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종말론, 무엇이 문제인가
지금 학자들이 말하는 종말론은 소설 수준이다. 저들이 진리와 멀어진 그 원인을 꼽으라면 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각자가 다르겠지만 필자가 보는 관점에서는 크게 세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는 종말론의 접근 방법이 바울이 접근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과 둘째는 구원론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 즉 요한계시록은 결론 부분이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에서의 견해의 충돌은 서론과 본론에서부터 논지가 다르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라는 것, 마지막으로는 학자들이 심판의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문제의 제기에서는 이 세 가지를 다루기로 한다.
1. 종말론의 접근 방법의 오류
종말론을 다루는 책들을 보면 그 접근 방법이 다양하다. 다니엘서를 중심으로 묵시 문학적 접근 방법을 취하는 경우도 있고(각주참조) 천년왕국을 중심으로 신비주의와 세대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방법도 있다.(각주참조) 또한 성경의 저자를 중심으로 접근하기도 하고(각주참조) 역사 속의 사건을 중심으로 다루기도 한다.(각주참조) 더 나아가 오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다루기도 하고(각주참조) 인간의 죽음을 시작으로 하여 성경의 기록을 중심으로 다루기도 한다.(각주참조)
종말론을 다루는 책들의 저자 서문을 보면 공통적으로 종말론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종말론에 대한 주제의 폭이 너무나 광범위해서 종말론의 중심 주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지지만 학자들마다 그 나름대로의 설득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종말론은 바울의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성경적 종말론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성경은 죽음 이후에 영생을 얻지 못하면 칠십 팔십의 인생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시 90:10) 바울 또한 그렇다.(고전 15:19) 따라서 성경적 종말론의 진수는 종말에 대한 성경적 지식을 삶에 적용시켜서 영생의 가치를 알게 하는데 있다. 즉, 인간의 삶이 죽음으로 가고 있다는 것과 죽음은 곧 개인의 종말이고 죽음 이후에 영생을 얻게 하기위해서 종말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종말론의 핵심이다. 또한 죽음 이후에 등장하는 영원한 세계로의 선택이 이 땅에서의 육신의 때에 결정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영생을 얻는 지식을 계시로 배워서 실생활에 적용하며 살게 하는 것이 종말론의 진수라는 것이다.
종말이 생활에 적용되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여 이 땅에서 주어진 모든 시간을 영생을 얻는데 사용하고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함에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얻었다고 해도 그 끝이 지옥이라면 그야말로 의미 없는 헛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강조하시는 것은 성경의 종말이 개인의 종말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을 인식하라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종말론은 설명의 편의를 위해서 개인적 종말과 일반적 종말(우주적 종말)로 나뉜다. 그러나 그 결국은 같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종말은 죽음을 기점으로 영생과 영멸로 갈라지고, 일반적 종말(우주적 종말)은 주님의 재림을 시작으로 피조세계의 종말의 과정이 진행되게 된다. 결국 주님의 재림으로 시작되는 우주적 종말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산 자들의 휴거로서 개인의 종말과 그 궤를 같이하여 영생과 영멸로 갈라지기 때문에 그 결국은 같은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은 개인의 종말에 맞추어 생활 속에서 영생을 얻는 실질을 알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종말론의 진수는 결국 영생에 이르는 구원을 얻는 지식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다르게 설명하면 구원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종말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교회에서 말하는 종말론은 바울이 말하는 종말론의 목적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형식적인 거짓신앙의 이론으로 인하여 이 진리가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인 종말론을 생활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종말론의 전체적인 내용이 모두 하나님과의 동행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인데 지금의 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이 진리를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우선 하나님과 동행함이 실생활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종말론의 본질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지금의 종말론이 개차반인 이유는 총론적인 부분으로 볼 수 있는 구원론, 즉 구원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 있는 것에서 비롯된다. 성경에 기록된 종말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구원의 본질과 방법론에 오류가 없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종말론이 우리 생활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구원의 본질인 믿음에(요 3:16)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구원의 요건인 믿음을 이해함에 있어서 ‘지식적 이해’를 믿음으로 알고 있는 지금의 신학체계에는 구원의 요건이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의 이해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동행을 구원의 요건으로 하는 성격적 종말론의 흐름을 이해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종말의 순서나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교회에서 믿음으로 보고 있는 단순한 역사적 지식으로는 종말론을 이해할 수도 없고 풀리지 않는 미궁 속에서 헤맬 수박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잘못된 종말론으로 인하여 결국은 영생을 얻는데 실패하여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탄이 노리는 마지막 노림수인 것이다.
