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신학

[스크랩] ‘만인제사장’론에 대한 오해(誤解)

수호천사1 2015. 12. 26. 14:33

 ‘만인제사장’론에 대한 오해(誤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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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 소위 ‘평신도신학’을 강조하는 일부 교파들과 이를 무분별하게 혼용하는 일부 장로교인들에 의해 ‘만인제사장(Universal priesthood)’을 근거로, 개신교 현실의 문제점에 대한 대안(代案)을 주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주장들에서는 거의 대부분 ‘평신도’라는 용어를 전혀 문제의식이 없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평신도(the laity)’라는 영어는 로마가톨릭이나 루터교 혹은 성공회와 같이 수직적인 직제론을 지지하는 교파들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용어로서, 만인제사장론을 언급하면서는 결코 동시에 사용할 수 없는 용어다.

그러므로 만인제사장론을 근거로 개신교 직제(職制)를 부정하면서 대안으로 평신도신학을 주장하는 것은, 이미 용어사용에서부터 만인제사장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와 인식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로마가톨릭의 수직적(위계적) 직제에 대한 거부 가운데서 시작한 종교개혁과 개신교의 직제는 수평적이며 기능적(혹은 수종(隨從)적)인 것인데, 잘 아는바와 같이 영국에서부터 잘 발달하기 시작한 근대 민주주의 정치원리가 바로 종교개혁의 직분론을 아주 잘 정립하고 있는 장로교의 교회정치원리에서 시작되기도 했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바탕으로 갱신된 개신교의 직제론에 있어서 만인제사장론은 ‘제사(祭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이는 개념지울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初臨)과 십자가에 달리신 구속(救贖)의 성취 이후로 유대교의 제사와 제사장 제도가 모두 폐기된 것이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만 만인제사장론의 정확한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가장 적극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성경본문은 히브리서 본문인데, 히브리서는 기본적으로 유대교로 돌아오라는 회유에 직면하여 흔들리는 히브리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교의 제사장과 제사제도가 모두 폐지되었음을 확신하도록 하는 사도의 권면으로 되어 있다.

만일 그들이 유대교의 회유에 흔들리고 만다면, 그들이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히 3:1)”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히 6:6)” 하는 패역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제사장과 같이 ‘중보(中保)’의 사역을 하는 직분도 완전히 폐지되었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해서만 신앙과 믿음이 가능한 것을 굳게 붙들도록 히브리서의 사도는 강력히 권면한다.

이러한 성경적 이해는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가 왜 ‘미사(missa)’가 아닌 ‘예배(worship)’를 드리는 지에 대한 근거로서,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 신앙에 있어서의 예배는 제물과 제사장을 통해 이뤄지는 제사가 아니라 말씀(성경)과 설교자(성경의 교사)가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종교개혁의 신앙유산은 ‘성찬’에 있어서도 로마가톨릭과 독특한 구별을 보이는데, 로마가톨릭의 ‘화체설transubstantiation)’과 달리 우리들은 ‘영적임재(spiritual presence)’를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이 영적임재에 있어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영적(spiritual)’이라는 말이 나타내는 바가 바로 ‘성령(聖神)’이심과 아울러 그 성령께서는 말씀의 영이시기 때문에 항상 성찬예식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성찬에 관련한 성경말씀과 강설을 통한 정확한 성찬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의미에서 영적으로 임재 하신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개신교의 성찬은 제사장으로서의 사제(priest)가 아니라 말씀의 교사이자 목자인 목사(‘pastor’ or ‘minister’)에 의해 집례된다.

그리고 그러한 직분으로서의 사제와 목사의 차이는 곧 제사장적이며 수직적인 직제인 사제와, 말씀교사 혹은 목회자로서 직능(職能)적이며 수종(隨從)적 직제인 목사의 차이로서 극명하게 구별된다.

소위 ‘평신도신학’을 강조하는 분들의 주장에서 오해하는 부분이 바로 이러한 직제에 대한 오해로서, ‘평신도’라는 용어는 사용할 수 없음과 아울러 목사와 성도(聖徒)인 신자들이 동일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사도바울이 설명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고전 12:28)” 이를 바탕으로 목사와 직분자(장로, 집사)들이 수종(隨從)적으로 그 직능을 수행하는 점에서 동일할(수평적일) 뿐인 것이다.

아울러 ‘수종(隨從)’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직제에 있어 중요한 것은 자신이 시중드는 직능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성경 가운데서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현대 개신교의 문제점들이 바로 이러한 직분(職分)과 직능(職能)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만인제사장을 주장하며 평신도신학을 강조하는 분들의 문제의식은 거의가 다 이러한 직분과 직능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정확한 이해와 개념이 없이 생각하는 개신교에 대한 문제의식은 당장에는 통쾌하고 명쾌한 대안인 듯 보이지만, 결국에는 더욱 큰 문제를 야기하며 사안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혼란만 초래하고 말 것이니, 바로 이 점에서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거의 유일한 대안이라 할 수 있다.


옮긴글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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