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

[스크랩] 일반 양태론보다 더 위험한 지방교회의 양태론

수호천사1 2016. 2. 19. 23:29
일반 양태론보다 더 위험한 지방교회의 양태론
[ 이단연구 / 김홍기 ] 지방교회(위트니스 리) 교리 비판 ⑤
2016년 02월 16일 (화) 13:03:38김홍기 목사 yesusarang@shaw.ca

김홍기 목사 / 캐나다록키침례교회 담임, 교회부흥성장연구원장

  
▲ 김홍기 목사

초대교회가 제정한 보편적인 삼대 신조들을 꼽는다면 니케아(the Nicene Creed) 신조,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 아타나시우스(the Athanasian Creed) 신조 등이 될 수 있다(Cairns, Christianity through the Centuries, 129). 이 중 니케아 신조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아리우스의 이단 교리를 교정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고 있으며, 따라서 삼위의 하나님 중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정의함에 있어서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 본질을 소유하신 분임을 천명하고, 삼위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한 하나님이심을 선언함으로 삼위일체에 관한 정통 교리를 확정한다. 이 삼위일체 교리는 당시(4세기 초) 로마제국의 서쪽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는 잘 알려진 교리였는데, 이미 3세기 초에 터툴리안이 삼위일체라는 용어와 개념을 창안하여 사용했기 때문이다(Millard J. Erickson, God in Three Persons, 64-70).

니케아 회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정치적인 목적을 따라 그의 주도 하에 소집되었다. 그러나 이 회의를 소집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던 아리우스의 이단 교리는 결국 초대교회가 삼위일체에 관한 정통 교리를 보편적인 의미에서 최초로 확정하고 천명하게 만든 동인이 되었다. 그러면 아리우스의 이단적인 주장은 어떤 것이었는가? 케언즈는 이를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고 있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다른 본질을 소유하신 분이라고 믿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분의 삶과 순종의 미덕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는 신성한(divine) 분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무(無)에서 창조되었고, 아버지에게 종속되었으며, 아버지와 다른 본질을 소유한 분이었다고 믿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동등하시거나(coequal) 영원히 공존하시거나(coeternal) 동일 본질을 소유하신(cosubstantial) 분이 아니었다. 아리우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신성한(divine) 분이지만 하나님(divinity)은 아니었다. (Cairns, 128)

니케아 회의는 이러한 이단설을 교정하기 위해, 아들은 아버지와 다른 본질(헤테로우시아)을 소유하셨다는 아리우스의 주장 및 아들은 아버지와 비슷한 본질(호모이우시아)을 소유하셨다는 중도(中道) 주장을 배척하고,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 본질(호모우시아)을 소유하셨다는 주장을 정통 교리로 확정한다. 니케아 신조는 이러한 정통 교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 ...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하나이시고(being of one substance with the Father)”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신조는 또한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시다는 주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성령 ...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예배를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며(who with the Father and the Son together is worshipped and glorified).” 이렇게 해서 니케아 신조(A.D. 325년; A.D.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정됨)는 삼위의 구별됨과 본질적 하나됨을 확정하고 천명한다.

이러한 정통 삼위일체 교리는 아타나시우스 신조(A.D. 4-5세기)에서 더욱 분명하고 확고하게 표현된다. 그리고 이렇게 표방된 정통 삼위일체 교리는 1,700년이 지난 지금도 정통교회에 의해 굳게 신봉되고 있다. 20 세기 최고의 설교자들 중 한 사람인 마틴 로이드 존스가 그의 책에서 아타나시우스 신조의 한 진술을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타나시우스 신조와 이 신조가 표방하는 삼위일체론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한 좋은 예가 된다.

아타나시우스 신조의 한 진술은 이에 관해서 완전한 정의를 준다.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아들도 하나님이시며 성령도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계시다. 아버지는 주님이시고 아들도 주님이시며 성령도 주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주님이 계시다. 기독교의 진리는 우리에게 각 위가 그분 혼자서(by Himself) 하나님이시며 주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도록 만든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기독교의 진리는 우리에게 세 하나님 혹은 세 주님이 계시다고 말하지 못하도록 만든다.”(A statement of the Athanasian Creed with regard to this gives a perfect definition: ‘The Father is God, the Son is God, and the Holy Ghost is God; and yet there are not three Gods but one God. The Father is Lord, the Son is Lord, the Holy Ghost is Lord, and yet there are not three Lords but one Lord. For as we are compelled by Christian truth to acknowledge each Person by Himself to be God and Lord, so we are forbidden by the same truth to say that there are three Gods or three Lords.)(David Martyn Lloyd-Jones, God the Father, God the Son, 90)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위의 인용문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구별된 삼위의 하나님이시며 본질상 한 하나님’이심을 천명한다. 이뿐 아니라 삼위를 혼동하지 말고 본질을 나누지 말 것을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삼위를 혼동하지 말며, 본질을 나누지 말라(Neither confounding the Persons: nor dividing the Substance.).”(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1670).

현대의 정통교회는 위의 두 신조와 동일한 신앙을 표방한다. 이런 맥락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변증학자 가이슬러는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설명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두 개의 기본적인 성경적인 가르침들 위에 기초하고 있다. (1) 하나의, 유일하신 한 하나님이 계시다. (2) 하나님이신 세 구별된 위격,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시다(The doctrine of the Trinity is based on two basic biblical teachings: (1) There is one and only one God. (2) There are three distinct persons who are God: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Norman Geisler, Systematic Theology, Vol. 2, God, Creation, 279)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정통 신학자인 그루뎀도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하나님은 삼위이시다(God is three persons). 둘째, 각 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다(Each person is fully God). 셋째,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There is one God)”(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231).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가이슬러는 2개의 문장으로, 그루뎀은 3개의 문장으로 표현했지만, 그들의 주장은 내용상 완벽하게 동일하다. 두 학자는 “삼위를 혼동하지 말며, 본질을 나누지 말라”는 아타나시우스 신조의 신학적 입장을 충실하게 견지하고 있다. 두 사람의 견해는 한 마디로 ‘한 본질 안에 계신 삼위’(three Persons in one substance)의 하나님, 즉 삼위일체 하나님인 것이다.

두 학자의 신학적 명제는 간결명료해서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를 더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정통 삼위일체론을 이해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루뎀의 3가지 명제를 더 발전시켜 보기로 한다. 먼저 첫째 명제(‘하나님은 삼위이시다’)에 관하여 저자 그루뎀의 설명을 들어 보자.

