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복음주의 운동의 내용과 방향
I. 복음주의의 부흥과 복음주의 운동의 과제
II.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III. 한국 복음주의 운동의 역사
IV. 한국복음주의 운동의 내용과 방향
1) 복음주의의 범위
2) 복음주의와 연합운동
3) 복음주의 신학의 과제
4) 복음주의와 전도 및 선교
5) 복음주의와 사회개혁
V. 맺는 말: 2000년대의 복음주의 운동을 위하여
I. 복음주의의 부흥과 복음주의 운동의 과제
현재 세계적으로 복음주의 운동은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첫째는 복음주의 교회의 부상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기독교신학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로 나뉘어지게 되었고, 대부분의 주류교단들이 자유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보수주의들은 분리되거나 소수파로 전락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복음주의의 부흥은 미국의 교회판도를 바꾸어 놓고 있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자유주의교회들이 더 이상 주류가 아니고, 과거의 주류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둘째는 WCC의 쇠퇴이다. 자유주의교회의 등장과 더불어서 이들의 연합체인 WCC도 위기를 맞고 있다. WCC는 회원교회들의 약화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맞고 있다. WCC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던 미국의 주류교단들이 교세격감으로 인해서 WCC를 열심히 도와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것은 미국의 NCC도 마찬가지이다. 미국 NCC는 만성적인 재정적자로 고민하고 있으며, 대규모의 구조조정을 요구받고 있다.
셋째는 복음주의 교회의 사회 참여이다. 복음주의 교회의 성장으로 인해서 복음주의교회는 더 이상 방어적인 자세에서 머물지 않고 보다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금 미국에서 기독교의 사회참여는 진보주의자들의 사회참여 보다는 복음주의자들의 사회참여가 더욱 강하다. 예를 들면 고어의 정책을 지지하는 진보주의자들의 결속력보다는 부시를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의 결속력이 더욱 강하다. 따라서 복음주의는 사회적인 관심이 약하다는 것은 옛 이야기가 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본인은 한국의 복음주의 운동의 내용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미래의 방향을 논의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위해서 먼저 복음주의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한국의 복음주의의 역사를 간단하게 언급한 다음에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고자 한다.
II.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먼저 복음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복음주의를 정의하는 방법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부정적인 방법으로 복음주의가 아닌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빈 공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복음주의는 잘못된 신앙이라고 생각되는 것과 싸워왔다. 첫째 복음주의는 형식적인 전례주의와 싸웠다. 이것은 웨슬리가 영국성공회와 싸운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둘째 복음주의는 냉랭한 정통주의와 싸웠다. 복음주의에 있어서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체험이다. 복음주의의 이런 모습은 부흥운동에서 잘 드러난다. 세 번째로 복음주의는 세속과 타협한 자유주의와 싸웠다. 이것은 20세기의 현상이다.
다음으로 긍정적인 측면에서 복음주의가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저는 여기에서 편의상 티모디 스미스의 정의를 따르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복음주의의 권위는 성서요, 복음주의의 표시는 중생이요, 복음주의의 사명은 선교라고 말했다. 신학적으로 볼 때 복음주의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성서의 권위이다. 신자의 생활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거듭남의 체험이다. 그리고 미래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선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복음주의란 어떤 교파적인 전통과는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복음주의 내에는 여러 전통이 있을 수 있다. 개혁주의, 웨슬리주의, 오순절주의 등이 그것이다. 복음주의는 이런 교파적인 전통보다 큰 개념이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교파가 복음주의를 전유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적인 복음주의, 웨슬리안 복음주의, 오순절적인 복음주의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복음주의 운동은 근본적인 데서는 일치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에서는 어느 정도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III. 한국 복음주의 운동의 역사
우리가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복음주의운동의 위치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한국교회의 초기 모습은 전형적인 복음주의라고 생각한다. 초기 선교사들은 철저한 복음주의자들이었다. 여기에서 복음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자유주의와 싸웠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복음전도에 충실했다는 의미에서이다. 사실 복음주의에서 신학이 중심 이슈로 등장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선 다음에서이다.
