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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느헤미야 서론

수호천사1 2016. 9. 8. 22:05
느헤미야 서론
느헤미야는 에스라서와 함께 구약 맨 끝 부분에 속하는 성문서로서 정경의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특별히 본서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폐허가 되었던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고 짓밟혔던 성전을 회복하면서 역사 속에서 사라졌던 민족의 회복을 다룬 역사적 기록이라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했던 지난 역사를 돌이켜 새롭게 하나님의 크신 뜻을 좇아 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생생한 사건을 담았다는 데서 더욱더 큰 의의를 가진다. 이제 본 서론에서는 느헤미야서의 역사적인 배경에 관한 문제들과 특징적 주제를 다룸으로써 느헤미야서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는데 우선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본서는 에스라와 거의 같은 역사적 배경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본서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에스라와의 상호 연관성을 잘 생각하면서 그 역사적 맥락과 신학적 주제들을 다루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제1부: 역사적 배경

 

   I. 명칭

 

   처음에 히브리 성경에서나, 헬라어 번역본에서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한 권의 책으로 되어 있었으나 후기의 헬라 사본에서 두 권으로 분리시켜서 구분하였고 그 전통을 라틴역이나 영역본에서도 이어 분리 수록하였다. '제롬'(Jerome)의 라틴역 성서인 '불가타'(Vulgata) 역에서는 '에스드라'(Esdras)를 네 권으로 나누고 있는데 그 중에 두 권이 지금의 에스라와 느헤미야이며, 나머지 두 권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서술된 사건들에 대한 또 하나의 기록과 에스라의 환상에 대한 기록들이다. 그런데 이 후자의 두 권은 외경의 에스드라 1, 2로 분류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 히브리어 성경에서도 1448년 두 권을 분리하여 사용하였고, 1525년 봄버그판에서 최초로 분리하여 인쇄하였다(이러한 두 권의 관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에스라서 서론 '명칭' 부분을 참조할 것). 한편 히브리 성경에서는 본서의 명칭을 중심인물인 느헤미야의 이름을 따서 <느헴야 ; hy:m]h,n]>라고 표기하였는데 70인역 성경과 라틴 불가타역, 그리고 영역본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 개역에서도 히브리 성경의 음역을 따라 '느헤미야'라고 부르고 있다(본서의 명칭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은 에스라 서론 '명칭' 부분을 참조할 것).

 

   II. 저자와 기록 연대

 

   1. 저자

 

     1) 느헤미야 단독 저작설
   느헤미야가 느헤미야서의 저자라는 사실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지지하는 전통적인 견해인데 그것은 본서의 1:1을 비롯하여 그 외의 많은 부분에서 본서의 저자를 느헤미야 자신인 일인칭 단수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자신을 3인칭으로 서술하고 있는 부분도 있는데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느 12:46, 47에서 언급되는 '느헤미야의 때'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느헤미야가 공직에서 물러난 후 자신을 동시대의 인물들과 함께 열거하면서 지난날 자신의 행적을 돌이켜 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서론에서 우리는 성경 자체가 증거하는 대로 느헤미야서를 느헤미야 자신이 기록했다는 견해를 가장 성경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인다.

 

   2) 느헤미야 저작설에 대한 몇 가지 이견들

 

