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을 아는 비결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는 반드시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그런 상황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이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가, 아니면 저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가? 다른 주로 이사를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어떤 사업을 하여야 할까? 세탁소를 계속 해야 하는가 아니면 새로운 Business 를 해야 하나? 직장을 옮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떤 진로를 택하여야 하는가? 음악가가 되기 위해 음대를 갈까? 아니면 돈 잘버는 의대로 갈까? 인생에 있어서는 이러한 진로 선택의 어려움이 있으며 또한 인생 속에서의 이러한 결정은 정말로 얼마나 중요한지요. 이 결정을 잘못 내리면 ‘내 인생은 실패로구나’라며 가슴을 칠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여러가지 결정을 내릴 때에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보장하시고 복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이러한 인생의 결정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성경적 원칙을 나누려고 합니다. 어떻게 내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가? 오늘 말씀을 잘 듣고 마음 속에 새겨서 인생의 선택 순간이 다가올 때 꼭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잘못된 방법을 소개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주의 뜻을 분별하려 할 때, 잘못된 방법을 사용할 때가 아주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잘못된 방법은 쉬운 방법입니다. 갈등도 없고 기도도 필요없는 방법입니다.
첫째로 잘못된 방법은 어떤 신비한 방법으로 미래를 알아내려 하는 시도들입니다.
예를 들어 점을 치는 것이 있지요.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점치는 사람있는데, 이는 하나님 앞에 대단히 악한 행위입니다. 또는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하나님과 흥정을 하는 방법입니다. 물을 튀겨서 이쪽으로 되면 이 길로, 저쪽이 되면 저길로 가는 식입니다. 또는 내일 날씨에 따라 좋으면 이렇게 나쁘면 저렇게. “누굴 만나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또는 꿈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라는 식의 쉬운 방법을 말합니다.
어떤 30대 집사님께서 선교 대회에서 선교사로 서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니 마음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뜻을 확인합니다. “선교사냐, 아니면 그냥 회사에 남아 있을거냐...” “하나님, 내일 아침 일어나서 우리 아내가 바가지를 긁으면 회사원으로 있을 것이고, 안긁으면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이런 식의 방법은 아주 위험한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치 않는 방법이요, 또한 일반적으로 이러한 방법은 스스로의 마음 속에 있는 우상에게 속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의 욕심에 의해 결정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바른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의 길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길이란 미래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길은 한번에 한걸음씩만 인도하십니다. 밤에 차를 운전할 때 보면 해드라이트가 비치는 영역은 항상 한발자욱 앞만 보여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빛을 의지하며 계속 달려 목적지까지 잘 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분변하며 사는 인생이란,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될 줄 미리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루 하루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오늘이라는 날을 주님과 동행하는 것, 그것 자체가 먼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 하고, 그 뜻을 성경적으로 찾아내는 과정 자체를 하나님께서 의도하셨으며, 이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는 그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자라나게 하는 것이요, 이 믿음의 성장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가장 의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란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지요.
히 11:8을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가고 그리고 그 이후에 가나안 땅으로 가게 되는데 그때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곧 아브라함의 인생을 요약하면, “갈 바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믿음으로 나갔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오직 그 날 그날 약속을 의지하고 나아간 것입니다. 바로 믿음의 길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인생을 돌아 볼 때, 하나님의 뜻이 그에게 이루어 진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아도 요셉 자신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인도해 가실 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약속만을 기억하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렸을 적에 형들에게 팔리고, 애굽 보디발의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게 되지만 진심으로 거부하지요. 그러나 그 반항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심지어 감옥에 들어갑니다. 이때 요셉은 그 감옥에서 ‘나는 몇년 후에 어떠한 방법으로 나온다’를 알고 있었겠습니까?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자신의 인생을 인도하고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곧, 요셉은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을 몰랐지만, 오히려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 줄 모르기에 더욱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갖고 살아가는 요셉. 이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뜻은 다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요셉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애굽이 흉년으로부터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모세의 예를 보아도 그는 살인범이 되어 애굽에서 쫓겨나서 광야로 피신하게 되지요. 