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교회생활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실제가 무엇인가를 알고 성령님이 인도하심을 따르는 교회일 것이다. 그러나 조정기간을 거치면서 바울 사도가 배웠던 방법으로주님의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배운 후에 시작된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운영되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지금 교회의 상태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 방법으로 교회를 시작하고 유지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계속 검증해 나가고 있는 단계이지만 궁여지책으로 필자가 함께하는 공동체가 운영되어지는 모습을 가감 없이 기술하여 나누고자 한다.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공동체라고 한다면, 우선 어떤 것도 인위적인 요소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각 개인들을 조종하거나 통제하거나 억압하거나 강요하지 않으셨듯이, 공동체를 운영할 때도 지체들을 조종하거나 통제하거나 억압하거나 강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필자가 함께하는 공동체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약간씩 거론하였지만, 필자는 교회 공동체를 만들려고 생각도 하지 않았고, 교회 공동체를 이끈다는 생각 자체를 아예 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동체가 시작되었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교회 공동체를 이끈다고 하면 한국 교단에서 이단이라고 매도할 것이 분명하고 그러한 분위기를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필자가 교회 공동체를 인도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작은 교회에서 특강을 하면서 공동체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작은 모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랐다. 그러나 나중에 그 모임이 교회 공동체가 만들어지기 위한 태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교회의 시작은 인간의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필자가 함께하는 공동체는 이제 막 공동체로서의 조정기간을 빠져나왔다. 제자들이 주님께 배웠던 3년 반이 넘는 시간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조정기간 이후의 공동체 생활을 막 시작하였다. 여기까지의 경험을 가지고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공동체 생활이 어떤 것인가를 나누고자 한다.
1.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교회의 모델
조정기간 내의 공동체 모습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였던 예루살렘 공동체 모습과 거의 같았다.(각주참조) 이 공동체는 세상의 교회들과 완전히 달랐다. 가장 큰 특징은 가르치는 사역에 주력을 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가르치는 사역은 공동체가 시작되면서부터 지금까지 매주 월요일 5시간씩 계속되고 있다. 교육 내용은 필자가 주님을 만나고 3년 8개월, 근 4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주님으로부터 배웠던 내용을 가지고 같이 나누었다. 필자는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론적인 부분은 잘 알지 못한다. 성령님의 기름부음에 의해서 가르쳐 주시는 대로 신앙이 이론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나누었다. 그 내용을 보면,
⦁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 계신다는 것
⦁ 성경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
⦁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
⦁ 하나님은 일의 근원을 따지신다는 것
⦁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계획으로 하게 된다는 것
⦁ 인간의 계획으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것
⦁ 신앙은 받아 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의 형성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
⦁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
⦁ 예수님은 세미나 대상이 아니라 만나야 할 대상이라는 것 등이었다.
신앙의 근간이 되는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하여 회개, 기도, 예배, 찬양 등 신앙생활에서 밀접하게 부딪치는 주제들과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들, 사탄의 정체에 대하여, 귀신의 실체에 대하여, 기적의 능력에 대하여,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 잘못 가르치고 잘못 배워서 망가진 우리의 삶의 오류들을 바로잡는 주제들에 대하여 성령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조명시켜 주시는 대로 가감 없이 지체들과 강의를 통하여 나누었다.
강의가 계속되는 동안 지체들은 눈에 띄게 변화되었다. 믿는 자의 표적이 나타났고 그 표적을 보면서 자신 스스로가 성경의 기록대로 믿는 자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주님이 동행하셔서 그 표적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인식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그들 속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교육이 계속되면서 지체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대답을 듣는 부모와 자식 관계 속으로 들어가 신앙의 진수가 무엇인가를 알아 갔다. 보이지 않는 영의 실재에 대해서 인식하고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따라 아버지의 뜻을 파악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성경의 기록 속에 나와 있는 신앙의 선각자들과 같은 그러한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강의를 하면서 필자가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는 많은 책들을 참고하였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들을 마치 하나님의 계시인 것처럼 써놓은 책들이 대부분이어서 독서의 양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스트레스가 더 많았다. 결국 주님께 여쭈어보고 주님으로부터 응답을 듣는 것이 최선이었고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여 가르치시면 그 기름부음이 알게 하신다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었다.(요일 2:27) 그야말로 학자와 같이 알게 하셨고 학자와 같이 말하게 하셨다. 주님으로부터 들었던 응답에 대해서는 시간을 갖고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번 말씀하시는(히 1:1) 그 방법에 의존하여 응답하신 내용을 다시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려서 확인하는 시간을 두었다. 응답의 내용 또한 성경과 대조하여 성경에 어긋나는 내용이 있는지를 분별한 후에 최선을 다하여 조심조심 나누었다.