   (1) 삽입설
   어떤 비평적 주석가들은 느헤미야서는 느헤미야 혼자 단독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느헤미야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부분적인 것들을 기록하여 삽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느 7:6-12, 26 그리고 12:44-47의 내용은 느헤미야의 기록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기록되어 따로 삽입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실제로 느 7:6-73에 기록된 족보는 느헤미야가 자신과 동시대 인물이면서도 그보다 먼저 귀환했던 에스라의 기록을 공식적으로 인용한 것일 뿐 결코 느헤미야와 상관이 없는 다른 이들이 기록하여 삽입시킨 것은 아니다. 즉 그러한 기록들은 적어도 느헤미야가 어떤 자료적인 근거를 사용하였다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다른 사람들이 직접 기록하여 삽입시켰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2) 편집설
   '아이스펠트'(Eissfeldt)나 '바이저'(Weiser) 같은 학자들은 역대기의 저자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메모들을 다른 기록들과 결합하여 느헤미야서를 편집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이 논거로 삼고 있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① 책의 중간에 느헤미야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 이들이 본서의 저자가 느헤미야가 아닌 후대의 다른 역대기 기자라고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느헤미야서의 본문 내용 중에 1장-7장, 12:27; 13:31에서는 느헤미야 자신을 1인칭으로 서술하지만 8:1-12:26까지는 느헤미야의 이름이 거의 기록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7:6-73에 대해서는 7:5에서 미리 이 부분을 스룹바벨 인도하의 제1차 귀환자들의 명단을 얻어 그것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밝힌 상태에서 기록한 것이므로 문제가 되지 않으며, 11:1-12:26에 대해서는 느 12:22-26과 같이 자신의 시대에 활동하던 자들에 대해 기록할 때에만 자신의 이름을 분명히 기록하고(참조, 느 12:26) 그 외에 예전부터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자들이나 다른 성읍의 이름을 기록할 때는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므로 이 부분 역시 문제될 것이 없다. 또 이 부분에서 1인칭을 쓰지 않고 3인칭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느헤미야가 저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문체의 양식상의 특성 때문이므로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② 1장-7장까지와 그 뒷부분과의 주제가 상이하다는 이유: 1-7장에서의 주제는 예루살렘 성곽 건축과 적으로부터의 경계 태세임에 반해서 8:1-12; 26장까지는 '에스라의 종교 개혁'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느헤미야서는 단일 저자가 아니라 편집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들은 느헤미야가 자신을 1인칭으로 표시하는 부분과 예루살렘 성곽 건축과 수호에 관계되는 구절들을 '느헤미야의 메모'들 이라고 부르고, 이를 후대에서 역대기 편집자가 현재의 느헤미야서를 편집하면서 다른 문서적 자료들과 함께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반부에 언급되는 개혁 운동은 과거에 이스라엘이 범한 죄를 회개하며, 새롭게 하나님과 굳은 언약을 맺고 인(印)친 자를 기록한 동시에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살 것을 맹세하면서 결심한 내용, 이방인과 혼인을 금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십일조 생활을 할 것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러한 항목들은 전반부에 나타나는 느헤미야의 개혁 의지와 일치하므로 비록 느헤미야의 이름이 이 부분에 언급이 되지 않더라도 느헤미야가 본서의 저자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주장은 객관적인 타당성이 결여된 고로 우리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견해이다.

 

   (3) 공동 저작설
   이 견해는 에스라서뿐만 아니라 느헤미야서까지도 에스라가 썼다는 주장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에스라서의 서론 중 저자와 기록 연대를 참조하도록 하라.

 

   2. 기록 연대

 

     본서의 기록 연대는 느헤미야가 활동하던 그 당시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데 실제로 B. C. 445-425년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 엘레판틴 지역에서 발굴된 '엘레판틴 파피루스'(Elephantine Papyrus)의 발견으로 명확하게 드러났다. 이 사본들을 보면 요하난(참조, 느12:22, 23)을 당시의 예루살렘 대제사장으로 기록하고 느헤미야를 가장 괴롭혔던 산발랏의 아들들을 B. C. 408의 사마리아의 통치자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느헤미야의 활동 시기 직후의 일이다. 또 이 문헌들이 당시의 유다 총독을 바고아스(Bagoas)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미루어 보아 느헤미야는 이미 총독에서 물러난 상태였던 것 같다.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생각해 볼 때에 본서의 기록 연대는 느헤미야 활동 시기 중인 B.C. 445-425년 사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3. 기록 목적

 