그래서 양떼를 치며 40년 광야 생활을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에게 한 번도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모세는 개인적으로 80세가 된 때에 자신의 쓸모 없고 의미없는 인생 속에서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는 40년이 지나면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실 것이다라고 미리 알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우리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나. 언제 오시려나 기다렸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찾아 오실 것이다라는 믿음만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모세가 가장 예상치 않는 어느날, 어쩌다 호렙 산 떨기나무에 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광경이 하도 이상해서 그리로 가까이 가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알게 해 주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우리에게 더욱 주님을 신뢰하게 하고, 더욱 기도하게 하면서, 주님과의 사랑 속에 우리의 미래를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복은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삶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알아내려는 의도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도와 전혀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기 보다 개인의 미래를 알기 위하여 어떤 세속적인 방법을 통하여 알려고 하는 시도에 대하여 가증한 악으로 간주합니다. 사무엘상 28장을 보면 사울 왕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그 승패를 알고 싶어서, 엔돌의 신접한 여인(무당)을 만납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일은 사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불타는 진노를 더 일으키는 다시는 절대 피할 수 없는 가장 큰 죄가 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아주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여러분, 목사라고 하면서, 예언의 은사가 있다고 하면서 여러분의 미래, 사업의 미래, 자녀들의 미래를 알려 주겠다고 하면,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는 거짓 선지자요.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행위를 하는 자입니다. 미국의 어떤 예언의 은사를 가졌다고 하는 목사님은 성도들이 어디다 세탁소를 차려야 합니까? 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 가게 자리의 과거 역사를 물어 본 다음에 예언을 해 준다고 합니다. '그 세탁소 자리를 보니 10여전에 술집을 한 적이 있군요.' '사탄이 역사하니 사업이 잘 안되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죽은 청년의 신음 소리가 나는구요. 안되겠습니다.' '그럼 어디서 사업해야 하나요.' '저쪽 백인 지역이 사는 아주 깨끗한 동네에서 하시면 복을 받는다는 예언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귀신이 역사하지 않거든요.' 이렇게 미래를 알려 주는 목사는 가짜, 돌팔이 목사입니다.
자! 그럼,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어쩌란 말씀입니까? 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아무튼, 현 시점에서 나를 향하신 주의 뜻을 찾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무엇인가 결정하여야 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아는 것입니까? 어떤 성경적 원리가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오늘 이 원리를 암기하시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먼저,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기 위해서 영적 원칙을 몇가지 알려 주십니다. 인생의 결정의 가이드 라인이 되는 셈입니다. 그 원리는 거. 사. 은. 영. 섭. 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언제나 이 원리를 따라 고민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왔습니다.
먼저 거룩의 원리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거룩의 원리를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의 원리는 제거의 원리입니다. 여러 길 중에 분명히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음란 사업과 관련 되었다던가, 교회 덕이 되지 않는 직업,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 예를 들어, 도박계, 술, 담배, 향락사업, 룸 싸롱 또는 사람의 마음과 몸을 더럽히는 사업 등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또는 가끔 보면, 보복 하려고 취하는 결정들이 있습니다. 질투로 인한 결정들이 있습니다. 상대에게 뭔가 피해를 주기 위해서 내리는 결정인데 이러한 결정을 하지 않는 것이 거룩의 원리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남자 친구에게 보복하기 위해 원치도 않는 사람과 결혼해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부모님을 골탕 먹이려고 한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아픔을 주기 위한 결정은 미움과 질투에서 나온 것이지 하나님의 뜻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 결정은 언제나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나 없으면 얼마나 고생하나 봐라’라는 심보의 골탕 먹이는 결정! 놀라운 것은 상상 외로 이런 동기로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기 말 안들어준다고 부모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하고 갑자기 시집 가버린 자매님. 몸 담던 회사가 자신에게 승진을 허락치 않자 그 회사가 피해를 입도록 하기 위하여 갑자기 회사를 때려치는 행위, 교회의 직분을 내려 놓는데 그 심보가 목사 너 골탕 좀 먹어라 라는 식의 결정,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멉니다. 거룩의 원리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사랑으로 남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입니다. 결정시 보통 두 요소가 따릅니다. 보통 need (필요)가 있고 Reward (보상)가 있습니다. 이때 사랑의 원리는 먼저 need (필요) 를 먼저 보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대접하는가는 나중에 생각하고 나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 가를 보는 것입니다. 사실, 얼마나 많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학벌, 가문, 돈, 외모등의 조건을 너무 계산 하다가 진짜 짝들을 다 놓치고 나중에 급해서 아무하고나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 지요. 그래서 참된 결혼 생활에 실패합니다. 또 어떤 사업가들은 더 나은 조건을 기다리다 기회를 다 놓치고 사업을 망치는 사례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많이 필요로 하는 곳, 내가 없다면 불편해 지는 곳! 