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선 교 신 학

수호천사1 2016. 6. 15. 00:56

선 교 신 학

 

 

 

모든 신학의 중심에 “선교”가 있다. 만약 신학이 선교를 위한 목적과 의도와 열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종교학은 될 수 있으되, 결코 기독교 신학은 될 수 없다. 이 선교를 연구하는 것이 선교신학이다.

 

J. Verkaul 이 세계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한 성부 성자 성령의 구원활동을 연구하는 것이다.

 

선교에 대한 학문인데, 이것은 주어진 문화적 상태에서 신학과 역사와 철학과 전략적 적용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선교신학 - 조직신학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정통신학을 알아야 한다. 조직신학을 통해서 그 선교신학이 이단으로 나가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며, 성서적 근거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구조 .... 성령에 대한 이해 이런 것들이 신학이라고 할 때 특별히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역사라고 할 때는 선교역사를 이야기하는데, 교회사와 선교사는 약간 다르다. 선교적 차원에서 보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참고도서 가운데 선교역사에 대한 책을 볼 때는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스테판 닐이 쓴 The history of Christian Mission(기독교 선교사) 을 보면 간결하면서도 중요한 것이 빠지지 않은 내용을 볼 수 있다.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초기교회(early church), 초대교회는 어폐가 있다. 콘스탄틴 이후의 로마제국을 중심으로 오늘의 유럽 서구가 기독교화 되는 과정을 두 번째로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 다음에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제수잇 오더를 중심으로 로만 카톨릭 교회의 아프리카, 중남미, 아시아 선교를 주목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별로 활동이 없었으나 개혁교회, 종교개혁 이후의 중요한 개혁교회의 선교 운동과 선교신학을 볼필요있다. 그 다음에 경건주의자들의 선교운동을 보아야 한다. 독일의 경건주의자 모라비안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운동. 그 다음은 19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운동, 화란, 미국, 영국등을 중심으로 일어난 19세기 선교운동이 중요하고, 그 다음이 현대이다.

 

철학이란 말은 선교철학인데, 여기서 말하는 철학이란 것은 우리가 볼 때는 관, 입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몇가지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선교를 할 때 어떤 사람은 개인주의적 견해가 있다고 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자신이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no intentional mission 혹은 passive mission이라고 한다. 그 다음은 교회주의의다. 개인의 의사와 관계 없이 교회의 권위로 이것을 해야한다. 로마 카톨릭이나 정교회가 이런 경형이다. 식민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선교는 국가의 책임이다. 한 때 이런 때가 있었다. 서구의 여러 국가들이 화란, 영국, 독일의 많은 사람들이 선교는 국가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이 faith mission이란 것이 있다. 믿음 선교는 지나친 직역이다. 교단의 지원 없이 지원 없이 선교의 뜻이 있는 사람들이 끼리 모여서 하는 것이 제 일 좋다는 견해다. supportism 지원 주의라는 것이 있다. 요즈음 중요한 것은 교회를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 기존의 교회를 도와 서비스하는 것, 서비스 미션 무브먼트, 성서공회가 이런 것에 속한다. 기구주의라는 것이 있다. 병원이나 학교나 고아원과 같은 기관을 세워서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기관을 세우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에큐메니칼리즘, 선교는 세게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는 것이며 이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관들이 중복, 결합되어 있다. 철학이란 것은 이런 것들을 의미하고 이런 것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전략적 적용이란 말을 하는데, 그것은 칸텍스트, 선교현장에 대한 연구, 역사, 종교, 문화를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 같은 신학적 입장과 철학적 입장, 역사적 연구를 통하여 선교현장을 연구하고 분석하여 전략을 논하는 것이 전략적 적용이란 말의 뜻이다. 신학, 역사, 선교관, 칸텍스트 연구와 선교 적용 이런 것들을 연구하는 것을 선교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훨씬 더 많은 분야들이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선교학이란 것은 미시올로지라는 것은 단순한 아카데믹 엑티비티가 아니다. 학문적 연구가 아니다. 이것이 다른 적지 않은 학문, 신학의 분야와 선교신학이 다른 점 중의 하나이다. 올란트 코스타스의 책, 크라이스트 아웃사이더 케이트, 이분이 선교학이란 것은 근본적으로 프락시오로지칼 피나미넘 praxiological phenominum 이라고 이야기했다. 프락시스 실천, 실행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선교학은 단순한 이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프락시오로지칼 한 것이다. 대단히 실천적인 학문이다. 프락시스와 로직이 같이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겠는가? 우리 나라의 학문적 전통의 역사를 참고한다면, 실학적 성격이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선교신학은 선교의 프락시스에서 일어나는 비판적 사색이다.  선교의 프락시스 없이 선교학은 불가능하다. 선교학은 선교에의 동참과 교회의 선교적 복종과 일정한 선교적 컨텍스트에서 일어나는 선교적 활동속에서만 수행되는 것이다. 선교학은 삶의 다양한 상황속에서 복음 증거활동에 부분으로 발생한다는 말도 있다. 선교신학은 실제적인 복음증거 활동, 선교활동의 부분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라는 액션과 그 선교에 대한 생각 레플렉션이 일치되어야 한다. 앤드류 워스 A. Walls  라는 사람이 있는다.  아프리카 선교사로 오랫동안 사역, 에딘버러에서 선교학을 교수하시다가 은퇴하시고 지금 프린스톤에서 임시로 강의하고 있다. Mission studies are not simply a preparation of mission, are a part of mission.   선교를 공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선교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선교학이란 것은 can not be static. 고정될 수 없다. 액션과 리플렉션이 같이 있기 때문에, 컨택스트가 자꾸 변하기 때문에 정적으로 고정될 수가 없다. it grows, ....  변화하는세계와 관계하고 적용하고 적응하기 때문에 고정될 수 없다. 선교신학은 종결이 없고, 완성이 없다. 그러므로, 통합적 신학이 어렵다. 보수신학은 지키기만 하면 되므로 쉬운 것이다. 진보주의, 자유주의 쉽다. 자기 멋대로 이야기해도 아카데믹 프리덤이 보장되는 분위기에서는 괞챤다. 그러나, 교회학문으로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성숙시키고 이런 측면에서 해야하기 때문에 통합적 신학이 어려운 것인데, 따라서 좋은 선교신학은 순례자적 선교학이다. pilgrim missiology. 선교신학은 theology on the way 의 성격을 가졌다. 도상의, 미완성 상태에 있는 것이다.

 

 

 

 

 

I. 세계선교와 한국(한민족)교회

 

세계역사는 주님의 성찬과 재림사이에 진행되고 있다. 재림과 더불어 역사는 종말을 고한다. 성찬과 재림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선교, 사람과 세계를 구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서에서 동으로,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고 있다. 복음의 중심의 이동, 예루살렘, 안디옥, 로마로 옮겨지고, 그 다음에 유럽전체로, 프로테스탄트로 말하면 영국, 네들란드, 스칸디나비아, 독일북부, 19세기 말쯤 되면 북미 대륙으로 20세기는 교회의 중심이 미국에 있었다. 선교사의 수나, 그들의 선교비 지출내역을 볼 때 20세기는 미국교회 선교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제 교회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고 한다. 2/3 세계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피선교권, 비 서방권으로 세계선교의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전통적인 피선교지 교회의 위상이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해 졌느냐 하는 것은 국제 기독교 대회, 모임 같은데 가보면 실감할 수 있다. 그 전에는 없었다. 피선교지 사람들은 업저버나, 피선교지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서 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2/3 세계 교회의 대표들이 참석한다. 교세가 확장된 지역으로 보면, 라틴아메리카, 중앙아프리카 일대, 그리고, 한국 중국 이 근처이다. 앞으로 이 지역의 교회들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20세기 초 80% 기독교인이 서구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60-65%의 기독교인이 2/3 세계에 속해있다. 미국의 경우도 점점 동부쪽이 더 중요해 지고 있다. 근데, 2/3 세계 교회쪽으로 세계교회 중심이 이동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한국교회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남미에 있는 교회는 상당히 아직도 신학적으로는 부실하다고, 빈약하다는 면이 있다. 대부분의 큰 교회는 오순절 교회고, 그나마도, 문제가 여기저기 있는 모습이고, 중앙아프리카의 교회도 역시 오순절 교회다. 건전한 오순절이라기보다는 샤마니스틱한 면이 많은 교회이기 때문에 그런 교회가 세계적인 선교의 주역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게 보면, 한국과 중국을 생각할 수 있으나, 중국은 아직 선교의 자료가 없고, 교회 지도자들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성숙하는데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 한민족 교회가 21세기에 대단히 중요한 선교적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한민족교회가 과거 어느 때 보다 지금이 선교적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 한국교회가 중요한가?

 

첫째는, 한국교회가 성장한 교회이기 때문에 그렇다. 지난 수십년간 가장 성장한 교회중의 하나가 한민족 교회다. 사실은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성장했다. 미국 선교사들이 처음 들어와서 선교한 이래 계속 성장을 했다. 일제 탄압 때문에 2차 세계대전 말기 약간 둔화되었으나 전반적으로 한국교회는 놀랄만한 성장세를 유지한 것이 사실이다. 19세기 말에 이미 미국선교사들이 교회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빨리 더 많은 사역자들을 보내 달라고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 지난 성탄절 마삼락 박사가 성탄카드 대신 편지를 보내면서 1930년대 마포삼열 목사님이 한국에서 본국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복사해서 보냈는데, 역시 그 때 한국교회가 굉장한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 비결을 묻는데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있었다. 마포삼열 목사님의 사모님이 보낸 복사 문서 1920년 초, 삼일운동 이후 몇해 지난 뒤, 교장 이취임식에 학교 연혁을 이야기하는데, 그 연혁문이다. 그 자료를 보면, 이미 1920년대에 평양장로회 신학교가 세계에서 장로회 신학교중에서 학생이 가장 많은 신학교로 보고되었다.  1907년 종로 YMCA 건물 기공예배를 드릴 때, 존 모트라는 사람이 왔는데, 당시 세계 YMCA 총무였는데, 서울보고 돌아가서 쓴 글 가운데, 아마도 세계 비기독교 가운데는 한국이 가장 먼저 기독교 국가가 될 것이다. 1907년에 그런 말을 했다. 그 만큼 처음부터 한국교회가 다른 선교지역에 비하면 선교를 하였다. 특별히 지난 20-30년 동안 양적 성장을 했는데, 물론 교회성장이 급속하게 되었기 때문에 많은 부수적인 문제가 생겼다. 질적 문제, 성숙의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우리에게 느껴지고 있고,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 근데, 확실히 생각해야 하는 것은 교회는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 성장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잘 못된 것이다.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성장으로 한국이 선교적 자원과 인력이 증가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역사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헌신자와 선교비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하는 일은 많다.(잠언말씀) 소가 없으면 편안하겠지만 일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교회 성장을 중요한 것이다. 인도네시아 반둥에는 화란 사람이 세운 벧엘 교회가 있었는데, 250년 된 교회를 한 번도 증축한 적이 없는 교회였다. 증축할 필요가 없는 교회였다. 성장이 안되니까...  지금 한국교회가 건물을 계속해서 부동산에 계속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성장하지 않는 교회에서 볼 때는 한국교회가 굉장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대단히 중요한 선교적 힘과 자원을 가진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미국의 주요한 프로테스탄트 신학교의 학생 분포를 보면, 미국 사람 다음으로 한국 사람들이 많다. 내가 1967년에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한국사람 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15%가 한국계 학생이다.

 

둘째는, 우리가 고난과 시련을 체험한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에 그렇다.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형성된 신앙을 가진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렇다. 한국교회가 그 같은 고통과 역경 속에서 신앙을 지킨 교회다. 그런 환경과 체험속에서 한국교회의 독특한 신앙성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한가지 서구 선교사들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현지인들의 고통, 그 가난, 그 차별의 서러움, 이런 것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이 없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교회적으로도 그렇다.

 

1960년 말 1970년 초, 선교운동 과정에서 “모라토리움”이란 것이 있다. 지불유보라는 경제적인 용어이다. 선교학에서 선교유보를 뜻하는 것이다. 선교중지, 선교유보를 뜻하는 것이다. 선교사여 돌아가라는 말이다. 혹은 우리 지역에 선교사들이 너무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하고 주장하기 때문에 우리의 자아성을 형성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서양선교사들이 물러갔으면 좋겠다. 그 동안 우리 자신의 교회를 형성하겠다. missionary go home!  모라토리움이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었다. 1993년이라고 기억되는데, 케냐 나이로비에서 한국 선교사 대회가 있었다. 초교파적으로 2년에 한 번씩 한국선교사들이 대회를 하는데, 케냐에 총회 본부가 있는 동부 아프리카 장로교회 총회본부에서 방문을 요청해서 방문을 했다. 총회 총무실에서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그 분들이 우리에게 동부 아프리카 장로교회 100주년 기념패를 주고, 뺏지를 달아주고, 한국에서 많은 선교사들을 보내 주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받았다. 마음속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모라토리움 운동이 진행될 때 핵심적인 인물이 동부 아프리카 총무였던 죤 케터(J. Gater) 였다. 그가 직무한 사무실에서 그 후임자들에 의해서 선교사 파송 요청을 받았을 때 대단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들 나름대로 어떤 한국교회와 한국 선교사에 대한 이들의 인식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백인 선교사들과 다르다. 인간의 고통, 가난, 슬픔을 체험한 사람들이 가진 신앙적인 공통점,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할 수 있는 이런 것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베트남에는 한국 교회가 두 개밖에 없다. 월남 사람들이 한국 사람 좋아하는가? 물었다. 월남 전쟁 때 많은 피해를 끼치지 않았는가? 선교사들이 처음에 본인들도 많은 걱적을 했는데, 막상 와서 이들을 대해 보니, 뜻밖에도 한국 사람들과 목사들을 교인들이 좋아하더라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여러분들 우리가 만나서 대해보면, 띵깐이 있다고 합니다. 띵깐-동감이란 말이다. 감정이 통한다는 말이다. 같은 식민하에서 있어고 전쟁과 가난과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서 우리가 겪은 여러 가지 마음과 마음이 교류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대단히 중요한 한민족 교회의 장점이다. 선교적으로 이야기할 때 그렇다. 문제는 21세기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리고, 한국교회가 그 같은 신앙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요즈음은 많이 변했다. 물론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이 있으나, 옛날 한국교회가 겪었던 고통과 수난과 역경을 경험하지 않는다. 자연히 오만해 질 수 있고, 잘난 척, 아는 척할 수 있다. 과거와 달리 지금 인도네시아에서는 한국 사람들에 대해서 알고보니 일본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겸손하고 인간의 처지를 동정하고 긍휼을 아는 신앙성이 고수되어야 하는데 이 것이 문제다.

 

셋째는, 같은 이야기지만, 약소민족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고통과 역경을 이야기 했는데, 같은 면도 있고 다른 면도 있다. 약소민족이란 것은 대외적인 이미지 문제이다. 서구선교가 대단한 대가를 지불했다. 인적으로 자원에 있어서, 그러나, 그들이 거둔 결실이 많이 없다. 한국이 가장 성공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2,300년 선교를 했으나 2-3%에 지나지 않는 곳이 많다. 대단히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는 그들이 강대국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그 말은 서구 식민제국주의 확장과 함께 서구교회의 선교가 진행되었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3M - Military, Merchant, Missionary 이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3C Civilization, Commerce, Christianity 회교도들이 포고를 할 때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 그렇게 했다고 하지만, 기독교 선교역사를 보면, 비슷한 면이 있다. 직접 칼 가지고 휘둘렀다기 보다는 군사적, 경제적 할 때는 같은 맥락이었다. 특히 로마 카톨릭 초기 선교에서는 엄청난 무력이 동원되었다. “Cross and Sword" 라는 책도 있다. 라틴 아메리카 서구 기독교 로마 카톨릭이 들어갈 때, 이 책의 특징은 그 때의 현지 자료들, 선교사들이 보낸 자료들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사실들을 입증해 나가는 책이다. 특이한 책이다. 식민지를 개척한 사람들 중에는 인디오를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혹은, 추장을 개종시키면 온 마을이 개종되니까 추장을 붙들어 놓고 협박을 한 경우도 있다. 믿겠다고 했는데도 죽였던 경우도 있다. 그후 남은 이야기들, 너무 염려하지 말아라. 너는 이제 천당 갈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죽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이것이 서구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다.

 

복단대학교 학자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중국에 기독교가 들어올 때 불평등 조약에 의해서 들어왔다는 것이다. 아편도 팔고, 선교사도 같이 와서 복음을 전했다. 모멸감과 분노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에 대해서. 어쨋건, 그런 상황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겠는가? 지금에 와서야 중국학자들 사이에서 ‘우리가 기독교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역사적 경험만을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기독교 자체를 연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중국의 띵 주교에 대해서 왈가왈부 많이 하고 있다. 그의 문집을 읽어보면, 중국에 교회를 정착해 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중국정부가 기독교를 허용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보라. 중국교회는 전적으로 해방군을 반대했다.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장개석 편을 들었다. 그러므로, 중국의 지도자들이 중국교회를 원수처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데, 중국정부가 이 정도 허용하는 것도 대단한 관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의견도 개진다.

 

식민지를 개척했던 상인들은 땅의 보화를 찾으러 인도와 동방으로 갔고, 선교사들은 하늘의 보화를 주러 갔다. 그러나, 땅의 보화를 찾아갔던 상인들이 없었더라면, 누가 하늘의 보화를 가진 선교사들을 그 지역으로 데리고 갈 수 있었겠는가?  - 어떤 사람이 쓴 글......  그 시대의 구조적인 불가피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한민족이 약속민족이었다. 이것이 선교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자질이며 조건인 것이다. 2천년 기독교 선교역사를 통해서 약소 민족으로 지금 한국민족이 가지고 있는 만큼의 선교적 잠재력을 가졌던 민족은 초기 교회 사람들과 우리 한 민족 밖에 없다. 그 중간의 교회들은 강대국의 교회였다. 그건 것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 선교는 세속적으로 약한 것이 선교적으로 강한 것이다. 세속적으로 강한 것이 약한 것이다. 선교는 약한 것이 강한 것이다. 만왕의 왕 예수께서 재벌로 오시지 않으시고, 가난하게 오시고 십자가에서 처형되심으로 메시야직을 수행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가장 유력한 선교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바울도 처음에는 강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자기가 깨닫고 보니까 육체의 가시가 나를 자고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내가 약할 때 강하고, 내가 약할 대 그리스도의 능력이 역사하더라고 고백하는데, 한민족 교회가 약소민족으로서의 이미지 그 성품, 이 것을 유지할 수 있는가 없는가 이 것이 관건이다. 나는 현재 신학생들을 볼 때, 솔직히 공부도 잘하고.... 그러나, 인간의 본질적인 고민, 인간으로서의 본질적인 고민이 약하지 않는가? 그런 고통, 인간에 대한 연민 이런 것들이 약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 할머니가 있는 풍경

 

- 떨어진 꽃은 줍지 않는다. (부제: 인민군 군관이 겪은 6.25 전쟁)

 

 

 

염광교회 유년부 이미선 전도사

 

3월10일 제2강

 

 

 

4. 비교적 신학적 균형을 가진 교회이기 때문이다. 균형 있는 신학을 유지하고 있는 교회가 한국의 주요한 교회들이다. 서구의 신학이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우리 나라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매우 건실한 신학적 입장을 견지해가고 있다.

 

5. 오늘의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문제. 세계로 흩어진 한 민족들. 사도 바울이 선교할 때 디아스포라들이 세계 선교의 기초를 형성했듯 21세기 세계 복음화 운동화에 있어 코리아 디아스포라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할 것이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민족의 수가 550만-600만으로 생각할 때 전체 한민족의 수에 비할 때 비율적으로 유대인 다음으로 많은 숫자이다. 숫적으로는 차이니스 디아스포라가 우리의 열배 정도이지만, 비율적으로 우리가 많다. 흩어져 있는 나라는 약140개국에서 170개국으로 보고 있다. 흩어져 있는 나라수로는 한민족이 가장 많다. 유대인이나 차이니스보다도 더 많은 나라에 흩어져 있다. 왜 이토록 많은 디아스포라가 있는가. 약소민족, 고난을 겪은 민족, 전쟁의 경험과 위협이 한 민족으로 하여금 전 세계로 흩어지게 하였다. 중국에 약 200만 정도가 있는데, 포로로 잡혀갔거나, 납치되었거나, 가난해서 도강, 범죄로 인해 도피, 혼인에 의한 이주 등이 있다. 대부분 그들은 노예나 하급병사로 하층 계급을 이루고 있었다. 일본은 임진왜란, 일제의 통치와 같은 이유로, 중앙아시아, 동북아, 외몽고까지 조선족들이 흩어져 있다.  이들의 선교적 의미가 크다. 흩어져 있는 한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 중 하나가 교회를 세우고, 선교를 하고, 선교적 열정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 많다. 이들이 선교적으로 생각할 때 세계 복음화를 위해 처처에 흩어져 있는 전초기지와 같다. 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곳에서 선교인력이 상당히 육성되고 있다. 그래서 한민족 교회 선교 인력의 상당한 수가 이곳에서 보충될 수 있다. 이들은 본토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이보다 더 유리한 점이 많다. 선교 언어를 구사, 문화...이들의 선교적 가치는 대단히 높은 것이다. 이들이 현지교회에 기여하는 바도 많다. 자기들이 가 있는 지역의 현지 교회에 신학적, 선교적으로 많은 기여를 한다. 특히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아직까지는 상당히 공헌을 한다. 호주나 미국 같은 곳에서 총회에서 상당히 문제가 되고 있는 동성연애자 문제들도 한인 교회들이 많은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

 

6. 새로운 시대. 21세기는 여러 가지로 새로운 시대이다. 우리 한민족 역사상 지금처럼 세계로 열려있는 시대는 없었다.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선교를 위해 해외로 나간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여권을 받기도 힘들었고,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다. 오늘날 선교적 변화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온 세계로 열려진 이러한 시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선교의 적기, 추수기임을 알고, 이것을 활용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수 있고, 인터넷을 통해 세계 곳곳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우연히 한민족 크리스챤 공동체에 이루어 졌는가? 아니면 필연적인 하나님의 섭리인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민족을 세계 복음화를 위해 사용하기 위해 섭리하신 필연적 역사의 과정이다.

 

 

 

** 21세기의 중요한 한민족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 몇 가지 심각하게 도전해 오는 장애들이 있다.

 

 

 

<선교에 대한 도전과 장애들>

 

 

 

1. 이데올로기의 도전. 사상적 문제. 민족주의가 많은 문제가 됨. 세계화 되고 있지만, 많은 부분에서 민족주의적인, 근본주의적인 이데올로기가 발생하고 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화 운동에 상당한 도전으로 느껴지고 있다. 기독교는 외래 종교라는 인식.

 

2. 종교적 도전. 타종교, 회교, 불교, 힌두교..... 또 요즘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전통적 신앙. 선. 명상. 상당히 불교와 연관되어 있고, 인도의 힌두교와 연관되어 있는데, 이런 것들이 민족주의와 연관되어 상당한 도전이 되고 있다

 

3. 기독교 선교 운동과 식민 제국주의와의 관계에 대한 비난.

 

4. 세속화 현상. 휴머니즘의 팽배. 인간이 물질적으로 풍요해지고, 유식해 지고, 정신적으로 성숙해 지면서 하나님과 분리되기 시작함. 바벨탑을 쌓듯이. 휴머니즘이 많은 지식인들의 관심이 되고 있다. 달라이 라마가 제네바에서 설교한 것은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신은 휴머니스트다” 라고 말하는 것을 가장 좋아함.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것은 좋으나 인간적으로 너무나 자족하고 있으며, 신앙을 가질 수는 없다.

 

5. 신학적인 도전.

 

 ① 비선교 신학의 도전. 신학의 비 선교화. Un Missionary Theology. 근원적으로 신학은 선교적이어야 한다. 선교적 신학. 성경이 역사책도 아니고, 선교적 문서. 구원의 계시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로 오셨으며,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온 것이다. 성경의 모든 것은 선교적인 것이다. 선교적 상황 속에서 선교적 글로 쓴 것이다. 선교가 신학의 어머니이다. 선교는 교회 사역의 부분이 아니라 선교는 교회사역의 전부이며, 근본이다. 그것을 위해 교회가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선교학문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콘스탄틴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로 의도적으로 전도하는 일이 교회에 불필요하다시피 되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유일한 국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교는 국가의 책임처럼 되었다. 신학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논의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신학이 비 선교화하기 시작했다. 선교 없는 신학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교회가 기구화 제도화 하면서 신학이 사변적. 이론적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신학은 역사 속에서 점점 비 선교화 하기 시작했다. 프락시스가 없는 메마른 신학으로 흘러오게 되었다.

 

비선교적 신학을 가지게 되면서 가진 특징은 어용화할 수 있는 경향을 많이 지니게 되었다. 콘스탄틴 대제 이후 기독교가 황제와 통치자와 정부의 간섭과 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밀접한 관계속에서 기독교란 것이 세상 권세와 친밀하게 될 수 있는 구조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역사속에 존재했던 기구화. 제도화된 교회의 본부. 총회. 주류들은 대부분 세상 권세와 친밀했다.

 

예를 들어, 독일. 독일교회가 히틀러를 지지했던 일....

 

서구의 신학은 대학 중심의 신학으로 발전. 정부의 연구비와 재정의 비호를 받는 ... 서민들의 삶과는 괴리감이 느껴지는 탈역사적. 이론적 신학이 발전하기 시작.

 

우리 한국교회가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 문제성을 인식하고 신학적으로 바로 잡지아니하면 우리가 21세기 한민족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그런 전통을 가지고 있는 신학을 배워야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흉내내고 그것을 배우기만 해서는 안된다. 서구신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비선교적인 신학의 발전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비 선교적 선교신학의 발전, 반 선교적 선교 신학의 발전. “Un Missionary Missiology"

 

  “ 미국 역사상 지금처럼 많은 선교사가 있었던 적은 없었다. 지금처럼 많은 선교 논문이 나온 적은 없었다. 선교학 강의도 가장 많이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선교운동 자체는 약화되고 있는가?” “Un Missionary Missiology" 때문이다. 선교를 죽이는 선교신학도 많다. 비난위주, 비판위주. 선교를 냉소적으로 보고, 찬물을 끼얹는 선교신학도 많다. 비판은 중요하지만 애정 없는 비난, 비판의 논조들은 선교를 약화시키고, 냉각시킨다. 종교다원주의 같은 것은 대표적인 “Un Missionary Missiology" 이다.

 

6. 교회의 약화 현상.

 

교회 성장의 둔화. 세계 복음화에 있어 많은 역할을 수행해야하는데,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교회의 약화이다. 선교인력, 신학, 선교의 자원이 부족해진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모두가 느끼는 것은 우리 한국 교회의 교세가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 성장의 둔화. 지금 대체로 보면 큰 교회는 크고 아주 작은 교회는 맥을 못추는 현상들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성장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이유로 교회가 둔화되고 있는 것은 선교에 있어 하나의 도전이다.

 

교회가 비 선교적 성향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기구화 되고, 제도화, 개교회 중심적 성향. 선교라는 것은 사람들을 모아 교육시키고 밖으로 내 보내는 것이다. 사람들을 모으기는 하는데, 밖으로 내 보내는 역동적 힘이 한국교회에서 약화되고 있다.

 

한국교회의 도덕적 권위. 지도력이 약화되고 있다. 근자에 와서 한국 교회가 이 사회속에서 도덕적인 권위와 지도력,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교회. 기독교에 대한 존경이 있으면, 사람들이 그 속에 함께 존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최근 한국교회는 사회에 대한 감화력을 잃어버렸다. 교회가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 교회의 교세가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7. 선교사들의 문제

 

선교사에 대한 개념 자체가 참으로 모호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선교사다”. 라고 말하는 이도 있으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증인이라고 하는 것은 옳으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선교사다” 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모두가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일하나 선교사는 그 지위와 역할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이다. 모두가 선교사라는 말은 위험하며, 과장된 말이다. 만일 모두가 선교사라면 아무도 선교사가 아니다라는 말과 동일하다. 이것은 위대한 말 같으나 선교사들의 책임을 약화시키는 위험한 말이다.

