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학

[스크랩]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수호천사1 2016. 10. 1. 00:33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1960년대의 일이다. 12월의 어느 주일 저녁시간으로 기억된다. 천주교 명동성당이었다. 카톨릭 신부 한 분이 예배를 인도했고 개신교회 목사가 설교를 했다. 몇 분의 불교승려가 초청되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회색 장삼에 검붉은 색깔의 어깨띠를 두르고 예배당의 강단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한국 카톨릭교회가 주관했던 종교간 대화 프로그램의 하나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벌써 거의 한 세대전의 이야기인 셈이다. 이 때 일간지 문화부 기자로서 목사와 신부와 불교승려가 동참하여 진행하는 이 예배를 취재했던 나에게 이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1983-84년 연말 연시를 스위스교회연합봉사회(HEKS)의 초청으로 관광휴양 도시로 이름높은 로카르노(Locarno)에서 지낸 일이 있다. 당시 스위스 국내에 있던 모든 교회장학생들이 참석한, 이를테면 장학생들을 위한 송구영신 축하모임이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제 3세계, 아직 오늘과 같이 교류가 자유롭지 못했던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등의 동구 공산권, 심지어 시리아 등의 중동 회교권 학생들이 함께 모인 자리였다. 불어를 영어로 통역하고 이를 다시 독일어로 중역하는 등 언어소통에 문제가 많았고 유럽. 스위스 식 생활풍습을 채 익히지 못한 데서 오는 문제도 속출했다. 그러나 이 경험을 통해 종교문화적 편견을 극복 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1984년 0시, 새해 첫 시간 새해를 알리는 축포가 울리는 순간, 여기 모였던 우리들은 각기 자기들의 모국어로 새해 맞이 축하인사를 나누었다. 그때 그 감격이 아직도 새롭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새해 맞이 첫 예배를 드려야겠는데, 카톨릭교인, 개신교인, 그리고 동방교회 소속 교인들은 함께 예배드리는데 그런 대로 별 문제가 없었는데, 중동지역에서 온 회교도가 문제였다. 그들은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고 고집했다. 협의 끝에 우리는 이런 결론을 얻어냈다. ①기도문은 희랍어 원어로 읽고 ②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진리의 이름"으로 대신하기로 한 것 등이 골자였다. 안수 받은 목사였던 탓에 이 모임에서 1984년 새해 맞이 첫 예배의 축도를 맡게 되었다. "진리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진리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새해 맞이 축도의 내용이었다. 이 같은 우리의 종교환경과 관련된 크고 작은 에피소드는 참으로 진지한 의문을 제기한다.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그리스도교회의 오래된 교리적 선언이 아직도 유효한가? 라 는 도전이 바로 그것이다.
로마 성베드로교회의 한 예배실 전면에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이란 벽화가 버티고 있다. 이 그림에 의하면 주님이 재림할 때 제일 먼저 구원받는 이가 사도 바돌로매로 되어 있다. 승리자로 재등장하 는 주님 앞에 바돌로매는 바른손엔 예리한 칼을, 그리고 왼손엔 이미 벗겨진 자신의 가죽을 들고 있다. 사도 바돌로매는 공관복음서(마태10:3, 마가3:18, 누가6:14)와 사도행전(1:13)에 사도들의 이름을 거명하는 중에 단편적으로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그밖에는 그의 행적에 대해 성서는 침묵한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교회 전승에 의하면 바돌로매가 인도나 에디오피아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고, 외경은 복음전파를 하다 그가 순교당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이에 관해 RGG, Ⅰ권p.898-899). 이러한 전승을 정리, 취합하여 미켈란젤로는 바돌로매가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산채로 껍질을 벗기우고 참혹하게 순교했다는 전승의 틀을 정식화(正式化)했다고 볼 수 있다. 바돌로매의 이 모습은 그리스도만이 주님이라는 고백 그 자체다.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절규다. 이 분 외에 또 누가 그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할 수 있을지 여부를 토의할 여유가 없다. 이 바돌로매의 교회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당당하게
입밖에 낼 수 있다.
세기적인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제1권 대심판관 편에서 그리스도를 추방하는 기독교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려놓고 있다. 이야기인즉, 어느 날 스페인 한 도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신다. 그러나 재림예수는 교회관청의 정보망에 탐지되어 바로 체포된다. 곧바로 추기경 앞에 인도된다. 컴컴하고 음습한 지하실에서 심문을 당한다. 심문 후 교회관청이 내린 판결은 예수 당신이 이미 우리 교회에 모든 권리를 위임한 이상 그가 불필요하다는 것이고, 쓸모가 없으니 다시 올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
다. 예수 없이 잘 해 나가고 있는데 뭣 때문에 다시 와서 간섭하려 드느냐고 추기경은 다그쳤다. 재림 예수에 대한 교회의 처리 결정은 즉시 떠나라는 것이었다. 떠나기를 거부하면 전에는 십자가에 못박은 처형이었지만 이제는 그보다 훨씬 가혹하고 견디기 힘든, 산 체로 불에 던지는 화형에 처하겠다고 교회는 협박했다.
