에게 공식적인 문책을 받는다.


그는 아버지의 우물을 다시 팠다(12-22절) - 우물이란 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한 하나님의 신성한 자원을 말한다(요 4:1-14). 아브라함이 이 우물들을 팠는데 대적들이 돌로 막았거나 물이 나오지 않게 했었다. 이 일은 오늘날에도 꼭 맞는 상황이다. 세상은 우리 조상들이 마셨던 영적인 우물들, 즉 기도와성경과 가정 제단, 교회 등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갔다 ! 옛 우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모른다. 이삭은 그 우물들을 다시 열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이름으로 불렀고(18절) 당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새 우물들을 몇개 더 파나갔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하나님을 믿었다(23-25절) - 이삭이 가나안에서 멀어져 가는 한, 충돌을 겪어야 했지만 브엘세바(맹세의 우물)로 돌아갔을때 하나님이 그를 만나셨고, 적들과도 평화를 이루게 해주셨다(잠 16:7)."


창세기 27장 

3. 축복을 주는 이삭(27장)


말하기는 안되었지만, 전 가족이 영적으로 좋지 않은 길에 들어서 있었다. 25장 28절에서 우리는 가정의 분열을 보았는데 이제 우리는 이 육적인 분열의 죄악된 결과들을 보게 된다.


쇠약해지는 아버지 - 이삭은 이제 137세이며 죽을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180세까지 살았다(35:28). 에서에게 축복을 주는 데에 성급한 것으로 볼 때,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육신적인 계획임을 말해 준다. 25장 23절의 말씀을 잊었단 말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계획을 바꾸려 하고 있는가? 그가 자기 감정에 어떻게 의존하는지 보자. 그는 만져보고, 먹고, 냄새 맡는다. 육체에 음식을 공급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보다 우선적임에 유의하자. 이삭은 전에 제단에 놓여졌던 몸이며 기꺼이 여호와를 위하여 죽으려 했었다 ! 얼마나 큰 변화인가 !


의심하는 어머니 -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속임수를 쓰고 음모를 짜서 에서를 확실히 제외시키려 했다. 그녀가 오래 전에 한 것처럼 기도 중에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의 육신적인 계획에 의존한다. 이것이 관례가 되어, 후에 야곱은 이런 성품으로 특징지워진다. 리브가는 자기 죄 값을 크게 치룬다. 그녀는 아들을 다시는 보지 못했고(43-45절 참조), 에서가 고의적으로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행동했으며, 그녀의 나쁜 본보기는 야곱으로 하여금 20년에 걸친 시련을 겪게 했다.


속이는 아들 - 야곱이 자기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대신 자기 어머니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들 둘은 그 계획을 성취하려고 얼마나 서둘렀던가 ! “믿는 자는 서두르지 않는다 !“ 염소로 사슴고기의 맛을 내었으니 리브가는 훌륭한 요리사였음이 분명하다. 야곱은 위선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 준다. 그의 목소리와 그의 손(말과 행동)은 일치하지 않는다. 19절에서 야곱은 아버지에게 세 가지 거짓말을 했다. “나는 에서입니다“, “내가 하였사오니“,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라고 말했지만, 그는 야곱이었고 어머니가 모두 요리했으며, 그것은 염소 고기였다. 27절에서의 그의 입맞춤은 속임수나 마찬가지였다. 야곱은 이 죄값을 치루었는가? 그렇다. 많이 치루어야 했다. 그는 아내를 맞는 일로 라반에게 속임을 당했고, 라반은 그의 품삯을 여러 번 바꾸었다. 또한 야곱의 아들들은 염소를 죽이고(37:31) 그 피를 요셉의 옷에 묻혀 주를 속이게 된다! “네 죄가 너를 찾아낼 것을 명심하라!“


절망하는 형 - 히브리서 12장 17절은 에서가 눈물로 축복을 받으려 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자기 죄를 진실로 회개한 곳은 찾아볼 수 없다. 양심의 가책은 있었으나 진지한 회개는 없었다. 그는 자기가 잃은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슬퍼했으나 자기 죄는 슬퍼하지 않았다. 33절에 보면 이삭은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심을 깨달았을 때 크게 떨었다. 에서의 눈물이 이삭의 마음을 변화시키거나, 축복을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에서는 그의 동생을 살해할 계획을 짜서 보복하려 한다. 그리고 자기 아내들과의 문제를 일으킴으로 고의로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실패하지 않았으나 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데 실패했다.

집 안의 죄는 언제나 비탄과 오해를 가져온다. 이삭과 리브가가 아들들을 편애하지 않았고, 결혼 초기에 그러했듯이 문제들을 놓고 계속 기도했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방법을 사용하시도록 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해 괴로움을 당했다. 우리는 나이가 많아진다고 해서 유혹되지 않거나 실패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창세기 28장    

벧엘에서의 야곱/ 창세기 28장


1. 모험(28:1-9)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은 실제로는 야곱의 생애를 소개하고 있으며, 이 중에는 라반과의 시련(28-31장), 에서와의 시련(32-33장), 자기 아들들과의 시련(34장 이하)이 포함되어 있다. 요셉의 이야기는 사실상 야곱의 역사의 일부이다.


리브가가 야곱에게 집을 떠나라고 종용한 근본 이유는 에서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였다(27:41-46). 그러나 그녀는 야곱에게 경건한 아내를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핑계를 대었다(24:1-9). 에서의 세상적인 아내들은 가정에 문제거리였으며,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 밖에서 결혼할 때는 언제나 같은 경우를 당한다. 리브가는 사실상 적당한 때에 야곱을 데리러 보내려고 계획했다(27:45). 그러나 그녀의 육적인 모든 획책이 그러했듯, 이 계획도 실패했다. 야곱은 다시는 그의 어머니를 보지 못했다. 다시 말하지만 “믿음이란 꾀를 부리지 않고 사는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며 집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 그러나 야곱은 아버지의 신앙에 의존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야했고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불행하게도 야곱이 참된 헌신의 장소에 오게 되기까지는 20년 이상이 걸렸다. 그는 그동안 불신앙과 반역에 대한 비싼 댓가를 치루었다. 6-9절은 육과 영의 대결을 보여주는 예증이다. 에서(육신)는 고의로 여호와께 불순종하여 가정에 훨씬 큰 슬픔을 안겨 준다.

길을 떠날 때 그는 젊은이가 아니라 적어도 77세는 되었다. 창세기 47장 9절은 야곱이 애굽으로 떠날 때가 130세였다고 언급한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때는 17세였으며 바로에게 나타난 것은 30세 때였다(41:46). 그렇다면 종으로 13년을 지냈다는 뜻이고, 7년의 풍년이 지나 2년째의 흉년이 들었을때 야곱이 애굽으로 왔으니 요셉은 39세 가량 되었다. 이 말은 야곱의 나이 91세 때에 요셉이 태어났다는 말이 된다. 창세기 30장 25절에 보면 요셉이 태어났을 때가 야곱이 아내들을 위한 14년의 수고를 끝냈을 때이므로, 야곱이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한 때는 77세 쯤임을 알 수 있다."


