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성장학

[스크랩] 청교도는 누구인가

수호천사1 2016. 5. 2. 22:13

청교도는 누구인가

 

 

Ⅰ. 들어가는 말


  Puritan, 우리말로는 청교도(淸敎徒)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통상적으로 헨리 8세 이후부터 엘리자베스 1세에 이르기까지 영국에서 성공회(The Anglican Domain)가 국교화(國敎化)하는 과정에서 칼뱅의 사상을 가지고 교회를 개혁하려 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당시 칼뱅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유럽 도처에 퍼져 있었는데 그들을 가리켜 프랑스에서는 위그노(Huguenot), 네덜란드에서는 고이센(Geusen), 영국에서는 퓨리턴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들은 성서를 신앙의 유일한 규준(規準)으로 보고 성서에 나오는 초대 교회를 이상적인 교회의 형태로 보았다.

  영국에서 청교도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엘리자베스 1세가 영국을 통치하고 있던 1558년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400년이 넘도록 이 말을 사용하면서도 이 말의 정의와 성격은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청교도를 성서에 입각한 종교개혁을 주장한 영국의 칼뱅주의자로 보고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Ⅱ. 영국의 종교개혁


  영국의 종교개혁은 잘 알려진 대로 헨리 8세와 캐서린의 이혼 문제로 인해 시작되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형 아더의 아내였던 캐서린과 결혼한 헨리 8세는 그녀와의 사이에 딸 메리를 두었지만 아들을 낳기 위해 이혼을 원했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트 7세는 이혼이 카톨릭의 교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사실 교황청에서 캐서린의 이혼을 반대한 것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가 그녀의 조카라는 정치적 이유가 더 컸다. 하지만 헨리 8세는 교황청의 명령을 거부하고 캐서린과 이혼한 후 궁녀인 앤 볼린과 재혼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영국과 교황청의 관계 단절을 선언한 것이다.

  1534년 11월 헨리 7세는 영국 교회의 독립을 선언하는 수장령(Act of Supremacy)를 발표했다. 교황청에 돈을 보내는 것을 금지하고 모든 성직자의 임명권을 왕이 가진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영국 영토 안에서는 교회의 우두머리가 왕 자신임을 천명한 이 법령을 반포한 후 헨리 8세는 교황에게 지급하도록 되어있는 성직의 첫 수입을 자신의 재량으로 끊어버리는 한편, 토마스 크랜머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다. 또한 성직자들이 로마에 항소할 권한을 금지시키고 교황이 파문하는 한이 있어도 계속 성례를 집행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엘리자베스가 태어난 후에는 왕위계승법을 통과시켜 앤 볼린의 소생이 적법한 왕위계승자임을 천명하고, 모든 국민들이 이에 따를 것을 선서하도록 했다. 그 외에도 헨리 8세는 수도원을 폐쇄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여 국고를 채웠으며, 교회에 번역된 성서를 비치하게 하기도 했다.

  헨리 8세 사후의 종교혁명은 그야말로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영국에는 성공회의 체재를 유지하려는 일파, 카톨릭으로 돌아가려는 일파, 대륙의 칼뱅주의를 도입하려는 일파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에드워드 6세가 겨우 10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토마스 크랜머가 종교개혁을 주도적으로 진행했다. 그는 영어로 된 공동 기도서를 만들어 모든 사람이 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여러 가지로 노력했으나 에드워드 6세가 16세의 어린 나이에 죽고 캐서린의 딸인 메리 1세가 즉위하면서 종교개혁은 중단되고 말았다. 구교도였던 메리 1세는 종교개혁 일체를 무위로 돌린 후 재위기간 6년 동안 토마스 크랜머를 비롯한 성공회 지도자 282명을 처형하여 ‘피의 메리(Bloddy Mary)’라는 별명을 얻었다. 메리 1세 치세에 카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신교도는 대륙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메리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한 후,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면서 종교개혁은 재개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58년 11월 26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1603년까지 45년 동안 영국을 다스리면서 영국의 종교개혁을 완성했다. 전대에 극과 극을 경험한 엘리자베스 1세는 외세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국민들이 화합할 수 있는, 중도적인 성공회를 만들기 위하여 여러 가지 법령을 반포했다.