이런 한국교회의 복음주의적인 모습은 1905년에 설립된 한국복음주의선교사연합공의회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이 모임은 한국최초의 교파를 초월한 연합회였고, 그 명칭에 복음주의라는 말을 붙였다. 그리고 이 모임이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유일한 하나의 복음주의교회를 조직하는데 있다”고 했다. 여기에 근거해서 장로교와 감리교라는 기존의 명칭을 포기하고 하나의 “대한 예수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이것은 한국 최초의 선교사들이 복음주의를 지향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모임이 주로 강조했던 것을 보면 초기 한국교회 복음주의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선교를 위한 협력이다. 사실 수많은 복음주의 단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교에 있다. 이것을 위하여 성서를 함께 번역하고, 교육사업을 공동으로 진행하며, 선교지의 분할을 통해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되었다. 또한 이 연합회에서 계획한 중요한 것은 전도집회나 부흥집회의 공동개최였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이 연합회의 노력의 결실 가운데 하나였다. 이 점에서 WCC를 중심으로 한 연합운동과 복음주의 운동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이런 복음주의 정신에서의 연합활동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이 한국복음주의선교사연합공의회는 그후에 복음주의선교사협의회(Federal Council)로 명칭을 개칭하고, 이것은 1918년부터는 한국교회가 참여하는 조선야소교장감연합협의회를 만들고, 여기에서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만들어졌다. 이런 연합단체들이 복음주의적인 정신에 입각해서 복음전파를 위해서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부터 이런 복음주의는 진보주의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미국의 진보적인 신학의 수입과 더불어 사회복음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한국교회의 연합활동도 여기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해방 전까지 한국교회의 주류는 복음주의였다.
해방이후부터 한국교회는 새로운 판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해방이후 한국교회는 WCC를 추종하는 NCC와 여기에 대해서 반대하고 나선 NAE로 분열되게 되었다. 일제 시대의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복음주의가 우세했지만 해방이후의 한국기독교협의회는 주로 WCC와 연대해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부터 한국의 복음주의는 주류에서 비주류로 전락하게 되었다. 여기에 설상 가상으로 한국 NAE계열이 자체적인 문제로 붕괴되고, 보다 극단적인 ICCC계열이 한국의 보수주의 교단의 연합체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진보적인 NCC와 분열주의적인 ICCC로 갈라지게 되었고, 신앙은 보수적이지만 연합적인 정신을 가진 온건한 복음주의는 한국교회의 중립적인 지대에 속하게 되었다.
온건한 보수주의가 교권에서는 비켜있지만 해방이전부터 내려오던 복음주의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흐름은 계속되었다. 이것이 한경직 목사와 빌리 그래함을 중심으로 하는 전도운동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밥 피얼스의 전도와 사회봉사가 함께 어울려져있었다. 사실 복음주의운동의 핵심은 전도운동이었지만, 이 전도에 대해서는 진보주의적인 NCC도, 근본주의적인 ICCC도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한경직목사는 50년대와 60년대를 이어 오면서 민족복음화운동에 앞장섰다. 한경직목사는 이런 운동을 하면서 진보주의도 근본주의도 아닌 미국의 복음주의자들과 연대했다. 이런 점에서 해방이후의 복음주의의 전통은 한국교회의 교단적인 연합사업을 통해서가 아니라 복음주의자들의 초교파적이고, 비교권적인 연합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시대의 한국교회의 대표성은 NCC도 ICCC도 아닌 바로 이런 복음주의자들이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60년대는 NCC와 ICCC의 대립이 치열했던 시기이다. 하지만 ICCC의 활동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약화되기 시작했다. NCC를 중심으로한 반독재운동은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이들이 가지고 있는 진보적인 신앙은 일반적인 한국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가운데서 실질적으로 한국교회를 이끌어 왔던 주요흐름은 빌리그래함전도대회, Expolo 74등 대규모의 전도부흥운동이었다. NCC가 몇몇 교단정치가와 신학자들의 독무대였다면 이 운동은 한국교회의 일반대중들의 속까지 파고들만한 대중운동이었다. 이 부흥운동은 70년대와 80년대의 한국교회의 부흥을 주도했고, 이것은 한국교회에서 복음주의가 다시금 주도권을 잡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70년대와 80년대 NCC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민주화운동이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터 약화되기 시작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한국사회는 투쟁적인 민주주의가 아닌 개혁적인 민주주의가 요청되기 시작했고, 이런 상황에서 복음주의적인 정신을 가지면서 사회를 개혁하려는 복음주의적인 사회개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큰 공헌을 한 분들이 바로 이 복음주의협의회에 속한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90년대부터 한국의 복음주의는 반사회적인 그룹이 아니라 사회의 개혁적인 그룹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복음주의 기독교도 한국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이 되어야 한다.
