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자료

[스크랩] 성경이란 무엇인가?

수호천사1 2016. 9. 15. 23:42

성경이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기독교의 존재는 성경을 떼어놓고는 불가능하다. 그 근거는 성경 자체의 증거이다. 경전이 없는 종교는 미신이다. 경전일지라도 살아있는 전능자의 말씀과 인간 교주의 말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내용의 깊이만이 아니라 인간사 전 영역과 내세의 세계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 차이는 누구도 좁힐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구약의 토라만 보더라도 하나님이 모세에게 일러준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한다. 선지자들의 말을 담은 선지서의 내용 그 자체가 이를 증명한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을 전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특별히 가죽에 쓴 글들도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언급하신 것들이 다 이를 증명한다(마 1:22, 마 2:5, 15, 17, 23). 주님께서 즉 만군의 주 여호와께
서 다 선지자들을 통해서(δια)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신 것이다. 선지자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수단 혹은 통로로 사용된 것임을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성경의 사례를 보면 선지자 이사야 혹은 다윗이 말한 것처럼 언급하여서 마치 그들이 주체자임을 묘사하는 경우도 있다(마 13:14, 15:7, 22:43.45, 행 1:16, 28:25).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하심에서 나온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인간적인 요소들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서 신적 요소를 ‘제일 저자’라고 하고 인간적 요소를 염두에 두고 ‘제 2 저자’ 혹은 ‘인간 저자’라고 구분은 하지만1) 성경 전체가 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제 2 저자에 해당되는 인간들이 스스로 발상하거나 연구하여 낸 창작물이 아니라 그들에게 역사하신 성령의 감동하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한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이를 말하고 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따라서 자연스럽게 성령의 감동하심이 무엇인지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성경의 영감론(Doctrine of Inspiration of Scripture) 라고 부른다.

 

성경의 신적 기원: 영감론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라고 선언하였다. ‘성령의 감동하심’이나 ‘하나님의 감동하심’이나 다 같은 의미임을 논할 필요는 없다. 삼위일체 신앙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라면 이를 부정하고 나설 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동하심’이라는 ‘테오프네우스토스’(θεοπνευστος)라는 헬라어는 무슨 뜻인가?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호흡하셨다’ 혹은 ‘하나님에 의해서 숨을 내쉬셨다’는 말로 이해한다.2) 즉 하나님의 영이 임하신 것이요 선지자들 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뜻한다. 이것이 베드로가 지적한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는 부연설명이 되는 이유이다. 우리 말 성경은 언뜻 보면 사람들에게 성령의 감동하심이 임한 것처럼 이해될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존재하나 헬라어 원어의 설명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말한 그 내용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 기록자가 영감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내용 즉 ‘성경이 영감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들이 한 말은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을 통해서 나온 말씀이요 성령 안에서 그 말씀이 기록된 것이다.이것이 딤후 3:16절이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성령 하나님께서 특정인들을 감화하사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고 그들이 무엇을 기록해야 할 것인지도 감동하심으로 알게 하셔서 정확무오하게 기록하도록 이끄셨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 자신이 무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입에서 나온 말씀도 오류가 없는 참 진리인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성경의 저자들이라 할 수 있는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 ‘새로운 종교, 윤리적 일신교의 창시자들이 아니라’는 말이다.3) 전적으로 하나님의 작품이다. 특히 오경의 율법들에게서나 선지서들에게서 매 순간 찾아지는 공식적인 문구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가 성경의 신적 기원을 부정하지 못하게 만든다. 더욱이 신약에 인용된 구약성경 자체를 보면 신약의 저자들이 신적 기원과 권위를 지닌 작품들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기록되었으되”4) 혹은 “성경에 이르기를”5)이라는 문구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외에도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라든지, ‘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등의 문구도 있다. 복음서들만이 아니라 바울 서신이나 히브리서 등에서도 같은 의미의 문구들이 자주 인용되고 있음이 신적 기원과 권위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6)