  먼저 엘리자베스 1세는 1559년 수장령을 재발포하는 함으로써 정치에 있어서나 종교에 있어서나 왕이 ‘유일 최고 통치자’임을 천명했다. 오늘날에도 이 법령은 명목상이나마 유지되어 현재 성공회의 수장은 엘리자베스 2세이다. 또한 1549년 에드워드 6세 때 발표된 적이 있는 통일령(Act of Uniformity)을 재발포하였는데, 이것은 예배의 형식을 규정하는 법령이었다. 1563년에는 에드워드 때 발포되었던 42개조의 신앙고백을 39개조 신앙고백으로 개정하여 발포했으며, 성찬식에 대해서는 칼뱅의 견해와 루터의 방식을 혼합하여 받아들이기도 했다. 당시의 교황 피우스 5세는 종교개혁 저지를 위해 1570년 2월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하고 암살까지도 허용하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이에 맞서 반교황법을 통과시키고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형시켰다. 엘리자베스 1세가 재위기간 동안 반교황법에 의해 처형한 사람은 221명으로, 숫자만으로 보면 메리 1세 때 처형된 사람의 수에 근접할 정도이다. 1588년 엘리자베스 1세는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무찌름으로써 성공회를 지키고 해상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부르는 성공회라는 이름은 신앙고백 가운데 ‘하나요, 거룩하고, 공변되고, 사도적인 교회'라는 구절의 성(聖)과 공(公) 두 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본래의 이름은 The Anglican Domain이며, 우리 나라에서는 영국 국교회, 영국교회, 영국 성공회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미국에서는 주교감독제라는 뜻에서 Episcopal Church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성공회는 엘리자베스 1세 치세에 구교와 신교의 중도적인 성격을 가진 종교로 완성되었는데, 이것은 성공회 교리 곳곳에 드러난다.

  성공회의 신앙적 특징은 복음을 전하려는 왕성한 전도의욕과 학문에 대한 존중, 교회의 토착화 정신, 동·서 분열 이전의 공의회(公議會)에서 결정된 교리의 준수 등이 있다. 성세·성체·고백·혼인·견진·종부·신품성사의 7성사를 행하며, 구약과 신약 66권외에 외경(外經) 14권을 준정경(準正經)으로 삼고 있다. 카톨릭의 성모 마리아 숭배를 일부 받아들였으나 마리아 무죄설 및 승천설은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성공회의 교리 성격을 온건한 칼뱅주의라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이것은 성경의 권위와 신앙의인(信仰義認)의 교리를 중시하고 원죄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Ⅲ. 청교도의 사상


1. 칼뱅주의


  들어가는 말에서 언급한 바대로 청교도는 영국에서 칼뱅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즉 청교도의 사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칼뱅의 사상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칼뱅(John Canvin)은 16C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한 종교개혁가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법학을 전공했으나 종교적인 탄압을 피해 스위스로 옮겨왔다. 그가 스위스 바젤에서 쓴 《크리스트교 강요(Insrir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는 수세기 동안 개신교의 교과서가 되어왔다.

  칼뱅의 사상은 크게 성서 중심주의, 예정설 등으로 대표된다.

  먼저 성서 중심주의는 성서가 신앙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뱅은 비성서적이고 미신적인 카톨릭의 의식을 타파하고 교회를 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칼뱅은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이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하므로 정치와 종교를 일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칼뱅의 이러한 주장은 제네바에서 실현되었다. 지금도 제네바에는 칼뱅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등 칼뱅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예정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루터 또한 같은 주장을 하긴 했지만, 루터는 예정 대상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이라는 공포에서 벗어날 도피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찾았다. 그러나 칼뱅은 예정 대상에게는 심판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일정한 수준을 갖춘 자라면 그 예정 대상에 속한 것이 분명하므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이때 일정한 수준은 신앙고백, 크리스트교적인 품행, 성찬식에의 참여이다.