하나님이 삼위이시라는 사실은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시라는 뜻이다. 그들은 다른 (혹은 구별된) 분들(distinct persons)이시라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아버지는 성령이 아니시라는 뜻이다. 그들은 다른(혹은 구별된) 분들이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들은 성령이 아니시라는 뜻이다. 이러한 구별됨(distinctions)은 앞선 부분에 인용된 여러 구절들과 많은 부가적인 신약의 구절들 안에 나타나 있다. (Ibid., 231)

그루뎀은 ‘하나님은 삼위이시다’라는 명제를 지지해 주는 구절들로 다음을 열거한다. 요 1:1-2; 7:1; 히 7:2; 요일 2:1. 가이슬러 역시 ‘구별된 삼위의 하나님’의 개념을 5가지 다른 경우를 들어 설명하는데, 그 첫째 경우는 “아들에게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경우이다(시 2:7; 45:6-7; 110:1; 마 3:17; 17:5; 22:41-46; 요 12:28; 히 1:8-9). 그리고 둘째 경우는 “아버지에게 말씀하시는 아들”의 경우이다(슥 1:12; 잠 30:4; 눅 23:46 ). 또한 세 번째 경우는 “삼위가 동시에 같이 계시는” 경우이다(사 63:7-10; 마 3:16-17; 마 28:19; 고후 13:14). 이에 더하여, 네 번째 경우는 “삼위일체는 구약에 함축된” 경우이다(출 20:3; 신 6:4; 시 45:6-8; 110:1; 사 6:3; 45:18; 63:7-10, 슥 1:12). 마지막으로, “삼위일체가 신약에서 가르쳐진” 경우이다(마 3:16-17; 28:19; 요 17:1-26; 고후 13:14)(Geisler, 288-90).

그러면 둘째 명제(‘각 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다’)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그루뎀은 이 명제를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하나님 아버지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다(창 1:1). 둘째, 아들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다(요 1:1-4; 20:27; 롬 9:5; 딛 2:13; 히 1:10; 벧후 1:1). 셋째, 성령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다(시 139:7-8; 요 3:5-7; 고전 2:10-1; 12:4-6; 고후 13:14; 엡 4:4-6; 벧전 1:2; 유 20-21) (Grudem, 235-38). 그루뎀은 ‘아들과 성령이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설명하는 일에 충분한 지면을 할애한다. 반면에 가이슬러는 ‘아들이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설명하는 일에 매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가이슬러는 이 개념(‘아들이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로, 예수님은 여호와이시라고 주장하셨다(마 25:1; 막 14:62; 요5:27; 8:12; 10:11; 18:5-6; 17:5; 계 1:17). 둘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동하시다고 주장하셨다(막 2:5; 요 5:21, 23, 25, 29). 셋째로, 예수님은 구주-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하셨다(마 26:56; 막 14:61-64; 눅 24:27). 넷째로, 예수님은 예배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하셨다(마 8:2; 9:18; 15:25; 20:20; 막 5:6; 요 9:38; 20:28). 다섯째로, 예수님은 권위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일하시다고 주장하셨다(마 5:18, 21-22; 24:35; 28:18-19; 요 12:48; 13:34). 여섯째로, 예수님은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할 것을 요구하심으로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하셨다(요 14:6, 13-14; 15:7; 행 7:59; 고전 5:4). 일곱째로, 예수님은 비유를 사용하여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하셨다(예를 들어 씨 뿌리는 자, 추수하는 주인, 반석, 목자, 신랑, 아버지, 죄를 사하시는 분, 포도원 주인, 주 등의 수많은 비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하신다는 것을 인정했다(가이슬러는 이 부분을 또 여섯 가지로 세분화하고 수십 개의 성구들을 인용하여 뒷받침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지면상 이것들을 수록하는 것을 생략함)(Geisler, 280-85).

마지막으로, 셋째 명제(‘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절대적으로 선포한다(창 1:1; 출 20:3; 신 6:4; 사 44:4; 45:18; 막 12:29; 고전 8:4; 딤전 2:5). 가이슬러는 하나님의 유일성에 관한 신학적 근거로 세 가지 다른 개념을 제시한다. 첫째, 순수한 실재(pure actuality)는 유일성(unity)을 뜻한다. 가이슬러에 의하면, “하나님은 가능성이 전혀 없으신 순수한 실재이시다. 그리고 가능성은 구별의 원리이기 때문에 둘 혹은 그 이상의 순수한 실재는 존재할 수 없다”(Geisler, 270). 둘째, 영원성은 유일성을 뜻한다. 가이슬러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이 그분의 존재 안에서 무한하신 분임을 확증한다(5장을 보라). 그리고 둘 혹은 그 이상의 무한한 존재는 있을 수 없다” (Geisler, 270). 셋째, 절대적 완전함은 유일성을 뜻한다. 가이슬러에 의하면, “거룩한 말씀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완전하심을 확언한다(14장을 보라). 그리고 절대적으로 완전한 두 존재(two beings)는 존재할 수 없다. 둘이 되기 위해서는 달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동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Geisler, 271). 반면에 그루뎀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하나님의 본질 및 본성에 근거해서 설명한다.

성경은 하나의, 오직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한다. 삼위일체의 다른 삼위(the three different persons of the Trinity)는 목적과 그들이 생각하시는 바에 동의하는 일에 하나이신 것뿐 아니라, 본질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이시다(one in essence, one in their essential nature).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한 존재이시다. 세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다.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시다. (Grudem, 238)

삼위일체에 관한 위와 같은 세 가지 명제는 성경적인 삼위일체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어느 것 하나라도 뺄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또한 세 명제는 불가분리적 관계이므로 이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생략하거나 변경시키거나 혹은 부정하면 성경적인 정통 삼위일체론은 붕괴되고 만다. 예를 들어 만약 어떤 사람이 가이슬러의 첫째 명제(‘하나의, 유일하신 한 하나님이 계시다’)를 부정하고, 둘째 명제(‘하나님이신 세 구별된 위격,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시다’)만을 주장한다면 그는 ‘삼위, 세 본질(삼위삼체)’의 하나님을 믿는 삼신론(tritheism)을 옹호하는 자가 된다. 물론 이것은 비성경적인 이단 사상이다. 반면에 만약 어떤 사람이 가이슬러의 첫째 명제(‘하나의, 유일하신 한 하나님이 계시다’)만을 긍정하고, 둘째 명제(‘하나님이신 세 구별된 위격,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시다’)를 부정한다면 그는 삼위가 아닌 ‘일위, 한 본질(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는 양태론(modalism-‘사벨리안주의’ 혹은 ‘양태적 군주신론’으로 불리우기도 함)을 신봉하는 자가 된다. 물론 이것 역시 비성경적인 이단 사상이다.

