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수 교수의 설교 강의
차례
1.성경적 설교 (Biblical Preaching )
2.각성의 설교 (Enlightening Sermon)
3.위로의 설교 (Encouraging Sermon)
4.신학적 설교 (Theological Preaching)
5.심오한 설교 (Profound Preaching)
6.신중한 설교 (Prudent Preaching)
7.은혜의 설교 (graceful preaching)
8.영적인 설교 (Spiritual Preaching)
9.의식화 설교
10.진정한 설교
1.성경적 설교 (Biblical Preaching )
성경적 설교 - 마태복음에서
(본문) 마 25:14-30
(제목) 많은 것을 맡기리라
설교에서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설교자가 청중의 상황을 잘 파악하는 것과 청중이 설교자의 생활을 잘 이해하는 것은 설교의 효과를 크게 좌우한다. 하지만 설교의 성공은 설교자와 청중의 긴밀한 관계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감동이 설교자와 청중을 사로잡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설교자와 청중 양쪽의 사전기도라든가, 설교현장의 분위기조성과 같은 여러 요소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감동이 결과될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설교에서 하나님의 감동은 무엇보다도 성경 그 자체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설교자가 성경의 내용을 제대로 해득하지 못하거나 청중이 성경의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받지 못하면 설교는 이미 실패한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반드시 "성경적 설교" (Biblical Preaching)이어야 한다. 우리의 관심은 설교자에게 있으므로 설교자가 어떻게 본문을 이해하고, 설교의 요점을 구상하며, 설교를 작성해야 하는지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1. 본문 이해
마 25:14-30은 유명한 달란트 비유이다. 이것은 천국비유이다 (본문이 마 25:1에서 시작된 "천국은 마치 ..."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본문을 잘 알기 위해서는 사용된 단어들을 이해하고 (예를 들어 달란트의 규모), 역사적 배경을 고찰하는 것 (예를 들어 고대세계에서 종의 위치)이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구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평면적으로 볼 때 이 비유는 어떤 주인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겼다는 것 (14-15), 종들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달란트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였다는 것 (16-18), 여행에서 돌아온 주인이 종들과 회계를 하였다는 것 (19-30)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가지 내용은 언제나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순서로 진행된다. 그러나 이 비유의 구성을 잘 이해하려면 여기에 머물지 말고 두 가지 층을 고려해야 한다.
1) 예수의 층
첫째 층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처음부터 은혜롭고 긍정적인 생각에 기반을 두고 말씀하셨다. 이 비유가 예수의 은혜롭고 긍정적인 생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1) 일을 잘한 종 두 명과 일을 잘못한 종 한 명
예수께서는 비유 속에 의도적으로 세 명의 종을 등장시키셨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일을 잘한 종과 일을 잘못한 종의 비율이다. 예수께서는 일을 잘한 종 두 명과 일을 잘못한 종 한 명을 말씀하신다. 말하자면 종들 가운데서 3분의 2는 일을 잘하고, 3분의 1이 일을 잘못했다는 것이다. 일을 잘못하는 종들이 없을 수는 없으나 일을 잘하는 자가 더 많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비율로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께서 일을 잘하는 종이 일을 잘못하는 종보다 많기를 바라는 심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일을 잘못한 한 달란트의 종에게 초점을 두고, 칭찬 받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의 종들을 들러리처럼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때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잘못 반응하는 사람들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알맞게 잘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2) 곱절을 남긴 일곱 달란트와 그대로 남은 한 달란트
그런데 예수께서 이 비유를 처음부터 은혜롭고 긍정적인 생각을 기반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은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많은 것을 맡은 종들이 일을 잘하고, 적은 것을 맡은 자가 일을 잘못한 것으로 말씀하시는 데서 잘 나타난다. 곱절의 이득을 얻은 것은 일곱 달란트이고, 그대로 남은 것은 단지 한 달란트 뿐이다. 만일에 예수께서 거꾸로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한 달란트를 남겼는데,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아무런 소득을 남기지 못한 것으로 비유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께서 많이 맡은 자들이 일을 잘하고 적게 맡은 자가 일을 못한 것으로 비유하는 것은 많은 것을 맡은 자들이 일을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때 적은 것을 가지고도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보다는 많은 것을 받아 큰 효과를 내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2) 비유의 층
예수께서는 일을 못하는 사람보다는 잘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을, 소득이 없는 달란트보다는 소득이 있는 달란트가 더 많을 것을 바라는 은혜롭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다. 바로 이러한 예수의 마음은 비유가운데 나오는 주인의 마음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래서 이 비유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주인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1) 달란트와 종
주인은 여행을 떠나면서 아무런 조건 없이 종들에게 "자기의 소유를 맡겼다" (14). 고대근동에는 세 가지 종류의 재산이 있었다. 이동할 수 없는 재산, 이동할 수 있는 재산, 살아있는 재산이 그것이다. 마지막에 언급된 재산은 다시 살아 있으나 말 못하는 재산인 가축과 살아 있으면서 말하는 재산인 노예로 나누어진다. 이렇게 볼 때 종은 밭떼기나 짐짝이나 가축과 같은 재산에 지나지 않았다. 종은 비참한 존재였다. 그런데 주인은 이와 같이 비참한 종들에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다. 사실상 주인이 종들에게 맡긴 금액은 상당한 것이다.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다. 보통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므로 (마 20:2 참조) 한 달란트는 6천 일에 해당하는 급료이다. 한 달란트는 대략 20년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그렇다면 다섯 달란트는 일평생 노력해야 얻을만한 금액이며, 두 달란트는 반평생 수고해야 얻을 수 있는 금액이다. 주인은 짐짝과 같이 비참한 종들에게 평생을 쓸 수 있는 엄청난 양의 돈을 맡겼던 것이다. 이 비유에서 극한 비참함과 극한 존귀함이 대조되고 있다. 그런데도 주인은 이러한 상당한 금액을 "작은 일" (21,23)이라고 부른다. 바로 여기에 주인의 은혜가 있다! 주인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이처럼 비참한 종들에게 이처럼 엄청난 금액을 맡겼을까? 그것은 신뢰이다! 이것은 주인이 종들을 아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인의 신뢰는 종들에 대한 은혜이며 긍정이다. 주인이 한 달란트 맡은 종을 책망한 이유는 남긴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주인을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24-27).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주인의 은혜롭고 긍정적인 신뢰를 무시하였던 것이다.
(2) 칭찬과 초청
그런데 주인은 종들의 능력을 알지도 못한 채 터무니없이 마구 맡긴 것이 아니다. 주인은 "각각 그 능력대로" (15) 재물을 맡겼다. 어떤 종은 다섯 달란트를 맡을만하고, 어떤 종은 두 달란트를 맡을만하며, 어떤 종은 한 달란트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을 주인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주인이 종들의 능력을 정확하게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인은 종들의 능력을 따라 할 만한 일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주인은 능력대로 차별적으로 달란트를 맡긴 것과는 달리 칭찬할 때는 동일한 내용으로 칭찬을 하였다. 다섯 달란트를 맡았던 종에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21)고 말한 주인은 두 달란트를 맡았던 종에게도 똑같이 말하였다 (23). 이것은 주인이 한 달란트를 맡았던 자에게도 동일한 것을 말하려고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록 주인 종들에게 달란트는 다르게 맡겼어도 칭찬은 똑같이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종들을 신뢰하여 달란트를 맡기는 것도 은혜라면 종들을 동일하게 칭찬하는 것도 은혜이다.
게다가 주인은 신뢰와 은혜를 깨달은 종들에게 많은 것을 맡기며 즐거움을 안겨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21,23). 물론 주인은 한 달란트를 맡았던 종이 주인을 오해하였을 때 책망과 처벌을 내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필요에 따라서 한 달란트를 맡았던 종에게 주어진 책망과 처벌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 전에 앞의 착하고 충성된 종들의 실천과 그들에 대한 칭찬을 먼저 강조해야 한다. 주인은 본래 이 일을 시작한 것은 종들을 칭찬하기 위한 것이지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은 종들에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21,23)라고 칭찬할 것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그 종들이 참여할 "즐거움" (21,23)을 예상하고 있었다. 이처럼 주인은 종들에 대하여 은혜롭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2. 설교의 요점 구상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본문분석을 통하여 마 25:14-30에 들어있는 달란트 비유는 은혜, 신뢰, 칭찬과 같은 메시지들을 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은혜롭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비유를 구성하신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일차적으로 천국의 모습을 설명하시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심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는 예수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천국의 모습 그리고 하나님의 심정이 모두 은혜, 신뢰, 칭찬을 담고 있다. 따라서 설교자가 이 비유로부터 말해야 할 것은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비록 비참한 인생들이라도 신뢰하시고 칭찬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이다. 이 본문으로부터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즐거움" (21,23)을 주실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3. 설교 작성
이렇게 설교의 요점을 구상하고 나면 실제로 다음과 같이 설교를 작성해 볼 수 있다.
도입: 천국이란 무엇인가? 달란트 비유에서 보면 천국은 종들에 대한 주인의 마음으로 표현된다. 이런 의미에서 주인은 하나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주인의 마음은 무엇인가?
1. 주인의 신뢰: 무엇보다도 주인의 마음은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긴 것에서 나타난다. 종들은 비참한 존재인 반면에 달란트는 엄청난 금액이다. 비참한 존재인 종들에게 엄청난 금액인 달란트를 맡긴 것은 주인이 종들을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천국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신뢰로 시작된다 (딤전 1:12-14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을 참조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신뢰를 저버리지 말고 충성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2. 주인의 은혜: 주인은 종들의 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는 재능대로 각각 다르게 달란트를 맡겼다. 그러나 주인은 종들에게 다르게 달란트를 맡겼지만 결국 똑같이 칭찬을 하였다 (셋째 종이 이 칭찬을 받지 못한 것은 주인의 신뢰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인의 은혜이다. 마찬가지로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는 더 큰 자도 없고 더 작은 자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해야 한다.
결론: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긴 것은 그들을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시키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신뢰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면서 즐거움에 참여시키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힘차게 인생을 살아야 한다.
2.각성의 설교 (Enlightening Sermon)
각성의 설교 - 마태복음에서
(본문) 마 5:13
(제목)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근본적으로 설교는 성경의 진리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설교의 목적이 설교자가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설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큰 오해이다. 물론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다보니 그것이 설교자의 사상이 될 수 있고, 그래서 설교에서 설교자의 사상이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강변을 해도 설교는 설교자의 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밝혀내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해석학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성경의 진리 중에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신자가 누구냐 하는 진술이다. 사실상 이것은 성경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끊임없이 흐르는 주제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정확한 본문해석을 바탕으로 신자의 신분을 정의하는 데 예리하게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신자는 설교를 통해서 성경본문으로 돌아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깨달아야 한다. 이것을 가리켜 "각성의 설교" (enlightening sermon)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설교에 가장 적합한 본문 중에 하나는 마 5:13상반절이다.
1. 본문이해
1) 문맥
큰 문맥을 볼 때 마 5:13은 산상설교의 일부이다. 산상설교의 분기점은 세 가지 의 (서기관의 의, 바리새인의 의, 그리스도인의 의)를 소개하는 마 5:20으로서 그 후에 이 세 가지 의에 대한 설명이 뒤따른다: 서기관의 의 (5:21-48), 바리새인의 의 (6:1-18), 그리스도인의 의 (6:19-7:27). 이렇게 볼 때 마 5:3-19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서론을 이루고 있다는 기분을 준다. 산상설교의 서론은 우선 삼인칭 표현으로 시작된다 (5:3-12): "... 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 그리고 이어서 서론의 둘째 부분은 이인칭 표현을 제시한다 (5:13-16): "너희는 ...". 마지막으로 산상설교의 서론에서 셋째 부분을 지배하는 것은 일인칭이다 (5:17-20): "내가 ...". 이것은 산상설교 전체가 그렇듯이 산상설교의 서론도 매우 짜임새 있게 구성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작은 문맥으로 볼 때 마 5:13은 산상설교의 서론에서 둘째 부분에 위치한다. 서론의 둘째 부분에는 이인칭이 두 번 사용된다: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 (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5:14).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진술들이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조의 동일성만으로도 이미 본문의 중요성이 충분하게 부각된다. 게다가 두 진술이 소금과 빛 또는 땅과 세상이라는 말로 내용을 상관시킴으로써 본문의 중요성을 한층 돋보이게 만든다.