이 같은 현상에 대해서 바빙크는 ‘예수와 사도들에게 있어서 구약성경이 다양한 책들과 다양한 기록자들로부터 비롯되었다 할지라도 단 하나의 유기적 통일성을 형성하여 하나님 자신이 저자임을 드러낸다’고 해석하였다.7) 예수님의 말씀 역시 예수님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그 기원을 찾는다(요 3:32).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히 1:2). 그의 증거가 참되다고 스스로 강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요 8:14). 더 나아가서 선지자들 혹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그리고 사도들의 입과 글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을 언급하고 있는 성경의 교훈은(e.g. 마 1:22)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분임을 명확하게 증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에 대해 전치사 ίπο(~에 의해)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실제적인 주체임을 말하는 것이다.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은 하나님의 도구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언급하고 있는 전치사는 δια+속격(~을 통하여) 형태가 쓰이고 있지 결코 ίπο가 쓰이지 않았다. 이처럼 ‘하나님 혹은 성령이 실제적으로 말씀하시는 분이고 정보 제공자이며 원저자인 반면 기록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말씀하는 도구이며 제 2 저자들이고 기록자들이며 서기관들인 것이다.’8)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갈 것은 성경의 ‘영감(inspiration)’은 성령의 ‘조명(illumination)’과는 구별된다는 사실이다.9) 영감이나 조명은
다 같이 성령의 사역이지만 영감은 성경의 기록과 관련된 것으로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한 성령의 역사이지만 조명은 이미 기록된 말씀을 성령의 비추어주심으로 인하여 잘 깨달아 알게 하는 일이다(요 16:13, 엡 1:17-19, 요일 2:27). 아더 핑크는 그의 책 성령론에서 신적 조명하심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신적 조명하심은 성령께서 이미 깨어있는 영혼에게 신적인 것들에 대해 정확한 영적인 이해를 가지게 하는 것이다.’10) 이렇게 성령께서 영혼에 빛을 비추어주실 때 그 계시된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죄악성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나 말씀의 신령한 의미들을 잘 깨닫게 하고 수용하게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이 참된 진리임을 확정케 하고 믿게 하여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감을 가지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영감하고는 달리 조명하심은 우리 자신의 죄성으로 인해 비춰주심을 받아 알았더라도 오류에 빠지거나 온전하지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따라서 성령의 조명하심은 지속적으로 필요하나 영감은 성경의 기록 완성과 더불어 종식된 것이다. 즉 성령은 이미 주어진 성경 외에 뭔가를 덧붙이기 위하여 새로운 계시를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른바 영감의 범위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의 인간 저자들이 다 단지 받아 적는 로봇의 역할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생명이 없는 나무 막대기로 취급하시지 않고 이성적 존재와 도덕적 존재로 대우하시는 것이다. 즉 개혁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은 영감의 범위가 성경의 중요한 내용만이 아니라 인간에게 알리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펼치시기 위하여 사용된 모든 단어들과 역사적 사건들까지도 다 영감으로 선정되고 사용된 것으로 믿는다. 이것은 과학적 논증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신앙고백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눈으로 접하는 모든 것들이 과학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충분히 증명이 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설사 의혹되는 것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작품이요 하나님의 말씀임으로 참된 것임을 믿는다. 왜냐하면 거짓을 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이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한 지식을 계시하신 것이고(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그리고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11)
이러한 성령의 ‘영감’을 우리는 일명 축자적 영감설(inspiratio verbalis-verbal inspiration) 및 유기적 영감설(organic inspiration)이라고 말한다.12) 한마디로 성령의 감동하심의 역사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서 헤르만 바빙크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기록과정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이란 기록자들의 인간적 의식을 출생, 양육, 자연적 재능들, 연구, 기억, 숙고, 인생 경험, 계시 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준비한 이후, 기록하는 과정 자체에 있어서 신적인 생각을 온갖 지위와 형편, 온갖 민족들과 모든 세기의 사람들에게 최선의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생각들과 단어들, 언어와 문체로 그들의 의식가운데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그 생각들에는 단어들이 포함되고 그 단어들에는 모음들이 포함된다.’13)
그러나 성경의 원 저자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해서 성경에묘사된 다양한 학문적 영역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의 의도와 목적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것이다. ‘성경은 오로지 신학의 기초 원리이며...성경을 중심으로 한 모든 학과목들에 있어서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에 관한 구원의 지식이다. 성경은 이를 위해 필요한 모든 정보들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전적으로 충분하며 완전하다’는 바빙크의 주장은 틀린 것이 것이다.14)


성경의 충족성(The Sufficiency of the Bible)


성경의 충족성(sufficientia)은 무오성과 더불어 뗄 수 없는 특성이다. 이것은 성경이 백과사전처럼 독자에게 필요한 모든 정보를 다