재림예수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어둠 속으로 추방되어 사라져갔다.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린 예수 없는 기독교의 모습이다. 분명한 것은 이렇게 다시 오시는 주님을 오히려 추방하는 예수 없는 기독교, 구원의 능력을 장악했다는 독선적인 교회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담을 자격이 없다.

Ⅰ.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요한복음 14:6): 이 말씀은 여전히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를 소극적인 방향으로 정당화하는 구절로 인용된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 인간이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한다는 것이 시간과 공간에 아무 상관이 없는, 우리의 삶에 아무 관계없는 우연한 일, 막연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현존과 진리와 영원한 삶에 대한 경험은 그러나 흐르는 물을 둑을 쌓아 가두어 놓듯 도식화할 수는 없다. 율법적으로 진리 방정식을 짜 만들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이르는 길, 진리와 생명경험을 화석화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요한복음 14:6절 말씀이 기독교복음의 특수성을 강조하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제국주의 방식의 선교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오랫동안 남용되어 왔다. 반대로 성서적 진리의 보편성을 말하고 싶어하는 측에 의해 이 구절이 교회의 필요성 때문에 교리적으로 과장, 첨가된 것으로 평가절하되기도 했다.
성서적 복음의 특징이자 강점은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그분의 지상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역사적인 진리라는 점에 있다. 동시에 이 진리는 지금 역사 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된 성령에 의해 새롭게 들려지고 새롭게 이해되어야 하는 복음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기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이분을 통하지 않고는 신의 현존경험이나 영원한 생명의 선취 같은, 진리의 보편성을 차단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예수는 당신들, 집 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이 분을 힘입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이름은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들 가운데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사도행전 4:11-12):이는 명백히 성서적 복음은 역사적 인물의 구체적인 삶과 관련되어 있다는 기독교진리의 비교 불가능한 특수성을 말하는 것이다. 베드로사도 자신이 행한 "예수-구원"에 대한 변증적 결론이다. 우리가 경험했던 역사적 인물 예수의 이름만이 구원의 능력이 있다는 선포다.
사도행전의 이 단락은 분명히 성서적 복음의 절대적 특수성을 말하고 있다. 기독교복음을 규탄하고 밀어내려는 유대교와의 대결에서 상대화될 수 없다는 초기 사도공동체의 몸부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음의 비교 불가능한, 역사적 예수와 관련된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까닭에 "예수-구원"에 관한 복음은 종교욕구의 충족이란 의미의, 종교적 방식이나 신비적인 접근에 의해서는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이 차단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C. K. Barrett,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 주석 32/2, 한국신학연구소 1985, p.288)이기는 해도, 그러나 초기교회에 대한 살인적인 박해가 계속되고 있는 중에도 베드로의 고넬료 전도(사도행전 10:1-43)라는 새로운 선교의 장을 열어가던 사도적 초기공동체가 복음의 보편성을 편협하게 차단하려 했을 턱이 없다.
우리가 아는 대로 누가복음은 특히 "역사적 관심"이 다른 복음서에 비해 크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구속사의 중심으로 보면서 동시에 역사적 예수를 "세계사와 관련"시킨다(누가 2:1, 3:1, 이에 관해 C.베스터만, 성서입문, 한국 신학연구소간 1985, p.310-311). 누가 복음의 속편이기도 한 사도행전은 이와 같은 누가의 신학을 철저하게 관철하고 있다. 4장 11-12절에서 읽을 수 있는 대로 사도행전은 "나사렛 예수가 구원의 기초"임을 타협의 여지없이 강조한다(김철손, 사도행전, 대한기독교서회 1959, p.85). 동시에 사도적 복음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간다(2:1-13). 종교의 편견을 극복한다(10:1-43). 민족적 장벽을 뛰어넘는다(8:26-40).
