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

[스크랩] 주경신학과 조직신학

수호천사1 2016. 2. 10. 19:17

주경신학과 조직신학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은 교의신학[dogmatic theology]이라고도 한다. 대대로 교회 안팎의 도전과 물음에 대해 성경에 최종근거를 놓고, 일반은총의 여러 분야의 계시를 힘입어 진리를 변증하여 드러내는 가르치는 분야이다. 일명 교리인데 교회의 가르침이다.

 

특히 교리의 역사인 [성경교리사]는 매우 중요하다. 초대교회부터 이제까지 성령님은 어떻게 어느 부분을 차츰 차츰 교리작업하도록 이끄셨는지, 그 내용과 배경, 결과를 담고있는 분야이다. 역사방면을 등한히 하거나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바른 교회를 세우거나, 복음진리를 목숨 바쳐 변증해내지 못한다. 하려고 해도 방향이나 목적, 방식을 전혀 모르거나 독단에 빠지기 때문에 그렇다.

 

 

더우기 말로써 조직신학이니 교리사니 진정하고 섭렵한다고 해도, 어떤 믿음과 신학을 고백하는지에 따라서 천양지차이다. 동일한 자료를 힘입어 교리작업을 하더라도 성경 밖의 자료에 대한 자세는 정말 중요하다. 특히 철학이나 과학, 종교학의 영향으로 계시종교인 기독교와 성경에 대한 자세는 오늘날 엄청난 도전과 핍박을 받았다. 그런 만큼 역사적 개혁파 교리를 붙잡는 것은 구원신앙의 초석이요 진실이다.

 

사실 교의신학은 매우 넓고 깊은 분야이다. 교회 안과 밖의 온갖 도전을 물리쳐야 하고, 시대의 흐름에 따른 하나님의 요구와 세상을 향한 진리 변증이야말로 얼마나 중요한 분야인지 절대의 부문인지 더 이상 말할 나위가 없다. 이른바 영 분별의 능력이 있어야하고 자신의 마음을 실험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확인하여야 한다. 너무도 많은 거짓선생들이 늘 쏟아져 나오기에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 인격을 말할 것도 없지만, 학문능력을 연마한 사람이라야만 한다. 그 가운데 언어분야만 놓고 생각해보더라고 직접 여러 나라 말로 된 원자료[original source]를 다룰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 이런 조직신학 선생이 한국에는 없다. 세상 다른 곳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우리라! 그러나 보니 요즘 교회와 신자는 대부분 교리를 부정하거나 교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무섭다. 간교하다.

 

담넘어 다니면 강도라도 말씀하셨다. 교리의 틀을 힘입어야 원만한 인격을 갖추게 되고, 진리를 매우 깊게 통찰하는 사색하는 힘을 지닌다. 진리를 진리로서 드러내는데 매우 강력한 힘을 갖는다. 지금 말하는 분야인 언어를 볼 때 이 말들을 다루기 위한 준비는 피나는 십자가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언어에 배어있는 부패에 물들지 않고, 언어의 쎈스를 힘입으려면 오직 성령님의 이끄심을 받아야만 한다.

 

 

갖추어야만 하는 언어를 떠올리면, 성경언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 신학언어인 라틴어, 그밖에 교회사에서 중요한 문헌과 교리작업에 섭리가운데 쓰신 언어들인 독일어, 불어, 화란어, 영어 적어도 이런 말로 된 작품들을 한글 대하듯 다루어야만 한다. 반드시 그렇다. 토를 달지 말자! 여기에 우리 경우는 한글과 한문까지 반드시 섭렵하여야만 한다. 우리말을 누가 그렇게 준비했는가?

 

말글[언어]를 다루는 훈련을 제대로 갖추지 않으면 제 말에 제가 속아넘어간다. 성경에서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나온다. 이것이 작은 문제인가? 게으름뱅이요, 이기주의자요, 개인주의자요 진실하지 못하고 욕심꾸러기이고 독선 가운데 말쟁이로 전락한다. 깊고도 넓게 하기를 주저한다. 나아가 진리를 얼마나 아전인수로 해석하여 혹세무민하겠는가?

