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말 이용익과 김영준 등 친러 보수파는 친미 개화파(박정양, 이상재, 윤치호 등)를 제거하기 위해 '기독교인 박멸 음모'를 꾸몄다. 이들은 황실 재정을 주도하던 자들로, 친미 정동파 독립협회의 비판에 깊은 반감이 있었고 미국 회사의 서울 시내 전차 운영에도 반대했다. 1900년 중국에서 반외세 반기독교 의화단사건(Boxer Movement)이 일어나고, 국내에서도 반외국인 감정이 고조되자 9월에 서울 시내 전차 반대 폭동을 배후에서 지원했다. 그러나 미국 공사 알렌과 다른 외국 공사들의 노력으로 전차 운행이 정상화하자, 고종 황제의 칙령(勅令)을 날조하여 기독교인과 선교사들을 음력 10월 15일(양력 12월 6일)에 모두 살육하라는 통문을 지방관청에 보냈다. 1888년 영아 소동에 이어 한국에서 이루어진 조직적인 반개신교 운동이었다.
한국 내 모든 기독교인을 살육하려던 이 음모는 다행히 사전에 발각되었고, 한국판 의화단사건을 막은 것은 한 문장의 라틴어 전보문이었다. 그 전보는 기독교인들의 생명을 구했고, 음모를 꾸민 이용익과 김영준의 몰락을 가져왔다. 한국판 부림절이었다.
언더우드의 전보로 살해 음모 저지되다
1900년 여름에 이어 10월이 되자 중국에서 의화단사건을 피해 제물포로 오는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늘어났다. YMCA 총무 라이언(W. Lyon), 루스(Herny Luce), 로벤스타인 목사도 있었다. 그들의 핍박 이야기는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한국에서도 그런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주었다.
10월 초 북장로회 연례회는 처음으로 서울이 아닌 평양에서 열렸다. 평양 지부에는 벌써 2,000여 명의 한국인 세례교인과 학습 교인이 있었다. 부산이나 서울 선교사들은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진남포를 거쳐 평양에 갔다. 루스와 로벤스타인 등도 연례회를 참관했다. 1주일간의 연례회를 마친 언더우드는 부인과 아들 홀리, 그리고 세 명의 독신 여자 선교사인 화이팅 의사, 체이스, 눌스(Sadie H. Nourse, 곧 웰번과 결혼)과 2개월간 황해도 지역 순회 전도에 나섰다. 진남포에서 은율로 가서 3주일간 사경회 등을 했다. 환등기(幻燈機)로 보여 준 샌프란시스코항에서 기선의 출발 장면, 서울의 궁궐, 그리스도의 생애 슬라이드는 인기였다. 이어서 곡산과 소래와 백령도를 방문하고 언더우드 일행은 제물포행 기선이 있는 해주로 갔다.
1900년 11월 19일 해주에 도착하자마자 언더우드는 은율읍교회 영수 홍성서가 몰래 보낸 전갈을 통해 서울에서 황해도 각 현에 보낸 '기독교인 살해 칙령'을 받았다. 다음 달 2일에 모든 유학도들이 가까운 서원에 모여서 모든 서양인과 예수교인들을 죽이고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불태우라는 내용이었다. 언더우드는 이 두려운 소식을 서울의 알렌 공사에게 전하는 방법을 궁리했다. 그러나 바로 공사관으로 전보를 보내면 의심을 살 것이므로, 언더우드는 에비슨 의사에게 전보를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영어로 전보로 보내면 중간에 친러파 관리가 없앨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인이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로 전보문을 급히 썼다. 언더우드는 파발(擺撥)을 통해 전보문을 에비슨에게 보냈다.
에비슨은 전보문을 영어로 번역하여 알렌 공사에게 알렸다. 알렌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신중한 언더우드가 보낸 것이라면 신빙성이 있다고 봤다. 그는 사건의 비상성과 중대성 때문에 즉각 외부에 알리고, 이어서 고종을 알현하고 음모 사실을 보고했다. 정부는 강화도와 평안도에 있는 다른 선교사들도 동일한 칙령 소식을 교인들로부터 전해 들었음을 확인했다. 고종은 즉시 살해 칙령은 조작된 것이며, 기독교인을 보호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언더우드는 에비슨에게 전보를 보낼 때, 빨리 달리는 사람을 고용하여 평양의 마페트와 황해도의 천주교 신부들에게도 알렸다. 위급 상황을 알고 공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외국 공사관들도 곧 바로 사태를 파악하고, 기존 칙령을 무시하라는 회람을 돌렸다.