창 28:10-12 

2. 벧엘의 꿈(28:10-12)


그는 브엘세바에서 벧엘까지 약 70마일(112.6km)을 여행했다. 3일간의 여행이었다. 그 날 밤에 그는 “돌들 중의 하나“를 취하여 기대어 잤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땅에 이르는 사다리(또는 계단으로 번역하기도 함)를 보여 주셨다. 요한복음 1장 43-51절은 이 구절에 대한 신약의 설명이다. 즉, 사다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야곱은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완전한 모형이다. 어두움 가운데서 자기 생명을 위해 도망치고 있으며, 아버지의 집을 떠나, 죄로 마음이 무겁고,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사다리는 땅에서 하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는 우리에게 천국을 열어 놓으셨고, 우리 생활에 하늘의 축복을 가져오시며, 그분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실 수 있다. 야곱은 자기가 외롭고 황량한 들판에 있다고 생각했었으나 잠을 깨자 그가 천국 문에 갔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구절을 요한복음 1장 43-51절과 관련지어 보면 야곱은 교활함(속임)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 사람인 반면에 47절에 기록된 나다나엘은 교활함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하나님으로부터 야곱에게로 온 최소한 일곱 개의 기록된 계시들 중에서 첫번째 것이다(31:3/31:11-13/32:1-2/32:24-30/35:1/35:9-13/46:1-4). 사다리 위의 천사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나타낸다. 천사들은 야곱이 에서와 상봉할 즈음, 야곱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나타났다(32:1-2)."


창 28:13-15 

3. 음성(28:13-15)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환상은 속임수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곱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친히 음성을 들려 말씀하셨다. 구원은 천사들로 말미암거나, 또는 환상을 보았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땅(13절) - 이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처음 주셨던 것으로서(13:14) 이삭에게 재차 확언되어졌던 것이다(26:1-5). 비록 유대인들이 모두 소유하지는 못했지만, 거룩한 땅은 그들의 것이다. 어느 날 이스라엘은 “자기 소유를 차지할 것이다“(옵 17절).


자손의 번성(14절) - 이 말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아내를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한다. 다른 방법으로는 자손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13장 16절과 22장 17절을 보자. 오늘날에는 나침반이 가리키는 어느 곳에나 유대인들이 있다.하나님의 인격적인 임재(15절) - 이 구절은 야곱이 방랑하게 될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한다. 왜? 하나님이 야곱의 생애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의 계획을 성취하실 것이다(빌 1:6/롬 8:28-29). 야곱이 앞으로 어려운 해들을 보내며 자기 죄의 결과를 거둬들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셔 보호하시고 축복하셨다."


창 28:16-22 

4. 서약(28:16-22)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다 !“라고 야곱은 외친다. “벧엘“(Beth-el)이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그 밤의 경험은 그를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그 곳의 이름도 바꾸었다. 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둥을 세워 제단을 삼고 기름을 부어 여호와께 바쳤다. 오랜 후 그가 벧엘로 돌아왔을 때, 야곱은 이 헌신의 행위를 반복했다(35:9-15). 이 믿음의 행위(비록 두려움이 동기였다고 해도)는 하나님께 자신을 헌납하는 야곱의 방법이었다. 빌립보서 2장 17절을 보자. “드릴지라도“라는 말은 “쏟아 붓는다“는 말이다. “베개“가 “기둥“으로 바뀔 때 이는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


야곱의 서약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가 “만일... 하시면“ 이란 말을 함으로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있다는 견해와, 히브리어는 “만일“이 “왜냐하면...“으로 번역되기도 하므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견해이다. 이것은 사실상 성경에 나오는 첫번째 서약이다. 위의 두 가지 해석은 모두 사실인 것 같다.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으나 에서와 이삭에게 거래하던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거래를 시도하는 “옛 사람“이 다분히 남아 있었다. 그에게는 “꾀를 부리는 것“이 습관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일도 자기 방식으로 꾀를 내려고 했다. 이런 습관은 마침내 얍복강 나루에서 노출되어 처리되었다(창 32:1-). 야곱은 평화롭게 집으로 돌아갔다(창 35:27-29).

야곱은 십일조를 실행했다(22절). 그는 자기의 재물이 하나님의 지배 아래있지 않는 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란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아브라함도 십일조를 했는데(14:20) 두 경우 모두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었다. 십일조가 오늘날 은혜 시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모세 율법의 일부라고 말하는 사람은 옛 성도들이 십일조를 실천했다는 사실을 놓쳐버리는 것이다. 십일조는 그들을 인도하셨고, 보호하셨고, 필요에 따라 공급하신 여호와께 믿음과 순종을 표하는 것이었다.


야곱이 이후로부터 이 서약에 따라서만 언제나 산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호적수 라반을 만났는데 라반이야말로 음모가였다. 20년 동안 둘은 서로 꾀로 승부를 다투었다. 결국, 야곱은 단련이 되었으며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지키셨다.사람이 자기 생애 가운데 “벧엘“ 곧 하나님을 헌신적으로 만나 어떤 확정된 결정들을 내린 곳을 가지게 됨은 축복된 일이다. 그는 주를 떠날 수도 있었으나 “벧엘로 돌아와“ 언제든지 약속을 되살릴 수 있는 것이다. 야곱은 두 가지 본성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육신과 싸우면서도 자기 자신의 능력과 계획을 의존하려 한다. 하나님이 제멋대로인 자녀들조차 돌보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


창세기 29-31장       

야곱과 라반


 


야곱은 벧엘이라는 영적인 산상으로부터(28장) 하란에서의 실제적인 일상생활로 내려온다. 여기서 그는 호적수격인 교활한 라반을 만난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과 20년을 보내며 자기가 지은 죄의 슬픈 결과들을 수확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미래 사역을 위해 그를 훈련하고 계셨다.


1. 라반의 딸들을 위한 야곱의 봉사(29:1-30:24)


1)결정(29:1-20) - 하나님은 섭리로써 야곱을 라반의 집에 인도하신다. 그러나, 중요한 심부름을 수행하던 아브라함의 종과는 달리, 야곱은 먼저 기도하기 위해 멈추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하자(24:12). 야곱은 다른 목자들을 목장으로 돌아가게 하고(7절) 라헬과만 인사하려고 했다 ! 그는 역시 책략가이다. 야곱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라헬과 라반이 달려 가고 달려 오는 것에도 주목하자(12-13절). 야곱은 결정을 내렸다. 아름다운 라헬을 아내로 맞고 싶었다. 라헬은 “암양“이란 뜻이고 레아는 “들소“란 뜻이다. 레아의 눈은 광채가 나지 않았는데 동양 사람에게는 눈의 광채가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야곱은 라반을 위해 7년을 일하기로 했는데,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시간과 수고는 빠르게 지나간다. 15절에서 우리는 야곱을 훈련시키는 제 1단계를 보게 된다. 그는 종이 된 것이다. 25장 23절에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고 약속하셨는데 이제 작은 자가 스스로 종이 되었다.


2)기만(29:21-30) - 여기 제 2단계가 있다. 사기꾼이 자기도 속는다. 라반은 큰 딸의 혼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야곱으로 하여금 그녀와 강제로 결혼하게 했다. 야곱은 장자를 속였었는데(27:19) 이제는 장녀로 말미암아 속임을 당한다(29:26). “궤사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그는 레아를 위한 결혼식 주간을 채운 후 라헬과 결혼하였고 7년간의 두번째 봉사 기간에 접어들게 되었다. 라반은 그 지역의 모든 사람들로 레아와 결혼한 증인을 세워 야곱이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데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22절). 법적으로는 야곱이 레아를 거절할 수도 있었으나 하나님이 자신의 속임수에 대해 징벌하시고 계심을 인식했다.