화요일은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치유 사역이 계속되었다. 이 치유 사역은 온전한 성령님의 사역이었다. 영적인 사역은 영이 육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동안 많은 영성집회 현장에서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과 함께 하는 척’하는 가식적인 행동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이런 눈꼴사나운 인위적인 모습들을 보아왔기 때문에 공동체 사역에서는 인위적으로 있는 척하는 행동들을 철저하게 배제하였다. 세상에서 말하는 명상이라든가 심리학을 이용하는 것 따위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하게 있는 그대로 성령님께 맡기는 사역이었다. 사역자들에게는 사역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내면으로 기도하게 하였고 기도 가운데 성령님께서 보여주시고 말씀하신 것들에 대해서만 나누게 하였다. 보여주신 것이 없으면 그대로 없다고 하고 마무리를 하게 하였다. 필자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체험으로 확인하였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 맡기면 된다는 생각이 분명하였다.
모든 것은 성령님께 맡기면 되는 것이었다. 있는 척하는 가식은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임이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역이 이생의 자랑이 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게 조명되었다. 성령 사역은 돈과는 무관한 사역이다. 돈과 무관한 사역이기 때문에 홍보할 필요도 없었고 자랑할 필요도 없었다. 처음에는 사역이 밋밋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성령님이 일하신 흔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별것이 없는 것 같은 사역이었는데 사역을 받은 사람들의 회복 속도는 빨랐다. 마음에 안정을 찾아가고, 귀신이 떠나가고, 병든 자들이 나음을 입었다. 성령님의 치유 사역은 매주 화요일에 계속되었다.
사역자를 뽑는 과정은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방법에 따랐다. 사역자가 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관계가 회복되어 분명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것을 해석하여 적용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나누고자 하는 것은,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교회는 교회 운영에 관한 모든 것이 인간의 생각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져 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영의 원리가 교회의 운영에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에 교회생활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 어떤 경우도 인간이 하나님을 도와주는 일은 없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신약성경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의 사역은 두 사람을 한 팀으로 묶어서 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각주참조) 이 모습대로 공동체가 시작되면서 필자와 함께 하였던 특별한 성도가 있었다. 그 당시 그 사람은 목사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4년제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였고 목사 안수를 받은 자였다.지금은 목사직을 내려놓았다. 교단도 탈퇴하고 목사직도 반납하였다. 목사가 성경에 없는 직분이라는 것을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평신도로서 배우고 있다. 이 지체의 역할은 오중 사역에 있는 목자와 같은 역할이었다. 그가 사역을 감당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볼 수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은 목자가 양의 우리를 고치듯이 공동체 건물을 보수하는 일과 목자가 양들을 돌보듯이 공동체 지체들을 돌보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역할은 세상 교회의 목사들의 일과는 전혀 달랐다. 성경에서 설교는 복음 전도자들이 하였듯이, 다시 말해서, 빌립 집사가 설교를 하고 스데반 집사가 설교를 하였듯이 설교는 평신도들이 하였다. 설교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일이나 영적인 사역 등 공동체 생활에 관한 전반적인 것들이 모두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목사의 역할은 비가 새는 교회를 수리하고, 애경사를 당한 지체들을 돌보고 보살피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여기서 나누고자 하는 것은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교회의 생활 속에 목자의 업무는 글자 그대로 목자의 일과 같다는 것이다. 목자가 양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직분이라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목사 한 사람에게 모든 업무와 업무에 관한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기존 교회의 목사들의 직무와는 전혀 달랐다.