 

 

말글이 사탄의 무기로 어떻게 악용되는지는 성경과 교회역사에서 너무도 뚜렷하고 엄청나다. 난다 긴다 하던 처음 두 사람도 말글로써 고꾸라졌다. 간과하지 말라! 말에서 말로 이어나가면서 성경과 교리를 그럴싸하게 버무리면서 다가오기에 깨어있어야만 한다. 자기를 돌아보지 못한다. 말글에 신중하지 못하다. 이를테면 인용을 하는 경우나 발음하고 적는 경우에도 진실해야 한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게 전개되는 경우가 많기에 조심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말쟁이를 싫어하신다 듣기는 속히 해야 하지만.

 

궁극은 제 나라 말을 잘 다듬어야 한다. 역사관이 뚜렷해야 한다. 논리가 명확해야 하지만 진리는 논리 위에 있음을 놓치면 안된다. 말과 글로써 명료하게 접근해야 한다. 말글의 한계를 알되 얕보면 안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대한 도리를 다루기에 얼마나 각별해야 하겠는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를 잊지 말라. 골목대장 같은 상태로 빠짐을 경계해야만 한다. 동서양을 꿰뚫되 폭넓게 섭렵하라.

 

 

조직신학은 단독으로 발생하지 못한다! 반드시 성경연구로부터 비롯한다! 성경에 나와서 성경으로 돌아간다! 사람 소리, 자기경험, 일반은총은 모두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과 마지막만 아니라 과정 중에도 성경에 호소한다. 단순히 기록된 말글이 아닌, 해석된 진리요 검증된 진리를 힘입어야만 한다. 이 원칙을 충실하게 교회의 지체로서 거쳐야 한다. 진리의 사귐이 역사적 주류의 신학과 신앙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성경을 원어를 중심으로 석의하는 것을 주경신학[exegetical theology]이라고 한다. 좁게는 한가지에 지나지 않는 말로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이라고도 하는데 조심해야 한다. 어쨌거나 조직신학이 왜 주경신학의 소산이냐 하면, 크게는 성경의 말글흐름인 문맥을 중시해야만 하고 특히 계시의 역사성과 점진성, 유기성을 놓쳐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런 방면들을 간과하기 쉽다.

 

 

흔히 성경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제나라 말 읽듯 다루어야만 주석작업이 가능하다. 성경을 늘 주경해야만 조직의 자료가 풍성해지고, 조직신학도 신앙고백의 열매로서 발전한다. 발전하지 않는 믿음의 고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에 대한 소양은 기본이다. 그렇기에 원수 사탄은 원어분야, 주경분야에 벌써 에덴부터 더럽혔다. 계시-언약의 말씀을 곡해하도록 교회 안에서 버젓이 그런 짓을 벌여온다.

 

 

주경 없는 조직은 공허한 철학논리이고 하나님이 없다. 말장난으로 넘어간다. 신학 모든 분야에서 이미 공중의 권세잡은 놈이 석권했다. 이제는 좁은 길이다. 오랜 준비를 교회와 세상에서 건실하게 거쳐야만 하고, 교회에서 진리와 성령님의 인도로 경배와 사귐 중에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아간다. 여기서 진실과 사랑과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을 따른 걱정으로서 소명의식을 발휘한다.

 

물론 주경신학도 성경교리의 도움을 회피하지 않는다. 성경을 깨달으면 어찌 믿음의 내용을 정리하지 않겠는가? 교회의 역사적 발자취에 참여하는데, 어찌 성경과 교리가 삭막하고 딱딱하고 차갑기만 하고 충돌하겠는가? 바른 주경신학을 쉬지 않고 해나가면서, 조직신학 작업도 멈추지 않고, 거룩한 교회의 전투가운데 마땅히 성령님의 선물로서 열매를 늘 맺어야만 한다.

 

리종연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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