이것은 그루뎀의 세 가지 명제에 적용해도 동일한 결과를 가져온다. 즉 만약 어떤 사람이 셋째 명제(‘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를 부정하고 첫째 명제(‘하나님은 삼위이시다’)와 둘째 명제(‘각 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다’)만을 주장한다면 그는 세 하나님을 믿는 삼신론자가 된다. 물론 이것은 비성경적인 이단 사상이다. 반면에, 만약 어떤 사람이 첫째 명제(‘하나님은 삼위이시다’)와 둘째 명제(‘각 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다’)를 부정하고 셋째 명제(‘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만을 주장한다면, 그는 “삼위가 구별된 분들(distinct individuals)이라는 사실과 아버지 하나님(God the Father)이 아들 하나님(God the Son)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아들이 아버지께 기도한 것과 성령이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해 탄원 주시는 사실을 부정하는”(Grudem, 240) 양태론을 옹호하는 자가 된다. 물론 이것 역시 비성경적인 이단 사상이다.

이처럼 정통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와 관련된 이단 교리인 삼신론과 양태론 모두의 반대편에 선다. 정통 삼위일체론은, 가이슬러의 주장처럼, “하나님 안에 세 분리된 존재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삼신론이라 불리우는 이단에 반(反)한다”(Geisler, 271). 또한 정통 삼위일체론은, 그루뎀의 말처럼, “세 가지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한 위격이 있다고 주장”(Grudem, 242)하는 양태론에도 반(反)한다.

교회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셋째 명제는 부정하면서 ‘하나님은 삼위이시다”라는 첫째 명제와 “각 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다”라는 둘째 명제만을 취했던 삼신론자는 거의 없었다(Grudem, 248). 또한 ‘하나님 안에 분리된 세 존재’(three separate beings in the Godhead)가 있다고 의식적으로 주장하는 삼신론자도 거의 없었다(Geisler, 295). 그러나 ‘삼위와 한 본질의 하나님’을 주장하는 정통 삼위일체론자가 불필요하게 삼신론자로 오해를 받는 경우가 왕왕 있어 왔다. 가이슬러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이런 경우를 뜻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부주의한 언어에 의해 말로(verbally) 삼신론에 빠진다. 또한 “삼위가 구별된다(distinct-강조는 저자의 것)는 사실을 정확히(correctly) 강조하는 것에 의해서 부당하게(wrongly) 분리된(separate-강조는 저자의 것) 세 존재(being)를 상정하는 삼신론의 언어에 빠져들기 쉽다”(Ibid., 295).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이 이처럼 부주의한 언어에 의해 말로 삼신론에 빠지지 않으려면 가이슬러와 로즈의 다음과 같은 모범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삼위일체의 한 구성원(member)이 세상에서 행동하실 때, 비록 그들이 그(Him)와 더불어 공동 작업을 하더라도, 그(He)는 여전히 다른 두 구성원들(members)과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와 같은 공동 저자들이 같은 책 안에서 같은 생각과 말을 공동 저술하는 것에 의해서 함께 우리의 마음을 어우르고 함께 행동할 때, 우리는 이 행위에 있어서 여전히 다른 두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 작업이 누구나 론을 “노먼,” 혹은 노먼을 “론”이라고 부르는 것을 정당화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참으로 다른 이름들을 가지고 있는 구별된(distinct) 사람들이다(Geisler and Rhodes, A Response to the Christian Research Journal’s Recent Defense of the “Local Church” Movement, 11).

이와 같은 예증은 ‘경륜적 삼위일체’(operational Trinity)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적인 존재(essential being)가 아닌 ‘활동들’(activities)에 관한 것을 설명하는 방법에 불과하다는 설명을 하면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예증의 문제는, 앞서 가이슬러와 로즈가 지적한 바와 같이, “삼위가 구별된다는 사실을 정확히 강조하는 것에 의해서 부당하게 분리된(separate) 세 존재(being)를 상정하는 삼신론의 언어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탁월한 변증학자 가이슬러와 로즈는 이 문제를 글 하단에 다음과 같은 주(註)를 달아 해결한다. “물론 대부분의 비유처럼 이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들로서 구별된 사람들(distinct persons)일 뿐 아니라 서로 분리된 존재들(we are also separate beings from each other)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적하는 바는 공동 작업이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흐릿하게(blur)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Geisler and Rhodes, 11).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은 부주한 언어에 의해 삼신론자로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위험은 정통 삼위일체론들이 무의식적으로 삼신론적인 견해로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이다. 유능한 신학자 웨인 그루뎀은 이러한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현대의 집단들 중에 삼신론을 지지하는 집단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된 위격을 인정하지만 분리되지 않는 존재(one undivided being)로서의 하나님의 유일성(unity)을 좀처럼 인식하지 않음으로, 어쩌면 오늘날의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무심코 삼위일체에 관한 삼신론적인 견해를 향하여 나가는 경향이 있는지도 모른다”(Grudem. 248).

삼신론이 ‘삼위삼체’를 주장하는 이단 교리라면, 일반(혹은 전형적) 양태론은 ‘일위일체’(one Person in one substance)를 주장하는 이단 교리이다. 양태론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다른 시대에 다른 양식(modes) 혹은 다른 역할(roles)로 나타나는 오직 한 위격이시다”(Geisler, 295)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삼위의 존재나 구별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삼위의 구별됨을 천명한 니케아 신조에 저촉이 된다. 또한 “삼위를 혼동하지 말라”는 아타나시우스 신조에도 저촉이 된다. 따라서 일반 양태론 이단 교리를 식별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지방교회의 양태론’은 경우가 매우 다르다. 지방교회의 양태론은 일반 양태론처럼 ‘노출된 ‘일위일체’가 아니라 ‘위장된 일위일체’이기 때문에 식별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CRI(Christian Research Institute-기독교조사연구소)의 회장 해너그라프나 편집장 엘리옷 밀러 같이 오랜 훈련을 거친 미국의 이단연구가들이 지방교회의 양태론을 정통으로 분류하고 지방교회를 적극 옹호하고 있는 사실은 지방교회의 양태론을 규명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웅변해 준다.