     느헤미야서의 목적에 대한 견해도 학자에 따라서 의견이 분분하다. '노트'(M. Noth)는 느헤미야와 에스라서의 목적이 반사마리아적인 태도에 있다고 하였고 '폰 라드'(Von Rad)는 이 책의 근본적인 의도가 종교 지도자를 합법화하고 그들을 메시아 대망의 전승 매개체로 삼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루돌프'(Rudolf)는 이스라엘 내에 신정 사회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본서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그때까지 이방인의 포로 생활을 하던 유대 민족으로 하여금 새롭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죄악된 길을 청산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민족적 역사의 회복과 그러한 역사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나타내려는 데 있다. 특히 무너졌던 성벽의 재건과 그 사건을 전후한 신앙의 개혁 운동은 새롭게 부과된 자신들의 임무에 충실 하는 일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Ⅲ. 특징과 구조

 

     1. 특징

 

     본서의 특징은 크게 다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느헤미야서는 매우 도전적이면서도 읽는 자에게 생기를 북돋아 주는 책으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당신과의 생동감 넘치는 관계를 회복하시고자 친히 자신의 종을 통하여 그들을 부르실 때에 이 부르심에 응답한 남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신학자 '휘트콤'(John. C. Whitcomb)은 느헤미야서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느헤미야서보다 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헌신적인 열정을 나타낸 책은 구약성경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위한 느헤미야의 열정은 그것이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른다고 할지라도 오늘날 우리 시대에 참으로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느헤미야서가 지닌 첫 번째 특징은 느헤미야서의 여러 주제들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참조, 느헤미야 도표1).

 

   2) 느헤미야서에는 믿는 자들이(개인이든, 교회이든) 반드시 본받고 나아가야 할 영적 운동의 패턴을 제시하는데 그 양상은 다음과 같다.
   ① 8장: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 ② 9장: 진실한 기도의 체험(죄의 고백과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자세). ③ 결단과 구체적인 행동으로의 실천.

 

   2. 구조

 

     느헤미야서는 전체가 13장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를 다음과 같이 크게 4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건축 사업(1장-7장)
   부흥(7:73-10:39)
   결론(11:1-13:31)
   이와 같은 기본적 구조를 중심하여 그 세부적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 도표와 같다 (참조, 느헤미야 도표2).

 

   제2부: 느헤미야서의 특별 주제들

 

   I. 인간 느헤미야
  
   느헤미야는 포로로 잡혀간 하가랴의 아들로 '여호와의 위로'라는 뜻이다. 이름의 끝자에 야(jah)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가족은 유다의 전통 신앙에 매우 충실하였음을 알 수 있다(참조, 느1:1). 그는 젊은 나이에 아닥사스다 1세의 수산 궁에서 술 따르는 일을 맡은 중대한 책임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하여 후에 느헤미야로 하여금 유다인들이 귀환하여(제3차) 예루살렘을 재건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 것이다.
   느헤미야는 참으로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참조, 느 2:12; 7:5). 때문에 기도는 그의 삶에 있어서 필수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생리적 요소와 같았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았고, 그래서 그 일을 위하여 몸소 열정적으로 참여하면서도 타인들도 역시 그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감동을 주었다. 그는 백성들 중 어떤 이들이 절망하면 그는 그들의 눈을 하나님께 돌려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도록 하여 하나님의 예비 된 응답을 발견하도록 인도했다.
   느헤미야는 학사이며, 이론가였던 에스라와는 약간 대조적으로 행동하는 실천적 사람으로 활약했다. 그는 자신의 온갖 정력을 쏟아서 죽어가던 예루살렘 유다인 사회에 생명과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폐허로 잔존해 오던 예루살렘 거리를 새로 건축하였다. 그는 단지 성벽을 다시 중건하기에 그치지 않고 절망하고 있었던 백성들의 삶의 방향을 수정시켰으며,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긍심을 갖고 살도록 유도하였다. 이렇듯 지도자요, 사역자요, 하나님의 종이었던 느헤미야는 유다의 총독으로 재직하였던 기간 동안에 에스라와 함께 몰락되었던 민족의 터전을 굳건히 함으로 말미암아 구약 역사의 마지막 시대에 사역했던 말라기 선지자의 영적 선포에 큰 영향을 미치었다(참조, 외경 마카비하 1:18-36; 집회서 49:13).

