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제l장 선교신학의 발전
서론
21세기를 향한 선교신학을 나름대로 세가지로 전망하고자 한다. 첫째 변화 속에 연속성 추구, 둘째 협력, 폭 그리고 특이성의 추구 마지막으로 역사가운데와 그 지평 너머의 하나님 나라 추구이다.
1. 변화속의 선교신학
선교대회들에서 1948-61년에 나타난 중요한 강조점은 “선교의 기구로서 교회”이다. 1961- 1975년 대회들에서 나타난 것은 “선교의 장(場)으로서 세계”이고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사상이 수용된 것이 특이하다. 그리고 1975-현재까지는 교회는 선교에 있어서 확고한 도구로 간주되었다. 1940년대 이래로 각 대회들에서 나타난 선교사상들을 아래에 좀 더 그 변화를 고찰하여 볼 필요가 있다. 캐나다 위트비(Whitby IMC 1947) 대회에서 나타난 선교사상은 특히 인간 가운데 성육신의 방법을 통한 실행이라는 전도의 개념 은 특이하다.
독일 윌링겐 대회 (Willingen IMC, 1952) 에서는 선교의 열쇠되는 개념은 바로 “하나님 선교"(missio Dei)였다. 그 개념의 형성에 크게 영향을 준 사람은 혹겐다이크였다. 그는
그는 교회를 사도적 보냄의 기능으로서 보다 “왕국의 기대” (Foretaste)라고 함으로 변경을 넘어 가는 보내는 종래의 선교 개념을 폐기하였다. 그러한 그의 이 같은 선교관점은 종래의 전통적인 사고를 벗어났고 선교를 이데올로기화함으로서 선교 사상을 크게 변형시키고말았다.
가나대회 (Ghana 1957-1958 INC)에서는 IMC를 뉴텔리에서 WCC(1961)에 병합시키는 문제가 주된 논의였다.
다시말하면 영원한 저주아래 있는 세계 영혼을 위하여 보낸다는 선교의 개념이 간과되었고, 교회의 선교는 교회에 있는 그리스도의 충만에로 사람을 인도함이라고 애매하게 규정하였다.
뉴렐리 대회(New Delhi 1961)에서 모든 땅에서 교회의 선교적 그리고 사도적 부름의 의미를 재 숙고하였다. 증거하는 단체로서의 교회의 재 발견은 결코 개별적인 전도라는 종래의 개념에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고 영원한 저주에서부터 인간구원에 보다 그리스도의 지상임재에 무게를 두었다.
멕시코 대회(Mexico 1963) 에서는 “다른 사람을 위한 교회" (The Church for others)와 “세계를 위한 교회”(The Church for the Warld)이라는 표어를 걸고 선교는 6대주의 교회들은 전체 복음을, 전체 세계에 가져다 주는 전체 교회의 공통의 증거라 하였다. 여기에서는 해외선교와 국내전도를 일치시켰는데 그것은 이웃하는 다른 신앙의 사람, 세속의 사람에게 증거함을 강조하였다. “다른 사람을 위한 교회”라는 개념은 미쇼데이 (missio Dei)에 순응하는 표현으로 과도기적 형태였다.
혹켄다이크의 선교사상은 선교가 공간적 개념으로 말하는 것 즉 변경을 가로지르는 운동으로 동등시함올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참된 선교란 메시아적 왕국의 대리자로서 섬김의 기능적 의미에서 이해된다. 그리고 그는 선교를 “살롬" (Shalom)의 메사야적 유형의 실현으로본다. 그가 말한 살롬은 인간의 상황 회복으로 치유된 모든 면 즉 의와 진리, 우애, 의사소통그리고 평화등등으로 요약된다.
교회는 사도의 기능즉 미쇼데이의 종이고 그것은 바로 세상에서 섬기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세상을 교회보다 우위에 둔다.
멜보른 대회(Melbourne 1980)에서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표어아래 뭉쳤다. 하나님 나라가 바로 선태된 주제였는데 나라와 관계되는 열쇠가 된 문제들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취급되었다. 즉 (1) 가난한 자에 대한새소식 (2)하나님 나라와 인간의 노력(투쟁) (3)하나님 나라에 대한 교회의 증거 (4)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부활한 예수이다.
에큐메니칼은 전도를 개별적인 전도나 언어적인 전도 보다 교회가 봉사와 증거에 참여 함을 뜻한다. 혹겐다이크는 그것을 선포, 교제 그리고 봉사의 참여라고도 한다. 재림에대해서는 재림 후의 왕국의 출현보다 현재적 주되심의 실현에 무게를 둔다. 구원은 말하지만 화해적인 구원 보다 새 인간성의 구현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에큐메니칼권에 있어서 보냄의 선교와 구어로 복음을 선포함의 가치는 아주 희미하게 되었다.
교황 바울 4세는 그의 기념적 작품 “우리 시대의 인간들의 전도” (Evange1ti Nuntianti 1975)에서 거짓 가치 체계의 폐기를 위한 도전을 언급 하는데 그는 거기에서 넓고 깊은 의미에서 인간 문화를 복음화시킴과 주님의 나라를 설립하기 위해 인간 문화의 요소를 빌림과 그리고 문화에의 복음의 침투를 강초한다.
콜롬비아 메텔련(Medellin 1979)에서 그 회의는 라틴 아메리카의 낙후, 기근, 비참함, 질병, 문맹, 소외, 불평 그리고 사회적 긴장과 폭력 등을 라틴 아메리카의 비극의 기호로서 교회는 시대의 기호를 분별하고, 참여하며, 협력하여 해방과 인간 성장을 추구해야 할 것을 말하였다. 가난한자는 하나님의 눈에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고통 받는자와는 연대를 이룸에 대해 주장하였다. 로마에서 개최된 미래 선교에 대한 연구센터의 세미나에는 6대주에서 45개 가톨릭 선교단체들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SEDO 세미나는 기독교회의 4가지 중요 선교사역은 선포, 다이얼로그, 문화화 그리고 해방이라 하였다. 그것은 로마가톨릭 선교의 또다른하나의 가치있는전망이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로마 가툴릭 선교사고는 에큐메니칼의 그것과 병행 내지 일치한다.
보수주의 에서는 세계대전 이후 특히 1960년대 후 횟튼대회(1966) , 베르린 대회 0966) , 그리고 로잔대회(1974)를 통하여 그들의 선교사상올 결집과 복음주의 선교관올 재 다짐하였다.
선교에 있어서 그들의 공통적인 관점이라면 개인적인 기독인의 경험, 언어적 증거를 통하여 타자와의 신앙을 공유함, 보수적 교리입장, 즉 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처녀탄생, 그리스도의 신성, 대속적 죽음, 육적 부활, 심판을 위한 예수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재립에 대한믿음이었다.
로잔대회는 로잔언약(Covenant)을 내어놓았다16)
기독인의 사회책임에 대해 그 언약은 인간과의 화해가 바로 하나님과의 화해는 아니지만 사회적 행동과 해방의 구원과 전도는 기독인의 임무이라고 규정한다. 이유는 구원의 메시지는 소외, 억압, 그리고 차별을 폐기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쉬는 선교가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위기에 처한 것은 오늘의 상황 때문이라 한다. 즉 그 이유로 (1)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가속화된 세속화의 세계 (2) 서방세계의 비기독교화 (3) 마디마디로 구분된 기독교 세계와 비기독교 세계의 구분이 사라짐과 비기독교화된 서방 타 종교가 횡행하는 서방세계가 됨 (4) 유색인들올 정복하고 착취한데 대한 서방 기독인의 죄책감으로 그들은 소망의 이유를 말하려고 하지 않음 (5) 부자와 가난한자의 구분이 심각함과 가난한자는 고뇌 가운데 있지만 부유한 서방 기독인은 신앙을 공유할 생각이 부족함 (6) 3세계 교회의 자율화의 강한 소망으로 서방신학의 수용를 원치 않음 등을 지적한다.
개혁주의 선교학자 보쉬조차 이 시대의 알맞는 선교 개념올 말하는데 그것은 에큐메니칼 선교개념과 가톨릭의 그것에 많은 영향을 입은 데서 나온 것 같다.
그는 (1) 선교는 설복만이 아니고 타종교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나눔이라고 함으로 다이얼로그를 중요한 수단으로 여김 (2) Mission 과 Missiones를 구분하는데 전자를 Missio Dei로 Missiones 를 특별한 형태의 교회가 하는 일로 규정함으로 교회를 선교로 보고 보내는 선교의 개념이 강조되지 않고 있는 점 (3) 선교는 세상에 대해 예스 (Yes)라고 말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이 세상을 향하였다고 하고 세상과의 유대를 강조함 (4) 선교는 세상에 대해 노(No)라고 함으로 세상의 가난, 억제, 차별에 대하여 대항, 반대를 말함 (5) 선교효과는 교회는 세상의 성례, 중보, 대표 그리고 기대라고 함으로 에큐메 니칼권의 교회관과 천주교의 그것과 일치를 보여주고 있으며 특별한 보내는 선교기관을 중시하지 않음에서도 그러하다.
맥가브란 (McGavran) 박사는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이 선교이다라고 함으로 파송의 개념을 망각한 움쌀라 대회의 결의는 불신의 20억이라는 인구를 배반한 것으로 규정지었다.
맥가브란은 그의 선교 정의에서 선교의 3가지 요소를 말하는데 (1) 복음을 선포함 (2) 사람을 설복하여 그리스도를 수용케 하여 그의 제자가 되게함 (3) 그로 하여금 교회의 삶에 책임적으로 참여케 함이라 한다.
21C를조망하는지점에서 총신선교학은 마땅히 신구약 성경, 경건주의 운동, 부홍운동, 교회중심사상에 근거를 두고 발전한 한국교회의 전통을 단절시키지 않고 현대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통찰을 갖고 추진해야 할 것이다.
2. 선교신학의 위치
계적인 선교는 19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확대되었고 그 전에는 국지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기때문이다.
선교학적 사고에 있어서 풍부한 사람은 성 어그스틴이다. 그의 저서 하나님의 나라는 선교철학이라 불려질 수 있다.
중세기초 교황과 감독들의 사상들 그리고 대회때 나타난 선언서 등은 선교적 사고를 보인다.
레이몬드는 변증술을 통하여 즉 그런 기술적인 방법으로 이슬람을 기독교인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기독인의 증거 방식으로 그것을 추천한다.