 

 선교사들의 자질 문제.

 

 선교현장에서 선교사들의 사역문제.

 

선교사들에 대한 정책부재와 과오.

 

선교사들에 대한 적절한 돌봄이 없다. 이런 것들이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이러한 보고들이 한국교회의 선교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같도록 하여, 열심을 약화시키고 있다.

 

Ⅰ. 선교에 대한 성경적 기초

 

 

 

구약성경

 

구약성경에 선교적 기초가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것은 선교에 대한 개념의 차이. 개념에 대한 오해에서 온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선교란 것은 해외전도라고 생각한다. 선교에 대한 지리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생각들이 교회 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 왜냐하면 교회의 선교사역자체가 그러한 지리적 개념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또한 오래동안 계속된 서구 사회에서의 비 기독교 사회로의 선교의 진행 때문이다. 그러나, 선교에 대한 개념을 바로 정립하고 바라보면. 구약성경에도 선교와 관련 있다. 아니, 우리는 우리의 개념과 선입관을 가지고 성경을 바라볼 수는 없다. 성경 그 자체가 선교의 말씀이다. 구약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이기에 구약성경 자체가 선교의 말씀이다.

 

< 지리적 개념을 무너뜨린 이유.>

 

① 세계 기독교 인구 분포의 변화/ 85%가 서구 사회에 있었다. 서구사회에서 비 서구 사회로의 일방적 선교 형태였음. 그러나, 1960년대로 넘어가며 80년대로 들어가면서 세계기독교 인구분포가 변화되고 있다. 따라서 지리적 사역이 변화되었다. 세계로 흩어진 모든 교회에서 모든 교회를 위한 사역으로 형식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② 인류 세계 생활의 변화/ 많은 사람이 이동하고, 함께 혼합해 서 살고 있다.

 

③ 신학적인 이유/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선교개념을 가지고 성경을 읽을 수 없다. 성경이 가지고 있는 말씀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선교의 아이디어는 무엇인가.

 

 

 

1. 선교의 목표 / 단순한 인간영혼 구원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구약성경이 나타내고 있는 목표와 범위는  

 

창조신학. 선교라는 것은 창조질서의 회복과 보존이다.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과 사람과 모든 피조 세계간의 온전한 조화, 화합. 이것이 샬롬이다. 죄가 이러한 창조질서를 파괴. 따라서  창조신학에서 볼 수 있는 선교의 목표는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조화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② 족장의 이야기. 하나님과 족장을 부르신 이후 의 근원이 됨을 말씀하심. 복을 받고 복을 누리는 것이 선교의 목표이다. 그러나, 이것은 물질적 개념의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 형제 자매가 되는 복. 그리고 자연만물에 대해 예속된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청지기. 돌보는 자. 상속자.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복.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구약전체를 보았을 때, 율법, 모세오경, 지혜서, 선지서 모든 것을 보았을 때 법과 지혜는 결국 하나님과 우리와의 올바른 관계. 사람과 사람사이의 올바른 관계. 사람과 모든 소유와 피조물과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 법과 지혜를 말하고, 지적하고, 찬양하고, 선포하는 것이 구약이다.

 

 

 

2.선교의 도구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그래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나의 종, 나의 사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을 부르심. 따라서 구약에 나타난 선교의 아이디어는 ① 선교는 구심적인 성격이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가 쓰실자를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불러 모으신다는 것이다. 그냥 불러모으시는 것이 아니라, 보내시기 위해 불러모으신다는 ② 원심적인 성격이 있다. 불러모으시고, 예배케 하시고, 그리고, 그 사람들을 통해 선교 사역을 하신다. come-go-strutucture .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들은 민족주의. 우월감에 빠져 선교의 도구로서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비극이다.  

 

 

 

3. 선교의 범위- 열방에 대한 부름

 

모든 족속과 열방이 선교의 부름이다. 선교는 원심적인 성격을 띠고, 열방과 만방으로 나가게 되어 있다.  구약성경이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성경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박국-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말라기- 해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

 

시편 22:27-  

 

시67편- 구약의 주기도문. 선교적 메시지. 세계적 선교 사상이 나타나 있다.

 

 

 

4. 선교적 영성-선교의 방법. 방식. 원리. 어떤 영성으로.

 

 섬기는 고난받는 종의 영성

 

 시42:1-4, 사49:1-4, 49:6-8, 50:6, 53장

 

 약하게 타자를 위해 약하게 고통과 고난을 당하는 영성. 타자를 위해 침묵적인 고난을 감수하라.

 

 

 

5. 종말과 승리

 

단7장. 역사에는 종말이 있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승리한다.

 

 

 

 

 

 

 

제3강

 

B. 신약성경에 나타난 선교

 

1. 예수선교

 

예수님이 선교의 오리지날 모델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라고 할 때 “같이”라는 말씀 - 선교의 오리지날한 모델은 예수님의 선교다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선교를 생각할 때,  첫째, 예수선교의 목표가 무엇이었는가?

 

1) 목표/주제 - 하나님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 - 사람

 

사람 - 사람

 

사람 - 자연만물 사이의 샬롬, 온전한 관계 형성이 하나님의 나라다.

 

   과거에 여기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특히 보수주의자들에 의해서 상당한 반대를 받았고, 교회성장학자들도 않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포괄적이고 통전적이 되는데, 개인전도, 개인구원, 교회성장과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 - 정의, 인간화, 비인간화, 피조세계와의 관계에 있어 대단히 복잡한 문제가 생길 수 있는데, 선교가 이를 포함할 경우 대단히 심각한 논란, 토론, 분열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민감한 사안을 교회선교에서 다루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상당한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반대할 사람이 없다.

 

피터 와거너 - 풀러신학교 교회성장학교수, 예수님 선교의 주제가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마태 52, 막 눅 요4 회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과 동의어가 나왔다.

 

마태복음28:20 가서 제자삼아 - 보수주의자들, 복음주의자들이 예수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눅4:16-19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예수선교의 주제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서로 논란이 있었다. 둘다 맞는 이야기다. 누가복음도 마태복음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둘 다 포함해야 한다. 눅은 메시야 취임사라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 지상명령은 문자 그대로 지상명령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 주권, 통치 이것이 예수 선교의 주제였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메시지를 한센텐스로 압축해서 말할 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 내가 왕이다라는 선포인데, 어떻게 보면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적어도 새로운 소식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믿었다. 새로운 소식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실제적으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관념상, 관습, 전통이고 실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대인에게도 이 선포는 새로운 선포였다고 볼 수 있다. 관렴도 아니고 신조도 아니고 교리도 아니고 역사적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임했다고 선포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오해를 했다. 강력한 메시야에 의해서 현세적이고 세속적으로 나라를 회복하는 등의 일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고, 예수님의 이적 기사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 다녔고,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하기 까지 하였다. 예수님께서 피하셨다. 예수님 말씀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인데 나는 그런 메시야가 아니다.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끝이 없는 욕망을 채워주는 그런 메시야는 아니다. 너희에게 준 떡은 표적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표적을 더 좋아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게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떡을 주시는 메시야가 아니니까 많은 사람들이 가버렸다. 제자들과 군중들과의 차이. 문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햇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현실로 여기 있지만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회개하고 믿어야 현실적으로 여기에서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가 보이는데, 군중들은 표적만 보고 따라 다녔다는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이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증언하고 있는 사실중의 하나는 예수님의 많은 이적기사가 그 때 유대인들에게 나사렛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믿게하는 데는 별 도움이 못되었다는 것이다. 회개는 U turn이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과는 거꾸로 보아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하나님 나라가 보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현세적인 사탄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보니까 아무것도 안보이는 것이다. 믿음이 자기 자신의 결단이나 자기 자신의 지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택한 자만이 그 것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하나님의 나라 이것이 대단히 막연한 것 같지만, 회개하고 믿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이 목표를 누가 수행하는가?

 

하나님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 하나님의 나라가 추구된다는 것이다.

 

사도들, 그리고 제자들/ 교회

 

그러므로, 예수님의 선교도 구심적인 성격이 있는 것이다. 성별된 사람들을 통해서 하신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 사명이 수행되는 것이다.

 

엡4:12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했는데, 이것이 성별된 사람들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교리를 전파하라는 뜻이 아니고, 이데올로기, 가치관, 문화, 삶의 스타일 전파가 아니라, 새사람 창조를 통한 하나님나라의 건설인 것이다. 제자를 삼고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왕권에 헌신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교육시키실 때 몇 가지 그 당시 랍비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당시 랍비들은 율법교육, 종교관습 이런 것들을 가르쳤는데, 예수님의 방법은 그들과 달랐고, 오늘 우리의 방법과도 달랐다. 첫째, 예수님은 소수에게 집중하셨습니다. 열두 제자, concentration.  이 열둘에 대해서 대단히 엄격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일반 대중에 대해서는 대단히 관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엄격하셨다.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면전에서. 둘째, 예수님의 교육은 인격변화, 인간변화에 치중하셨다. 지식전달 위주가 아니고 character change 였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셋째는, 인격적 관계형성을 통한 교육이었다. contact. 부단한 접촉, 삼 년 합숙하신 것이다. 문자 그대로 도제훈련이다. 몇 사람끼리라도 놀아야 한다. 인격적 교류, 인격적 관계를 가져야 한다. 놀고 친해져야 동역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넷째, 현장 중심으로 교육시키셨다. context. 예수 제자훈련 방법 4 Cs.

 

예수님께서 자기 팀을 구성하실 때, 예루살렘 가말리엘 문하생 똑똑한 사람들로 구성하신 것이 아니라 소박한 갈릴리 어부 중심으로 팀을 구성하셨다는 것을 가끔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하나님의 나라 운동, 복음 사업이란 것은 우리의 아이큐나 우리의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됨, 인격, 회개하고 복음을 믿느냐 하는 조건들이 가장 중요한 것이. 가룟 유다가 탈락하게 되는데, 한가지 다른 제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가장 두드러지게 달랐던 것은 머리가 좋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것 때문에 그 대열에서 이탈하게되는 것이다. 어떻게 머리가 좋다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첫째는 회계를 맡았다는 것이 머리가 좋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장부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기록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마태가 세리였는데도 회계를 못했다. 두 번째는, 마지막 주간에 호산나 하고 입성할 때 다른 사람들은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누가 우리 중에 크냐, 누가 오른편에 앉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들어갔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상황을 제대로 보았다. 예수님께서 틀림없이 권력자들과 대결할 것이고, 우리가 이길 승산은 1%도 없다. 그래서, 자기가 살길을 그쪽 편에 붙는 것이다. 살기위해서 배반한 것이다. 그 만큼 가룟 유다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이 것이 나쁜 것이 아니지만, 인간적인 장점만 가지고는 사도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역자의 핵심은 우리의 지식이나 우리의 자원이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헌신한 사람들이 일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훈련시킬 때 다른 특징을 보면 원리를 가르치시고 방법을 가르치시지 않았다. 요새 한국교회의 병폐는 목사님 세미나를 보면 방법론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리지만, 기초가 되고 원리가 되고 원칙이 되는 것을 가르치는 데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르치시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강조하시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보다는 관념적인 이론보다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을 강조하셨다. 요즈음 신학교육이나 한국교회의 병폐는, 예수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아무리 많아도 자기를 구원할 수 없고 사람을 구원할 수도 없다. 지식이 중요한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복종하는 것이다. 이 것이 거꾸로 되면 교회가 쇠퇴하게된다. 오늘 한국교회가 양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왜 힘이 없는가? 사람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지 보고싶어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교육시키려 하였던 것은 물론 지식도 포함되지만 지식보다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복종하는 삶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다.

 

셋째, 대상/범위. 예수 선교의 대상과 범위는 우주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시 원심적인 특징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기 전까지는 당신 선교의 우주적인 의미, 차원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잡히시기 직전에 “내가 너희를 보낸다” 고 말씀하셨고, 부활 직후에 “내가 너희를 보낸다” 그리고, 승천하실 때 “가서 제자삼으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세상 죄를 지시고 난 뒤에야 비로소 예수 선교의 우주성이 실효를 가지게되었다고 말하는 선교학자가 있다. “히13:12에 보면 예수도 자기 피로서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이 구절 중에서 “성문 밖”이란 구절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성문 안과 대비되고 있다. 대부분이 제사는 성문 안에서 집행되었다. 성문 안에서, 성전에서 유대인을 위해서 짐승을 잡아 제사장이 제사를 했다. 이 제사는 반복되었다.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성문 안의 제사는 계속 반복된 것이다. 이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그림자다. 진짜 속죄제사는 성문 밖에서 이루어진다. Outside. 예루살렘 성전 밖에서, 성전 아닌 곳에서 속죄양이 되신 것이다. 이것은 이 속죄사건의 효력이 유대인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이방인까지, 우주적으로, 열방으로 미치는 것이다. 그리고, 단번에 드린 영원한 속죄제사였다. 그래서, 반복이 없는 것이다. 온전한 단 1회적인 제사다. 우리가 무의식중에 우리의 의식과 설교과 기도와 말속에 우리가 죄 지을 때마다 예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설교할 때가 많다. 성경이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단번에 온전한 영원한 제사였다는 것이다. 반복되지 않는다. 완성된 것이다. 눅13:13 선지자가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죽는 법이 없다. 고 말씀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는데, 정작 예수님은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많은 신학자는 지리적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사명지”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되기 전까지는 본인이 직접 말씀하신 것 처럼 “보내심을 받은 자” 였다. 그런데, 부활하신 후에는 “보낸 자”로 예수님의 지위가 바뀌는 것이다.

 

넷째, 스타일, 태도, missional spirituality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선교적 영성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문화를 초원해서 근본적으로 통할 수 있는 방법은 missional spirituality다. 그것은 한 마리도 말하면 섬기는 고난의 종의 영성이다. 섬기는 고난의 종의 형태가 가장 유효한 선교원리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다. 제왕이나 재벌로 오실 수도 있었는데, 왜 하필 구유에 출생하시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는가? 낮고 천한 자가 되셨는가? 그것이 가장 유효한, 유력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빌립보서2장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거꾸로란 말을 했는데 정말 거꾸로다. 자기의 권익을 스스로 포기하신 것이다. 세속적인 가치판단과 상식으로는 자기 권익을 찾아야 하고 쟁취해야 성공하는 것이다. 자기를 비우셨다. 자기의 모든 것 생명까지 비우셨다는 것은나누어 주신 것이다. 세속적인 가치판단으로는 어리석은 것이다. 세상에서는 채워야 하고 지켜야하고 축적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잘난 것이고 성공하는 것이고 입신양명을 해야한다. ‘종이 되셨다’ 이것도 거꾸로다. 세상에서는 지배하고 군림하는 자가 성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종이 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나섰을 때 처음부터 왔던 유혹은 십자가를 지지 말라는 것이었다. 광야시험은 강력한 메시야가 되라는 유혹이었다. 본회퍼가 쓴 글을 보면 자살은 아니지만 일종의 자살적 행동을 감행하신 것이다. 선교란 것은 다 그런 것이다. 자실은 아니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종교적으로 생각하면 거리끼는 것이며, 헬라인들, 세상을 상식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택하신 스타일은 그런 것이다. 백성들이 강력한 메시야를 원했고, 제자들도 그것을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약한 메시야가 되셨다. 사역의 클라이막스는 십자가인데 십자가는 약함의 극치다. 당신의 산상수훈 처럼,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의 모습으로 그렇게 사셨다. 끌려가셨다. 힘 없는 모습이다. Jonathan Bonk 라는 사람 Mission and Money라는 책을 썼다. 이 분의 책에서 예수님의 특징은 성육신, 약함, 십자가 세 가지다. 교회가 보편적으로 성육신이라고 말할 때 교회에서는 이론으로, 신학적 주제로 끝나 버리는 것이 문제다. 성육신은 역사적 사건이었고, 교회를 통해서 계속 반복되어야 하는데 이론으로 흘러가 버리는데 오늘 교회의 무기력성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말이 안되는 것이다. 말이 안되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 논리를 모두 초월한 엄청난 충격적인 사건이다. 교회와 신학자는 이것을 말로만 이야기한다. 역사적 현실로 우리가 반복하지 않는다.

 

약함이란 것은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예수님의 특징이다. 그것이 당시 강력한 메시야를 기대했던 군중들이 등을 돌리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유월절에 호산나 하면서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그 며칠 사이에 일어난 사건은 예수님은 아주 연약한 분으로 나타난다. 로마군대에 끌려가서 매맞고, 침뱉음을 당하고, 불법적인 재판에도 변명을 안하시고...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원래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예수님의 침묵, 빌라도가 기이히 여김 - 어떤 사람이 이 장면을 transposition 이라고 말한다. 재판장과 재판 받는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빌라도의 기대와 달리 군중들이 예수님을 죽이라고 한 것은... 매수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강력한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예수에 대한 일종의 오기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권능의 예수가 잠잠히 죽음을 맞이한 것은 그들에게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엔도슈사크의 소설을 좋아한다. 침묵, 그리스도의 탄생,.....,숙적-소서행장과 가등청정 이야기다.,  

 

그리스도의 탄생이란 책은 왜 그리스도가 메시야로 추앙될 수 있었을까? 그 시대에 그렇게 죽었는데. 그것을 추적하는 내용이다. 세계 어떤 지역에서보다도 한 인간이 신격화되기 어려운 곳이 유대인 사회인데, 어떻게 나사렛 예수가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신격화되었는가? 그것을 자기가 조사한 자료로 상상해서 기록한 것이다.  마지막장에 가면 “갈릴리에서 자라나 예루살렘 밖에서 살해된 ..... 오직 사랑만으로 산 사나이. 그는 생전에 현실 속에서 무력했으며, 다만 사랑만을 말하고, 사랑만으로 살고, 사랑의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을 뿐이다. .... 골고다에서 죽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겁쟁이들을 사명자로 바꾸고 그리스도로 추앙되었다.”“왜 이토록 무력했던 사나이가 사람들로부터 망각되지 않았을까? 왜 개처럼 살해된 이 사람이 메시야로 추앙되었을까?..... 불가사의..... ”

 

엔도 슈사크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무력성이다. 세속적인 무력성, powerlessness.

 

미국의 어떤 신학자가 “엔도 슈사크의 기독론”이란 책을 쓴 적이 있는데, 역시 거기서도 예수님의 무력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엔도는 가톨릭 신도이다.

 

주님의 방식은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는 방식이고, 십자가를 지는 방식이다. 십자가의 복음을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는 그 말이다. 데이비드 보쉬가 말하기를 “예수님은 인기 위주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것이 그가 십자가에 달리게 한 것이다.” 교회 역사상 이 missional spirituality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바울이었다. 바울은 스스로 자기가 예수님을 본받은 것 같이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 missional spirituality를 가장 잘 드러낸 분이 아시씨의 프란치스코다. 예수전을 쓴 르낭이 예수님 이후의 가장 오리지날한 크리스쳔이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의 영성이 shalom spirituality라고 한다. 우리의 선교의 목표가 shalom이다. 이것은 세속적인 강함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약함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교회사에서 이런 분은 손양원 목사님이 계신다. 뉴비긴의 말가운데 “구원의 진리는 교리나 세계관이나 종교적 경험이 아니다. 또한 정의니 사랑이니 하는 추상적인 말들을 반복하므로서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그 진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서 세상을 화목케 하시기를 원하시는 그 사람 예수 그리스도시다(The man Jesus Christ).  이 진리가 택한 방식(form)은 지배나 제국적인 힘의 형태가 아니고 고난과 연약성에서 나타난 힘이었다.“  

 

어떤 사람이 “바울은 로마감옥에서 개선하는 로마군의 말바자국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로마를 정복한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었다.” 본회퍼가 옥중에서 쓴 편지 가운데 “그는 세상에서 약하고 힘이 없었다. he was weak and powerless in the world) 그리고, 그것이 그의 유일한 그리고 가장 올바른 힘이었다. 그는 그 연약함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신다.” “마8:17을 읽어보면 분명하다. 그리스도는 그의 전능성으로 우리를 도우신 것이 아니고 그의 약함과 고난으로 우리를 도우신다.” - 본회퍼.  

 

본회퍼의 옥중서신 맨 마지막쯤 나온다. 그는 석방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석방되지 않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어떤 역사로 풀려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가 끝까지 그런 하나님을 기대했다면 절망햇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깨달은 것은 주님은 그의 약함과 고난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이다.

 

보쉬의 말가운데 Weak(Powerless) witness

 

사도 바울도 처음에는 힘있게 선교하고 싶어했다. 가시를 없애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자기가 깨달은 후에는 자기의 교만을 다스리는 도구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와 함께 하셨다는 paradoxic 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고후12:9).

 

다섯째, 5) 종말과 승리 - 역사는 종말이 온다. 주님 승천하시면서 .....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다시 오신다. 재림으로 종말이 오고 심판적 재림을 하신다. 그 때 교회가 승리한다. 이것이 예수선교의 중요한 다섯가지 포인트인데, 이것은 구약의 중요한 다섯가지 포인트와 동일한 것이다.

 

 

 

 

 

바울의 선교 - 제 4 강

 

 

 

먼저 사도바울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누구냐? 열두사도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첫째는 순수한 유대인이었다. 이방의 사도였지만 순수한 유대인이었다는 것을 늘 명백하게 했다. 유대인에 의한 오해박해 비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레코 로만 문화권에서 성장한 사람이었다. 이방 지역, 이방 문화권에서 성장했다. 유대인의 전통과 헬라문화의 전통을 함께 받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방의 사도로 택함을 받은 특징이다.

 

셋째는 로마의 시민이었다는 것이다. 출생때부터 로마 시민이었다. 어떻게 시민권을 받게되었을까? 성경에는 자세한 설명이 없으나, 호크가 쓴 “바울선교의 사회적 상황”이란 책에서 바울 부친이 사시던 다소가 로마군인의 이동이 많았는데, 천막을 깁는 사람으로 로마 군대에 천막을 군납하면서 장군들과의 친분을 통해서 시민권을 얻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다.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는 것이 바울의 선교에 큰 의미가 있었다.

 

넷째는 사도바울이 그가 스스로 회심한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강력한 격렬한 복음에 대한 반대자였는데 결국은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자신의 경험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이방의 사도의 자질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무력한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를 신봉한다는 것이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고, 배척하고 했지만, 바울의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그 장애를 극복했다는 것이다. 많은 유대인들도 예수의 무력성 때문에 예수를 믿을 수 없었지만, 누구보다도 그 이유로 예수를 반대했던 사람이 자신이었기 때문에,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예수를 전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의 회심에 대해서 갑자기 다메섹 도상에서인가? 혹은 어떤 과정이 있었는가가 가끔 논의가 되는데, 선교에 있어서 회심이 중요하기 때문에 어거스틴의 회심, 웨슬레의 회심, 루터의 회심, 바울의 회심이 중요한 연구과제가 된다. 도날드 코겐이란 사람이 쓴 “혁명가의 초상” 이란 책에서, 바울이 혁명가였다는 뜻이다. 세상을 둘러 엎은.  영국 성공회 주교로 있었던 분인데, 간략하지만 재미있게 바울을 관찰한 책이다. 바울의 회심에 대해서 몇가지 이야기를 한다. 점차적으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다메색에서 결정적으로 회심했다는 입장이다. 첫째는, 젊은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공부할 때 예수님을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상상의 문제, 엔도 슈사꼬가 쓴 “그리스도의 탄생”에서도 그렇게 단정하고 있다. 만일 그가 젊었을 때 젊은 예수를 보았다면 이 두 젊은 청년의 만남은 어떠했겠는가? 상상에 맞긴다. 사울같이 셈세하고 예민하고 종교심이 투철했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이미 예수의 소문을 듣고 있었을 텐데, 작은 도성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기숙사에서 잠자고 있었겠는가 하는 이야기다. 만약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면, 교회를 박해할 때 때때로 그 때 만났던 예수님을 상기했을 것이고, 그것이 그를 괴롭혔을 지 모른다. 두 번째 충격적인 사건은 스데반의 순교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무식한 사람들이 예수를 추종한다고 생각하다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보니 무식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울이 현장에 있다가 자신의 그와 같은 선입관이 도전을 받는다는 것이다. 무식한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보는가? 그리고, 스데반의 죽어가는 모습이 종교적인 사울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세 번째는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박해하는데 이 그리스도인들이 전혀 저항하거나 자기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 계속해서 사울에게 부담을 주었을 것이다. 성경을 보면,  스데반 사건 이후에 사울이 더욱 살기가 등등하여... 라고 했는데, 이것이 인간의 부조리성이라는 것이다. 자기의 신념이 흔들리니까 오기를 부리고 강퍅해 진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이런 측면이 있다. 살기가 등등한 것은 그가 동요하고 있었다는 증거일 수 있는 것이다. 이미 많은 갈등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주여 뉘십니까? 한가지 질문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가시채로 뒷발질 --- 이것이 그가 오랫동안 갈등한 명백한 증거이다. 강력한 반대자였던 경험과 회심의 경험이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그의 사역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다섯째, 바울은 노동자, 근로자, tent maker 였다. 여기에 로날드 호크라는 사람이 쓴 “바울선교의 사회적 상황”이라는 책이 재미있는 책인데, 사도바울의 그런 면을 많이 썼다. 대개 사도바울의 책을 읽어보면 복음전도자로서 신학자로서의 모습을 부각했지만 이 책은 근로자로서의 바울을 부각하고 있다. ‘바울의 삶의 정황을 이해해야만 그가 전한 복음의 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요새말로 바울은 전천후 선교사였다. 부한사람과도 할 수 있었고, 대단히 어렵고 낮은 사람들과도 격의 없이 대화할 수 있는 그런 타입의 선교사였다.

 

여섯째, 사도바울은 순교자였다.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순교자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순교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이 순교적으로 생각하고, 순교적으로 사역하고, 순교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죽었다는 것을 우리가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십자가의 복음을 십자가 적으로 전했다. 빌립보서 2장에서 그가 명상한 그리스도의 모습대로 자기를 죽였다는 것이다. 바울의 이 같은 삶의 정신이 아주 극명하게 나타난 곳 중의 하나는 사도행전 마지막을 보면 알 수 있다.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권면하는 장면, 빌립의 딸들과 아가보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모습. 다른 것이 아니라 성령의 계시로 알게 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복음전하는 사명을 위해서 죽을 것도 각오하고 올라가는 모습. 사도바울이 순교적이었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안갈 수도 있는 것이다. 얼마든지 합리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바로 가는 것이 더 빠른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바울을 헷갈리게 하셨는가? 헷갈리게 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을 알려주신 것이다. 사도 바울의 자의적인 결단을 존중해 주시는 것이다. 결국은 예루살렘에 간 것 때문에 순교하게되는 것이다.

 

 

 

바울의 선교의 동기가 무엇이었는가?

 

 

 

첫째는 감사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셨다. 자기에게 직분을 주셨다. 감사와 감격.

 

둘째는 의무감. 책임감. 롬1:14의 빚진자의 의식. 고전9:16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다. 바울은 자유를 설교하신 분이다. 한가지 사도바울에게 부자유한 것이 있었다. 스트레스와 강박관념이 있었는데 그것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고전9:19-23 말씀도 바울의 선교의 융통성이라고 신축성이라고 유대인에게 유대인처럼... 해석하지만, 베이빗 보쉬 같은 사람들은 바울의 선교적 책임의식을 강조한 것이라고 본다.

 

셋째는 연민의 마음. 사랑. 고후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넷째는 순종, 복종. 행16 딤후4:1,2 물론 디모데에게 훈시한 내용이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의 신념이기도 했다.