2) 분석
마 5:13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하여 본문을 정확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본문은 주어부 "너희는 ... 이다"와 술어부 "땅의 소금"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주어부 "너희는 ... 이다"
(신분정의의 외부성) 예수께서는 신자의 신분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있다. 신자의 신분은 스스로에 의하여 정의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땅에서 얻은 것도 아니며, 아래로부터 난 것도 아니다. 이 신분정의는 우리의 내부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며, 위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 신분정의는 우리의 외부로부터 온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정체에 대하여 깨달을 수가 없다.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가장 명확하게 깨닫는다. 우리의 신분정의는 예수 그리스도께 의존한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이 정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정해주신 인생을 사는 것이다.
(신분정의의 현재성) 여기에서 또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장차 무엇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고, 이미 무엇"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장차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고, 우리가 이미 어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신분은 장래에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미래에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가능성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현재에 이렇다는 사실성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현재적인 신분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장차 무엇이 될 것을 기대하는 기대 속에서 살기보다는 이미 무엇이라는 사실을 실천하는 실천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긴장감 있게 만드는 중대한 요소이다. 장차 무엇인가가 될 사람은 느슨한 마음으로 살 수 있겠지만, 이미 무엇인가가 된 사람은 긴장된 마음으로 살 수 밖에 없다. 만일에 우리가 장래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가질 것이며, 아직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느슨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장래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가질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기에 긴장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현재적인 신분을 규정하고 있다.
(신분정의의 효과) 예수께서 신자의 신분을 현재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두 가지 효과를 준다. 첫째로 소극적인 효과를 생각할 수 있다. 신자는 예수로부터 신분정의를 받음으로써 자신의 신분과 정체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잘못을 방지할 수 있다. 우리는 쉽게 우리의 신분을 망각한다. 때로는 땅의 소금이라는 신분을 잊어버린 채 살아간다. 그리고는 마치 땅의 소금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예수께서 신자의 신분을 규정하는 것은 이러한 오류를 방지하는 효과를 준다. 둘째로 적극적인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예수에 의한 신분정의로 말미암아 신자는 자신의 신분과 정체를 분명하게 인식함으로써 그 역할과 사명을 충분하게 감당하는 효과를 얻는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신분정의는 신자에게 엄청난 도전과 충격을 준다. 계속 그 신분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말이다. 그 신분을 인식하고 그 신분을 표현하며 그 신분을 실현하고 그 신분을 자랑하도록 만든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위로부터 오는 신분정의를 주신 것은 그것을 인식하며 표현하며 실현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신분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영광스러운 신분이다.
(2) 술어부 "땅의 소금"
(소금) 그러면 예수께서 정의하신 신분은 무엇인가? 그것은 "소금"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내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예수께서 소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이유이다. 소금은 고대사회의 일상생활에서 아주 흔한 물질이었다 (소금에 대한 예수 당시 사람들의 설명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Pliny, 자연사 31,102). 소금이란 것은 한 편으로는 가치가 있으면서도 또한 한 편으로는 쉽게 무시되는 것이다. 왜 주님께서는 하필이면 소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을까? 신자들의 신분을 정의하기 위하여 좀 더 가치 있는 것들을 선택하실 수 없었을까 (예를 들면 금과 은 같은 보석이나 젖과 꿀 같은 음료)? 그러나 주님께서 제자들의 신분을 설명하기 위하여 소금이란 단어를 선택하신 데는 어떤 특별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땅) 그것은 소금과 땅 (개역성경이 "세상"이라고 번역한 것은 오역이다)과의 관계 때문이다. 소금은 땅 모든 곳에 일반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땅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다. 소금 없는 땅은 어디에도 없고, 땅 없는 소금은 어디에도 없다. 땅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소금이 있다. 그만큼 소금은 이 땅에 일반적으로 널려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소금은 아주 일반적인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땅의 소금이라고 정의한 것은 어디든지 있어야 할 존재를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땅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있어야 할 존재이다. 소금이 있지 못할 곳이 없듯이, 신자들이 있지 못할 곳도 없다. 모든 곳이 소금이 있을 수 있는 곳이듯이, 모든 곳이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는 곳이다. 신자는 땅의 소금인 것이다.
(땅의 소금) 여기에서 우리는 소금과 땅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구태여 "땅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데는 소금과 땅 사이에 어떤 중대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그것은 소금이 땅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소금은 땅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금은 땅에서 자리 (위치)를 잡아야 한다. 이것은 소금이 언제나 땅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는 땅의 모든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2. 설교의 요점 구상
때로는 본문이 짧을수록 내용이 깊을 수가 있다. 어떤 면에서 짧은 본문으로 설교를 하는 것은 깊은 묘미를 가져다 준다. 마 5:13에 대한 본문분석은 산상설교를 듣는 제자들에 대한 신분정의를 피할 수 없이 분명하게 제시한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자에 대한 신분정의로서 엄청난 각성을 자극한다. 이 신분정의는 현재성을 띄고 있다는 점에서 너무나도 흥분된 내용을 담고 있다. 게다가 가치로 볼 때 소금이라는 별 볼일 없는 사물을 땅이라는 대상체와 연결시킴으로써 그 흥분을 훨씬 더 증폭시킨다. 실제로 신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신분정의를 듣기 전에는 그냥 "소금" 같은 초라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의 신분정의에 의하여 신자들은 그 신분이 "땅의 소금"으로 급부상한다. 설교자는 청중에게 이러한 신분상승의 흥분을 전달해야 한다.
3. 설교 작성
우리는 위의 본문이해와 설교의 요점 구상을 따라 다음과 같이 설교를 작성해 볼 수 있다.
도입: 우리는 매일같이 몇 번이고 거울을 들여다보기 때문에 자신의 얼굴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막상 자기의 얼굴을 그려보라고 하면 썩 나설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만큼 우리는 얼굴 뿐 만 아니라 자신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인가?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의 신분을 정의해주신 것이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며, 위로부터 오는 것이다.
1. 신분의 현재성: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장차 무엇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고, 이미 무엇"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신분은 장래에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장차 무엇이 될 것을 기대하는 기대 속에서 살기보다는 이미 무엇이라는 사실을 실천하는 실천 속에서 살아야 한다. 예수의 신분정의는 우리의 삶을 긴장감 있게 만든다. 교생실습생은 아직 교사가 아니기 때문에 실수를 해도 크게 항의를 받지 않지만 교사에게는 실수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항상 긴장된 마음을 가지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장래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가질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기에 긴장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신분정의는 우리가 신분과 정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망각하는 것을 방지시킬 뿐 아니라, 신분과 정체를 분명하게 인식함으로써 그 역할과 사명을 충분하게 감당하게 만든다.
2. 신분의 위대성: 주님께서는 구태여 소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까닭은 어떤 특별한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땅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소금이 있다. 그만큼 소금은 이 땅에 일반적으로 널려져 있는 것이다. 소금 없는 땅이나 땅 없는 소금은 없다. 이것은 땅이 신자가 사역해야 할 대상인 것을 알려준다. 주님께서는 비록 신자들이 소금과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신분정의 후에는 땅을 상대로 하는 위대한 면모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3.위로의 설교 (Encouraging Sermon)
위로의 설교 - 마태복음에서
(본문) 마 4:23-5:12
(제목) 무리를 보시고
성도들은 가정이든 직장이든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다양한 고통을 당한다. 신자의 삶에는 육체적이며 정신적이며 정신적인 고통이 줄을 잇는다. 신체의 질병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정의 불화, 직업의 문제, 동료와의 갈등 같은 수많은 일들이 신자를 공격한다. 말하자면 설교자 앞에는 고통에 찌들은 청중이 앉아있는 것이다. 청중은 다양한 고통과 무서운 위기에 사로잡혀 있다. 고난이 없는 청중은 없다. 그런데 이것은 목회자들이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다. 심지어 목회하기 전에 생활전선에서 고전분투를 하던 사람들마저도 목회자가 되고 나면 이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목회자들은 설교의 사명이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의 영혼에 비수처럼 꽂혀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의 영혼에 비수처럼 꽂혀야 한다는 생각은 아주 단편적인 것이다. 청중에게 책망이 무조건 필요 없지는 않겠지만 무엇보다도 위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냉정한 비판 뿐 아니라 따뜻한 위로를 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설교자는 때때로 "위로의 설교" (Encouraging Sermon)를 해야 한다. 마 4:23-5:12는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본문이다.
1. 본문이해
산상설교는 여러 개의 틀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외곽을 차지하고 있는 틀은 "무리"와 관련된다. 산상설교가 시작되기 전에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4:25)는 산상설교가 종료된 후에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8:1)와 일치한다. 또한 산상설교의 직전에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5:1)와 산상설교의 직후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침에 놀래니"(7:28)는 상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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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 - 무리 - 산상설교 - 무리 - 무리
(4:25) (5:1) (5-7장) (7:28) (8:1)
이렇게 볼 때 산상설교의 대상에 제자들이 들어있다는 것을 고려하면서도 (5:1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무리를 산상설교의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산상설교는 무리를 염두에 두고 있다. 무리는 산상설교의 외곽을 장식하는 기본구조이다. 이런 기본구조에 비추어 본문을 예수에게 나온 무리의 정체(4:23-25)와 무리에게 주신 예수의 설교(5:3-12)로 나눌 수 있다.
1) 예수에게 나온 무리의 정체(4:23-25)
본문은 무리의 출처를 알려준다(4:25). 주님을 따라온 청중은 지역적으로 보면 북쪽에서 ("갈릴리와 데가볼리"), 남쪽에서 ("예루살렘과 유대"), 동쪽에서 ("요단강 건너 편") 왔다. 이것은 필요를 채우기 위한 사생결단의 모습을 보여준다. 본문에서 무리의 수효는 간단히 "허다하다"는 말로 묘사되지만 이것은 대단히 많은 군중을 암시한다. 그들은 서로간에 필연적으로 경쟁자가 되고 만다. 주님의 청중은 신체적으로 보면(4:24) 다양한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 본문은 무리의 상태를 알려준다. 한 마디로 말해서 주님 앞에 몰려온 청중은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이었던 것이다. 무리의 출처와 수효와 상태로부터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무리의 외면적인 비참성이다.
그런데 이 무리를 조금 자세히 관찰해 보면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무리의 성향이다. 본문은 무리가 보여준 동작을 설명하기 위하여 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4:25). 무리의 성격을 규정하는 이 한 단어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무리가 지니고 있는 성향가운데 가장 큰 특징은 이동이라는 것이다. 무리에게는 이동의 성향이 있다. 무리는 결코 중립적이 아니다. 무리는 매우 이기적이다. 무리는 결코 밀가루 반죽 덩어리와 같은 것이 아니다. 무리는 이렇게 둥글리면 칼국수 판이 되고, 저렇게 뭉치면 수제비 덩어리가 되어버리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무리를 물질적인 개념으로 설명해서는 안된다. 물론 때때로 개인이 무리 속에 들어가면 개인성을 상실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에게 있는 이기적인 의지는 무리가 되어도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나타난다. 개인의 이기적인 의지는 계속해서 무리의 집단 속에 굳게 자리잡고 머문다. 무리는 개인의 욕구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리는 개인의 욕구를 선명하게 표현한다.
이러한 이기적인 의지 때문에 무리는 이동을 한다. 간단한 예로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하거나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을 하면 사람들이 이동을 시작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조금 더 심층적으로 보면 학군중심의 이동이나 신도시로의 이동 같은 것도 이런 현상에 속한다. 무리는 밥을 찾기 위하여 이동하고, 집을 얻기 위하여 움직인다. 무리에게는 경제적인 의지 뿐 아니라 정치적인 의지가 있어서 필요할 때는 어떤 정치가든지 받아들이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어떤 정치가든지 내버린다. 이것은 무리의 세력이다. 무서운 것은 무리의 세력은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서 악을 정당화할 수 있는 세력이라는 사실이다. 이 같은 세력이 예수를 향하여도 작용했다. 무리는 필요 따라서 예수를 왕으로 섬기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또한 필요에 따라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받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무리는 집단성을 가지고 있다. 무리는 집단성에 의하여 행동을 강요당한다. 무리가 이동하고 있을 때 이동하지 않는 개인은 큰 불안에 사로잡힌다. 이것이 바로 집단성에 포함되어 있는 개인의 비참함이며, 동시에 개인성을 소유하고 있는 무리의 비참함이다. 무리의 이동성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리의 내면적인 비참성이다.