지방교회의 양태론은 지방교회가 정통 삼위일체론으로 포장해서 세상에 내놓은 ‘위장된 양태론 교리’이다. 따라서 ‘노출된 일반 양태론’보다 더 위험한 양태론 이단 교리인 것이다. 지방교회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할 때 정통 삼위일체론을 표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와 오직 한 본질을 소유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위격들이 혼동되어져서는 안 되고 본질이 나뉘어져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삼위이시다, 그러나 그들은 본질에서 하나이시다(We may say that the Triune God has three persons but only one essence; the persons should not be confounded and the essence should not be divided; 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are three in person, but They are one in essence. (Witness Lee, The Revelation and Vision of God, Chapter 1, Section 5) [진술 #1]

위트니스 리의 이러한 진술을 접할 때 누가 리와 지방교회가 정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실상 엘리옷 밀러는 이러한 진술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이 지방교회를 정통이라고 옹호한다. “나는 성경적인 정통을 정의하는 본질적인 것에 이를 때 지방교회와 공동일치한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에 관하여 우리는 영원히 구별된 삼위 안에서 계시된 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실제(reality) 안에서 하나가 된다”(Elliot Miller, We Were Wrong, 50).

그러면, 밀러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지방교회는 정통이란 말인가? 또한 지방교회를 ‘양태론 이단’으로 규정한 사람들은 밀러와 해너그라프처럼 ‘우리가 잘못이었다(‘We Were Wrong)라고 고백하며 CRI처럼 그 나름대로 참회록들을 써야 하는가? 물론 지방교회의 신조가 위에 기록한 바와 같기만 하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지방교회의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리는 아래와 같은 또 다른 진술들로 위와 같은 그의 주장의 정당성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삼위이시라고 감히 말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그들이 삼위가 아니시라고 감히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실로 신비이기 때문이다(We dare not say that 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are three persons, nor do we dare say that They are not, because this is truly a mystery). (Lee, The Revelation and Vision of God, Chapter 1, Section 7) [진술 #2]

리는 진술 #1에서 “우리는 삼일 하나님은 삼위와 오직 한 본질을 소유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런데 위의 진술(진술 #2)에서는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삼위이시라고 감히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을 바꾼다. 진술 #1에서 리는 정통 삼위일체론을 고백하지만, 위의 진술(진술 #2)에서는 정통 삼위일체론에 대한 깊은 회의감(懷疑感)을 드러낸다. 가이슬러와 로즈는 리의 이런 말 바꾸기와 변덕스러움과 모순을 다음과 같이 책망한다. “이에 응하여, 우리는 모순되는 진술들을 감히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기를 원한다. 또한 우리는 양태론적인(modalistic), 즉 정통적이 아닌(unorthodox)언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지적하기를 원한다”(Geisler and Rhodes, 11). 그러면 리는 왜 ‘삼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이렇게 꺼리는가? 리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실제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설명하기 위해서 ‘삼위’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만족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삼위(three Persons)’는 참으로 세 분(three persons)을 의미하기 때문이다(Actually, to use the designation ‘three persons’ to explain the Father, Son, and Spirit is also not quite satisfactory because ‘three Persons’ really means three persons). (Lee, Concerning the Triune God—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Chapter 1, Section 4) [진술 #3] 

리는 진술 #1에서는 ‘삼위’라는 용어를 기꺼이 사용하지만, 진술 #2에서는 ‘삼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꺼리더니, 급기야 위의 진술(진술 #3)에서는 ‘삼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매우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이러한 불만족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실토한다. “삼위(three Persons)는 참으로 세 분(three person)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리에 의하면, 여기 ‘세 분’(three persons)은 ‘세 하나님’ 혹은 ‘분리된 세 위격’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해석은 다음과 같은 리의 말이 그 객관적 정당성을 입증해 준다. “많은 가르침들은 하나님을 세 분(three persons)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하나님을] 세 하나님(three Gods)으로 생각한다(Lee, The Divine Trinity as Revealed in the Holy Word, Chapter 1, Section 1). 달리 말하면 ‘삼위’는 ‘세 분’을 뜻하고, ‘세 분’은 ‘세 하나님’ 혹은 ‘분리된 세 위격’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라는 용어는 ‘삼신론’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것 참 기가 막힐 일이 아닌가! ‘삼위’가 삼신론을 뜻한다고 생각한다면, 리는 왜 진술 #1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와 오직 한 본질을 소유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을 했는가?

리는 진술 #1에서는 정통 삼위일체론을 고백하고, 진술 #3에서는 정통 삼위일체론을 고백한 자신을 자기 스스로 삼신론자로 정죄한다. 그렇다면 리는 정통 삼위일체론자인가 아니면 삼신론자인가? 둘 중에 어느 쪽인가? 둘 다 동시에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리가 참으로 진술 #1(‘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와 오직 한 본질을 소유하신다’)만을 확고하게 믿는다면 그는 정통 삼위일체론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리가 진술 #1(‘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와 오직 한 본질을 소유하신다’)과 진술 #3(‘삼위는 참으로 세 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삼위’는 참으로 ‘세 하나님’이라는 말을 동시에 믿는다면, 그는 자신이 한 말에 스스로 얽혀 삼신론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리는 진술 #1과 진술 #3을 동시에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명백한 모순이기 때문이다. 리는 진술 #1을 믿든지 진술 #3을 믿든지 양자택일해야 한다. 리가 진술 #1을 분명히 믿는다면 진술 #3을 취소해야 한다. 반면에 리가 진술 #3(‘삼위는 참으로 세 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삼위’는 참으로 ‘세 하나님’이라는 말을 믿는다면, 진술 #1(‘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와 오직 한 본질을 소유하신다’)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리가 진술 #3(‘삼위는 참으로 세 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삼위’는 참으로 ‘세 하나님’이라는 말을 취소하지 않고 진술 #1(‘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와 오직 한 본질을 소유하신다’)을 주장한다면, 자신을 정통 삼위일체론자로 가장하고 주위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리는 자신의 주장(진술 #3-‘삼위는 참으로 세 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삼위’는 참으로 ‘세 하나님’이라는 말에 의거하여 볼 때 분명한 삼신론자인 것이다. 이 사실로 보건대, 리는 확실히 정통이 아닌 이단이다!