중세기의 선교는 대 그레고리의 천사사건, 영국과의 접근, 이교도인 독일 민족과의 접근, 후기에는 이슬람과의 접근의 그 주된 흐름이다. 거기에서 선교문제가 야기되었고 또한 그것에 대한 반성도 뒤따랐다. 16세기, 17세기에 이르자 기독교 눈 앞에는 새로운 거대한 비기독교 세계가 선교지로서 전개되었다.
17세기,18세기에 선교에 관계되는 문서는 주로 중국과 인도선교에 대한 것이었는데 선교의 원리에 있어서 개혁할 점 그리고 문제들을 논하고 있다(Ibid.). 18세기, 19세기 초기 가톨릭 국가들의 식민지 권세들의 위치가 위축이 되어 선교적인 물음을 다룬 문화적인 작품도 극히 미미 하였다.
이 시기의 선교란 세계적인 힘인 스페인의 장식물로서, 혹은 식민지 세력으로서 비기독교세계에 관계되었다는점이 특색이다. 16세기, 17세기의 선교권내에서 선교를 위한 문서의 출현은 화란에서였다. 설교가이면서 라이댄 대학 교수였던 사라비아 (Adrianus Sarav)는 1590년 “주에 의해 설립된 주의 전달자들의 다양한 측면들에 관한 연구” (De diversis ministrorum Euangelii gradibus sicut a Domino fueram insti)라는 논문을 런던에서 발표하였다.
유소니우스 (Justas Heurnius)는 라이멘 대학에서 1618년 한 논문 즉 “De Legatione Evangelica ad indα cappassencla admonitiou"를 썼는데 그 책은 인도인에게 전할 복음의 유산에 대한 것이다.
그는 로마 가톨릭과 이슬랍을 저물어가는 황혼에 비교하고 아시아에 복음을 전할 기회를 말하고 선교 방법론, 성경번역 그리고 성경적 설교 동을 논하였다. 어부, 무역업자, 병사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대한 선교를 고무시켰다.이 책은 훗날 윌리암케리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19세기에 이르러 독일에서 선교의 문제에 대한 토론은 더 활발하였다. 슈라이마허(Friedrich Daniel Schleinnacher)는 신학으로서 선교학올 정초 하였는데, 선교학을 광의의 신학 영역에 두어야 함을 말하고 특히 실천신학 단원에 포함시켰다. 그는 선교학을 “교회 영역이나 근처에 살고 있는 종교 문외한 사이에 행해질 때 개종지들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이론이라 하였다.
선교학이 신학교나 대학에서 독립된 학문이 되기까지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제약과 난관이 따랐다. 그 원인은 우선 15세기 가톨릭 교회는 열렬히 선교프로그램을 출항시킨 반면 개혁주의측의 선교노력은 너무나 미미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교를 교회 주변에만 관심을 가진 전도 정도로 생각하였고, 기구적인 교회 봉사와 교구적이고, 국내적인 사역 즉 실천 신학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지칠줄 모른 바네크(Gustav Wameck)의 노력에 의해 선교학은 손님이 아닌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굳히게 되었다.
바네크의 그러한 공헌은 프로테스탄트에서 뿐 아니라 가툴릭 측에서 더 영향을 끼쳐 선교신학이 발전되었다.
영국에서는 선교학을 분리된 학문으로써가 아니고 신학의 전 분야에서 선교적 차원을 융합시켜 가르치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다른 신학분야의 교수들이 모든 신학의 선교적 차원을 충분히 인식 하지 못하는 경우와 그것에 무관심할 경우 문제라 지적한다. 오늘에 이르러 미국에서는 풀러,트리니티, 칼빈 그리고 웨스트민스터와 같은 복음주의적 신학교들에서는 선교학이 독립된 학문으로써 뿐 아니라 선교대학원을 두어 전문화하고 있다.
먼저 선교신학의 정립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다른 세계의 신학 분야와 협력 공조를 해야한다. 전체의 신학내에서 하나의 독특한 테마를 전체 신학의 협력으로 신학적 사고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전체 안에서 새로운 면을 확보하고 그것을 실제에 적용시킨다.
선교신학의 토대를 놓기 위해 성경 신학과 병행,협력하여 연구함이 필요하다. 성경 해석학과 주석은 교회 선교에 대한 충분하고도 바른 이해를 위해 필수적이다. 예수님의 선교와 그명령 사도사(使徒史)에 있어서 바울 사도의 선교 철학 즉 문화적응과 이방인에 대한 태도와 그 방법론의 모델에 대한 해석학적 연구에 성서 신학의 관심과 도움이 요구된다.
우리는 살롬의 신학, 해방신학 그리고 희망의 신학 등에 대해 신학적 정당성 여부를 조직신학과 협력하여 연구해야 할 것이다.
선교학은 여러 선교지역에서 야기되는 문제들에 대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그런 점에서 다른 신학 분야에 병합 시킴이 도저히 불가능함을 알게 된다. 이유는 발생되는 문제들에 대해 특별히 결정해야 할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선교학이 독립과목으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신학으로 하여금 선교적 성격을 항상 가지게 끔 함이며, 그 신학의 분야를 위하여 필요할 뿐 아니라 선교신학을 위하여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의 진리가 문화란 탈이 벗겨져서 옮겨져야 한다. 과학의 급속한 발전의 영향을받는 사회, 현대기술로 말미암아 한충 더 서로 가까이 된 지구위의 사람들, 그런 가운데서도 신앙과 가치를 상실한 사람들, 그런 사회에 유효한 신학적 접근은 우리가 연구해야 할 선교적 과제임에 틀림 없다. 선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상황, 기독인의 경험 그리고 교회의 이해로 융합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선교의 분야는 네 분야의 신학 연구 외에 문화 인류학,종교학, 커뮤니케이션의 이론 그리고 선교전략 등으로 넓게 연구 되어야 한다.
야마모리에 의하면 아직도 6대주에 흩어져 있는 미접근 종족은 무려 5,310개이다. 그는 그들 종족 접근을 위해 9가지 단계를 제시한다. 즉 1) 조망 2) 통일화 즉 목표지점을 정함 3) 기도 4) 양자 삼음 5) 인원동원 즉 전 종족들에 침투할 60만 특수 요원이 필요함이 훈련 7) 전략, 구제, 발전 프로그램올 운용허는 전도 전략올 세움 8) 평가 결과에 대한 것 그리고 9) 참여 그곳 토착 교회와 외부 교회와의 연대 수립과 기도 와 정보를 공유함이라 한다.
3. 하님나라 위한 선교신학
19C는 선교의 위대한 세기였고 19C에 있어서 선교적 충동은 18세기와 19세기 초반에 일어난 미국의 부에 근거되었고 그것은 유럽의 경건주의에 영향을 은바가 크다.
자유주의 쪽에서 그들의 선교사업에 대해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경건주의적 신학적 사고는 영혼구원 중심적이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한 적극적인 사고가 부재한다고 지적한다.
근본주의는 예수그리스도의 처녀탄생, 육체적 부활, 성경의 무오성, 그리고 주의 급속한 재림을 믿음의 요체로 보고 자유주의로부터 교회를 구원하려는 목적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선교적 열의는 급속한 주의 재림 이전에 급속히 세계선교가 이루어져야 한다는데 근거하였다.
그들의 영혼구원중심, 세계를 부정하는 차세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신 복음주의는 교리주의를 반대하고 여자적으로 무오하다는 성경 영감론을 반대하고 고등비평을 수용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와는 달리 자연신학을 반대하고 성경의 여자적 무오를 믿지 않으나 성경의 상징과 신비를 나름대로 수용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위대한 행동을 계시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신복음주의의 선교적 동기는 경험 공유나 인류애적 사업 운영이 아니고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자(自)계시에 둔다. 언행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함, 진리를 의사소통함을 선교의 수단으로 본다.
자유주의는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자유로이 묻고 조사하고 즉 이전의 입장을 재구성함에 자유롭다. 그들은 이성과 경험을 존중하며 정통에 구애 받지 않고 인간과 관련하여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시도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서든지 모든 사람의 화해나 치유를 위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난다고 한다. 서로를 위해 타인과의 동일화, 그들의 삶의 유형을 이해함, 그들의 삶에 새 삶을 공유하도록 함을 선교로 본다.
자유주의 성향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와 선교를 연계하여 생각할때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를 위함 보다 현재 이미 오신 신적인 힘을 크게 보고, 현재 여기에 그의 나라 실현에 강조를 둔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며 죄를 회개케 하며 선교를 주도하고 인도하는 성령에 인도함을 받아 교회를 심고 성장시키며 교회지도자를 양성하는 이 선교적 과업에 매진할 따름이다.
제2장
선교를 왜 해야 할까?
선교의본 질적 성격 규명과 함께 선교에 장애가 되고 있는 심리적이고 문화적이며 신학적인 요소들올 찾아보고자 한다. 왜L
1. 선교의 요체
첫째, 선교의 요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목적에 따라 예수의 구원과 은사를 받도록 사랑을 부르는 사역이다.
성경은 그같은 하나님의 계획올 보여 주고 있는데,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올 얻게 되는 것(요 3: 16)과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는 것(고후 5: 19)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다른 종류의 사역들, 즉 목회나 기독교 교육이나 상담의 일들도 선교와 일의 구획을 분리할 수 없는 것은 모두가 같은 목적을 위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태여 선교를 그것들과 구별하자면, 목회나 상담이나 교육은 복음을 인간 삶 전반에 직접적으로 적용시키는 일이고, 선교란 그런 하나님의 나라의 전반적인 일을 넓게 소개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선교의 요체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에로 불러 제자가 되게 하고 세례를 거쳐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무리와 교제, 연합하게 하는 일이다.
그분은 세 가지 중대한사역, 즉 가서 모든족속을 정복하는 일(왕의 일) 세례를 주는 일(제사장의 일), 그리고 가르쳐 지키케 하는 일(선지자의 일)을 교회에 명령하셨다.
교회와 선교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문제이다. 한 사람이 회심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은 교회 밖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회심자를 성숙케 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선교를 추진하는 일이라 하겠다.
교회의 위치는 이미외(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에 위치하는 말세적 단체이다.
에밀 부룬너는 “불이 탐으로 존재함 같이 교회는 선교함으로 존재한다”라고 하였다. 만약교인들이 한 교회의 회원이 되어 자리 채우는 데에만 그친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수 없다. 그 이유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는 주님 말씀을 전혀 따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가 회원수 확보와 자체 봉사에만 그치고 있다면, 꺼진불처럼 세상의 단체일수는 있으나 그리스도가 활동하시는 공동체라고는 말할 수 없다.