이로써 기독교인 살해 음모는 사전에 저지됐다. 언더우드 일행은 며칠 후 해주에 온 기선을 타고 제물포로 왔다. 언더우드는 목사로서 한국인 교인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위로하기 위해 해주에 남기로 작정했으나, 서울에서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함께 해주를 떠났다.
뭇 생명을 구한 라틴어 공부
언더우드 부인이 쓴 <상투잡이와 보낸 15년>(1904)을 보면 이 사건의 전모가 위와 같이 자세히 나온다. 그런데 나는 그 전보 원문이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선교사 웰본(Arthur Welbon) 목사의 손녀(Priscilla Welbon Ewy)가 할아버지(웰본)와 할머니(눌스)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이 전보 원문(언더우드의 친필)을 공개했다. 그 책 <Arthur Goes to Korea>(2008)에 있는 사진이다.
▲ 언더우드의 친필 전보문(1900년 11월 19일), Priscilla Welbon Ewy, <Arthur Goes to Korea> (Tucson, Ariz: 개인 출판, 2008) |
라틴어 원문은 "Omnibus praefecturis mandatum secreto mittus est In mensis decima Idibus omnes Christianes occident."이다.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현감에게 보낸 비밀 지령, 10월 15일 모든 기독교도 살해."
여기서 날짜는 음력이다. 음력 10월 15일은 양력으로 12월 6일이 된다. 고종의 옥쇄를 훔쳐서 문서를 위조하고 모든 지방관청에 기독교인을 살육하라는 비밀 칙령을 보낸 것이었다.
김영준은 이 일과 이어서 발각된 인천 월미도를 매각한 사건과 연관되어 1901년 처형되었다. 운명이 뒤바뀐 김영준은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과 같은 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김승태 교수는 이를 '한국의 부림절 사건'이라고 불렀다.
페르시아 제국의 대세력가 하만은 여호와만 경배하는 배타적인 유대인들을 말살할 계책을 세우고, 왕에게 유대인을 말살하는 칙령을 내리면 은 1만 달란트를 왕의 보물 창고에 바치겠다고 제안한다. 탐욕스럽고 계략에 능한 그는 유대인을 죽인 후에 그들의 재물을 몰수하여 은 1만 달란트를 보상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에스더의 기지와 용기로 음모가 발각되어 오히려 하만이 효수되고, 모르드개가 그의 영광을 대신 받았다. 한국에서도 기독교인을 죽이려던 김영준은 처형되고, 지혜롭게 라틴어 전보를 보내 기독교인들을 구한 언더우드는 교인들의 참목자로 존경을 받았다.
언더우드는 전보를 보낼 때 한글, 한문, 영어로 쓰면 중간에 이용익-김영준 파 관리가 없앨 것이므로, 라틴어로 보낼 궁리를 했다. 평소 라틴어 성경을 번역하던 실력에, 함께 간 아들(원한경)에게 있는 작은 라틴어 문법서를 참고하면서 서툰 라틴어로 에비슨 의사에게 전보를 보냈다. 에비슨은 라틴어를 잘 했으므로 이를 번역하여 엘런 미국 공사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참고로 내한 선교사 가정에서 2세들에게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가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여자 의사나 교사 출신 어머니는 자녀에게 가정교사가 되어 고전어를 가르쳤다. 언더우드 부인은 의사 출신이라 원한경에게 라틴어를 가르칠 수 있었다. 평양에서 마페트의 자녀들은 의사인 어머니나, 그녀가 죽은 후 버클리대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한 마페트의 두 번째 부인인 어머니에게 그리스어를 배웠다. 아무튼 언더우드가 평소에 공부한 성경 라틴어 공부가 뭇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되었다.
기도 달력의 힘
한국판 의화단사건을 막은 두 번째 숨은 요인은 한국선교회를 위한 '기도 콘서트'(monthly prayer concert)였다. 1900년 11월은 북장로회 해외선교회가 발행한 선교사 '기도 달력'(Yearbook of Prayer for Foreign Missions)에 따라,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매일 한 명씩 기도하도록 정한 달이었다. 당시 북장로회에서 11월은 한국 선교을 위한 달이었다. 11월이 되면 선교 잡지는 한국을 특집으로 다루었고, 교회마다 해외선교부는 한국을 주제로 책이나 논문을 읽고 토론하고 기도했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선교부 기도 달력에는 11월 1일 언더우드 부부, 2일 기퍼드 부부, 3일 무어 부부, 4일 밀러 부부, 5일 빈턴 의사 부부, 6일 에비슨 의사 부부 등의 순서로 30일까지 매일 기도하게 되어 있었다. 바로 1900년 11월 한국선교회를 위해서 전 미국 북장로교회가 기도할 때, 조작된 칙령이 발각되었고 학살 음모가 미연에 방지되었다.