리 외에도 ‘삼위’라는 용어를 삼신론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칼 바르트(Karl Barth)이다. 그는 ‘위격(pers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회피(avoid)했는데, 그 이유는 “자아 의식을 가진 셋 혹은 삼중의 개인에 대한 견해는 삼신론으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거의 말할 수 없다(the idea of three self-consciousness or a threefold individuality is scarcely possible without falling into tritheism)”고 생각했기 때문이다(Erickson, 231). 물론 칼 바르트의 이러한 말에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은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이 ‘삼위’라는 용어를 왜 여전히 사용하겠는가? 위의 인용문에서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위격’을 사람의 ‘인격’과 동일시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사람의 ‘인격’은 다른 사람의 인격과 구별될 뿐 아니라 분리가 된다. 반면에 하나님의 ‘삼위’는 구별은 되지만 분리되실 수 없다. 왜냐하면 ‘삼위’는 본질상 분리되실 수 없으시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는 이 점에서 결정적으로 잘못되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정직하다. ‘삼위’라는 용어가 삼신론으로 떨어지게 만들 위험성이 다분히 있다고 보고 ‘삼위’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회피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리는 “삼위는 참으로 세 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진술 #3), 즉 ‘삼위’는 참으로 ‘세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뿐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와 오직 한 본질을 소유하신다”(진술 #1)라고 동시에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을 보건대, 리는 칼 바르트 같이 정직하지 못하다. 리는 또한 칼 바르트와 달리 비겁하다. ‘삼위’가 세 분, 즉 ‘세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믿는다면, ‘삼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리가 진술 #1(‘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와 오직 한 본질을 소유하신다’)과 진술 #3(‘삼위는 참으로 세 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삼위’는 참으로 ‘세 하나님’이라는 말을 동시에 주장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는 명백한 모순이다!

지방교회의 열혈 옹호자인 CRI 회장 해너그라프와 편집장 밀러는 리의 글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이런 모순을 알고 있기나 하는가? 해너그라프는 지방교회를 일방적으로 옹호한 CRI 저널 특집판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자랑스럽게 말한다. “당신의 손에 붙들려 있는 그 저널은 워치만 니라는 이름을 가진 한 중국인 그리스도인이 본래 창시한 한 운동에 관한 6년간의 조사의 정점을 보여준다”(Hank Hanegrraff, We Were Wrong, 4). 그리고 이어서 확신에 찬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실제는 내가 그레첸 파산티노와 크리스천연구저널의 편집장인 엘리옷 밀러에게 리빙 스트림 미니스트리스의 대표자들과 만나는 일을 위해서 합석을 하자고 요청했던 때인 2003년에 표면화되었다. 모임을 가지는 동안 나는 지방교회가 부인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 바로 그 교리들에 대한 감동적인 확언들을 들었다. 하나씩, 그들 자신의 말로, 지방교회의 대표자들은 영원히 구별된 삼위 안에 계시된 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증언했다. (Ibid., 4)

행크 해너그라프와 엘리옷 밀러가 들었다는 지방교회 대표자들의 확언은 바로 진술 #1을 말한다. 그러나 이들이 6년간이나 공들여 조사했다는 연구보고서에는 진술 #1(‘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와 오직 한 본질을 소유하신다’)과 진술 #2(‘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삼위이시라고 감히 말하지 않는다’) 및 진술 #3(‘삼위는 참으로 세 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삼위’는 참으로 ‘세 하나님’이라는 주장 사이에 존재하는 명백한 모순에 대한 정확하고 공정한 평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이들은 왜 이러한 모순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들의 글에 리의 모순되는 진술들을 일일이 열거해 놓았으면서도 지방교회를 옹호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는가? 그 이유는 밀러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급진적인 진술들을 해놓고 그의 가르침의 다른 곳에서 그 진술들의 균형을 잡는 리의 양식(pattern)과, 이로 인해 리의 비판자들이 리의 균형을 잡는 진술들은 감안하지 않고 그의 급진적인 진술들에만 달려드는 양식은 현재까지 지속되었다. 사실상 이 주제는, 신학을 다루는 한에 있어서(insofar as it deals with theology), 이 글의 균형을 매우 잘 요약해 주고 있다”(Miller, 13). 

위에 인용된 밀러의 말은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즉 리의 진술들을 종합적으로 살펴 보면 균형이 잡혀 있는 정통이고, 리의 비판자들의 글은 균형을 잃은 부당한 견해들이며, 밀러 자신의 글은 균형을 갖춘 공정한 글이라는 것이다. 글쎄, 정말 그러한가? 과연 리의 진술 #1, #2, #3은 종합적으로 보면 균형이 잡힌 진술들인가? 물론 결코 아니다! 실제로는, 밀러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리의 진술 #1, #2, #3은 균형 잡힌 견해가 아니라 명백한 모순인 것이다! 따라서 밀러의 글도 신학적으로 균형 잡힌 글이 아니라 명백한 모순을 덮어 버린, 혹은 적당히 얼버무린, 이단 교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글인 것이다! 해너그라프나 밀러에게는 리의 진술 #1, #2, #3이 균형 잡힌 진술들로 보일지 몰라도, 대부분의 이단변증가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가이슬러와 로즈는 CRI가 리의 진술 #1, #2, #3에 있는 명백한 모순을 알면서도 리와 지방교회를 일방적으로 두둔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CRI는 그들이 처음부터 지방교회가 삼위일체에 관해서 모순되는 진술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을 인정한다(7). 이것이 CRI가 본래 지방교회를 “사이비 종교집단(cult)” 보다는 “일탈한(aberrant)” 것으로 간주했던 이유이다. 왜냐하면 지방교회가 “정통의 신앙고백들(confessions of orthodoxy)을 부정하고(contradict) 위협하며(compromise) 약화시키는(undermine) 추가의 확언들을 정통의 신앙고백들에 더했기 때문이었다(16). ... 어떤 이상한 이유 때문에, CRI는 한때는 모순되는 진술들이라고 인정했던 그것들이 이제는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무엇이 마음의 변화를 촉발했는가? 이 유명한 이단 변증가들(엘리옷 밀러나 그레첸 파산티노)은 “하나님은 오직 한 위격이시다”라는 진술과 “하나님은 구별된 세 위격”이시라는 진술이 이제는 모순이 아니라고 믿고 있단 말인가? 간단히 말해서, 이상하게도, 그 답은 ‘예’인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Geisler and Rhodes, 11) 

리의 모순된 진술들을 볼 때 우리는 혼돈의 수렁에 빠져 있는 리와 지방교회를 본다. 이들은 이런 ‘모순과 혼돈의 큰 바벨론 교리’를 가지고 정통 교리를 교정하겠다고 때도 장소도 가리지 않고 교리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안목에서 볼 때, 지방교회는 정통교회를 혼동시키는 ‘큰 바벨론’이다! 또한 지방교회는 정통 교회를 분열시키는 ‘영적 음행자’이다! 그리고 정통 교리를 타락시키는 ‘음녀’이다! 또한 정통 교리를 떠난 ‘배교자’이다!