공동체의 조정기간이 마무리되어갈 때쯤 새로운 리더들을 단 위에 세워서 훈련을 시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그 음성대로 두 명의 리더를 선발하여 격주로 주일 설교를 하도록 훈련을 시작하였다. 필자는 조만간 새로운 지역에 공동체를 세우러 나갈 것이라는 음성을 들었다. 지금의 공동체를 보며 설교자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번갈아가며 설교를 했던 초대교회의 모습이 그대로 구현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 공동체는 필자를 세워서 하나님께서 세우셨다. 그리고 이제는 이 공동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너는 내가 지시하는 곳에 가서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라”고 말씀하셨다. 지금의 공동체를 맡길 수 있는 리더를 발굴하여 훈련시켜서 맡기고 필자는 다른 곳으로 가라는 음성이었다. 조만간 필자는 그 음성대로 순종하여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지역의 공동체가 태동되기 시작한 것을 주의 깊게 보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를 살펴보고 나누고자 한다. 지금 필자가 함께하는 공동체를 살펴보면 성경에 기록된 내용과 거의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자라게 하셨다.”(고전 3:6)는 바울 사도의 고백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에 설렘이 있었다. 필자가 씨를 뿌린 공동체가 어느 정도 커지고 자립할 정도가 되니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새로운 곳으로 떠날 것을 준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공동체를 떠나는 필자의 모습이 바울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교회 공동체는 초대교회 모습과 같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교회에 담임제도가 없다는 것이다. 성령님이 이끄시는 교회는 순회 사역으로 운영되어진다는 것이다. 순회 사역이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교회 운영의 한 면이라면, 교회를 세습한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순회 사역을 하는 것이 성령님이 교회를 이끄시는 방법이라면 지금의 담임목사 제도는 전혀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또한,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교회는 자연발생적으로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잉태한다. 교회를 인간의 생각으로 세우고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다시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씨를 또 다른 곳에 뿌리게 하시고 어느 정도 자라면 새로운 장로를 선출하여 돌보도록 맡기고 교회를 개척한 사도는 또 다른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자신이 개척한 교회를 순회하면서 감독하는 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1세기의 모든 교회는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떠돌이 순회 사역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다. 1세기 열두 사도의 가르침이라고 불리는 ‘디다케’의 내용 중에 “떠돌이 사도들에 대한 처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각주참조) 담임 목회라는 것은 성령님이 인도하셨던 초대교회에는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가 함께하는 공동체가 초대교회의 형태를 닮아가기까지 그 과정을 되돌아보면, 성경적인 방법 이외의 어떠한 인위적인 방법들도 취하지 않았다. 성경에 없는 것들은 과감하게 따르지 않았고, 기존 교회에 있는 조직에 관한 것들은 어떠한 것도 취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공동체에는 조정기간 내에 조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하실 때 어떤 조직이 있었다는 기록을 볼 수 없다. 오순절 성령 세례 이후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많은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직분이 주어지고 조직들이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 공동체 모형에서는 3년 반이 넘는 기간 동안 그야말로 남전도회, 여전도회, 청년회, 학생회 등 어떤 조직도 없었고, 간판도 없었고, 십자가도 없었고, 전화번호도 없었다. 필자가 함께한 공동체 또한 겉보기에 교회라고 볼만한 어떤 것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원근 각처에서 백여 명에 가까운 지체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함께 나누고, 쌀이 없을 때 쌀을 나누고, 몇 푼 안 되지만 차비가 없을 때 차비를 나누며 서로가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는 대로 그렇게 섬기면서 생활해 왔다.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교회생활이라고 한다면, 우선 인간의 생각에서 비롯된 경영 이론이나 세상적인 시스템이 교회에 들어올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하나님께서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교회를 운영해 나가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실존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신다. 이에 대한 증거로는, 필자가 만났던 하나님을 시간이 지나면서 지체들이 만나기 시작했고 필자에게 주어진 믿는 자의 표적들인 방언, 신유, 축사 등의 능력들이 모든 지체들에게 동일하게 나타났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베드로가 행하였던 기적을 바울이 행하였듯이 그들도 믿는 자라는 것을 같이 증명할 수 있는 일들이 벌어짐으로 인해서 모두가 같은 지체로서 능력이 함께 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교회의 머리되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체험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2. 공동체 지체들의 교회생활
공동체 지체들은 주일안식일과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를 지켰다. 안식일에 대해서는 주일이 안식일로 대체되었다는 명확한 성경적 근거에 의해서 주일은 지켰고, 절기의 문제는 주님께서 지상사역을 하실 때 지키신 절기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었다는 것과 사도 바울이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에베소 교회를 들르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향한 기록들을 종합하여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을 찾아서 지키게 되었다.자세한 것은 필자의 책‘성경적 생활’ 05. 유년기, 절기와 성경적 생활을 참조하라.