 

다섯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빌1:20-21

 

 

 

바울선교의 방법(형태)

 

 

 

대개 선교학자들은 사도바울이 일정한 선교전략을 가지고 선교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마이클 그린의 책 “초기교회의 전도” 동일한 견해다. 사도바울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분인데 로란 알렌도 바울에게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진행할만한 여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사도바울은 성령께, 성령의 지시에 순종했다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따랐다는 것이다. 바울은 아무 생각없이 했는가? 아니다. 그증거는 행16장에 보면 아시아로 가기를 원했다는 구절이 있다. 어느정도 자신의 계획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어느정도 자신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항상 성령의 인도에 순종했다는 것이다. 행13장에서 28장까지에서 사도바울의 선교전략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어떤 것인지 자세히 추려서 설명할 수 없지만,

 

첫째는, 사도바울은 파송한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했다.(하버드 케인 H. Kane)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 교회를 말한다. 선교사를 보면 세계교회와 관계가 단절될 경우는 토착신앙과 혼합되던지 없어지던지 하게된다.

 

우리 한국교회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사분오열하는데 한국 교회의 분열의 원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지적을 하는데, 간과하기 쉬운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는 일제시대 선교사들이 철수하고 난 뒤 한국교회가 세계교회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교회의 흐름을 잘 몰랐다는 것이다.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1920년대 30년대 미국에서는 이미 근본주의자들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이 침례교회와 장로교회 안에서 심각한 분열이 있었다. 한국에 왔었던 선교사들은 극단적인 근본주의자들이 아니었다. 근데, 이들과 단절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1930년대와 40년대 미국교회의 분열의 현상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면, 장로교회가 쉽게 분열을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고립되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다. 앞으로의 선교에 굉장히 중요한 교훈을 주는 방법이다.

 

둘째 사도 바울은 주로 네 지역에 집중적으로 선교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 아시아, 마게도니야, 아가야,  둘은 아시아고 둘은 유럽이었다는 것이다. 선교사로서의 바울의 생애가 그렇게 길지 못했기 때문에 제약된 시간과 불편한 교통통신을 가지고 많은 곳을 다닐 수 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위 네 곳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도시 중심으로 선교했다는 것이다. 도시 위주로 선교 사역을 했다. 우리가 선교 역사를 보면, 선교는 대개 도시에서 먼저 시작된다. 선교사들이 도시로 먼저 갔다. 바울도 그랬다. 예수님을 갈릴리에서 시작했지만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됐다. 제한된 자원으로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서 도시로 갔다. 도시는 인구가 집중되어 있고 농어촌 보다 개방적이다. 도시에 교회가 세워지면 도시교회들이 주변의 농어촌의 복음화를 위해서 일할 수 있다. 이것은 전략적인 것이다. 도시들이 주변의 농어촌을 이차적으로 복음화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넷째는 회당에서 자주 설교를 했다. 회당 중심의 선교를 했다. 갈2:8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는다는 확신이 자기에게 있었지만, 그는 새로운 지역에 가면 주로 회당에서 그의 전도를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비록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의 의식속에는 유대인이 먼저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그가 쓴 표현을 보면 항상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렇게 말했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이런 순서로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머리속에 유대인 의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회당에 간 이유는 그곳이 전도하기 쉽고 유리했다는 것이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빨리 접촉점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비록 이방인의 사도였지만 유대인의 대한 애정이 깊었다는 것은 성경에 많이 나타난다. 로마서8장에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9장에 보면 내가 골육의 친척 유대인들을 위해서라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한다고 했다. 그 만큼 그 마음속에 유대인에 대한 생각이 깊었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케인의 지적은 반응이 좋은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 농부도 같고 씨도 같은데 소출이 다른 이유는 땅에 있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제한된 시간안에 교회를 세우고 세계 복음화의 기초를 놓기 위해서 자기를 배척하는 곳은 그냥 지나가고 반응이 좋은 곳에서 비교적 오래 있으면서 복음을 전했다. 알렌 로랑이 쓴 책에 보면 “만약 그들이 그를 거절했을 때, 바울도 그들을 거절했다.” 한마디로 바울은 반응이 좋은 곳에서 선교했다.

 

여섯째,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세례를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즘 선교와 다른 점이다. 요즘은 여러 가지 절차를 밟는다. 당시는 특수한 상황이었다. 그는 금방 떠나야 하고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교회에 지도자도 없었다.

 

일곱째, 일단 교회가 세워진 곳에서는 상당기간동안 체류하려고 노력했다. 그 교회가 뿌리가 내리도록 도왔다. 그래서, 그 교회가 3자 원칙에 입각한 교회가 되도록 힘썼다. 자치, 자립, 자전.

 

여덟째, 케인은 바울 선교의 특징은 팀웍이었다고 했다. 바나바, 마가, 실라, 디모데, 누가..... 바울은 자기 혼자 선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재능과 은사를 활용하면서 함께 선교했다. 또 개인적으로만 협력한 것만 아니라 그가 세운 교회끼리도 함께 협력하도록 많이 권장했다. 부조도 하고.

 

아홉째, 바울은 복음 자체를 고수하기를 노력했다. 메시지의 변질을 우려하면서 메시지 자체는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고수했다. 도그마틱했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저주를!

 

마지막으로, 그러면서도 바울은 선교 방식에 있어서는 융통성, 신축성이 있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엄청난 자유고, 엄청난 융통성이었다. 이것이 바로 통합적 방법이다. 통전적. 왜 그렇게 했는가? 자신이 명백하게 밝혔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들과 함께 복음의 축복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바울이 선교사로서 성공한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는 소명의 확실이다. 분명한 소명의식이 있었다. 갈1:15 어머니 태로부터 택정 받았다.

 

둘째,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헌신했다. 행16장 드로아에서 마게도냐로 건너간 것, 행21장 예루살렘 가는 이야기.

 

셋째, 성령께 의존했다. 고전12:9

 

넷째, 전도의 담대성.  갈____   행21:37이하 피투성이가 된 채 일장 연설.....

 

다섯째, 지역교회를 존중했다. 자기가 개척한 교회를 간섭하지 않고 자율권을 주었다. 3자원칙.

 

여섯째, 돈 문제가 깨끗했다.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한 이야기를 보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내가 매사에 본을 끼쳤다.

 

일곱째, 전도자로서 언행일치. 모든 일에 본을 끼쳤다. 순교하는 일까지도.

 

 

 

 

 

사도바울의 인격적 특성 - 영성

 

데이빗 보쉬 - "A Spirituality of the Road" 도상의 영성. 내가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얻었다 함도 아니요.... 사도바울의 인간적인 혹은 사도로서의 모습 성품이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것이 고후라고 보쉬는 말한다. 바울 자신이 자신의 솔직한 심정의 토로를 고후에서 많이 했다. 사도권 시비를 통해서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인간적인 신변에 대한 말을 가장 많이 했다. 고후가 바울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책이라고 본다. 고후의 특징은 특별히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한 책에서 서너가지 말이 많이 나오는데 약함, 고통, 소외, 자기부정과 같은 단어이다.  사도바울이 자기가 진정한 사도라는 것을 설명하는 많은 말을 했는데 이런 뜻의 말을 가장 많이 했다.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바울이 그 만큼 고통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둘째는 진정한 사도의 삶이란 것이 어떠한 것이냐?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 간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III.  교회와 선교

 

 

 

목회 상담의 제 유형 - 이 책에 보면 처음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미국에 배가 자주 파선되던 해안에 몇 사람이 인명구조소를 만들었다. 움막을 짓고 작은 배를 장만해서 기다리다가 배가 파선될 때 사람들을 구원했다. 이런 구조 사업이 계속되면서 구조 받은 사람들이 돈을 내고 봉사를 해서 인명 구조소가 점점 성장했다. 점점 부유해지니까 직접 나가지 않고 사람들을 고용해서 인명구조를 했다. 조금 지나면서 이런 생각들이 생겼다. 이제 인명 구조 그만해도 되지 않겠는가? 이 아름다운 공간을 우리의 휴식처로 쓰자는 의견이 나왔다. 총회에서 투표해서 클럽하우스가 되어 버렸다. 카펫깔고, 아름답게 장식하고, 처음 인명구조를 위해서 사용했던 낡은 배를 전시하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지냈다. 계속 구조를 해야한다는 사람들이 거기서 나와서 움막을 짓고 다시 인명구조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꼭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지금도 가끔 그 해안에서 배가 파선되지만, 인명 구조소는 없고 휴양처만 남았다고 내용이 끝난다. 교회를 비난하는 것이다. 교회는 처음부터 인명 구조소였다. 하나님, 선교, 교회다. 교회, 하나님, 선교가 아니다. 이게 혼돈되면 우리의 신학적 사고방식이 죽도 밥도 안되는 것이다. 항상 이 틀안에서 생각해야 한다.

 

처음교회는 선교공동체였다. missionary church(community). The Church-in-Mission. 선교라는 공적인 사역을 수행하기 위한 집단이 에클레시야다. 교회론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선교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니까 기본적으로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성경에 교회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 이라고 했다. 선교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생길 수 없다. 복음을 전해야 듣고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그리스도인이 되고 공동체에 합류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반드시 선교가 전제되어야 한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 선교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표현이다. 첫째는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메시야, 구주시며 왕이시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구원하시는 분의 몸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지상명령, 선교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둘째로, 교회의 파송성을 나타내는 뜻이 있다. 몸이 많은 지체를 가졌다. 이 세계 온세상에 세계 각계 각층에 파송되어야 할 지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지상의 교회의 시간적 제한성을 초월한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역사속에서 시간의 제한을 초월한 공동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 사도들 - 교부들 ---- 이 전통을 시간을 초월해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도바울을 본적이 없다. 그러나, 지금 사도바울과 관계 없이 살고 있는가? 어거스틴, 루터, 칼빈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장벽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다. 넷째로, 지상의 교회라는 것은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있다는 것이다. 인종과 문화와 국경을 초월한다. 에큐메닉.

 

셋째는 성령의 전이라고 한다. 교회는 영적 공동체이다. spiritual community. 왜냐하면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미 성령의 선물로 믿음을 가진 구원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전이다. 선교와 결부해서 생각해 본다면, 선교의 동기 이것은 사실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것이다. 사랑이 선교의 동기다. compassion.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선교의 동기가 여러 가지가 있다. 제일 중요하고 근원적인 것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다 형식적으로 심하게되면 위선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하게되는 것이다. 사랑이 없어도 선교할 수 있다. 성령께서 사랑을 주시는 것이다. 그 다음에 순종이 동기다. 자기가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감동과 감화로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동기가 있다. 특히 개혁교회 선교의 전통 가운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동기가 많았다. 그런데, 그것도 자연적인 사람의 생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자극하고 충동하시기 때문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 다음에 성령의 전이라는 것은 사역할 때 은사,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교회는 은사 공동체이다. 카리스마틱 공동체다. 지체마다 선물을 주셨다. 선물 따라 직임을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카리스마, 은사다. 이것을 무시하면 경영학적 행정학적, 군대식 교회운영이 되는 것이다. 은사를 따라서 사역을 해야 한다. 교회 사역의 선교의 능력의 문제이다. 성령이 능력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능력을 받고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성령의 능력 없이는 교회가 사역을 할 수 없다. 몰트만의 성령의 능력 아래 있는 교회,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헨리 부어(Boer)의 책도 중요한, 성령과 선교에 대해서 쓴 중요한 책이다.

 

넷째는 교회는 기구다는 것이다.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역사속에 존재하는 교회는 기구(Institution)다. 교회가 제도화된 것, 기구화된 것 우리가 싫어한다. 타락의 주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기구와 관련된 이단들도 많이 있다. 가령 구원판, 와치만니를 따르는 사람들. 나도 목사가 되기 전까지, 목사가 되고 난 직후 교회의 제도라는 것을 필요 악이라고 생각했다. 안 좋게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어떤 대학교의 교목으로 처음 갔을 때, 상당수가 교회를 가야하는데 안갔다. 만나서 물어보니까 복음, 성경, 기독교 이것보다는 자기가 보고 느끼는 교회에 대한 반감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히피 운동하는 사람들이 60년대 예수는 좋다. 그러나, 기독교는 싫다는 운동도 있었다. 아무튼 그 때 제도가 없는 제도화되지 않은 교회를 하고 싶었다. 감리교 사회관을 빌어서 주일마다 누구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광고하고 리터지 없는 조직도 없는 아무것도 없는 교회를 했다.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돈을 털어서 선물을 준비하고, 성탄절을 집에서 보냅시다 플랭카드를 들고 거리를 다니면서 선물을 나누어주었다. 6개월쯤 지나고 난 뒤에 문제가 생겼다.... 지금도 그 때 그 잔당들이 남아 있다. .... 그런데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몸이란 것은 지체가 일부 절단되도 살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환경속에서 살려면 불편하다. 사지가 있어야 활동할 수 있는 것처럼, 역사속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정통신앙을 지키고, 이단으로부터 방어하고, 그리스도교의 일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조직화, 제도화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제도가 본질적인 차원을 압도해 버리느냐? 이것이 문제다. 교회는 기구다. 역사속에 존재하려면 기구를 가질 수밖에 없다. 개혁을 위해서 저항을 할 수 있지만, 온전히 부정해서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 부정하는 사람들도 자기들끼리 제도를 가지고 조직을 하고 있다. 이름만 다를 뿐이다.

 

 

 

교회와 선교라는 문제를 생각할 때, 근본적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기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격적 공동체가 교회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구, 제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교회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초기의 교회, 313년 전까지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초기의 교회의 특징이 무엇인가?

 

초기 교회의 특징은

 

자주 박해를 받았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별 힘이 없었던 집단이었지마는, 이 초기교회가 강력한 선교적 공동체, 교회였다는 점이다. 처음에, 초대교회가 처음 시작할 때 문제가 있었다. 이 지상의 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없다. 초대교회도 문제가 있었다. 칭찬 받았지만, 행1:8에도 불구하고 처음 마가 다락방 공동체는 예루살렘 성벽을 넘어갈 의도가 없었다. 이방인에게 전도할 의도가 없었다.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했지만,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는 외향성, 선교성, 사도성, 파송성은 부족했다. 몇가지 이유가 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을 임박한 것으로 생각했다. 임박한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 이 것이 예루살렘 공동체가 그곳에 머물게 했다. 금방 주님께서 재림하실 줄 안 것이다. 행 처음에 보면, 힌 옷 입은 두 사람이 재림을 이야기했다. 당시의 정황을 보면 임박한 재림을 기대할 수 밖에 없었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3년을 같이 있었다. 부활하신 후에 돌연히 자기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주님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골방에 돌연히 나타나셨다. 여기저기 여러차례 기대하지 않았는데 나타나고 가시고를 반복하셨다. 여러차례 왕래하셨기 때문에 주님 승천하셨는데도 전처럼 주님오실 것이라고 심리적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라나타, 주께서 오신다. 기도문이었다. 안오시니까 주여 오시옵소서로 바뀐 것이다. 초대교회는 주님의 언행을 기록하지 않았다. 주님 곧 오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예루살렘 중심의 사고방식. 주의 날이 오면 예루살렘이 중심이 된다. 열방이 여기 와서 찬양하고 경배하고, 구구절절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나갈 이유를 못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실제는 단순한 상상인데, 주님께서 땅 끝까지 가라는 말씀을 제대로 못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엄청나고 이상한 말이었다. 로마 식민지로서 하루하루 살기도 힘든데.. 예루살렘을 떠나 천하 만민에게 ...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다. 제자들은 특별히 핵심적으로 중요한 말씀들은 거의 못 알아들었다. 십자가. 고난 당할 것이다. 마지막 올라갈 때까지 우편, 좌편 했던 것이다. 부활도 못 알아들었다. 마이동풍으로 들었다. 그러나, 이후에 성령의 능력을 받고, 방언-외국어를 하고, 이것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바벨탑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흩어 버리셨다. 이제 성령으로 복음으로 하나가 되게 하신다고 하는 세계 복음화의 상징적 사건이다. 스데반 사건으로 박해를 받으니까 예루살렘 공동체가 쫓겨나서 사마리아 주변으로 가서 전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강제해산 시키신 것이다.

 

 

 

 

 

교회와 선교 4월 7일 강의

 

A. 초기교회

 

초기교회의 특징 - 때때로 박해를 받았다. 조직, 제도, 건물, 시설 여러 가지면에서 오늘의 교회와 비교할 때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가운데서 선교한 교회다. 선교공동체였다. 두가지 양태가 있다. 첫째. local church( 갈라디아, 빌립보 등 등 ) - 일상적으로 전도했다. 둘째, 박해가 시작되면, 지상에서 교회가 사라지고, 흩어져서 전도했다. - 유랑하는 평신도 전도자들...또 다른 특징은 유랑하는 평신도 전도자들이 있었다.(wandering lay preacher, evangelist, charismatics) 이 시대의 독특한 사람들이었다. 특징이 있었는데 첬째는, 무가족(familyless),  둘째는, 무주택(homeless)  셋째는, 무소유(possessionless) 넷째는 무보호, 무보장(protectionless)  

 

기독교 역사장 가장 radical 한 그룹이었다. 가장 과격하고, 근본적으로 복종한 사람들이다. 근본적으로 복종하니까 이 세상에서는 과격하게 보이고 급진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바꾸어 말하면 거지다. 자원해서 거지처럼 되어서 유랑하던 전도자들이다. 외형적으로 보면 사회적으로 매우 불리한 여건속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존재했지만, 이 시대가 가장 강력한 선교운동이 전개되었던 시기다.

 

스테판의 닐, 단권으르된 기독교 선교 역사서 중 가장 좋은 책, 기독교선교사에 보면,  전체 로마에 약 5천만명의  인구가 살았을 텐데, 그 중의 약 10%가 그리스도인이었다. 500만 명. 엄청난 숫자다. 박해를 감수하면서 존재했던 기독교인 수가 약 10% 였다는 것을 여러 자료를 가지고 말했다.

 

호교론자들이 쓴 편지들을 보면.... 우리는 미신숭배자가 아니다. 로마의 궁궐에도, 로마의 육군에도, 로마의 해군에도 크리스챤이 있다.... 이것은 황제에게 위협처럼 들릴 수 있는 엄청난 이야기다.  

 

제임스 케네디가 쓴 전도폭발을 읽어보면 처음에 만일 콘스탄틴이 기독교인에게 자유를 선언하지 않았다면, 약 500년 정도 되었으면 지금의 유럽은 완전히 기독교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복음화가 약화되었다고 말한다. 생각해 볼 여지는 있는 지적이다.

 

초대교회가 그들이 일상적으로 전도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일상적인 것이며, 또한 의무였다. 성경적으로 보면 전도는 일상적으로 해야하는 것이다. 가장 훌륭한 좋은 전도방법이다. 일상적으로 전도한다고 해서 어떻게 열악한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었겠는가? 여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마이클 그린이 쓴 “초기교회의 전도”라는 책을 읽어볼 것.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아주 약자였던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적인 전도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그 들에게 삶의 능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일상적인 전도는 가장 쉬우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다. 대상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이 쉬운 점이고, 어려운 점은 그 대상자가 나를 잘 안다는 것이다.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이들이 가졌던 독특한 코이노니아 - 생사고락을 같이하고 유무상통하는 코이노니아가 아주 부러운 것이었다. 둘째,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된 인격 - 온유, 겸손... transformed character 셋째는,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보였고 보여 주었던 기쁨 넷째, 환란과 고통가운데서 보여주었던 인내.

 

1940년대 말 중교 공산화 이후 30년간 중국교회가 박해를 받으면서 중국교회는 거의 박살났다. 1970년대 개방되기 전까지 중국에는 크리스챤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중국의 기독교회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로잔대회(1974)에서 중국교회 현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개방되고 보니까 엄청나게 많았다. 중국교회가 오랜 핍박중에 기독교의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비본질적인 것을 다 빼앗김으로 본질적인 것을 알게되었다고 말하는 학자들이다. 초기교회도 마찬가지다. 박해 중 비본질적인 것을 다 빼앗겨도 그것이 별 것이 아니며, 본질적인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하르낙이 쓴 “the mission and expansion of christianity in the first century" 하르낙은 이런 여건속에서 강력한 선교적 교회로 확장되어갈 수 있었던 몇가지 이유에 대해서 마이클 그린과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 더 구체적으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지적한 것이 있다. 첫째는 구제에 힘쓰는 교회였다. 둘째, 과부들과 고아와 갇힌자, 가난한 자, 노예, 나그네들을 섬기고 영접했다. 주인 없는 시체를 매장해 주는 일,  요새말로 교회의 구제와 사회봉사를 진심으로 행했다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전도하고, 사랑으로 섬기고, 능력(축사와 신유-주로 많이 나타난 능력)을 행했다.

 

 

 

 

 

 

 

B. 콘스탄틴적 전환 - 보쉬에 의하면 콘스탄티니안 터닝 포인트라고 말한다.

 

박해받는 교회에서 국교가 되면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첫째는, 기구화(Institutionalization) 교회가 제도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관료화되기 시작했다는 것과 연결됨.

 

이교도들은 로마 제국의 적이 되었다. 그렇게 됨으로, 교회에 대한 박해는 종식되었지만, 교회의 인격적 선교적 영적 역동성은 쇠퇴하게되었다.

 

교회의 순례자적 성격이 상실되기 시작했고, 나그네와 행인들의 교회 특징이 감퇴되기 시작했다. 박해중에는 나그네와 행인의 교회로 존재했다. 이 땅에는 영원히 거처할 곳이 없고, 우리의 본향은 저곳에 있다. 종말론적 공동체였다. 그러나, 콘스탄틴 대제 이후에 종말론적 비젼이 사라졌다. 그래서, 이땅에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교회가 유랑을 거치고 정착을 시작한 것이다. 탐욕이 생기는 것이다.

 

교회가 정신은 죽고 형식이 굳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Spirit -> Form, 처음에는 비젼과 아이디어를 가지고 조직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비젼과 아이디어는 퇴색하고, 형식화된 조직이 빈약한 비변과 아이디어를 끌고 간다.

 

보쉬가 이런 지적을 했다. 초기교회 첫 3세기에 교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직분이 사도였다. 사도라는 것은 파송되는 것이다. 운동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역동적 이미지가 있다. 콘스탄틴 이후는 가장 대표적인 직분이 감독(Bishop)이 되었다. 뉘앙스가 그냥 감독하는 것이다. 행정적이고 사무적이고 정적이다. 물론, 감독도 필요하지만 교회의 대표적인 직분이 사도로부터 감독으로 바뀐 것은 매우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기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가 제도와, 기구화되니까 외향적이었던 교회가 내향적이 되고, 교회안에 많은 지위가 생겼다. 박해 중에 있었을 때는 교회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먼저 박해를 당하는 것을 의미했다. 첫3세기 동안 교회에서는 지도자는 교인들의 추대를 받았다. 많은 경우 자기가 하기 싫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박해를 감수하고 순교까지 하기도 하면서 온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틴 이후는 교회 안의 여러 지위들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주는 것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안의 지위를 탐하게 되었다. 서로 비방하고 음모하고 성직 매매까지 하게되었다. 지도자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교회가 타락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중세 암흑기로 넘어가는 것이다.

 

라투넷 교수가 쓴 “교회 확장사” 기독교가 그레코로만의 영향을 받으면서 가장 나쁜 것은 교회 리더십의 개념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전에는 섬기는 자였다. 그러나, 크레코로만 문화속에서 세속적인 리더십 개념이 교회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교회가 과거 지향적이 되었다. 중요한 사건들은 이미 과거에 일어나 버렸다. 앞으로 미래에는 중요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고, 교회는 보물을 맡고 있는 창고로 전락했고,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보물을 나누어주는 것이 사명으로 바뀌었다. 비역사화되어 버린 것이다.

 

후켄다이크, 화란의 선교신학자, 말년은 미국에서 여생을 보냈다. “교회론은 단지 제2세대의 주요 관심사이다. 부흥, 개혁, 선교운동이 진행되는 당대에는 우리의 관심이 기독론에 압도되고 사고방식 유형은 종말론적이고 삶은 찬양과 감사가 충만하며 교회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다.” 부흥이나 개혁이나 선교운동이 진행되는 당대에는 우리의 관심이 예수가 구주이시고 왕이시라는 대 압도되고, 현세적이고 세속적이지 않으며, 삶은 가난하든지 부하든지 평탄하든지 어렵든지 찬양과 감사가 넘친다. 역으로  교회가 교회자체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진다는 자체가 선교적인 교회가 아니다. 역동적인 개혁이 진행되지 않는 교회라는 것이다. 부흥하지 않는 교회라는 뜻도 될 수 있다. 콘스탄틴 이후의 기구화란 의미의 뜻은 교회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주로 관심을 가지게되었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보존 유지 관리 이런 것에 안주하게되는 것이다. 이것이 기구화 이다. 기구화가 관료화를 낳고 관료화가 세속화를 낳는다.

 

역사상의 교회는 운동형태와 기구화 형태 두 형태로 존재한다.

 

리차드 니버는 두 형태의 차이를

 

대체로 말해서 운동력이 있는 교회는 진보적이다. - 기구화 형태의 교회는 보수적이다.

 

운동력 형태의 교회는 능동적이다. - 기구화 형태의 교회는 수동적이다.

 

외에 영향을 가하는 특징이 있다. 변화시키는 특징이 있다. -  외부의 영향을 받는다.

 

미래 지향적이다. - 과거 지향적이다.

 

데이빗 보쉬의 이야기

 

모험을 감행한다. 불확실한 것도 용기를 가지고 감행하는 성향 - 변화에 대해서 불안해 한다. 모험을 하지 않으려 한다.

 

기득권을 포기한다. - 기득권을 수호하려고 한다.

 

선교를 강조한다. - 정착을, 착생에 관심을 더 많이 둔다.

 

은혜를 강조하고 - 율법을 강조한다.

 

바른 삶을 강조하고 - 교리를 중시한다.

 

사도, 예언자, 전도자등의 역동적 사역을 중요시 하고 - 감독, 장로 중심의 정착된 사역을 더 중시.

 

 

 

조화를 이룬 교회가 좋은 교회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통합적으로 해나가느냐가 중요하다. 양자택일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원래 movement 성향을 훨씬 더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개척, 선교보다는 관리, 정착, 안정이 더 중요하게되고, ?......? 교구가 나의 세계라는 비젼으로 축소되어 버리고, 모든 족속이라는 비젼과 지평이 내교회 내 교인으로 축소되어버린 경향이 일어나는 데, 이것이 기구화란 단어의 뜻이다.

 

교회가 기구화 됨으로, 관료화, 결국은 세속화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다. 얼마만큼 세속화했는가? 성직을 매매할 만큼.

 

 

 

둘째, 교리화. 보쉬의 표현을 쓰면, 기독교 신학의 철학적 변형. 헬라철학의 많은 영향을 받고, 히브리적인 요소가 감퇴되고 헬라적인 색채를 띄게되었다. 어떤 사람 표현은 헬라정신의 승리라고 했다. 큰스탄틴 이후에 계속된 그레코로만 문화속의 기독교가 헬라정신이 히브리 정신을 압도했다. 그리서, 철학적 변형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신앙 정신의 논리적 정리가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우려이다. 교리가 이단으로부터 정통신앙을 보전하고 교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 과정속에서 헬라적인 영향을 지나치게 받은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앙, 신앙성, 신앙정신이 논리적으로 정리되면서 규격화하고 폐쇄적이 되고 도그마틱하게 되었다. 이것이 어떤 변화를 의미하느냐 할 때에 히브리적인 것과 헬라적인 것을 대조시켜 놓았다.