3)분열(29:31-30:24) - 결혼이 죄로 시작될 때, 가정에는 대개 분열과 불행이 있기 쉽다. 처음에는 두 아내가 모두 자녀를 낳지 못했다. 그러나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했으며 레아를 “등한히 한“(미워한, 31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르우벤(“보라, 아들이로다!“), 시므온(“들으심“), 레위(“연합되었다“), 유다(“찬양함“)의 네 아들을 레아에게 주심으로써 그녀를 높였다. 이는 레아의 기도가 응답을 받은 것이었다(29:33/30:6/30:17/30:22). 라헬은 언니를 질투할 수 밖에 없었고, 질투는 그녀와 야곱 사이에 노여움과 불화를 만든다. 야곱은 침착성을 잃지 말고 이 문제에 대하여 기도했어야 했다. 야곱의 부모들도 이런 문제에 직면하여 기도했던 일이 있다.(25:19-23). 인간이 만든 해결책은 야곱이 빌하와 결혼하는 것이었고 그녀는 단(“재판함“)과 납달리(“경쟁함“)를 낳았다. 레아는 야곱에게 실바를 주었고 실바는 갓(“군대 또는 큰 무리“)과 아셀(“행운“)을 낳았다. 분명한 것은 야곱이 영적인 분위기의 가정을 이루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아내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고, 남편을 자기 계획의 저당물로 사용했다(30:14-16). 라헬은 우상에게 관심을 갖기조차 하였다(31:19). 집에는 제단이 없었고 그로 인한 슬픈 결과들을 쉽게 찾아 볼 수있다. 레아는 잇사갈(“상급“)과 스불론(“거함“)의 두 아들을 더 낳았으며, 라헬은 야곱이 사랑했던 요셉(“하나님이 더하시기를“)을 낳은 후 베냐민(“오른손의 아들“)을 낳고 죽었다(35:16-20). 이 외에도 야곱에게는 여러 명의 딸이 있었다(30:21/37:35/46:7/46:15).

이러한 가운데 고생과 시련과 시험의 14년이 지난다. 하나님은 야곱을 훈련시키고 그 앞에 펼쳐진 일들에 대해 준비시키는 데에 라반과, 어려운 상황들을 사용하셨다."


창 30:25-43 

2. 라반의 가축을 얻기 위한 야곱의 계략(30:25-43)


야곱은 14년간 봉사해 왔는데, 자신의 소유를 위해 그리고 대 가족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투쟁해야 함을 깨달았다. 야곱은 라반에게 떠나게 해 줄 것을 요청하나, 간사한 수리아 사람은 쓸모있는 사위를 놓치려고 하지 않았다. 야곱은 두 아내들을 얻기 위하여 14년을 일했는데, 이제 가정을 세우려 한다면 그가 필요로 하는 가축을 얻기 위해 일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라반은 여호와의 이름을 사용하여 자기의 나쁜 동기를 감추며(27절) 품삯을 정하라고 청한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까?“ 라반이 묻지만 야곱은 선물을 거절한다. 왜냐하면 지난번에 선물을 받았을 때, 그는 속았기 때문이다(29:19). 야곱은 라반이 양떼와 염소떼 중에서 “불합격품“을 그에게 준다면 라반의 목자로서 일하겠다고 제안한다. 동양의 양떼는 흰색이며, 염소는 갈색이거나 검은 색이다. 줄무늬와 점있는 것, 얼룩진 것을 받음으로써 야곱은 라반에게 외관상으로는 더 많은 양(量)을 주는 듯했다. 물론 이것은 믿음의 행위였다 !

그러나 모략가는 일을 시작했다. 필요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31:9/ 28:15/28:20) 야곱은 자기 자신의 계획을 이용했다. 여물통 옆에 세운 특별한 막대기와 지팡이는 양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양, 어떤 염소가 생산될 것을 결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야곱은 “선택적인 품종 개량“을 이용했다(40-43절). 따라서 강한 가축만 새끼를 배게 했다. 우리는 31장 8절을 통해 라반이 야곱의 양떼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계약 조건을 여러 차례 변경시켰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라반을 다스리셨고 야곱은 부자가 되었다."


 창세기 31장 

3. 라반의 집으로부터 도주한 야곱(31장)


1)회의(1-16절) - 야곱이 떠나기로 결심한 데는 세 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라반의 변한 태도, 자기 자신의 가정을 일으켜 세울 필요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호와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이 그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에서의 서약을 생각나게 하셨고, 이 타락한 사람은 이제 돌아가서 그를 축복하신 여호와와 맺은 자기의 약속을 성취해야만 했다. 라헬과 레아는 떠날 것에 동의하지만, 그들의 결정은 주님의 뜻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문제를 고려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도 그의 아내들이 벧엘에서의 체험에 대해 모르고 있었는지 의아스럽다.


2)추적(17-35절) - 그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 야곱은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간 사이에 서둘러 도망친다. 신자가 비밀스러운 행동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간증인가! 라반은 이미 야곱에게서 3일 거리에 있었으므로 일 주일 동안은 그에게 잡히지 않았다. 라반이 야곱을 만나기 전에 하나님이 미리 라반을 경고하셨으므로 야곱이 무서워할 이유는 없었다(31절/ 잠 16:7). 라반은 짐짓 감정이 상한 것처럼 행동했다. 아마도 그는 자기를 죄로 이기려 하며 점점 부자가 되어가던 야곱이 없어진 것을 기뻐했을 것이었다. 그가 사실상 관심을 가졌던 일은 그의 우상을 누군가 훔쳐갔다는 것이다. 죄는 죄를 낳는다. 라헬은 그녀의 아버지와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였고, 성난 라반은 행렬을 모두 조사한다.


3)대결(36-42절) - 20년 동안 쌓인 울분이 이제 모습을 드러내며 야곱은 장인에게 모두 늘어 놓았다. 라반은 우상 숭배자였고 야곱은 타락한 사람이었다. 이들 사이에 무슨 합의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야곱의 성난 연설에서 유일한 속죄의 요소가 있다면 자기 성공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점이다(42절).


4)언약(43-55절) - 찬송가에 나오는 “미스바의 축복“이란 말은 전혀 성경적이 아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둥을 세워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것을 피차에 상기하도록 했다. 이 돌들은 “미스바의 축복“이 뜻하듯 그들의 우정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상호 불신에 대한 증거였다. 47절을 보면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언어도 서로 달리 사용하였다. 두 가지 명칭이 모두 “증거의 무더기“ 또는 “간증의 무더기“란 뜻이다. 가족들이 서로를 신뢰할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들이 서로 용서하고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의존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 52절은 라반이 세운 기둥을 경계석으로 하여 야곱이 감히 넘지 못하도록 했음을 알려준다.

야곱의 20년에 걸친 종살이가 끝났다. 그러나 그는 벧엘로 돌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창세기 32-36 

야곱과 에서


이 장들에서는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벧엘로 가는 도중에 생긴 생의 중대한 경험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육과 영, 옛 생활과 새 생활 사이의 대결을 예증해 주는 세 가지 생생한 모습을 보여 준다.

 

창세기 32장 



1. 씨름꾼 야곱(32장)


에서가 오고 있었으므로, 야곱은 그의 잊어버렸던 과거와 만나야 할 처지에 있었다. 에서가 그를 용서할 것인가, 아니면 싸울 것인가? 야곱은 속여 취한 모든 것을 잃을 것인가? 과거가 어떤 사람을 붙잡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다고 해도 지울 수 없으며 20년이란 역사도 지울 수없다. 그러나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에 세 가지 다른 만남을 경험한다.


