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학

[스크랩] "아인슈타인"천재 물리학자의 종교적 신앙

수호천사1 2016. 2. 19. 23:22

천재 물리학자의 종교적 신앙

최재석  |  jschoi@cnu.ac.kr

아인슈타인이 1915년에 예측한 중력파의 존재를 100년 후에 직접 탐지하고 측정했다는 사실이 요즘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에 대해서 경탄하고 있다. 이러한 과학적 천재가 자신은 ‘독실한 신앙인’이라고 말한 것은 종교적 신앙이 과학의 공격을 받는 지금 과학과 종교의 긍정적인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인다. 특히 아인슈타인이 새롭게 각광을 받게 된 지금 아인슈타인의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가 알아보는 것은 종교적 신앙을 외면하는 과학의 시대에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공언에도 불구하고, 21세기 무신론의 전도사를 자칭하는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의 서두에서 아인슈타인은 무신론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도킨스의 책을 읽는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은 그의 말대로 신앙인인가, 그는 도킨스의 말대로 무신론자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글에서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 과학의 시대에 우리가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말에서 귀담아 들을 만한 것이 있는지 찾아보려고 한다.

 

  
▲ 지구에서 10억 광년 이상 떨어져 있는 충돌직전의 두 블랙홀의 모습.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물결이 퍼져 나가듯, 별이 폭발하거나 충돌하면서 생긴 중력의 물결을 미국의 관측소 두 곳에서 동시에 포착해내 아인슈타인이 예측했던 중력파의 실체가 101년만에 확인됐다. 지금까지는 빛과 전자기 방사선의 다른 형태를 통해서만 우주를 관측할 수 있었으나 중력파를 통해 더 많은 우주의 신비를 밝혀낼 수 있을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종교 감정

아인슈타인은 그가 체험한 우주의 장엄함에 대한 신비감을 언급하면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체험은 바로 이 신비감이라고, 종교를 탄생시킨 것은 이 신비감의 체험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엄한 우주 앞에서 인간의 욕망과 목표가 덧없음을 느끼는 한편 장엄성과 놀라운 질서가 자연계와 사고의 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이 심오하기 짝이 없는 우주의 합리성에 대한 인식이나 감성이 참된 신앙심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했다. 과학자가 우주의 신비를 느낄 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사태의 진전과정에 관여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했지만. 이 ‘어떤 존재’를 신이라 부르지 않고 ‘이성’ 혹은 ‘합리성’이라고 말했다. 그가 과학자로서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현존하는 세계의 경이로운 구조를 인식하고 일별하는 데 만족하며, 자연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이성’을 그 일부나마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가 이 ‘어떤 존재’를 신이라고 부르지 않은 것은 피조물에게 상을 주고 벌을 내리는 그리스도교의 초월적인 인격신을 그의 과학적인 합리적 사고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신비감은 종교적 신앙의 출발점이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면서 그 자연을 지배하는 ‘어떤 존재’에게 제사를 드리고 자연재해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빌어 왔다. 우리는 이런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서 그 ‘어떤 존재’를 신이라고 부르고 그 신에게 비는 신앙을 원시적 신앙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원시적 신앙은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드리거나 자동차를 사거나 배를 진수할 때 돼지 머리를 놓고 안전운행을 위해서 신에게 비는 데서 뿐 아니라, 비를 오게 해달라고 교회에서 기도하는 데서도 그 잔재를 찾아볼 수 있다. 종교적 신앙의 중심에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자연의 신비에 대한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 신비주의자들이 있고 어떤 신학자는 앞으로의 종교에서는 신비주의가 주도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과학과 종교의 차이와 협조

아인슈타인은 과학자의 태도와 신앙인의 태도를 대비시켰다. 그에 의하면 과학자는 보편적 인과관계에 사로잡혀 있다. 과학자에게 미래란 과거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필연적이고 결정적인 것으로 비친다. 반면 종교인은 초인적 가치와 목표를 분명하고 완벽하게 인식하고 그 의의를 계속 강화, 확대하려고 한다. 과학은 ‘당위’가 아닌 ‘현상’을 규명하고 종교는 인간의 사고와 행위에 대한 가치판단의 문제를 다룬다. 이렇게 서로 다른 과학과 종교의 영역을 혼동하기 때문에 지난 200여 년 동안 과학적 지식과 신앙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갈등이 존재한다고 말해 왔다. 그리고 과학이 획기적으로 발달함에 따라서 믿음은 지식으로 대체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식의 견해 표명이 일방적임을 알아차릴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행동과 판단에 필연적이고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확신은 합리적인 과학적 방식만으로는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객관적 지식은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데 필요한 강력한 수단을 제공하지만, 궁극적 목표 자체와 그런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은 다른 원천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근본적 목표와 판단을 명확하게 하고 개인의 정서적인 삶에 그런 목표와 판단을 정착시키는 것은 바로 종교라고 그는 주장했다.