지방교회는 “삼위(three Persons)는 참으로 세 분(three persons)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진술 #3), 즉 ‘삼위’는 참으로 ‘세 하나님’이라고 제멋대로 정의를 내려 놓고는, 정작 ‘위격(person)’에 대한 정의를 내려 줄 것을 정식으로 요구하면 요리조리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곤 한다. 필자가 지방교회 필진(筆陣)에게 ‘위격’에 대한 정의를 내려줄 것을 재차 요구하자 둘째 반론을 통해 아래와 같은 답을 보내 왔다.

김목사는 ‘위격’에 대한 정의를 묻는 질문에 지방 교회측이 답하지 않았다고 했다. 먼저 ‘위격’ (페르소나) 은 성경 용어는 아니다. 그러므로 김석환 박사는 칼빈조차도 “ ’삼위일체’, ‘위격’ 등의 용어 문제에 관하여 (특히 ‘위격’과 ‘실체’라는 용어에 대하여) 옛 교부들이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라는 진술을 했다고 적고 있다(교부들의 삼위일체, 338쪽). 이처럼 ‘위격’은 교부들 간에도 이견이 있는 용어이지만, 지방 교회측은 에베소서 1장에 근거하여, 선택과 예정은 성부에게, 구속은 성자에게, 인침과 보증은 성령에게 각각 귀속시킨다. 혹은 하나님의 경륜을 ‘계획’하신 분은 성부, ‘성취’하신 분은 성자, ‘적용’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라고 구별 한다. 이제 김목사 본인은 ‘위격’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답변할 차례이다. 

위의 인용문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지방교회는 여전히 ‘위격’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를 거부하고 있다. ‘위격’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일을 창조와 구원에 있어서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할을 기술하는 것으로 대신하여 동문서답을 한 것이다. 이처럼 ‘위격’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를 극도로 꺼려하면서, 왜 “삼위는 참으로 세 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진술 #3), 즉 ‘삼위’는 ‘세 하나님’ 혹은 ‘분리된 세 위격’이라고 주장을 하는가? 참으로 지방교회는 ‘혼돈과 모순의 큰 바벨론’이 아닐 수 없다!

지방교회는 반론에서 “위격(페르소나)은 성경 용어는 아니다”라는 말로 얼버무리며 ‘위격’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를 거부한다. 이러한 모습은 ‘여호와의 증인’이 삼위일체는 성경 용어가 아니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자세와 일맥상통한다! ‘위격’이나 ‘삼위일체’는 성경에 등장하는 용어는 아닐지 라도 성경에 있는 가르침의 개념을 표현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성경에 분명히 나오는 ‘위격’이나 ‘삼위일체’의 개념을 적절한 용어를 통해서 표현하는 것은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일이다! 칼빈은 이러한 작업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게다가 교회가 ‘삼위일체’나 ‘위격’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도록 몹시 강요를 받고 있음이 드러났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러한 용어들의 새로움을 비난한다면, 그는 진리의 빛을 하찮게 책임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을 받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겠는가? 왜냐하면 그는 진리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만들어 주는 것들을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John Calvin,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vol. 1, 124)

이럼에도 불구하고 지방교회는 ‘위격’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 자신들의 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것도 고작 2차 자료를 사용해서) 칼빈의 말을 인용한다. 그러나 교회사에 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을 칼빈이 언급한 것이 무슨 그리 대단한 뉴스거리가 되는가? 만약 지방교회의 필진이 1차 자료인 칼빈의 책을 면밀히 읽고 연구했더라면 칼빈의 말을 인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방교회가 인용한 칼빈의 말은 필자의 손에 칼자루로 쥐어져 지방교회를 공격하는 강력한 검이 되었기 때문이다. 안일한 지방교회 필진이여, 2차 자료를, 게다가 몇 십 년 전에 찾아 놓은 케케묵은 자료를 재탕, 삼탕, 아니 수십 탕 우려먹고 또 우려먹는 게으름은 새로운 환경에서 당신들에게 재앙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위격’을 표현하는 헬라어 ‘휘포스타시스’나 라틴어 ‘페르소나’는 둘 다 처음에는 용어의 뜻을 놓고 동방교회나 서방교회에서 논란이 많았으나 4세기 이후에는 ‘위격’(person)으로 정리가 되었다(Cross F. L., ed.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293). 칼빈은 신학 용어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논쟁은 자제했지만, 그 용어들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활용하는 일에는 단호하고 적극적이었다. 아래의 글은 칼빈의 그러한 자세를 잘 보여준다.

교회는 “삼위일체”나 “위격” 등의 표현들을 거짓 교사들의 정체를 드러내는 일에 필수적인 것으로 여겼다. . . .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용어들의 참신함은(그것이 그렇게 불리워져야 한다면), 잽싸게 움직임을 통해서 그것을 회피하는 거짓 교사들을 대항하여 진리를 제시해야 할 때, 특별히 유용했다. 오늘날 우리는 순결하고 유익한 교리의 원수들을 격파하는 우리의 중요한 수고에 있어서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미끈거리는 뱀들은 담대하게 추적하고 붙잡아 으스러뜨리지 않는 한, 그런 비뚤어지고 구불구불한 모습으로 미끄러져간다. 그러므로 부패한 교리를 상대로 벌이는 다양한 투쟁으로 인하여 자극을 받았던 옛 사람들은, 장황한 말들 속에 그들의 오류를 숨겼던 불경한 자들에게 그 어떤 기만적인 잽싼 움직임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느꼈던 바를 완벽한 명확성을 가지고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Ibid., 124-25). 

지방교회가 ‘삼위’를 표현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경향은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에도 잘 나타나 있다. 주지한 바 같이, 정통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위(person)’를 언급한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삼일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쓰며 ‘위’를 의도적으로 생략한다. 그 이유는 리가 이 같은 신조어를 사용할 것을 다음과 같이 주문했기 때문이다. “그분은 삼일(three-one)이다. 어떤 신학적인 글들에는 전치사가 삼과 일 사이에 더해져서 하나 안의 셋(three-in-one)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Lee, The Triune God to Be Life to the Tripartite Man, Chapter 5, Section 1). 정통교회는 ‘한 본질 안에 계신 삼위의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 안의 셋’(three-in –one)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위격’을 생략하고 하나님을 호칭하기 위해 ‘삼일’(three-one)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것은 리의 다음과 같은 이단적인 주장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삼위’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만족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삼위(three Persons)’는 참으로 세 분(three persons)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진술 #3).