 

   Ⅱ. 건축된 성곽문들에 대한 해석
 
   느헤미야 3장을 보면 예루살렘 성벽에 세워진 성문들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이제 그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양문(Sheep gate: 1절)
   이 문은 성곽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곁에는 베데스다 못이 있었다고 한다(참조, 요5:1). 양문이라는 이름은 제물로 바칠 양들을 베데스라 못에서 씻어 이 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여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이 성문은 대제사장 엘리야십과 그 형제 제사장들이 함께 건축하였고, 또 그것이 다 완성되었을 때 '성별'하여 다른 문들과 구별하였던 것이다.

 

   2. 어문(Fish gate: 3절)
   이 문은 성곽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요단강과 갈릴리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를 운반하여 들여오는 데서 연유된 이름인 듯하다.

 

   3. 옛문(Old gate: 6절)
   이 성문은 현재의 다메섹 문에 해당되는 문이라고 추측되는데 이곳 외에 성경의 다른 곳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4. 골짜기 문(Valley gate: 13절)
   이 문은 성곽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문으로서 문의 방향이 힌놈(Hinnom)의 골짜기를 향하여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졌다고 하는데 이것은 과거의 웃시야 왕이 견고케 하였던 당시의 이름 그대로이다(참조, 대하 26:9).

 

   5. 분문(Dung gate: 14절)
   이 문은 성곽의 남쪽 중앙에 있는 문인데 성 안의 모든 오물들을 실어내는 문이었다.

 

   6. 샘문(Fountain gate: 15절)
   이 문은 실로암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었다(참조, 느3:15)

 

   7. 수문(Water gate: 26절)
   이 문은 성전에서 사용하는 물을 실어 들여오기 때문에 불려진 이름이다.

 

   8. 마문(Horse gate: 28절)
   이 문은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문으로 이곳으로 말들이 왕래했었던 것으로 추측되어진다. 그리고 또 이 문은 왕궁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다(참조, 느3:25).

 

   9. 동문(East gate: 29절)
   이 문은 아마도 앞에서 언급한 '수문'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10. 에브라임문과 감옥의 문
   이 문은 느헤미야 3장에 언급되지 않은 문들인데(참조, 느 12:39) 에브라임문은 성곽 북쪽, 즉 옛문을 향하여 가는 서쪽 방향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고 감옥의 문은 성곽 동쪽, 즉 '수문'을 향하여 북편 방향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고대에서는 성과 성문은 몹시도 중요한 것이었다. 적어도 어느 한 나라의 집결된 힘이 성곽과 그 성문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성곽 건축과 성문 건축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Ⅲ. 산발랏과 도비야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

 

     애굽으로 이주해 간 유다인들의 정착지인 '엘레판틴'(Elephantine) 지역에서 발견된 '엘레판틴 파피루스'(Elephantine Papyrus)의 문헌에 의하면 산발랏과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문헌의 내용은 애굽의 유다인들이 그들의 성전 건축에 대하여 사마리아 총독인 산발랏에게 알리어 그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 마지막 결구에서 '이 편지의 전체 내용은 사마리아의 총독 산발랏의 두 아들인 델라이야(Delaiah)와 셀레미야(Shelemiah)에게도'라고 기록하고 있다.
   도비야에 대해서도 애굽의 오아시스 지역으로 '파움'(Fayum)이라고 불리는 지방의 '게자'(Gerza)란 곳에서 발굴된 '제노 파피루스'(Zeno Papyrus)에 언급되어 있는데 거기에 팔레스틴 지역에 관계되는 내용 중 한 문서는 요단강 동쪽의 팔레스틴 지역을 다스리는 암몬 총독 도비야(Tobiah)가 직접 기록한 것이다. 이 외에도 암몬 동부인 '아락엘 에밀'(Aragel-Emir)에서 도비야 가문의 성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근처에는 그 가문의 묘지가 있고 그 성의 벽에 아랍어로 도비야(Tobiah)란 가문의 이름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고고학자 올브라이트(Albright)의 감정에 의하면 그 묘지는 기원전 400년 이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이들의 역사성은 사실로 인정할 수 있으며, 또한 그들과 관련된 느헤미야의 역사성 역시 확실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 특이한 것은 산발랏의 두 아들 '델라이야'(Delaiah)와 '셀레미야'(Shelemiah) 그리고 '도비야'(Tobiah) 등의 이름에 '야'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야훼(Yahweh)의 약칭 명칭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들의 부모나 조상들은 여호와를 숭배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은 여호와를 섬기되 유일신으로 섬겼다는 말이 아니라 일종의 '지방신'으로 섬겼을 것이다.