  반대파로부터 ‘제네바의 성서적 폭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엄격한 사람이었던 칼뱅은 카톨릭의 요소를 제거한다는 의미로 성인들의 상(像)과 십자가상(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을 거부하기도 했으며, 초대 교회의 금욕과 절제를 본받는다는 취지에서 음악 등 예술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다. 심지어 청교도의 선구자로 불리는 녹스(John Knox)는 즐거워서 춤을 추는 것을 범죄로 간주하고 벌을 주었을 정도였다.


2. 청교도 운동


(1) 성격과 전파


  Puritan[pju′(ː)rit(ə)n / pju′ər-]이라는 단어를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청교도, 퓨리턴[16C 후반에 영국 성공회 내에서 일어난 신교도의 한 파]이라는 정의와 함께  [종교상․도덕상] 엄격한 삶, 근엄한 사람이라는 정의가 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 청교도는 절제와 금욕의 상징으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그들이 주장한 바는 어떤 것인가?

  메리 1세 때 박해를 피해 대륙으로 망명했던 800여 명의 신교도는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한 후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들은 엘리자베스 1세의 개혁에 만족하지 못하고 칼뱅주의에 따라 스위스 제네바 교회를 모델로 한 개혁을 주장했다. 이들은 영국의 종교개혁이 불완전하다고 보고 엘리자베스 1세의 중용적인 종교정책에 반대하면서 교리뿐만 아니라 의식에서도 카톨릭의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Puritan이라는 이름도 ‘정화하다’를 뜻하는 purify에서 유리된 것이다. 그러나 순수한 교회 통치방식, 성서적인 예배의식 및 거룩한 생활양식 등 청교도들의 주장은 엘리자베스 1세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청교도들은 대학과 신문의 육성, 신흥세력에 속하는 장인․법률가․소지주․도매상 등에게서 지지를 획득하려 했는데, 대학 중에는 특히 캠브리지 대학이 청교도 운동의 요람 역할을 했다. 대학을 기지로 삼은 청교도들은 기성 교회의 부패를 공격하는 논문, 책자를 출판하는 등의 방법으로 청교도 사상을 전파시켰다. 그 결과 1640년대에는 청교도가 의회 다수파를 차지할 정도로 세력을 넓히게 되었다. 당시 청교도들은 예배 의식에 남아 있는 카톨릭의 요소들을 제거했다. 즉 순수한 복음적인 예배 의식에 부과된 의식적인 행위들이 제거되고, 성서적인 근거를 갖는 요소들만이 남겨진 것이다. 심지어 이들은 교리 문제에도 개입하여 39개조 신앙고백 대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채택하기도 했다.

  청교도가 적극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캠브리지 대학의 St. John College를 졸업한 토마스 카트라이트가 1567년 Trinity College의 연구원 및 전임강사가 오고부터였다. 이후 설교자가 된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청교도 사상을 설교했고 이전부터 성공회의 교리에 대해 비판과 반대의견을 많이 낸 캠브리지 대학이었던 만큼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정식으로 교수가 된 후 성서의 사도행전을 강의하면서 청교도의 사상을 더욱 더 열심히 전파했지만, 1570년 교수직에서 해임되고 2년 뒤에는 대학에서 영구히 추방당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대륙으로 망명했고, 네덜란드와 스위스 제네바에 머물면서 신학을 연구했다. 1585년에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음지에서 청교도 전파에 힘썼으나, 5년 만에 체포되어 13년 동안 옥중 생활을 한 후 출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고 말았다.