제공해 준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특별히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비추어볼 때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주어진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하는데 충분한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혹은 인간의 구원을 해결하기 위해서 얻을 수 있는 필요 충분한 지식은 성경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어떤 상상이나 사사로운 방안도 심지어 가톨릭교회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는 전통도 여기에 첨가될 수 없다. 성경은 우리가 알아야 할 신지식(神知識)과 구원에 이르는 참 지식을 알게 하는 일에 100% 충분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본성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일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권능이 명백하게 나타나 있어서 사람이 핑계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충분히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여러 때에 여러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며 그의 뜻을 교회에 선언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리고 후에는 진리를 잘 보존하시고 전파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육체의 부패와 사단과 세상의 사악함에 대항하여 교회를 더 견고하게 세우시고 위로하시기 위하여 그 진리를 온전히 기록하게 하셨다. 이것이 성경을 가장 필요로 하게 만들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 방식은 종식된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 믿음과 생활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과 관련한 하나님의 전 경륜은 성경에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거나 선하고 필연적인 결과에 의하여 성경에서 추론할 수 있다. 이 성경에는 어느 때를 막론하고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이든 인간의 전통에 의해서든 아무 것도 추가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에 계시된 것과 같은것들에 대하여 구원받는 것들에 대한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내적 조명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교회의 정치, 인간의 행위들과 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특별한 상황들이 있음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상황들은 언제나 순종해야 할 말씀의 일반적인 규범에 따라 본성의 빛과 그리스도인의 분별에 의해서 규정되어져야 할 것이다.15)
본 고백서의 요지는 이렇다. 소위 일반계시로는 하나님을 아는 일과 구원의 길을 찾기에는 불충분하다. 물론 신적 존재에 대한 부정을 용납하지 못하는 근거가 될지라도 일반계시 자체로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 하나님을 아는 길을 보여주셨으며 가르쳐주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기록된 그 말씀 안에서 찾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기록된 목적(요 20:31)과 성령의 감동하심의 의도측면에서 볼 때 신구약 성경은 그 자체로도 충분한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내포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럴지라도 성령의 조명하심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령한 것은 오직 신령한 것으로만 이해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경의 목적과 의도는 그 내용과 가장 긴밀하게 연관되기 때문에 그 의도하신 목적 달성을 위한 충분성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복음 전하는 자들과 목사와 교사를 주신 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함이다(엡 4:12). 그런데 주의 일군들이 무엇을 가지고 성도를 온전케 할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모든 성경 66권이다. 그 성경만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는” 말씀인 것이다(딤후3:17). 성경은 인간이 필요로 하는 과학적 지식 혹은 수학적 지식 또는 천문학적 지식 공급을 위한 책이 아니기 때문에 혹 그러한 척도로 성경을 판단해서 오류 혹은 불충분성을 내세우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구원에 이르는 참 지혜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규정해주는 유일한 잣대이다.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하며 지켜져야 할 것들은’ 성경에서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고 밝혀져 있는 것이다.16)
그렇다면 정경(Canon)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신구약성경 66권만이 정경임을 무슨 근거로 교회는 고백하고 있는가? 로마 가톨릭은 일명 ‘외경’(apocrypha)도17) 정경에 포함시키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외경을 이렇게 정의한다:
‘보통 외경이라 불리는 책들은 영감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전의 일부가 될 수없으며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어떤 권위도 행사할 수 없다.’18)
외경을 정경에 포함시키지 않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히브리어 성경에 포함된 일이 없다. 둘째 그리스도나 사도들에 의해서 인용된 적이 없다. 셋째는 초대교회 교부들이 작성한 정경 목록 속에도 포함된 적이 없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되었다는 증거가 전무한 것이기 때문이다.19)