3. 헌금
헌금의 항목에 관해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항목만을 지켰다. 항목에 없는 헌금들은 일절 근절하였다. 성경에 있는 헌금의 항목을 보면, 첫 열매, 십일조, 감사헌금, 구제헌금, 절기헌금 외에는 없다. 따라서 이상의 항목 이외의 헌금은 어떤 명목으로도 강요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았다. 십일조와 첫 열매, 절기헌금은 반드시 해야 하는 헌금으로 가르쳤다. 절기헌금의 경우는 “일 년에 세 번 남자들은 공수空手로 나오지 말라.”(신 16:16)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액수와는 상관없이 감동되는 대로 하되 빈손으로 나오지 않도록 하였다.
건축헌금이나 선교헌금은 성경에 없는 항목이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였을 당시 솔로몬의 부를 가지고도 충분히 건축할 수 있었지만 아비인 다윗이 성전 건축에 관한 모든 재료를 준비하여 성전을 건축하였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원리이다. 이 영의 원리에 의해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선교헌금이란 명목 아래 헌금을 받아서 선교지에 지원을 해주는 것도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를 하러 보내실 때 “전대도 가져가지 말고 옷도 두 벌 가져가지 말고 신은 신되 빵도 가져가지 말고 그냥 빈손으로 가라”(막 6:8~9)고 하셨던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성령님의 조명하심으로 인식된다면 선교헌금이 얼마나 비성경적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그 필요를 하나님께서 채우신다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인간의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신약의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극한의 간난 속에서 연보를 해서 바울에게 보냈던 헌금이 선교헌금이라는 주장은 전혀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 마음에 각자 감동을 주시어서 헌금을 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주님의 분명한 가르침은 선교지에 나갈 때 전대를 가지고 가지 말라는 것이다. 또한 믿는 자들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내용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하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채우지 않으시겠는가? 반드시 채우신다. 까마귀를 통하여 엘리야를 먹이셨듯이(왕상 17:4) 하나님께서는 때에 따라 필요를 채우시고 알아서 먹이신다. 이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성경의 내용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신앙이 아니다. 따라서 선교헌금이나 건축헌금은 성경에 없는 헌금 항목이라는 것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가 함께하는 공동체는 두 번의 이사가 있었는데, 공동체에 나오는 지체들은 세상에서 찢어지고 깨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건축헌금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내는 헌금,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헌금, 즉 체면상 하는 헌금이 공동체에는 없었다. 우선 차비가 없는 사람들이 많았고 집에 쌀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체면을 생각하고 헌금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진한 감동이 있을 때, 그때 있는 얼마 안 되는 것을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필요한 만큼 부족하지 않게 하나님의 방법으로 채우셨고, 공동체의 운영에 부족함이 없이 채워져 가면서 조정기간을 빠져나왔던 것이다. 이제 또다시 공동체를 옮겨야 할 때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하실 것을 기대하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전을 주실 것을 모두가 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다.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교회는 교회를 지으면서 교회가 빚을 지고 성전 건축의 문제 때문에 성금을 강요해서 지체들이 떠나는 그런 일들은 결코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돈이 없어서 세상에 빚을 지고 건축을 하시겠는가? 하나님은 실존하시는 분이시고 홍해를 가르신 분이시다. 이것을 믿는다면 인위적인 방법과 인간의 생각으로 헌금을 강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위적으로 헌금을 모아서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웃기는 이야기다.