1)하나님의 천사들과의 만남(32:1-20) - 그는 벧엘에서 처음으로 이 천사들을 만났었다(28장). 이들은 하나님이 조정하고 계심을 그에게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야곱은 그곳을 마하나임, 즉 “두 진영“(야곱의 장막과 천사들의 군대)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그에게는 오래 전에 그를 보호하시리라고 약속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오늘날 신자들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할 때에 히브리서 1장 14절과 시편 91편 11-13절을 주장할 수있다. 그러나 야곱은 다시 자기 자신과 꾀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그는 선물로 에서를 누그러뜨리려고 하였다. 그는 자기의 식솔을 두 떼로 나누고(7절), 보호하는 천사들의 군대는 무시했다. 육신적인 확신으로 이런 단계를 밟은 후에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청한다. 하나님께서 라반으로부터 그를 보호하셨던 방법을 잊었단 말인가?(31:24)


2)주님과의 만남(32:21-26) - 사람이 하나님과 홀로 있게 될 때에 일들은 발생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께서 야곱과 씨름하려고 오셨고, 이 전투는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야곱이 하나님께 축복을 받으려고 씨름을 한 것이 아님을 명심하자. 그는 자신을 방어하며, 양보할 것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야곱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갈 2:20)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데까지 이르게 하시려고 그를 깨뜨리시기를 원하셨다. 밤새도록 야곱은 자기를 방어하였고 항복하기를 거절하였으며, 그가 죄를 지은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하나님이 야곱을 연약케 하셨고 이 씨름꾼은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축복을 받으려고 꾀를 부리거나, 축복을 받으려고 거래를 벌이는대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축복을 받았다 !


3)자기 자신과의 만남(32:27-32) - 사람은 먼저 주님을 보기까지는 참으로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 질문은 야곱으로 하여금 자기의 참된 자아가 “야곱 - 사기꾼 !“이라고 고백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가 자신을 직면하고 죄를 고백하자 변화된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과 더불어 겨룸“ 또는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뜻을 지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 하나님과 함께 능력을 소유하는 길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새로운 출발, 새 이름과 함께, 곧 새로운 능력, 육신으로 행치 않고 성령으로 행하는 능력을 주셨다. 이것은 새로운 걸음걸이로 증거가 되었다. 야곱이 절게 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깨어졌다. 그러나 다리를 저는 것은 연약함이 아니라 능력의 표시였다. 31절은 새 날이 밝아옴을 말한다. 해가 솟아 올랐고, 야곱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에서를 만나려고 절룩거리며 나아갔다."


창세기 33-34장  

2. 타락자 야곱(33-34장)


야곱이 그의 새 이름에 따라,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새로운 지위에서 살아갔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이 장은 새 이름 “이스라엘“이 아니라 옛 이름 “야곱“이란 말로 시작된다. 그리고 “눈을 들어“ 믿음이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 행함을 본다. 야곱이 자기의 영적인 특권을 주장하지 않음으로써 그가 잃어버린 것을 보자.


1)그의 절룩거림(3절) - 그는 에서 앞에서 걷거나(절룩거림) 정면으로 대면치 않고 절을 한다. 하나님과 더불어 겨루기까지 했던 사람이 세상의 사람 앞에 아첨하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절룩거리는 것이 자기를 신뢰하여 절하는 것보다 낫다.


2)그의 능력(33:1-2/33:8-11) - 야곱이 적과 거래하며 다시 속임수를 쓴다! 하나님이 그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주지 않았던가? 언제나 그를 보고 있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지 않으셨던가?


3)그의 간증(33:12-17) - 그는 양떼에 대하여 에서에게 거짓말을 하고 반대 방향으로 여행한다. 에서와 야곱은 아버지를 장사지낼 때까지 결로 만나지 않았다(35:29). 에서가 야곱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을 것은 의심할 나위 없다.


4)그의 장막(33:17) - 그는 숙곳에 집을 짓고 정착했다.5)그의 소망(33:19) - 그는 다시 이동하여 롯과 다를 바 없이(13:12) 세겜성 근처에 장막을 쳤다. 야곱은 하나님의 성(城)에 대한 소망을 잃었다(히 11:13-16).


6)그의 딸(34장) - 롯과 같이, 야곱은 유혹의 장소에 가족을 방치해 두었다. 그의 딸이 성을 보러 갔다가 사고를 당하였다. 야곱의 아들들은 그들의 아버지처럼 거짓말장이였다. 사실상 그들은 신성한 할례 의식을 이용하여 사악한 속임수를 쓴다. 30-31절은 야곱이 가족의 죄보다는 자신의 안전과 복지에 더 관심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이 모든 일이 언제 시작되었는가? 야곱이 하나님과 함께 세운 새로운 표준에 따라 살지 못했을 때였다. 오늘날 신약 그리스도인들은 왜 속이고 죄를 짓고 실패하는가?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의 지위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엡 4:1- 이하)."


창세기 35-36장    

3. 여행자 야곱(35-36장)


이 장들에서는 야곱이 매우 자주 “여행했음“에 주목하자(35:5/35:16/35:21). 하나님은 “벧엘로 돌아가라“고 그에게 말씀하셨다(1절). 꿈과 서약의 장소로, 야곱이 그러했듯이, 타락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헌신의 장소로 돌아가서 약을 새롭게 하는 일 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식솔을 제단으로 인도하기에 앞서, 야곱은 “집을 청결케“ 해야 했다. 이방인의 종교의식과 연관된 이상한 신들과 보석을 땅에 묻어 버렸다. 죄가 처할 곳은 무덤 속뿐이다. 이 장에는 사실상 네 개의 무덤, 즉 우상의 무덤(4절), 드보라의 무덤(8절), 라헬의 무덤(19절), 이삭의 무덤(29절)이 나온다.

야곱은 벧엘로 돌아와 제단을 쌓았다. 하나님은 새로운 방식으로 그를 만나셨고, 새 이름 이스라엘을 상기시키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셨던 약속들을 재 확인하셨으며, 야곱은 새 기둥을 세우고 전에 했던 대로 기름을 부음으로써 이에 응답하였다. 야곱이 전에 잃었던 모든 것은 제단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이제 다시 얻게 되었다. 타락한 신자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는 새 경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그에게는 옛 경험을 새로운 방법으로 재차 확인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야곱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한 직후에 라헬이 죽은 것은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위대한 영적 체험은 삶에 있어서의 슬픔과 시련에 대하여 세속적인 것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분명히 야곱은 그의 제단을 다시 쌓은 지금, 이 슬픔을 더욱 잘 극복할 수 있었다. 하나님과 제단에서 만남으로써 그가 이전에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이제는 다시 소유하게 되었다.

헌신적인 신자의 가족에게는 슬픔뿐만 아니라 죄 또한 있다(22절). 르우벤은 큰 기대 속에서 태어났다(29:32). 말년에 야곱은 르우벤이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고 말했다(49:3). 그러나 르우벤에게는 참을성이 없었고, 경건한 성품이 결여되어 있었다(49:4). 그 결과로 장자에게 속한 장자권(대상 5:1-2)을 잃었고 이것은 유다와 요셉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죄는 결코 축복을 가져오지 않는다.


이 여행은 야곱과 에서가 아버지를 장사지냄으로 끝난다. 야곱은 그의 어머니를 다시 만나려고 계획했었으나 그녀는 야곱이 집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36장은 에서의 역사인데 하나님이 그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다. 그러나, 불행히도 에돔족속은 세대를 통해 내려오며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였다."


창세기 37-40 

고난당하는 요셉


 


우리는 이제 성경에 나오는 가장 흥미진진한 전기(傳記) 중의 하나, 곧 요셉과 그의 형제들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다. 전체 이야기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그의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예증하고 있다. 요셉에게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는 집안의 영적인 거인으로 두드러져 보인다.