그러나 정경은 로마가톨릭이 주장하는 것처럼 공의회의 결정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교회는 성경의 정경을 인정하고 받아드리고 그것에 복종할 뿐이다. 그리하여 공의회가 사용한 단어는 라틴어의 ‘recipimus’ 즉 ‘우리는 받아드린다’는 단어를 선택하였다. 바빙크는 이렇게 인용하고 있다: ‘정경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단번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점차적으로 영혼과 시간의 통치자이시 하나님에 의해서 산출되었다.’20) 물론 신구약 책들에 대한 정경성을 어떤 원리들에 근거하여 교회가 결정한 것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신약의 교회들안에서 그 책들이 어떤 ‘공식적인 약속도 없이 자연스럽게’ 정경으로 자리매김을 했다는 사실이다. 즉 그 글들이 언제, 어디서 처음으로 권위를 얻었는지 지적할 수 없지만 성경의 정경성은 ‘그 글들의 존재에 근거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인용한 글들과 초대교회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책들과의 내용상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서 바빙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들의 권리’(Jure suo)로 그 권위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 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록하는 것을 지도하고 그 글들이 교회에서 인정받게 한 이는 바로 주의 영이다.’ 2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경의 권위는 어떤 인간의 증언이나 교회의 증언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한다. 하나님께서 이 성경의 저자이시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믿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22)
신약의 교회는 처음부터 성경과 함께 존재했다. 교회는 사도들의 손에서 구약성경을 받았고 그것이 곧 신적 권위로 주어진 경전으로 받은 것이다. 이 성경을 연구할수록 그리고 성경의 교훈하심을 열심히 순종할수록 하나님에 대하여 믿어야 할 모든 것과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의미에 대하여 성경이 충분히 설명하고 있음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것은 특히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성경에 기록된 것들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말씀하셨고 행하셨지만 기록된 부분만 우리에게 전달된 것은 성도들이 믿어야 할 것들, 구원에 필요한 것들을 완전하게 포함한 내용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의 교회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입으로는 고백하나 실제 행위로는 성경의 충족성을 부정하고 있다. 물론 교회의 조직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관습들과 의식들과 규정들 및 규칙들을 성경이 다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신앙에 필요한 조항들은 성경에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자료의 도움이 없이도 ‘오로지 비교 연구와 숙고를 통해서 성경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다.’23) 이것이 성경의 충족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근거하고 있지 않은 수많은 것들을 교회는 속속 수용하면서 인간의 교훈을 따라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존자이신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규례대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점에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지식을 충분히 소개해주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제도와 예배에 대한 규례, 교회 회원권과 직분자, 복음 전파 방법론 등 기록된 말씀에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들이 교회의 관습 혹은 사람들이 선호한다는 명목 하에 하나님의 일들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초대교회와 중교개혁자들의 교훈은 기록된 말씀 외에 결코 다른 어떤 것에도 주시하지 않았다. ‘교회는 항상 주어진 시기에 현존하는 성경에서 매번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해왔다.’24)
성경에 기록되어지지 않은 예수의 말씀, 성경에 남아있지 않은 사도들의 가르침이 설혹 발견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일지 몰라도 신앙적으로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아니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성경에 만족하기에 비록 예수 자신에게서 유래된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다른 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가르침이었다. 계시는 양적으로 성경이 보전했던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많았으나 질적으로, 실질적으로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완전히 충분하다.’25) ‘성경은 시작한 곳에서 종결된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오심은 주어진 계시에 어떤 새로운 무엇을 덧붙이려고 함이 아니라 교회를 진리가운데로(요 16:13-15) 인도하여 모든 차이를 통과해 신앙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하나 되게 만드시기 위함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것은 특별계시 전달 방식은 이제는 완전히 종결되었다는 사실이다(히 1:1-2).26)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대한 최종적이며 최상의 계시이다. 그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이다.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 교회는 언제나 그 말씀 외에 다른 것에 주목할 필요가 없다. 새로운 계시나 교리가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것 외에도 더 많은 것을 말씀하셨고 사도들 역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 보다 더 많은 것들을 가르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기록된 계시인 성경만이 우리의 구원과 삶을 위하여 완전하고 충분한 진리임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성경의 충족성은 이처럼 자연스럽게 성경의 권위 문제를 다루게 한다.


