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리어는 ‘하나님의 사람’, ‘믿음 강한 사람’” 애도 미국연방대법원(SCOTUS, The Supreme Court of the United States)의 안토닌 G. 스칼리어 대법관이 지난 2월13일 텍사스주 한 리조트 호텔에서 세상을 떠났다.
<LA TIMES> 워싱턴 지국장인 데이빗 G. 사베이지(David G. Savage) 기자는 2월14일자 신문 1면에‘스칼리어 죽음이 캠페인과 사법부에 큰 격량을 몰고 왔다’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무려 5면(A1, A18, A19, A20, A21)을 할애하여 파격적인 기사와 사진들로 30년간의 스칼리어 대법관의 생애와 죽음, 사법권의 이념을 집중적으로 보도 하였다. 사베이지 지국장은 1986년부터 연방대법원을 출입한 법률이슈의 전문 대기자 이기도 하다.
<Huffington Post>의 법률전문담당 크리스천 파리아스(Christian Farias) 기자는 ‘연방대법원의 대법관 만장일치로 안토닌 스칼리어 대법관 추모찬사’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였다(2월13일자). 파리아스 기자는 저술가, 민권운동, 형사법 변호사이다. 본지는 두 기자의 보도내용과 2월17일자 A&E Television Networks의 ‘스칼리어 전기’를 요약 보도한다.
<편집자주> ▲ 텍사스주 사업가 존 포이인덱스터의 초청으로 그의 리조트를 찾았던 스칼리어 대법관은 2월 13일 7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워싱턴 DC에 있는 연방대법원은 조기를 내걸고 고인을 추모했다. © 크리스찬투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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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리어 대법관이 서거한 텍사스주의 주지사 그레고리 에보트(공화당)는 어스틴 텍사스주에서 2월13일자 보도자료를 통해 주정부 공식 애도 성명을 발표하였다. “스칼리어 대법관은 하나님의 사람(a man of God), 애국자(a patriot), 기록된 헌법과 제정된 법률에 흔들리지 않는 방어자(unwavering defender)이며 헌법을 곡해하고(distort), 벗어나려는(depart) 많은 공격에서도 견고한 반석(Solid Rock)이었다.” 클레린스 토마스 대법관은“스칼리어는 믿음이 강한 사람(a man of strong faith)이었다”고 추모하였다.
동료들에게 ‘니노’ 별명으로 불렸고 ‘법의 거인’, ‘법의 천하장사’로 추모받아 대법원장 존 G. 로보츠는 스칼리어를 “연방대법원과 국가에 큰 손실이다. 그는 비범한 법학자였다.”고 했고 엔서니 케네디는 “불굴의 의지로 헌법의 기준에 역사적인 성과를 이루었다.”고 그를 추모했다.
또한 클레렌스 토마스는“법의거인(legal giant)이었다.”, 루스 긴스버그는 “텍스트의 해석은 달랐어도 헌법에 대한 경외심으로 법원을 섬겼다.”고 밝혔고 스티븐 브레이어는 스칼리어 대법관을 “법의 천하장사(legal titan)였다.”고 회고했다.
그 외에도 사무엘 알리토는 “법률 문화(legal culture)에 가장 큰 영향력을 준 학자이었다.”, 소니아 소토 마요르는 “역사에 지울수 없는 흔적(indelible work)을 남겼다.”, 엘레나 케이건는 “텍스트 해석에 대변혁(most transformational)을 이룬 대법관이었다.”고 그의 업적을 기렸다.
스칼리어 어록에는 “나는 이념이나 사상을 공격하는 것이지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좋은 사람도 어떤 나쁜 생각을 갖고있을 수 있다”, “미국의 헌법이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영속적으로 선택해야 옳지 않습니까”, “나는 원칙주의자(originalist)입니다”, “나는 까다로운 미치광이가 아닙니다(I am not a nut)”라는 하이라이트가 있다.