2. 선교의 요청(要請)
첫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요청이다.
구약에서는 현대 선교와 같은 이방인의 회개의 선교를 권장한 사실을 볼수 없다. 그러나 선교적 관심, 즉 세계적 관심은 여러 곳에서 찾올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유대인들을 선민으로 택하신 것은 결단코 편애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함이 아니고 세계를 향한 그분의 뜻이 그들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말함이다(창 12: 3).
그리스도 예수의 조상 가운데 라합과 룻이 이방인으로서 선민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고무적인 사실이다.
구약은 하나님이 임마누엘로 나타나시기 이전 수세기에 걸쳐 유대인의 선택을 통하여 이방인에게 구원이 미칠 것과, 이방인들이 결단코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는 증거를 여러 모양으로 보여 준다.
둘째,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요청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은 인간을 정복하시기 위해 오심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기와 관련된 사건들을 볼 때, 우리는 그가 결코 유대적이라기보다 세계적임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당신의 선교는 이스라엘의 앓은 양을 찾으로 온 것(마 15 : 24)이라고 하였으나, 그것은 그의 선교의 차서 (次序)를 말함이지 결코 이방인을 배제하는 말씀은 아닌 것이다.
예수님은 지신을 가리켜 “인자”(son of man)라고 하셨는데, 그것 역시 그가 어디까지나 세계적인 사람, 세상의 구주되심을 암시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제지들에게 주신 명령은(마 28: 16- 20)더 말할 것 없이 세계적인 선교를 촉구하는 요청임에 틀림없다.
셋째, 은혜 입은자의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요청이다.
넷째, 이방 세계의 상황에서 오는 요청이다.
다섯째, 이방세계가 스스로 구원을 갈망하는 데서 오는 요청이다. 이방 세계는 다 익은 곡식을 곳간으로 거둬들일 추수꾼을 기다리는 것처럼 주의 구원을 갈망하고 있다.
이방인들이라 해서 전혀 하나님의 도(道)에 생소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연 계시가 있기 때문이다. 자연 계시는 선교의 기초가 된다.
오늘의 시대적인 요청을 볼 때, 우리는 널리 퍼지면서(diffusion) 침투(pnetration)해야 함이 주의 뜻이다.
3. 선교와 선포(宣布)
오늘날 신학자들은, 선교를 영적 운동심령에 일어나는 영적 사건을 무엇보다 중요시동{}}는 사람들과 새로운 사회 질서를 위한 운 동으후보는사랍들로크게 갈라지고 있다. 끼
전자롤 “보으 주의적 접근" (ev;와1ge1ical approach)이라 한다면, 후자는 “인본주의적 접 근.. (humanistic approach)이라 하겠다. 후
선교에 대한복음주의적인 견해를 몇 가지로 정리해 보고자한다,
첫째, 선교의 본질은 구원의 선포이다.
격사 가운데 실제로 이루어진 객관적 사실이요 진리이다
둘째, 선교의 본질은 부름의 선포이다. 그 부름이란 죽음에서 삶에로의 부름을 말함과 동시에 성도의 모엄에로부름을 말한다. 그런
그리스도인의 펠로우십인 교 회가인간심령에의미가있는것은,주님의 임재가흘로있는개인에게보 다 펠로우십 가운데 나타나기 때문이다.
셋째, 선교의 본질은 증거의 선포이다. 증거란 구원에 대한 증거일 뿐 아니라 멸망과 심판의 중거도 된다.
선교란 세상이 그리스도를 불신함과 어리석음과 고집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꼬집는 증거이다.
넷째, 선교의 본질은 만유의 왕이신 주의 행차의 선포이다.
선교에 있어서 메시지 전달만을 중요시하고 봉사를 빼버리는 것은 잘못이다. 선교에는 제사장적 자비가 선지자적 중언과 함께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봉사없는 증거는 외식이고 비효과적이며 증거 없는봉사는 봉사로만 그치게 되는 것이다. 봉사는 증거의 필연적 표현이다.
4. 선교의 장애(障隔)
선교에는 장애가 항상 있어 왔다. 문제는 그것이 교회 안에서부터 있어 왔다는 데 있다.
선교를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해롤드 쿡은 그의 [기독교 선교]라는 책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국내에서부터라고 하면서 선교를 불필요한 사치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주장은 하나의 주장에 불과하고 위장이며 내면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1)인격적이고 활력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의 부족 (2)자기 중심주의 (3)세계에 대한 이해 부족 (4)숙명론적인 구원관 때문이라한다.
첫째, 자체 문화에 대한 회의(懷疑)이다. 그런 태도를 문화적 자학이라고도 한다.
인종 문제, 교육 문제, 빈민 복지 문제 등으로 그들 사회는 신음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들은 해외선교에서 움츠러들게 된 것이다.
둘째, 폭넓은 관용주의이다.
그들의 관용적 태도는 타지역의 타종교에 대해서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셋째, 문화상대주의이다. 문화상대주의란 한 문화의 옳고 그름을 가릴 객관적인 규준이 있을수 없다는 견해이다.
그들에 의하면 문화란 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종교에 변화를 주면 문화 전체에 혼란이 오니, 다른 종교 신앙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날슨(David K.)은 오늘날 회심을 위한 접근이 약화된데 대해 몇 가지 이유를 말한다. (I) 보편주의 (universalism) (2) 섬멸주의 (anihilationism) (3) 사회활동주의(social activism) (4) 극칼빈주의 (hypercalvinism) 그리고(5) 심리주의에 돌린다.
이상과 같은 기독교 선교를 방해하고 있는 사고방식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 보지않을 수 없다.
첫째, 기독교와 서방문화는 별개의 것으로 구별해야한다.
이방인들이 미신과 무지에서 깨어나 우주적 윤리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선교 운동의 열매이다.
둘째, 성정적인 변화가 오늘날도 이방에 요구된다.
기독교는 세계의 종교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세계적인 종교이다. 그것은 기독교가 선교의 종교임을 입증한다.
어떻든 교회는, 빛과 소금처럼 자신을 희생시키는 겸손과 밖으로 확장하는 용기를 가지고 나아갈 때, 가치있는 열매를 거두어 들일 것임에 틀림없다.
제3장
선교와 바른 동기
화란 자유 대학의 선교학 교수 버차일(J. C)에 의하면, 선교의 동기에는 순수한 동기가 있는가 하면 순수하지 못한 동기도 있다고 한다.
첫째, 순종의 동기가 있다.
바울의 선교 동기는 주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다.
선교에 있어서 순종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율법화시켜도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선교를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어떤 개인적인 흥미나 취미거리로 말할 수는 더더욱 없다.
둘째, 사랑, 긍휼, 그리고 자비의 동기이다. 선교의 동기가 사랑, 긍휼, 그리고 자비에 근거를 두어야 할 이유중 하나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 긍휼 그리고 자비의 대상이 되어 구원받았다는 점과, 다른 하나는 이방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것을 필요료 한다는 점이다.
셋째, 영광의 동기(the Motive of Doxology)이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 영광 중심의 사상’에 대해 오해하여 기독교의 하나님은 희랍의 신 나시수스(Narcissus)처럼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하나님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은잘못 된 생각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신성의 충만이고 그분의 존재의 현현이다.
넷째, 종말론적 동기이다. 주기도문에서 두 번째 간구의 기도는 “나라이 임하옵시며”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충만함은 전 세계적으로 주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만약 교회가 주의 왕국에 대한 열망과 아울러 이방 가운데서 그의 왕국의 충만함(확산)을 소원하지 않는다연 그것은 더 이상 교회일 수 없다. 살아 있는 교회라면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로 모든 이방인들을 모으는 데 가슴올 태워야 마땅하다.
다섯째, 화급의 동기이다.
시간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인간에게는 무한의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고로 시간을 낭비함 없이 목적 추구에 쏟아야 할 것이다.
여섯째, 개인적인 유익의 동기이다.
복음을 나눈다는 것은 영생의 생물을 그 샘에서 퍼내는 것 처럼 결코 마름이 없다.(요4: 14) 복음의 나눔이 없을 때 교회는 내향적이 되고 논쟁적이 된다.
불순한 동기에서 선교를 추진하였던 바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첫째, 제국주의와 결탁하였던 서방의 선교 실행이다.
둘째, 문화적 동기이다.
바울은 문화보다 초문화인 그리스도의 전달에 관심올 두었다. 그는 어떤 문화를 전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사자로서 복음전파에만 힘썼다.
셋째, 상업적인 동기(the Commercial Mαive)이다.
마지막으로, 교회 식민주의적 동기이다.
토착 교회가 따라야 할 교회 형태는 구미의 것이 아니라 신약적인 것 이어야한다.
제4장
선교란 무엇인가?
Mission이란 라틴어에서 차용한 말이다. 이 말은 파견(sendung) , 혹은 사명(aufgabe), 혹은 위임(auftrag)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선교는 교회가 불신 세계를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하려는 노력이다. 그것은 교회가 자신의 경내를 넘어 바깥으로 나아감에서 이루어진다.
천주교에서는 비가톨릭은 모두 선교의 대상 지역으로 간주한다. 다시 말하면 비가톨릭 지역에 복음전파의 의무가 있다고 한다. 용어에 있어서도 그들은 선교라는 말 대신 “사도직의 일" “신앙의 선전” (propagario fidei)이라는 말들을 사용한다.
2. 용어 해설(선교 사업과 관련)
(1) Mission
이 말은 missions와 구별하여 사용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총제적인 성경적 과업”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고 교회의 안팎의 사역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이다.
(2) Missions
선교란 신약 시대 교회가 변경과 그의 직접적인 복음 영향권 그 너머에 공인된 사람을 보내어 복음의 빈곤지역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함과, 타신앙 내지 무신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의 회심자를 얻어내는 것과, 속한 단체나 나라에서 기독교의 열매가 되는 기 능적이고 번식적인 지역 교회를 세우는 일.
(3) 복음화(evangelization)
복음화는 기독교 사역에 있어서 우선시되는 사역으로서 , 회심자를 만들려는 결정적인(단호한) 목적올 가지고 적합하고도 지적인 언어와 설복적인 방법으로 성경에 계시된 바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올 권위적으로 선포하는 일을 말한다. 그것은 타신앙자와 무신앙자의 회심을 위한 복음의 효과적인 제시, 즉 결단의 제시이고, 용어 침투적이고 잠입적이고 대결적인 모든 것을 포함한다.