사도행전적 증언은 성경의 복음이 나사렛 예수라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한 인물의 삶과 관계가 있는 그 특수성을 양보하지 않는다. 동시에 모든 장벽을 넘어가는 복음의 보편성, 곧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인간구원의 세계사적 의미"를 간과하지 않는다(C. 베스터만, op,cit., p.337 참고). 이런 구도에서 사도행전 4장 11-12절의 단락은 "예수-구원"에 대한 성서적 복음의 특수성을 말하는 것
이지 기독교적 사신의 보편성이나 개방성을 차단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사도서신에서도 그대로 어진다. "하나님께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삼으셨으니 아무도 이 기초 이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고린도전서 3:11)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구절을 C. K.바레트는 "교회의 기초는… 나사렛 예수가 메시야라는 고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는 것"(C. K. Barrett, 고린도전서, 한국신학연구소 1985, p.113)으로 이해한다. 이에 따르면

첫째, 성서적복음, 교회의 기초는 철두철미 지상의 삶을 경험하신 나사렛 예수에 근거하고 있다는 타협의 여지없는 특수성을 갖는다. 둘째는 그러나 성서적 복음 교회의 기초는 사도들의 고백 내지는 어떤 무엇에게도 예속될 수 없는 개방성과 보편성을 갖는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의 특수성이 상대화되지 않는다. 동시에, 나는 "바울편이다" 또는 "아볼로편이다", "게바편이다"(고린도전서 4:12)라는 등식의, 복음을 교조적인 방식으로 화석화하는 것을 차단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바울 자신이 스스로를 이방선교를 위한 사도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스도가 교회의 기초라는 바울의 증언을 성서적 복음의 보편성을 폐쇄하는 구실로 남용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복음의 특수성에 대한 강조일 뿐이다.

Ⅱ.
"Salus extra ecclesiam non est"(extra ecclesiam nulla salus)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라틴 교부의 한 분인 카르타고의 감독 C. 키프리아누스(Caecilius Cyprianus)의 말이다. 이어서 그는 "교회를 어머니로 갖고 있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고 했다(참고: J. L. Neve, 서남동역, 기독교교리사, 대한기독교서회 1965, p. 132). 이러한 키프리아누스의 교리적 선언은 그의 진정한 의도가 어떠했든 "사도적 로마 교회밖에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식으로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로마 교회의 가시적이고도 교권적이 체제"에 묶어 놓는 사태를 빚어냈다(W. Niesel, 이종성. 김항안역, 비교교회론,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p.72). 그러나 니이브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는 키프리아누스의 말은 "개인이 교회 밖에 있으면 정통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구원을 보증해 줄 수 없다"는 의미로 파악한다(J. L. 니이브, ibid). 즉 "교회만이 구원을 보증한다"고 할 때, 이는 인간구원의 능력을 교회가 독점한다는 뜻이 아니라, 공동체 신앙이 아닌, 사적인 신앙을 경계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세례받은 성도공동체를 지향하는 공속성(Zugehorigkeit)이 구원의 기본전제"라는 견해도 있다(RGG, Ⅲ, 3판, 1959, p.1306).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강조하는 시각이다. 특히 E. 스테헬린(Ernst Staehelin)은 키프리아누스의 교회론의 진의는 "(교회의)분열에 저항, 보편적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는 데 있다고 이해한다(Ernst Staehelin, Die Verkundigung der Reiches Gottes in der Kirche Jesu Christi, Ⅰ.Bd., Basel 1951, p. 198).이상의 의견을 염두에 둔다면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선언이 교권을 고집하고 확립하는 구실로 남용되는 것을 지지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명제가 교회의 공교회적 성격을 지지하고 공동체의 분파적 분열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는 교의라면 이에 대한 긍정적인 재검토가 무의미한 일일 수만은 없다.
어쨌든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의는 이를 선언하고 지지한 교부들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든 "로마교회 교황권 확립의 기초"를 제공한 것이 (J. L. 니이브, ibid)사실이다. 이는 14세기에 와서 교황무오설 교리로 굳어지고, 19세기에 와서 재확인 강화되었다. 주님이 그 분의 교회에게 허락한 "무오성을 교황이 소유한다"는 이 로마교회의 교황 무오설 교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심하게 "오해와 반감"을 받아왔는지는 재론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에 대한 로마 천주교회의 접근방식이 달라졌다. 달라져도 크게 달라졌다. 1959년 오순절에 개막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부터의 일이다. 이 공의회는 교황과 교회와의 관계를 검토한 끝에 교황의 무오성을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신도공동체는 믿음에 있어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고 선언했다.(이에 관해:J. Feiner, L. Vischer, 하나의 믿음, 분도출판사 1979, p.612). 이어서 교리의 무오성을 말할 때 이는 "무오성의 특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로 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류 없이 가르친다"는 교회의 교육적, 선교적 사명에 대한 강조를 재해석했다(ibid.). 무엇을 위한 무오성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이 공의회는 교황무오성을 "교회는 멸망할 수 없다", "진리의 영은 교회를 떠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교회의 불멸성", 다시 말해서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무오성"이라는 대답했다(op. cit., p.613). 교황무오설을 교회는 항상 진리 안에 머문다는 기본사실"로 이해하는 한스 큉(Hans Kung)의 견해는(op. cit., p.614)로마 교회의 빠른 변화를 실감케 한다.