(2) 개인의 신앙


  청교도가 널리 전파된 데에는 칼뱅의 예정설이 크게 공헌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간 역사를 혁명적으로 바꾸기 위해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에 투신했던 것이다. 예정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이 예정 대상에 속한다는 확신이 필요한데, 이것을 회심이라고 한다. 청교도들은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한편 하나님이 이를 용서하셨음을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헌신적으로 실천하려는 열의를 가지게 되는데, 이렇게 회심한 자는 곧 예정된 자로 여겨졌다.

  자신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른다는 것을 확신하려면 일상생활의 모든 면을 살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그날그날의 실패와 성공을 일기에 적음으로써 양심을 살폈다. 오늘날에도 청교도들의 일기, 자서전 및 전기는 수없이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청교도라고 해서 여유가 없고 우울하며 병적일 정도로 자신을 학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생에는 엄숙한 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의무도 있었기 때문에 성실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모든 일에 있어서 절제하는 것이 청교도의 일반적인 태도에 가까웠다.


(3) 교회의 형태


  다른 모든 교리가 그렇듯, 교회의 형태 면에서도 청교도들은 성서를 강조했다. 그들은 교회의 원형인 초대 교회의 형태를 따라 교회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서에 나오는 초대 교회는 장로제도에 의해 운영되는 형태로, 사도행전 6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供饋)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사도행전 6:2~6>


  청교도들은 왕이 수장으로서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신도들이 장로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로와 일반 신도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를 기준으로 하여 청교도는 두 분파로 나뉘게 되었다.


① 장로파(Presbyterian)


  장로파는 목사와 신도 중에서 선출된 장로가 일반신도의 우위에 서서 교회의 관리 및 운영을 담당하는 방식을 지지한다. 이들은 의회의 상․하원 의원들과 군대의 간부 및 정치․사회적 주도권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나중에 영국혁명이 일어났을 때도 자금을 제공하는 등 소극적인 방법으로 참여했고, 나중에는 왕정복고에 앞장서게 된다.

  장로파의 주장에 의하면 교회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국교가 되어야 하지만 교회의 통치는 목사와 장로들이 맡으며, 그 외에 교사와 집사를 둔다. 성공회의 교리에 따라 성직자 임명권을 가지는 왕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왕권 침해의 일종이었고, 따라서 찰스 1세는 장로파에 탄압을 가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영국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조직은 당회-노회-대회․총회의 위계를 가지며, 장로가 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문제는 일반 신도들이 아니라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당회가 결정한다. 만약 문제가 해결되지 못할 경우 지역 합의체인 노회에 상정하여 결정된 바를 따르는데, 노회의 판결은 강제성을 가지고 있다. 교회 내에서 일반 신도들은 목회(牧會)의 대상에 불과하다.


② 회중파(Independent, 조합파 혹은 독립파)


  회중파는 장로제도를 인정하지만 장로나 일반 신도나 모두 동등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대체로 군대의 하사관과 빈농 및 도시 노동자들이 이들의 주장에 동의했으며, 훗날 이들은 영국 형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회중파는 목사를 포함한 장로와 일반신도가 모두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므로 원리상 동등하다고 말한다. 교회는 상위 집단 및 국가로부터 독립한 자치적 집단으로, 모든 사람이 종교의 자유를 가지고 교회의 구성 및 운영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회중파에서도 대회․총회의 개념을 인정하지만, 이것은 장로들만의 모임이 아니라 일반 신도까지도 포함하는 모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곳의 결정은 어디까지나 권고일 뿐, 강제성을 가진 판결이 아니다. 이렇게 살펴볼 때 성공회의 수장인 왕이 성직자 임명권을 행사하는 것도, 국교로 지정된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회중파의 신도는 장로교에 비해 그 역할이 매우 크다. 신입 신도는 기존 신도들 앞에서 서약하는 절차를 통해 그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는데, 능력만 있다면 목회의 책임이 없는 일반신도에게라도 설교를 맡길 수 있다. 목사는 신도들에게 예속된 존재로 목사 안수는 일반 신도들이 선출한 장로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교회 내의 행정 체계에 따르지 않는 자는 성찬식에 참여할 권한을 박탈당할 수 있다.