(4) 기독교화
이것은 복음화 이후 따라야하는 사역이다. 즉 믿는 자로 하여금 복음과 기독교의 윤리로 무장시키는 일올 기독교화라 한다. 환언하면 믿는 자를 그의 제자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어떤 개인을 그리스도화시킨다는 것은 그의 전 생애가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고, 주의 효과적인 증거자가 되게 하며, 유용한 종(principles)으로 사회에 침투토록하는 것이다. 제자회는 기독교화의 동의어이다.
(5) 사회화
기독교화라는 것이 개인 신자가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는 일이라면, 사회화는 개인 신자로 하여금 신자의 공동체인 교회나 기독교 공동체가 인정하는 기독교의 이상, 모범, 제도에 부합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공동체의 삶은사회화의 목적이다.
(6) 문명화
한 문화를 기독교 문화와 동일화시킴올 말한다. 문제는 기독교 문제화가 어떤 것인가에 있다. 리츌은 서방 문화를 기독교 문화와 동일시하였다. 그러나 세상에는 기독교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서양 문화는 세속주의(secularism)로, 동양은 범신론으로, 하나님이 원하는 문 화와 먼 거리에 있다는 것이다.
3. 선교의 개념과 정의
(1) 피터 바이엘하우스(Peter Beyerhaus)
“선교란 무엇인가” 할 때, 보통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 까지 전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 근거는 선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선교의 방향을 찾을 수 있다.
그의 선교는 첫째로 복음 전파와 병 치료에 전념하였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이 대중을 긍휼히 여기심을 본다.
셋째로, 예수님은 추수할 일꾼올 보낸다.
넷째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택하여 안수하시고 대표자로 보내셨다.
그는 선교의 개념을 성경적으로 정리하였다.
첫째, 선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선교의 관심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다. 선교는 세상의 대변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는 것이다.
둘째, 선교는 영원한 구속을 주는 것이다.
에큐메니칼 신학자들은살롬, 즉 평화 · 조화 · 번영의 실현을 선교라 한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죽음에 직면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화해(reconciliation)로 말미암는 평화, 에이레네(eirene)가 필요하다.
셋째, 선교는 악한 마귀를 내쫓는 것이다.
예수님의 오심은 귀신의 역사를 부수기 위함이었다. 선교는 마귀를 그 권좌에서 축출하는 것이다^
넷째 , 선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다(a mission which prepares Christ‘s return). 그의 우주적 통치의 교두보인 교회는, 주의 돌아오심을 준비함에서 모든 백성 앞에 복음을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보내어졌다.
(2) 오를란도코스타스
그는 자신의 책 [선교의 본래 모습](the Integrity of Mission)에서 선교에 대해 몇 가지로간추리고 있다. 그의 설명은다음과 같다.
첫째, 선교는 선포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선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1) 주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이다. 주의 이름을 선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개념을 전달함이 아니고 그의 인격과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의 나라는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삶의 새 질서, 새 인간성, 새 창조라는 말로 표현되 는 역사의 변혁을 말한다. 하나님 나라는 이처럼 현재일 뿐 아니라 미래에 다가올 나라임을 부인할 수 없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 자체는 아니나 그것의 가시적 표현이며 충성스러운 해석자이다.
(3)하나님의 은혜의 순간(회심의 결단)을 선포함이다.
회심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아래서 새로운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새로운 인간성 회복하는 것이고, 새로운 가치관과 태도를 견지함과 동시에 하나님과 사회(이웃)에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다.
둘째, 선교는 제자를 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1) 신자가 새 단체에 연합됨으로 주를 따름을 말한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전인적인 교육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기간에 끝나지 않고 평생 이루어지는 것이다.
(2) 예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3) 예수를 순종하는 것이다. 여기서 순종이라 함은 맹목적인 복종이나 딱딱한 이데올로기의 수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의미한다.
셋째, 선교는 활동(mobilization)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도록 하자면 동기를 가지게 하는 일, 자원의 확보와 인원을 선택하는 일, 공동의 노력을 하기 위한 조직을 구성하는 일, 문제점이 되는 곳을 살피고효과적으로 일을 하도록 감독하는 일 등이 필요하다.
활동의 과정은 (1)의식화 (2)분석 (3)계획 (4)공동의 노력 (5)평가의 순으로 그 과정을 정할 수 있다.
활동을 고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이 계속적으로 권고되어야한다. 그래서 말씀으로 동기를 갖게 되고,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며, 열심과 소망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진행케 된다.
넷째, 선교는 복합적 성장이다.
증거, 권면, 상담으로 폭의 성장을 도모해야 하며, 신학의 이해와 봉사, 그리고 교제로 깊이의 성장을 해야 하고, 빛된 삶, 타인을 위한 삶, 희생의 삶 등으로, 높이의 성장을 해야 한다.
다섯째, 선교는 해방(liberation)이다.
해방의 개념에는 세 가지 카테고리, 즉 (1)가난함 (2)눈멂, 그리고 (3)포로됨과 압박 받음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눈먼 자는 육적인 맹인 외에 하나님의 계시를 모르는 자, 이방인, 문맹자, 교육을 못 받은 자들을 의미한다. 포로된자와 압박받는 자는 부채를 갚을길이 없어 종이 된 자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선교는 축하(celebration)이다. 선교는 승리적인 상황을 축하함이고 교회를 축하함이며 예배의 연속이다.
(3)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선교는 하나님께 그 기원을 둔다.
선교의 주체는 삼위 하나님이시다.
벌링겐회의의 보고서에서는 선교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 이라고 하였다. 그 보고서의 글귀는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선교 운동은 삼위일체 하나님 그 자신 안에 근거를 가진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체계적 정립은 그 대회 이후 조지 비세돔( George Vicedom)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하나님 나라가 선교의 ,목표인데 그것은 종말론적 성격을 가진다.
미래는 구속사업의 연장선상에서 완성되는 것이므로 단순히 미래만 바라는 것은 옳지 않으며, 과거에 이룩한 구속 사업을 중시하는 가운데 미래를 바라야 할 것을 말한다.
즉, 주 예수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과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에 포개어 이루어 놓으려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이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의 선교를 관찰할 때 종래의 선교 이해와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사상이 말하는 선교 철학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첫째로, 그것은 종래의 선교 목표인 ‘교회 세우는 일’ (implantioecclesiae)의 약화를 뜻한다.
구속 역사에 있어서 교회의 중요성이 없어진 것은 아니나 바뀌어졌다. 즉, 종래의 ‘하나님 →교회 →세계’ 라는 구원사역의 차서는 ‘하나님 → 세계 → 교회’ 라는 차서로 바뀌었다.
둘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인간화에 둔다.
즉, 도시,농촌,학생,특수그룹등, 인간의 일에 관심과 참여를 강조환다. 나병, 말라리아, 무지와 약함, 그리고 가난을 위한 치병(治病)과 도우는 일은 모두 선교이며 그런 일을 하는 사 람은 하나님이 보낸 선교사들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그것은 역사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역사의 심판자(judge)로서, 그리고 해방자로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하여 모든 내용을 그대로 긍정할 수 없다. 메시야의 행동,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행동만 강조한 나머지 선교적인 선포가 약화될 수는 없다.
(4) 칼 바르트
그의 선교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화해 사건을 선교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서 선교 신학을 도출하는 하나님의 선교와는 달리, 그가 그리스도의 화해 사건에서 그의 선교 신학을 도출하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화해 사건으로 구원을 위해 필요한 화해가 이미 이루어졌다. 교회의 “선교 파업은 이것을 그들에게 알리는 데만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선교의 목적이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개인적인 기쁨을 가져다 주는 회심에 있지 않고 이미 이루어진 화해에 대한 증인을 만드는 데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선교에 있어서 인간은 구원을 얻도록 초청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증인이 되게 하는 부름에 초청되는 것 뿐이다. 그리고 인간이 이미 하나님과 화해가 되었다는 견해는 보편적 구원론이 되는 것이다.
(5)구스타프 바네크
바네크는 복음선포를 교회를 세우고 조직하는 것에 연관시켰다.
선교사는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대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6) 월터 프레이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이방인 가운데에서도 이루어져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임하도록 관철하려는 그분의 계획 가운데 하나님의 행동에 동참하는 것이 선교이다.
1) 하나님의 행동이다. 2)공동체의 모임이다.
(7) 해롤드 쿡
쿡은 “선교란 선교사라고 부르는 선택된 일꾼들의 그룹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신앙에로 인도하려는 기독교의 노력이다”
첫째, 선교는 교회의 일이다.
둘째, 선교는 다른 사람을 얻으려는 교회의 노력이다.
셋째, 선교는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신앙에로 이끄는 것이다.
넷째, 선교는선택된 일꾼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4. 선교학의 연구 대상
선교학의 연구 대상은 신학과 함께 사회과학을 통한 인간 구원에 관한 것이다.
미국 선교학회는 티펫 교수의 선교학 정의와 같은 내용을 이렇게 말한다. “과학인 선교학은 인류학, 동문화 의사소통이론, 에큐메니칼 운동, 역사, 문화관계 연구, 방법론, 종교적 조우, 그리고 신학과 같은 학문을 결합함으로써, 기독교 선교의 이론 그리고 실천에 관한 조직적 연구이다.
제5장
선교는 어디로
선교가 어떤 특정한 지역의 교회나 인물들의 전용물이 될 수는 없다. 선교는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부과된 사명이다.
따라서 교회와 선교는 분리될 수 없고, 선교 신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신학이 바로 선교신학이다.
교회가 선교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두 가지 관점에서 관찰하고자 한다.
첫째, 교회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공동체{the eschatological community}리는 관점에서 선교 사명을 강조하고자 한다.
교회의 종말론적 위치는 교회의 시대적 사명이 높고 위대함을 말한다.
1).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려진 시대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십자가의 대속적 죽음, 부활의 승리, 생령의 내림)로 정철된 시대이다.
2). 그로 말미암아 교회(그리스도의 지체)가 설립되어 하나님의 통치가 지상에 임하는 시대이다.
3). 교회에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여야 할 사명이 주어졌다.
4). 교회는 장차 임할 주님의 나라를 선포할 사명이 있다.
5). 교회는 복음으로 세계를 가득채우며, 세계 역사를 변화시켜야 할 사명이 있다.