2) 무리에게 주신 예수의 설교(5:3-12)
예수께서는 외면적으로도 내면적으로도 비참성에 사로잡힌 무리를 향하여 산상설교를 시작하셨을 때 입을 열자마자 첫 마디로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동일한 말씀을 자그마치 아홉 번이나 반복하셨다. 산상설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주님께서는 온갖 질병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 비참한 인생들에게 천국의 복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비록 그들이 세상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는 너무나도 비참한 인생들이지만 주님의 눈에는 천국의 복을 받을만한 영광스런 존재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 무리는 사람들에게는 저주받아야 할 존재였지만 주님에게는 축복받을만한 존재였다. 주님께서는 누가 뭐라고 하든지 무리가 영광스러운 존재임을 알려주셨다.
예수께서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낮고 천한 인간을 귀중하게 여기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이 있다"는 말씀은 인간을 존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나오는 선포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가지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항상적인 인간정신에 대하여 싸움을 거신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주님의 "복이 있다"는 선포 앞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앞에 나온 사람들은 모두 이 말씀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이 있다"라는 말씀은 철저하게 인간의 존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존귀하게 여기신다. "복이 있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인간을 존귀하게 여기심에 대한 가장 분명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 선포 앞에 설 때 무시되고 상실되고 파괴된 인간의 존엄성이 다시 기억되고 회복되고 건설된다.
주님께서는 온갖 질병에 시달리며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무리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천국의 영광을 가르쳐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 9:12-13)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 (마 11:19)라는 말을 듣기를 싫어하지 않으신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마 11:28)고 초청하시는 주님께서 그 앞에 몰려온 무리에게 천국의 영광을 보여주고 있다. 육체적으로 질병에 고통을 당하고 사회적으로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던 무리에게 찬란한 천국의 영광이 비추었다(마 4:16; 사 9:2).
질병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온갖 멸시와 수모를 당하고 별별 조롱과 박대를 받던 무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겠는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무리는 가슴이 벅차 오르고, 마음이 뜨거워졌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 무리에게는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뜀박질하였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 무리에게는 감격의 눈물이 쏟아지고 입술에 찬송이 흘렀을 것이다. "복이 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무리는 너무나도 큰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주님의 축복의 선언 앞에서 무리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람들인가!
2. 설교의 요점 구상
목회자들이 저지르는 큰 실수 가운데 하나는 성도를 훈련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조련사가 훈련을 통해서 개를 복종시키듯이, 목회자들은 다양한 훈련을 통해서 성도들을 길들이려고 한다. 그러나 성도들이 양으로 비유되는 경우는 많아도 개로 비유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양은 목양의 대상이지 훈련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성도는 목양의 대상이지 훈련의 대상이 아니다. 목회자가 성도를 훈련의 대상으로 생각하다 보면 자주 성도를 공격하게 된다. 특히 목회자들은 설교를 통해서 성도를 항복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설교는 자주 책망과 비판의 어조를 띈다. 성도들은 목회자에 의한 훈련과 공격 앞에서 천국의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 이제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성도들이 비참한 인생을 사는 중에도 얼마나 영광스런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위로의 설교를 해야 한다.
3. 설교 작성
1) 비참한 인간
사람들은 땅에 살고 있다. 땅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비참하다. 비록 외면적으로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도 실제로 그 내면을 파고 들어가면 반드시 엄청난 고통을 가지고 있다. 예수께 몰려나온 무리는 땅에 사는 사람들의 비참성을 간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원근을 가리지 않고 다니는 떼거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게다가 그들의 수효는 엄청나기 때문에 서로간에 다른 사람들을 밀쳐내야만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경쟁자가 된다. 더 나아가서 그들의 육체는 온갖 종류의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상실한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다.
2) 존귀한 예수
예수께서 비참한 무리를 향하여 입을 열었을 때 그 입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예수의 입은 복과 영혼과 천국을 주제로 삼았다. 예수께서 입을 열자 천국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예수께서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은 땅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늘의 예수이다. 예수의 입은 하늘의 문이다. 예수의 입에서 복으로 이끄는 말씀이 나오며, 영혼을 회복시키는 말씀이 나오며, 천국을 알려주는 말씀이 나온다. 예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설교는 땅에 사는 비참한 무리에게 한량없는 위로가 된다. 예수의 존귀한 말씀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땅에 사는 동안에도 하늘을 누린다.
4.신학적 설교 (Theological Preaching)
신학적 설교 - 마태복음에서
(본문) 마 16:13-20
(제목)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
설교자들은 신학을 무거운 것으로 생각한다. 신학은 지나치게 학문적이어서 머리를 아프게 만들고 실천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주장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신학이 교회의 상황을 외면한 채 단지 이론에만 몰두하면 정말로 골치 아프고 유용성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안타깝게도 지금 이런 식의 신학이 도처에서 활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 때문에 설교자들이 신학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신학은 설교에 엄청난 힘을 불어넣으며 교회를 대단히 역동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사에서 오랫동안 사실로 증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신학이 교회와 설교에서 찬란하게 꽃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설교자들이 절대로 "신학적 설교" (theological preaching)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먼저 설교자들 자신이 신학을 연마하기에 부지런해야 하고, 또한 신학을 설교에 연착륙시키기 위해서 고민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설교는 더욱 심화되고 풍성하며 능력있게 될 것이다. 마 16:13-20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요점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본문이다.
1. 본문이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대화이다. 본문은 우선 예수가 누구냐 하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 (13-14)와 제자들의 견해 (15-16)를 말해준다. 여기에 교회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이 이어지고 (17-19),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자신의 신분을 비밀에 부치는 것으로 본문은 끝난다 (20).
사람들의 견해 (13-14)
---> 교회에 관한 교훈 (17-19) ---> 경계 (20)
제자들의 견해 (15-16)
교회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은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 (18)는 말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본문을 잘 살펴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기 전에 어떤 단계가 있으며 (17-18),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어떤 단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18-19).
1) 발단 (16)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 (18)는 예수의 말씀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6)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관련이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라는 말로 예수를 왕이며 제사장이며 선지자로 인정한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예수를 인간의 문제를 초월하시는 구원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2) 교회건설에 관한 말씀 이전의 단계 (17-18)
그런데 교회건설에 관한 교훈에 이르기 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하여 두 가지 사실을 정리해주셨다.
첫째로 그러나 이로부터 우리가 보통 알고 있듯이 교회는 신앙고백에 바탕을 둔다고 말하는 것은 속단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그 자신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베드로의 고백이 "육과 혈" (인간적인 것의 총체 - 참조. 요 1:13; 고전 15:50; 갈 1:16; 엡 6:12; 히 2:14)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계시하신"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이다 (마 16:17). 강조점은 베드로의 고백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의 신앙고백 이전에 하나님의 계시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둘째로 교회는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고백에 근거한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에 이어서 비로소 베드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선언하신다 (이것은 그리스어 본문으로 보면 확연하게 나타난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네게 계시하셨다. 그래서 나도 네게 말한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이는 예수의 선언도 없다. 베드로가 예수를 향하여 "주 (그리스어로는 '너')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라고 말했을 때,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너는 베드로라"(18)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교회건설에 관하여 일러주셨다. 그러므로 교회건설은 예수에 대한 사람의 고백보다 사람에 대한 예수의 고백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사람의 고백은 쉽게 흔들리지만 (마 16:21-23 참조) 예수의 고백은 결코 요동하지 않는다 (마 10:32). 따라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고백이 아니라 예수의 고백이다.
3) 교회건설에 관한 말씀 (18)
교회건설에 관한 말씀에서 분명한 것은 예수와 교회의 관계이다.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 (18). 여기에 두 가지 측면에서 기독론과 교회론의 철저한 결속이 표현된다.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교회를 건설하는 분이며 교회를 소유하는 분이라는 점이다.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신다 ("내가").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의 교회이다 ("나의"). 그러므로 교회에 관한 한, 사람들에 의하여 그리스도로 고백되는 예수가 중심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그분께 모든 일에 첫 번째 자리를 내드려야 한다. 교회에서 사람은 언제나 예수를 앞서는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교회는 인간사(事) 이전에 예수사(事)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18). 여기에서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로 반석은 무엇인가? 우선 베드로와의 연관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본래 베드로 (페트로스)라는 말은 작은 돌을 가리키고, 반석 (페트라)라는 말은 큰 돌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계시를 따를 때 베드로는 비록 작은 돌 같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큰 반석같이 여기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려 하신다. 여기에 교회에 관한 은혜 사상이 엿보인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대로 교회의 근본적인 바탕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이다. 여기에서 "네 위에"라고 하지 않고 "이 반석 위에"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의도를 이해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반석이라는 말로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계시를 지시하신다. 사실상 하나님이 반석이라는 사상은 비록 용어상 차이는 있지만 이미 구약에 널리 퍼져 있던 것이다 (신 32:4,31; 삼상 2:2; 시 18:2,31,46; 19:14; 31:3; 사 26:4 등등).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반석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또는 그의 계시를 의미하는 것이다.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교회건설에 관한 예수의 말씀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확인하고 난 다음인데,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결국 예수의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한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정당한 것이다.
둘째로 반석 위에 세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 말은 산상설교의 마지막 부분 (마 7:24-25)의 도움을 받으면 잘 해석된다. 반석 위에 세워진 집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혀도 무너지지 않는다". 비는 위로부터, 창수는 아래로부터, 바람은 사방에서 온다. 반석 위에 세운 집은 위와 아래 그리고 사방으로부터 공격을 받아도 견고하게 선다. 이와 같이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져 있기에 어떠한 세력에 의하여도 무너지지 않는다. 비록 위와 아래 그리고 사방에서 교회를 파괴하기 위한 공격이 올지라도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 위에 서 있기 때문에 견고하기만 하다.
4) 교회건설에 관한 말씀 이후 단계 (18-19)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18)는 말씀에 이어 예수께서는 두 가지 사실을 교훈하셨다.
첫째로 교회와 음부(하데스)의 관계이다. 예수께서는 교회건설에 관한 말씀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덧붙이셨다(18). 이것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음부의 문들이 그것을 (= 교회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 "문들"이라는 표현이 여러 겹의 문들을 뜻하는 것인지, 여러 면의 문들을 뜻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문은 방어적인 의미를 가지므로 음부가 방어적인 입장에서 설명되고 있다. 음부의 문들과 관련하여 사용된 단어는 "...보다 힘이 세다"는 전쟁용어이다. 이 단어는 부정사와 함께 사용될 때 "...보다 힘이 세지 못하다", 다시 말하자면 "...을 당하지 못하리라"는 뜻을 가진다. 그렇다면 사탄의 나라가 아무리 강한 문들을 가지고 방어를 한다고 해도, 교회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사탄의 나라는 교회의 세력 앞에 방어할 힘이 없다. 이것은 교회가 담대하게 어둠의 나라를 공격해야 할 것을 알려준다. 교회는 공격하는 교회이다. 교회는 반석 위에 서 있기에 흔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나라를 흔든다.
둘째로 교회와 천국의 관계이다. 예수의 교회건설에 관한 말씀은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라"(19)로 나아간다. 여기에서는 예수께서 단지 베드로와 대화하고 있기 때문에 베드로만 언급된다 (마 18:18 참조). 교회의 일원인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준다는 것은 교회에 준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스어로 보면 열쇠는 복수로 사용되었다 ("열쇠들"). 교회는 천국의 열쇠들을 받는다. 교회는 음부에 대하여는 문들을 깨뜨리는 전투적인 모습을 가지지만, 천국에 대하여는 문을 순조롭게 여는 자격을 가진다. "천국의 열쇠들"을 가진다는 것은 선교적인 의미로 사람들이 천국으로 들어가도록 문을 여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마 23:13 참조). "열쇠들"은 교회가 다양한 방면에서 선교를 해야 할 것을 암시한다. 교회는 이러한 천국의 열쇠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게는 땅에서 하늘의 권한을 가지는 것이다. 교회는 하늘과 땅을 연결시킨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게서도 풀릴 것이다" (19). 교회에게 하늘과 땅을 엮는 권세가 허락되었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첫째로 교회가 얼마나 능력적인지를 배운다.