  이 회중파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올리버 크롬웰이다. 그가 영국 혁명을 일으켜 호국경(護國卿)으로서 집권한 동안, 영국에서는 회중파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왕정이 복고된 후에는 탄압을 피해 102명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의 뉴잉글랜드로 이주했고, 지금도 회중파는 미국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교파이다.


(4) 이상적인 사회


  청교도는 하나님의 뜻에 봉사하는 자신의 삶은 이 세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선택을 받은 자신들이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며, 죄로 가득한 악한 사회를 정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청교도들이 정부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생활의 모든 악을 제압하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회심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즉 청교도들이 생각한 이상적인 사회는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전념하는 사회였다. 그러나 사실상 대중이 계몽되지 않은 상태에서 청교도의 예정설은 우월한 선민의식과 그것을 통해 남에게 신앙을 강요하는 부작용을 가져왔고, 결국 청교도의 이상 사회 구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Ⅳ. 청교도의 사회적 영향


  청교도의 주장은 가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뉘어 받아들여질 것은 받아들여지고 버려질 것은 버려졌다. 공동체의식, 근면, 절약, 절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신앙을 생활의 중심으로 이해하는 자세 등은 포용된 것 중 대표적인 것이고, 광신주의, 불관용, 강제적인 종교생활 등은 배제된 것 중 대표적인 것이다.

  청교도들이 교회의 원형으로 보았던 초대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공동체 의식이다. 개인의 유익보다는 전체의 유익을 중시하고, 인간은 서로가 필요하며 서로 사랑하기 위해 불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 의식은 실제로 실현되지는 못했으며, 대신 청교도들이 이주하여 세운 나라인 미국에서 문화가 발전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청교도들의 노동과 부에 대한 관념 또한 사회적으로 크게 기여했다. 그들은 노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맡겨진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Calling)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부를 악한 것으로 보지 않고 부를 갖춘 후 신앙을 잊어버릴 것을 경계했다. 이것은 사회 전체에 근면, 절약, 절제 등의 풍조를 가져와서 산업 발달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Ⅴ. 나오는 말


  이상에서 청교도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그들의 사상과 사회적 영향에 대해 알아보았다.

  청교도는 성서에 입각한 종교개혁을 주장한 영국의 칼뱅주의자로, 정치적 목적 내지 왕의 개인적 목적으로 이루어진 영국의 종교개혁을 비판하고 성서에 나오는 초대 교회를 이상적인 교회로 보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었다.

  청교도의 사상은 칼뱅의 성서 중심주의와 예정설을 기반으로 하여 중․하류 계층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여 의회를 장악했으며 나중에는 영국 혁명을 통해 청교도 사상에 의한 국가 건설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들은 자신들이 구원을 예정 받은 선택된 집단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 늘 성실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했다.

  초대 교회가 그러했듯 장로제도에 의해 교회가 구성되고 운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장로와 일반 신도의 관계를 기준으로 청교도는 장로파와 회중파로 나뉘게 되었다. 장로가 일반 신도 위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장로파는 중류층이 많이 참여했으며 영국 혁명 때도 소극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장로와 일반 신도는 동등하다고 주장한 회중파는 하류층이 많이 참여했으며 영국 혁명 때도 올리버 크롬웰 등 주도자들이 많이 나왔다. 왕정이 복고된 후 회중파가 중심이 되어 미국 뉴잉글랜드로 이주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청교도는 다분히 이상주의적인 측면이 강했다. 이들은 교회와 사회의 질서가 올바로 설 때 대다수 사람들이 회심을 통해 신앙 중심의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모든 사람이 크리스트교 신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은 영국과 미국에서 이미 증명되었다. 결국 청교도가 크리스트교에 제공한 교훈은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점과, 교회는 봉사를 위한 기관이지 사회 지배를 위한 기관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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