과학과 종교가 자기의 영역을 지키지 않고 상대 영역을 침범할 때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시간과 공간상의 대상들과 사건들의 상호연관성을 결정하는 일반법칙을 확립하는 것이 과학의 목표다. 그런데 과학이 과학적 방식에 기초해서 가치와 목적에 대한 근본적 판단을 내리려고 하면 종교와 맞서게 된다. 반면 종교는 자연 일반에 대한 인간의 태도, 개인 생활에 이상을 설정하는 문제 그리고 인간의 상호관계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이런 종교적 사상에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주제에 관한 독단적 주장이 포함될 때 종교와 과학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아인슈타인은 그리스도교가 과학과의 마찰을 피하려면 인격신이 자연 현상에 관여한다는 교리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교는 인간성 자체 안에 있는 진선미를 함양할 수 있는 힘을 활용하고 그 범위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종교적 목표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본질적이 아닌 주제를 피하는 것이 종교의 보존을 위해 중요하다. 달리 말하면, 종교가 과학의 영역에 끼어들면 과학의 시대에 종교의 존립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은 종교와 과학이 호혜적 관계를 유지하고 상호의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종교는 자신이 세운 목표에 도달하는 데에 어떤 수단이 도움이 될 것인가를 과학으로부터 배우고 과학자들은 진실과 지식에 대한 열망을 종교에서 배울 수 있다고 언급했다. 종교의 목표 중 하나가 자기중심적 갈망과 욕구, 두려움의 속박으로부터 가능한 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라면 과학은 또 다른 측면에서 종교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과학자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신비감을 자연 가운데서 느끼면서 신앙인이 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아인슈타인은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고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라고 말했다.


마치면서

과학의 발달로 인해서 무신론이 팽배해진 오늘날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인간의 인식이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존재’를 인정하면서 자신을 ‘독실한 신앙인’이라고 공언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종교가 과학의 공격을 받아서 수세에 몰려 있는 지금 과학과 종교는 호혜관계에 있고 상호 협조해야 한다고 말한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과학은 과학의 영역을, 종교는 종교의 영역을 지켜야 한다는 그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런데 과학자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에서 과학의 영역을 넘어서 종교를 건드리고 있다. 그는 그 책의 서두에서 인격신을 인정하지 않는 아인슈타인은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는데, 그 말은 아인슈타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는 아인슈타인이 인격신을 믿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가톨릭 사제, 유대교 랍비, 그리고 개신교 목회자들의 말을 거듭 인용하고 있다. 도킨스가 그런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아무도 아인슈타인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또한 그를 종교적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사람도 없다.

도킨스는 아인슈타인이 범신론자인 스피노자를 좋아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범신론은 매력적으로 다듬은 무신론’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논리는 스피노자를 좋아한 아인슈타인은 범신론자고, 범신론자인 그는 무신론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문화권에서 자란 도킨스는 인격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신앙이 없는 무신론자로 본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신에 취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신에 취한 사람이 말 그대로 무신론자일까? 그리고 신에 취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을 무신론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초월적인 인격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신에 취할 수 있고 종교적 신앙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신비로 가득 찬 우주 안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성’ 혹은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이 ‘독실한 신앙인’임을 공언하면서도 무신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초월적인 인격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과학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격신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초월적인 신을 거부하면서도 신에 취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그런 스피노자를 좋아했다.

철학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철학은 과학의 발달에 따라서 철학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신학은 철학에 의지해서 하나님의 세계를 설명하려고 노력해 왔다. 따라서 신학은 과학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지금 과학의 시대에 교회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이해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이런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한 신학자들이 20세기 중반부터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있다. 초월적인 신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신학의 대안으로 나온 신학이 만유재신론이다. 만유가 신 안에 있으며 신은 만유에 내재하는 동시에 만유를 초월하여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만유재신론자들은 초월적인 신보다 내재하는 신을 강조한다. 우리 가운데 내재하시는 하나님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에게서 성경적 근거를 댄다. 그리고 에베소서 4장 6절에 나오는 하나님이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를 인용하기도 한다.

100년 전에 아인슈타인이 예측한 중력파가 사실이라는 것이 확증된 지금, 우주적 종교 감정, 우주 안에서 작용하는 ‘어떤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인격신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었던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만유재신론자들의 신학에 주목할 때가 되었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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