칼빈은 이처럼 ‘삼위일체’나 ‘위격’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을 기피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엄중한 경고를 보낸다.

당신은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위격의 삼위일체가 계시다고(there is a trinity of persons) 말할 수 있다. 당신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성경이 진술하는 바를 말할 것이며, 공허한 수다스러움을 중지시킬 것이다. 참으로, 극심한 미신이 이 용어들을 감당할 수 없도록 누구를 심히 강요한다 해도, 비록 그가 파열한다 할지라도, 이제 아무도 “하나”를 들을 때면 “본질의 통일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과 “한 본질 안에 셋”을 들을 때면 이 삼위일체 안의 위격들(the persons in this trinity)을 의미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간교한 속임수가 없이 이것이 고백될 때 우리는 용어들을 가지고 논쟁하며 시간 낭비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나는 용어들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싸움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은밀한 독을 품고 있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반복적으로 경험해 왔다. 그 결과,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모호하게 말하기 보다 의도적으로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Ibid., 128)

지방교회는 리의 진술 #3(‘삼위는 참으로 세 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에 따라 ‘삼위’를 참으로 ‘세 하나님’ 혹은 ‘분리된 세 위격’과 동일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관점에 기초해서 삼위일체에 관한 정통교회의 대부분의 신조들과 많은 가르침들은, 함축적으로 혹은 잠재적으로, 하나님을 ‘세 분’(three persons), 즉 ‘세 하나님’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함부로 주장한다.

니케아 신조를 시작으로 거의 모든 신조들은 함축된 삼신론의 범주에 속한다. 신조들은 삼신론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은 삼신론을 함축하고 있다. 세 번째 범주는 잠재적 삼신론이다. 잠재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많은 가르침들은 하나님을 세 분(three persons)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하나님을] 세 하나님으로 생각한다. Nearly all the creeds, beginning with the Nicene Creed, come under the category of implied tritheism. The creeds do not directly say anything tritheistic, but they contain an implication of tritheism. The third category is subconscious tritheism. Subconsciously, or unconsciously, many teachings have the thought of God as three persons and therefore three Gods. (Lee, The Divine Trinity as Revealed in the Holy Word, Chapter 1, Section 1) [진술 #4]

위의 진술에서 리는 “니케아 신조와 거의 모든 신조들”(아타나시우스 신조가 포함된 것으로 추정함)을 ‘함축적 삼신론’으로 규정한다. 또한 지방교회의 ‘이단적 상호내재론’을 따르지 않는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의 ‘많은 가르침들’을 ‘잠재적 삼신론’으로 정죄한다. 그러면 왜 그렇게 규정하는가? 리에 의하면, ‘니케아 신조 및 거의 모든 신조들’은 하나님을 ‘삼위’(지방교회가 보기에는 ‘분리된 삼위’ 혹은 ‘세 하나님’)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한 바와 같이, 리의 진술 #3(‘삼위는 참으로 세 분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은 ‘삼위’를 불법적으로 ‘세 하나님’으로 규정한다. 결국 ‘함축적 삼신론’이니 ‘잠재적 삼신론’이니 하며 제멋대로 만들어 놓은 용어들은 ‘삼신론’과 실제로는 다를 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런 사실로 보건대, 리는 실제로는 ‘삼위’의 하나님을 표방하는 니케아 신조뿐 아니라 아타나시우스 신조 및 다른 모든 정통 신조들과 가르침들을 ‘함축적 혹은 잠재적 삼신론’이 아닌 삼신론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참조. 필자의 글 ‘정통 삼위일체론을 삼신론으로 정죄한 지방교회’).

리와 지방교회가 이렇게 정통교회를 상대로 한심하고 무모한 이단 정죄를 남발하고 있는 이유는 ‘위격’에 대한 정의가 비성경적이고 이단적이기 때문이다. “삼위는 참으로 세 분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진술 #3), 즉 ‘삼위’는 참으로 ‘세 하나님’ 혹은 ‘분리된 세 위격’이라는 리의 주장은 성경적인 ‘위격’의 개념과는 전혀 동떨어진 무지와 왜곡의 산물이다. 그러면 성경적인 ‘위격’의 개념은 과연 무엇인가?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위격’에 대한 개념을 가장 쉽고 명료하게 설명한 분은 노먼 가이슬러 교수이다. 그의 설명을 들어 보자.

성경은 하나님이신 세 구별된 위격이 계시다고 확언한다. 모두[삼위]는 하나님으로 불리워지시고, 모두[삼위]는 한 위격으로서의 본질적 특징을 소유하고 계시다. ... 인격체(personhood)는 전통적으로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소유한 사람으로 이해된다. 이 세 가지 특징 모두가 성경에 있는 삼위일체의 세 구성원들의 것이다. 본질적으로, 인격체는 하나의 “나”(an “I”) 혹은 하나의 “누구”(a “who”) 혹은 한 대상(a subject)을 나타낸다. 삼위일체의 각 “나”는 (한 공통의 본성에 따라서)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하는 능력을 소유한다. 인격체 그 자체는 그것의 나됨(I-ness) 혹은 누구됨(who-ness)이다. (Geisler, 279)

이어서 가이슬러는 위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삼위’에 구체적으로 적용한다.

삼위일체의 각 구성원은 하나의 위격(나, 누구)으로 언급되기 때문에 하나의 위격(a person)이시다. 각 위는 인격체의 모든 요소 혹은 인격체의 능력인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계시다. 

아버지는 위격이시다
한 위격(“그”)으로 지칭되고 있는 것에 더하여, 인격체의 모든 세 가지 요소가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다. 그분은 깨닫는 지성의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마 6:32). 또한 느끼는 감정의 기능을 가지고 계시다 (창 6:6). 그리고 선택하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마 6:9-10). 게다가 의사소통 하는 능력 (마 11:25)과 가르치는 능력(요 7:16-17)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계시다. 

아들은 위격이시다
한 위격(“그”)으로 지칭되고 있는 것에 더하여, 아들은 오직 인격만이 할 수 있는 의사소통을 하시며 또한 가르치실 수 있다(요 7:17). 게다가 그분 역시 지성을 가지고 계시다 (요 2:25). 또한 감정을 가지고 계시다 (요 11:35). 그리고 의지를 가지고 계시다 (요 6:38). 