그곳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항상 기회를 얻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등,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들을 내릴 때 중요한 결정 원리는 내게 돌아올 보상 보다 먼저 그들이 나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가의 필요를 고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나중에 후회하고 실망하며 또한 헛수고가 되고 쓴 열매를 맺어 인생의 실패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적인 방황 및 좌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열심히 하면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특히 교회 일에서는 이 원리가 더욱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는 섬김의 원리, 곧 봉사의 원리로 서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보상 먼저 따지는 사람은 교회가 나를 얼마나 알아 주는가를 봅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보상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은 실제 사랑의 원리로 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게 하는 길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이 공동체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의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나를 얼마나 인정하는가 등의 계산이나 또는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을 따지지 말고 결정하는 것이 하나님께 인정 받는 신앙 생활의 지름길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 속에 있는 숨겨진 심보를 알고 계십니다. 그 분은 절대로 속지 않으십니다. 왜 그러한 결정을 했고, 무엇이 그 결정의 동기인가? 하나님은 정확히 아십니다. 예를 들어 목회자의 Calling 을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훌륭하고 저명한 목사의 인기 및 그들의 받는 대접과 영광을 보고 목회길을 원한다면 그는 완전 실패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Need, 영혼들의 Need를 보며 그들의 고통을 보며 Reward(보상)을 보지 않고 목회길을 갔다면 그는 주께서 책임지십니다. 지금도 주께서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사람이 필요합니다. 들판이 희어져 추수로 가득찹니다. 그러나 쓸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때, “제가 여기 있나이다.” 주님의 Need에 대답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셋째는 은사의 원리입니다.
곧 자신의 은사와 재능을 확인 개발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은사가 있습니다. O.S.Guiness라는 분은 평신도 신학자이신데, 그 분의 책 “하나님의 뜻을 아는 원칙”이라는 책을 보면, 하나님의 뜻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제일 하고 싶은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분이 말씀하시는 “제일하고 싶은 것”이란 더러운 육체적 욕심 곧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 육체의 정욕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적성과 체질에 의하여 하고 싶어하는 재능과 은사의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치 않는데도 돈. 명예. 권력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반대로, 주님이 주신 재능을 살리는 길이 하나님의 뜻인데 이를 은사의 원리라 하며 우리 각자는 각자의 은사 개발를 개발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봉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을 성실히 개발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은사와 재능을 개발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기회를 주십니다. 반드시 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는 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께서 이 은사와 재능을 주심은 하나님이 쓰시려고 주신 것이기에 분명히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재능을 개발하여 주의 뜻을 따를 경우 그 인생은 아주 조화있는 삶이 되며 자신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일하는 보람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 단지 돈 때문에 보람도 없는 억지로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뭔가 잘못된 것이요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나 있기에 그 인생은 자연스럽지 않으며 돈을 혹시 벌게 될 지 몰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사회의 기여도에 있어서 별로 드러낼 것이 없고 사실은 나중에 보면 인생 낭비인 것입니다.이러한 점에서 볼 때 부모의 역할은 자녀들의 은사와 재능을 발견하여 그것을 개발하도록 돕는 것이 부모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은사와 재능을 어렸을 적부터 잘 개발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뜻하시는 자신의 길을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쫓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쫓길 바랍니다. 그러면 틀림없습니다. 항상 주께서 사용하실 것입니다.
넷째로 주의 영광의 원리입니다.
창세기 26장을 보니 이삭이 우물을 팝니다. 이때 그랄 사람들이 그 우물을 빼았습니다. 이때 이삭은 그들과 전쟁과 싸움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계속 양보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악을 다투면서 경쟁하기 보다,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양보합니다. 죽일 듯 싸우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가장 좋은 우물을 주십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랄 사람들이 시셈을 내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보호하십니다. 이곳 우물 이름이 바로 “르호봇”입니다. 여기서 보면 주의 영광의 원리로 이삭은 계속 우물을 양보한 것이요, 하나님은 마침내 이삭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의 원리는 “내” 유익이 먼저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이 높여 지길 원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 때문에 내리는 결정들, “우주적 하나님의 나라”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하는 그러한 동기를 가진 결정들, 이러한 결정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결정인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직장 생활을 하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재차 확인하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마음 속에서도 주의 종이 되길 간절히 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자 친구가 절대 반대합니다. 결정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그 남자가 많은 기도 후에 여자 친구를 떠나 보냅니다. 아픈 결정이었습니다. 괴로운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결정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이 청년의 결정은 주의 영광의 원리에 따른 결정이었던 것입니다.