4. 전도
전도 또한 인위적으로 하지 않았다. 주보도 없고, 간판도 없고, 전화도 없을뿐더러, 원근 각지에서, 강원도에서 전라도 끝까지 각처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주일에 참석하지 않아도 그들을 심방할 여력조차 없었다.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인위적인 방법으로 먹을 것을 사고 전단지를 들고 나가서 노방전도를 하는 형식적인 행위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사람들을 보내셨다. 공동체를 방문한 사람들 중 그냥 이유 없이 오는 사람들은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이 병든 사람들이었고 귀신들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공동체를 방문할 때에는 주님께서 손 붙들고 안내하신 사람들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보살폈다. 그들이 사역도 받고 여러 가지 노력도 하였지만, 실질적으로 회복된 때는 영의 실재인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예배를 회복하면서부터였다. 그러면서 모든 질병과 귀신들림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사역을 하는 사역자들에게는 인위적인 행동이나 자기 의를 드러내는 어떤 것도 철저하게 차단시켰다. 자신에게 성령의 능력신의 능력이 와 있다는 것을 이생의 자랑으로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병든 자가 낫고 귀신이 떠나는 믿는 자의 표적이 드러났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새로 온 사람들은 공동체에 안착해 갔고, 필자는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믿는 믿음이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의 말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기를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믿는 믿음의 뿌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려졌다는 것에 그야말로 신이 났다.
5. 찬양
공동체 지체들의 찬양하는 모습들을 바라보면 찬양의 기름부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불치병을 치유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 귀신들린 자녀를 두어서 그 아이를 데리고 전국 안 가본 데가 없을 만큼 돌아다녔어도 해결 받지 못해서 낙담을 하고 있다가 하나님께서 일하셔서 정상으로 돌아온 그 아이를 바라보면서 올리는 찬양, 재정이 망가져 완전히 폐인이 되었다가 그 재정이 회복되어서 하나님께 올리는 감사함의 찬양, 딸랑 피아노 한 대를 놓고 드리는 찬양이지만 그 찬양의 기름부음은 대단했다. 박자가 맞지 않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지만 감사와 기쁨으로 눈물 콧물이 뒤범벅된 찬양, 자기 소원이 이루어져서 한나가 사무엘을 안고 흔들면서 올렸던 찬양과 같이 공동체 지체들의 찬양에서 형식이나 꾸밈이나 가식은 찾아볼 수가 없다. 찬양집 하나 변변한 것이 없어서 유인물을 가지고 뒤적이면서 곡을 찾아 부르지만, 오케스트라와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 그 어떤 교회의 찬양보다 기름부음이 있고, 성령님이 임재하시는 현장이었다.
6. 예배
예배 때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고 다들 편한 복장으로 예배를 드린다. 예배의 형식은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을 같이 나누는 간증부터 시작해서 어떤 때는 나눔으로 끝이 날 때도 있고 나눔이 끝나고 나면 병든 자들의 치유를 위한 기도가 있을 때도 있다. 그리고 주신 말씀을 같이 나누고 상고하고 예배가 끝난 후에는 점심을 같이 나누고, 평일에 사역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1시간 정도 주일 사역을 해줌으로써 영적인 쓰레기들이 제거되도록 하였다.
점심 준비는 공동체의 지체들이 돌아가면서 형편에 맞추어 준비를 하고 공동체에서 일부를 보조한다. 어떤 경우도 식대를 받지 않는다. 초대교회 시대에 예배 후의 식사는 만찬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성찬이 항상 예배 후에 한 끼의 식사를 하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성찬을 하며 식대를 받는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한 끼 식사를 하면서 돈이 없어서 먹지 못한다는 것도 공동체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공동체에서 매월 첫 주는 성찬을 한다. 손톱만한 빵조각, 병아리 눈물만큼의 포도주가 아니다. 세상의 교회에서 행하는 것과 같은 형식적인 성찬이 결코 아니다. 충분한 떡을 떼고 감당할 만큼의 포도주를 마신다. 그야말로 한 끼의 풍성한 만찬을 즐기면서 주님을 기린다.자세한 것은 ‘영의 원리’ 11-3. 공동체 이야기를 참조하라.
[회복시리즈 04. 그리스도의 영 中 일부 발췌 / 박찬빈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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