2. 설교의 요점 구상
교회는 신학적 설교를 듣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미숙아의 상태에 있을 뿐 아니라 항상 허약한 체질을 벗어나지 못하며 조금만 건드려도 늘 넘어지고 만다. 신학은 교회를 견고하게 만든다. 본문에 나오는 교회론은 비록 간략하지만 교회의 근거와 교회의 소속과 교회의 능력을 치밀하게 설명해준다.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교회나 예수께서 인정하시는 신분을 가지지 않은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 예수께서 설립자와 소유자가 되지 않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니다. 음부(하데스)의 문들을 깨뜨리지 못하거나 천국을 여는 열쇠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 교회는 힘있는 교회가 아니다. 본문에 언급된 교회에 관한 가르침으로부터 교회의 참된 기반이 무엇이며, 교회의 참된 소속이 무엇이며, 교회의 참된 능력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교해주면 신자들에게 성숙함과 강인함과 견고함이 주어질 것이다.
3. 설교 작성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의 다섯 가지 말씀이 나온다 (17-19). 첫째는 하나님의 계시가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근거라는 말씀이다 (17). 둘째로 베드로에 대한 것으로서 "너는 베드로(= 페트로스, 작은 돌)이다"라는 말씀이다 (18). 셋째로 예수에 대한 것으로서 "내가 이 반석 (= 페트라)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18). 넷째는 음부에 관한 것으로서 "음부의 문들이 그것을 당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18). 다섯째는 천국에 관한 것으로서 "천국의 열쇠들을 너에게 줄 것이다"라는 말씀인데, 여기에 매는 것과 푸는 것의 권세에 대한 말씀이 곁들여진다 (19).
본문은 지금처럼 예수의 다섯 가지 말씀을 하나 씩 풀어나감으로써 설교화 될 수 있다. 이렇게 한 구절씩 해설하고 나서 매 단락마다 마지막에 신학적인 정리를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니면 훨씬 앞에서 본문을 이해한 것처럼 신학적 용어들(교회의 근거, 교회의 소속, 교회의 능력)을 소제목으로 걸어놓고 각 구절을 해설해도 괜찮다. 이런 방식은 청중에게 아예 교회론의 몇 신학을 제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아주 명쾌한 설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교회론을 가르치는 이런 신학적인 설교가 성공한다면 청중은 교회의 부요함을 보다 더 크게 느낄 것이 분명하다.
5.심오한 설교 (Profound Preaching)
심오한 설교 - 마태복음에서
(본문) 마 1:1-17
(제목) 아브라함이 예수를 낳고
성경에는 설교하기에 거북스러운 본문들이 두 가지 있다. 난해한 구절과 따분한 구절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설교자에게 불편한 본문들이다. 특히 한 책을 연속적으로 강해하는 설교자들에게는 이런 본문들이 정말 해결하기 어려운 골칫거리가 된다. 그냥 넘어가자니 청중에게 성경실력의 한계를 보이는 것 같고, 붙들고 싸워보자니 능력도 능력이려니와 시간이 한도 끝도 없이 걸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욱 큰 문제는 이런 본문들은 대체로 독자들도 외면하기 때문에 사전이해가 부족하여 설교로 전달하려고 해도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어느 부분이든지 가치와 의미가 없는 것이 없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성경의 모든 부분이 설교하기에 적합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평상적으로 설교자들이 이런 본문들을 주의 깊게 연구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사실상 설교자가 이런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게 되면 그 자체가 그것을 그냥 흘려버렸던 청중에게는 엄청난 도전이 된다. 그 뿐 아니라 골칫거리처럼 보이는 본문을 설교함으로써 뜻밖에 얻는 엄청난 소득이 있다. 자주 그런 본문에는 숨겨진 보물같이 더욱 깊고 놀라운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것은 "심오한 설교" (profound preaching)이다. 마 1:1-17은 이런 설교에 대표적인 본문이다.
1. 본문이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다루는 세 가지 내용가운데 첫째이다 (1:1-17 역사적인 측면; 1:18-25 가정적인 측면; 2:1-23 사회적인 측면). 본문에서 첫 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이며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소개한 후에 (1:1), 역순으로 먼저 아브라함의 계보를 진술하고 (1:2-6a), 이어 다윗의 계보를 진술한다 (1:6b-11). 그리고 바빌론 포로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까지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서술하면서 (1:12-16) 요약적인 결론을 내린다 (1:17).
다윗의 아들(1) \ / 아브라함-다윗(2-6a) ↘
예수 그리스도(1) -----------X--- 바빌론 포로-예수(12-16) → 요약결론(17)
아브라함의 아들(1)/ \다윗-여고냐(6b-11) ↗
이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이스라엘이 왕국으로서 흥기하고 붕괴한 것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14대 씩 세 번의 구조로 나눈다 (1:17). 그것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 (여고냐)까지 14대, 바벨론 포로 (여고냐)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이다. 마태복음은 이러한 세 가지 구조를 통하여 이스라엘 왕국의 흥망성쇠를 설명한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이스라엘 왕국의 성립기이고,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 (여고냐)까지는 이스라엘 왕국의 존속기이며, 바벨론 포로 (여고냐)부터 그리스도까지는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기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기에 오셨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이제 이스라엘로서의 하나님의 왕국대신에 새로운 하나님의 왕국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옛 왕국은 지나갔고 새 왕국이 왔다는 것이다. 둘째로 다윗이라는 왕 대신에 새로운 왕이 통치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윗은 사라졌고 예수께서 등장하셨다. 이스라엘의 멸망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것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왕국이 왔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와 같은 역사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전달한다.
1) 계획의 하나님
첫째로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풀면 (마태의 계산으로) 40대 이상의 역사이지만, 줄이면 3대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 밖에 안된다고 말하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 (아들)이며, 다윗은 아브라함의 자손 (아들)이다. 그러므로 요약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 (아들)이다. 아브라함에게서 예수가 나셨다. 아브라함이 예수를 낳았다.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는 2천년이라는 시간이 들어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이 갑자기 졸속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위한 역사 뒤에는 하나님의 오랜 계획이 숨어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은 하나님의 오랜 계획을 배경으로 한다. 하나님께서는 오랜 역사를 그냥 흘려보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랜 계획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중대한 약속을 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는 한 아들을 낳아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고 (창 13:15; 17:7f.; 갈 3:16), 다윗에게는 한 아들을 세워 나라를 이루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삼하 7:12ff.). 하나님께서는 이런 언약을 맺으심으로써 자신의 계획을 오랜 역사동안 차근차근 이루셨다. 하나님은 아주 세밀하신 하나님이시다.
2) 역사의 하나님
둘째로 본문은 하나님의 계획이 오랜 역사가운데 진행되는 동안 그것을 망가뜨리려는 위험이 수없이 많이 찾아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파괴하려는 위험들이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갈의 사건이 있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엄청난 오해에 기인한 실수였다. 아브라함의 실수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것이었다. 다윗에게는 밧세바의 사건이 있었다. 이것은 다윗의 인간적인 충동에 기인한 실수였다. 다윗의 실수는 하나님의 도리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에는 왕들이 부패하고 타락하는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사 3:8). 한 마디로 말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살에 가시와 같은 것이며 눈에 먼지와 같은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을 괴롭힌 역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아픔을 당하셨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당하신 하나님의 고통은 심각한 것이었다. 성자 예수께서 몇 시간 동안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다면, 성부 하나님께서는 수 천년 동안 역사 속에서 고통을 당하신 것이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십자가를 지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위한 성부 하나님의 수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는 이처럼 성부의 수난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랜 시간 동안 역사와 함께 고난을 당하셨다.
특히 본문은 네 번 여자들의 이름을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을 파괴하려는 위험들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보여준다. 네 명의 여자들은 다말 (1:3), 라합 (1:5), 룻 (1:5), 우리야의 아내 (1:6)이다. 여기에서 가장 먼저 던지게 되는 질문은 이스라엘 왕국의 성립기에 네 명의 여인의 이름이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그것은 언뜻 보면 이스라엘 왕국이 여인들이 없이는 결코 성립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처럼 보인다. 네 명의 여인들은 이스라엘 왕국의 설립을 위하여 각각 매우 큰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여자들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던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 (교회)에서도 여자들이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여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위한 하나님의 오랜 계획을 파괴할 위험한 인물들이었다는 것이다. 이 여자들과 관련된 사건들은 매번 하나님의 계획이 깨어질 뻔한 고비가 되었다. 이 여자들은 모두 이방인들이었다. 다말은 아람 여인이었을 것이다 (창 38:5,12은 다말이 압둘람 근처의 지방인 거십과 딤나 지역에 관련이 있는 것으로 말한다). 라합은 가나안 여인 (여리고의 여인)이었다. 룻은 모압 여인이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는 우리야가 헷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삼하 11:3) 헷 여인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여자들은 모두 죄인이었다. 다말은 창기의 역할로 시부와 불륜의 관계를 맺은 여인이며 (창 38장), 라합은 창기 출신의 여인이며 (수 2:1), 룻은 본래 이방신을 섬기던 여인이었고 (룻 1:16), 밧세바는 다윗과 간음 관계를 맺었다 (삼하 11장).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처음 단락부터 철저하게 죄악으로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인간적인 안목으로 볼 때 하나님의 시도는 처음부터 파괴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면 달라진다. 하나님께서는 오랜 계획을 파괴시킬 위험한 여자들을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키는 인물들로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을 이루셨다. 하나님은 죄인의 역사를 통하여 의인의 역사를 이루셨다. 인간은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성공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매번 아브라함과 다윗과 이스라엘을 찾아오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하나님의 찾아오심은 절정에 이르렀다. 성탄은 하나님이 실수하고 범죄하고 타락한 역사를 뚫고 그의 백성에게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은 임마누엘이다.
3) 가속의 하나님
셋째로 본문은 하나님께서 구속의 계획가운데서 오랜 시간을 기다리셨지만 오래 참으시는 중에도 급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아브라함은 대략 2천년 떨어져 있고, 다윗은 대략 1천년 떨어져 있으며, 바빌론 포로는 대략 5백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위하여 아브라함 시대로부터 2천년을 기다리셨고, 다윗 시대로부터 1천년을 기다리셨고, 바빌론 포로 시대로부터 5백년을 기다리셨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시간을 점차 줄이셨다. 이것은 성탄을 위한 하나님의 가속화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위하여 인내의 한계를 나타내신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급하심이 보인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중에도 급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견딜 수가 없었다.
본문은 하나님의 가속화를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하여 아브라함과 다윗을 거론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다윗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1: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위한 이스라엘 역사의 요약이다. 이스라엘 역사는 아브라함, 다윗, 예수 세 인물로 요약된다. 이 세 인물은 이스라엘 역사의 압축이다. 인간의 역사적인 안목으로 보면 긴 시간도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안목으로 보면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벧후 3:8 참조).
2. 설교의 요점 구상
설교하기에 거북한 본문의 이면에는 때때로 놀라운 메시지가 숨어있다. 그것은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계보와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묘사하는 본문은 언뜻 보기에 매우 지루하고 재미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막상 본문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마치 땅속에 숨어있던 감자 알들이 줄줄이 끌려나오듯 굉장한 것들이 자태를 나타낸다. 특히 본문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역사와 구속사의 관계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백성의 존속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이며, 하나님의 구속사는 인간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실현이다. 역사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실패하고 구속사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승리한다. 인간이 실패하는 역사와 하나님이 승리하는 구속사 사이에 나타나는 대조적인 관계를 얼마나 선명하게 밝혀내느냐 하는 것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에서 성패를 가름한다.
3. 설교 작성
첫째로 이스라엘 역사를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로 압축하고 있는 서론 (1:1)으로부터 하나님의 심원한 구속계획을 말해야 한다. 둘째로 이스라엘 역사를 세 단계로 나누어 전개하는 본론 (1:2-16)에서 인간의 실패를 극복하는 하나님의 승리를 발견해야 한다. 셋째로 이미 서론 (1:1)과 본론의 마지막 절 (1:16)이 압축으로든지 전개로든지 이스라엘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가게 만들었던 것처럼 본문의 결론 (1:17)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역사의 목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면서 역사를 가속화시키는 하나님의 열심을 설명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조상들의 자연적인 출산의 결과가 아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1:2)라는 말에는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그 이후로 모든 출산과정이 계속되어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1:2)라는 말속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게 하고"라는 말이 숨어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은 인간의 자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적인 작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하여 우리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찾아오심의 절정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은 구속의 원인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절대적인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절대적인 표현이며 실현이다.