이상의 사실을 요약하여 말하면, 교회의 시대는 무한한 복으로 채워진 시대요, 교회는 그 위대한 사명, 즉 세계와 그 역사를 하나님의 것으로 복귀케 하는 일에 종사해야 한다.
둘째, “교회는 세상으로 파송된 단체이다”라는 관점에서 선교의 사명을 논하고자 한다.
교회는 소금과 빛이 되는 사명을 감당키 위하여 그 세계에로 파송된 것이다.
교회는 세계를 그 가슴에 안으며, 세계의 생명과 접촉하며, 그것의 문제점 해결을 위한 분투에 동참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는 이미 온 구원 장차 올 구원을 매개해야하는 사명이 있다.
교회는 세상에 있는 교회, 세상을 위한 교회(the church for others)여야할 것이다. 그것은 교회가 외향적으로 나아가며 세계를 가슴에 품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교회가 순간적이고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의 현현만을 위해 존재 하지 않고 그의 통치의 예기적 현현을 위해 존재한다.
1. 교회 중심주의 선교
교회 중심주의 선교라함은 선교의 직접적인 목적은 무엇보다도 교회를 세우는 것(to plant churches)이라는 말이다.
맥가브란 박사는 인간구원의 요청이 육체적, 교육적인 필요나 어떤 구제 활동보다 훨씬 더 긴박하다고 강조한다.
이같은 전통적인 선교 개념은 한국 교회 선교 운동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고 아니할수 없다. 자치,자급,자전도를 골자로한, 한국교회가 채용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교회 조직에 무엇보다도 역점을 두었다. 그러한 네비우스선교정책에 큰 장점이 있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나가는 외향성 보다는 모으는 내향성에 치중한 사실과 교회 발전만 중시한 나머지 사회적인 봉사를 등한시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지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들에 의하면 참된 교회란 단순히 어떤 지역의 다수의 교회의 묶음이 아니라 교회 내의 남녀가 하나님의 나라로 부름을 받아 거기에 참여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교회 중심주의 선교관에서 지향해야 할 점은 교회가 자기 중시 집착을 벗어나 세계로 향함에 있다고 하겠다. 교회는 세계, 즉 하나님을 떠나 있는 세계로 보내어졌다는 사실과 교회는 타자를 위한 것임을 다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타자를 위한 교회로서 세계에 대한 책임 안에 있을 때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이 선교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교회중심주의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중심에 있지 않고 교회가 그 자리에 있다. 그러나 후자는 전자를 위해 존재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예비적(provisional)인 존재이고 그것에도 사람을 모움이 선교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고 주의 통치를 선포함이 선교 의 목표이다. 교회가 영이 내제하는 단체이지만 그 영은 세상과 단절되지 않고 밖으로 나아감이 되어야한다.
2. 영적 부흥주의 선교
영적 부흥주의 선교라 함은 선교를 인간의 영적인 영역에만 국한하고 인간생애의 총체적 영역에 미치는 것은 제한하는 것을 두고하는 말이다.
바이엘하우스(Beyerhaus)는 신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이 가견적이고 질적인 현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하지만(마24:30), 기본적으로 그것은 영적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마음 위에 승리와 자유를 가져오게 하는 하나님의 구속적인 주재라고 하였다(롬14:17).
우리는 인간 실존 내면 깊이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변화에 목적을 둔 성령 운동을 결단코 반대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참된 화해를 추구하는 성령 운동을 우리는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실현되고 있는 부흥 운동이 진리의 일면만 강조한 나머지 기독교의 다른 중요한 면을 등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경건주의 운동의 강조점은 종교적인 자세, 종교적인 감정에 있고 단순하고 주관적인 성경 연구와 회개와 도덕적 개혁등 실제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등한시한 것이 비판의 대상으로 남고 있다.
에드워드에게서 우리는 개인 종교 경험에 치중한 일면을 볼 수 있다.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 1792-1875)에게서 우리는 한걸음 더 치우친 부홍 신학을 찾을 수 있다. 그는 부흥 운동에 종교 심리학을 적용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건너갈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칼빈주의적 견해를 반대하고 자연과 초자연과의 관계를 인간적 노력으로서 조화적인관계로 성립시킬 수 있다는 원리를 인간 회개 운동에 적용하였다.
무디(1837-1935)의 부흥 철학은 “그리스도로 구원, 그리스도 없이 멸망”이라는 두 가지 어구로 요약된다. 그는 회심자의 숫자에 크게 관심올 두었다.
우리는 에드워드에게서 감정주의, 찰스 피니에게서 피상적인 기교 치중, 무디에게서 단순주의와 대집회 강조, 빌리산데이 에게서 숫자 치중 등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부흥주의에서 온갖 감정주의, 외형주의, 영웅주의 , 단순 낙관주의 등에서 오는 폐단을 볼 수 있다.
이상의 운동들이 개인 영혼 구원에 대해 순수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고그것은 잘못일 수 없다. 선교는 개인의 필요 즉 심경의 고적함, 죄, 죽음 그리고 실의에 처한 개인의 필요를 채움이 중요하다. 그러나 사회적이고 전인적 구원과 해방을 도외시하면 편향적이 됨에 틀림 없다.
3. 사회 봉사주의 선교 <mission as social movement)
이 운동의 골자는 선교라는 가견적 교회 조직이나 영혼을 건져 천국으로 보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생애 전체에 관여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사회적인 제도를 변화시킴에서 어떤 구원의 의미를 찾자는 것이다.
이 운동의 대두는 계몽주의 영향때문이었다. 그 결과 계시와 이성이 동일하게 됨과 신앙의 경험화가 강조되었다. 교회의 확산보다 봉사로서 사회침투와 총체적 접근을 중시하게 되었다.
이 운동의 구원의 개념(the concept of salvation)이란네 가지차원의 구 원올 말한다.CD 인칸에 의한 인간 착취에 대항하여 경제적인 공의를 위한 투쟁에서 얻는 구원,~ 인간에 의한 인간 압박에 대항하여 인간의 존엄성 을위한투쟁에서 얻는구원,e{}})인간이 인간으로부터분리되는것을대향 하여 결속을 위한 노력에서 얻는 구원,@ 인간 생애의 절망에 대항하여 희망쟁취를위한노력에서 얻는구원.
이처럼 이 운동의 구원 개념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데 강조점올 두고 있음이그특색이다.즉
. 평화로운사회 성취를 전도의 목척으로 보는호 켄다이크의 사상은 그같은 실제적인 구원관을 신학적으로 합리화한 사랍 으로볼수있다.그는
j다. 선교가 압박과 불공평 가운데 처한 사 회에서 선지적 그리고 체사장 역할을 수행함이 마땅하다.
이같은 사회적인 구원의 개념 역시 일면의 진리밖에 되지 않는다. 바
뿐만 아니라 바이 옐하우스(Beyerha않)는 호켄다이킹{}} 일면적 인 구원 개념, 즉 선지자들에 의하여 약속된 하나님의 니라 개념에서 끌어 낸 것만 가지고 말한 반면, 신약의 평화 개념(εirene)은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에이레네는 그리스도의 화해의 기초 위에 성립된 인간의 하 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즉 I~까1αl의 관계를 의미한다. 죄인은 어디까지나 복음 선포로십자가에 나아갈 때까지, 즉 믿음으로 화해를 받기 전까지 여 전히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남는디는 것이다89)
결론적으로 우리는 어떤 하나만을 고집할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자교단의 선교 방향이 한쪽으혹만 치우쳐 나가고 있다면 그 방향만 이 최선이라는고집을버리고치우친자리에서 방향올바로잡아야할것 이다. 교회는바야흐로 영혼구원 뿐만아니라착실한사회, 문화의 영역 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세상에서 주님을 선포하는 일과 참된 봉사를 실천하는 일에 균형을 잃지 말고 힘써 행해야 할 것이다.
제6장
성령 운동과 선교
오늘날 세계의 오순절파 운동을 대해 보면 다음과 같다. 1)고전적인 오순절파 운동(Classical Pentecostalism)-19세기 초에 시작하여 교회와 교단을 형성하고 있다. 2)신오순절파 운동(Neo-Pentecastalism)-2차 대전 후 발단하였다. 이 운동은 신교회의 중요한 교단 교회들 가운데서 체험된 것이다. 그러나 자기 교단에 머물고 자체 교단 형성은 시도되지 않았다. 가톨릭의 카리스마주의자들(C따tismatics) - ‘재생’ (renewal)이란 말을 사용한다.3) 제3세계, 특히 아프리카 흑인 교회 가운데의 오순절 운동을 들수 있다.
아주사 운동은 선교의 동기를 불러일으켰으며 그곳은 기독교 세계의 선교 추진지로 유명하였다. 영국의 오순절파 운동은 선교에 많은 재원과 인재를 투입하였다. 화란 오순절파 사람들도 1904년에 벌써 그들 단체를 조직하였고, 6년 뒤에는 암스탤담에서 선교사훈련 학교를 세워 선교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들의 선교 운동은 ‘하나님의 회중’운동으로 시작하여 많은 다른 기관들에 의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선교운동에 열심인 점과 가난한 자와 압박받는 자에게 특별히 접근을 한다는 점에서 오순절운동의 선교는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하겠다. 그들은 교회 성장에 패배주의, 정체와 은둔을 배격하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가진다.
그러나 그들에 의한 오순절은 반복적이라는 주장과 제2의 축복을 언급 함(고전 12:13) 방언은사를 중요시함 그리고 말씀 대신 경험을 강조함은 비성경적이다. 그들의 실천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영적으로 교만을 보임과 신유은사 실천을 예배보다 중요시함 그리스도 중심보다, 성령 중심에서 부터 기독론을 약화시킴 그리고 분열적으로 나아감 등이 그것이다.
교회 교리의 허약함, 회심 후 성령 체험, 물세례와 은사 실현에 대한 신학적인 해답이 불분명하다. 그들의 선교가 문화에 대하여 적응의 위험을 가지고 있으며, 낭비적인 선교양태를 보이고, 계시보다도 체험을 중시하는 것등은 그들의 취약점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기적 체험과 영적인 은사의 추구를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우리는 기독교 선교의 다른 하나의 극단인 오순절파 운동에서 훌륭한 점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그들과 교리적으로 충돌을 할 필요가 없으며 그들을 형제 자매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제7장
교회와 선교
1.교회의성격
선교의 기구로서의 교회와 함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교회를 생각하지 않올 수 없다.