 

 

 

신관/ 하나님:  헬라적 사상은, 신은 불멸의 존재다.  히브리적 사상은, 야훼에 대한 정의가 시도되지 않았다. 할 수도 없었고 할 필요도 없었다. “I am who I am" 이것은 헬라철학 사상에서는 안통하는 것이다. 인간이 뭐냐? 인간은 인간이다. 이런식의 대답은 안통한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에게는 그것이 대답이 되는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과 불멸의 하나님은 다르다. 존재하는 신, 살아계신 역사적, 인격적, 창조자, 역사의 지배자, 우리의 주님! 역동성에 있어서엄청난 차이가 있다. 감히 이름도 못 불렀다. 신앙성과 신앙정신에 이 만큼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어느쪽이 압도하느냐에 따라서 역동서에 차이가 있다. 안다는 말에 있어서도 ”야다“는 체험적인 지식, 인격적 관계를 통해서 체험적으로 안 그 믿음 이것이 히브리적인 앎이고 믿음인데, 헬라에서는 체험이 없어도되는 지적인 이지적인 앎이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과 사람을 안다는 것에 있어서 히브리적 사고와 헬라적 사고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사도신경과 니케아신조와 같은 것을 읽을 때, 히브리적으로 읽으면 인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지만, 헬라적으로 읽으면 지식적으로 안다는 개념이 가능하다. 그런데, 마귀도 알 거는 다 안다. 그래서, 알고 떤다. “다바르” 역사적 운동력을 가진 사건적 의미, 개방적, 다이나믹한 어감이 있는데, “로고스”는 정적이다. 이치, 도 이런 것은 대단히 정적이다. 히브리인들은 매우 청각적인 특징이 있었다. 음악이 발달되었다. 헬라는 시각적인 민족이었다. 조각, 건축, 그림이 발달되었다. 그러면서, 청각적이다, 음악을 들을 때,  합창, 여러 가지 다양한 악기가 같이 연주될 때... 모호하고 분명치 못한 것이 많이 있는데.. 그래도 통한다. 시각적인 그것은 정확하다. 희고 검고, 크고 짧고 확연하게 드러난다. 히브리 사고는 융통성이 있고 개인적 자유가 있고 크고 넓고 깊다. 특정 사람의 하나님 경험에 대해서 하나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수용성이 넓어진다. 그러나, 헬라적인 경우는 규정되어져 있기 때문에 아멘이나 아니냐 분명해진다.  기독교의 성서적 진리와 가능성과 운동력을 상당히 축소시키는, 이단으로 정통신앙을 고수하기 위하여 한 것이지만, 이 과정에서 헬라정신이 압도함으로써, 그래서, the church in movement 가 established church 로 고정되어 버리는 그런 형태가 일어나고, 그것이 결국 선교를 나가는 것보다는 기구화된 교회의 확장, 교구의 증가 이런 식으로 나가게 되고, 그 다음에 신학에서 선교가 떨어져 나오는, 논의 될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교리발전이란 것이 선교가 빠진 발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defence theology 로 theology of maintenance 로 되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화석화되어가기 시작했다는 지독한 표현을 쓰기도 했다. 역동성을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셋째) 그 다음에 말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매우 경직화 되었다. - 콘스탄틴 이후의 전환

 

이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부정적인 현상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전이다. 인격적 공동체다. 그래서, 몸이란 것은 생명력이 강할 때일수록 신축성이 강한, 유연한 것이다. 노화했다는 것은 경직되었다는 이야기다. 죽으면 완전히 뻣뻣한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특징은 유연하고 신축성이 있는 것이다.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신축성과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교회가 말기현상이 될수록 경직화되는 것이다. 교회가 가장 온유한 지도자였는데, 온유가 무엇인가? 신축성과 탄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언제나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 유연한 것이 강하다. 교회는 부드러워야 하며, 교회 지도자도 부드러워야 한다. 교회는 훨씬 더 여성적이 되어야 한다. 그게 목회다. 여성적인 부드러움이 더 강하기 때문에 그렇다. 또, 아이를 낳고 키우는 주된 역할이 어머니에게 있는데, 그런 어머니의 가진 특징이 있다. 목회는 영적으로 사람을 낳고 기르는 것인데.... 남성적, 폭군적 기질은 목회가 안 되는 것이다. 양육하는 성품을 많이 체득을 해야한다.

 

(일종의 여담)  토마스 카알라일의 “영웅의 역사” 신앙적 위인을 언급하는 장에서, 신앙적 위인의 공통된 특징은 “성실성-integrity", 특히 여성적 성실성,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성애, 초지일관 마지막까지 절망하지 않고 자녀를 돌보는 모성애. 그 예로 종교개혁자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당대 기성교회 로마 교황에 대해서 거역하고 항의하고 운동을 벌였던 사람을 보면 대단히 단선적이고 강력한 이미지로 생각하기 쉬운데, 토마스 카알라일은 정반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루터는 강직한 사람이 아니다. 초상은 꼭 레슬링 선수의 인상을 받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루터의 위대하고 소박한 가슴속에 있는 부드러운 사랑의 숨결, 그 것보다 감동적인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사려 깊은 온유함, 너무도 예민하고 섬세한 온유함. 루터의 눈, 우수에 찬 눈이다. 루터에게는 위대하고 자유로운 인간의 가슴이 있다. 루터에게는 웃음과 눈물도 있었다. 마음이 약하고 부드러운 그런 남자였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했다는 것이다. 존 낙스도 강력한 사람으로 생각되어지는데, 그도 아주 여성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이루었다. 낙스는 원래 종교개혁에 적극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종교개혁이 옳다고 생각한 정도였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이 모여 있는 성이 가톨릭과 정부군에 의해서 함락직전에 있을 때,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 지도자로 낙스를 지목했다고 한다. 낙스는 두려워서 뛰쳐나가서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하는 생각으로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성이 함락되어 결국은 노예로 고통을 당하게 되었고... 이 후에 위대한 종교 개혁자가 되었던 것이다. 교회는 유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꺾여진다. 지도자도 마찬가지다.

 

 

 

 

 

B. 로마제국의 선교 - 로마제국하의 기독교 선교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진행되었다.

 

첫째는, 교구확장(교황), 기구적 확장. 정치적으로 강력하게 정복해 감으로 비이교도화(depaganization ??) 해 간 것이다. 형식적으로 이교를 포기하게 하는 것이 비이교도화였다. 따라서, 형식적인 신자가 교회에 많이 생기게 되었다. 로마제국의 선교는 거품이 많았다. 유명무실한 교인들을 양산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정의가 달라졌다. 법적으로 로마제국의 신민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는 로마 제국이 복음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제도화, 세속화, 교리화, 경직화됨으로 교회의 de-formation, 곧 기형화 되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하는데, 그것을 영어로 re-formation, 다시, 재, 형성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이란 다시 형성한다는 뜻이다. 루터가 그렇게 분명히 지적한 것은 아니지만, 콘스탄틴적 전환으로 일어난 결과들을 분명히 걸고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콘스탄틴 이전의 기독교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다. 혹은 re-volution 이라고 하는데, 혁명이라고 하는데, 정치, 경제, 일상 삶에까지 여향을 끼쳤기 때문에 혁명이다. volution은 회전, 돌아간다는 뜻이다. 다시 돌아가는 것인데, 콘스탄틴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의미는 콘스탄티누스 터닝 포인트를 다시 반전시키자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제자리로 잘 돌아갔다고 생각하는가? 어떻든, 이렇게 교구확장, 정치적, 군사적, 지리적, 법적으로 형성한 타입

 

두 번째 타입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일어난 선교운동이다. 여기저기서 진행되었다. 초기교회의 선교 전통을 이어받은 것은 수도원이다. 희생, 봉사, 섬김, 전도의 타입니다. Monk missionary 라는 말도 있다. 이들이 전통적인 선교운동, 원래 초기교회의 선교운동의 전통을 이분들이 이어갔다고 보는데, 이들으 선교운동이 공로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의 역기능은 당시 교회들로 하여금 교회전체가 선교하는 것이 아니고 선교는 수도사들이 하는 것이라는 오해를 교회에게 낳게 하였다는 것이다.

 

 

 

V.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선교운동과 선교 사상의 발전

 

A. 종교개혁 시대

 

근대 선교운동의 발달은 신항로의 발견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7세기에 모슬렘들이 일어나서 세계를 완전히 갈라놓았다.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갈라놓았다(그림). 유럽이 고립된 것이다. 이때 서구의 기독교화가 추진된다. 밖으로 못나오니까! 근대선교운동이란 것은 고립된 유럽이 신항로를 발견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1492년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수십 년 후 종교개혁이 일어났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과 초기에는 별다른 선교에 대한 운동이 없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신학적 문제가 있다. 지상사명에 대한 오해, 초기교회의 제자들에게 준 것이며, 후대와는 관계가 없다고 보았으며, 그리고, 예정론, 특히 개혁교회, 칼빈 등의 예정론에 있어서의 논쟁, 성찬 논쟁이 프레테스탄트간 심각한 분열을 일으킴으로써 선교에 대해서 빨리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둘째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생존을 위한 노력이 더 우선적이었다. 베스트 팔리아 조약 이전에는 외부에 관심을 갖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셋째, 자기 자신의 조직과 형성을 위해서 시간이 필요했다.

 

넷째,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처음에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은 포르투갈, 스페인 사람들인데 가톨릭 사람들이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그 항로들과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보가 부족했다.

 

다섯째, 프로텐스탄티즘이 가진 문제

 

        1.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종교개혁이 힘있게 퍼져나갔던 요인 중에 민족주의의 영향이 잇다. 이 민족주의는 비선교적인 특성이 강하다.  주의해야 할 일이다. 항상 온 세계가 나의 교구, 우리의 사역지라는 지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본회퍼가 그랬다. 진정한 크리스챤은 민족주의자가 될 수 없다고 했다. 민족이 중요하다.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이렇게 가지만, 양자 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땅 끝까지의 지평을 항상 견지해야 한다.

 

       2. 개인주의적 성향. 오직 믿음으로 할 때, 그것은 개인의 믿음, 자기 자신의 믿음이다. 옳은 주장이지만, 부수적으로 개인주의적 성향을 갖게 한 것은 사실이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주장하니까, 공덕, 헌신 이런 것이 부족했으며,...., 루터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안에, 사랑으로 이웃속에 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성도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안에서 멈추어 버렸다.

 

여섯째, 교회의 구조 문제를 지적한다. - 선교역사가

 

교회는 초기교회부터 이원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Sodality(특수구조, 선교구조라고도 할 수 있다. 목표와 규약과 정신에 맞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이다.)와 Modality(보통교회 구조-아무나 들어갈 수 있다.)

 

두 개가 공존해 오면서 역동성을 유지해 온 것이다. 선교가 강력히 진행될 때는 두 개의 기능이 자유롭게 조화롭게 역동적으로 수행되었다는 것이다. 양 구조가 이렇게 조화 있게 작용하면서 대단히 선교적 교회의 위력을 나타내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도 교구와 수도원이란 양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수도원이 생긴 것은 Modality에 대한 반동으로 생겼지만, 구도는 같았다. 그리고, 함께 교황아래 있었다. 그런데,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후에 수도원을 폐지시켰다. 교회의 Sodality 구조를 제거했다는 것이다. 선교하자는 주장은 여기저기서 일어났지만, 준비된 구조가 없고, 준비된 인력이 없어 실천하지 못했다. 로만 가톨릭에서는 예수회나 도미니칸 등을 통해서 배출된 사람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200년 이상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선교단체를 싫어하는 경향이 그런 것이 될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 선교운동의 시작 - 4월 14일 강의

 

독일 경건주의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선교운동과 결부시켜서 이들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종교개혁 이후에, 프로테스탄트 교회자체가 루터교를 포함하여 타성에 바치고, 형식주의에 빠지고 메마른 전통주의에 빠지면서 독일 일각에서 일어난 일종의 부흥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루터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의를 제기했다.

 

특별히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은

 

첫째로, 당시 루터교회 천하에서 진정한 회개와 인격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당시 루터교회 사람들에게 이것은 영적교만으로 오해받을 수 있었다.

 

둘째로, 성경공부, 기도, 예배, 코이노니아를 통해서 영적 성장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루터교 지도자들과 교인들에게 역시 영적교만으로 오해받았다. 다 그리스도인인 기독교 천하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셋째로, 전도와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것 역시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 성장, 결혼, 죽음을 맞이하는 문화에서 전도라는 것은 대체로 이해가 안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17세기 말에 독일 경건주의자들의 자녀들이 삭슨 지역을 중심으로 대학입학이 거부되는 일이 있었다. 1964년에  할례학교와 고아원을 세우고, 이 할례를 중심으로 영적 각성운동을 시작하는데 이 할례대학이 가졌던 특징은 신학보다도 성경을 중시한다. 신조나 교의 공부보다는 성경자체를 중시한다는 특징이 있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이 거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실천이 중요하다. 지식보다는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할례대학의 신학부가 유럽에서 많은 학생들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이 할례대학을 중심으로해서 1705에 더 대니쉬 할레 미션이란 것이 세워지는 것이 최초의 공식적인 프로테스탄트 선교단체였다. 공식적으로 해외로 선교사를 파송한 것이다. 대니쉬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덴마크의 프레드릭 4세가 인도의 자기들의 식민지에 선교사를 파송할 생각을 했는데 사람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할례가 인적인 자원을 부담하고 선교비, 재정적 부담은 덴마크 정부가 하는 것으로 해서 그해 11월 29일에 최초로 선교사를 인도에 파송한 것이다. 1706년에 인도에 크난크바리라는 곳에 도착하는데 그것이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로 파송받는 사건이다.

 

중요한 몇 가지가 있는데,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 파송이

 

첫째는 교회와 분리되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더 대니쉬 할레 미션이란 것이 모달리티가 아니라 소달리티라는 것이다. 공식적인 기성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한 것이 아니라 미션 소사이어티가 결성되어 선교사를 파송했다는 것이다. 기성교회와 분리되어 선교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지장을 받았다. 지금까지도 미국이나 한국에서 보면 메인라인 프로테스탄트 교회들, 장로교, 감리교 등 역사를 가진 교회들은 선교회, 파라쳐치, 수백개나 되는 파라처치들과 조화가 잘 안되고 있다. 지난 20년간의 통계를 보면, 선교사의 파송 숫자도 파라쳐치에서 파송한 것이 더 많으며 점점더 많아지며,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선교비의 문제에 있어서도 기성교회에 들어오는 헌금보다 파라쳐치로 더 많은 선교비가 들어가고 있다. 10년전에 이사람들이 전망한 것을 보면 2000년쯤 되면 미국 프로테스탄트 교회 전체에 들어가는 헌금보다 파라처치 단체에 들어가는 헌금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런 것은 앞으로의 선교운동을 위해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협력이 필요한데 앙금이 남아 있다는 것은 좋지 못한 것이다. (루터의 수도원 폐쇄도 영향을 끼쳤을 것) 윌리암 캐리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아버지라고 하지만, 영국의 침례교회가 그를 후원한 것이 아니라 그가 선교회를 만들어서 파송된 것이며, 그 이후 영국에 선교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서 선교가 진행된 것이다.

 

둘째는 선교비, 선교운동의 형태문제다. 사람은 할례가 갔지만, 선교비는 식민지를 개척하고 있던 덴마크 정부가 부담했다는 것이다. 덴마크 프레드릭 4세가 선의로 선교를 시작했다고 할 수 있지만, 선교비의 출처 때문에 기독교 선교운동이 식민지 개척과 동반, 연루되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된 것이다.

 

셋째로는, 지난 3-40년동안 서양교회나 선교단체를 비판한 사람들 중에 비판의 한가지가 이것이, 국제적인 어떤 조직을 가지고 2/3 세계로 들어왔다고 말하는데, 그 말하는 사람들의 의도는 처음부터 기독교 선교운동이란 것이 국가를 초월해서 세력을 합해서 들어왔는데 일종의 다국적 기업이 2/3 세계를 경제적으로 밀어오듯이 기독교 운동도 그랬다는 것이다. 이것도 대니쉬 할례의 합작을 보면서 비판을 한 것이다.‘

 

 

 

경건주의자들이 처음 인도에 가서, 원칙을 가지고 선교를 했는데 우리가 역사적으로 최초의 개신교 선교 정책으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원주민 교회를 빨리 세운다.

 

둘째, 원주민의 문화를 연구해야한다.

 

성경을 빨리 번역해야 한다.

 

원주민 지도자를 빨리 양성해야 한다.

 

이것이 초기의 경건주의자들의 생각이다.

 

경건주의자들의 선교라는 것이, ..... 멀어서 못들었 음.... 초기의 경건주의자들에 비해서 조금 시간이 흐른다음에 경건주의 선교는 감정주의와 영적구원에 치중하는 조금 좁은 선교운동으로 변해갔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을 비민족화, denationalization, 비원주민화, 그 사회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들의 역사와 전통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물론 우리가 영적으로 하나님의 시민으로 분리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민족과 문화와 전통속에 잇는 그리스도인인데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전통적인 문화와 관습으로부터 무조건 분리시키는 그런 쪽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사실은 이중적인 문화생활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오셔서 아웃사이더로 오셔서 인사이드가 되셨지만 그래도 아웃사이더가 되셨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런 것이다. 아웃사이더로 오셔서 인사이드로 사신 아웃사이더...

 

 

 

 

 

그 다음으로 중요한 그룹이 모라비안들이다.

 

우리가 프로테스탄트 선교를 이야기할 때, 경건주의가 시작한 선교운동을 더 발전시킨 사람들이 모라비안들이다. 종교개혁 당시 직후의 개신교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하고 선교운동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이야기했는데, 참고로, 루터교 선교신학자들 가운데 그리고, 상당한 선교학자들 가운데, 그 같은 견해에 대해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종교개혁 당시와 직후의 교회들은 19세기나 20세기의 교회와 매우 다른 상황 속에 있었다. 그래서, 19세기의 선교운동과 같은 잣대로 그 사람들의 선교를 평가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 선교가 일어났을 때 교회는 파송이 가능한 상당한 힘을 가진 교회였지만, 개혁 당시의 교회는 그런 여력이 없었고, 교회다운 교회를 만드는 것이 그들의 당면과제였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의 선교다. 그런 일리가 있는 지적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쪽에서 공격하는 것은 그래도 주님의 지상명령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 있었다면, 충분히 선교를 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이야기를 한다.

 

 

 

모라비안들의 선교

 

얀  후스의 신앙적 전통을 이어받은 무리다. 박해를 받아 돌아다니다가 진젠도르프의 영지에 정착을 하게된다. 그리고, 진젠도르프가 모라비안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그러면서, 모라비안들이 선교적인 교회로 나타나게된다. 진젠도르프 자신은 할례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신앙적으로 경건주의자라고 볼 수 있고, 할례에서 선교의 열정과 비젼을 받은 사람들이다. 인도의 선교사들이 안식년에 돌아왔을 때 진젠도르프를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경건주의의 선교 정신을 그대로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초기교회 이후의 선교가 모든 교회의 책임으로 인식하고 수행했던 최초의 교회다. 콘스탄틴적 전환이후로 선교는 교회 일부, 특수층의 책임으로 변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책임, 목사와 평신도 남녀노소 모두의 책임이란 것을 각성하고 선교를 했던 최초의 교회였다.

 

둘째로, 영혼구원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선교목표는 인간구원에 있었다.

 

셋째, 이들은 선교, 모든 교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드시 특정인이 선교사로 가야한다고 생각했고 누구든지 소명이 있는 사람이 소명에 의해서 가야한다고 생각하여 직분에 관계없이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믿었다. 그래서, 자기들의 책임은 자기들이 복음 전하면 하나님께서 예배하여 두신 그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에 자비량 선교를 위주로 했다. 많은 사람들을 파송했기 때문에, 더구나 평신도까지 나갔기 때문에 선교비를 다 조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현지에서 스스로 조달했다. 많은 사람들이 직업, 기술훈련을 받고 선교지로 나갔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자비량 선교정책의 문제점

 

첫째로, 기술훈련, 직업훈련을 받고 갔으나 현지에서는 그 기술이 아무 쓸데없을 때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고생을 하게되었다.

 

둘째로, 선교자수가 많아지면서, 선교비 조달이 안되어 이 사람들이 생각해 낸 묘안이 상업, 일종의 무역이었다. 어떤 지역이 선교사가 다른 지역의 선교사에게 특산물을 보내어 일종의 무역을한 것이다. 진젠도르프가 이 안에 대해서 반대를 했다. 그러나, 선교비에만 쓴다는 조건으로 감독의 허락을 받아서 이일을 한 것이다. 이 이익을 거룩한 이익이라 불렀다. 그렇지만, 역시 장사는 장사여서 특별히 자꾸 문제가 되는 국제 상업주의, 식민지 확장과 연루가 되었다는 것이 거론된다. 가장 이익이 많았던 것이 담배다.

 

셋째로, 자비량하기 위해서 현지에서 선교사들이 한 일 중의 하나는 식민지 개척, 통치하는 서양 정부나 기업, 기관에 가서 도와준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다. 이것은 양자에게 모두 편리했다. 인기 있는 선교비 조달방식이 되었다.

 

 

 

이 때 모라비안 교회가 전체 교인수대 선교사의 수를 비교해보면 역대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였다. 진젠도르프 감독이 모라비안 교회로 하여금 선교를 진작시켰지만, 진젠도르프가 여전히 감독으로 있을 때 모라비안 선교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진젠도르프가 재혼을 했기 때문이다. 첫째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재혼을 했는데 이 문제가 모라비안 선교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그의 첫부인이 세상을 떠나기 15년 동안 이 여인이 자기 아내요 아이들의 어머니라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라고 기록한 책이 있다. 재혼할 때 자기 측근의 농촌 출신의 여성과 결혼했다. 빈한한 가정의 무식한 여자였다. 문제가 된 것은 그 여자가 신비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신비주의자 - 왜 선교에 타격을 주었는가?

 

기독교 신앙생활에는 신비한 것들이 많다. 성육신..... 신비가 문제가 아니라 “주의”가 문제다. 신비가 신비의 체험이 지상에 가장 좋은 것이라고 되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신비한 것 자체가 복음의 진수 자체는 아니다. 그리고, 성경의 목표도 아니다. 그런데, 이 부인은 신비주의자였다. 또 불건실한 신비주의자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고통을 실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최고의 미덕이라고 주장했다. 모라비안들이 최고의 헌신을 선교, 복음전하는 것이라고 나가다가, 예수의 육체적 고통을 체험하는 것이 최고로 중요하다고 하니까... 나가는 것보다 앉아서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 신비한 방법으로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된 것이다. 근데, 진젠도르프가 다시 그 이후에 회복한다. 내가 어찌하여 그 같은 흑암에 처했던가? 신비주의를 극복하고 일어나기는 하지만,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다. 선교와 신비주의란 것은 서로 얽히고 섥힌 것인데, 아시시의 프란시스코는 신비주의가 아니다. 바울이 병을 고친 것도 신비주의가 아니다. 이적기사를 행한다고 신비주의자는 아니다. 예수님의 변화산을 생각하라. 그게 좋다고 생각하고 거기 머물렀다면 신비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신비한 체험을 필요하지만 그 자체가 최고는 아니다. 사도 바울도 삼층천을 체험했는데 자고하지 않으려고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 그는 신비한 체험을 이야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알기로 한 것이고, 그 삼층천 체험이 죽기까지 복음을 전한데 중요한 작용을 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신비주의자의 모티브와 선교의 모티브는 다른 것이다.

 

심층에 들어가면 극과 극이 통한다. 자기 사랑 때문이다. 미국에서 20년전에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지미 베이커란 사람이, 카리스마틱 부흥사였다. TV 방송을 통해서 미국 전역에 부흥을 했다. 그러다가, 스캔들이 폭로되어 몰락하는데, 세무조사를 해보니 엄청난 비리가 있었다. 누가 폭로했는가? 누가 부추겼는가? 다른 부흥사들이 부추긴 것이다. 그것을 부추긴 오순절 부흥사도 같은 일로 몰락을 하게된다. 그때 신문들이 왜 자기들끼리 폭로를 하는가? 시장 확보를 위해서 싸운다고 했다. 이 사람들이 신비주의를 강조했다. 예배당을 지을 때 강당처럼 만들고 최고의 음향 시설을 만들고 무대를 크게 하고 그리고 막 설교를 해서 감정적이고 신비적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오순절 그 부흥사는 복음 성가 가수도 하는데, 마이크를 잡고 왔다 갔다 하면서 설교를 하는데... 그리고, 노래를 잘하니까 피아노 앞에서 자기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찬송을 하고 그리고 마이크를 잡고 최고의 음향시설을 갖춘 홀에서 ... 클라이막스에 가면 마이크를 잡고 막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사람들이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막 일어나서 열광을 한다. 이런 분들이 도덕적 문제로, 이성과 돈 문제로 나가떨어진다. 교단에서 징계를 받아 설교 징계를 받았는데, 그 기한이 끝나기 전에 또 TV에 나타나서 설교를 하는데, 자기는 회개를 했기 때문에 설교를 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미 베이커와 같은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밝혀지기도 했다. 헌금을 한 교인들에게 인터뷰를 했는데, 우리는 하나님께 헌금을 했기 때문에 지미 베이커가 어떻게 썼든지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 신비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신비주의자는 되지 말라.

 

 

 

선교신학 - 4월 21일 강의

 

지금까지의 내용은 독일교회의 선교까지 강의한 것임

 

지난번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그 사람:   지미 스웨거스(?) - 오순절 부흥사

 

 

 

영국교회의 선교

 

1. 영국교회 선교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71-1834

 

근대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개척자, 아버지. 실제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선교사로 생각하고 있다. 초기에 사도 바울, 중간에 프란시스 사비에 등 몇 사람 거론하고, 프로테스탄트 선교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람으로 언급한다.

 

 

 

1) 선교사 윌리엄 캐리 -  왜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개척자로 평가를 받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선교의 아버지란 말은 정확하지 않은 표현일 수 있다. 개신교 선교는 경건주의와 모라비안의 독일교회에서 먼저 일어났다. 영국만 해도 윌리암 캐리 이전에 몇 선교기관들이 있었다. 모라비안이 영국에도 있었고, 자기들이 개척한 북미대륙의 영국 사람을 위해서 선교활동을 하던 단체들이 몇 있었다. 그러나, 그런 몇몇 선교회들을 이야기하지 않고 윌리암 캐리를 개척자로 부르는 몇 가지 이유가 잇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서양식민주의가 바스코다가마(신항구 개척)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개신교 선교는 윌리암캐리에서 시작되었다.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의 주동자라고 말할 수 있다면, 윌리엄 캐리를 개신교 선교운동의 주동자라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렇게 평가하는가?

 

첫째는 교회와 선교에 대해서 개별적으로 교회와 떠나서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연합시키는 역할을 했다.

 

둘째는 그에게서 조직적인 선교운동이 시작되었다. 특별히 영어 사용국에서 그에 의해서 조직적인 선교운동이 일어났다. organize

 

셋째, 그가 해외 선교의 목표를 분명히 제시했다. 당시 해외선교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잇었다. 1846-1852 영국의 식민장관 어얼 그레이가 국회에서 연설할 때, 식민지 지배권의 획득으로 우리 나라는 마음대로 포기할 수 없는 지고한 책임을 지게되었다. ...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축복을 전하는데 협력해야한다.(국가적으로)   이 말은 영국 일반에 있어서 다른 나라에 기독교를 전하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실제로 안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교들의 개종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에 대한 연구 An Inquiry into the Obligation of the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 87페이지 짜리 팜플렛, 여기에 명백하게 왜 우리가 선교해야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내용을 곧 다시 말하겠음. 마틴 루터의 95개조가 종교개혁에 끼친 영향만큼, 그의 이 문서가 프로테스탄트의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누군가가 말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선언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넷째는, 그가 자신의 선교회를 조직하고 인도로 간 후에 바로 영국을 중심으로 우후죽순처럼 많은 선교회들이 조직되고 선교사들을 파송하게 되었다. 그의 설교와 그가 인도에 간 것이 기폭제가 되어서 선교의 바람이 일어낫다.

 

다섯째, 그의 지도력을 통해서 세계 광범위한 지역에 선교운동이 전개되었다. 모라비안들의 선교등은 지역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는데, 그 이후에 선교영역이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여섯째, 그가 대단히 훌륭한 선교방식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가령, 원주민 지도력 개발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선교에 있어서 외국 교회들, 국제적 협력, 선교하는 교회끼리 국적을 초월한 협력이 있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미개한 사람들에 대한 사역도 해야한다. 성경번역문제 이런 것에 있어서 대단히 기본적이고 중요한 선교방식을 제공했다.