창세기 37장 

1. 사랑받는 아들 요셉(37장)


1)야곱의 사랑(1-4절) - 라헬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였고 요셉은 그녀가 낳은 첫 아들이었다(30:22-24). 야곱이 노년에 왜 그를 총애했는지는 알만한 일이다. 가정에서의 이런 편애는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17세의 요셉은 양치는 일을 도왔으나, 야곱은 곧 그 의무로부터 그를 해방시켜 “맞춤옷“을 입힘으로써 감독관을 삼았다. 야곱은 요셉이 실제로 섬기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통치자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요셉의 형제들이 그를 미워하며(4절) 시기하였다(11절).


2)요셉의 꿈(5-11절) - 이 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할 바 없다. 요셉이 애굽에서 시험을 받은 여러 해 동안 신실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어느 날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때문이었다. 첫 꿈은 그 배경이 땅이고 두번째 꿈은 그 배경이 하늘인 것에 유의하자. 이것은 또다시 아브라함의 지상 자녀들(유대인)과 그의 천국 자손(교회)을 나타낸다. 요셉의 형제들은 어느 날 그에게 엎드려 절했다(42:6/43:26/44:14 참조).


3)유다의 꾀(12-28절) - 요셉을 없애자고 제일 먼저 제안한 형제가 누구인지는 나와 있지 않다. 아마도 시므온이었을 것인데 그는 야곱이 장자권을 불법점유한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결국 르우벤은 장자권을 잃었다/ 49:3-4). 34장에 보면 시므온은 교활하고 잔인했는데, 42장 24절에서 요셉은 시므온에게 가혹하게 굴었다. 어쨌든 형제들이 세겜 지역(전에 문제를 일으켰던 곳/ 34장)에 들어와 있었고 요셉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비록 좋은 뜻을 성취하기 위해 나쁜 방법을 사용했다고는 하나, 르우벤은 요셉의 생명을 구하려고 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증오심을 번복시키셨고, 요셉은 살해당하는 대신 노예로 팔리웠다.4)야곱의 슬픔(29-36절) - 오래 전에 야곱은 그의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염소를 죽였었다(27:9- 이하). 이제 그의 아들들이 똑같은 방법으로 그를 속인다. 우리는 심는 대로 거둔다! 야곱은 그 후 22년 동안 요셉의 죽음을 생각하며 슬픔 가운데 지냈다. 그는 만사가 자신을 해롭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창 42:36). 그런데 사실은 모든 일이 그를 이롭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요셉을 앞서 보내어 이스라엘을 한 민족으로 보존하기 위한 길을 마련하셨다."


창세기 38-39장    

2. 충성된 청지기 요셉(38-39장)


38장은 유다가 육신의 더러운 욕망에 굴복하는 상황을 보여 준다. 이것은 요셉의 순전함과 잘 대조를 이룬다(39:7-13). 유다는 그의 동생을 노예로 팔았으나 그 자신이 “죄의 노예“였다(요 8:34).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한다“ 왜냐하면 다말이 그리스도의 가계(家系)에 끼어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마 1:3). 유다는 자신에 대해서보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엄격했음을 주시하자(24절). 다윗이 그러했듯이, 유다는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하기까지 “죄인“이 심판받기를 원했다 !

야곱은 요셉을 일해야 하는 책임에서 벗어나게 했으나, 하나님은 요셉이 먼저 종이 되기까지는 통치자가 될 수 없음을 알고 계셨다(마 25:21).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의 통치자가 되게 하기 위해 준비 단계로서 세 가지 훈련을 시키셨다.


1)봉사(섬김)의 훈련 - 요셉은 “채색옷“(마춤복)대신 종의 옷을 입었다. 하나님은 강압적으로 그에게 일하는 법을 배우게 하셨다. 이렇게 하여 그는 겸손(벧전 5:5-6)과 명령에 순종하는 일의 중요성을 배웠다. 요셉이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므로 보다 큰 일을 그에게 맡기셨다(잠 22:29/잠 12:24 참조).


2)절제의 훈련(39:7-18) - 요셉의 어머니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므로 아들이 그녀의 용모를 물려받았을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애굽 여인들이 불경건한 것은 잘 알려져 있었으나 요셉은 굴복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요셉을 시험하고 계셨다. 요셉이 종으로서 자신을 절제하지 못한다면 통치자로서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아무도 모를 텐데 !“ 또는 “다른 사람들도 다 하는 일인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살았으며,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는 계기로 삼았다(롬 13:14).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바울은 충고했다(딤후 2:22). 요셉이 한 일이 바로 이 일이었다! 그는 겉옷을 잃었으나 자기 품성을 지켰다. 이 훈련에서 실패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고전 9:24-27/잠 16:32/잠 25:28).3)고난의 훈련(39:19-23) - 요셉은 자기 정욕을 조절할 수 있었을 뿐아니라 혀도 조절할 수 있었다. 그는 관리들과 다투거나,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모함하려 퍼뜨린 거짓말을 폭로하지 않았다. 혀를 잘 조절하는 것은 영적인 성숙의 표시이다(약 3장). 보디발은 죄수를 책임맡은 경비대장이었던 것같다. 수석 사형집행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가 요셉을 왕의 감옥에 넣도록 한 것은 틀림없다(20절). 요셉의 충성과 헌신은 관리들의 호의를 샀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이 말은 요셉의 성공의 열쇠이다(39:2/39:5/39:21).

요셉은 죄수로서 최소한 2년이나 그 이상을 고난받아야 했다. 시편 105편 17-20절은 이 고난이 그의 영혼을 단련하였다고 설명한다. 고난은 자신을 벗어나도록 돕는다 ! 고난을 피하는 젊은 사람들은 참된 개성을 개발해내지 못한다. 요셉이 고난으로부터 인내를 배웠음은 분명하다(롬 5:1-5).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신뢰하는 법을 배웠다(히 6:12). 이 고난이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난은 영광으로 그를 인도했다 !"


창세기 40장 

3. 잊혀진 종 요셉(40장)


이제 요셉은 왕의 감옥에 있는 종으로서 일하며(41:12) 예언의 꿈이 이루어지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의 죄수가 들어왔는데, 이들은 왕의 술 맡은 사람과 떡 맡은 사람이었다. 그들의 죄명은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통치자를 거스리는 어떤 작은 일이었던 것같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들을 갇히도록 배정하셨음을 안다. 요셉은 불의한 자로 취급을 당했으나 하나님께서 어느 날 그의 말씀을 성취하실 것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꿈을 해석할 때에 보여준 요셉의 겸손에 주목하자(8절). 그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두 죄수는 그들이 저지른 일로 인해서 갇혀 있으나 요셉은 무죄였다. 그가 해석한 꿈이 이루어져 술 맡은 자는 복직되고, 떡 맡은 자는 처형되었으며, 요셉은 감옥에 남게 되었다 ! 다른 사람들은 축복을 받는데 우리는 왜 이처럼 핍절한가에 대해 궁금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계획과 그의 시간이 있으신 것이다.

14절에 나오는 요셉의 요구에서는 실망과 불신을 보게 된다. 요셉이 육신의 팔에 기대고 있었는가? 그렇다면 육신의 팔이 그를 실패케 했다. 왜냐하면 술 관리는 2년간 그를 완전히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것은 인간을 결코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좋은 교훈이었다. 하나님은 결국 요셉을 구하시는 데 술 관리의 좋지 않은 기억력을 사용하실 것이지만 바른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술 관리는 요셉을 잊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잊지 않으셨다 !