6.신중한 설교 (Prudent Preaching)
신중한 설교 - 마태복음에서
(본문) 마 11:27-30
(제목)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잘 아는 본문일수록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성경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닐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사이가 가까운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고, 매일같이 되풀이하는 일에서 실수를 하며, 주위에서 흔히 보는 물건의 쓰임새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성경에서 이런 사례들은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외우고 있는 말씀들이나, 설교를 통해서 여러 차례 반복해서 들은 말씀들이 오히려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입만 열어도 술술 흘러나올 정도로 익숙하게 암송하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암송이 이해인 것처럼 생각하는 잘못이다. 또 다른 쪽에서 보면 익숙한 본문은 이미 그 내용을 다 소화한 것같이 당연시하여 더 이상 깊이 살펴보지 않는 경향 때문에 무지한 상태로 남고 만다. 성경의 모든 부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성경에는 결코 잘 아는 본문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어느 본문을 잘 안다고 말하는 것은 아직 그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잘 안다고 생각하는 본문일수록 더 충실하게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중한 설교" (prudent preaching)이다. 마 11:27-30은 이런 본문 중에 하나이다.
1. 본문이해
본문 (마 11:27-30)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감사기도 (마 11:25-26)에 이어진다. 본문의 첫 절 (27절)을 앞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감사기도에 부속하는 것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맥상 분리하여 읽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28절의 "내게로"에서 "내"는 27절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 설명 받으면서 28절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리스어 구문에서 볼 때) "내게로" (28a)는 아버지와의 관계 (27)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28b)로 나아가는 교량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27 28a 28b
아버지에 의하여 모든 것이 주어짐 ↘ ↗ 수고하고
아버지가 아심 → "내게로"
아버지를 아심 ↗ ↘ 무거운 짐 진 자들
본문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인지를 설명한다 (27).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어떤 분인지 드러난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하여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27a). 부활 후에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마 28:18).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기 때문에 충만하고 풍성하신 분이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아시는 분이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27b).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마 3:17; 17:5).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의 모든 것을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고통과 아픔도 아셨다. 예수께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들어주셨다 (히 5:7).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아시는 분이시다.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7c).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그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신다 (마 11:26).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신다면 사람을 아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에 의하여 모든 것을 소유하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아주시고, 하나님 아버지를 아시는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세 가지를 요청하신다. "내게로 오라" (28), "나의 멍에를 메라" (29), "내게 배우라" (29).
1) 내게로 오라 (28)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초청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8).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쉼을 줄 수 있는 이유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쉼을 줄 수 있다. 사실상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가 없다. 죽은 자는 산 자를 위로할 수 없고, 거지는 부자를 위로할 수 없다. 지식이든 물질이든 지위이든 충분하고 풍성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위로라는 것은 말로 그치고 만다. 예수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하고 풍성하신 분이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수고와 부담에 고통하는 사람들에게 쉼을 줄 수가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은 예수께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쉽게 인정하고,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쉽게 사랑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고통과 아픔을 헤아림 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잘 헤아리는 법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시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신다.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아시는 예수께서는 사람의 수고와 부담을 꿰뚫어보신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아신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시는 분으로서 인간을 완전히 아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하기에 자신을 완전히 돕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가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이다. 사람이 타인을 돕지 못하는 것도 그를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우리가 다른 사람과 상담하면서 늘 느끼는 일이다. 인간은 자신이나 타인의 문제의 근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해결해 줄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시는 분으로서 인간의 문제의 근본을 아시기 때문에 해결해 주실 수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관계에 있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쉼을 주실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수의 초청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초청이다. 예수의 초청은 모든 인간적인 초청을 초월하는 놀라운 것이다.
2) 나의 멍에를 메라 (29)
둘째로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쉼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신다. "나의 멍에를 메라" (29).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수고와 부담을 없애기 위하여 예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시는 것은 언뜻 보면 매우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다. 그냥 수고와 부담을 제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멍에를 메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잘 생각해보면 깊은 진리를 담고 있다. 휴식이란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휴식이란 것은 종래 하던 것과 다른 것을 할 때 생긴다. 예를 들면, 노동을 하는 사람은 운동을 함으로써 피로를 푼다. 일터에서 벽돌과 목재를 나르는 일을 하는 사람이 집에서 아령과 역기를 드는 것은 언뜻 보면 매우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은 것이다. 힘든 일을 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휴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격이 다른 힘든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축구선수들은 휴식하는 방법으로 격렬하게 족구를 하거나 수영이나 탁구를 하는 것이다. 힘들게 일하는 회사원이 위험한 산을 등반하는 것도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인생의 수고와 부담을 벗는 방식은 예수의 멍에와 짐을 지는 것이다. 인생의 짐을 벗는 좋은 길은 신앙의 짐을 지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의 멍에는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께서는 "나의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30)고 말씀하신다. 예수의 멍에가 쉽고 예수의 짐이 가벼운 이유는 그것들은 즐거움과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예수의 멍에는 즐거움을 주고 예수의 짐은 기쁨을 준다. 즐거운 일은 어렵지 않고 기쁜 일은 힘들지 않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수업의 일환으로 산에 오르면 몹시 힘들어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산에 오르면 전혀 힘들어하지 않는다. 수업은 귀찮은 일이지만 여행은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쉼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의 멍에와 짐을 지라고 말씀하신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예수의 멍에와 짐을 지면 참 휴식이 주어진다.
3) 내게 배우라 (29)
셋째로 예수께서는 사람들게 쉼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로부터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내게 배우라" (29). 이 말씀도 역시 언뜻 보면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쉬는 것과 배우는 것은 서로 반대가 되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쉬는 것과 배우는 것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그러나 참된 휴식을 얻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배움은 휴식을 준다. 왜냐하면 배움은 새로운 사실과 새로운 세계를 알게 하기 때문이다. 배움은 신선함을 더해주고, 재미를 더해주고, 호기심을 더해준다. 배움은 환희를 일으킨다. 배움으로써 새로운 사실이 다가오고,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그래서 배움은 탄성을 자아낸다. 배움은 사람을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고 신선하게 만들고 재미있게 만들고 열정적으로 만든다. 바로 여기에 휴식이 있다. 작은 지식에 매이지 않고 큰 지식을 얻을 때, 낡은 지식에 매이지 않고 새로운 지식을 접할 때 휴식이 주어진다. 이것이 바로 아직도 세상에 지식추구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된다. 학습과 교육은 휴식을 준다.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휴식이 된다면, 예수로부터 배우는 것은 얼마나 큰 휴식이 되겠는가? 예수로부터 배우는 것은 참된 휴식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에게서 성경의 사실을 배우며, 영적인 진리를 배우고, 하나님의 세계를 배우며, 하나님 자신을 배우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을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영혼과 인생에 휴식을 가져다 준다.
특히 예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시기 때문에 (29)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온유와 겸손을 배울 수가 있다. 이때 우리는 예수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된다. 온유와 겸손을 습득하면 우리의 영혼에 참된 휴식이 주어진다. 사실상 사람들이 인생을 사는 동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온유하지 않고 겸손하지 않기 때문이다. 온유하지 않고 겸손하지 않으면 절대로 휴식을 얻을 수가 없다. 온유하고 겸손할 때 참된 휴식을 얻는다. 그래서 우리는 참된 휴식을 얻기 위하여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2. 설교의 요점 구상
성경에는 휴식(안식)의 신학이 있다. 휴식은 성경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관통하는 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께서 이 말씀 중에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29, 렘 6:16). 특히 휴식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수고와 부담으로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사실 누구도 인생이 수고와 슬픔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다. 인생은 수고와 부담으로 엮어져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수고와 부담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하여 애를 쓴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꼬이기만 하고 결국은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일생을 마치고 만다. 우리 자신에게는 인생의 수고와 부담을 풀만한 해결책이 없다. 이렇게 일생동안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께서 휴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3. 설교 작성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작성하면서 먼저 시 90:10같은 말씀을 들어 사람들이 얼마나 수고와 부담 가운데 인생을 사는지 언급할 필요가 있다. 외면적으로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도 사실은 나름대로 인생의 수고와 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그 자체로 문제거리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나에게 문제가 되었다"고 말한 어거스틴의 고백은 진실이다. 아무도 스스로 인생의 수고와 짐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오직 인생의 수고와 부담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 예수께서만 사람들에게 참된 휴식을 주시고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8), 사람들은 예수에게서만 참된 휴식을 발견한다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으리라", 29).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7).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으신 분이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시는 분이고, 하나님 아버지를 아시는 분이기에 충분하고 풍성하게 사람들에게 쉼을 줄 수 있다. 예수의 휴식은 그의 멍에를 메고 그의 교훈을 배울 때 극대화된다 (29,30). 왜냐하면 예수의 멍에와 교훈에는 놀라운 즐거움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7.은혜의 설교 (graceful preaching)
마태복음 설교 7
(본문) 마 8:1-4
(제목) 내가 원하노라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설교가 있다. 그런 설교는 그렇긴 하지 수긍하며 머리를 끄떡인다고 해도 가슴에는 전혀 와 닿지 않는다. 답답한 설교의 원인을 분석해보자면 무엇보다도 언변의 문제일 수가 있다. 말이 느리고, 졸리기에 딱 좋을 정도로 지루하게 잔잔한 어투는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와야 하는데 그냥 입 안에서 우물거리면 역시 재미가 없다. 설교자는 침이 튀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라는 것은 아니다. 논리가 꼬여있는 설교도 문제이다. 줄거리의 앞뒤가 맞지 않거나, 이 내용 저 내용이 마구 섞여 뒤죽박죽이 된 설교는 정말 짜증나게 만든다. 모션이 없는 설교는 두 말 할 것 없고, 모션이 너무 크거나 잦은 설교도 청중의 흥미를 떨어뜨린다. 설교에는 청중과의 눈맞춤과 함께 반드시 설교자의 적절한 동작과 표정이 가미되어야 한다. 원고만 들여다보는 설교 또는 원고만 읽는 설교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답답한 설교와 관련하여 이런 원인들은 외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설교에 은혜(감동)가 없다는 것이다. 설교에 은혜가 있다면 목소리가 격앙되지 않을 수가 없고, 논리가 꼬일 리가 없고, 모션을 하지 않을 수가 없고, 원고만 들여다보며 읽을 수가 없다. 설교는 은혜의 설교 (graceful preaching)가 되어야 한다. 마 8:1-4는 이런 설교에 좋은 예가 된다.
1. 본문이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설교가 끝난 상황에서 시작하고 있다. 여기에는 세 종류의 인물이 등장한다: 무리 (제자), 문둥병자, 예수. 이 세 인물을 중심으로 본문을 이해할 수 있다.
1) 무리 (제자)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설교 앞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마 7:28). 예수의 설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잠시도 한 눈을 팔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입을 열어 말씀을 시작하셨을 때 마치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처럼 천국의 비밀스런 보화들이 쏟아져 내렸고, 예수께서 설교를 마치셨을 때 바다에 물이 차는 것처럼 영혼의 깊숙한 자리까지 채워지게 되었다. 예수의 설교 가운데 한 마디도 영혼을 찌르며 심령을 흔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예수의 말씀은 그들이 지금까지 들었던 어떤 말씀과도 비교할 수 없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마 7:29). 사람들은 권세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동안 마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진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 모든 것이 분홍빛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렇게 예수께서 설교하시던 그 산은 말씀의 산이며 은혜의 산이었고, 그 산은 감격의 산이며 흥분의 산이었고, 그 산은 소망의 산이며 환상의 산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산에만 머물러 계시지 않았다. 비록 은혜의 말씀이 있고 감격적인 흥분이 있고 소망이 넘치는 환상이 있어서 그 산이 영적이고 신비하며 천상적인 산이라 할지라도 예수께서는 그 산에 머물지 않고 산에서 내려오셨다 (1). 예수께서는 말씀을 마치셨을 때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셨다. 예수께서는 말씀의 산에 계셔야 할 뿐 아니라 말씀이 없는 세상에도 계셔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무리들도 예수를 따라 내려왔다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신 후에도 무리가 여전히 산에 머무는 것은 예수의 뜻이 아니다. 예수의 뜻은 자신이 산에서 내려오듯이 무리도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은 말씀을 듣는 자리에만 머물게 하시지 않는다. 말씀을 들은 사람들을 산에서 내려가게 하시는 것이 예수의 뜻이다. 말씀과 은혜의 산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감격과 흥분의 산에만 집착해서는 안된다. 소망과 환상의 산만을 붙잡고 있어서는 안된다. 세상으로 들어가라. 말씀이 없는 사람들에게로 가라. 은혜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사명을 향해 가야 한다.