 

일곱째, 어떤 사람이, 인간으로서 지도자로서의 캐리 자신의 위대성이 그를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의 인내, 균형과 겸손, 평화, 사랑, 헌신, 광범위한 지식, 선교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등으로 윌리암 캐리만한 선교사는 역사상 보기 힘들다. 영성과 신학에 있어서 뛰어났다는 것이다. 그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 구둣방에서 일한 직원이었다. 그리고 독학을 했다. 독학으로 그릭, 히브루 이런 성경어들을 마스트하고, 여러 가지 신학적 공부를 스스로 한 사람이다. 이후에 침례교에서 그냥 목사 안수를 주어서 목사가 된 것이다. 그가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했을 때 자기 부인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부인은 문맹자였다는 기록이 있다. 구둣방 주인이 자기의 처재를 소개해서 처재와 결혼한 것이다. 연상의 문맹자였다는 기록이 있다. 구둣방 주인이 세상을 일찍 떠나서, 윌리암 캐리가 자기 가족과 처형의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상황에서, 다니면서 선교만 이야기하고 다니니까 자기 부인이 화가나서, 윌리암캐리가 선교사로 갈 때 같이 가지 않았다. 물론, 임신중이었으므로 공포감과 선교에 대한 거부감도 있어서 안갔다. 그래서, 윌리암캐리가 맏아들을 데라고 갔는데, 배가 고장나서 돌아왔고 부인은 조산을 하게되어 결국은 같이 떠나게 되었다. 어쨌던 부인은 선교에 대한 열정이 없어, 인도에서 정서적 장애를 일으키고, 심각한 정서 장애를 일으키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아버지도 윌리암 캐리가 정신이 이상하다고 걱정을 했고, 그에게 안수를 주었던 목사도, 목사의 모임에서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했을 때, 젊은이여 앉아라(young man sit down),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한다면 당신이나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핀잔했다. 이 말이 논리적으로는 맞지만 신학적으로 틀린 것이다. 그런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항상 사람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시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은 맞지만, 실제로는 틀린 것이다. 그에게는 한 번도 30년간 안식년이 없었다. 그의 비문에 이렇게 적혀있다. 그가 자기 동역자들에게 내 비에 이렇게 새기라고 부탁한 것이다. 찬송가의 한 구절이다. “천하고 불쌍하며 무력한 이 벌레는 당신의 친절하신 팔에 안겨 여기 누워있습니다.” 모든 반대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견디면서 한 번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척박한 인도에서 30년을 선교했던 이 사람이 죽으면서 남긴 이야기가 이것이다. 그의 겸손이다. 어떤 사람이 말년에 그를 찾았다. “다니면서 내게 대해서 이야기할 것 없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잇다. 그렇기 때문에 윌리암 캐리가 위대한 선교사다.

 

 

 

구둣방 청년이 어떻게 이런 선교의식과 지식을 갖게되었는가에 대한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제임스 쿡이 쓴 여행기다.  The last voyage of captain cook

 

그것을 읽고 깨달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세계가 광대하고 많은 나라가 있고 많은 인종이 산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복음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둘째는, 그의 성경적 확신이다. 이 모든 사람들이 이 상태로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확신과 안타까움. They are all hidden.

 

셋째는, 요한 웨슬레의 부흥운동이 영향을 끼쳤다. 회개. 인간의 삶에 대한 영적 해석 그것이 선교의 필요성과 연결된다. 세계가 나의 교구다. 웨슬레 정신에는 그런 비젼이 있다. 교회가 제도화되어 버리면 내 교구가 나의 세계다. 이렇게 되면 교회가 위축된다. 굉장히 위험한 것이다.

 

넷째,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드 부흥운동을 통해서 들어온 선교적 성향이 강한 설교들을 들은 것이 중요한 요인이다. 죄, 회개, 구원....

 

다섯째,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David Brained 생애와 일기. 그는 1718-1747 산 사람. 젊어서 요절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예일대학에 다니다가 퇴학당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부흥운동을 통해서 영적 각성을 하고 열심히 전도를 하게되는데, 자기가 다니는 예일대학 교수들이 영 형편없는 것 같아 공박하고 공격하니까 그 결과가 쫓겨난 것이다. 예일 대학에서 퇴출 당하고 이 사람이 미국 인디안들에게 전도를 했다. 말타고 다니면서... 몸이 약했다. 폐렴에 걸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에게 와서 그 집에서 치료를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이 책을 쓴 것이다. 이 책은 번역되어 있다. 스물 아홉에 죽은 것인데, 왜 조나단 에드워드가 썼느냐? 그가 쓴 이유는 그의 부흥운동의 작품이기도 하지만, 조나단 에드워드의 딸이 브레이너드를 간호를 했다.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데, 브레이너드가 죽고 그의 딸도 폐병에 걸려서 죽게되었다. 그래서, 이 책을 쓰게된 것이다. 윌리암 캐리가 이 책을 읽고, 기름을 한 바가지 부은 것 같은 상황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선교를 할 때 우리 자신이 뭘 이루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인본주의다. 농사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하는 것이다. 50년 후, 100년 후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세계선교란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란 것은 주님 오실 때까지 전세계적으로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선교사역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자기업적을 위해서 자꾸 무리하는 것은 인본주의다. 윌리암 캐리에게 브레이너드의 사역이 세월이 지나고 충격을 주는 것이다. 데이빗 리빙스톤이 위대한 선교사라고 하지만, 그가 당대에 자기의 사역을 통해서 개종한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었다. 30년간 아프리카 선교의 결과로 한 사람 개종한 것이다.

 

그의 책의 요지는 그런 것이다. 나는 복음 전하기 위해서 혹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타는 헌신과 열정을 가지고 전도한 것이다.

 

여섯째, 찬송가들이 윌리암 캐리에게 대단한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찬송이 52장 햋 빛을 받는 곳 마다... 이 것이 당시 영국에서 부르던 찬송이었다.

 

그 다음에, 광범위한 영향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면, 당시 영국이 세계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고, 많은 사람들이 외국으로 외국으로 나갔다. 개척정신, 해외에 대한 호기심. 위리암 캐리도 그런 시대적 분위기를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종의 낭만적인 호기심이 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런 낭만적 호기심이 있었는데, 선교적 열정으로 연결시키지 못했는데, 윌리암 캐리에게 그것이 가능하게 했던 요인들이 위에서 열거된 것이다. 그의 모든 성경지식을 주님의 자상명령과 연결시킨 것이다.

 

윌리엄 캐리는 윌리암 쿡의 글을 읽고 세계지도를 그리고, 그것을 자기 책상에 붙여 놓고 늘 보면서 기도하고, 선교의 비젼을 불태웠다.

 

 

 

2) 선교사역

 

이교들의 개종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에 대한 연구 An Inquiry into the Obligation of the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 라는 책에서 다룬 내용임

 

 

 

첫째는, 신학적 견해는 주님의 지상명령에 대한 해석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상사명은 예수님 당대에만 적용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그것을 반박했다. 만일 지상명령이 예수님 당대에만 적용된다면 우리에게 모순이 있다. 왜 우리는 지금 세례를 주고 있는가? 그 세례도 초대교회로 끝나야 하지 않는가? 세례를 안주는 교단이 옳은 것 아닌가? 우리가 세례를 주면서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것은 모순이지 않는가? 그리고 임마누엘이다.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둘째는 역사적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교회역사를 보면 사도들이 나가서 선교를 했다. 이미. 또 유럽이 복음화 될 때 선교활동이 있었다. 예수회가 선교한 것도 거론하고 있다. 브레이너드, 경건주의자, 모라비안을 언급한다. 그러면, 사도들이나 모든 선교사들이 불필요한 일을 한 것인가? 무의미한 일을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영국교회가 사도들의 선교활동을 찬양하고 역사적인 선교활동을 평가하면서도 왜 우리는 선교를 해서 안된다는 것인가? 안 해도 된다는 것인가?

 

 

 

셋째는 세계의 종교적 현상을 지적한다. 유럽을 제외하면 이교도들의 세계다. 기독교인의 수보다 이슬람이나 다른 종교의 수가 훨씬 많은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것을 전하지 않는다면 인도적인 측면에서도 문제다.

 

실제적으로 선교를 반대하는 이유를 보면, 거리가 멀다. 언어를 모른다. 그들은 미개하므로 선교가 필요없다. 위험하다. 필요한 여건들을 구비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선교를 안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목사는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이런 소신이 있었기 때문에 기회 있을 때마다 선교에 대해서 주장했다.

 

 

 

1792년 5월 30일 노팅햄에서 침례교 교역자 회의가 있었는데, 이사야 54장 2-3절 본문으로 설교했다. 역사가는 그 설교를 기념비적 설교라고 말한다. 윌리엄 캐리의 가장 유명한 설교라고 말한다. 그의 설교중에 우리가 아는 유명한 말을 했다. Expect the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the great things for God.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것들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것들을 시도하라.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그의 말 가운데 가장 유명한 말이다. 당시 목사들은 조금도 감동하지 않았다. 훌륭한 설교가 뭐냐? 후대의 사람들은 이 설교를 통해서 많은 감동을 받고 도전을 받았다. 윌리암캐리는 이 설교를 위해서 많은 준비를 했고, 이 회의에서 선교회를 조직하고 선교활동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그해 10월 2일 열두 명의 목사와 한명의 평신도가 모여서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서 윌리암 캐리가 선교회를 조직하고 선교를 하자고 했다. 그러나, 그 목사들이 작은 교회의 목사들이었다. 그들이 힘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윌리엄 캐리가 그들에게 모라비안들의 선교 보고서를 보여주었다. ... 여러분도 믿음으로 이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울면서 설득했다. 이 책을 읽고 윌리암 캐리의 도전에 감동해서 선교회를 조직했다. The Baptist Missionary Society.  그 회칙에 보면 그들이 자기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선교비를 냈다. 13파운드 2실링 6펜스 이것이 최초의 선교회 기금이었다. 당시의 가치는 윌리엄 캐리가 구두수선공으로 공장에서 일할 때 월급이 10파운드였다. 그러므로, 가난한 직공이 받는 월급 수준이다. 윌리엄 캐리가 1792년에 조직된 위 선교회 파송으로 1793년에 인도로 간 것이다.

 

 

 

 

 

윌리암 캐리가 주장한 선교의 원칙

 

첫째, 선교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최대한 광범위하게 많은 전도자를 파송해서 전도해야 한다는 원칙을 주장했다. 자신도 자신의 가족도 미얀마까지 보내서 전도했다.

 

둘째, 성경을 원주민 말로 읽도록 해야 한다. 성경이 없이는 그 지역을 복음화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다. 성경이 없으면 두 가지 중의 하나가 일어난다. 하나는 혼합주의에 빠지고, 아니면, 교회가 없어진다. 성경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세계 어디를 가든지, 교회가 영적으로 살아있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예배 드리러 올 때 자기 성경찬송을 가지고 오느냐 아니냐를 보면 알 수 있다. 요새 이런 경향이 한국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 채플에서도 성경 안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다. 심각한 증상이다. 신학교 채플에 신학생들이 예배 드리러오면서 성경 찬송을 안가지고 온다. 심각한 증상이다. 암초기다. 로마 가톨릭 선교와 개신교 선교의 차이는 성경번역에 있다. 얼마전까지 가톨릭은 평신도는 성경 필요 없다. 라틴어로 미사를 드렸다. 한가지 더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는데, 요새 우리가 성경 본문 읽겠습니다. 몇 페이지입니다. 이것도 중풍, 고혈압, 저혈압의 증상이다. 왜 페이지수를 이야기하는가? 전에는 안 그랬다. 부흥하는 교회에서는 그런 것 듣지도 보도 못했다. 몇 년 전까지 이런 것 안 했다. 좋지 않은 것이다. 교인들이 평상시에 성경을 잘 읽으면 금방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윌리암 캐리 자신이 사역 30년 동안 6개 언어로 신구약 완역, 23개어로 신약 완역, 사전을 만들고 문법책도 썼다. 윌리암 자신이 뱅갈어, 산스크리트어(?), (      ) 등 3개 언어를 능통하게 했다. 위클립 성경 번역회가 최대 개신교 선교단체다. 한 5-6,000명 되고, 아직도 성경을 번역하고 있다. 아직도 성경 번역이 안된 족속들이 많이 있다. 수 천년동안 글을 안 읽고 산 사람들은 글을 안배우려고 한다. 온갖 선물을 주면서 글을 가르켜서 성경을 읽게 하는 것이다.

 

셋째로, 윌리암 캐리는 원주민 교회를 빨리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도 현지에 교회를 세웠다.

 

넷째로, 현지 사역자들을 빨리 배출해야 한다. 그래서, 현재 원주민 교회 지도자 양성을 위해서 대학을 세우고, 훈련했다. 그러나, 선교의 목표는 역시 인간영혼구원에 있다.

 

또 윌리암 캐리도 역시 복음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는  현지인들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사역했다.

 

 

 

이렇게 윌리암 캐리가 인도로 떠난 것이 충격을 주었고, 계속적으로 선교 보고를 한 것이 영국 교회와 주변 국들을 자극해서 선교회 조직과 파송을 촉발시켰던 것이다.

 

 

 

 

 

3. 미국교회의 선교

 

19세기를 선교역사가들은 위대한 세기라고 부른다. 그 직접적인 이유는 라토렛 교수가 세계 교회사를 일곱권으로 썼는데, 일곱권 중에 마지막 세 권을 19세기에 대해서 썼다. 그 만큼 선교운동의 분량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914년까지의 선교역사를 기록할 때 3/7이 19세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19세기를 The Grace Century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가령,

 

 

 

이 시대에 가장 역사상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복음 선교운동이 전개되었다는 면이 있고, 19세기 서양선교는 비자문제가 없었다.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 가장 광범위하게 선교사들이 갔고

 

 

 

또, 위대한 선교사들이 많이 배출 활동했고, 윌리암 캐리, 져드슨(30년간 미얀마 선교, 한 때 정서장애가 있을 정도로 고생을 많이 했다. 요새말로 영성으로, 매일 3시간 마다 기도했고 한다. 평소의 경건 단련으로 그 위기를 극복했다고 한다. 미얀마 선교하다가 거기서 죽었다. 배타고 가다가 죽었다. 시체를 물에 던졌다. 무덤은 있으나 시체는 없다. 6년만에 첫 개종자를 얻었다. 그가 죽을 때는 3천명 정도, 지금 미얀마의 소수민족인 카얀, 지금은 박해를 받고 있다) 데이빗 리빙스톤,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 묻힌 유일한 선교사다. 그가 묻히게 된 과정이 중요하다. 그는 정글 속에서 죽었다. 토인들이 일어나 보니까 침상에 머리를 파묻고 세상을 떠나 있었다. 기도하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계속해서 열병을 앓았다. 그는 20회 이상 열병을 앓았다. 열대지방의 열병은 굉장한 것이다. 나도 열병을 한 번 앓아봤다. 굉장히 춥고 그 뜨거운 곳에서 떨리고, 댕기라는 열병이란 것이다. 열대지방에 유행하는 골통 열병이라고 사전에 나와있다. 낮에는 열꽃이 피고... 후유증이 오래가는 병이다. 사자에게 물리고, 정글 속의 유일한 백인이었다. 가족과 떠나서 10년을 지나서 처음으로 안식년을 갖고... 사람들이 물었다. 정글에서 무엇이 가장 힘드는가?  리빙스톤이 고독이 가장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수고한 것이 없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우리가운데 누가 감히 그리스도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고생을 했다고 말할 사람이 있는가?” 그런데 죽었다. 토인들이 시체를 열고, 창자를 다 꺼내 묻고 난 뒤, 시체는 말려서,  마른나무로 싸서 런던까지 가지고 온 것이다. 그의 묘지에는 “신실한 사람들에 의하여 육지와 바다를 건너온 탐험가 자선사업가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톤 여기에 잠들다.“ 라고 기록되었다.  그가 생전에 한 사람을 개종시켰다. 그의 사역을 통해서 그 후에 얼마나 많은 풍성한 열매가 있는 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허드슨 테일러(그 때는 서양의 선교 기운이 조금 떨어졌다. 1865년에 중국 내지 선교회를 만들었다. 상해에서, 분위기가 조금 깔아 앉았다. 많은 선교하던 교회와 선교회들이 예수님의 재림이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다고 생각했다. 복음이 거의 중요한 지역에 전파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종말이 온다고 생각하고 선교 기운이 떨어진 것이다. 그 때, 그가 China Inland Mission을 만들었다. 그래서, 후기 역사가들이 허드슨 테일러까지를  The Era of Coast Land 라고 말했다. 허드슨 테일러는 선교가 끝난 것이 아니라 내지가 남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매우 독특한 선교사였다. 우선, 이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중국식 변발과 중국식 복장을 하게 했다. 많은 비난을 받았고, 이 것 때문에 선교회에 못 들어온 사람도 있다. 모든 선교회들은 본부가 자국에 있었다. 그러나, 이 내지 선교회는 본부가 상해에 있었다. 파격적이며 탁월한 선교 전략가였다. 그 다음에, 그가 위대한 점은 한 번도 자기들의 정책이 교회와 사람들에게 선교비를 요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중국내지 선교사들이 사역했다. 그런데, 정책은 선교비를 요청하지 않는 것이었다. 내버려두는 것이다. 기도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만 하는 것이다. 자신해서 가져오는 것은 받는다. ”만일 내가 어제 헌금 주머니를 돌렸다면 이 사람이 많이 했어도 5파운드를 헌금하고 중국선교를 위해서 헌금했다고 생각하고 중국 선교를 잊어 버렷을 것이다. 그러나, 헌금 바구니를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께서 감동시키셔서 500파운드를 헌금하게 했고, 아마 평생동안 그가 중국선교를 잊지 않았을 것이다“ ”허드슨 테일러가 무릎을 꿇지 않고 중국 대륙에 태양이 떠오른 적이 없었다.“  Faith Mission 이라고 말하는데, 사람에게 선교비를 의존하지 않는 선교회란 뜻이다.) 마펫, 언드우드 다 훌륭한 선교사들이다. 마펫 목사님은 탁월한 선교사였다. 배위량 목사님이란 분이 계셨다. 이 분이 말했다. ”마펫은 어떤 분야에 나갔더라도 출중한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위대한 선교사들이 19세기에 배출되었다.

 

 

 

위대한 대가를 지불한 세기이기 때문이다. 많이 나갔기 때문에 많은 대가를 지불했다. 돈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인명을 이야기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죽었고 선교가 힘이 들었다. 여행의 위험. 선교지까지 가는 것, 그 지역에서의 이동에서 여행의 위험, 풍토병, 대부분의 지역에서 복음에 대해서 저항했다. 져드슨이 6년 걸렸고, 로드 모리슨은 중국에서 7년만에 첫 개종자를 냈고, 태국에 갔던 선교사들은 침례교는 그냥 철수하고, 장로교는 16년만에 첫 개종자를,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선교를 했다. 1900년 의화단 사건이 났을 때 중국에서 186명의 선교사와 가족들이 살해당했다.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도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다음에, 미국선교 때문이다. 미국 국가와 교회역사가 짧기 때문에 과거 선교의 역사는 없다. 1880년부터 본격적으로 선교에 들어오는데, 미국교회의 선교가 위대한 세기를 창출하는 것이다.

 

 

 

 

 

4월 28일 선교신학 강의

 

 

 

우리가 미국교회의 선교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19세기가 위대한 선교의 세기였다.. 몇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미국교회혹은 미국의 선교회들이 선교에 동참하게 된느 것이 19세기 특별히 말에 있었던 것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 19세기 중엽이 지나면 유럽의 선교가 이미 땅끝까지 이른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에 침체를 하는데, 중국내지선교회를 통하여 선교운동이 계속되는 가운데, 미국교회가 선교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큰 사건이 기여를 했다.

 

하나는, Haystack Prayer Group 라고 말하는데, 미국 매사츄세츠주의 윌리암스 williams 대학의 다섯명의 학생이 선교기도모임을 정기적으로 모였다. 미국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기원을 이 그룹으로 두는데, 1806년 8월 2일 이사람들이 학교 단풍나무 밑에서 정기적으로 기도회를 했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피한 곳이 건초더미이다. 그 때 그 중에 한 사람이 이런 영감을 들었다. 위 캔 두 이프 위 윌, 지금까지는 기도하고 토론만 했는데, 자기들 스스로 헌신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하면 되지 않는가 라고 뜻을 모으로 미국 회중 교회에 자기들의 뜻을 전달하고, 이들을 졸업 후 엔도버 Andover 신학교로 갔다. 하바드에서 분리된 작은 신학교이다.  원래 하바드가 교역자 양성을 위해서 세운 학교인데 세속화되자 이 신학교가 갈라져 나간 것이다. 여기서 이 사람들과 다른데서 온 선교에 열의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선교에 대한 비젼을 계속 키우고, 졸업 후 1812년 선교사로 떠난 것이 미국 선교운동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8명이다. 그중의 한사람이 져드슨이다. 이들이 선교사로 가는데, 예정된 일자에 떠나지 못했다. 선교비가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국제적 송금이 안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선교사가 떠날 때는 적어도 1년치 선교비를 가지고 떠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그해 2월 24일 떠나게 되었는 것이 미국선교이 시작이다. 처음 미국교회로서 선교한 것은 회중교회다. 이들을 주축으로 선교한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대단히 중요한 사건은 S. V. M. Student Volunteer Movement 19세기 말에 일어난 학생자원 운동이다. 1880년대 말에 미국의 동북부에서 처음 일어났는데, 1886년 7월 6-8월1일 매사츄세츠의 마운트 헐몬에 250(251) 90(87)개 미국과 캐나다의 대학과 신학교 학생들이 모여서 신앙 수련회를 했는데, 주강사가 D.L. 무디였다. 이 하기 수련회가 미국교회를 선교적인 교회로 탈바꿈 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19세기를 위대한 세기로 만드는데 있어 마지막 폭발적인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모임은 선교를 위한 모임은 아니었다. 그냥 성경공부위주로 하는 사경회였는데, 여기에 몇사람이 선교에 대한 비젼과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프린스턴에서 몇 사람이 21명 정도가 주축을 이루었다. 그 모임중에 선교를 위해서 계속기도했다. 무디 선생이 성경공부를 기본적으로 인도했지만, 특강 강사들은 선교사들과 선교운동가들이 특강을 많이 했기 때문에 자연히 선교적인 의식이 고취되는 그런 성격을 뛰었다. 가령 몇 가지 예를 든다면, 7월 16일 아더 피어슨 A. Pierson, 이분은 선교사로 활동한 분은 아니었으나 미국에서 선교운동을 일으킨 장로교 목사님인데, 마지막에 침례를 받아서 규제를 당하기도 했다. 그양반이 와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선교에 대한 강연을 하시면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All should go, and go to all. 모두가 가야하고 모두에게 가야한다. 7월 23일 meeting of the ten nation 이라는 모임이 있었다. 그해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선교사의 아들들이 있었다. 중국과 인도와 이란, 이 사람들이 자기 아버지가 사역하는 선교지에 대한 연설을 하고, 거기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일곱명이 7개국어로 3분간 연설을 했다. 분위기가 선교적으로 고조되었다. 닥터 애쉬모어 Dr. Ashmore 라는 사람이 밤에 설교를 했다. 그 설교 가운데 유명한 한마디가 남아있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를 제시하라.Show me if you can, why you should not obey the last commandment” 그날밤의 참석자들은 무겁고 깊은 침묵가운데 그 집회를 끝냈다. 그리고, 조용히 그 홀을 떠났다. 그리고 그날 밤에 잠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압도된 것이다. 그래서 아무말도 못한 것이가. 그리고, 가서 그날 밤 삼삼오오로 기도한 것이다. 우리 예배 끝난 후에 소란한 것은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다. 이들이 7월6일부터 8월1일까지 마운트 헐몬에서 모임을 갖고 헤어질 때, 앞으로도 계속 모임을 갖고, 우리가 받은 은혜를 미국의 각 신학교와 대학에 가서 간증을 하고, 내년에 모인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대표를 뽑자고 이야기해서 실천했고, 그리고 기도하던 사람들은 그해 말까지 100명이 가입하여 기도했다. 88년 지나면서 이것이 조직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컨퍼런스의 오리지날한 열정과 비젼이 퇴색될 우려가 있다. 또 다른 여러 단체가 있는데 그런 단체들과의 중복, 조화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1888년이 지나면서 “학생자원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위대한 구호를 이들이 많들었다. “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 지금 이 세대에 전세계에 복음을 전한다. 지금까지도 많은 선교대회에서 그래도 인용하고 주장하는 구호이다. 이것을 인용함으로써 자기들이 19세기 위대한 선교운동의 주류라고 과시하려고 인용하는 중요한 말이다. 이 구호가 위대한 구호인데, 누가 처음 이 말을 하기 시작했는가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어슨의 작품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어 사용국의 학생들이 위주가 된 것이기 때문에, 독일 선교학자들은 처음부터 비판적이었다. 너무 낙관적이고, 낭만적이라고 독일선교신학자들은 그런 견해를 피력했다. 지금까지 논란이 되는 문제란 this generation이란 말의 원래적인 의미가 무엇인가? 자기들의 세대인가 혹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세대에 비젼을 가져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논란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19세기 말 그들의 세대를 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땠던, 대단히 중요하고 유명한 구호이다. 이 학생자원운동이 매년 컨퍼런스를 하고, 끝날 때 소위 자원서약을 했다. 그것을 강제로 한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대로, 서약을 하게 했다. 내용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제가 선교사가 되겠습니다.if God is willing, I will be a missionary.”  그것이 이 서약의 내용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1920년대 중반까지 이 학생자원운동을 통해서 해외로 나간 선교사의 수가 2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또 이 운동에 동참했던 멤버로서 기도와 선교를 후원한 사람을 합하면 10만명 정도가 선교에 헌신했다고 평가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제2의 오순절 운동이었다고 평가한다. 우리 나라에 왔던 초기 선교사들 가운데, 마포삼열, 평양신학교의 교수 선교사들, 아담스, 게일 등은 이 학생자원운동과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20세기 개신교 선교는 미국선교라고 할 만큼 압도적이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몇가지 이유가 이 두 가지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생자원운동의 근원에는 그리고 추진하는 힘 가운데는 D.L.무디가 있었고, 그의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이같은 운동이 사실은 가능했던 것이다. 그 외의 또 몇 가지 다른 이유를 든다면, 세계적으로 평화를 유지한 시기라는 것과 둘째, 식민지 확장으로 인해서 서구의 경제수준이 향상되어 중산층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며, 그들을 위주로 교회 선교비가 많이 들어왔고, 그 다음에 교통수단의 변화,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선교사들의 수송, 물자의 수송이 상당히 편리해졌다는 것이다. 한국에 선교사로 온 사람들의 대부분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왔다. 장로교 신학교에서 동쪽에서는 프린스톤이 역사가 있고, 서부는 샌프란시스코가 100년 이상으로 역사가 오래되었는데, 기선의 주인이 엄청난 돈을 샌프란시스코 신학교 건축에 헌금했던 것이다.

 

 

 

현대 선교신학의 발전 과정

 

우리가 20세기 100년동안 발달해 온 선교신학은 지금 우리가 이야기해온 20세기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가 되어서 더 구체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있고, 크게 말하면 20세기 선교신학은 몇갈래로 나눠져서 발전했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그리고 60년대 들어서면서 갈라지는데, 크게 말하면 로만 가톨릭 선교신학이 있고, 동방정교회 선교신학이 있고, 프로테스탄트 선교신학이 잇는데, 이것을  세분하면, 에큐메니칼, 이반젤리컬, 펜타코스탈(제3의 세력) 선교사상으로 세 갈래로 대별할 수 있다. 우리끼리 이야기하면 또 한가지 더 통합적 선교사상이다.

 

 

 

A. 에큐메니칼 선교사상

 

간단히 살펴보자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에큐메니칼 혹은 이밴젤리칼 선교사상을 이야기할 때, 선교대회 위주로 개관하는 것이다. 선교신학은 특히 context와 불가분리의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사건들에 따라 엮어져 있는 것이다. 선교대회를 위주로 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하는 것인데, 에큐메니칼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1910년 에딘버러의 세계선교대회다.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모였는데, 6월 14-23, 역사상 최초의 세계적인 기독교 대화였다고 말해진다. 어떤 유로든지 이것이 최초로 세계교회가 무인 대회였다는 것이다. 그전에도 물론 소규모의 선교대회는 있었다.