여기서 분명하게 이해되어야 할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믿음을 넘어 하나님과 동행함에 있을 때 된다는 것이다.(각주참조) 다시 말해서, 지금의 기독교는 구원을 얻는 믿음이 단순한 지식적인 이해Understanding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삶으로 이끌어내는 하나님과의 동행Walking with God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론을 풀지 못할 미궁 속으로 몰아넣은 원인이다. 성경적 구원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하면 종말론은 의미가 없다. 종말론의 모든 것을 풀었다 하더라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적 종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적 구원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성경적 구원론과 성경적 종말론이 그 궤를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종말론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참으로 멀게 느껴지는 분야이다. 성경의 내용 가운데 들어본 적도 별로 없고 누가 쉽게 풀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종말론에 정통한 사람도 없고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영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론을 실생활에 적용시키는 사람은 더욱 더 없었다. 종말론에 관한 책의 저자가 다른 분야에 비하여 소수에 불과한 이유는 그만큼 거짓신앙에서는 다루기가 어려운 분야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루기가 어렵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것은 지금의 신학이 구원과 무관한 인간의 지식적 추론에 의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지금의 신학이 인본주의에 터를 잡고 있다는 것이고 인본주의의 배경이 사탄이기 때문에 종말론의 중요성이 사라진 이유 또한 종말의 중요성을 희석시켜 인식하지 못하게 하려는 사탄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종말론이 다루기 어렵게 된 이유는 종말론의 논리가 사탄의 의도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판의 과정을 아예 모르게 만들어서 구원에 이르는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가를 모르게 논리에 논리를, 즉 올무에 올무를 쳐 놓았다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종말을 인식하느냐 못하느냐의 여부는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 이후의 삶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지만, 죽음 이후의 삶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를 찾는다. 사람이 죽음 이후의 세계를 인식한다면 이 땅에서의 생활이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이 실재 장소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 것에 모든 것을 투자 한다. 밭에 보화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전 재산을 털어서 그 밭을 사듯이(마 13:44) 천국과 지옥이 실재 장소라는 것을 경험적 지식을 통해서 아는 사람들은 영생을 얻는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간다. 보화가 묻힌 밭의 비유처럼 영생을 얻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매 순간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사람이라면 누구나 개인적인 종말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개인의 종말을 향하여 밀려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활에서는 종말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죽음 뒤의 삶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우는 진정한 목자가 없고 지금의 교회가 신앙의 본질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종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 영생의 시작이든 영멸의 시작이든 새로운 세계의 시작인 것이다. 개인적인 종말은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세계를 말하는 것이고 우주적인 종말은 주님의 재림으로 인하여 휴거와 부활 등 성경에 기록된 일들이 일어나 영생과 영멸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결국 개인적 종말이든 우주적 종말이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절차를 따라, 믿는 자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시작점이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지옥의 고통으로 들어가는 시작점이 종말이라는 것이다.
종말론은 인간이 지대한 관심을 갖는 분야이다. 세상적으로 많은 물의를 일으키면서도 이 분야에 열광을 하는 이유는 ‘본향’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그리움 때문이다. 주님께서도 인간이 궁극적으로 가야할 곳은 본향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고통과 근심이 없는 곳, 눈물과 슬픔이 없는 곳, 영원한 즐거움이 있는 본향을 생각한다. 이 가치를 아는 것은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전 재산을 들여서 보화가 묻힌 밭을 사듯이 본향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생활이 되기 때문이다. 이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추구하고 하나님만을 바라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믿음에 터 잡아 생활이 이끌어져 간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을 다루는 성경적 종말론은 항상 수평을 유지하며 균형을 잡고 있는 자이로콤파스Gyrocompass와 같아야 한다. 종말론이 균형이 틀어져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많은 파열음을 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재림의 열망이 식어져 차가운 쪽으로 치우치면 현실의 삶에 몰두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다른 한편으로 재림에 대한 열망이 강하여 뜨거운 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미혹의 영이 주는 생각에 이끌려 성경의 내용에서 벗어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 종말론은 인간의 생각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많은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다. 이 함정들을 피하지 못하고 그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비명소리가 신학과 목회의 현장에서 들러오는 파열음들이다. 신학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학자들의절규, 즉 학문으로 연구한 이론적인 종말이 삶의 현실에서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자탄의 소리가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이성적인 휴거 열풍으로 드러난 폐해와 같이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과 온갖 비아냥을 받기에 충분한 사건들이 기독교의 쓸모없음을 스스로 증명하면서 그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말론의 접근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적 종말론은 어떻게 접근하여야 하는가?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 여기에 대한 상세한 것은 이 책 02-3, 독자들을 위한 권면 - 종말론을 어떻게 접근하여야 하는가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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