2) 문둥병자 (2)
은혜의 산 아래는 문둥병자가 있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며 비천한 사람이며 병약한 사람이었다. 문둥병자는 사람이었지만 사람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문둥병자는 인간이었지만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 이하의 존재였으며, 존재 이하의 비존재(非存在)였다. 그에게는 인간이 될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그에게는 인간 이하의 상태를 해결할 아무런 해결책이 없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문둥병자는 막힌 길에 들어선 것이며, 막힌 길의 종점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만한 능력이 없었다.
문둥병자는 자신의 무능성을 인식하였다. 그에게는 그를 문둥병에서 구원시킬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께 도움을 청하였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2). 그가 예수께 도움을 청하였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아무런 지혜도 능력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이 말로 자신의 무능성을 철저하게 고백하였다. 이렇게 문둥병자는 자신의 무능성을 인정하고 고백함으로써 참 인간이 되는 길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었다. 아직 인간의 무능성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그에게는 자신을 구원할만한 진정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 있든지, 부요하든지 가난하든지 자신의 비참함을 발견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드디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능력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시작된다. 인간은 자기를 포기하는 곳에서 하나님을 얻는다.
그러므로 문둥병자는 예수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2)라고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며 최후의 말이었다. 그는 이제 막힌 길에 영원히 갇힐 위기의 순간에 이 최후의 유일한 말을 하였다. "주께서 원하시면". 이것은 예수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의미한다. 이 세상에 자신의 의지를 접고 타인의 의지를 따라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은 강요된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다음 단락에 나오는 백부장의 말에서 잘 입증된다 (마 8:9). 강요적인 상황이 아닌데 자신의 의지를 꺾고 타인의 의지를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문둥병자는 "주께서 원하시면"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예수의 의지를 추종한다. 이제 문둥병자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의지가 없다. 그의 의지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의 뜻은 어떤 것이든지 더 이상 가치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의지까지 포기하였던 것이다. 놀랍게도 그의 소망은 예수의 의지에 자신을 맡기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3) 예수 그리스도 (3-4)
예수께서는 산 아래로 내려가셨다. 산 아래에서는 문젯거리가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는 그 일을 피하지 아니하셨다. 예수께서는 더럽고 암울한 세상을 지나쳐가지 아니하셨다. 예수께서는 문둥병자를 만나셨다. 예수는 은혜의 주님이시다. 그래서 그는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셨다 (3). 이것은 예수의 깨끗한 손과 문둥병자의 더러운 몸의 조우이다. 이것은 접촉한 것도 아니며 접촉하지 않은 것도 아닌 수학적인 탄젠트가 아니다. 이것은 비록 짧은 접촉이지만 모든 것을 변화시킬만한 절대강력의 접촉이다. 이것은 순간에 영원을 담은 접촉이다. 예수의 손은 인간의 손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이며, 문둥병자의 몸은 인간에 몸에 담긴 세상의 문제이다. 예수께서는 더러운 문둥병자의 몸을 만지기 위하여 자신의 거룩한 손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예수께서는 연약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랑을 가시화 하는 것을 마다치 아니하셨다. 예수의 속에는 은혜가 가득하기에 예수의 겉에도 사랑이 가득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문둥병자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원하노라" (3).
문둥병자의 회복은 예수의 뜻에 달려있었다. 예수께서는 문둥병자가 치료받기를 원하신다. "내가 원하노라" (3). 이것은 예수의 긍휼의 마음이며, 사랑의 심정이다. 이 소원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주셨다. 이렇게 하여 예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했던 말씀을 이루셨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마 8:17). 또한 이 소원 때문에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께서는 병 가운데 가장 크고 무서운 병인 죄악이라는 영혼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께서는 인간에게 있는 영혼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찢으시고 자신의 피를 흘리셨다. 예수의 몸과 피는 우리의 영적인 병을 치료하는 약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죄악이라는 인간의 가장 극악한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이라는 가장 위대한 약을 주셨다.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주셨으며, 가장 처절한 방식으로 주셨다. 이것이 예수의 소원이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원하노라".
예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셨다. 예수께서는 말씀과 은혜의 산, 감동과 감격의 산, 소망과 환상의 산에 머물지 아니하셨다. 산 아래에서는 질병과 슬픔이 기다리고 있었다. 산하는 고통과 사망의 세계였다. 그러나 사랑과 은혜의 예수께서는 그 세계를 피하지 아니하셨다. 산 아래에는 예수께서 하셔야 할 일이 있었다. 산 아래는 예수를 위한 사명의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좌절과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에서도 예수께서는 긍휼과 자비를 베푸셨다. 예수의 인애와 은총으로 말미암아 절망과 죽음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은 참된 인생을 가질 수가 있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은혜의 말씀을 멈추시고 산에서 내려오셨다. 예수의 설교는 끝났다. 그러나 예수의 사역은 끝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은혜의 입을 닫으시고 은혜의 손을 펴셨다. 예수의 은혜는 언제나 계속될 뿐이다. 산 위에서의 설교는 끝났다. 그러나 이제부터 산 아래서의 실천이 시작된다. 산상설교는 끝났다. 그러나 이제부터 산하실천이 시작된다. 이제부터가 정말로 은혜의 시작이다.
2. 설교의 요점 구상
본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은혜(감동)가 철철 넘친다. 무리 (제자)가 예수를 따라 감격의 산을 내려온 것부터가 감동적이다. 그들은 영광의 산에 머물지 않고 문젯거리로 가득 찬 세상으로 과감하게 내려왔다.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사람들이다. 산하에서 예수와 무리를 향해 나온 것은 인생의 종점에 처한 문둥병자였다. 그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비참한 존재였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의지라고는 자신의 의지를 예수의 의지에 내놓는 것뿐이었다. 인간이 무능함을 고백하는 것을 시작할 때 하나님은 전능함을 침묵하는 것을 끝낸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인간은 자기를 포기하는 곳에서 하나님을 얻는다. 예수의 모든 행위는 은혜의 연속이다. 산상에서 입을 열어 가르치신 예수는 산하에서 손을 내밀어 병자를 고치신다.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입을 아끼지 않으신 예수께서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손도 아끼지 아니하신다. 결국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살을 찢고 피를 흘려 은혜를 베푸는 것, 이것이 예수의 전적인 의지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이 본문에서 은혜를 말해야 한다.
3. 설교 작성
본문을 토대로 하는 설교의 성패는 매 장면을 얼마나 리얼하게 묘사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본문에 등장하는 세 인물은 각각 감동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무리는 예수의 산상설교에 놀라며 그를 따라 산에서 내려왔다 (7:28-8:1). 설교자는 무리가 예수의 설교를 들으면서 얼마나 감격했으며 예수와 함께 산에서 내려오면서 얼마나 흥분했겠는지 생생하게 묘사해야 한다. 그들의 감동은 산꼭대기보다도 더 높은 기분이다. 이에 비하여 문둥병자는 자신의 의지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비참한 존재이다 (2). 그가 짐승보다도 못한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얼마나 깊은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설교자는 리얼하게 말해주어야 한다. 그것은 산 뿌리보다도 더 낮은 절망이다. 마지막으로 설교자가 혼신을 다해 강렬하게 설명해야 할 것은 병자를 향한 예수의 뜨거운 마음("내가 원하노라")과 병자를 만지시는 뜨거운 손이다. 산상에서처럼 산하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 덩어리이다.
8.영적인 설교 (Spiritual Preaching)
마태복음 설교 8
(본문) 마 4:5-7
(제목)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설교자는 자칫하면 웰빙 차원의 설교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다. 이때 설교의 주제는 섭생과 규칙적인 생활에 의한 건강, 이웃사랑이나 성공을 강조하고 성적으로 문란한 사회를 비판하는 것, 부부의 금실개선 또는 자녀교육 같은 가정문제, 겸손과 인내와 정직 같은 것의 심성향상, 기도생활이나 집회참석 그리고 헌금을 권면하는 종교적 활동에 머문다. 이런 경우 기독교의 설교는 다른 종교, 철학, 사회단체들에서 행하는 연설과 다를 바 없을 뿐 아니라 때로는 그보다 훨씬 못할 수도 있다. 물론 기독교는 위에서 언급한 것들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이 정도를 기독교의 설교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충분하지 않다. 영적인 차원이 다루어지지 않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자주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든가 영적인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기독교의 진정한 관심은 영적인 세계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영적인 일이란 일차적으로 볼 때 거듭남,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것, 성령의 충만 같은 것이며, 더 나아가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목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 일을 가름하는 것은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지느냐 이다. 비록 교회와 관련된 일을 해도 그 목적이 자기를 위한 것이면 그것은 육적인 일이고, 사회에서 일을 해도 그 목적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면 그것은 영적인 일이다. 영적인 일을 설교하는 것을 영적인 설교 (Spiritual Preaching)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마 4:5-7은 이런 설교를 위한 좋은 예이다.
1. 본문이해
1) 마귀의 시험 (5-6)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을 진술하고 있다. 두 번째 시험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첫 번째 시험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시험은 첫 번째 시험과 마찬가지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이라는 말로 도입되면서 예수의 능력을 문제시 삼는다. 차이가 있다면 첫 번째 시험은 변화의 능력 (돌이 떡이 되게 함)에 관련되는 반면에 두 번째 시험은 보존의 능력 (발이 다치지 아니함)에 관련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마귀는 이 두 가지 시험으로 예수를 능력자로 만들어 구속성취보다는 능력행사에 더 마음을 두게 한다. 마귀는 예수를 능력자로 만들어 구속자의 신분을 잊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는 간교하게도 예수께 능력자임을 증명하면 하나님의 아들임이 증명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마귀의 교묘한 계략이다. 예수께서는 능력자임을 보여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이런 능력을 발휘하건 하지 않건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마 3:17). 사실상 마귀는 이러한 일반적인 계략 뒤에 더욱 무서운 계략을 숨기고 있다.
(1) 거룩한 성과 성전 시험 (5)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한 성으로" 이끌고 갔다. 이곳은 하나님의 도성이다. 마귀는 하나님의 도성을 차지하기를 소원한다. 마귀의 시험 속에 하나님의 도성을 빼앗으려는 시도가 숨어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영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마귀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는 "뛰어 내리라"고 말한다. 예루살렘과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나 사탄에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마귀가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운 것은 예배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마귀의 목적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이다.
마귀는 예수께 예루살렘과 성전을 능력행사의 장소로 이해시키려 한다. 이렇게 하여 마귀는 예루살렘과 성전이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의미를 완전히 상실시킨다. 이것이 마귀가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험하는 진정한 목적가운데 하나이다. 마귀는 하나님의 도성을 탈취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오용하는 것을 목적 삼는다. 이것은 마귀가 끈질기게 집착하는 목적이다. 그래서 마귀는 결국 성전을 장사꾼으로 가득 채우고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마 21:13).
(2) 성경 시험 (6)
마귀는 예수께 능력행사의 시험을 베풀면서 구약성경을 인용하였다(시 91:11-12). 마귀는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철저한 증빙서류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하면서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
마귀는 무엇보다도 성경의 목적성을 시험하려는 것이다. 마귀의 논리는 이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능력을 발휘할 때 입증되는데, 뛰어내려도 안전하다는 사실은 구약성경으로 입증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귀가 성경을 인용하는 의도는 이것이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성경에 너를 보호하겠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마귀는 마치 성경이 예수가 능력자인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마귀는 "뛰어내리라"는 말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성경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것은 구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성경의 목적을 오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마귀의 무서운 계략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오용시키던 사탄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오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마귀는 성경의 진실성을 시험하였다. 마귀는 성경으로 예수를 시험함으로써 성경이 과연 맞는가를 시험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 간사한 마귀의 꾀가 들어있다. 첫째로 예수께서 뛰어내리지 않으면 예수가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 된다. 둘째로 예수께서 뛰어내렸는데 천사가 보호하지 않으면 성경(하나님의 약속)이 틀린 것이 된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한 예수에 대한 시험은 결국 성경에 대한 시험이다. 마귀가 의도하는 것은 성경이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가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시편의 내용을 왜곡되게 인용한 것이다. 시편의 말씀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신자의 인생여정을 철저하게 보호해주실 것에 관한 말씀이다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시 91:11). 그러나 마귀는 마음대로 성경을 조작하고 있다. 마귀는 이 구절로부터 "네 모든 길에서"라는 말을 삭제하였다. 마귀는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3) 하나님 시험
셋째로 마귀는 성경이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성경을 주신 하나님도 믿을만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마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마귀의 최종적인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시험함으로써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옛날 사탄이 하와를 유혹할 때 사용한 오래된 방법이다(창 3:1, 4-5).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는 방법을 쓴다.