성령은 위격이시다
성경을 보면 인격체의 모든 것이 성령의 것이다. 그분은 지성을 가지고 계시다 (요 14:26). 또한 의지를 가지고 계시다 (고전 12:11). 그리고 감정을 가지고 계시다 (엡 4:30). ... 게다가 인칭 대명사 (“그”와 “그의”)가 합당하게 성령께 부여된다 (요 16:13). . . . 마지막으로, 한 인격의 활동들이 성령께 돌려진다. 그는 찾으시고, 아시며, 말씀하시고, 보여주시며, 확신시켜 주시고, 명령하시며, 싸우시고, 움직이시며, 도우시고, 인도하시며, 창조하시고, 재창조하시며, 거룩하게 하시고, 감동하시며, 중보해 주시고, 교회의 일들을 명하시며 기적을 행하신다. 성경의 여러 구절들이 이러한 활동들을 뒷받침한다 (창 6:3; 눅 12:12; 요 3:8; 16:7-8; 행 8:29; 롬 8:26; 고전 2:11; 엡 4:30; 벧후 1:21 등). (Ibid., 287-88)

위와 같은 가이슬러 교수의 ‘위격’에 대한 정의에 덧붙여 한 가지 필히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격’은 하나님의 본질(혹은 본성)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루뎀 교수의 지적과 같이, “위격들 안의 차이는 존재의 차이가 아니라 관계의 차이임이 분명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위격은 참으로 존재해야만 한다”(Grudem, 255).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각 위격은 구별된 존재이시지만, 본질상으로는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시라는 것이다. 이 원리를 무시할 때 정통 삼위일체론은 신기루 같이 사라져 버린다. 지방교회는 이 원리를 무시함으로 양태론 이단(‘아들은 아버지이시고 주는 성령이시다’)이 된 것이다.

“삼위(three Persons)는 참으로 세 분(three persons)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진술 #3), 즉 ‘삼위’는 참으로 ‘세 하나님’ 혹은 ‘분리된 세 위격’이라는 리의 주장은 하나님의 위격을 사람의 인격과 동등 비교를 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격과 사람의 인격을 동등 비교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인격’은 다른 사람의 인격과 구별될 뿐 아니라 분리가 되는 반면, 하나님의 ‘삼위’는 구별은 되지만 본질상 분리되실 수 없기 때문이다. 리와 지방교회는 이 점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오류는 지방교회의 양태론 이단 교리(‘아들은 아버지이시고 주는 성령이시다’)의 근본 원인을 제공한다.

지방교회가, 위에 상술된 바와 같이, ‘위격’에 대한 모순되고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는 진짜 이유는, 또한 ‘위격’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일을 계속 거부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양태론 이단 교리’에 있다. 지방교회의 교리에도 소위 ‘구별된 삼위,’ 즉 구별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계시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 속에서는 “아들은 아버지이시고 주는 성령이시다”(Lee, Concerning the Triune God, 18).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동일한 분,’ 즉 ‘한 인격’(one Person)이시다! 따라서 심령 깊숙이 ‘일위’를 신봉하고 있는 그들이 ‘삼위’를 정의하는 일에 갈팡질팡하고 모순되며 상반된 주장을 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정통 삼위일체론이 되려면 ‘위격’에 대한 성경적인 분명한 이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지방교회의 교리에는 이 필수적인 요소가 빠져 있다. 지방교회는 한편으로는 ‘구별된 삼위’를 믿는다고 말한다. 이는 정통 교리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구별된 삼위를 부정한다. 왜 그런가? 리의 말처럼, ‘삼위’를 ‘세 하나님’이라 해석하면 ‘분리된 삼위’를 주장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본질상이라는 조건을 달지 않고, 리의 말처럼, ‘아들은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성령’이시라고 주장하면 ‘일위’ 혹은 ‘한 인격’ 혹은 ‘한 위격’(one Person)을 주장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이단 교리이다. 일반 양태론은 ‘구별된 삼위’를 부정하고(이단 교리) ‘일위(one Person)’를 주장함(이단 교리)으로 쉽게 식별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지방교회의 양태론은 한편으로는 구별된 삼위를 긍정하고(정통 교리),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하면서(이단 교리) 정통과 이단을 섞는다. 따라서 분별해 내는 일이 쉽지 않다. 지방교회는 그들의 이단 교리를 지적하면 자신들이 신봉한다는 정통 교리를 들고 나와 화두(話頭)를 교활하게 바꾸어 놓은 후 격렬하게 변증하며 치열한 교리 전쟁을 벌인다. 따라서 이단 판정을 내리는 일도 간단치 않다.

지방교회는 ‘삼위일체’ (‘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와 오직 한 본질을 소유하신다’)와 ‘일위일체’ (‘아들은 아버지이시고 주는 성령이시다’)를 동시에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양립될 수 없는 모순이고 무한한 혼돈이며, 이런 점에서 ‘일위일체’만을 주장하는 일반 양태론과 다르다. 일반 양태론은 ‘노출된 양태론’이기 때문에 식별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지방교회의 양태론(‘아들은 아버지이시고 주는 성령이시다’)은 아주 교묘하게 ‘위장된 양태론’이기 때문에 분별하는 일이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일반 양태론보다 지방교회의 양태론은 훨씬 더 위험하다.

지방교회는 한편으로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와 오직 한 본질을 소유하신다”(진술 #1)라고 말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삼위이시라고 감히 말하지 않는다”(진술 #2)라고 말을 바꾼다. 이뿐 아니라, “삼위는 참으로 세 분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진술 #3), 즉 ‘삼위’는 참으로 ‘세 하나님’ 혹은 ‘분리된 세 위격’이라고 또 말을 바꾼다. 이것은 성경적인 정통 삼위일체론이 아니라 ‘혼돈과 기만과 모순의 삼위일체론’이다. 그러므로 지방교회의 삼위일체 교리는 정통 삼위일체론에 혼돈을 가져오는 ‘큰 바벨론의 삼위일체 교리’이다! 또한 정통 삼위일체론을 타락시키는 ‘음녀의 삼위일체 교리’이다! 그리고 정통 삼위일체론을 균열시키는 ‘영적 음행자의 삼위일체 교리’이다! 또한 정통 삼위일체론을 떠난 ‘배교자의 삼위일체 교리’이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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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김홍기 목사 소개

미국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철학박사(Ph.D.)
미국 탈봇신학대학원(Talbot School of Theology) 목회학 석사 및 목회학 박사(M.Div., D.Min.)
교회부흥성장연구원 원장
캐나다록키침례교회 담임목사
WWW.21CHURCH.COM (신천지 관련 동영상 설교 63편, 지방교회 관련 동영상 설교 4편, 여러 이단 관련 동영상 설교가 유투브에 게시됨)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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