요셉이 애굽에 왔을 때 17세였는데 30세에 감옥에서 구출되어졌다(41:46).이 말은 종과 죄수로서 13년을 보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해들은 단련과 훈련의 시간들이었고 애굽 제 2의 통치자로서 평생의 사역을 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해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 굴복하기만 하면 우리를 준비시켜서 그가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일에 쓰신다."

 

창세기 그리스도의 모형인 요셉   

그리스도의 모형인 요셉


신약 어느 곳에도 요셉을 예수 그리스도의 조형이라고 밝힌 곳은 없지만 유사점이 너무 분명하고 많아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많은 분들이 이 제목으로 책을 쓰셨는데, 특히 아더 핑크(Arthur Pink/ 창세기 단편록)와 아다 R. 하버슨(Ada R. Habershon/ 모형의 연구)이 잘 알려져 있다. T. W. 칼러웨이(Callaway)박사는 그의 양서 “구약에 나타난 그리스도“(Christ in the Old Testament)에서 요셉에 대하여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여기 주어진 비교와 대조 중에는 이 책들에서 발췌한 부분이 첨가되어 있다.


1. 아들


1)아버지의 사랑을 받음-37장3절(마 3:17).

2)목자-37장 2절(요 10:11-14)

3)형제에게 미움받음-37장 4-5, 8절(요 15:25). 말 때문에 미움받음(마 26:64/요 8:40)

4)불신당함-37장 5절(요 7:5). “통치함“-37장 8절(눅 19:14)

5)참된 증거-37장3절(요 7:7)

6)시기를 받음-37장 11절(막 15:10/마 27:17-18)

7)형제에게 보내짐-37장 13절(눅 20:13/히 10:7). 그들의 평안을 위해-37장 14절(요 3:17)

8)헤브론(교제)에서-37장 14절(요 17:5/요 17:24)

9)모함을 받음-37장 18절(마 27:1/요 11:53). “우리 손으로 말고“-37장 27절(요 18:28)-이방인

10)유다가 거래함-37장 26-27절(유다-막 14:10)

11)옷을 벗김-37장 23절(마 27:28/요19:23)

12)앉아 지킴-37장 25절(마 27:36). “꿈이 어찌되나보자.“ -37장19-20절(마 27:39-44)

13)노예로 팔림-37장 28절(마 26:15)

14)애굽으로 데려감-37장36절(마 2:14-15)


2. 종(39:1/눅 22:27)


1)하나님이 함께 하심-39장 2, 21, 23절(요 16:32)

2)성공함-39장 2-3절(사 53:10)3)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맡김-39장 4, 8절(요 3:35)

4)보디발을 기쁘게 함-39장 4절(요 8:29)

5)유혹을 받음-39장 7절 이하(마 4:1-)

6)거짓 고소됨-39장 16-18절(마 26:59-60)

7)갇힘-39장 20절(마 27:2)

8)변명하지 않음-39장 20절(사 53:7)

9)다른 두 죄수-40장 2-3절(눅 23:32) 한명은 구원받고 다른 사람은 버려짐.

10)이방인에게 고난당함-(행 4:26-27)

11)간수에게 존경받음-39장 21절(눅 23:47)


3. 절대주권자


1)감옥에서 나옴-41장 14절(부활)

2)석방됨-시편 105편 20절(행 2:24)

3)옷을 바꾸어 입음-41장 14절(요 20:6-7)

4)신의 감동을 받음-41장 38절(행 10:38)

5)하나님의 지혜를 가짐-41장 39절(요 5:20/마 13:54)

6)집을 다스림-41장 40절(히 3:6)

7)모든 백성을 다스림-41장 40절(행 5:31)

8)바로의 보좌에 함께 함-(계 3:21)

9)요셉 없이는 바로가 아무 것도 시행치 않음-41장 44절(요 15:5)

10)사람들이 절함-41장 43절(빌 2:10)

11)새 이름을 가짐-41장 45절(빌 2:9-10)

요셉-“더함“(30:24)

사브낫바네아-“비밀을 계시하는 자“(눅 2:34-35)

12)30세-41장 46절(눅 3:23)

13)이방인 신부-41장 45절(교회)

14)“그의 말하는 대로 행하라“-41장 55절(요 2:5)

15)모든 민족이 나아옴-41장 57절(사 49:6)

16)이중의 권한(마 28:19-20)

땅-37장 5-7절

하늘-37장 9-10절


4. 자기 백성을 구할 자


1)백성이 그를 모름-42장 8절(요 1:10-11/행 3:17)

2)피값을 치름-42장 22절(마 27:25)3)요셉의 눈물-42장 24절(눅 19:41)

4)그들을 벌함-42장 7, 17절(호 5:15)

5)죄를 고백함-44장 16절(호 5:15)

6)두번째 나타남-45장 1절(행 7:13/슥 12:10)

7)그들이 놀람-45장 3절(슥 12:10)

8)하나님의 하신 일-45장 8절(행 2:23)

9)“나를 보라“-45장 12절(눅 24:29)

10)은혜를 보임-45장4-15절(사54:7-8).

11)그의 영광이 나타남-45장 13절(눅 24:26)

12)형제에게 소식을 전하게 함-45장18-19절(144,000명)

13)오도록 초청함-45장 18-19절(마 11:28-30)

14)그들을 위로함-50장 21절(사 40:1-2)

15)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킴-45장 20절(사 2:1-5)"


창세기 41-45  

통치하는 요셉


 


이 부분에서는 요셉이 죄수에서 통치자로 승격되며, 새로운 이름(“비밀을 계시하는 자“/ 41:45)을 얻는다. 이 장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인 요셉이 계시하는 세 가지 비밀을 주목해서 공부할 것이다.

 

창세기 41장 



1. 바로가 꾼 꿈의 비밀(41장)


요셉은 술 관리가 자신을 기억하고 그를 위해 중재해 줄 것을 바랬다(40:13-15). 그러나 그 사람은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고 그 뜻을 풀지 못하여 마음의 평정을 잃을 때까지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지나고 난 후에 알게 되지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은 결코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늦는 일이 없다. 이 땅 위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앞에 서있을 때 보여준 요셉의 겸손에 유의하자.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6절). 그는 바로에게 7년 간의 풍년이 있은 후 다시 7년의 흉년이 이어지리라고 해몽하고는, 식량 공급을 감독할 지혜로운 자를 세울 것을 조언한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명령하여 요셉을 지명케 하신다. 그리하여 이제 요셉은 보좌로 올리워진다(벧전 5:6 참조).


요셉이 이방인 신부를 맞아 결혼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교회와 결혼하는 것의 모형인데 그의 육적인 형제들(유대인)이 그를 거절하는 동안에 이방인들(교회)이 그리스도와 결혼한다. “므낫세“는 “잊어버리는 것“을 뜻하며, 이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얻은 요셉의 새 지위가 과거의 모든 시련을 잊게 한다는 뜻임을 암시해 준다. “에브라임“은 “이중(二重)의 수확“이란 뜻으로 그의 모든 시련이 결국은 수확과 축복을 가져왔다는 뜻이다. 한 알의 밀알처럼 요셉은 “죽었던“ 것이며 그리하여 혼자 거하지 않아도 되었다(요 12:23-26). 하나님은 요셉에게 하신 말씀을 지키셨으며 요셉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여호와의 말씀은 인간의 지혜가 하지 못할 때 효력을 나타낸다(41:8).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이스라엘을 이 세상에서 보존하여 그리스도의 출생을 준비한다는 보다 더 큰 계획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창세기 42-44장     

2. 형제들의 마음에 있는 비밀(42-44장)


그 계획이 이제 작동한다. 야곱은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먹을 것을구하러 그의 아들들을 보낸다. 그들의 2차에 걸친 애굽 방문을 자세히 생각해 보자.