(4) 예수 시험
마귀의 시험의 결론은 예수를 능력자로 만들려는 것이다. 마귀는 예수의 마음을 능력 구하는 보통사람들의 심정에 적응시키려는 악한 시도를 한다. 당시에는 (사실은 지금도!) 초인간적인 능력적인 행사를 구하는 인간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초인간적인 행사를 구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이다. 모든 사람이 능력적인 일을 구한다. 마귀는 예수께 이런 능력적인 행사를 요구한다. 마귀는 예수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요구함으로써 예수를 초인간적인 능력자로 인정해주는 것처럼 하면서, 결국은 예수도 초인간적인 능력을 구하는 모든 사람의 심정을 가지도록 만들어 버리는 무서운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귀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대신 보통사람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였다.
2) 예수의 말씀 (7)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의 계략을 간파하셨다. 마귀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오용하고 있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고 있다는 것,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아셨다. 비록 마귀가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가고 성경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외면적으로는 매우 경건하게 보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예리한 안목을 피할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마귀의 가장된 경건의 이면을 정확하게 뚫어보셨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후에도 사탄의 악한 계략에 대하여 계속해서 싸우셨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과 성전을 오용하는 마귀의 계략을 깨뜨리기 위하여 활동의 마지막 부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고 (마 21:1), 예루살렘에 대하여 애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셨으며 (마 23:37),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예루살렘을 사수하셨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장사꾼으로 가득 차 있는 성전을 청결하게 하심으로써 성전을 탈환하셨다 (마 21:12). 이렇게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사수하시고 성전을 탈환하심으로써 사탄의 계략을 이기셨다. 또한 예수께서는 성경을 곡해하는 마귀의 계략을 파괴하기 위하여 성경을 잘못 가르치는 유대인의 지도자들과 논쟁을 하셨고 무리를 향하여 쉬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계략을 깨뜨리기 위하여 모든 행동으로 하나님을 지향하였고, 모든 말씀으로 하나님께 집중하였다.
바로 두 번째 마귀의 시험 앞에서 예수께서는 단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짧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셨다. 예수께서는 마귀의 최종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짧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심으로써 마귀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오용하고, 성경을 곡해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단칼에 물리치셨다. 이렇게 하여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2. 설교의 요점 구상
본문에서 마귀의 행위에 주목해야 한다. 마귀의 행위는 외면적으로 보면 매우 경건하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의 음란한 도시로 데려간 것이 아니며, 혼잡한 시장 한가운데 세워놓은 것이 아니고, 유행가의 한 대목을 읊조린 것이 아니며, 로마 황제의 승리를 언급한 것이 아니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갔고, 성전 꼭대기에 세웠으며, 구약성경을 인용하였고, 하나님의 보호를 언급하였다. 게다가 마귀는 예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러나 마귀의 목적은 전혀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예루살렘과 성전과 성경을 오용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며, 예수를 파멸시키려는 것이었다. 외면적인 경건의 이면에 숨어있는 마귀의 계략을 정확하게 간파해야 한다. 때때로 기독교와 관련된 모든 것이 제시된다 할지라도 전혀 비기도교적일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3. 설교 작성
무엇보다도 예수를 시험하는 마귀의 적극성을 치열하게 묘사해야 한다. 예수를 넘어뜨리기 위한 마귀의 노력은 회수로 세 번에 불과하지만 대단히 간교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은 경건을 가장한 시험이라는 데 두려움이 있다. 마귀는 예루살렘과 성전,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경, 하나님에 대한 언급, 예수와의 대화라는 경건하게 보이는 모든 것을 동원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무서운 야욕을 감추고 있었다. 우리는 자주 외면적인 경건에 경탄할 줄은 알지만, 가장된 경건 뒤에 숨어있는 악의에 대하여는 무지하다.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자는 자신의 야욕을 이루려는 마귀의 행동과 언어를 분명하게 정리해 줄 필요가 있다. 혹시 우리도 마귀의 행동과 언어를 따르고 있지 않는가? 기독교와 관련된 공간, 사물, 언어에서 자기의 유익에 몰두하고 있지 않는가? 마귀의 야욕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을 따를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시험 당하고 있는 자신까지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칠 때마다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구태여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구약성경을 택하셨고 (4,7,10), 마귀의 두 번째 시험에서도 "나를 시험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의 회귀, 귀결, 집중, 이것만이 생명의 길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9.의식화 설교
마태복음 설교 9
(본문) 마 18:15-20
(제목) 소수 그리스도인의 권세
우리는 다수에 의하여 소수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은 오래 전부터 사회를 지배해오고 있는 현상이지만 어느덧 교회에도 침투하여 지금은 많은 신자들이 이 현상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신자들은 큰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기를 좋아하며, 마치 대형교회에 속해 있는 것이 신자의 존엄인 것처럼 오해한다. 만일 그렇다면 초대교회는 가장 가치가 없는 시대의 교회로 간주되어야 하며, 초대교회에 속해 있던 신자들은 별로 귀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시작점에 있던 초대교회는 수적으로 볼 때 가장 작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다수에 의하여 소수의 존재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소수는 이미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진다. 오늘날 기독교회에는 소수의 가치에 대한 의식화가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으며, 이 요청에 부응하기 위하여 의식화 설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1. 본문이해
예수께서는 작은 수의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권세에 관하여 가르치신다. 소수의 의미는 교회설교 (마 18장)에서 잘 설명된다. 본문에 이르기까지 세 단락이 선행한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 (마 18:1-6), 실족하게 하는 자 (마 18:7-10), 잃은 양의 비유 (마 18:11-14). 그런데 각 단락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소자에 관한 내용이다. 첫째 단락에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라" (마 18:6)고 말씀하신다. 둘째 단락에서는 "삼가 소자 중에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 (마 18:10)고 말씀하신다. 셋째 단락에서는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마 18:14)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소자에 관한 말씀에 이어 소수에 관한 말씀으로 나아가신다. 그래서 본문에 흐르는 주제어는 소수이다: "한 두 사람" (16), "두 세 증인" (16), "두 사람" (19), "두 세 사람" (20). 여기에 점층법적인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다음과 같은 권세가 있다고 가르치신다.
1) 권고 (15-18절)
첫째로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하는 권세가 있다. 이 권세는 범죄한 형제에 대한 태도에서 잘 나타난다. 이 단락은 잃은 양의 비유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예수께서는 범죄한 형제에 게 권고하는 일에 일련의 순서를 가르치신다. "너" (15) - "한 두 사람을 데리고" (16) - "교회에 말하고" (17). 예수께서는 개인 ("너")에게 이미 범죄한 형제를 권고할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고 말씀하신다 (15). 한 사람에게 권세가 있기에 소수의 사람에게도 권세가 있다. 그들에게는 범죄한 형제에게 증참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 (16). 소수의 사람에게 권세가 있기 때문에 교회에게도 권세가 있다. 교회는 범죄한 형제를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길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17). 교회는 하늘에 영향을 주는 권세를 가진다 (18). 그러므로 교회의 권세는 소수의 권세에서 시작되며, 소수의 권세는 개인의 권세에서 출발한다. 그만큼 개인과 소수의 권세는 중요하다.
범죄한 형제에게 권면한다는 것은 형제의 범죄에서 자신의 범죄를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인간의 거울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타락은 교회의 타락에 대한 거울이며 (고전 10:5-6), 형제의 범죄는 자신의 범죄에 대한 거울이다 (갈 6:1). 그래서 권면하는 사람은 형제 뿐 아니라 자신도 죄악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범죄한 형제에게 권면하는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쉽게 빠져드는 죄악과 싸우는 것이다. 범죄에 대한 권면은 죄를 아파하는 것이며, 죄와 싸우는 것이며, 죄를 이기는 것이다. 개인이든 소수이든 범죄한 형제를 권면함으로써 죄와 싸우고 이기는 권세를 가진다. 이것은 형제와 자신을 범죄 앞에서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소수의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최고의 권세 가운데 하나이다.
2) 기도 (19절)
둘째로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도하는 권세가 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19상). 이것은 같은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합심기도에는 능력이 있다 (행 4:24). 이것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는 것을 실현한다. 땅에 있는 사람의 기도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응답을 이룬다. 사람과 사람의 합심은 사람과 하나님의 합심을 이룬다. 두 사람의 합심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심정적인 일치를 의미한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쉽게 넘어지지 않는다. 기도할 수 있는 합심은 더욱 중요하다. 이것은 신앙적 일치를 의미한다. 신앙의 친구인가 하는 것은 함께 기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합심은 가장 중요하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시리라" (19하).
여기에서 조건문과 귀결문을 연결시켜 두 가지에 주의해야 한다. 첫째로 소수의 신자들이 합심하여 간구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연결함으로써 하나님과 연결되는 소수이다. 둘째로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으면 신자들의 간구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점은 하나님의 응답에 관한 말씀에 있다. 소수의 권세는 하나님의 응답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다수보다 하나님의 응답이 있는 소수가 위대하다. 소수의 권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립된다. 교회의 역사는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이 바로 남은 자의 역사이다.
이 구절의 후반부를 정확하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것은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로부터 이루어질 것이다" (it shall be done for them by My Father who is in heaven, NASV). 예수께서는 "나의 아버지로부터"를 강조하신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산다. 기도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하나님을 근원으로 삼는다. 기도는 땅에 있는 사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참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도는 땅에 있는 인간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의하여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는 것이다. 그의 모든 원동력은 하나님에게 있다. 바로 여기에 기도하는 소수의 권세가 성립된다. 소수의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권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살기 때문에 권세를 가진다. 그래서 기도하는 소수 그리스도인들의 권세는 곧 하나님의 권세이다.
3) 집회 (20절)
셋째로 소수의 그리스도인에게는 집회의 권세가 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20). 이것은 소수 그리스도인의 가치를 가장 놀랍게 설명하는 말씀이다. 구약에서 기드온의 삼백 용사에게서 보듯이 큰 무리가 꼭 위대한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소수 그리스도인들을 광채 나는 존재로 인정하신다. 예수께서 보실 때 소수 그리스도인들의 모임도 존귀한 모임이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작은 무리라고 해서 무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기에 주님께서는 함께 계신다. 이것은 결국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교회관이 되었다. 초대교회는 가정에서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교회를 대단히 중시하였다. 예를 들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가정에서 시작된 교회라든가 (롬 16:5) 빌레몬의 가정에서 시작된 교회를 말할 수 있다 (몬 2). 예수께서는 작은 모임의 그리스도인을 귀하게 여기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눅 12:32).
그런데 소수 그리스도인이 권세를 가지는 가장 큰 근거는 예수의 이름이다.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권세를 가지는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얼마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에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얼마나 모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모였느냐 이다.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소수가 모였더라도 그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것이면 능력을 발하고, 다수가 모였더라도 그것이 예수의 이름없이 모인 것이면 능력을 발하지 못한다. "어떻게"에 따라서 "얼마나"가 평가되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소수는 모든 것이지만, 예수의 이름 없이 모인 다수는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은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놓쳐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의 이름이 단순히 "예수"라고 소리를 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수의 이름은 예수의 진리를 가리킨다 (요 14장 참조).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의 진리와 상관없이 예수의 이름을 말하는 것은 "다른 예수"를 말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고후 11:4). 우리는 소리로 예수를 말할 것이 아니라 의미로 예수를 말해야 한다. 우리는 음성으로 예수를 말할 것이 아니라 진리로 예수를 말해야 한다. 우리의 모임은 예수의 진리로 모이는 모임이어야 한다. 우리의 모임에서는 인간의 이론이나 세상의 철학이 지배해서는 안된다. 오직 예수의 진리와 복음이 우리의 모임에서 왕 노릇해야 한다. 이때 비록 소수의 그리스도인이 모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권세 있는 위대한 모임이 된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일 때 소수와 다수의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예수의 진리로 모이는 모임은 수에 의하여 영향력이 결정되지 않는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다면 적은 수의 그리스도인이 모인 것이나 많은 수의 그리스도인이 모인 것이 별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소수의 모임에나 다수의 모임에나 예수께서 똑같이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임재는 어떤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든지 동등한 가치를 가지게 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20하). 하늘이 땅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소수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며 영광이다. 소수의 영광은 예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사실에 있다. 예수께서 소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능력이며 영광이다.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예수는 임마누엘이시다 (마 1:23). 예수께서는 세상의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 (마 28:20). 그러므로 소수의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함께 주시는 능력과 영광을 누린다. 예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권세와 영광으로 삼고 능력적이며 영광스럽게 사는 것이 소수 그리스도인의 권세이다.