교황무오설을 놓고 벌인 세계교회 차원에서의 신. 구교간의 에큐메니칼 대화는 다음과 같은 공통의 이해를 끌어내기에 이르렀다.:"절대적인 무오성은 하나님에게만 고유하다. 하나님의 약속에 힘입어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의 무오성에 참여한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교회를 진리 안에서 멸망하지 않게 지켜준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개신교적 언어로 정리한다면, "무오성이란 언제나 성령의 은혜이지 결코 교회자신의 소유가 아니라"는 마과 일치한다(op. cit., p.617). 이렇게 교황무오의 근거가 성도공동체의 무오함에 있는 것이라면, 성도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무오성이 항상진리안에 바로 서 있어야 한다는 종말로적 성격을 의미한다면, 이 무오성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항상 새롭게 받아야하는 은혜의 선물이라면,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명제가 더이상 교권적 교회로서의 교황 무오성을 뒷받침하는 교의가 아니라면, 교회의 일치와 공동체성을 지지, 강조하는 것을 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해방과 구원을 증언하고 실천하지 않는 교회는 바로 이 일을 위임한 그분의 교회일 수 없다는 종말적 성격을 담고 있는 것이라며는 이와 같은 성경의 진리에 대한 교회의 확증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항상 새롭게 주어지는 것이라면,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적 명제는 오늘날과 같은 세속화된 사회에서 성서적 복음의 해체에 가까운 상대화를 저지, 이의 보편성을 다치지 않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해방이라는 비교 불가능한 복음의 특수성을 진술하는 틀로서 유효할 수 있다.

Ⅲ.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대화는 그 동안 세계교회 차원에서 WCC의 주도아래 진지하고 심도 있게 진행되어 왔다. 특히 개혁교세계연맹은 총회 권고에 따라 유대교 및 이슬람교와의 대화를 시도했다. 대화의 결과는 대안을 얻어냈다기보다 문제를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는 표현이 온당할 것 같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슬람을 보다 깊이 이해해야 한다는 절박성이 분명해졌다"는 보고와 함께 "하나님의 목적의 보편성과 관련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유일성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됐던 것이다(이에 관해: 개혁교세계 연맹 서울대회(1989.8.15-17)보고서, 대한기독교서회 1989, p.400).
타종교와의 대화 내지는 종교다원론에 관한 논의가 최근 몇 년 사이에 국내 교계와 신학계의 주요 주제가 되고 있다.「다원주의적 종교신학운동」이 조직교회와의 갈등을 빚는 가운데 도도히 흐르고 있다. "하나님은 오직 기독교인들의 기도만 들으시는 기독교인만의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한다. 타종교는 이제 "선교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주체"라는 입장이다(변선환, 신학의 과제로서의 한국종교, 종교다원주의와 신학적 과제, 대한기독교서회 1990, p.5). 종교적 다원주의의 현실이 바로 "신학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op. cit., p.6). 다원론적 종교신학이 한국교회의 신학계에 던진 가장 뜨거운 주제는 그리스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서 신중심 주의를 지향하자는 제안이다(이에 관해: 변선환,「타종교와 신학」,역사와 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86; 이정배, 다원주의 기도론과 토착화신학, 복음과 문화, 대한기독교서회 1991, 등의 논문을 참고할 수 있다).