1)첫 방문(42절) - 열 명의 아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는데, 요셉은 이들을 알아 보지만 이들은 그를 알아 보지 못했다. 그의 모습이 20년 동안에 변했을 것이며 그가 사용하는 애굽의 언어와 옷은 형제들로 하여금 그가 애굽 사람인 줄로 믿게 했을 것이다. 열 사람이 엎드려 절했음을 눈여겨 보자(42:6). 그런데 요셉의 꿈은 열 한 사람이 절한다고 예언했었다(37:9-10). 이 일은 베냐민이 그들과 동석했을 때 이루어 질 것이었다(43:26). 이것으로 요셉은 이 열사람이 동생과 함께 다시 돌아오게 됨을 알 수 있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그처럼 심하게 굴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데 그처럼 오래 기다려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들이 죄를 회개하였음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그를 더 나쁜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다(눅 17:3-4 참조). 그가 형제들을 어떻게 다루었던가? 거칠게 말했고, 정탐군으로 기소했다(7-14절). 3일 동안 감금해 두었다가(17절) 시므온을 볼모로 잡아 그들이 보는 데서 결박했다(18-24절). 요셉의 마지막 행동은 그들의 돈을 되돌려 주는 것이었다(25-28절). 이 냉혹한 대접이 계획했던 결과를 가져 왔다. “우리가 범죄하였도다 !“라고 고백하였기 때문이다(21-23절). 이 언급은 그들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집으로 돌아와 야곱에게 보고하고 돈이 자루에 그대로 있음을 발견하자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어떻게하면 좋은가? 집에 그대로 있으면 도둑이 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면 베냐민을 함께 데리고 가는 모험을 무릅써야만 했다. 36절은 오래 전에 그들이 요셉에게 했던 일을 야곱이 알고 있지 않나 하는 인상을 준다.


2)두번째 방문(43-44절) -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배고프게 하셨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처럼 이 사람들은 다시 돌아가거나 굶어 죽을 수 밖에는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마음의 변화를 보여주는 또다른 면, 즉 유다가 어린 베냐민을 위해 기꺼이 볼모로 가는 것, 돈을 기꺼이 돌려주는 것, 요셉의 청지기에게 진실을 고백하는 것(43:19-22)을 본다. 그러나 요셉에게 선물을 가져가는 것, 요셉 자신에게가 아니라 종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 등의 실수를 저지른다.

우리는 이 전체의 이야기를 살펴봄으로써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죄인을 다루시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죄인을 자신들에게로 인도하기 위하여 환경을 조절하신다. 그러나 슬프게도 죄를 깨달은 사람들 중에는 선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 큰 희생(유다가 베냐민을 위해 자기 생명을 볼모로 제공했을 때와 같이)을 치루어 구원을 얻으려는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요셉이 그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들의 진정한 고백과 회개를 받는 길뿐이었다.

요셉은 그들이 죄를 고백하는 자리에 이르도록 하는 데 두 가지 책략을 썼다. 기쁨의 잔치(43:26-34 / 26절과 28절에서 열 한명 모두가 그에게 절하는 것에 유의하자)와, 베냐민의 자루에서 컵을 발견케 한 일이 그것이다. 44장 14절에서 다시 열 한 명 모두는 진실로 죄를 깊이 뉘우치며 그 앞에 엎드린다.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셨으니“라고 고백한다(44:16). 이 말이 요셉의 귀에 음악과 같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유다가 44장 18-34절에서 한 연설은 그 겸손과 죄에 대한 고백때문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어린 동생에 대해 보여 준 사랑 때문에도 칭찬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생명을 잃더라도 책임을 지기 위해 기꺼이 볼모가 되고자 했다.


우리는 여기서 얼마나 아름다운 영적인 교훈을 가지게 되는가 ! 유다는 요셉이 참으로 죽었다고 생각했다(44:20). 따라서 그에게는 살인했다는 죄의식이 있었다. 그는 요셉이 살아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구세주임을 알지 못했다. 잃어버린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기 죄를 고백하는데, 이 때 이들은 죄를 고백하면 어떤 진노를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고, 그가 살아계심으로 인해 가장 극한 자라도 구원하실 수가 있으신 것이다 ! 그리스도는 우리가 죄값으로 볼모가 되거나 다른 사람의 죄때문에 볼모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볼모가 되시기 때문이다(히 7:22).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한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실 수 없으시며 그리고 그는 영원히 사실 것이다.

그 형제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것은 죄의 고백이나, 희생이나, 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요셉의 은혜로운 용서였으며, 그들로 인해 받은 고난으로 값주고 산 용서였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


창세기 45장  

3. 하나님의 목적에 속한 비밀(45장)


이제는 요셉이 자신을 나타내며 하나님이 그를 보내신 목적을 나타낼 차례이다. 사도행전 7장 13절은 요셉이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 “두번째“라고 분명히 밝힌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모세를 거부하고 40년이 지난 두번째에 그를 받아들인 것과 같다(행 7:35). 이것은 스데반이 했던 설교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언제나 구세주를 거절했고 두번째에야 받아들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그러할 것이다 !


요셉이 자신을 나타내자 그들은 몹시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은 죄로 인해 요셉에게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았고, 그에게 절했으므로 그들을 용서해도 될 것을알았다. 그는 앞으로 5년 더 기근이 들 것을 설명하고, 그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애굽에 피난처를 준비해 두었음을 알렸다. 하나님은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요셉을 앞서 보내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좋은 예화가 여기 나온다 ! 요셉은 그들을 봉양하여 식물을 공급하고(11절) 보호할 것을 약속하였고, 그들을 보고 울며 입맞추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에게 선물을 보내어 애굽의 풍성함을 확인시켰다. “내게로 오라!“ 이 말은 그의 초청의 말이었다(45:18). 요셉이 살아있음을 알게됨으로써 야곱에게 생긴 변화는 어떠하였을까 ! 그리스도가 살아나셨음을 발견했을 때 보인 제자들의 변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에 야곱은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42:36)라고 했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었다."

 

 

창세기 46-50 

용서하는 요셉


이 장들에서는 야곱의 말년을 다룬다. 그가 마지막으로 몇 가지 행동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창세기 46-47장 

1. 야곱의 마지막 여행(46-47장)


믿음으로 야곱은 헤브론을 떠나 애굽으로 향한다(37:14). 하나님은 또다시 자신을 나타내시며 자기의 약속을 새롭게 하심으로 그의 믿음을 존중하신다. 야곱은 아브라함이 애굽에 가서 범죄하게 되었던 것(12:10-)과 이삭이 그곳에 가지 못하도록 금지를 당했던 일(26:2)을 잘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인을 받았던 것이다. 패망의 장소가 되었던 애굽이 축복의 장소가 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민족이 고난에도 불구하고 수가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가족이 야곱과 함께 애굽으로 여행하게 되었는데, 레아에게서 낳은 33명(8-15절), 실바의 소생 16명(16-18절), 라헬의 소생 14명(19-22절), 빌하의 소생 7명(23-25절)으로서, 야곱의 자부를 제외한 자손 66명이었다. 여기에 야곱, 요셉과 그의 두아들을 더하면 모두 70명이 된다.(출 1:5 참조) 사도행전 7장 14절은 가족이 75명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다섯 자녀를 포함시킨 듯하다.(대상 7:14- 참조)

유다는 이제 신뢰받는 사람이 되었으며 그를 지도자로서 앞서 보낸다. 그 사이에 요셉은 바로와 함께 그들의 거처와 업종을 준비하고 있다. 애굽이 오늘날의 세상 체제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자들이 그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우리 주께서 선한 목자이시니 세상은 그와 관련이 없을 것이다!