성경의 권위(The Authority of the Bible)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지적하고 있듯이 성경에는 권위가 있다. 이 권위는 인간이나 교회의 증언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권위의 출처는 전적으로 진리이신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 마치 왕의 어명 그 자체가 권위가 있는 것이지 그 어명을 전달하는 사신의 지위나 인격에 달려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바빙크는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신자들의 선행 공로로 보충될 필요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말씀은 교회의 전통으로 보충될 필요가 없으며 그리스도 자신은 교황에 의하여 계승되거나 대체될 필요가 없다.’27) 누군가가 개신한다고 해서 그의 말씀의 권위가 더 품위 있고 위용 있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충분하다.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께서도 이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각각의 성도들에게 적용하며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 성령께서는 그 일을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일군들을 통해서 확정하신다. 구약시대에 선지자들과 신약시대의 사도들을 사용하신 성령은 기록된 말씀을 보존하시고 증거케 하시어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구원의 완성을 적용해 가신다. 그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점점 흥왕케 되는 것이다. 교회의 전통을 성경의 권위보다 더 우위에 두었던 중세교회의 비성경적 가르침들을 타파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게 했을 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전통과 관습이 다 성경의 최고 권위를 넘지 못함을 남겨주었다. 바빙크는 종교개혁자들의 유산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성경은 설교, 신앙고백, 예전, 예배, 신학, 종교적 문학 등에 지속적으로 생존하는 모든 전통이 자라나고 길러지는 하나의 유기적 원리였고 모든 종교적 삶의 샛강들과 물줄기들이 양육되고 유지되는 순수한 생수의 원천이었다. 그와 같은 전통은 성경 자체에 근거한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완수했을 때 성령을 보냈다. 그 성령은 실로 계시에 어떤 새로운 것을 덧붙이지 않을 것이며 교회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여 모든 차이를 통과해 신앙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하나 됨에 이르게 할 것이다.’28)
따라서 성경기록자들과 설교자의 권위는 그들의 인품과 학식 및 선한 공로들이 출중한 사람들 자체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손으로 그리고 입으로 나타낸 산물 그 자체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자체 권위를 가지게 한다. 그리고 그 권위는 수신자 혹은 설교자의 도덕적 성결함을 낳게 하고 그 열매가 성경 진리를 더욱 신뢰할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설교자의 흠결이 있다고 해서 그가 선포하는 진리의 말씀 까지도 흠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반대로 학식 있고 덕망 있는 어떤 사람이, 혹은 종교적인 위용을 지닌 사람이 성경이 진리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성경이 참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무게 있는 사람도 결국은 성경에 의해서 판단되어질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부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성경의 권위가 인간의 재량에 달린 것처럼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주장대로 하면 성경이 살아남을 여지는 거의 사라지고 만다. 왜냐하면 인간이 규정하는 범위란 언제든지 요동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권위 역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 최근에 아일랜드에서는 국민투표를 통해서 동성연애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되게 하였다. 