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

[스크랩] 칭의와 성화

수호천사1 2016. 7. 2. 06:45

칭의와 성화



1)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기의 기쁘신 뜻으로 말미암아 구원하실 자들을 무조건적으로 택하신다. 각 사람의 미래의 행위를 예지하사 택하신 것이 아닌 것은 모든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그 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요소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예지는 택함을 앞서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들을 무조건적으로 택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의 구원이 객관적인 사실임을 의미한다.

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에 근거하여 구원하실 자들을 의롭다 칭하여 주시는데 칭의는 하나님의 선택에 기인하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객관적인 사실이자 법적인 선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죽을 죄인들 중 일부를 택하사 법적으로 의롭다 선언하시고 죄책을 제거하여 주신다. 칭의가 외부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은 칭의에 필요한 근거가 우리 인간 안에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칭의의 근거가 인간 안에 없다는 것은 곧 칭의라는 법적 선언이 인간의 도덕적 상태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의로운 사람들을 의롭다 칭하시는 것이 아니라 죽어 마땅한 자들을 의롭다 칭하신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사 그들이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도록 선택하셨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자면 믿음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사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어 그리스도에게 접붙이신다. 그래서 믿음은 선택을 앞서지 않는다.

3)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칭하신 자들을 성화되게 하시며 최종적으로는 영화롭게 하신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 그리고 영화는 각기 구분되지만 서로 분리되지는 않는다. 즉 칭의 가운데 성화가 시작되며 성화의 종국은 곧 영화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화롭게 하실 자들을 택하시며 믿음을 주시고 의롭다 칭하시며 성화되게 하시는 것이다. 즉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만들어가시기 위한 언약의 출발점이다. 우리가 마땅히 구원받을 사람이기 때문에 의롭다 칭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의롭다 칭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죽어 마땅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영화로운 존재들이 되도록 하시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자신의 처참한 상태로 인하여 당황할 필요는 없으며 성화 가운데 나타나는 죄와의 싸움에서 때로는 패배한다고 할지라도 다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낙심할 필요는 없다. 성화는 구원을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이미 구원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필연적인 변화이자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단번에 영화롭게 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존하게 하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가운데 자라나는 우리로 하여금 영광 받으시기 위함이다.

4) 칭의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만 성화는 외부로부터 주어짐과 동시에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사역, 즉 성령 하나님의 내적 사역이다.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분명한 차이점은 하나님의 이러한 사역이 이제는 모든 성도들 가운데 전범위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은 율법보다 강력한 구속력을 지니게 된다. 즉 성막과 성전에 거하시던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영화로 나아가게 하신다. 영화는 이 땅에서는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으며 마지막 날 주님과 함께 살게 될 때에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5) 앞선 사실들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칭함을 받은 의인이라는 것이다. 실로 우리는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다. 성화의 과정 속에서 영화의 날이 오기까지 지속적으로 죄와 투쟁하는 의인된 죄인이다. 이러한 투쟁 가운데 우리는 고의적인 죄들을 반복적으로 범할 수도 있다. 어떤 것이 죄인줄 알면서도 죄를 범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그러한 상태 가운데 지속적으로 머물도록 방관치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칭하신 자들을 성화의 과정을 거쳐 영화롭게 하실 것을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그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겠노라 아담과 하와, 그리고 노아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이 언약은 갱신되기는 하였어도 결코 바뀌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언약을 지키시며 그러므로 사람마다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그 누구도 언제까지고 완악한 상태에만 머물 수는 없다. 물론 사람마다 상대적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타인의 구원 여부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각 개인이 자신에 관하여서만 판별할 문제로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6) 구원은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사실을 우리의 삶 속에서, 즉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앙의 여정 속에서 믿음으로 붙들도록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러한 방법으로 믿음을 요구하신다. 다른 방법은 없으며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현재완료이면서 동시에 현재진행이다. 정답을 미리 내려놓길 원하는 우리의 성급하고 교만한 본성과 대치되는 일임이 분명한데 우리는 여기서도 하나님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가령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말씀하시고, 자신의 행위 위에 구원의 기반을 세우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조급한 판단은 우리의 죄악된 본성이 만들어낸 패스트 푸드에 불과하다. 그것은 몸에 좋지 않다. 컴퓨터는 일주일만 공부하면 전유성 만큼 할 수 있다고 하였던가?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 속성(續成)은 없다. 신앙은 여정, 곧 우리 삶의 여정이다. 그래서 신앙인은 '날마다',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어서도' 믿는다.


[출처] 칭의와 성화|작성자 calvianus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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