야곱은 바로를 만나 그의 긴 생애 동안 함께 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하고, 그를 축복하였다. 이 세상의 유일한 축복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13절 이하는 요셉이 애굽의 일들을 처리하는 방법을 설명하며 헌납의 본보기를 예(例)로 보여 준다. 백성은 돈과 땅과 소유물과 자신의 몸을 바쳤다(롬 12:1-2).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셨고 매일 우리를 돌보시는 그리스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야 마땅하다.

 

창세기 48장 

2. 야곱의 마지막 축복(48장)


야곱은 그의 생애 147년 중에서 마지막 17년을 요셉과 함께 애굽에서 보냈다. 따라서 그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과 처음 17년, 그리고 그의 생애의 마지막 17년을 함께 살았다. 그가 죽을 것임을 알자, 고령의 족장은 요셉을 침상으로 불러(47:31) 그의 두 아들을 축복하도록 했다(히 11:21 참조). 두 소년은 적어도 20대 초반은 되었을 것이다(41:50/47:28 참조). 야곱은 이들을 그의 장자 르우벤과 시므온의 지위에 비교하며 이들이 자기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했다(48:5/49:5-7 에 보면 시므온과 레위는 분리해 놓은 지파로서 사라질 것이므로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었다). 요셉은 므낫세가 장지임을 알리려고 야곱의 오른쪽에 세우고 에브라임을 왼쪽에 세웠으나, 야곱은 팔을 엇갈리게 얹어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었다. 이 일로 요셉은 기분이 언짢았으나 야곱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대로 했다. 하나님은 에브라임에게 더 큰 축복을 주고자 하셨다. 이것은 둘째를 세우기 위하여 첫째를 제쳐놓는 하나님의 원리의 또하나의 본보기이다(히 10:9). 우리는 전에 셋과 가인에게서, 이삭과 이스마엘에게서, 그리고 야곱과 에서에게서 이 원리를 보았었다. 야곱이 손을 엇갈린 것은 십자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은 옛 본성을 못박았으며 본성의 사람들을 제쳐두고 영적인 사람들을 세우려 하셨다.


야곱은 또한 평생에 그를 지켜 보호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요셉을 축복하였다. 그리고 요셉에게는 특별한 몫의 땅을 주었다(22절/요 4:5). 이것은 그들이 앞으로 받을 전체 유산(遺産)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창세기 49장 

3. 야곱의 마지막 멧세지(49장)


이 장은 어려운 장이며 모든 것을 상세히 다룰 수는 없다. 아들들에게 보내는 이 마지막 멧세지에서 야곱은 그들의 성격을 드러내며, 그들의 역사를 예언한다.


르우벤은 장자였고 능력과 영광을 물려받는 것이 마땅했으나, 그의 죄로 인해 그의 장자의 축복을 잃었다(창 35:22/대상 5:1-2). 시므온과 레위는 둘 다 레아의 아들들로 잔인하고 고집이 세었으며 34장에서 세겔 사람들을 살해할 때 잘 나타난다. 시므온 지파는 후에 유다 지파에게 흡수되었다(수 19:1). 레위는 제사직을 맡는 족속이 되었고(놀라운 은혜이다.) 그로 인하여 자신 소유의 유산은 없다. 민수기 1장 23절(59,300명)과 민수기 26장 14절(22,200명)을 비교하면 시므온이 수적으로 쇠퇴했음을 보게 된다.

유다는 백수(百獸)의 왕 사자로 상징되는데 유다지파로부터 율법의 수여자(그리스도)가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의로운 왕들도 유다지파출신이다. 10절은 유다가 통치권을 잃기 전에는 실로(안식 수여자-그리스도)가 오시지 않을 것을 예언한다. 예수께서 오셨을 때는 물론 이 일이 이루어졌다(로마 통치 아래 있었음-역자 주). 11-12절은 유다에게 큰 물질적인 축복이 있을 것을 예언한다. 스불론은 갈릴리로부터 지중해에 걸쳐 뻗혀 있으며 이것이 배와 연관된다. 잇사갈은 항거하거나 자유를 가지기보다는 기꺼이 다른 사람들의 짐을 짐으로써 편히 쉬게 해주는 겸손한 종으로 그려지고 있다. 단은 뱀과 협잡으로 연결되며, 이스라엘에서의 우상 숭배가 단 지파로부터 출발했음은 이상할 것이 없다. 갓은 “군대“란 뜻으로 전쟁과 관련되고 아셀은 부유함, 특히 왕을 즐겁게 하는 종류의 풍요함과 연관된다. 납달리는 놓인 아름다운 사슴과 비교되며 능력있는 언어 사용법을 알게 하겠다고 약속하시는데 사사기 4-5장에 나오는 바락의 아들과 드보라가 승리하는 것을 보자(4:6 에 유의).

요셉에 대한 축복은 가장 길다. 그는 열매가 풍성한 가지였고 그의 형제에게 공격을 당하나 결국은 승리하였다. 야곱은 요셉에게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다양한 축복을 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될 것을 확신시킨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 중의 왕자“였다(46하반절). 베냐민은 정해 놓은 사냥감을 잡아 밤에 그 먹이를 즐기는 늑대로 비유된다. 사울 왕이 이 족속에서 나왔는데 그는 정복자였고, 영적인 의미로는 바울이라고 이름 붙여진 사울이 있다.


이 놀라운 예언의 모든 세부적인 면을 눌러 짜내기는 어렵다. 역사는 야곱의 말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개인적인 책임에 대한 교훈이 들어있는 것은 확실하다. 어떤 족속들은 그 창설자의 죄로 말미암아 축복을 잃었다. 요셉은 가장 많이 고난을 받았으나 가장 큰 축복을 받았다."


창세기 50장 

4. 야곱의 마지막 요청(50장)


49장 29-33절에서 이 노인은 막벨라 굴에 그의 가족과 함께 장사지내어 줄 것을 요청했다. 거기에는 이미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 리브가, 레아가 있었고 야곱의 시신은 일곱번째로 장사될 것이었다. 야곱이 죽자 그의 아들들이 그를 위해 곡하였으며 영광스런 장례를 치루었다. 온 땅이 70일 간 그를 위해 곡한 것은 분명하며 이 기간 중 40일 동안은 그의 시신을 향료로 처리하여 썩지 않게 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성경에서 향료로 처리된 시신과 정성어린 장례식이 나오는 첫 경우이다. 야곱과 그리고 50장 24-26절의 요셉은 왜 가나안에 장사되기를 원했는가? 그 땅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땅이었고 또 그는 세상(애굽)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영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겠다. 믿는 자의 영혼만이 사후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부활 때에 몸도 이 세상에서 데려 가실 것이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가 용서했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을 믿지 않은 것은 불행한일이다. 사실상, 요셉은 그들의 불신앙과 두려워함 때문에 울었다. 그들은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두려움과 의심 속에서 살아가는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다. “두려워 말라“는 말은 요셉이 형제들에게 한 말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들은 용서를 받기 위해 일하려고 했다(“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 그러나 그는 그의 은혜를 통하여 완전한 용서를 주었던 것이다.


창세기는 동산에서 시작하여 관(棺)으로 끝난다. 죄의 결과에 대한 훌륭한 기록이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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