 

   Ⅳ. 느헤미야 7:70의 다릭(Daric)에 대한 고찰

 

     예루살렘 성전 건축 사업을 위하여 어떤 방백들은 '금 일천 다릭'을 다른 족장들은 '금 이만 다릭'을 그리고 나머지 백성들이 '금 이만 다릭'을 바쳤다고 했다(참조, 느7:70-72).
   여기서 '다릭'(Daric)이라는 화폐 단위는 히브리말로 '드라크마'(Drachma)라고 읽을 수 있는데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이 '드라크마'는 그리스의 화폐 단위로 알렉산더 대제(B.C. 330) 이전에는 팔레스틴 지역에서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느헤미야서 자체도 느헤미야 시대의 기록이 아니고 후대 역사가에 의하여 헬라 시대(B.C. 250)에 기록되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사실에 위배된다. 물론 '다릭'이 헬라의 주화인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이미 B.C. 5세기부터 아시아의 고대 근동 지방에서 널리 사용되었음이 증명되었다. 그 실례로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베르트 줄(Berth-Zur) 지역에서 '드라크마'가 6개나 발견되었는데 이미 그리스의 상인들이 널리 아시아의 근동 지역을 왕래하면서 무역상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와 동시에 올브라이트(W. F. Albright)도 이와 같은 시대에 애굽에서도 '드라크마' 즉 '다릭'(Daric)이 사용되었음을 '엘레판틴 파피루스'(Elephantine Papyrus)를 근거로 하여 명백하게 반증하고 있다.

 

   Ⅴ. 느헤미야 성벽 재건의 신학적 의의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성전을 회복시켰으며, 에스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권위를 회복하였다. 이제 그 바탕 위에 느헤미야는 성을 재건하고 유다 민족의 정치?사회적인 제반 여건을 충실히 재정리하였다. 폐허가 되었던 성벽이 재건됨과 동시에 그 성은 견고해져 가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하여 인구가 점차 늘어나고 부자가 가난한 자를 압제하는 불의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으로 제거되었다. 그러나 이 회복은 엄밀한 의미에서 온전한 회복이 아니었다. 이 사실은 느헤미야와 그 동역자들이 이방인의 종이 되었음을 한탄하는 표현 속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삽는데 곧 주께서 우리 열조에게 주사 그 실과를 먹고 그 아름다운 소산을 누리게 하신 땅에서 종이 되었나이다'(참조, 느 9:36).
   이러한 잠정적인 회복은 그리스도를 통한 완성된 삶에의 구원을 필요로 하며, 그로 말미암아 모든 삶의 근원적 관계가 궁극적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즉 말하자면 느헤미야의 개혁적 회복은 하나님의 왕국에서 나타날 공의를 지칭하는 예언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또 느헤미야는 극성스러운 반대에도 불구하고 복구 사업을 밀고 나갔는데 이는 느헤미야가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느헤미야가 회복시킨 예루살렘 성은 장래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도래하고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언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Ⅵ. 느헤미야 총독 시대의 신앙 운동

 