다섯째로 하나님의 섭리의 원리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섭리를 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위의 4가지 원칙적인 원리와 함께 좀더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는 마지막 한 가지, 섭리의 원리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반드시 고려 되어야 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이 원리가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손길과 음성은 하나님의 섭리를 통하여 우리 개인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구체적 섭리는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그리고 경건한 사람들과의 만남과 진실한 대화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시며 그 뜻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체적 섭리를 분별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도와 만남입니다. (다시 말하면,) 간절한 기도를 통한 마음 속의 확신과 주께서 허락하시는 새로운 만남의 역사입니다. 창세기 24 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종을 보내어 자기 아들 노총각 이삭의 아내를 구하여 오게 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과정을 보면,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알기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분별하는 지혜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종이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분별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기도와 만남을 통한 것이었습니다. 이 두 요소를 통하여 그는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였습니다. 곧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때, 우리로 하여금 기도와 만남을 통하여 확실히 섭리를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기도를 통한 섭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소원을 갖게 됩니다. 시편 37:4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하였고, 빌 3:13에서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마음 속의 소원은 언제나 두 종류인데 죄성으로 인한 소원 (Sinful desire)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원(God-given Desire)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소원이 우리의 소원이 되는 것은 바로 기도를 통하여 생깁니다. 하나님의 목적와 영광을 보기 때문에 생기는 우리의 소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에 대하여는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의 소원이 나의 소원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길을 보여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혜는 그 구체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5절 말씀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셨고, 예레미야 29장 12절과 13절에서는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분명 하나님은 주님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길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체적 상황에서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길 기뻐하시며 그 뜻을 보여 주시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가운데 반드시 알려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간절한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하여 알려 주십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만남입니다. 곧, 사람들의 만남이란 철저한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남은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는 최고의 섭리이십니다. 왜 하나님은 이 사람을 만나게 했을까? 그 답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알게 하시는 답일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많은 결단들이 만남의 축복 속에 있습니다. 만남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 외 아주 중요한 결정을 하나님께서 도와 주실 때 쓰시는 방법으로는, 꿈을 꾸게 한다거나, 급한 상황의 변화가 있다거나, 아니면 성령의 강한 내적 음성을 들려 주시는 방법이 있습니다.특히 하나님의 뜻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마음 속에 강한 충동을 주시는 그 음성을 들으셔야 하는데요, 저는 그 음성을 이렇게 확인합니다. 길을 가는데 성령님이 강한 충동을 주십니다. 이 사람을 전도해라. 운전을 하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생각이 나며 전화를 하고 싶어집니다. 가난한 전도사님을 보았는데 집에서 가서 경제적으로 도와주라는 충동을 느낍니다. 이러할 때 주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은 나의 마음 속의 그 충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지 아닌지 우리의 성경 지식을 통하여 쉽게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운전하는데 전화를 하라는 마음의 충동이 생겼습니다. 이때 이 충동이 성령의 음성인가 아니면 내 음성인가 하고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만일 그 전화하라는 충동이 위의 다섯 가지 원리에 맞는가? 확인만 하면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전화를 통하여 따지고 싸우고 싶은 충동이라면 벌써 하나님의 뜻이 아니지요. 그러나 돌보고 도와 주고 관심을 갖는 충동이라면 주의 뜻이 맞습니다. 성령의 음성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음성을 들으시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면 당장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마음 속의 충동이 하나님의 뜻과 잘 조화를 이루는 것이면 거의 틀림없이 성령님의 강권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방법대로 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확신하였으면, 더 이상 계산하거나 따지지 말고, 무조건, 바로 순종해야 합니다. 계산하지 마세요. 이렇게 하면 고생할까 편안할까? 인기를 얻을까 부끄럽게 될까? 고민하지 마세요. 롯의 아내처럼 주저하면 안 됩니다. 세상 조건에 의하여 방해받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발견하였으면, 순종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 때에는 더 이상 미래를 알려고 하지 말고, 그저 주님의 뜻에 순종하셔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가장 좋은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우리 하나님은 그 사람의 그 결정과 함께 평생 함께 하시며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먼 훗날이 되면, 우리는 그의 때가 되어서야, 주님과 함께 결정하였던 인생의 결정들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을 보게 되면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과 그 크신 뜻을 헤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과 경배와 존귀가 저절로 나오게 되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결국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모든 동기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에 있습니다. (마 6:33)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어떤 때는 더 가난하고 어렵고 고달픈 길로 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으로 오는 인생의 수다한 결정 속에서, 이제는 더 이상 인간적이고 어리석은 결정들이 아닌, 여러분을 가장 사랑하시고 가장 복을 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항상 주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주의 뜻대로 살아 가셔서 여러분의 인생이 영원토록 하나님께 기억되는 축복된 주의 백성의 여생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데반 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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