 

 

 

첫째, 배경을 생각해보면, 모이게된 요인들인데.... 첫째는 1806년 5월에 이미 10년 주기로 선교대회를 모이자는 제안들이 당시 선교지도자들 가운데 있었다. 그것이 성사된 것이 1910년이다. 구체적으로 인도, 중국, 일본, 아프리카, 멕시코 지역의 선교사들이 이 모임을 협의하고 구체적으로 이 모임을 주선했다. 둘째, 기독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이다. 이제 기독학생운동을 통해서 선교사들이 여러 지역으로 퍼져 가는데 선교에 대한 협력의 문제가 논의될 수밖에 없었다. 셋째, 외부적인 요인으로 기독교 선교에 대한 위협을 몇 군데서 느끼게 된 것이다. 중요한 지역들을 보면 1900년의 중국의 의화단 사건(186명 살해됨), 아프리카 특히 중부 아프리카 이남에 강력하게 퍼져가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대책 마련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민속신앙, 토착신앙에 대한 문제, 정령(animism)으로 말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우상을 어떻게 선교적으로 처리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들을 현지 선교사들이 관심을 가지는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둘째로 특징을 보면, 첫째로 철저히 서구 선교회들의 모임이었다. 본토인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20세기가 시작될 때 세계기독교 인구의 85%가 백인이었다고 한다. 두 번째, 이 대회가 매우 낙관적인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고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딘버러 문서가운데는 진군, 전진, 승리, 십자가 군병 이런 말들이 많이 나온다.

 

왜 낙관적인 분위기를 가지게 되었는가? 영국의 유명한 선교학자 스테판 닐(S. Neill)이 이유를 설명했다.

 

1. 우선 닐의 이야기를 보류해 두고 우리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큰 배경 하나는 그 시대가 낙관적인 시대였다. 철학이나 교육학이나 낙관론이 주도가 된 시대적 배경이 있고, 둘째 실제적으로 모일 수 있도록 한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학생자원운동이다. 그 회장이었던 죤모트가 대회장이 된 것이다. 그는 평신도지만 걸출한 교회행정가고 전략가였다. 계속해서 선교대회 의장이 되었다. 기독교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사람인데... 학생자원운동의 구호가 낙관적인 선교운동이었다.  

 

2. 닐의 구체적인 설명을 보면, 이 때 선교운동가들은 20세기가 끝날 때쯤이면 다른 종교들이 세계에서 거의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낙관적이었다는 것이다.

 

첫째, 선교사의 수가 급증했다. 전시대에 비하면 엄청난 선교사들이 활동했다는 것이다. 1810년대 세계 선교사의 수가 300명 정도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1910년에는 21000명 정도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정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엄청난 수가 사역하게 된 것이다. 이 선교대회에 모였던 정식 대표만 1200명이다.

 

둘째, 이 때에 유지되었던 세계적인 평화.. 로마의 평화시대에 바울이 선교해서 기독교의 기초를 닦았다고 하는데, 이 때 유럽 대륙에 전쟁이 없었고, 피선교지 내에 심각한 부족 전쟁이 많이 종식되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의 안정과 활동이 훨씬 나아졌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씀하신 것 가운데 유대인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이런 말씀이 있는데, 초기 선교사들 가운데 여행으로 많이 죽었고, 또 돛단배를 타고 행해하는데 유럽에서 오면 6-7개월 걸리는데, 전염병에 걸리거나 현지인들에게 살해당하거나 이런 것이 많았는데, 평화가 상당히 정착되었다.

 

셋째, 의약품의 발명이다. 선교사들의 치사율이 낮아졌다. 처음에는 아프리카 선교사들의 경우 2년 이상 사는 사람들이 없다고 했다. 19세기 초 아프리카에 들어가기 시작했던 영국의 선교사들은 거의 현장에서 죽었다. 얼마 못살고 현지에서 죽었다. 의약품이 발명되니까 수명이 많이 연장되었다. 19세기의 위대한 선교사들은 결혼을 자주 했다. 왜 그러냐? 어떻든 일을 많이 한 선교사는 다른 선교사에 비해서 사역이 대개 길다. 그런데, 그런 몇 분들은 오래 사역했는데 그 부인들은 오래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넷째, 성경번역이 진전이다. 개신교선교운동의 핵심은 우선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었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1910년에는 자기 생각에 세계 중요한 말로는 성경이 번역되었다고 혹은 거의 완성단계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 성경을 가지고 선교에 전력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섯째, 타종교의 약화. 아시아 아프리카가 서구의 식민지가 되면서 그들의 종교도 약화현상을 보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세계의 대부분의 종교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섯째, 선교단체, 선교프로그램의 강화와 다양화. 의료시설을 통한 선교, 교육기관 설립을 통한 선교를 하게된 것이다. 선교비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구교회 교인들의 경제수준이 확대되었고, 중산층이 많아졌고, 선교헌금이 들어오고, 무디 부흥운동을 통해서 교회가 부흥하고, 학생자원운동을 통해서 선교열이 고조도었기 때문이다. 포괄적인 선교사역을 하게되었다는 것이다.

 

일곱째, 대학 캠퍼스 안에서 일어난 선교운동. 이것은 학생자원운동의 직접적인 영향이다. 그전에는 적지 않는 선교사들이 대학졸업생이 아닌 경우도 있었고, 또는 가난한 집안 출신들이 많았다. 그리고, 작은 대학 출신들이 많았다. 그런데, 학생자원운동을 통해서 상류층 학생들, 유명한 대학들 안에도 선교운도이 일어났다.

 

여덟째, 교회의 선교참여이다. 교회에서 선교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개신교선교는 소달리티 선교회 중심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기성교회는 냉담했는데, 건초더미...를 통해서 미국 교회가 선교에 점점점 들어와서 협조적이 되었기 때문에 희망적으로 보게되었다.

 

아홉째 교파간의 협조하는 분위기를 보였다. 선교운동을 통해서 위해서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고 그 가능성을 본 것이다. 에큐메니칼 시발점을 에딘버러 선교대회에 두는데, 이것은 에큐메니칼을 위한 모임이 아니고 선교를 위한 모임이었으나 선교를 위해서 교회일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열째, 현지 선교사들에게 일어났던 낙관적인 의욕이다. 이전 선교사들은 위험과 고립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당시 선교사들은 그들의 전 시대보다는 위의 아홉 가지 요인으로 인하여 조건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선교의욕이 많이 고취되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사기라고 할까. 소외와 고독... 선교사들은 지금도 어디서 어떤 사역을 하는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몇 가지 어려움이 있다. 첫째는,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슬픔이다. 가족들이 다 반대한다는 것이다. 둘째, 현지 선교사들은 고독하다. 리빙스톤은 고독이 제일 힘들다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근본적으로 고독의 문제가 있다. 한국사람들이 많아도 고독하기는 마찬가지다. 선교사이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다. 차라리, 교인들은 선교사에 대해서 관대하다. 그러나, 예수 안믿는 사람들은 선교사에 대한 기대수준이 슈바이쳐 혹은 데레사 정도를 기대한다. 그래서, 소외감을 느낀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Why me? 라고 말한다. 그런것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때를 따라 위험하다는 것이다. 19세기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전시기 보다는 좀 좋아졌다는 이야기고, 선교사들이 사기가 높아졌던 것이다.

 

 

 

 

 

 

 

5월 12일 선교신학 강의록

 

에큐메니칼 선교사상의 발전

 

1910년 에딘버러대회 대단히 낙관적인 분위기에서 시작되었고, 그 이유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에딘버러의 특징은

 

한마디로 선교전략회의 였다. 선교는 해야한다는 데는 별로 이의가 없었고 다만 어떻게 선교하느냐에 촞점을 맞춘대회였다.

 

그리고, 선교역사가들은 모든 선교대회 가운데 가장 그리스도의 왕권이 강조되었던 대회였다. 전진, 정복, 군병 이런 군사적인 말들이 많이 나왓다.

 

다음에, 그 때 논의되었던 중요한 신학적 요점들이 무엇인가?

 

첫째, 구원은 개인적 개종, 회심에 의해서 되는 것으로 개인의 변화, 개인 구원에 초점

 

둘째, 사회도 개인의 변화로 변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선교이 목표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 구원을 기초로 하는 것이다.

 

셋째, 이같은 개인구원과 사회변화를 위해서 교회가 선교의 기본적인 기구라고 생각했다.

 

넷째, 그러므로, 지역 교회의 선교적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크게 말하면 국가의 교회를 이야기하고, 작게 말하면 지역의 교회를 이야기한다.

 

다섯째, 교회가 선교적인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어야 한다. 순수한 교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조된 것이 교육문제다. 교육을 통해서 현지인들을 각계의 지도자로 육성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소위 mission school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순수한 교회의 중요성 때문에, 그 지역의 종교, 특히 정령론에 대한 논의를 많이 했는데, 애니미즘은 일종의 민속종교라고 결정했고, 악령에 대한 공포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이것을 그대로 신봉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같은 관습을 계속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여섯째, 타종교문제와 관련해서는 기독교의 절대성, 그러나, 타종교에도 부분적인 진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따라서 타종교가 일종의 접촉점이 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잇었다.

 

일곱째로, 이 대회를 통해서 기독교 세계가 분명한 이분법적인 개념을 갖게 되었다. 기독교 세계와 비기독교 세계로 양분하고, 기독교 세계의 책임은 비기독교 세계를 복음화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대회의 영향, 결과

 

첫째, 20세기 그리고 그후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기초를 만들었다.

 

둘째,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일치의 비젼을 제공했다. 일체감을 느끼게 하고 일치를 위한 비젼을 제시했다고 말할 수 있다. 종교개혁이후 개신교 교파들이 잘 협력을 못했는데, 교리논쟁으로, 세계복음화란 거대한 과제를 놓고 우리가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고, 이대회가 교회일치를 위한 대회는 아니었지만 부산물로 교회일치를 위한 생각과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엇다는 것이다.

 

셋째, 세계교회에 세계선교의 비젼을 제시했다. 끝날 때 메시지를 많이 보냇다. 그 가운데 보면, 앞으로 10년이 카이로스다. 세계복음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시기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가 세계선교에 진력해야 한다. 이 시기를 놓치면 안된다. 이런 메시지를 많이 보냈다. 특히 이 운동의 회장이나 지도층이 student volunteer movement 였기 때문에 세계의 서방의 청년들에게 선교의 비젼을 심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19세기와 20세기초에 개신교를 위대한 세기를 창출케 했던 경건주의자들의 선교적 열의가 냉각되기 시작한 기점이었다. 특히, 보수적인 사람들 가운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령 존스톤 같은 사람이 있다. 경건주의자들의 선교정신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던 선교의 기운이 이제 에딘버러 대회를 통해서 선교정치가, 교회정치가들에게 선교의 영향력이 넘어가므로 위대한 세기를 창출했던 선교적 열의가 냉각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어느정도 사실이다. 지금도 그렇다. 교회가 안고 있는 큰 문제는 교회 선교가 선교의 비젼과 열의와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화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너무 지나친 간섭을 받고 정책이 좌우되는 것이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2. 예루살렘 대회 1928

 

1921년 IMC라는 것이 조직되었다.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sel. 이것은 에딘버러 대회가 끝날 때 미결된 안건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것을 처리할 수 있는 계속위원회를 만들어서 그것이 논의하고 해결하도록 했는데, 그 계속위원회가 주축이 되어서 세계교회의 협력을 위해서 위원회가 필요하다고 하여 만든 것이다. 이것이 WCC와 통합되기 전에는 IMC가 선교대회를 주최했다.

 

에딘버러 대회에서 10년주기로 선교대회를 하기로 결정을 했는데, 2차 대회는 1920년에 모여야 하는데, 두 번째 대회는 1928년 모이게 된 것이다.

 

예루살렘 대회의 배경은

 

에딘버러 대회때 가졌던 낙관적인 견해가 분쇄되고 또 낙관적으로 역사가 전개되리라고 생각했던 대로 발전하지 않고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큰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 혁명, 1차 세계대전 이런 큰 유럽의 사건들이 일어낫다.

 

그 다음에 신학적으로 1910년에 다소 기미가 있었지만, 예측하지 못했던 큰 문제로 근본주의 논쟁이 있었다. 미국 장로교회와 중요 교회들에서 일어난 신학논쟁과 교회분열과 그것이 서방교회에 미친 영향이 심각해지는 것이다. 이 신학논쟁이 일어나면서 1910년 대회에 동참했던 중요한 선교단체들이 탈퇴를 한다. 1910년 선교회들의 대회인데, 여기서 대표적인 선교회들 곧  중국내지선교회와 같은 주요단체가 빠져 나가 버린다. 그리고, 서양교회 자체가 영적으로 많이 약화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크게 두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는데, 기구적 교회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그 다음에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이다. 전에 선교사들은 나가서 선교할 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절대적인 진리라는 생각가운데 가르쳤는데, 역사비평등의 영향으로 기구인 교회가 구원의 메시지에 대한 혼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진린가? 구원의 능력이 있는가?를 교회 자체가 의심을 하니까... 교회가 영적으로 약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 대회의 특징은 예수님의 제사장 역이 가장 강조된 대회였다. 왜 선교해야 하는가? Why mission?

 

 

 

주요한 토의 내용들, 문제들,

 

첫째, New evangelism의 대두. 이것은 쉽게 말하면 그전까지면 인간 영혼구원 위주로 거의 일방적으로 이야기된 선교의 목표에 사회적 차원이 포함된 것이다. social dimension or conception.  혹은 comprehensive approach 포괄적인 선교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제적으로 old evangelism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뿌리가 경건주의자들에게 있는 것이고, SVM의 주축들은 다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무디 선생의 부흥운동과 직결되어 일어난 것이 SVM이기 때문이다. 무디가 은혜를 받고 부흥운동을 전개하는데 무디 선생은 그의 부흥운동의 특징이 몇 가지 있는데, 그것을 신학적으로 이야기할 때, 첫째는 인간영혼 구원운동 위주입니다. 그의 성장과정과 사역과정에서 겪은 경험들과 그가 받은 교육과 관계있는 것이다. 무디 선생이 구제의 필요성도 다 역설했다. 그러나, 역시 포괄적인 깊은 교육을 못받은 분이기 때문에 정치 사회의 복잡한 구조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흔히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배 한 척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무디야 이 배를 가지고 나가서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을 구원해라.  그리고, 그의 부흥운동은 전천년설과 직결되어 있다. 후천년설을 믿는 사람들은 사회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졌는데, 전천년설은 영혼구원에 더 집중했다. 이 세상은 불타는 빌딩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가서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한국에 왔던 중요한 선교사들도 거의 이런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마포삼열목사님은 근본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지셨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굉장한 그런 신학적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이 old evangelism을 가졌던 사람들에게는 러시아혁명이나 세계 대전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5월 19일

 

예루살렘 대회에 대해서 계속......특징

 

첫째는, 인간영혼구원, 임박한 종말의식에 젖은 그런 타입의 성교운동이 사회적 차원의 포괄적인 면을 띄게된다. (old -> new)

 

둘째는, 다른 세계 종교에 대한 입장이 에딘버러대회때 보다 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긍정적인 뜻은 아니다. 이전에는 다른 신앙은 마귀가 창조한 악한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런 생각에 비하면 예루살렘 모인 사람들 중에는 보다 관대한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이유는 스테판의 닐의 지적에 의하면 이미 교회자체에 서 복음에 대한 확신이 약화되었다. 그전에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절대 유일의 구원의 복음의 확신을 가지고 전파를 했는데 신학적 논쟁에 이미 말려들어 메시지 자체에 대한 확신이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신학자들 사이에 일어난 타종교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이해가 관대해 졌다고 보고, 셋째는 선교 현장에서 타 종교인들과 접촉을가지면서 선입견, 야만인들이라고 보았던 것을, 상당한 진리가 있다는 이해를 하게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속화에 대한 공동적인 대처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점점 사람들이 신앙이 없어져 가고 하나님을 부정하고 세속화해가는데 기독교든 불교든 종교들이 심리적 유대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좌우간 그 전에 비해서 경건주의자들이나 모라비안이나 SVM 들이 몰고온 이전의 교회나 선교사들에 비하면 많이 관대해졌다.

 

셋째는, 선교의 정의를 살아계신 구주이신 그리스도와의 신앙적 교제를 통한 개인 사회 국가에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만드는 것이다. Production Christ-like Character in individuals, socities and nations. 그전에는 개인변화 위주로 치중되었던 선교관이 사회, 국가를 포함하게된 것이다.

 

넷째로 기독교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그리스도와같은 인격 성품을 만들기 위해서 자연히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나 삶속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christlike living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을 함양하여 전도의 도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대회가 미친 영향

 

첫째, 타종교와 복음의 관계를 서로 관대하게 보는 분위기 조성

 

둘째, 선교의 열의가 냉각되는 결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적 문제다. 복음에 대한 성경의 내용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면서 자연히 일어난 현상이었다. 선교운동의 갈등과 선교개념의 갈등이 생긴 것이다.

 

셋째로, 선교운동의 분열, 선교개념의 갈등에 의해서 일어났다.

 

넷째로, 사회적 개념의 증대, 1920년대까지 SVM이 2만명이상 선교사를 파송하고, 20년대 이후에 약화되는데 그것이 약화된 직접적인 이유가, 성서신학을 위주로한 신학의 변화, 갈등, 분열, 논쟁이 그것이 당연히 선교개념의 갈등을 일으켰고 선교운동을 분열시켰다는 것이다.  SVM은 무디의 임박한 종말론에 근거한 인간구원 위주의 선교였는데, 주된 사상이었는데, 사회적 개념이 확대되고 성경자체에 대한 교회 이해가 흔들이면서 SVM자체도 분열되고 약화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1938년 마드라스에서 모였던 대회 - 세 번째 세계선교 대회

 

Madras 1938(Tambaram) 인도의 도시다.

 

1938년 12.12-29 연말에 모였다.

 

첫째로, 이 대회의 분위기, 일반적인 분위기. 분위기가 중요한 것이다. 현장이 주는 느낌 고민 문제 등이 있기 때문에, 선교대화가 모이면 그 같은 것이 토론과 결론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1938년 마드라스 대회가 모였을 때 세계적인 분위기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난세였다고 볼 수 있다. 세계적 난세였다. 우리가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몇가지 상징적인 사건, 역사적 이야기를 한다면, 첫째는 러시아가 완전히 공산화된 이후였다. 정치적 의미뿐만 아니라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도 심각하고 충격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러시아 정교회하에 있던 제정 러시아가 붕괴하고 무신론자에 의해서, 국민들이 무신론자를지지하고 선호했다는 사실은 선교하는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였다. 그 다음에는 세계 1차 대전의 여러 가지 후유증이 유럽을 중심으로 있었는데 가장 충격적인 것인 히틀러의 등장과 무솔리니의 등장이고 아시아의 일본 군부세력이 팽창하고 있었다. 이것이 중요한 정치적 현상이었다. 그리고,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다음해 여름에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2차 대전 약 반년 전에 이 대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신학적 갈등과 분쟁이 훨씬 더 진전된 때였다.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사이가 훨씬 더 분열된 그런 상태였다. 그러므로, 이 때 분위기는 총체적으로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우울하고 불안하고 당혹감에 젖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이 사람들에게 깊은 우려를 주었던 것은 히틀러의 등장이었다. 기독교국에서 어떻게,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경건주의자들과 모라비안들에 의해서 개신교 선교운동이 일어났던 나라에서 히틀러와 같은 정권이 등장할 수 있는가? 교회가 무엇을 했는가? 하는 문제로 아주 힘든 상황 속에서 모임을 했다.

 

 

 

신학적 내용(특징)

 

에딘버러는 그리스도의 왕권

 

예루살렘은 제사장 직이

 

마드라스 대회는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이 가장 강조된 대회였다. 혹은 증거(witness)에 대해서 강조했던 대회였다.

 

첫째, new evangerlism의 발전. Larger evangelism이라고 한다.  구원의 개념의 영적 내면적 차원뿐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 일어나는 선교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의 정의 자유 평화의 문제를 포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개인이 변하면 사회가 변한다. 이 말은 50%의 진리다. 온전한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동시에 사회가 변하면 개인도 변한다는 말도 50%의 진리다. 개인과 사회가 함께 변해야 한다. 그것이 larger evangelism의 개념이다. 독일의 히틀러 정권 등장의 반성이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드라스의 주장은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회, 정치적 변화의 목표는 사람들의 회개와 개종이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개인이 변화면 사회가 변한다. 사회가 변하면 개인이 변한다는 것은 둘 다 50%의 진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변화와 사회변화의 출발점은 개인의 회심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온 세계에 이같은 사역을 수행할 수 있는 local church가 필요하다. 그렇게 볼 때 이 지구상에는 많은 이 같은 교회를 세워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그래서, 선교는 아직 미완성의 사명 unfinished task로 남아있다.

 

이제 우리가 개인적으로 선하게 살고 싶다고 해도 사회구조가 악하면 곤란한 경우가 많다. 양쪽이 다 변해야 한다는 것이 옳은 말이다. 전쟁 후 독일의 전범을 처벌할 때, 유대인 학살의 실제적인 집행을 했던 자가 몇 년 후에 잡혀서 처벌을 받았는데, 진두지휘한 사람인데, 피고 최후 진술을 요청했을 때, 아이히만이 그렇게 최후 진술했다. 나는 죄가 없다. 나도 사람이다. 처음으로 유대인을 학살했을 때의 이야기를 했다. 폴란드의 산골짜기에서 체포한 유대인들을 학살할 때, 그 때 어떤 젊은 어머니가 갖난 아기를 쳐들면서 이 아기를 살려달라는 것을 보았다. 그의 본능적으로 사격중지를 외쳤는데, 이미 누군구가 총을 쏘아 버려서 아기와 어머니가 죽었다. 나도 괴로웠다. 나도 사람이다. 나는 군대 장교로서 상부의 명령에 복종한 것 밖에 없다. 자기는 제국의 많은 톱니바퀴들이 돌아가고 있는데, 그 사이의 작은 톱니 바퀴에 불과했다. 그래서, 자기가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이다. 명령에 복종한 것 밖에 없다. 그 때 아이히만니즘이란 말이 유행했다. 그 이야기 때문에.... 오리발 내밀기.. 그렇게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이 선하면 선하게 살 수 있다... 그 때는 순교하는 방법 밖에 없다. 캄보디아에서 많은 지식인들을 다 죽였다. 나중에 진압되고 인터뷰를 했다. 너희들이 왜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였는가? 졸병들이 소대장이 명령했다. 그래서, 위로 계속 올라갔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과 사회가 함께 변해가야 한다는 것도 맞는 말이고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인데, 그 starting point는 개인의 회개와 회심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마드라스 대회 때 중요한 이슈의 하나는 타종교에 대한 문제였다. 그전에 1932년에 책이 한권 나왔다. Re-thinking Missions: A Laymen's Inquiry After 100 Years 라는 책인데, 그전에 미국의 주요 개신교회 평신도 대표, 각 교단에서 평신도 대표 다섯 명씩 35명이 선교현장을 답사하고, 인도, 미얀마, 일본 등을 답사하고 그 보고서를 낸 것이다.  William E. Hocking 이 대표로서 의견을 취합하여 쓴 것이다. 책이나 본문을 쓸 때, Hocking's report 혹은 Laymen‘s report 혹은 inquiry라고도 한다.  그는 하바드 대학의 철학교수였다. 그 내용은 한마디로 말하면 기독교 복음이 절대 유일의 구원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그 같은 생각이 유럽교회에, 철학계에 혹은 사상계에 있었다. 트로웰치 같은 사람, 모든 것은 역사적으로 조건지워 있고 역사적으로 변화하고 상호연결되어 있고 상대적인 것이다. 세상에는 절대적인 것이 없다. 어느 것도 여기에서는 예외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신은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다. 라고 했다. 대표적인 이야긴데.. 여기서 나온 것은 선교를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진리만이 절대 유일의 종교가 아니다. 다른 종교도 우리가 존중해야 한다. 결론에 가서는 선교사들이 할 일은 다른 종교들과 함께 궁극적인 종교적 진리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만이 절대유일의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선교사로서 적합하지 않다. 이런 말이 자꾸 나왔다. 그래서, IMC 주최측에서 이 문건에 대해서 사전 스터디를 의탁했다. 핸드릭 크레이머에게... Hendrik Kraemer, 화란의 평신도, 1922년 인도에서 네들란드 바이블 소사이어티에서 일했던 사람이고, 인도네시아 최고의 신학교를 시작한 사람이었다. 이슬람과 동양 문물에 대단히 조예가 깊었던 사람이었다. 평신도이면서도 피선교지 교회의 허약성에 대해서 많이 우려했던 사람이다. 피선교지 교회가 지나치게 서양선교사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염려한 사람인데... 1930년대까지는 인도네시아 밖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람인데, 이분에게 호킹 레포트에 대한 연구가 위촉된 것이다. 마드라스 대회를 연구서를 썼고, 나중에 책으로 출판된 것이다. The Christian Message in Non-ChristianWorld. 비기독교 세계에서의 기독교 메시지. 둘 다 중요한 책이다. 종교다원주의는 예수님 당시부터 있었다. 우리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첫 300년은 생사를 건 다른 종교와의 싸움이었다. 어떻튼, 핸드릭 크레이머가 쓴 책은 다 읽어 볼 필요가 있다. 평신도 신학이란 책이 있다. 기타 그가 쓴 책은 닥치는 대로 읽으볼 필요가 있는데, 이분은 나찌 수용소에서도 고생을 했다. 독특한 경험을 했다. 어떻튼 이책에서 핸드릭 크레이머는 , 요점은 성경이란 것은, 기독교의 계시는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노출의 기록이라고 했다. God's self disclosure in Jesus christ. 그래서, 기독교와 타 종교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discontinuity between christianity and other religion 질적 차이가 있다. 그게 뭐냐? 복음은 하나님의 의를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를 받고 구속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다. 모든 다른 종교는 한 마디로 이야기한다면 self-justification, -sanctification, -redemption  자기의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말한다면, 많은 불교도들과 힌두교도들과 회교도들보다 도덕적 수준이 낮을 지도 모른다. 기독교인들의 평균적인 도덕적 수준이 다른 종교인들의 도덕적 수준보다 반드시 높다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또 종교적인 어떤 열심, 종교적 계율을 지키는 면에서도 많은 다른 종교인들이 우리보다 더 지킨다. 우리는 기도한다지만 회교들은 하루 다섯 번씩 한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다 내려서 다 기도하고... 일년에 한 달씩 금식한다(해가 있을 동안에는 먹지 않는 것이다). 일주일만 하면 입술이 터진다. 음식점도 안 연다.

 

종교의 역사란 것은 결국 “자기의”의 반복이다. 그 핵심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가 결론에서 주장하는 것은 우리는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담대하게란 말이 오해하기 쉬운데.. 동시에 강조하는 것은 radical humility 였다. 철저한 겸손, 복음전도자들의.  

 

 

 

네 번째로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교회 협의회 구성 문제이다.  Council of Churches.   이미 선교회들은 IMC가 1921년에 조직되어 세계 교회들의 협의체가 없다는 것이다. 요즈음의 WCC의 필요성이 이때 논의된 것이다. WCC가 곧 이어서 창설되지 못한 것은 2차 세계대전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2차 대전 후에 WCC가 창설되는 데,

 

 

 

 

 

마드라스 대회가 끼친 영향/ 큰 세번째로

 

첫째, 마드라스 대회를 거치면서 경건주의와 사회복음의 기세가 약화되는 기미가 보였다. 경건주의라는 전통적인 개신교 선교운동을 추진해 왔던 정신이고, 독일의 경건주의자들 모라비안들, 19세기 위대한 선교세기를 창조한 선교세력들, SVM 이런 선교 운동의 기조를 이루었던 경건주의의 정신이 더 약화되고, 왜냐하면, 인간 영혼구원 위주로 이야기하던 것이 new 와 larger evngelism을 자꾸 이야기하기 때문이었고, 동시에 사회복음 강조하는 것도 약화되었다. 그래서, 마드라스 문서에서는 죄, 의, 영적 소외, 심판, 배교, 사죄, 개종 등의 말이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마드라스 신학이 이렇게 되는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K. Barth 이다.