성경에 반하는 명백한 잘못이지만 성경의 완전성과 충족성을 부정하는 무리들 앞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결정이 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최종적인 진리라고 믿는 어떤 권위에 근거해서 사고하고 행동한다. 이것은 유한한 인간에게는 필연적인 사고방식이다. 권위란 일반적으로 누군가가 어떤 것을 말할 수 있는 권세, 어떤 문제에 있어서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권리를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자신의 최종적인 권위가 무엇인가에 따라 행동방식이 결정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이유와 행동하는 이유가 더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세상의 유행과 관습이나 국민들의 생각이 최종 권위가 아니라 성경이라고 분명히 고백한다면 사람들이 만들어 낸 어떤 전통이나 관습이 다 영원한 진리인 성경에 의해서 판단되어져야 한다. 성경이 주어진 목적과 주어진 동기나 고과정과 그 내용이 그 어느 것 하나도 인간적인 기준에서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그것은 그 성경의 원 저자이신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먼저 성경이란 용어는 그들이 이미 영감된 책으로 믿었던 구약(딤후 3:16, 롬 3: 2)과 신약(벧후 3: 16)의 거룩한 책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란 표현은 기록된 형태의 신구약 모두에 대해 사용되었다(마 15: 6, 요 10: 35, 히 4: 12).
이들 각각의 용어는 “뛰어난 책”,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시를 기록한 유일하고도 공인된 책”을 가리키고 있다. 한편 헬라어를 사용했던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성경을 “타 비블리아”즉 뛰어난 책들이라고 불렀다. 그 후에 문헌들의 총체를 가리키는 단수인 “Bible”(책 또는 두루마리의 뜻)을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데 사용한 사실은 이 성경이 하나님의 확실하게 증거한 다양한 문서의 선집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섭리로 통합된 한 권의 완전한 책이라는 기독교인들의 확신을 나타내 준다. 성경은 유일한 책이다. 또한 이 책은 1500여년 동안 약 40명의 저자가 기록했으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모순이 없는 한 권의 책이다. 왜냐하면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유쾌한 것과 불쾌한 것, 인간의 성공과 실패, 과거와 미래, 그 모두를 쉽고도 권위 있게 말해 주기 때문이다. 성경처럼 광범위한 책도 없지만 또한 성경처럼 완전하고 정확한 책도 없다.29)
성경의 권위가 인간 저자 자신에게 있다거나 전달자 자신의 인격에 좌우된다고 한다면 그것처럼 불안과 의심을 극대화하는 것이 없다. 설교자가 성경을 강론할 때 그 자체가 자신의 도덕적 성결함에 근거한다고 한다면 말씀의 능력(히 4:12)은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인격은 일시적인 감동을 줄 수는 있어도 변화를 일으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말씀을 전달할 때 그 말씀이 하나님의 진리라는 확신 속에서 전달할 때 그것을 듣는 자들도 믿음으로 수용하고 그 말씀의 위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설교의 모든 권위와 영향력과 변화의 능력은 다 어명 그 자체에서 뿜어 나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설교는 둘 다 신적인 권위를 그 토대로 삼을 것을 요구한다. “만일 성경의 신적 권위가 흔들린다면 신앙은 비틀거릴 것이다.”’ 30)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떤 무엇이 성경에 있기 때문에 참된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것이 참되기 때문에 참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진리는 듣는 이들에게 순종을 요구한다. 그 진리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인치심으로 주어진 것이기에 권위가 더욱 돋보인다. 신적 권위 외에 무엇이 우리를 순종하게 하고 신뢰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는 단지 종교적 영역만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 학문과 예술 정치 모든 분야에서 사람들이 가지는 권위를 능가한다. 우리의 신앙과 인격과 삶의 영역의 유일한 규범이 된다.