IV. 한국복음주의 운동의 내용과 방향
지금까지 한국교회 복음주의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제 한국복음주의 운동의 현황을 살펴 보면서 필자 나름대로의 생각을 밝히고자 한다.
1) 복음주의의 범위
이미 위에서 본인은 복음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이것을 이제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설명하겠다. 1905년에 한국에 장감선교사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의 이름이 복음주의선교사공의회였다. 따라서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장감이 공유했던 이름이다. 여기에 전례주의적인 성공회는 가담하지 않았다. 해방이후 NAE가 형성되면서 NAE의 중심그룹이 장로교보수파와 성결교회였다. 이때부터 한국성결교회는 복음주의의 주도적인 멤버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복음주의는 원래 교단적 운동이 아니라 한경직목사를 중심으로한 민족복음화운동이 주체였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미국복음주의도 마찬가지이다. 미국복음주의의 핵심은 어떤 교단보다도 빌리그래함을 중심으로한 전도운동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진보주의와의 싸움에서 장로교의 보수파들이 가장 앞장섰고, 그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장로교 이외의 사람들은 제외되기 시작했다. 사실 성결교회는 복음적인 교단이며, 감리교회에도 이런 분들이 많이 있다. (실제로 유동식교수는 감리교의 본래적인 신학을 체험적 복음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유동식, [한국감리교회의 역사], 145.) 통합측에도 이런 분들이 많이 있다. 한국교회의 복음주의는 원래 장로교보수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한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이런 분들을 포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오순절운동이다. 우리는 세계교회에서의 오순절운동의 등장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WCC는 이것을 인정하고 그들을 포함하고자 한다. 하지만 오히려 교리적인 복음주의는 이들을 전통적인 잣대로 정죄하면서 배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이단시비가 있었을 때에 한국의 복음주의들은 여기에 대해서 침묵했다. 그들은 외로왔고, 그래서 NCC에 가입하게 되었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오순절운동을 복음주의의 운동에 합류시키는 것은, 오순절운동을 위해서도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본인은 한국의 복음주의 운동이 신학적 자유주의와 형식적 전례주의를 배격하면서, 동시에 성서의 권위, 체험적 신앙, 선교에 관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과 가능한대로 연대하여 그 폭을 넓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2) 복음주의와 연합운동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주의의 연합운동 정신을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다. WCC가 단일교회의 형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을 때 복음주의 진영은 교회의 일치는 영적인데서 찾아야지 기구적인데서 찾아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가시적인 교회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불가시적인 교회의 단일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근대적인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서구사회는 하나의 사회에 하나의 교회를 강조하여 왔다. 즉 사회의 통일성을 교회의 통일성에다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근대사회는 더 이상 종교의 통일성에 사회의 통일성을 두지 않는다. 이렇게 되자 다양한 교파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WCC가 단일교회를 추구하는 것은 전근대적인 발상이라고 본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해야 한다. 18세기 서구사회는 세속화되기 시작했고, 종교는 더 이상 국가의 지배와 후원을 받지 않게 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등장한 것이 교파주의이다. 교파주의란 한국에서는 부정적으로 이해되지만 최근의 미국교회사가들은 정교의 분리이후에 다양한 종교집단들이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서 만들어낸 종교경쟁 시스템이라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다양한 교파들이 경쟁을 통하여 신자들을 모으게 된다. 우리는 다양한 사회에서 다양한 교파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될 가능성도 없다.
복음주의는 교파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역사적으로 복음주의라는 이름아래 수많은 교파들이 모여서 행동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이 이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복음주의는 아무리 다양하다고 할지라고 기독교라는 이름을 사용하려면 몇가지 중요한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시대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20세기에 들어서서는 성서의 절대영감, 구원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유일성등이 그것이다. 복음주의의 연합운동은 이런 전제에 합의가 된다면 개교단의 구체적인 정치제도나 예배형태에 관계없이 서로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한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다양성으로 이해되어야 할 문제를 옳고 그름의 문제로 비화시켜 동지를 적으로 만드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한다.