첨예한 논쟁과 갈등을 빚을 수 있는 많은 케이스마다 스칼리어는 진보의 신념에 대한 빈정댐의 공격(caustic attack)의 선봉자가 되었다. 진보진영의 국민들로부터 시대에 뒤떨어진 고루한 후진성에 항상 성토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스칼리어는 엘리스 아일랜드(ELLIS Island)를 거친 청년 이탈리아 시칠리 출신을 아버지(부르클 전 대학의 로만스(라틴어 계통) 언어학 교수)로 최초의 이탈리아 - 아메리칸 초등학교 선생님인 어머니 사이에서 뉴저지주 트렌톤에서 1936년 3월11일에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불러주던 ‘니노(Nino)’라는 별명으로 불려지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다인종 이웃이 많은 뉴욕 퀸즈에서 전형적인 이탈리안 카토릭 가정에서 자라며 공립 초등학교시절에도 전부 A학점을 받은 학생이었다. 맨하탄의 카토릭 교회학교인 예수회 운영 군사학교에서 장학금으로 공부하였다.
이 고등학교의 클래스 메이트는 훗날 스카일러가 대법관에 임명된 후에 “17세인 나이에도 이 아이는 보수였고(this Kid was a Conservative) 다른 학생들에 비해 누구보다 명석한 학생이었다”고 하였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보수주의’와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예수회 운영학교 에서 ‘보수적인 깊은 종교적 확신(Conviction)을 정립하였다’고 한다.
백악관에서 ‘호전적’이며, ‘보수적인 명성’과 입지 다져 뉴욕퀸즈에서 자란 이탈리아 이민의 아들은 프린스턴대학 입학제의를 거절하고 예수회가 운영하는 죠지타운대학교 역사학과에서 우등생으로 1957년에 졸업하였다. 1960년 하버드 로스쿨 마지막 졸업학년에 Radicliff 대학에 재학중인 머린 메카티를 만나 결혼하였다. 9명의 자녀 28명의 손자 손녀를 두었다.
오하오주 클리브랜드에서 로펌 변호사로 있다가 1967년에 버지니아 로스쿨의 교수로 방향을 틀었다. 1972년에 닉슨 행정부의 텔레커뮤니케이션의 정책실 법률자문위원으로 TV 산업의 규칙을 제정하였다.
워터게이트 스켄달 사건 이후 닉슨대통령 사임후 제랄드 포드 대통령이 취임한 후 1974년8월에 법무부의 법률자문위원이 되었다. 스칼리어는 이때에 큰 두각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호전적(Combative)이며 보수적인(Conservative) 강한 인상으로 명성을 쌓게 되었다. 그 당시에 훗날 부통령이 된 딕 체니, 국방장관이 된 럼스펠드와 친구로서의 교분을 나누었다.
레이건 대통령 시절 연방항소법원 판사, 연방대법원 대법관으로 임명 사법부의 ‘보수 이이콘’, ‘보수의 리더’로 자리매김 스칼리어는 1977년 지미카터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행정부를 떠나서 시카고지역으로 가서 ‘보수 아메리칸 기업 연구소’를 설립하고 시카고 로스쿨에서 강의를 하였다.
1986년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스칼리어의 주가는 치솟았다. 워싱턴 미연방 항소 순회법원의 판사로 지명, 임명되었다. 1986년 윌리암 랜퀴스트 대법관이 대법원장이 되고 워렌버거 대법관자리에 스칼리어가 대법관으로 지명되었다. 그는 보수적인 추천 자격자(Conservative Credentials)임에도 불구하고 연방상원 법사위원 청문회에서 파이프 담배를 물고 상원들과 농담 가운데 청문회를 마치고 인준을 받았다.
그는 임기 대부분 전투적이며 강력한 반대 의견의 판결문을 작성할 때에도 동료 대법관들에게도 막강한 영향력을 보인 ‘헌법의 엄격한 해석자’로 보수의 버팀목이 되었다.
‘이민개혁 행정명령’ 최종판결에 따라 공화 민주 양당 대선 캠페인 격량속으로 연방대법원에는 민감한 사안들 산재 총기 소유, 낙태시술과 피임약 보험, 소수 우대정책, 특히 가장 뜨거운 감자인 오바마의 ‘이민개혁 행정명령’이 있다. 이 케이스는 주정부 연합이 제기한 소송으로 텍사스 연방법원이 시행을 중단시켰고, 연방 항소법원이 심판결의 정당성을 인정해 준 소송 건이다. 4월에 심리를 시작하고 6월말에 최종판결을 앞에 두고 있다.
합법판결이 나면 5백만명 이상의 서류미비자가 3년간 추방유예와 노동허가증을 받을 수 있다. 만약 보수성향 4 진보성향 4의 동수일 경우에는 하급심 법원의 판결이 그대로 유효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