2. 설교의 요점 구상
설교자 자신이 먼저 다수에 의하여 소수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소수의 가치 그 자체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면 이 설교는 성공할 수 없다. 교회의 규모가 커질수록 설교자는 개인과 소수의 귀중성에 대하여 무디어진다. 이런 경우에는 필자가 보기에 성경의 절반 이상이 설교에서 멀어지고 만다. 소위 교회설교라고 일컬어지는 마태복음 18장을 천 번이라도 읽어서 사고에 전환을 일으켜야 한다. 설교자가 소수의 가치에 대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면서 이 본문을 설교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이 본문이 소수 그리스도인의 존엄과 권세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설교자는 이 요점을 맹렬한 주장하여 청중이 개인과 소수의 존엄과 권세를 의식하고 회복하게 만들어야 한다.
3. 설교 작성
청중에게 아주 잠시라도 본문의 문맥에 나타난 작은 자, 개인, 소수에 대한 반복적인 진술을 집어주는 것이 좋겠다. 이것은 청중에게 이런 문제에 대한 성경의 고집스러운 입장을 이해시키는 데 지름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의 서론에서 오늘날 우리가 사회적으로 맞이하고 있는 대형화추세와 개인가치의 소멸에 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매우 합당하리라고 본다. 본문에 점진적으로 흐르는 세 가지 요소인 권고, 기도, 집회에 대한 진술은 일반적으로 세 대지 설교에 잘 맞기 때문에 청중이 기억하기에 좋을 것이다. 설교자는 이 본문을 가지고 개인과 소수의 존엄에 바탕을 둔 교회의 의미를 부각시켜라. 가장 작은 것의 실현이 가장 큰 것의 실현이다.
10.진정한 설교
마태복음 설교 10
(본문) 마 28:16-20
(제목) 열 한 제자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로 삼고 있는 것 가운데 한 가지는 신과 인간의 극명한 대비이다. 사람은 가장 안전한 상태에서도 불안하고, 가장 행복한 상태에서도 불행하며, 가장 위대한 상태에서도 가장 비참하고, 가장 지고한 상태에서도 가장 천박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빛의 상태에서 항상 빛이시며, 복의 상태에서 항상 복이시며, 선의 상태에서 항상 선이시며, 영의 상태에서 항상 영이시다. 하나님과 사람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런데 성경이 처음부터 끝가지 주제로 삼는 또 한 가지 사실은 신이 인간을 교정한다는 것이다. 빛이며 복이며 선이며 영이신 하나님이 불안함과 불행함과 비참함과 천박함에 있는 사람을 찾아오셔서 교정하신다. 신은 인간의 교정자이다. 인간은 신의 교정일 때만 가치가 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에 의하여 교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은혜이다. 설교의 중대한 기능은 인간의 비참함을 날카롭게 지적하여 신에 의한 교정이 없이는 인간이 얼마나 허무한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장엄하게 설명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교정된 사람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진정한 설교는 인간의 비참함을 예리하게 드러내기에 파괴적이며 (destructive), 하나님의 은혜를 찬란하게 소개하기에 건설적이다 (constructive).
1. 본문이해
본문에는 열 한 제자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조가 여러 가지 면에서 극명하게 돋보인다. 제자들은 무엇인가 결핍된 상태를 보여주고 (16-17),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인가 충만한 상태를 보여준다 (18-20). 열 한 제자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나타난 대조를 보여주기 위하여 양쪽에 동일한 또는 유사한 단어들과 대조적인 단어들이 반복된다 (16 제자 - 19 제자를 삼다; 16 가다 - 19 가다; 16 열 하나 - 19 모든; 16 산 - 18 하늘과 땅; 17 예수 - 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17 경배하다 - 제자를 삼다/세례를 주다/가르치다).
제자들은 숫자적으로 보면 본래의 수에서 하나가 모자란다. 그들은 열 두 명이 아니라 열 한 명이다. 수적인 결손은 제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후에 한 제자를 보충하는 일까지 하였다 (행 1:15-26). 그러나 예수께서는 달리 생각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면 열 한 제자가 해야 할 일은 한 명의 제자를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것이다 (19). 예수께서는 제자를 열 두 명으로 고정시키는 것에 더 이상 관심이 없다. 예수의 진정한 관심은 모든 족속으로부터 수많은 제자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열 한 제자가 모든 사람을 제자로 만들기를 원하셨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명하신 갈릴리의 산으로 "갔다" (16). 제자들은 갈릴리로 갈 것에 관해서 이미 여러 차례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26:32; 28:7,10,16), 예수께서 명령하신 대로 갈릴리의 산에 이르렀다. 갈릴리의 산에 도착했으니 이제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완수한 것인가? 갈릴리의 산에 도달했으므로 예수의 명령을 준수했다고 안심해도 괜찮은가? 그렇지 않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갈릴리도 가는 것은 명령의 시작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셨다. 예수께서 진정으로 원하신 것은 제자들이 갈릴리의 산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족속에게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19). 갈릴리는 종점이 아니라 시점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갈릴리의 산으로 간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모든 족속에게로 가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리의 산이 아니라 모든 족속을 맡길 생각을 가지셨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겨우 갈릴리(의 산)를 다스리는 분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갈릴리 외의 지역에서는 아무런 권한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간신히 한 지역 (갈릴리든지 산이든지)만을 다스리는 분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발생할 수 있는 오해를 깨뜨리기 위하여 자신의 권한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다" (18).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의 주재이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은 세상의 끝 날까지 확장된다 (20). 예수께서는 가장 큰 공간인 천지를 다스리며, 가장 큰 시간인 종말을 주관하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어떤 권한을 소유하신 분을 만나고 있는지 알려주셨던 것이다.
제자들은 갈릴리에 가서 부활하신 예수를 뵈었다 (17).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뵌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육체가 아니라 부활하신 몸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 자신을 보는 것만으로는 기뻐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 자신 뿐 아니라 아버지와 성령을 위하여 일하게 하신다. 예수께서 진정으로 소원하신 것은 제자들이 예수를 보는 것을 그치지 않고,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삼위 하나님을 체험시키는 것이었다.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19). 예수의 소원은 제자들이 예수를 체험이 아니라, 제자를 통하여 사람들이 삼위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경배하였다 (17). 경배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경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감동은 경배를 낳고, 경배는 감동을 낳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을 경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경배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경배하는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고, 세례를 주며, 예수의 분부를 가르칠 것을 요구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뿐 아니라 모든 족속이 예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원하셨던 것이다.
갈릴리에 도착한 제자들에게서 나타난 가장 큰 문제는 그들 가운데 몇 사람들이 의심을 했다는 것이다 (17). 제자들은 영적인 결핍상태에 빠져있었다. 여기에 이상한 것은 예수께서 전도의 사명을 주기 전에 의심하는 자들에게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에는 예수께서 의심하는 제자를 책망하시거나 권면하셨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바다 위를 걷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베드로가 물에 빠져드는 것을 보고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마 14:31)고 나무라셨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예수께서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아무런 책망도 권면도 하지 않는다. 베드로가 예수의 초청을 의심할 때 책망을 받았다면,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의심할 때야 더욱 책망을 받을 법하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의심을 책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의심을 깨는 길은 책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는 제자들의 의심을 깨뜨리기 위하여 다른 방법을 사용하신다. 그것은 전도의 실천이다. 전도는 의심을 파괴한다. 물론 전도는 복음에 대한 확신으로 이루어져야 하지만, 때때로 의심 속에서도 행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의심하는 제자들의 의심을 풀어주는 데 마음을 쓰지 않고, 오히려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영적으로 보충하는 방식은 책망이 아니라 사명을 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본문은 열 한 제자와 예수를 대조적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열 한 제자에 대하여 대조적인 모습을 가지는 것은 제자들을 절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제자들이 모든 면에 얼마나 부족한 상태에 있는지를 알려줌으로써 그들을 좌절에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열 한 제자를 교정하여 신적인 위치로 높이려는 목적을 가지셨다. 제자들의 고귀한 위치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첫째로 제자들은 예수의 권세를 대신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가지고 계신 가장 결정적인 권세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18)이다. 이것은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의미한다. 이러한 권세를 가지고 계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준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전도는 막강한 배후를 가지고 있다. 천지의 권세를 지닌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통하여 이 권세를 떨치려 하신다. 제자들은 예수의 이 권세를 떨치는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하여 제자들을 가장 높은 지위로 올리신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역자들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전도사명은 명령이 아니라 은혜이다. 겨우 두려움을 쫓고 예수를 만나기 위하여 달려온 제자들에게, 그 중에는 아직도 의심하는 자들이 섞여 있는 제자들에게 전도를 요구하는 것은 예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낮고 천한 제자들을 사용하여 자신의 권세를 발표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담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전도로써 예수의 권세를 표현한다. 예수의 권세를 보이느냐 아니냐는 제자들에게 달려있다. 예수께서 권세가 있는 분인 것을 증명하느냐 아니냐는 제자들에게 달린 것이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제자들은 고귀한 위치에 올려놓으셨다.
둘째로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삼위 하나님의 이름을 부여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신 것은 "모든 족속" (19)을 제자로 삼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전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스케일이다. 예수께서는 온 세상 사람을 주목한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모든 족속을 상대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러면 예수는 제자들의 전도를 통하여 모든 족속에게 무엇을 주려는 것인가?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에로" (19) 연합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세례라고 불린다. 세례는 성 삼위 하나님께 연합하는 것이다. 세례는 사람들이 전과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되는 행사이다. 사람들은 제자들로 말미암아 다른 이름을 가짐으로써 다른 신분을 가진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전도를 통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달하려는 복은 바로 이런 것이다. 제자들은 단순히 무슨 물질적인 복이나 세상적인 복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이름에 연합하는 복을 전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사람들에게 삼위 하나님의 이름을 부여하는 자들이라는 존귀한 위치로 올려놓으셨다.
2. 설교의 요점 구상
본문에서 열 한 제자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조를 극명하게 드러낼수록 좋다. 제자들의 상황과 예수의 의도를 대조적으로 실감나게 그려내야 한다. 설교자는 이 본문을 가지고 인간이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할 때조차도 얼마나 불확실한 존재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는 자리에서마저도 깊은 의심에 빠져들었다. 인간은 확실함 속에 자리잡은 불확실함을 스스로 깨뜨릴 수가 없다. 따라서 인간은 모순적일 뿐 아니라 불능적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제자들의 모순적이며 불능적인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확실함 속에 위치한 불확실함을 깨뜨리셨다. 예수께서는 먼저 제자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 이것은 제자들을 절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의도하는 것은 제자들을 교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의 문제를 지적한 것은 은혜이다. 이것은 교정의 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교정자이다. 설교자는 이 본문에서 인간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장 확실한 상황에 놓인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위한 유일한 교정자가 되신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나쁘지 않다.
3. 설교 작성
예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다시 만나 경배하였다. 언뜻 보면 이것은 매우 훌륭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부활 예수를 만난 제자들에게는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있었다. 우선 그들은 숫자적으로 결핍상태에 있었으며 (열 한 명), 영적으로 결손상태에 있었다 (의심). 그러나 본문을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면 제자들에게는 더 큰 문제점들이 발견된다. 그것은 제자들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도와 멀리 떨어져있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진정으로 소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전히 알지 못했다. 본문은 예수께서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를 보여주면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소원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부활의 영광을 얻으신 예수께서 가장 확실한 상태에서도 가장 불확실한 열 한 제자를 교정하여 모든 족속을 책임지는 영광스런 지위로 올려놓으셨다.
조병수 목사
총신대 (B.A.)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M.Div.)
독일 뮌스터 대학교
(Westaeflische Wilhelms-Universtitaet)
신학박사(Dr. theol.) 신약학
독일 Aachen 한인교회 목회
독일 Wuppertal 한인교회 목회
염광교회 담임목사 (1995-2001)
現 합동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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