 

어떤 사람은 바르트를 현대 선교신학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격동기의 신학 전반에 걸쳐서, 선교신학에도 칼 바르트의 영향이 컸다. 바르트는 신학교를 마치고 목회를 하지 못하고, 잡지사에서 일하고.. 성경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런 사람은 강단에서 서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스위스로 돌아가서 목회를 시작한다....   . 빌3:12-15를 좋아햇다. 그런 정신으로 신학하고 목회한다고 했다. 세가지 큰 사건이 있다. 자기가 열심히 목회를 하는데도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트루나이젠을 만나서 - 목회실천론을 쓴 사람 - 친구가 되었는데, 그가 바르트에게 ‘당신이 도스도예프스키를 읽어야 되겠다.’ 바르트는 순탄하게 큰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를 잘 못한 것이다. 낙관적으로 생각한 것이다. 당시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도스도예프스키의 작품을 읽고 인간의 본성, 죄, 부조리성, 추악상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선은 성경을 그대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 한가지 사건은, 자기 선생을 포함한 독일의 유명한 학자들이 1914년 8월에 93명의 학자들이 빌헬름 2세의 제2차 세계대전 지지서명을 했다. 거기에 충격을 받았다. 자기의 선생, 신학교 선생들이, 자기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선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바르트는 ‘나는 이들의 신학과 윤리를 따를 수 없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1919 로마서 주석을 썼다. 그것은 칼바르트가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런 입장에서 읽고 정리한 것이다. 그것을 출판했는데 아무도 출판을 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업적 수완이 없는 어떤 출판업자가 출판을 했는데 다 팔려버렸다. 제일 놀랐던 사람은 바르트 자신이었다. “How I changed my mind” 라는 책에 나와있다. 당시 신학하는 사람들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하라.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로마서 주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어떤 사람이 종탑에 올라갔다. 나선형으로 계단이 되어 있다. 그가 올라가다 발을 헛디뎠다. 엉겁결에 줄을 받았는데 종 줄을 잡아서 종소리가 울렸다. 종칠 시간이 아닌데 종소리가 들리니 마을 사람들이 다 나왔다는 것이다. 이게 자신의 로마서주석이라고 그가 말했다. 모차르트...  위대한 신학자가 되는데 큰 서재가 필요 없다....

 

바르트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다. 그리고, 경건주의자들의 인간영혼 구원에만 집중되었던 그들의 정신도 약화되었다는 것은, 독일교회의 상황때문이었다. 어떻게 기독교국인 포악한 사탄의 세력이 득세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만 이야기하면 이세상은 다른 악마가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내면 생활의 게토가 되어서도 안되고, 하늘의 영역만 관심을 가져서도 안된다. 일반 삶의 영역에서 철수해 버린 과오에서 돌이켜야 한다. .... 1935년 바르멘에서 독일 복음주의자들이 바르멘 선언을 하는데, 그 다음에 하노바에서 만나서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그런 것들이 1938년 탐바란에서 모였을 때... 경건주의자들의 개인영혼 구원의 강조가 약화되는데 영향을 많이 끼쳤다. 독일의 신학자들은 산자와 죽은자들을 심판하러 오신다는 사도신경의 고백을 강조했다. 나치들은 인간들의 노력으로 인간의 생각으로 역사를 창조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심판주로 오실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뜻에 합당한 역사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교회와 선교의 관계에 중요성을 강조했다. 결국 우리가 인간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켜 나갈 때 그 기본기구는 교회라는 것이다. 그래서, Mission of the Church 라는 말이 자주 강조되었다. 보쉬는 그렇게 강조한 것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다고 본다. 교회의 선교적 책임을 강조한 것은 긍정적이지만, 교회중심적인 선교관의 발전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교회중심적인 선교관이란 것은 나중에 이야기할 것이다.

 

셋재, 교회가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전에는 기독교 세계와 비기독교 세계로 이분해서 생각해 왔는데, 세계가 하나의 선교의 현장이라는 도식으로 새로운 관심과 이해를 하게되었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의 세계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세계다. 동서양을 구분할 수 없다. 이미 유럽도 기독교 지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히틀러, 스탈린....을 보라는 것이다.  그것은 긍정적인 영향인데 이것이 준 부정적인 영향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세계와 교회를 분리해서 보는 견해가 강조된다는 것이다. 전에는 기독교 세계대 비기독교 세계였는데, 이제는 세계대 교회로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강화되엇다는 것이다.

 

넷째, 선교에 대한 종말론적 이해가 강조되었다.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재림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합당한 선교, 사역, 역사 창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는 승천과 재림사이에 있는 교회의 사역으로 강조되었다.

 

 

 

Whitby 1947 /큰 넷째로

 

가나의 휘트비에서 7.5-20

 

먼저 분위기

 

역대 세계 선교대회가 가운데 가장 소규모였다. 40개국 112명 참가했다.( 예루살렘 대회는 김활란 박사, 마포삼렬 박사등이 참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여건이 여의치 않았다. 1947년 2차대전 이후 최초의 세계적 규모의 교회 모임이었다.

 

첫째, 서구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식민주의 구조가 무너지는 시기였다. 1945년 대전이 끝났을 때, 제1세계, 백인 세계와 일본이 포함되는데, 1세계를 포함한 기타 모든 나라들 가운데 99.5%가 식민지였다. 랄프 윈터가 쓴, "Unbelievable 25 years"  믿을 수 없는 25년 이란 책이있다. 1945년에서 69년까지 25년까지 간략한 선교 역사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19(69)년까지 그 중에 99.5%가 독립했다는 것이다. 그냥 된 것은 없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독립전쟁이란 것이 있었다. 그 와중에서 기독교 선교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어려웠던 사람들이 선교사들이었다. 본국의 편을 들어야 하는가? 선교지의 편을 들어야하는가? 이 와중에서 어떤 선교사들은 자기 나라 편을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현지인들 편을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중립을 지키겠다고 했다. 1947년 휘트비 대회가 모였을 때 세계 선교는 짙은 먹구름에 가려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독립이 추구되는 지역, 독립한 이후에 나라들은 전통문화의 복고가 그대로 올라오는 것이며, 그 핵심에는 현지인들의 종교가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이시기가 세계가 동서로 분리되는, 냉전이 시작하는, 공산주의가 성장하는 시기였다. 서양선교회들이나 교회들에 있어서 중국이 공산화된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가장 중요한 선교의 대상이 중국이었는데, 중국이 공산화된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휘트비 대회가 모인 것이다.

 

 

 

이 대회의 신학의 특징이 무엇이냐?

 

What next?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What can we do in this revolutionary world? 그래서,

 

첫째는, 교회의 갱신과 부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의미하는 바는 교회가 선교적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자기 자신의 안일에 빠져서 자기 중심적이어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가 선교적인 아니면 교회일 수 없다. 교회가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게 되면 하나님의 종의 위치를 잃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선교적 도구가 될 때만 교회는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The church is the church only when irt is the missionary of God's will.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하나님 - 선교 - 교회”다. 하나님이 선교를 하시고, 그리고 그 일을 교회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시기를 원하시는가? 그것을 하는 것이 선교다.

 

둘째로, 교회의 코이노니아를 강조했다. 이것은 전쟁 후였기 때문에 치료적인 의도가 있었다. 전쟁 중에는 적대국들의 대표들이 모였다. 독일과 영국, 미국 - 적대국들의 대표들이었다. 그래서, 종래까지의 선교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했다. 그것이 명시된 것이 “Partnership in Obedience” 이것이 휘트비의 중요한 표어였다. 파트너는 동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선교에 있어서의 국가적 차이를 초월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supernationality of mission.  

 

Partnership in Obedience” 이게 무엇이냐? 첫째, 선교가 백인들만의 책임이라고 생각한 것을 탈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white men's burden이 아니다. 둘째, 피선교지 교회는 younger church, 서구 교회는 older church 혹은 daughter church 혹은 mother church 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런 것이 좋지 못하다. 셋째, 영적 동등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재정과 인력의 격차가 있더라도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모든 교회가 동등하다. 넷째, Paternalism/온정주의/친권주의(선교학적 정확한 의미)를 극복해야 한다. 친권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온정과 친권이 다 포함되어 있는데,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래서 돕는다 이것은 좋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너를 지배한다.. 이렇게 가면 친권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기독교 선교운동은 가장 이상적인 선교는, 빨리 현지 교회에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보통의 선교는 4P의 단계를 거쳐간다. Pioneer 개척의 시기가 있다. Parent 가부장적인 역할을 하는, 키우는, 신학교, 교역자 육성 등등 시기가 있다. Partner 동역하는 단계가 있다. 함께 일하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가 Participant 선교사는 현지교회의 요청에 응하여 동참한다. 현지 교회가 원치 않으면 필요 어벗는 것이다. 바람직한 선교는 빨리 Participant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두 단계는 선교사가 리더이고, 셋째 단계는 동등, 넷째 단계는 현지 사역자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선교사들은 보조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마지막 단계에 와있다. Paternalism이란 것은 선교사들이 의도적으로 두 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혹은 온정에 의해서 머물러 있는 것이다. 로란드 알렌 같은 사람, 삼자원칙을 이야기하게되는 중요한 영향을 끼친 분인데, 그 분은 우리가 선교 현장에 가서 현지인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고, 예배가 그들에 의해서 집행되면 그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문화 속에서 현지인 교회가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현지인 교회가 성숙하고 성장할 수 있다고 19세기에 이야기한 것이다.

 

넷째로, 세계 교회의 모든 자원을(the resources of the whole church) 선교를 위해서 활성화(mobilization)시켜야 한다. 지역교회 단위에서는 평신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선교관은 무엇인가? 이 혁명적 세계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증거되어야 하겠는가? 에 대해서는 두 가지가 있다. 곧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전적 헌신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선교는 total evangeization으로 나가야 한다. 개인구원과 사회적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교회는 무지와 탐욕과 질병과 죄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대처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뜻에서 active social involvement를 주장한 사람도 있다.

 

 

 

 

 

Willingen 1952 다섯 번째 세계 선교대회

 

독일에 있는 도시, 어떤 사람은 개신교 선교개념에 관한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한 대회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분위기.....

 

첫째로, 역시 휘트비 대회의 분위기가 연결되는 것이다. 99.5%의 식민지가 99.5% 독립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중국이 공산화되었다. 이것은 세계 교회의 충격을 가한 것이다. 세계 선교운동가들, 선교단체들에게는 굉장한 충격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 자원이 투자된 나라였다. 그런데, 장개석의 정부군에게 미국이 원조를 했다. 공산군은 2차 대전 도중에는 패잔병이었다. 패주한 군대였다. 온 세계가 기도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붉은 용, 사탄이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공산화되었고.. 이것은 불가사의였다. 물론 중국이 개방된 것도, 좋은 의미에서 충격이었다.

 

세 번째로, 한국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선교 지도자들에게는 아주 알려진 교회요 나라였다. 어떤 지역보다도 선교가 성공한 지역으로 생각했다. 존 모트가 1907년에 한국에 와서는 피선교국 가운데 한국이 가장 먼저 기독교국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 한국에서 공산군이 내려와서 전쟁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이 때 모인 사람들은 세계선교를 매우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넷째, 1948 WCC가 창설되었는데, WCC를 창설한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대회였다. 그래서, 교회와 선교의 분리상태가 종식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경건주의자들에 의해서 교회와 분리되어 선교가 진행되어 왔는데, 그것이 종식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요한네스 후켄 다이크였다. J. Hoekendijk  네들란드 사람인데, 아버지가 인도네시아 선교사였던 사람이다.

 

 

 

 

 

6월 2일 강의 -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개념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룬 해였다고 빌링겐에서 가져왔는데,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요한네스 후켄 다이크 J. Hoekendijk 라고 이야기했다. 후에 그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강의했다. 그가 발표한 두 문서가 중요하다. 하나는 The Call to Evangelism 이것은 여러분의 과제물로 내고있는 IRM에 발표했던 글이기도 한데 후켄다이크가 쓴 “흩어지는 교회 - The church inside to out"의 제1장이 이 논문이다. 후켄다이크가 쓰고 있는 뜻은 전도가 선교의 개념이다. 그의 핵심적 주장은 그동안의 개신교 선교관이 근본적으로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선교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옛날 이스라엘 민족들이 메시야에게 기대했던 것, 그리고 메시야가 실제로 하셨던 일 그것을 하는 것이 선교다.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샬롬, 평강이라는 것이다. 그 샬롬을 추구하는 것이 선교다, 그래서 그의 신학을 샬롬 미시올로지라고 한다. 성경에서 준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렇게 볼 때 선교가 샬롬의 추구라고 볼 때 전통적인 개신교 선교는 그 개념이 잘 못되었다는 것이다. 샬롬 미시올로지를 다른 말로 메시아닉 칸셉트 오브 ........ 라고 했다. 전통적인 개신교 선교는 기본적으로 두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교파선전 위주였다. prophaganda ? 위주의 선교. 둘째는 교회 중심적인 선교, 교회 개척위주의 교회 개척과 성장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것은 샬롬의 개념에서 볼 때 혹은 메시야적 선교의 개념에서 볼 때 빈약한 것이다. too poor and too closed. 선교는 세가지 요소를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고 했다. 케리그마,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 라고 주장했다. 케리그마 - 샬롬의 선포로서의 케리그마, 그다음에 샬롬을 가진 사람들 끼리의 나눔 사귐 공동체로서의 코이노니아, 우리가 하나님의 샬롬을 가졌다는 증거로서 실천하는 디아코니아 ... KKD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 다음에 또 한가지 문서가 “The Church In Missionary Thinking ” IRM 1965년 6월호에 실렸던 글이고, 윌링엔 대회에 모였던 대표들에게 사전에 배부되었던 것이다. 이 글은 제목 그대로 선교적 교회론이다. 여기서 더 구체적으로 신랄하게 전통적인 개신교 선교관을 비판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교회중심적인 선교관이었다고 말한다. 개신교 선교운동사 선교신학 발전사 혹은 선교정책의 역사를 볼 때 대단히 중요한 핵심들을 간단히 볼 수 있다. 경건주의자들 할 때... 윌리암 케리의 선교 정책에서도 현지 교회를 가능한 한 빨리 세운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30년 혹은 50년 동안 영국과 미국이 선교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데 SVM을 주축으로, 선교정책의 기조를 만든 사람이 헨리 벤(영국 H. Venn) 루프스 앤더슨(미국 R. Anderson) 이 두사람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다. 이 분들의 아이디어도 핵심은 삼자원칙에 입각한 원주민 교회를 세우는 것이 선교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다. 자립, 자치, 자전. 우리나라의 네비우스 정책이라고 소개된 것... 네비우스도 이런 분들의 사상을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이 분들은 사도 바울의 아이디어로부터 온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1세기, 경건주의 인도 선교 초기 상황, 윌리암케리 인도 처음 갔을 때, 그리고 벤과 앤더슨의 19세기 말의 상황에서는 선교 초기 였기 때문에 당연히 교회개쳑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변해가는 시대에서 그러한 선교관을 유지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며 too poor too closed 라고 호켄 다이크는 생각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백인 교회는 class church 계급 교회고 폐쇠된 공동체라고 지적한다. 교회중심적인 선교관이 왜 잘못되었는가? 교회중심이 된 선교는 중심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선교가 잘못된 것이다.

 

교회를 중심으로 전통적으로 선교가 진행되었는데, 그의 생각은 선교의 중심이 성경을 통해서 볼 때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었다는 것이다. 선교는 세상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교회와 세계가 겹쳐지는 곳에서는 선교가 올바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선교가 정도에서 이탈한 경우가 많은 것이다.

 

교회는 세계지향적이 되어야 하고 세계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건설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사역을 해야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파송 선교를 강조하다. 나가는 것을 강조한다. “파송(사도성)이 없는 사도직은 사도직이 아니고 배교다”   선교는 하나님의 종말적 사역이므로 교회는 온전하고 완전하게(홀리 앤 컴플리트)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 지향적이어야 한다. 고로 교회가 선교적이 되지 못하고 교회 우선적이 되는 것을 교회지상주의(The churchism)의 이단이라고 생각했다. 교회는 중요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나라, 복음, 파송, 세계라는 순서로 체계를 잡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들로서의 교회는 기존의 범주에 자기 자신을 안주시켜서는 안된다. "The Church-as-people of God"라고 호켄다이크는 매우 강조해서 표현했다. 교회의 역동성을 강조한 것이다. 교회는 기구 제도 건물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교회는 어떤 형태로든 고정되어서는 안되는데 선교 위주가 안될 때 교회는 고정화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선교이기 때문에 교회가 사도적이라고 하는 것이며,  거꾸로 교회가 선교적 사역을 가졌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선교가 교회보다 크고 더 우선적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하나님, 교회, 선교 이렇게 말하는데, 하나님, 선교, 세계, 교회로 순서를 바꾸는 것이다.

 

교회중심 선교의 문제점이 뭐냐? 그것은 결국 선교를 안락사 시킨다고 우려했다. 왜냐하면 삼자원칙의 원주민 교회 설립 후 무엇을 해야하는 지가 강조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교회 중심의 선교는 교회로 하여금 세상 혹은 세계에서 고립된 자기 교회 중심의 교회 아무리 범위를 크게 잡아도 민족교회화의 위험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 민족의 교회 이상의 비젼을 가질 수 없는 그런 교회를 만든다는 것이다. 왜, 삼자 원칙에 의한 토착교회의 설립을 계속 강조해 나갈 경우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걸음 더 나가서 기껏 나가도 세계 교회들간의 에큐메니칼한 교제 이상의 관계를 갖지 못하는 그런 교회가 도리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교회중심의 선교가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교회중심의 개념이 우리를 단단히 포박해 왔고 우리 주변을 가로 막아 놓았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가 얼마나 교회화되었는지 우리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모든 세상에 전파되어야 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할 때마다 그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진지하게 묻고 하나님 나라 복음 파송 세계라는 틀속에서 교회문제의 해결책을 찾고자 시도해야 하고 그 때 우리는 교회중심의 견고한 포박으로부터 풀려 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앞에서 이야기한 책에 보면 하나님의 샬롬 미션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하나님의 목표는 선교라는 것은 이 세상의 교회화 CHURCHFICATION 가 아니다. 개인전도, 개인구원보다 훨씬 더 광대한 것이다. MUCH MORE THAN PERSONAL SALVATION. 그러면서, 사실은 교회와 살롬이란 것은 가장 상반되는 것일 수도 있다. the bitterest enemy. 교회가 선교적일 때만 교회지 선교적이 아니면 교회가 아니다. 우리가 사도적 교회를 말할 때 하나는 사도적 전승을 말하고 그런데, 후켄다이크는 추가하여 문자 그래도 파송, 선교를 의미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교 없이 사도들의 신앙과 전통이 우리에게 전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 없는 사도성은 사도성이 아니라는 것이고 교회는 항상 세상을 구원하려는 선교를 의도로 교회 경계선을 넘어설 때만 교회가 될 수 있다. 교회중심적이 되면 교회벽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세계를 보는 시야를 차단한다. 결과적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안주하고 사역이 위축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세계 구원중심 위주로 교회가 사역할 때 그 때만 교회가 교회 되고 고정화되지 않는다. open chuch로 살아남게 된다. 교회는 자기가 있는 곳 혹은 있고 싶은 곳에서부터 있어야 할 곳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이 파송이고 선교고 사도직이라는 말의뜻이다. 교회가 하고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보다도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는 것이 선교적 교회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자기 탈출과 자기를 비우는 모험을 감해해야 한다. 빌2:5 말씀.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파송 혹은 운동으로 이 세상에 존재(happen, 발생)한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으로 가고 세상과 함께 연계되어 구원의 운동을 전개하는 공동체이다.

 

그 다음에 한 사람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 문서를 빌링겐의 선교관을 바꾸는데 영향을 끼친 논문이 “십자가 밑에 있는 교회The church under the cross”라는 레이놀드 폰 타베 RReinold von Thadden의 책이다. 첫째 교회가 세상을 등지지 않고 과연 십자가 밑에 있는가? 하는 그 질문, 그런데 이 논문에서 스스로 대답하는 것은 부정적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왔다가 그곳에 교회가 없다고 한다. 우리가 갈망하던 교회가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의 교회였다. church of restoration(회고). 앞으로 전망하고 나가는 타입의 교회가 아니고 옛것을 회고하고 그것에 근거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교회다. 우리의 진정한 싸움터에서 후퇴해서 안주하고 있는 교회가 아닌가? 첫째는 세계의 필요와 이슈에 대해서 교회가 답을 내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둘째, 자기 중심적이 아니냐?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안에서 모든 힘을 소모하고 있다. 교리논쟁, 자족감, 자리다툼.....신비주의... 셋째, 오늘의 교회가 너무 이상적이기 때문에 비현실적이기 때문이 아닌가?  거역하는 죄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신 하나님을 따르는 교회, 죄인과 세계를 사랑하고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따르는 교회, 그 자신 피 곧 생명의 대가를 지불하신 하나님을 따르는 교회가 참된 교회이다.

 

Norman Goodal의 “missions under the cross” 빌링겐 대회 후 자료를 정리한 책이다. 그러면, 빌링겐의 선교적 개념이 뭐냐?

 

첫째는, 교회 중심에서 세계 중심으로 개념을 바꾸었다. 에클레시오센트릭에서 월드센트릭으로.

 

둘째, 전통적인 크리스토센트리즘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으로 선교의 개념을 생각하게 되었다.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의 사역으로 선교를 보아야한다. 전통적인 선교는 예수 믿고 구원받고 영생을 얻으라는 핵심포인트로 교회를 개척해 나간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은 선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공동적인 사역으로 선교를 이해해야 한다. 성부께서 세상과 우리를 그와 화목케 하시기 위해서 그 아들을 파송하시고 성령을 통해서 그 화목이 이루어진다.

 

셋째, 그 동안의 선교가 인간중심으로 생각되었다. 안드로포센트리즘. 이 말은 우리의 선교, 우리의 선교사, 우리의 선교비, 우리의 선교운동이라고 할 때 우리가 사람들이었다. 부지불신간에 우리의 선교... 우리.. 우리... 우리... 하면서 하나님보다 우리 자신 인간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 선교에 있어서 좌우간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선교하는 사람들이 빠졌던 폐단중의 하나였다. 좌로 가든지 우로 가든지 좌우간. 선교는 인간의 선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뿐이다. “Missio Dei” 뿐이다. 이전부터 가톨릭에서 있던 말을 다음 두 가지 의미로 빌려 쓴 것이다. 첫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 선교다. 그리고 둘째는 선교는 하나님의 사역 밖에 없다. 인간이나 교회는 도구로서의 기능뿐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개신교 선교가 이 폐단에 빠졌다는 것이다. 선교는 여러 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선교는 하나밖에 없다. Not many. 전통적으로 선교를 Missions 라고 복수로 썼다. “From Missions to Mission” 이런 말로 많이 표현도 하고 글도 썼다. 선교가 하나님의 선교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선교 운동형태는 다양하지만 선교 자체는 하나님의 선교 하나다. 그리스도 중심적 선교에 대한 잘못된 부정적인 이해와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오해가 일어난다. 그리스도 없이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그런 내용이다. 그러나, 나이로비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의 교회가 기본적인 기구라는 것을 재정립한다. 빌링겐에서 그리스도중심주의라는 것은 현재의 다원주의적인 그런 용어가 아니었다.

 

빌링겐이 터미널은 아니었다. 다만 빌링겐에서 중요한 이정표(milestone) 하나를 세웠다. 그 이후에도 뉴데일 대회와 다른 대회들이 있었다. 뉴데일 대회에서 IMC와 WCC가 통합을 했다. CW&E라는 이름으로 통합을 했다. 통합에 대한 찬반 논쟁이 많았다. IMC 지도자들이 많이 주저했다. 왜냐하면 WCC와 통합하게 될 때 선교가 교회 관료주의의 지배를 받아 선교가 위축되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은 선교가 교회사역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는데 통합을 통해 선교가 위축되지 않겠는가 생각했던 것이다. 지나고 보면 이들의 우려가 옳았던 것이다. 제도권에 있는 사람들이 선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선교를 간섭하고 지배하는 일들이 더 많아진 것이다.

 

 

 

 

 

한국교회는 해방직후부터 수십 년 동안 60년대까지 조직신학적으로는 옛날의 평양신학교 혹은 총회신학교 특히 박형룡 박사님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박형룡 교수님이 신학지남에 “초자연적인 신유는 없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는 사도시대 끝난 것이다. 우리가 예수믿고 구원받는 것이 성령의 은사이고, 성경읽고 감동하는 것이 성령의 은사다”라고 축소했다. 방언 등의 은사는 불과 근래에도 통용되지 않던 것이었다. 사실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는 주류 기독교에서는 오랫동안 중단되어 있었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오순절적인 성령운동은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가 시작될 때 일어난 것이다. 켄사스주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다가 방언,........ 성령의 역사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오순절 운동들이 기존의 중요한 교파들 속에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본격화되면서 교회에서 거부하게되면서 새로운 교단이 일어난 것이다. 1960년대에 가톨릭과 기존 개신교에서 다시 카리스마틱한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1960-70초까지만 해도 카리스마틱 -프레즈비테리안, -루터란, -뱁티스트 같은 교회들이 있었다. 그와같은 현상이 보편화되면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 때 나운몽 장로 집회를 많이 따라다녔다. 고삼 때 여학생 학교에서 수업 중에 입신을 했다는 것이다. 입신을 해보려고 시험을 포기하고 일주일을 철야를 했는데도 나는 입신하지 않았다. 졸업 후 용문산에 올라갔다. 초자연적 은사를 받으려고... 기진맥진해서... 우연한 기회에 밖에서 집회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매일 저렇게 울고불고 하는 것이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게 하나님의 뜻일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짐을 싸서 내려왔다. 그 이후에 박태선 장로의 집회도 따라 다니고 안수를 받은 적도 있다. 방언이고 이런 거 한번도 못해봤다. 나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를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의 경험과 아는 것은 제한되어 있다. 앞으로의 시대는 특별히 성령의 시대이다. 여러분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서의 선교를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68년 스웨덴 웁살라 대회다. IMC와 WCC 통합 이후의 첫 대회다.

 

주제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첫째, 시대의 배경에 대해서...

 

1960년대 말이라는 이 시기를 이해해야 웁살라 대회를 이해할 수 있다. Social Concept가 최고조로 강조되었던 대회였다고 하는데 그런 이유가 있다. 그럴만한 시대적 분위기가 있다. 1988년 타임지가 1968년 특집을 낸 적이 있다. 그만큼 1968년으로 상징되는 60년대 말이 세계적으로 대단히 격했던 시기였다. 88년에 20년 전의 상황을 회고하면서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기성의 모든 것에 저항을 했는가? 를 분석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그 시대 젊은이들이 느꼈던 절망 때문이었다. 지식인 젊은이들이 느꼈던 절망감이 반항으로 분출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절망이라는 말속에는 희망이 있었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1960년대 초는 서구의 젊은이들에게 상당한 희망을 느끼게 했던 시기였다고 본다. 몇 가지 상징적인 사건으로 보면 케네디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역사의 미래를 좀 희망적으로 보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가장 젊은 그리고, 로만 가톨릭으로서 대통령이 되고 그의 참신한 이미지와 그의 발상 주장 이것이 세계 젊은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었다. 한국의 젊은이들도 케네디 대통령에 대해서 희망을 걸었다. 그 다음이 마틴 루터 킹의 죽음이다. 차례 차례로 암살된다. 말콤 엑스도 암살되고... 이런 것들이 상징적 사건이고 세계의 젊은이들이 절망하고 분노하고 일체의 기성의 것들에 대해서 저항하게 된 것이다. 웁살라 대회가 모일 때는 이런 격한 소용돌이 속에서 모이는데, 선교라는 것이 컨텍스트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교회답게 존재하면서 선교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웁살라의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대단한 위기상황이었다고 이 시대를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논의내용이 뭐냐?