3) 복음주의 신학의 과제
최근 한국신학계에 큰 변동이 일고 있다. 그것은 한국신학계에 복음주의계통학자들의 등장이다. 사실 해방이후 한국의 신학계는 진보적인 그룹이 주도했다고 본다. 하지만 70년대 이후에 복음주의적인 교파들의 정비와 함께 신학교육기관들이 정비되고, 이런 기관들에 해외에서 유학하고 들어온 많은 학자들이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한국복음주의신학회의 성장을 보면 잘 알수 있다. 이들이 한국신학계의 판도를 바꾸어 놓고 있다.
하지만 이런 외형적인 모습과는 달리 내면적으로 보면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그중의 하나는 최근에 들어온 많은 학자들이 거의가 복음주의와는 관계없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소수의 학교 외에는 복음주의계통에서 박사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히 유럽, 더 구체적으로는 독일에서 공부하고 온 학자들은 근본적으로 복음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복음주의계통의 신학자들은 교단의 눈치 때문에 자기 입장을 하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 본인의 생각으로는 한국 복음주의 신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몇가지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세계적인 복음주의의 흐름을 비 복음주의 계통에서 공부한 학자들로 하여금 접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계의 복음주의신학계와 학문적인 교류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한국교회의 복음주의 신학 수립을 위한 학술재단의 조성이다. 최근 미국의 복음주의 역사학은 엄청난 발전을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휫튼대학의 복음주의연구센타를 통하여 기금이 모아지고 이것을 통하여 수많은 연구가 나오고 있다. 한국교회는 복음주의 신학의 수립은 많이 말하면서 이것을 위하여는 투자하지 않는다.
셋째는 복음주의 신학의 수립을 위하여는 신학교와 목회현장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구신학의 문제점은 지나치게 아카데미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복음주의 신학의 장점은 현장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
4) 복음주의와 전도 및 선교
시카고대학의 말틴 마티는 복음주의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빌리그래함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빌리 그래함으로 대변되는 복음주의 운동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전도이다. 복음주의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한다는 확신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복음주의의 어떤 다른 측면보다도 중요하다. 사실 근대복음주의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복음의 전파이다. 빌리 그래함은 평생 이 전도를 위해서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교리의 순수성 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전도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전도할 기회를 제공한다면 어느 정도의 의견의 차이를 인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무디도 마찬가지였다.
한국교회의 복음주의 운동도 전도를 위한 것이었다. 일제시대에 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는 100만 구령운동을 주도했으며, 1930년대에는 전진운동, 해방 직후에는 빌리 그래함전도운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50년대와 60년대를 지나가면서 전도운동은 연합운동의 주 관심사에서 멀어졌고, 신학적인 잇슈나 정치적인 잇슈가 연합운동의 주제가 되었다. 지금 한국교회는 성장의 쇠퇴를 경험하고 있다. 본인은 한국복음주의 운동의 가장 근본적인 주제는 전도가 되어야 한다. 원래 복음전도자(evangelist)와 복음주의자(evangelical)은 거의 동의어로 쓰여졌다. 전도운동은 근본적으로 교회성장운동이 아니라 구령운동이다. 교회를 채우기 위해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전도하는 것이다.