교회는 선교의 목적이요 또한 선교의 기구인 것을 알수있다.
(1) 에클레시아로서의 교회
교회는 단순히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오도록 불러내었다. 에클레시아란 말에서 교회의 구별됨, 교회의 특별 목적, 교회의 일체감, 교회의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암시하는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2) 종말론적 단체로서의 교회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과부활, 하나님의 결정적인 종말론적 행동에서 시작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 새 공동체를 선택받은 자, 혹은 성도라 칭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공동체를 kahal yahweh라 하였는데, 이는 이스라엘을 지칭한 말이다. 신약의 하나님의 교회(ekklesia tou theou)는 이스라엘을 포함한 전 세계 가운데 흩어져 숨어 있는 참 이스라엘, 즉 선택자를 불러 모아 나타나게 된 종말론적 백성을 말한다.
즉, 예수님의 생존시 그의 사역의 목표는 소수의 구별된 단체가 아닌 이스라엘 전체를 회복시킴에 있었다.
그렇다면 12제자의 모임은 무엇을 의미한 것인가? 그들은 선택된 소수의 의로운자의 그룹과 같은 것도 아니었고 교회의 전신도 아니었다. 그들은 12지파를 대표하는 자들이었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부르고 새 이스라엘을 세우고자하셨다.
교회는 성찬을 통하여 오고 있는 영광의 미래를 예수님의 인격 가운데서 현재에로 돌입시키는 것에 의의를 둔다.
정확히 말하자연 교회의 태동은 예수님의 부활 후의 일이었고 부활의 신앙을 근거로 가능하였던 것올 볼 수 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앙 안에서, 그리고 그의 완전한 통치의 날을 기대함 가운데서 모임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원시 교회의 탄생은 그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원으로 하는 종말론적 공동체이다.
3)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은 옛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구약적 술어이다. 한편 신약의 교회를 향하여는 “그의 소유된 백성(" “택하신 족속”,“거룩한 나라(ethnos)"라고 말하였다(벨전2:9). 교회, 새 이스라엘은 옛 이스라엘 안에서부터 탄생되었다. 그러나 양자는 제도상 다른 점들을 보이고 있다. 새 이스라엘의 독특한 제도라면, 죄의 회개와 정결함의 표인 예수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가 있었다. 가정에서 가지는 자그마한 형태의 기도집회가 있었다.유월절기념이 아닌 주님의 곧 오심을 기념하는 성찬이 있었다. 그들의 지도자는 12사도였다. 사랑과 우의를 가졌다. 이 하나님의 백성은 목적지에 이미 도달한 공동체가 아니고 미래에 올 도성을 바라보며, 가고 있는 순례의 공동체였다. 중간기(interim)에 위치한 교회는 그 존재 목적을 선교와 연관시켜 생각하지 않올 수 없다.
(4)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비유의 말은 교회의 영적, 기능적 실재를 표현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개인간의 연합과 성도들 상호간의 연합이라는 협동적, 집단적 인격체임을 의미 한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에 대해 명칭은 이렇게 요약한다. 교회 없이 그리스도가 존재하지 않고 그리스도 없이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예배, 세례, 그리고 성찬에 함께 하신다. 그리스도는 교회에 완전히 포함된다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머리로서 존재한다.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순종함으로따라가야 한다.
(5)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
먼저 성령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은사임을 생각할 수 있다.
성령의 부어 주심의 사건은 종말론적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표지이다. 성령이 심령 가운데 내재함은 인간심령에 그의 통치를 실현함에 있는 것이지 인간에 의하여 지배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지배가 인간을 죄에서 자유케 할 뿐 아니라 새로운 속사람(inner self)을 창조한다. 즉,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능력로 살지 않고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것 이다. 성령은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으로 살게하고 그의 지체의 부분으로만 만듦과 함께 지체의 통일을 이루게 한다.
교회는 영의 역사와 증거 위에 세워지고 영에 의하여 통치되고 채워지기 때문에 교회를 성령의 전이라 한다.
성령을 가리켜 부룬너(Brunner)는 교회의 호홉이라 하였는데, 이 참된 경배는 성전 예배(회생제물로)가 아니고 영과 진리로 예배함을 골자로 한다. 그런고로 그의 죽음과 부활 후에는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언하였는데, 그것은 그 성전이 더 이상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아님을 암시한 것이다.
(6) 기구로서의 교회
교회는 영적인 동시에 공회적이며 기구적이다. 즉, 12지파의 대표로 상정되는 12제자들의 기반 위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원한 예식 성찬이 있으며,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주는 제도가 있고, 말씀의 사역, 가시적이고 계속적인 교체, 그리고 행정 체제가 있다.
에클레시아에 해당하는 영어로는 congregation, community, church 등이 있다. 이 congratgation이 라는 말은 고정된 단체가 아닌 옴의 반복적인 사건을 통하여 존재하는 단 체임을 암시하고, community라는 말은 추상적인 초자연적 단체가 아닌, 어떤 공간과 시간 가운데 있으며 목적을 위하여 정규적으로 회집하는 단체임을 말한다. Church란 개인이 아니고 교제(fellowship)로 되어 있음과, 남을 위한 봉사로 성립되어 있음을 말한다.
2. 교회의 메시지
교회가 세상에 내어 놓을 메시지는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을 한마디로 구원의 메시지라 부른다.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우리는 좀더 그 뜻을 기술할 필요가 있다. 선교의 내용인 복음은 무엇인가?
(1) 복음 : 구약이 기대하던 소망의 성취
복음의 성립은 구약에 그 기원을 둔다.
첫째, 공의와 의의 시기에 대한 것이다. 구약이 강조한바는 이스라엘의 사회에서 뿐 아니라 다른 민족의 사회에서도 적용될수 있는 공의와 의에 대한 하나님의 규준이다.
그러한 구약의 강조는 어떠한 사회에서도 성취된 바가 없다. 심지어 의와 공의가 실현되어야 할 모텔 케이스인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그렇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곧 하나님의 실패는 아니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내세워 공의가 물같이 시내같이 흐르는 새로운 시기를 조망하게 한 것 이다.
둘째, 평화의 시기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평화이다. 즉, 평화는 그분의 속성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진다.
그런 평화의 이상이 성취되는 시기는 미래에 있고, 평화의 왕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도래될 것올 말한다.
셋째, 고통올 통하여 매개된 소망의 시기에 대한 것이다. 고난 받는 종의 노래(사 40-50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런 소망의 성취는 먼저는 이스라엘의 고난의 경험올 통하여 다시 회복되는 종말론적 전망을 말하는 것이고, 메시야의 고난을 통하여 소방이 이루어질 것을 말한다.
(2) 복음 :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됨
복음은 진공(Tabula rasa)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고 구약에서 도출된 것이다. 구약의 소망은 예수를 통하여 성취되었다.
주님 안에서 성취된 복음이란 무엇올 말하는가?
첫째, 새로운 시대의 출범(inauguration)을 의미한다. 새로운 시대의 출범은 주님에 의하여 선포되었다. “때가 왔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올 믿으라"(막 1 : 15). ‘나라’ 라는 말은 헬라어로 ‘basileia'(왕국)인데, 그 의미는 주권의 실천, 통치를 받는 단체, 주 권이 실현되는 특정 장소를 의미한다.
둘째, 하나님의 의의 현현(願現)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의가 현현하였다. 그는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성취시킴으로 율법의 저주의 시기(時期)를 폐기하셨다.
교회는 의롭다 함을 입은 사람들의 모임으로서 공의를 행하여야 하고 약한자, 가난한 자, 심령이 상한자, 그리고 포로된 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 평화의 현현을 의미한다.
넷째, 새 사람의 창조를 의미한다.
교회는 그분의 첫 열매로서 화목된 공동체(화해를 입은 공동체)이다. 교회는 새로운 인간상의 첫 열매이고 전체 우주 안에서 화해의 산 표본이다. 교회는 삶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인간의 총체적 복지를 중진시켜야 할 것이다.
(3) 실천으로서의 복음
praxis란 말은 반성 위에 근거된 행동을 뜻한다.
복음은 구체적 상황에서 적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깊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 교회의 메시지는 이미(ready)이루어진 바에 대한 것과 아직(yet)미래로 남겨둔 것에 대한 기쁨의 소식이다.
3. 교회의 부르심의 목적
(1) 예배의 목적
교회를 부르신 목적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데 있다.
경배, 예배는 속죄 받은 자의 자발적인 표현이다.
예배는 결코 교회가 가진 하나의 단순한 기능이 아니고 궁극적인 목적이다.
(2) 선교의 목적(missioruuy purpose)
새 언약의 맥락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백성이 모인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선교적 목적을 가진다.
‘mission’ 이라는 용어는 정확히 성경 원어에서 차용한 말은 아니다. 그러나 라틴어의 ‘missio’ 에서 기원된 말로서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이르기 까지 구속사의 전반에 침투된 개념이다.
교회의 예배는 선교의 성취로 가납할 만한 것이 된다. 예배란 결코 주일의 예배로 완성됨이 아니고 주(週)간의 날들을 통하여 성육신적인 경배, 선교로 완성이 된다.
(3) 교회의 선교적 사명의 차원
첫째로, 선지자적 차원이다.
둘째로, 제사장적 차원이다.
셋째로, 왕적인 차원이다.
제8장
말씀 선포와 봉사
선교의 핵심은 말씀 선포라 해도 무방하다
있다. 그러나진실올상실한말씀선포는 비없는구름과같다고하겠다.
1. 용어들을 통한 선교 이빼
전도란, 예수 그리스도의 제시(提示)와 신앙응답의 도출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시는 단순히 복음의 역사적 서술에 그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조우(遭遇)하게 함을 말하고, 신앙의 응답은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헌신하게 함과 동시에 교회에서 책임을 다하는 회원이 되게 하는 것을 포함한다.
다음으로 생각활 용어는 선교이다. α
광의의 선교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총체적인 성경적 과업”을 지칭한다.
선교에 있어서 그 주체는 하나님 이시고 교회는 선교의 담지자(擔持者)이다.
그런점에서 교회의 위치는 이 세상에 보내어진 자, 순례자, 나그네, 증인, 선지자, 종, 소금, 그리고 빛이다.