 

첫째, 선교가 뭐냐? 선교의 목표가 뭐냐? 하는 것이 토론되었다. 선교 목표는 Humaization이다. 인간화다. 인간의 비인간화에서 오늘의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이다. 착취, 억압, 증오, 차별, 이런 것들이 비인간화의 모습이다. 선교의 목표는 인간화시키는 것이다. 사람으로 진정한 인간되게 하는 것이다. 그 진정한 인간으로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델이다. 전에는,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회개가 강조되었는데, 오늘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보다 새로운 방법으로 인간이 그의 동료 인간들에게 돌아가 얼굴을 맞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 외에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다른 길은 없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말보다 먼저 우리가 고난 받고 소외받는 인간으로 돌아가자. 우리가 어떻게 인간화작업을 할 수 있는가? 첫째는 identification. 교회가 고통속에 있는 자들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둘째는 의식화. consentalization(?)  사람들이 비인간화 되어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것을 자각하도록 깨닫게 해주고, 스스로 쟁취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셋째, 예언자적 비판. 약자와 가난한 자 편에서 비판적으로 나가야 한다.

 

다음에 논의할 수 있는 것이, 타종교와의 대화문제인데 거기에서 나온 말 중에 사실 타종교의 문제는 에딘버러 문제에서부터 나온 문제이고 계속 심각하게 다루어진 문제인데 웁살라 대회 때는 “우리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대할 때 기본적인 태도는 모든 사람들을 대한 우리의 사랑에 근거해야 한다. 그들이 무엇을 믿고 있든지 그들의 존중해야하고, 그들에게 더 효과적인 증거의 방법을 찾기 위해서 인내를 가지고 노력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1963년 멕시코 대회에서 한 적이 있는데 그 정신이 웁살라에서 달라진 것이 없다. 그래서, 웁살라에서는 우리가 타종교문제를 생각할 때 진정한 대화라는 것은 복음과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공통적인 관심을 우리가 가지고 대화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복음에 대한 관심이 없이 대화를 하게되면 기분좋은 대화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리를 잊어버릴 수 있는 위험이 없는 것이고, 존중과 사랑이 없이 대화를 하면 연관성이 없고 설득력이 없고 .... 없는 대화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대화를 해야한다. God with men.

 

에큐메니칼 선교신학과 이벤젤리칼 선교신학이 극단적으로 간격이 벌어져서 양극화 현상이 일어난 시기이다. 그 결정적인 단계가 사실은 후켄다이크의 사상에서 출발해서 클라이막스를 이룬 것이 웁살라대회를 거치면서 복음주의자들이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은 도저히 신학으로서 논의할 가치가 없고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했다. WCC의 초대 총무였던 네들란드의 Vissent Hooft 는 “수직적인 차원을 잃은 기독교는 소금과 그 맛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쓸모 없이 된다. 그러나, 기독교가 그의 수직적인 차원의 전제를 인간의 삶 속에서 그들을 위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면 성육신을 통해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요체는 하나님의 중심이기 때문에 인간 중심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이며 하나님을 위하여 사신 분임을 말함이 없이 타자를 위한 분이었다고만 말해서는 안된다.” 웁살라가 수평적 차원을 강조하는 것은 좋다. 기독교 역사의 발전을 보면 너무 극단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것을 반복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양쪽 다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직적 차원이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John Stott가 웁살라 대회에 대해서 말했다. 영국의 목회자이고 신학자이다. 대단히 이상적인 분이다. 선교에 대해서도 깊은 조예가 있다. 에규케메니칼 선교대회 복음주의자들의 모임에 다 다녔다. 통합적인 분이다. 로잔대회 주도적 역할을 했다. 웁살라 대회에 대해서 대단히 중요한 지적인데 “이 대회가 현대 세계의 기아와 빈곤과 불의에 대해서 진지한 주의를 환기시켰다. 내 자신이 많은 감동을 받았고 그들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대회가 사람들의 영적 기아에 대한 꼭같은 관심과 동정(comparable concern and compassion)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를 거부하는 회개하지 않는 도성을 보시고 우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이 이 때에 없었다. ” 그 눈물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무엇이냐? 도날드 맥가브란이 논문을 낸다. 제목이 “Will Upssala betray the two billion? 울살라가 20억의 사람들을 배신할 것인가?” 라는 논문으로 항의를 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20억이었다. 에큐메니칼은 요하네스 후켄다이크, 이반젤리칼의 대표선수는 도날드 맥가브란 Donald McGavran 이었다. 유명한 현대 선교신학 논쟁이 이 두사람에 의해서 촉발되는 것이다. 논쟁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도날드 맥가브란이 편집한 "태풍의 눈, Eye of the Storm"이란 책이 있다. 후켄다이크의 글이 있고, 후켄다이크에게 보내는 공개장이란 부제를 단 글을 실은 것이다. 이것이 웁살라에서 절정을 이루는 것이다.

 

 

 

 

 

 

 

B. Evangelical 선교 사상의 발전

 

우리가 지금까지 소위 20세기 복음주의 선교사상의 발전, 선교운동의 형태, 에큐메니칼한 사람들과의 문제 등을 이야기할 때, 이 것들을 대변하는 기구들이 있다.

 

1. 기구

 

1) IFMA The Interdenomination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

 

1917년 프린스톤에서 조직되었다. 이 모임은 1910년 에딘버러 대회의 신학과 지도자들에 대해서 동의하지 못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조직된 것이다. 따라서 신학적으로는 당시 일어났던 근본주의자들의 신학을 고수했다.

 

1) EFMA The Evangelical Foreign Missions Association

 

이것은 NA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복음주의 협의회/ 에 속한 단체이다. 1943년 NAE가 창설되었다. 이것이 창설된 것은 기존의 복음적인 단체들에 대한 불만에서, 신학적으로 너무 편협하다는 불만에서 보다 포용적인 입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둘째는 근본주의 논쟁으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신학적 논쟁과 분쟁과 실패들을  탈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셋째는 자기들의 공동 관심사에 대해서 복음주의자들의 연합된 의견 표명기구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자기들의 신학적 입장과 의견들을 더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선교 분야에 대한 협의체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1945 EFMA를 미국에서 12월 29일 창설했다. NAE에서 1945년 EFMA가 나왔는데, 지금까지 복음주의 선교는 이 두 기구가 주도하고 있다.

 

 

 

우리가 통합 합동 갈라질 때 에큐메니칼과 NAE가 갈라졌다고 교회사 책에 기록되어 있고 우리학교 연혁에도,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통합 합동이 갈라진 것은 에큐메니칼 NAE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결정적 계기는 1958년 봄에 있었다. 남산의 총회 신학교에서 있었다. 당시 이슈는 3천만원 사건이었다. 전쟁 끝나고 부산으로 대구로 전전했던 우리신학교가 서울로 올라왔다. 신사 본산지인 남산 꼭대기에 신학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는지, 소위 정부 재산에 있었는데 거기 건물을 짓고... 그 땅을 학교땅으로 만들기 위해서 소위 로비를 한 것이다. 3천만원을 썼는데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것은 선교사들의 돈이었다. 선교사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한국 교회 지도자들도 ... 박형룡 목사님의 교장 사임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사회안에서 교회 지도자들안에 박교수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는 사람들과 원만하게 무마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 우선 사표, 수습 후 재 취임 - 그래서, 그해 봄에 58년 봄에, 학교 안에서 교수와 학생들까지 알게되고 표면화된 것이다. 그래서, 교수 학생이 두파로 나누어 졋다. 그 때 가장 반대했던 교수들이 김윤국 목사님, 박창환 목사님 가장 이문제를 안된다고 했다. 잘못되었다고 앞장서 지적하고, 그것이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두 분이 그 학기 강의를 거부했다. 계일승 목사님.. 이런 분들이 역시 조금 소극적이었지만 선교사들 쪽의 입장을 지지했다. 명신혼...저쪽을 지지.. 그래서, 수업이 안되고 논란으로 조기 방학을 했다. 내가 그 때 예과 2학년이었다. 정부에서 남산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몇몇 교수님들이 중요한 기물들을 옮기려고 했는데 직원들도 두 패였다. 숙직을 하던 직원이 박형룡 박사 지지파였다. 문을 잠그고 차가 못나가게 했다. 서무과의 고집사님이라고 계셨는데 그분이 학교 직인과 중요한 것을 들고 나왔기 때문에 직인은 이쪽에 문서는 저쪽에 분열되는... 대전중앙교회에서 이듬해 총회하면서 그 때 엉뚱하게 에큐메니칼, NAE가 나온 것이고, 엉뚱하게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게 되었다.  WCC, 용공, 신신학 이런 식으로 된 것이다. 우리 통합이 NAE와 신학적으로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가장 중요한 모임은 이 66년 휘트니에서, 베를린에서, 시카고에서, 여러 차례 모였는데, 가장 중요한 결정적인 모임은 1974년의 로잔대회이다. 로잔에서 이 복음주의자들이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자들이 빌링엔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했다고 할 만큼 중요한 전환을 가져왔다. 1968년 상황이 계속되는데, 물론 70년대 들어오면서 완화되기는 했지만, 복음주의자들도 그같은 컨텍스트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로잔에서 이야기되었던 선교관은 그 이전의 복음주의자들의 전통적인 선교관에 비하면 훨씬 더 포괄적인 개념이 되었다. 그래서, 선교를 M= E + SR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이는 이반젤리즘, 전도를 말한다. 에스알은 소셜 레스판스빌리티 사회적 책임의 수행을 의미한다.  E 대신에 PS personal salvation를 쓰기도 한다.

 

전도에 대해서 복음주의자들이 더 깊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서 사회적 책임을 첨가했다는 것이 대단한 변화이다.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사람이 죤 스토트 J. Stott 였다. 자기도 선교에 대해서 전통적으로 evangelism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니까 그리고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자 성서신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성경은 두 가지를 다하고 있다. evangelical mandate와 함께 cultural mandate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적 위임, 문화 변화, 역사 창조, 하나님의 나라, 그래서, 성경적 선교관은 반드시 이 두 요소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상당한 논의가 있었다. 결국은 기본적인 그의 생각이 받아들여지고 이같은 생각이 나중에 파타야에서 모이고, 나중에 미시간의 그랜드 래피트에서 대표들이 다시 모여서 확증을 한 것이다. 그것을 크게 나이로비에서 생겨진 선교적 개념의 변화라고 할 수 있는데, 저것이 나이로비에서 정해지니까 복음주의자들안에 내분이 생겼다. 그래서 저같은 선교관을 동의하는 사람들을 The neo-evangelicals 신복음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 매킨타이어 같은 사람, 극단적인 보수주의자, 한국 교회의 분열에도 기여했는데, 그 때부터 빌리그래함 목사의 집회를 방해했다. 로잔 대회는 한국의 총신에도 파장을 일으켜 신복음주의 논란이 있어 교수 두세 명이 학교를 떠나게 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나갔던 사람이 총장을 하게되는 역사가 있다. 사회적 책임을 넣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왜 그것을 주장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할 때 이분들이 그 때 당시 적어도 8억, 세계인구의 1/5이 혹은 더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궁핍상태에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의식주의 문제로 혹은 복지 문제로 비인간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며, 경제적 차별과 압박, 정치적 억압, 성차별, 또 과잉인구, 기근, 자본낭비, 환경오염, 폭력, 전쟁, 핵전쟁의 위험, 이런 것들이 세계 현안으로 있는데 여기에 교회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동안 왜 복음주의자들이 보수주의자들이 적절한 사회적 책임의식이 결여되었는가를 스스로 진단을 했다. 자기들끼리의 이야기는 구제, 단순한 구제가 사회적 책임의 수행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신학적 유산이라고 생각했고 다르게 큰 반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전통적으로 자기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 그렇게 만들었다. 영혼과 육체, 은총과 자연, 구속과 창조... 이런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사회적 책임수행을 적절하게 못하게 했다. 여기서 자기들이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두 가지 다른 요인이 더 있다고 본다. 하나는 교회성장에 치중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이슈를 교회에서 취급할 때 교회 성장이 둔화될 수 있다, 교회가 분열될 수 있다는 우려를 하였다. 사회 정치 경제적 이슈를 교회 안에서 다루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다음에 하나는 The great reversal 대전환, 미국 교회 신학 발전사를 보면, 이 세기에 들어와서 대전환이란 것이 있다. 사회적인 어떤 의식을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없어지고 인간영혼 구원에 집중하는 전환이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대전환이라는 이야기를 말했는데 사실은 그 전에 더 심각한 대전환이 있었다. 그것은 미국 남북전쟁의 영향이다. 노예문제만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배경이 되는 문제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최근 역사가들의 저작을 보면, 남부의 많은 교회지도자들도 노예제도의 문제점을 인식했으며 군데군데서 노예를 해방하는 일이 있었는데 경제적 상황이 바뀐 것이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유럽 쪽에서 미국에 요청했던 물자가 면이었다. 그 때 미국에서 목화농사가 다시 한번 크게 부흥했던 것이다. 그 수년동안 미국의 수출품중의 1위가 면이었다. 노예가 필요했던 것이다. 자기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노예제도를 정당화시킨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남북 전쟁은 미국 사람들이 겪었던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미국의 거의 대부분의 전쟁은 나라 밖에서 있었던 것이다. 남북전쟁은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무수한 피해가 있었다. 처절한 전쟁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교회에서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조용히 있다가 천당가면 되는데 노예해방이니 이런 것 하다가 손해를 보게되지 않았는가? 교회가 이런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환란을 부르는 것이다.... 본래 사람은 자기의 이해 문제에 굉장히 민감한 것이다.... 그 같은 환란을 겪었던 후였기 때문에 그 말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이전에 목사들은 후천년설을 주장하고 사회문제를 많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후에 사회의 책임 문제에 대해서 보수적인 교회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는 것이 생긴 것이다.

 

선교라는 것은 양자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성경적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둘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은 공식적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독립적이다고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며 동등하다고 정립했다. 심지어는 바지의 두 가랭이가 있듯이, 가위의 두 날이 있듯이 복음적인 선교는 이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 날이 하나면 가위가 아니고 칼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논쟁이 일어난다. 누군가가 이것은 끝없는 학문적 토론으로 끝날 수 있다고 말했다.

 

대다수 복음주의자들의 기본적인 입장은 인간구원이 기본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 이 우선 순위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것이다. 가령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든다. 이방인이라고 그냥 지나가는 것은 선교가 아니다.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치료해주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고 그것이 선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인간구원이 기본적이다. 굳이 우선순위를 이야기하면 그렇지만, 컨텍스트가 우선순위를 능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복음주의자들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인간구원과 사회적 책임은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 수행이 복음에 귀를 닫았던 사람들의 귀를 열게 하고, 복음에 눈이 가리웠던 사람들의 눈을 뜨게한다. 그러면서 존 스토트는 복음 전도의 수단으로서 선행을 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흔히 전통적으로 교회가 구제와 선행을 한다고 할 때 전도의 수단으로 했던 경우가 많았는데 존 스토트는 그것이 잘 못되었다고 주장한다. 교회의 사랑의 행위는 사랑의 행위 자체 이상의 목표를 가지는 것은 속이는 것이다.이것은 전도를 위한 미끼로 사람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 거짓이 없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는 그냥 그 두책임을 묵묵히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전에는 선행을 흔히 Pre-evangelism 으로 보았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렇게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을 의도적으로 그것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C. 마지막으로  통전적/통합적(Wholistic/Holistic) 선교관

 

잊어버려도 중요한 것은 학교 다니는 동안에 클라스에서 느꼈던 것이 있으면 교육이 된 것이고, 그게 없으면 교육이 안된 것이다. 데이빗 보쉬가 소위 이벤젤리칼 미션을 이야기할 때 근본적으로 약점이 있다고 했다. 첫째로, 복음주의 이반젤리칼 선교신학이 가지는 것은 복음의 약화이다. 복음에 물을 타는 것이다. 충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첫째는 이원론적 사고방식, 이분법적으로 전통적인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이 복음을 온전케 하는데 장애를 준다. 둘째로, 삶과 교리의 분리, 생활과 교리의 분리 현상이다. 교리의 전통성, 의식 이런 것은 대단히 중시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에 대해서는 비교적 약하다는 것이다. 무관심하거나 무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컨데 어떤 사람이 윤리적으로 아주 잘못된 일을 했는데... 나는 웨스터 민스터 신조를.... 믿습니다 이러면 괜찮은데, 윤리적으로 대단히 훌륭하고 그래도 나는 웨스터 민스터 신조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애... 이렇게 이야기하면 용납이 안되는 것이다. 삶과 신학이 일치가 안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가 교회와 세계의 주이심을 현실적으로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교회의 주님이시고 세상의 주님은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는, 선택적 보수주의라는 말을 썼다. selective conservatism 이라고 되어있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과 실제가 다르다는 것이다. 또, 우리가 우리 자신 위주로 기독교 윤리나 가치관 같은 것, 생활양식을 선택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장이나 삶이 그 때 그 때 자기 위주로 이해관계에 치우쳐서 말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보수주의자들이 한 때 모랄 메조리티라는 것을 만들었다. 도덕적 다수, 그래서 선거에 작용을 했다.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관이 지금 쇠퇴하고 있는 정치가들이 책임이 있다. 전통적인 푸리탄의 가치관에 맞지 않는 사람은 뽑지 말아야 한다는 운동이다. 당시 이변이 일어났다. 정치 거물들이 낙선하고 무명의 사람들이 의원이 되기도 하였다. 대통령 선거 때는 달랐다. 카터와 레이건이 붙었는데, 레이건은 보수주의자 입장에서 보면 이혼한 경력도 있고 소돔 고모라 출신이었다. 카터는 이분들의 주장에 의하면 가장 적격자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거듭난 침례교인, 교회학교 교사,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여기에 대해서 미국에서 이의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실제로 투표는 절대 다수가 레이건을 찍었다. 거의 모든 교회에서 레이건이 압승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선택적 보수주의라는 것이다. 말과 현실이 다른 것이다. 자기 이해관계를 가지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우리가 더 잘먹고 잘살게 되며 더 강력한 미국이 되겠는가? 레이건이 더 낫다는 것이다. 이것이 선택적 보수주의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더 그런 성향이 복음주의자들에게 강하다는 것이 보쉬의 지적이다.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은 어떠냐? 상당히 복음을 왜곡시키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폭력적 혁명까지도 정당화하는 경우가 있는데 문제가 있는다. 둘째는 복음의 변형이다. 인격적 회개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종말의식이 약하다. 인간의 판단과 경험이 때로는 과대 평가된다. 특정한 신학자, 특정한 신학에 몰두하고 그 신학으로 모든 신학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함정에 자주 빠진다. 또 교회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세 번째로 구원의 한계성을 지적했다. 육체적 사회적 구원에 치중함으로 인간 영혼의 구원에 대한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경시된다. 보수주의자들이 영적 구원에 편중하듯이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자들 가운데 사회구원에 편중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도 온전치 못하다는 것이다.

 

통합적 선교관은 어떤가?    흔히 사람들이 통합측 신학의 입장이 모호하다고 말하는데, 선교 신학적 입장에 관한한 모호한 것이 하나도 없다, 문자 그래도 통합적이다. 성경적 선교신학은 통합적이다. 선교신학뿐 아니라 신학 일반이 그렇다. 자유주의 신학을 하는 것은 쉽다. 자기가 확신하는 바를 주장하면,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독창적이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보수주의 옛날 것만 지키면 정통 보수주의가 되는 것이다. 쉬운 것이다. 통합적 이것은 문자 그대로, 모든 신학을 종합적으로 비판하고 비판적으로 종합하고 취사 선택해 나가는 입장인 것이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고 이루었다 함도 아니다. 지키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이 역사적 컨텍스트 안에서, 고민하고 ... 나가는 것인 통합적 신학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이 방법이 어려운 것이라고 본다. 바울도 통합적인 방법을 썼다. 어떤 사람에게는 할례를 받으라 너는 받지 마라... 분명한 신학적 입장이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융통성이 있고 신축성 있고 포괄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다.

 

M = E + SR 우리도 이 근본적인 사상에는 반대할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을 더 풀어서 보면

 

M = E + N + S(SS + SA ) + F 라고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제일 위대한 공식이다. 세계를 구원하는 공식이기 때문이다.  E 전도는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N Nuture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역,  S service 섬김 봉사 SS social service 사회 봉사다. SA social action 사회 행동. 사회봉사는 어떤 결과에 대응하는 것이다. 홍수, 자연재해.. 결핵... 결과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반대할 사람이 없다. 교회 밖에서도 다 환영한다. 안한다고 비판한다. SA 사회행동은 그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에 대해서 대응하는 것이다. 왜 이 지역의 사람들은 가난한가? 왜 이 지역은 결핵환자가 많은가? 그 원인을 고치고 대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대단히 미묘하고 복잡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같은 일을 야기 시키는 원인 자체가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복잡한 정치적 제도적 법적 통치적 문제와 걸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행동을 할 때 충돌하고 갈등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사회행동이란 것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도 갈등이 생긴다. 그래서 대단히 미묘한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마지막 시간에 조금 더 이야기하겠다. F Fellowship 사귐과 나눔과 협력, 개인과 지역교회와 국가교회, 세계교회간의 .....

 

M = m1 + m2 + m3

 

동일 문화권 선교, 유사문화권 선교, 타문화권 선교 이렇게 나눈다. 전에는 지리적으로 구분했지만 지금은 문화적으로 구분한다. 미국의 백인 목사가 한국에 와서 미국 백인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면 m1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M = E + SR에 동의를 하는데, 우리도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일반적으로 말할 때는 전도가 기본적이고 우선적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상황이 우선 순위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영원한 생명의 문제를 먼저 다루셨다. 두눈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한 눈 가지고 천국에... 온 천하를 얻어도 네 목숨을 잃으면.... 기본적으로 영원한 생명이 기본적인 핵심이 된다는 것. 사도바울의 선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도바울이 로마 식민지하에서 사역을 하는데, 롬8에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네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해서라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한다... 10장에서 그것은 유대인의 구원, 기본적으로 영적인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우리가 실질적으로 교회가 이 땅에서 사역할 때.. D. Kelly가 쓴 "Why the conservative churches growing?"  미국 NCC 스탭이었는데, 교회 안에 있는 통념, 보수적인 교회는 통념이 옳은가를 15년에 걸쳐서 조사를 했다. 미국 안팎의 기독교와 다른 몇몇 종교까지.... 그 책이 나온 후 많은 교훈을 주었다. 책제목이 내용과 다르다는 지적을 받았다. 사실 보수적인 교회가 다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성장과 보수적이라는 것은 핵심적인 연관성이 없다. 고신측, 미국의 보수적 침례교단.. 성장 안한다. 교리가 우수하기 때문에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가 보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역의 우선순위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 교회가 사역할 때 어떻게 사역하느냐 하는 것이다. 성장하는 교회는 헌신이 확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그리스도께 사람을 헌신시켜야 하고, 둘째, 그리스도의 몸에 헌신시켜야 한다. 셋째, 그 다음에 세상 속에서의 그리스도의 몸의 일에 헌신시켜야 한다.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수행인 것이다. 이 우선순위가 분명한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뀐 교회는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또 문제는 이 우선순위에 근거해서 전원활성화 Total mobilization 이 되는가 안되는가가 중요하다. 사회적 책임을 더 강조하는 교회의 경우는 인력과 선교적 자원이 점점 감소하지만, 전도를 강조하는 교회는 인력과 선교적 자원이 점점 증가하더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역과 바울의 사역을 보면서 이런 것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행동의 문제, 교회가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에 봉착하는 것이다. 다양한 컨텍스트에서 사회적 행동이 요청되고 해야할 경우가 많다. 어떻게 해야하는가? 왕도가 없다. 그것은 그 때의 교회가 자기의 달란트와 성령의 감화와 신앙적 확신에 의해서 수행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경우에서도 예수님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은 복잡했다. 로마 식민지하에서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유대인 사회에는 몇 개의 그룹이 있었다. 사두개파... 가장 로마당국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자기들의 현상 유지를 위해서, 바리새인들.. 율법만 지킬 수 있으면 로마사람이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젤롯당........에센파.. 아예 떠나서 직접 직통... 예수님은 어느 쪽에 있었는가? 예수님은 독자적인 길을 가신 것이다. 독자적인 길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길이었다. 예수님은 매 상황속에서 이럴때는 이렇게.. 저럴 때는 저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 없다. 큰 원칙만 말씀하셨다. 그리고, 삼년동안 사시면서 상황속에서 말씀하시고 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내 삶과 죽음으로 충분히 가르쳐 주셨다고 생각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도 하늘나라에서 이 땅에 오신 분으로 두 상황, 두 문화권 속에서 존재하셨다. outsider로서 insider로서 insider가 아닌 outsider로서.... 우리가 자기가 확신하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는 있지만,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의 확신가운데 살아갈 때 비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인도의 극렬 힌두교의 문제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 초대교회 교인들은 무력적으로 항쟁하지 않았다. 순교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시대가 지난 후에 교회가 살아 있었다. 십자군 전쟁이 무력으로 해보려고 굉장히 노력하고 정복했지만 지나간 후에는 지금까지 기독교 선교를 망친 많은 요인을 제공하고 있다. 서구 교회의 제국주의 적인 선교정책도 많은 열매를 맺지 못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슬람과 기독교인들이 충돌하고 있는데, 충돌이 일어나는 곳은 기독교인들이 많은 곳이다. 기독교인들이 다수이기 때문에 박해를 해서 회교도들이 저항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회교들이 많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다시 열세에 몰리는 그런 상황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인도에 오랜 선교를 했는데 인도의 교회가 이것을 견딜 수 있도록 선교를 했는가? 초대교회와 중국교회는 견디어 냈다. 그런데, 인도의 교회가 힌두교의 박해를 견뎌내도록 선교를 했고 그렇게 뿌리를 박았는가가 중요하다.... 우리가 본 회퍼를 생각하면 히틀러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본회퍼 자신도 사람들이 막 자동차에 치어 죽는 판에 뒤따라가면서 장례를 치루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냐 운전사를 끌어내려야하는 것 아닌가 라고 이야기했지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많은 말을 하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 어떤 말을 했다고 전체 생애와 신앙의 정신을 평가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앞뒤를 맞추어 보고 문맥을 살펴보고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I knew 디크리히 본 회퍼” 라는 책이 있는데 그 주변의 사람들이 경험한 본 회퍼를 소개하는 것이다. 그의 친구 가운데 히틀러의 친위대원이 있었다. 자기가 히틀러를 쏠 수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본회퍼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자기 형에게 보낸 편지에 내가 극동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 한 내용이 있다. 인도에 가서 간디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으로는 서구의 기독교로서는 이 시대와 앞으로의 시대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다. 뭔가 새로운 탈출을 해야하는데 내가 간디를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어떻든 내가 보기에는 본회퍼도 원칙적으로 절대 평화주의자다. 인도의 상황, 기독교인들, 기도하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선교를 바로 했는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목회하고 선교할 것인가 와도 직결되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때 르 샴봉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약 2500명의 유대인들을 구했다. 유그노 개혁교회가 그것을 했다. 전쟁 후 그것이 알려진 것이다. 그 근처의 다른 지역에도 위그노 교회들이 있었는데 다른 교회들은 못했는데 어떻게 이 교회는 할 수 있었는가? 모두가 목사님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나치가 그것을 알았다면 그 마을 전체가 보복을 당할 일이었다. 어떻게 그런일을 할 수 있었는가? 당국자들이 눈치를 채고 몇번 자기에게 왔었다는 것이다. 양이 피할 곳을 찾을 때 그들을 도와주지 않는 것은 목자가 할 일이 아니다. 목자의 책임은 양을 돌보는 것이라고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관리도 그 말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적극저극적으로 탄압을 하지 않았다. 목사님은 우리는 원칙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라 “매일의 성경 공부와 기도 속에서 성령이 우리에게 감동하시는 대로 우리가 매일 매일 그렇게 살았을 뿐이다”고 대답했다. 결과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주로 학생회 여전도회가 그런 일을 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영적이고 거대하고 계획적이고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께 순종하는 기본적인 삶의 원칙에 순종하는 것이 선교다. 선교는 존재하는 것이다. 선교는 삶이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컨텍스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지 못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과 성령의 능력에 순종하는 것이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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