성경의 권위는 그 성경 진리가 영원한 것이라는 사실에서도 입증이 된다. 국가의 권위나 사람의 권위는 그 범위와 영향이 한정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와 인종을 뛰어넘는 진리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영원한 진리이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그 시대와 사람들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되거나 해석되지 아니한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5:4절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의 영원성에 대한 귀한 교훈을 얻는다. 바울 당시에 ‘전에 기록한 바’는 구약 성경을 가리킨다. 적어도 중간사 시대를 포함하여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는 말라기시대에서부터 계신해도 5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다음의 일이다. 구약성경을 구약 시대 성도들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장래 소망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준 것으로만 해석한다면 바울이 본문에서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구약성경이 신약시대 성도들의 교훈을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 원리는 신구약 성경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성경 이해의 원리가 된다. 비록 2천년 전에 주어진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따라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21세기를 사는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진리인 것이다.
더구나 인간에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존재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에게는 과거나 미래가 없고 언제나 현재만 존재하신다. 그는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과 같은’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권위가 있는 진리요 모든 인간은 이 진리에 순종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서 있는 것’이다(시 119:89). 그러므로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현재의 교훈이요 규범이다.
또한 성경의 권위는 비록 시대적인 구분에 의해서, 또는 인간 저자들에 의해서 66권이라는 분류가 존재하나 한 하나님 입에서 나온 것이요 한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신 것이라는 측면에서 성경은 하나이다. 신약과 구약이 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품속에서 나온 하나의 진리이다. 시대적 환경과 지식적 배경과 사회적 혹은 종교적 지위가 다 다를지라도 그들 저자들은 하나같이 동일한 하나님을 말씀하였고 동일한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같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이 아니라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모든 성경은 인간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한 권의 책이다. 그 권위를 누가 부정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 권위있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의 해석: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


개혁주의 성경해석은 성령의 직접적인 조명하심에 의한 이해와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여 그 성경을 읽는 독자 자신의 몫에 해당된다. 즉 성령의 깨닫게 하심에 대한 설명적 부분이 해석의 영역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31)
성경의 모든 기록들은 그 자체가 모두 같은 정도로 알기 쉬운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에게 같은 정도로 분명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하며 꼭 지켜야 할 부분들은 성경의 이곳저곳에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고 열려 있기 때문에 유식한 사람이든 무식한 사람이든 일상적인 구원의 수단이 적절히 사용될 경우 그것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문자화되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 따라서 그 문자를 이해하려면 정확한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그 해석의 원리는 사람들의설명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 자체가 헌법재판소와 같이 성경 자신의 해석자요, 판단의 기준이다. 여기에서 개혁주의 성경해석의 가장 중요한 전제가 등장한다. 그것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원칙이다. 성경의 어떤 한 부분에서 애매한 부분이 다른 부분으로 더 명료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 본문을 가지고 다른 본문과 대립시켜 해석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본문은 직접 접해 있는 문맥에 비추어서 해석할 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문맥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32)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경해석 방법을 네 가지로 간주했다. 문자적 해석, 은유적 해석, 비유적 해석 그리고 신비적 해석이 그것이었다. 그같은 해석의 권위자는 사제였다. 평신도들은 성경을 해석할 능력이나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의 교훈은 무엇보다 역사적 문법적 해석만이 유일한 방편이라고 했다. 문법적이라는 말은 성경의 문법적인 구조와 언어를 중요시하며 역사적이라는 말은 성경 문맥의 역사적인 상황을 중요시하며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말한다.