그리스도 중심에서 신중심으로 전환하자는 한국적 종교신학의 제안은 이것이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의 십자군적 정복적 태도"(김경재, 생명해방의 연대 전선에서 종교간의 대화, 복음과 문화, 대한기독교서회 1991, p.388)에 대한, "타종교들에 대해서 절대성과 우월성을 자부해온 보수적 한국그리스도교에 대한"(박순경, 타종교와 신학에 대한 응답, 역사와 신학 1986, p.202-218)비판이라면 긍정적이다. 그러나 종교신학이 제안하는 신중심주의가 "모든 종교들의 종합가능성을 막연히 전제"하는 것이라면, 이는 "범신론에 귀착해 버리거나… 개념론적 추상성에 머물러 버리게 된다"(박순경, op. cit., p.206)는 비판에 대해 진지하게 응답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스도 중심주의 신중심주의로 지향하자는 종교신학의 제안을 교권적 동기에서 예수 없는 기독교의 재편쯤으로 매도하는 것은 진지한 태도가 아니다. 그리스도론과 신론을 별개의 것으로 분리하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교의학적 질의는 중요하긴 해도 이에 대한 논의는 뒤로 미루어 둘 수 있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샤머니즘적 영성과 불교적인 문화와, 유교적인 윤리에 둘러싸인 우리사회 우리문화 속에서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과 해방의 복음을 증언하고 실천하는 일이 이제는 의미 없는 일이냐 하는 점이다. 이 에 대해 대를 이어 친숙한 관계에 있는 기존의 재래종교가 말하는 종교적 상식을 승인하고 받아들이고 따라 살면 되지 무엇 대문에 또 예수그리스도에 의한 그 복음이냐? 고 답한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된다. 오늘 우리 교회의 목회적 현실은 이런 식의 대안에 쉽게 동의해 줄 분위기가 아니다.

Ⅳ.
1985년 10월 7일, 바젤대학의 W. 비더(Werner Bieder)교수와 바로 이 문제,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제를 놓고 학문적 대화를 나눈 일이 있다. 이 때 그와 나눈 대화의 골자는 이런 내용이었다 : "땅을 파고 들어앉아 적을 향하여 기관총탄을 쏘아대는 토치카(벙커)와 같은 교회는 바른 교회가 아니다. 기동력 있는 천막이 바른 교회의 표상인데, 천막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계 안에서 가난한 자와 권리를 박탈당한 자를 위해 자신을 소모하는 교회이다." 이에 비더교수는 바로 전날 L. 보프(Leonhardo Boff)신부가 이곳 텔레비전 대담에서 한 말을 인용하면서 바로 천막교회는 하나님나라의 보이는 표징이고 무오함(Unfehlbarkeit) 을 주장할 수 있는 교회라 했다. 그 때 그 대화에 지금 한마디 덧붙인다면, 하나님나라의 보이는 표징으로서의 천막교회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다가 산채로 껍질을 벗긴 바돌로매 교회만이 이 말을 할 수 있듯이 말이다.
K. 바르트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을 "그리스도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로 바꾸기를 제언한다. 그러나 "교회가 선포하는 봉사를 실천해야 한다"는 점에서,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신앙이 불가능하다. 구원을 인식할 수 없다"고 말한다(K. Barth, Die Kirchliche Dogmatik Ⅳ/1, p.769;770).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적 선언이 계시와 자연, 하나님 나라와 세상, 그리스도 교회와 일반 다른 종교를 과격하게 분리, 성서적 복음의 우월성을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구실로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의 진의가 이를 허락하지 않겠기 때문이다. 교회만이 수행할 수 있는 "예수-구원"에 대한 증언의 당위성 대문에 진리의 이름으로 회교도와 만나는 것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생명해방전선"(김경재, op. cit., p.409)에서 불교도와 전우가 되는 것을 마다해서
는 안 된다.
반면에 진리의 이름으로 타종교인과 생명해방전선의 전우가 되기 위하여 교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예수-구원"에 대한 증언과 실천을 상대화시킬 이유가 없다. 오히려 복음을 세속적 필요성 때문에 할인, 방매하는 오늘의 사회에서, 인간적 의도에 맞추어 복음을 쓸모 있게 다듬어 실용화하는데 길들여진 문화환경 속에서,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고백은 여전히 유효한 명제가 될 수 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우리의 독특한 구원과 해방의 진리를 증언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말이다.
오늘의 복음증언과 실천이 "반종교적 그리스도교 신학"이 형성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 동시에 타종교와의 대화 내지는 만남을 위하여 그리스도론의 특수성을 상대화하거나 해체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리스도론의 특수성이 타종교와의 만남을 위한 장애물이 될 수 없기 대문이다. 바로 이 한계만 지킨다면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적 명제는 유효한 것이 된다.
"예수-구원"을 증언하다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학대를 받으며… 이 세상의 폐물같이, 인간의 찌꺼기같이" 살았다(고린도전서, 4:11-13). 지금도 복음의 사회적 증언에 나섰다가 육신이 톱날에 의해 토막나는 이상의 고통을 당한 동역자들이 있다. 그분의 강단을 위해 "제물"이 된 끝에 넘어져 신음하면서도 그래도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살다 죽겠다는 복음의 동지들이 어디 한두명이든가! 이렇게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킨" 복음의 용사들이 "숨질 때 되도록"부르짖어 말할 수 있는 고백은 이것이다: "하늘아래 이 이름"예수그리스도를 바로 증언하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정권모박사 (기장 신학연구소장)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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