협의의 선교란 “교회가 변경과 그의 직접적인 영향권 너머에 공인된 사람을 보내어, 복음의 빈곤지역에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함과 타신앙내지 무신앙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회심자를 얻어내는 것과, 속한 단체나 나라에서 기독교의 열매가 되는 기능적이고 번식적인 교회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화란 한개인이나사회에서 복음올수용하고난후 결과적으로 따르는 상황올 말한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그의 ‘형상을 닮게 됨과 증거자와 유용한 종으로서의 삶을 가지게 됨을 말한다.
사회화란 한 개인인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의 이상, 모범, 그리고 제도에 일치되는 삶의 과정을 갖게 됨을 말한다.
문명화란 소위 기독교 문화라고 하는 서양 문화의 규준에 일치하게끔 피선교지의 어떤 문화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을 말한다.
호켄다이크의 사상에서 교회는세상을 위하여 세상에 존재하면서 세상과는 구별된다고 한다. 이런 사상의 배경에는 지리학적인 다양성에 대한 접근보다 사회학적인 다양성에 접근해야 한다는 사상이 깔려 있다. 다시말하면 사회와 역사에서 불신과 불의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선교지라는 사상이다.
2. 선교의 방향
오늘날 선교 신학은 두 가지 흐름으로 뚜렷이 갈라진다. 하나는 보수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에큐메니칼적인 것이다. 전자는 인간의 구속(redemption)을 지향하는 선교를 강조하고, 후자는 인간화를 목적으로 하는 선교 신학을 주장한다.
1948년 암스텔담의 w.c.c. 총회에서 조차 그들은 보수적인 선교 입장을 표명하였다. 거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복음이 생사<生死)의 문제라면, 이 세계에서 지금 어떤 인간이 그것을 듣거나 수용 할 기호를 갖지 못하고 여전히 그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은 확고한 신념과 운동이 오늘에 이르러 왜 그처럼 흔들리게 되었는가?
첫째, 2차 대전 종전 이후 세계의 상황 변화가 따랐다.
둘째, 제3세계 비기독교인 가운데 반 서방적인 반응으로 옛 종교의 부흥을 가져오게 되었다.
셋째, 서양 신학의 변질로 기독교 선교는 아시아 종교와의 공존이나 혼합주의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넷째, 기본적 종교적인 문제보다도 정치 사회적 관심을 선교의 문제로 대체한 데서 오는 것이었다.
선교하는 교회가 그 선교 의지를 철회할 수는 없다. 자신들의 문화적 상황과 기독교는 구분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제 3세계의 문화적, 도덕적 상황에 대해 기독교가 무관심하거나 방관하여도 좋은 것은 아니다. 교회는 과거 선지자의 사명을 다하여 왔듯이 미래에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이방 세계에 문화적 혼란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닌, 인간 개인과 사회, 그리고 문화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힘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첫째,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의 반응이다.
그들 가운데는 ‘신앙 선교’(faith mission)를 표방히는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의 선교 단체들이 있다.
둘째, 국제 선교 협의회의 본래 정신을 되찾자는 것이다. 그것의 본래 정신은 순수하고도 확고한 근거와 함께 분리를 지양하고 에큐메니칼 형태의 선교를 위해 진력하는 것이었다.
선교의 에큐메니칼을 주장하지만, 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좌경화 때문에 우려를 표명하는 것이 국제 선교 협의회의 입장이다.
셋째, 현재의 조류에 대한 적용 가운데서 선교의 새로운 이해의 시도가 있다.
선교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이해는 교회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위대한 위임에 근거를 두지 않고,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적 활동에 초점올 둔다.
3. 선교의 양 방향에 대한 평가
먼저 복음주의자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크레츠만(Martin L. Krerzman)은 복음주의가 폐쇄된 신학 체계와 관련이 될 때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보수주의자의 단점은 교회의 분리성에서도 보인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교회 형태를 절대화한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교회가 불가견 교회의 진정한 대표인 듯이 행동한다. 그것이 분리와 움추림의 원인이 되고 있다.
교회관과 더불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성경주의(biblicism)인데, 그것은 종종 진리에 대한 경직성과 더불어 그것을 자신의 무식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하여 진리에 대한 깊은 인식을 얻는 수단을 거절하는 것도 보수주의의 결점으로 지적된다.
보수주의에서는 종종 신앙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관계만을 강조한 나머지 역사가운데 변화시켜 놓아야 함은 무시한다. 즉, 우리에게 사랑, 겸손, 그리고 용서가 보여져야 한다.
보수주의자들은 구원이 현재의 실재라는 사실과 상황(context)에서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화해라는 것도 역시 하나님과의 화해뿐 아니라 인간과의 화해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복음 또한 개인적인 접근만이 전부가 아님을 보수주의자는 알아야 한다. 이유는 선교의 최종적인 목표가 평화를 성취한 구속받은 인간사회라는 연합적인 실재이기 때문이다.
에큐메니칼주의자들의 선교 개념에서 또한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역사를 강조한 나머지, 역사 너머의 종말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에큐메니칼주의지들은 보편주의를 표명하는데,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복음은 개인 구원을 무시하지 않으며, 구원은 개인적인 삶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큐메니칼의 주장은 회심의 기능만 강조하고 새 존재가 됨에는 무관심하다. 그러한 주장은 기독교의 핵심을 상실한 것이다.
에큐메니칼주의들은 성경적 토대가 약하고 교회관이 잘못되어 있으며 수평적 관계만 강조한다. 또한 세속화 신학과 정치 신학 등으로 인간 자력 구원의 개념만을 말하고 있다.
4.결어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간과해서는 안되는 꼭 필요한 것, 즉 필요한 자에게 보여야할 자비, 사랑을 강조하셨다.
복음을 순전히 단체적인 접근을 위한 것으로 두고 행동만 강조할 때 복음올 왜곡함이 되는 것임은 두 말할 것 없다. 에큐메니칼의 주장대로라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우리는 봉사의 고귀성, 희생성, 효율성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만이 최상의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말씀 선포와 봉사, 이 양자를 겸하여 나아가야 할 것이다.
제9장
인간 상황과 선교
1. 요한 칼빈과 일반 은총(common grace)의 교리
칼빈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였다면, 루터는 구원론을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칼빈이 우주적이고 객관적인 인간의 상황을 중요시하였다면 루터는 주관적이고도 내면적인 면, 즉 이신득의(以信得義)에 주안점(主眼點)을 두었다.
2. 미시오 데이(Missio Dei)와 역사
선교 행위의 주인이 되는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그의 선교적인 행위를 역사가운데서 이루신다는데 두고 있다. 즉, 육체적, 심리적 고통, 무지, 가난, 인종차별, 죽음의 위협과 같은 인간상황 안에 있는 악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과 봉사를 적극 장려하는 주장이라 하겠다.
3. 호켄다이크와 살롬
호켄다이크의 주장은 사회를 포함하는 보다 광범위한 구원을 말한다. 그같은 구원은 살롬의 사회적 성취에서 이루어진다.
그의 이론적인 근거는 장차 메시야가 오시는 날에 성취될 마지막 구원은 인간과 그가 처한사회의 구원, 즉 전인적인 구원이라는 것이다.
4. 왕국 의식과 굉범위의 선교
보수주의자들의 하나님의 나라(me kingdom of God)에 대한 개념을 살펴보면 현재적인 면과 미래적인 면중 후자에 더 관심을 두는 경향이 나타난다. 진보주의자들이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에만 관심을 두는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 가운데 그하나를 경시함은 비성경적이다.
보수주의의 약점은 역사개념의 결핍, 회생적인윤리 사상의 부재, 문화적 사명과 사회적 사명 의식의 부재 등이다. 내세 사상, 교회 중심 전도적 사명이 보수주의의 강점인데 그것과 함께 다른 것들을 취하고 이상의 약점들을 보완할 때 더욱 이상적인 교회가 될 것으로본다.
5. 교회와 문확적인 사명(cultural mandate)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동시에 죄인이라는 사실과 문화를 연결하여 생각할 때, 인간의 산물인 문화에는 신적인 요소도 있고 악마적인 요소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은 어느 문화권에서도 복음으로 새 삶의 의미, 새 방향을 제시하는데 기여를해야할 것이다.
6. 교회와 사회적 사명(Social mandate)
7. 영적인 세계와 육적인 세계에 대한 사명
신자가 영적인 세계에 대해 사명을 감당해야 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구속을 받은 사람에게는 영적인 책임이 부과된다. 그것을 우리는 영적인 사명이라고 한다.
8.결론
교회의 사명 중 전도의 사명이 무엇보다 우선이 라는 맥가브란(Donald McGavran)박사의 주장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만 치중하여서 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면의 사명을 등한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보수주의의 단점이 무엇인지 겸손히 반성하고, 한 방면 뿐 아니라 다른 방면에서도 모범이 되었으면 한다.
복음을 전하되 삶의 컨텍스트(context)안에서 전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복음은 역사 가운데 살고 있는 인간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10장
교회성장주의에 대한 평가
선교에 있어서 교회 성장 주의는 교회의 성장이 선교의 우선적인 목표가 됨을 말하는데, 그 성장이란 개교회의 신자 숫자의 증가만 말함이 아니고 기독교의 세포 조직인 지역 교회의 증식, 즉많이 확대됨을 포괄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 성장주의에 대하여 반대론자들은 숫적인 교회의 팽창이 교회의 의의 있는 역사에 참여 없이도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나 정치적인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걸로 보는 것은 너무나 안이하고 낙관적인 태도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1. 교회성장주의의 역사적 발전과 그 내용
개인 영흔 구원주의는 오늘날도 면면히 흐르고 있는 사상인데, 거기에 전혀 옳은 것이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선교 실천에서 깊은 외로움에 떨고 있는 심령, 죄, 마귀, 죽음의 위협 아래 있는자, 의혹과 절망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로의 의미있는 개인적 접촉은 결코 등한시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교회주의가 교회의 이기주의나 자아만족적인 생각에서 타교회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배타적이 되지 않고 폐단들을 극복하기만 한다면 교회 중심적인 생각이 비성경적인 것으로 그렇게 크게 위험시할 것은 아니라 본다. 교회 중심적인 생각은 개인 영혼 구원을 선교의 목표로 보는 생각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임에 틀림없다.
(1) 영혼을찾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그들을 하나님의 곳간, 즉 교회로 불러들이는 추수작업에 강조점을 둔다.
교회성장학파에서는 교회성장을 3개의 통로를 거쳐 이루어짐을 말한다. ; 생물학적 성장, 이동의 성장 그리고 회심의 성장. 그 가운데 세번째는 가장 바람직한 성장으로 간주한다.