     총독으로서의 느헤미야의 사명이 예루살렘 성곽의 완성으로(참조, 느 12:27-43) 끝난 것은 아니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스룹바벨이 유다의 총독으로 봉직한 후 다시 느헤미야가 총독이 되기까지 칠십여 년 동안 유다를 다스린 총독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 동안의 사적들은 알 길이 없으나 그 여러 총독들은 민족을 위하고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백성들을 압제하고 착취하며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참조, 느 5:18; 말 1:8).
   그러나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느헤미야 자신 스스로가 유다의 총독으로 있는 동안(12년간) 총독이 당연히 받아야 할 '총독의 녹'까지도 먹지 않았으며(참조, 느 5:14). 도리어 그는 성곽 건축에 온 힘을 기울이면서도 그의 상에서 먹는 일군들이 먹는 모든 비용을 다 부담했다(참조, 느 5:17). 물론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진하여 공궤하는 일도 있었으나(참조, 느 5:18)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부담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늘 힘을 썼고 그 때문에 그들의 녹을 거절했던 것이다.
   그가 이처럼 몸소 본을 보인 것은 당시의 상황이 너무도 저급하고 타락된 상태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귀환자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계층적으로 분화되기 시작했고 자기 동족들끼리도 인신매매하는 일까지 성행하였던 것이다(참조, 느 5:5). 또 자기의 재산을 팔아 처분하고도 빚을 속량할 길이 없는 자들도 비일비재하였다(참조, 느 5:5). 느헤미야는 이러한 행위들을 보고 크게 꾸짖어 그들로 하여금 돌이켜 모세의 율법을 따라 생활을 정리하라고 타일렀다. 즉 이식받기를 그치고(참조, 느5:10), 종을 돌려보내고 기업을 무르게 하고(참조, 느 5:11, 14), 율법을 기억하여 지킬 것을 호소했다.
   이에 백성들은 여태까지의 총독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자신들에게 부르짖는 느헤미야의 음성에 점차적으로 수긍하고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도저히 느헤미야의 힘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백성들의 종교 생활에 관한 문제였다. 정치 지도자인 그로서는 백성들의 종교 생활에 대하여서 아무런 지도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에스라에게 부탁하여 백성들을 하나님의 율법으로 지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잘못된 생활을 버리고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마침내 축제의 달 7월에 유다 백성들은 일제히 예루살렘 성에 모여 에스라의 낭독하는 율법을 청종하고(참조, 느 8:3, 8) 그로 인한 대규모의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참조, 느 8:9-12). 그러나 사실 이러한 영적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그날 들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성곽을 건축할 때의 열정과 더불어 마음속에 뜨겁게 일어났던 율법을 사모하는 그 갈급한 마음에서 이미 영적인 부흥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영적 부흥은 상당한 기간에 걸친 깨달음(참조, 8장)과 회개와(참조, 9장) 헌신적인 실천으로(참조, 10장) 지속되었다 (참조, 느헤미야 도표3).

 

   Ⅶ. 느헤미야의 역사적 배경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시간적 차이는 약 12년간인데 느헤미야서는 그 후 20년간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 역사적 배경을 도표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도표3)과 대조하면서 다음 사항을 관찰하여 보라.

 

   1. 느헤미야의 활동 기간 동안의 바사(Pasa) 왕은 아닥사스다 1세였음
   2. B.C. 458년 에스라의 인도 하에 제2차 포로 귀환이 이루어짐
   3. B.C. 446년 대적자들이 유다인들의 성 건축을 방해함. 그리고 이미 건축된 부분을 헐어버림(참조, 스 4:23). 이 소식이 느헤미야에 전달됨(참조, 느 1:3).
   4. B.C. 445년 느헤미야의 인도 하에 제3차 포로 귀환. 이미 귀환해 있는 유다인들과 함께 성을 건축함(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1세로부터 유다 총독에 임명됨).
   5. B.C. 444년 성 건축이 완공됨(참조, 느 6:15).
   6. B.C. 433년 느헤미야가 공식적인 일로 바벨론으로 돌아감(참조, 느 13:6).
   7. B.C. 433년 느헤미야가 바벨론에서 돌아옴(참조, 느 13:7).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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