개혁자들은 성경은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자기 언어로 번역되는 것을 적극 지원하였다. 한마디로 회중들조차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방편이 마련된 것이다. 존 오웬은 이렇게 말했다:33)
성경에는 실질적으로 성경을 구성하고 있는 단어들 속에 담겨진 의미 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 어떤 사람의 생각을 해석함에 있어서 먼저 그가 말하고 기록한 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말한 언어, 관용어구, 표현의 통상적인 사용과 취지들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는 한 그의 생각이 무엇인지 직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문법적 해석은 그 책이 주어진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본문의 문맥과 문법을 세심하게 살피는 작업이다. 이러한 의미파악을 위하여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문맥의 이해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성경에는 모호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사제들의 주관적이고 비유적인 해석이 필요하다는 가톨릭의 주장에 반하여 개혁자들은 성경은 명료하기 때문에 성경은 외부적인 표준이나 전통에 매이지 않고 그 자체가 해석자임을 강조한 것이다.34) 그렇다고 성경은 성경의 사사로운 해석을 용인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진리를 발견할 자유는 누구든지 가지고 있지만 자신들의 입맛대로 꾸며댈 권리까지 지닌 것은 아니다. 즉 주관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바른 성경해석은 언제나 기록한 성령의 본래 의도하심을 파악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이 최초로 주어진 상황에 아주 적절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본문에 비추어서 해석해야 한다. 성경의 통일성과 충족성 및 명료성을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초기 계시가 후기 계시의 조명으로 해석되어짐을 전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의미이다. ‘성경의 위대성은 분문해석의 무한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뜻의 명료성에 있다’는 칼빈의 해석 원리는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이처럼 저자의 의도와 역사적인 상황, 문법적 구조, 그리고 문맥에 적절한 성경해석은 오늘의 현실에 적용가능한 생동감 있는 말씀으로 전달될 수 발판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록 오래 전에 기록된 것이라 할지라도 오늘 이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주신 교훈이요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에 올바른 해석과 적용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성령의 역사는 성경 기록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성경에 대한 해석과 전달에도 나타난다. 따라서 해석자 혹은 전달자들은 언제나 지적 탐구만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달하는 것이 되도록 항상 기도에도 힘써야 한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는 성경해석과 전달은 죽은 문자에 불과한 것이요 생명 없는 지식전달에 불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심령의 변화 혹은 영혼의 치유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로 보내심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말씀만을 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그에게 한량없이 부어주신 성령 때문이다(요 3:34). 성경해석과 전달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야말로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것이 성경해석의 진정한 목적이어야 하며 진리를 이해하고 확신하며 믿어 실천하게 하는 것은 전달 혹은 선포의 목적이어야 한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개혁주의 신앙고백적 성경관을 살펴보았다. 단지 학문적인 접근이 아니라 신앙 고백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에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의 권위 앞에 모든 인간이 다 순복해야 할 유일한 규범임을 증언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만한 어떤 신학자의 글과 가르침은 없다. 오직 그 성경만이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고 그 성경만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이다. 그 성경에 대한 해석과 적용은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의 책무이지만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 진리의 말씀에 순복하고 실천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이다. 성도 개개인들도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거듭난 성도 심령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에 가르침에 수고하는 목사와 교사를 세운 것은 거짓 교사들이 진리를 왜곡하여 성도들의 마음을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심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고후 11:3, 행 20:29-30).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최고의 증언은 성령 하나님 자신만이 아니라 말씀을 맡은 이들의 온전한 순종적 헌신에서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다. 말씀을 맡은 이들의 불순종적 삶이나 모순된 언어행실은 성경의 권위를아무리 강조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교회가 조롱과 비판의 대상이 된 가장 큰 이유는 진리에 대한 불순종이다. 이기적이고 기복적인 행동양식이 희생적이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거룩함과 화평을 추구하는 삶을 무용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교훈을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사람의 말 듣는 것보다 더 우선이어야 함을 행동으로 부정한 것이다. 이제라도 성경이 오늘 이 시대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유일한 진리임을 믿는다면 개개인의 사고방식과 삶의 행동약식을 진리에 기초한 것으로 철저한 개벽이 일어나야 한다. 전하고 가르치는 자들의 모범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학교 선생’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신학교의 교수들과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이 세상에서 보는 것보다 더 볼썽사나운 것들인 한 성경은 죽은 문자일 뿐이다. 소위 성직을 맡은 이들이 먼저 회개와 각성과 변화를 일으키는 길을 가지 않는 한 진리의 말씀의 권위 앞에 전적으로 무릎 꿇을 인간은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케 되는 부흥의 역사를 소망한다.

 


서창원(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역사신학)/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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