복음주의 운동은 항상 해외선교 운동에 앞장서 왔다. 종교개혁의 신학이 민족주의와 관련되어서 해외선교에 소극적이었다면 복음주의는 복음의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해외선교를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서 복음주의는 종교개혁을 뛰어 넘는다. 역사적으로 볼 때 복음주의자들은 항상 선교에 열심이었다. 특별히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은 가능한대로 복음을 순수하게 전파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기존의 선교가 Rice Christian을 만들었다고 비판하면서 복음 때문에 복음을 믿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전통을 가진 한국교회의 해외선교는 지금 어떠한가? 한국교회는 입으로는 복음의 능력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복음보다는 돈으로 선교하려고 한다. 구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도, 선교와 더불어서 중요한 것은 교회갱신운동이다. 한국의 기독교역사가 깊어가면서 한국교회는 부패한 모습을 갖게 된다. 복음주의는 한국교회에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또한 한국에는 명목상의 신자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들의 신앙을 보다 활기있게 만들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복음주의 운동은 진정한 성결운동을 벌여야 한다. 사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형식적이고, 지적인 신앙을 실질적인 가슴의 신앙으로 만들려는 운동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의 세계적인 성결운동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복음주의협의회가 케직사경회를 통해서 한국교회에 활력을 불어 넣으려고 하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5) 복음주의와 사회개혁
최근에 들어서서 복음주의의 가장 큰 변화는 활발한 사회참여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복음주의가 사회참여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주의가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고 사회에 나올 수 있게 되었다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의 사회참여는 복음주의의 정신이 담겨있는 사회참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70년대 중반이후에 미국의 복음주의가 사회참여를 하면서 진보주의의 사회참여와는 다른 색깔을 내기 시작했다. 먼저 가정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이다. NCC의 사회참여가 여권신장, 남녀평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복음주의의 사회참여는 가정보호, 순결강조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는 것이 낙태문제이다. 진보주의자들이 어미니의 선택에 강조점을 둔다면 복음주의자들은 태아의 살 권리에 더 큰 강조점을 둔다. 이것은 미국에서 가장 큰 잇슈이다. 여기에 대해서 한국 복음주의자들은 최근까지 별 반응이 없다.
둘째로 정교분리에 대한 재해석이다. 미국사회가 정교분리를 주장한 것은 잘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정교분리는 정부가 특정한 교파를 지원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의미이지 미국이 종교적으로 공백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20세기 중엽부터 많은 미국사람들은 정교분리는 모든 공적인 장소에서 종교적인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고 보게 되었다. 여기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 공립학교에서의 기도금지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최근 복음주의자들은 미국사회의 기초가 기독교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다종교사회에 있기 때문에 미국보다 더욱 힘들다. 한국 복음주의교회는 타 종교와의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어떻게 한국을 기독교적인 사회로 만들것인가 하는 중대한 과제를 갖고 있다.
셋째로 복음주의의 국제관계이해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주로 정치적으로 압박당하는 사람들의 인권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복음주의자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박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의 가장 큰 관심은 선교이며, 이 선교의 자유를 방해하는 국가에 대해서 미국정부를 통하여 압력을 행사하도록 하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인간은 누구나 복음을 들을 권리가 있으며, 이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복음주의도 한국의 외교정책에 이런 것들을 반영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의 복음주의는 에너지가 넘친다. 그러나 이 에너지가 바로 사용되지 않으면 않된다. 복음주의의 사회참여는 복음주의다운 것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 보다 깊은 토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V. 맺는 말: 2000년대의 복음주의 운동을 위하여
한국교회의 주류는 처음부터 복음주의였다. 이것이 해방이후 NCC의 등장으로 한 동안 후퇴하였지만 최근의 복음주의는 분명히 한국교회의 주류를 회복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의 복음주의는 자신감을 가지고 2000년대의 한국교회를 이끌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복음주의 운동이 많은 문제점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나친 배타주의, 사회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복음주의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복음에 대한 확신이다. 복음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인류의 문제 해결의 열쇠라는 신념아래 존재한다. 이것이 흔들리면 복음주의가 아니다.
둘째 대중성의 확보이다. 복음주의는 사실 교권운동이라기 보다는 자원운동이며, 엘리트 운동이라기 보다는 보통사람들의 운동이다. 복음주의는 이것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셋째 사회적응력이 강하다는 점이다. 복음주의는 신앙의 내용에는 타협이 없지만 그것을 전하는 방법에는 항상 융통성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복음주의는 교회조직, 예배형식, 커뮤니케이션의 다양화 등 수많은 점에서 보수주의와 진보주의가 갖지 못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 이런 요소들이 오늘의 복음주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20세기 초에 진보주의에 패배한 복음주의는 기독교의 주류에서 밀려나 근본주의라는 형태로 존재하였다. 하지만 근본주의는 복음주의의 본래적인 모습이 아니다. 70년대 중반부터 복음주의는 다시금 기독교의 주류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복음주의는 단지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소극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사회를 복음화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박 명 수 교수(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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