(2) 숫자적인 성장을 우선적으로 추구한다.
선교사들이나 목회자들은 신학적 이유에서 혹은 자신의 약점을 가리우기 위한 심리적인 이유에서 숫자를 기피하는 현상이 있다한다. 사람들이 흔히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숫자에 있지 않고 의와 화평과 공의 실현에 있다고 말하면서 숫적인 것을 외면하는 많은 이유는 자신들이 이루어 놓은 성과가 없다는 것을 은폐하기 위함이라 한다.
즉, 제자를 삼는 일과 완성시키는 일을 둘로 본 가운데 숫적인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였는데, 그것은 선교를 이원화시킨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숫적 증가와 기독교인의 완성을 별개로 취급하는 그의 선교관은 비판의 여지를 남긴다고 볼 수 있다.
(3) 교회 성장이 부홍운동 보다 우선되어야 함을 말한다.
부홍 운동을 어디까지나 교회 중심 운동에 앞설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완성에 해당되는 작업으로 여겨 부흥을 선교의 목적으로 두지 않으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4) 교회성장은 사회적인 구조와 연관되어 일어난다고 한다.
복음의 전달과 교회 성장을 위하여는 그 사회의 성격을 파악하는 일이 우선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교육과 재산, 능력에 의하여 구분되고 있는 계층의 형성, 그것에 따르는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를 알 필요가 있으며, 그 사회가 동질성을 띤 사회냐 아니면 이질적인 사회냐, 원시적이냐 아니면 도시적인 사회로 전이하고 있는 상태냐에 따라 복음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접촉이 달라져야 함을 말한다.
(5) 장벽을 넘지 않음이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된다한다.
어떤 종족을 접촉할 때는 반드시 그들의 본래 언어를 사용함이 효과적이라는 결론이다. 그리고 계급적인 장벽과 종족적인 것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은 자신과 계급이 같은 사람과 같이 하려는 의식을 가기고 있고, 자기들과 언행과 사고방식이 같은 사람들과 같이 하기를 원하며, 자기 종족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무리한 종족 계층의 연합은 전체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동질성 단위를 중심으로 한 복음의 커뮤니케이션이 합당 하다고 한다.
(6) 단체 회심운동의 형태는 하나님이 축복하신 방법이라 한다.
집단 운동이란 비교적 소규모의 단체를 말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단체적으로 접촉을 통한 지도가 있은후에 그들 자신이 군중적이고 개인적인 결의에 의하여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결신에 이르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7) 토착적인교회 원리를 적용하자는 견해이다. 그는 토착적인 원리의 대표적인 것을 네비우스의 방법이라고 본다.
네비우스의 방법은 선교사의 순회, 성경 중심적인 사업, 자전, 자영, 자급의 교회설립, 조직적인 방법으로 성경 연구시행, 타 교단과의 연합, 산업등이 강조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그것은 너무나 경제적인 독립에 강조점을 두고 있음을 지적함과 동시에 그렇게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장점을 들고 있다.
2. 교회성장주의에 대한 평가
(1) 성경적인 평가
구원의 체험의 전파와 그것을 체험한자들의 교제, 즉 교회의 세움은 선교의 지상 목표이기 때문에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으로도 대치될 수 없다고 한다.
대중적 회심에 관하여 그는 성령의 역사가 단체, 가족, 그리고 종족 중심으로 되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는 제지들이 주께 모일때 가족이라는 단체의 연결 혹은 무리중에 의하여 되었음을 말한다.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도 시작은 가족중심으로 된 것이며, 후에 나라의 형태는그것이 확대 된 것임을 말한다. 사도행전에서도 많은 가족단위로 은혜를 받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2) 신학적인 평가
풀러 신학교의 쥬이트 교수는 교회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교회란 말씀과 성례로써 선포된 사도적 메시지를 수용하는 가운데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구주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의 교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재하심의 은혜의 선물이며 사랑에 의하여 역사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계층, 종족, 성, 문화, 그리고 국가의 장벽을 초월함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그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아래 모든 지체를 두어 한 몸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이 정의에서 알수 있는 것은 교회는 비단 성장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고 교회가 교회 되려면 교회 정신의 동질성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3) 실제적인 평가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a. Snyder)는 그의 [포도주 부대]라는 책에서 그같은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는 제도화되고 너무나 비대화된 교회에 대하여 비선교적이고 안이하다고 지적한다.
첫째, 교회가 비기동적임을 말한다.
둘째, 교회가 비유동적이 됨을 지적한다.
셋째, 교제의 결여를 지적한다.
넷째, 교회가 계층적인 구분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교회 성장주의가 반드시 교회만 설립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성장을 강조함에서 대교회주의가 나올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것으로 본다.
3결어
확실히 맥가브란박사의 교회 성장주의는 칼빈주의적이라기 보다 복음주의적인 경향에서 나온 산물이다.
교회성장학파는 하나님은 잃은자를 구원하심을 원하신다는 확신 가운데 우리들에게 초대 교회의 열정을 요구하고 또 과감히 문화 인류학적 안목을 가지고 그것을 적용하여 영혼들을 구원함과 교회를 많이 세우는 것이 주의 귀한 뜻인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교회 성장에서 인간적인 책임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성령의 역할을 그렇게 많이 취급치 않고 있음을 지적한다.
많은 지역의 교회 성장을 포괄하는 원리로서 적용하기에는 문제점이 많음을 지적하지 않을수없다. 그의 교회 성장 운동에는 숫적 성장 치중이라는 인상을 씻을 수 없다.
한국의 보수주의 교회가 그 기능을 충실히 다하여야 할 것은 교회의 선지자, 제사장, 왕적인 기능이라고 보며, 그것을 충분히 발휘함에서 성숙의 자리에 이른다고 본다.
제11장
선교의 제문제
1. 위기에 선 현대 문화와 선교
오늘의 문화는 공업화로 인해 생활이 편리해지고 물질적으로도 부요하게 되었지만, 반면 전통적 도덕 기준과 가치관의 붕괴, 그리고 비인간화의 현상은 날로 심해지고있다.
첫째로, 성(聖)과 속(倚)의 구분이 폐하여짐에서 온다.
둘째로, 교회와 세상의 구분이 폐하여짐에서 온다.
오늘의 신학적 경향은 교회와 세상을 다 하나님께 속한 존재들로 본다.
하나님의 구원의 초첨이 교회가 아니고 세상이며, 선교는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에 참여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 사상은 미시오데이 선교사상과 일치한다.
셋째로, 구원 받은자와 불신자 간의 구분이 폐하여짐에서 온다.
넷째로, 중거와 봉사를 구분하지 않음에서 온다.
다섯째로, 기독교와 비기독교 종교의 구분을 폐함에서 온다.
여섯째로, 선교사와 비선교사의 구분을 폐함에서 온다.
이런 현대 문화의 위기적 상황에 대한 보수주의의 선교적 내용은 무엇 일까?
첫째로, 모든 착취 압박의 형태에 대한 올바른 태도이다.
인간이 공동체라는 점에서 볼 때 한 형제에게 죄를 짓는 것은 전체 인간에게 그렇게 함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한 인간에게 죄를 짓는 것은 바로 비인간화를 의미하며 그것은 사회를 비인간화 시키는 것이 된다.
둘째로, 인간화의 강조가 물질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셋째로, 비인간화의 원인을 인간의 죄에서 찾아야 한다. 비인간화를 정치, 정제, 사회 구조나 빈민가나 소수 민족의 주거 지역에서 찾지말고 에덴 동산에서 찾아야 한다.
2. 공의의 실현과 선교
공의의 실현이란 사회적, 정치적 이유로 자유를 상실하고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공의의 실현을 가장 강하게 외치는 신학을 해방신학이라 하겠다.
공의 실현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방안은 어떠한가? 1974년 로잔세계 복음화 대회에서 공의 실현에 대한 관심과 표현이 나타났다.
복음주의는 청치적 해방의 논리는 인정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의 정치,사회적 참여가 의무임을 자성(自省)하고 있다. 로잔 언약 제5항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중요한 활동의 영역을 전도와 사회 정치적 활동이라고 규정한다.
1) 공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공유하라. 2) 화해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공유하라. 3)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공유하라. 4)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귀하게 여기라. 5) 아무도 착취하지 말라 6) 모든 사람을 섬기라 7) 악과 불의를 고발하라. 8) 그리스도 왕국의 의가 나타날 것을 추구하라. 9) 그리스도 왕국의 공의가 펼쳐 질 것을 추구하라.
이 세상에서 부지런함과 성화를 향한 삶에는 선지자적 사명의 실천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3. 선교와 상황화
선교와 관련한 상황화의 논의는 19세기 헨리 벤(Heruy Venn)에 의한 토착 교회론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토착 교회는 자치, 자급, 그리고 자전(自傳)하는 교회이다.
제 3세계에서 기독교는 자신의 동질성을 추구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 이유는 여러 측면에서 고찰된다.
1) 식민주의와 기독교 복음의 구분이 요구된다.
2) 제 3세계의 교회에 있어서 예배의 표현은 맹목적으로 서방의 패턴을 따르고 있어 독자적인 예배적 표현을 필요로 한다.
3) 제 3세계의 상황에 상응하는 신학이 요구된다. 제 3세계의 상황, 물음, 요구, 소원은 서양과 통일하지 않다. 그것에 대한 답변이 신학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4) 제 3세계의 기독교는 제 3세계 옷을 입은 그리스도를 소개해야 한다.
상황속에서의 선교는어떻게하여야할까?
1) 기독교의 불변적인 진리는 고수되어야 한다.
2) 어떤 상대적 부분은 변화의 대상으로 두어야 한다.
3) 문화적인 면은 토착 문화의 것을 취해야 한다.
4) 성경의 규준이 모든 문화의 가늠자가 되어야 한다.
5) 우상숭배와 같은 문화의 부분은 기능적인 대체로 승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기독교-이교주의에 빠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혼합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선교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선교학 강의 자료 (0) | 2016.06.15 |
---|---|
[스크랩] 선교학 요약 (0) | 2016.06.15 |
[스크랩] 현대선교의 이해 (0) | 2016.06.15 |
[스크랩] 바울의 도시 선교의 성경적 전략 (0) | 2016.06.15 |
[스크랩] 로저 그린웨이의 도시 선교신학 (0) | 2016.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