▲ 1900년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기도 달력 11월 첫 페이지. 11월 1일은 서울의 언더우드 부부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었다. |
1888년 영아 소동, 1894년 평양 기독교인 박해 사건, 1900년 친러파의 기독교인 살해 칙령 조작 사건 등은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구(舊) 질서와 충돌하고 박해를 받은 대표적인 사건들이었다. 영아 소동에서 서울의 친중(親中) 보수파 양반 세력은 민중을 선동하여 미국 선교사와 친미 개화파를 몰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선교사들과 각국 공사관의 항의로 실패했다. 평양에서는 마을 제사에 돈을 내지 않는 것을 빌미로 관리들이 비개항장에 부동산을 구입하고 진출하려는 선교사와 그들을 돕는 한국인 기독교인들을 몰아내려고 했다. 관리들은 한국인 교인들을 투옥하고 배교를 강요했다. 영미 공사관의 개입으로 투옥한 교인들은 석방되었다. 청일전쟁과 이후 평양에 진출한 일본인 상인들 덕분에 영미 선교사들도 평양에 진출할 수 있었다. 청일 군인들이 대신 흘린 피로 기독교는 평양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아관파천 이후 힘을 얻은 서울의 친러 세력이 꾸민 기독교인 살해 사건은 홍성서의 발 빠른 전달, 라틴어 전보를 보낸 언더우드의 기지, 알렌 공사의 신속한 조치로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사소한 일이 역사적 반전을 일으킨다
이 세 사건은 모두 19세기 말 개신교 선교가 선교사와 외교관과 본국 정부 관리 사이에 얽힌 복잡한 관계 속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개신교 선교는 제국의 힘의 논리 안에 있었다. 동시에 소수 기독교인과 선교사들이 신앙을 지키고 생존하기 위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적대적 세력들과 맞서야 했던 위협적 상황도 보여 준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고종을 언더우드와 에비슨 등 선교사들이 야간 보초를 서면서 도와준 일도 한몫했을 것이다. 허약한 군주의 생명을 보호해 준 선교사들을 기억한 고종은, 과거 역사 기록을 읽다가 왕의 암살 음모를 알려 준 모르드개를 기억하고 상을 준 아하수에로 왕처럼 5년 후 선교사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칙령을 내렸다.
그러나 얽히고설킨 정치 세력들의 대결과 거대 담론 아래에는, 개인의 지혜와 교회의 영적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역사에서는 흔히 사소한 일로 보이는 것이 반전을 일으킨다. 교회사를 읽고 해석할 때 뺄 수 없는 부분이다. 고전어 공부와 같은 지루하고 딱딱한 일이 하나님나라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해외에 있는 선교사를 위한 중보 기도가 과연 어떤 힘이 될 수 있을까. "역사의 드라마를 움직이는 주연은 누구인가?",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질문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회의가 생겨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역사서를 펼치고 1900년 11월에 일어난 기독교인 살해 칙령 조작 사건을 다시 읽어 보길 권한다.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1세)는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역사 기록을 넘겨 보다가, 과거 왕의 암살 음모를 알린 모르드개에게 상을 내리지 않았던 것을 기억했다. 이렇듯 역사는 어느 날 되살아나 반전을 이룬다.
12월 6일 모든 기독교인과 선교사들을 살해하려고 했던 사탄의 계획이 폭로되고, 그 싹이 잘렸다. 이를 11월 한 달간 미국 교회가 한국과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한 결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모르드개는 민족의 큰 위기 앞에 옷을 찢고 베옷을 입고 대성통곡하며 에스더에게 왕의 유대인 진멸 조서 초본을 전달하고,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스더 4:14)며 강권했다. 이러한 모르드개의 역사관과 3일간 금식하고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일사 각오의 정신으로 왕에게 나아간 에스더의 용기와 잔치를 배설한 지혜가 필요한 때다.
첫 성탄 때에도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공모한 세력이 있었다. 헤롯의 유아 살해령으로 작은 동네 베들레헴에 있던 두 살 아래 유아 10여 명이 살해되었다. 거의 모든 가정이 통곡했다. 아기 예수는 이집트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그 와중에 목자들이 와서 경배했고, 동방박사들도 예물을 바쳤다. 악의 세력과 선의 세력은 교차한다. 문제는 필요한 시점에 평소 준비한 지성과 영성을 용기와 지혜로 바치는가이다.
옥성득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임동순·임미자 석좌 부교수(한국기독교)이다.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2002년부터 UCLA에서 한국근대사와 한국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 <한반도 대부흥>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