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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랑의 최종 열매, 성숙

수호천사1 2015. 10. 9. 23:38

[조덕영 칼럼] 사랑의 최종 열매, 성숙

입력 : 2014.11.12 18:22   

아가서 강해(13): 사랑의 연단은 왜 오는가-아 5:1~9

▲조덕영 박사.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우유를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일어나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지는구나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겉옷을 벗겨 가졌도다
예루살렘 딸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여자들 가운데에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사랑하면 다가오는 불청객이 하나 있다. 사랑하여 결혼해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사랑의 연단이다. 사랑의 연단(갈등과 시련)이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결혼은 단순하지가 않다. 결혼하면 새로운 문제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다른 성, 다른 환경, 다른 성격, 다른 체질, 다른 가정, 다른 지역, 다른 식성, 다른 취미를 가졌다는 것이 항상 좋은 방향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반드시 시련과 갈등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또한 결혼의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서로를 조금씩 알게 되고 익숙하게 되면서, 서로 신비스럽기도 하고 몰라서 뜨거웠던 설렘과 열정은 조금 식기도 하고 무덤덤해지기 시작한다. 그때 시련과 갈등이 시작된다.

신앙의 연단도 이와 유사하다. 신앙의 첫사랑은 무덤덤해지고 신앙의 뜨거움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다. 이때 하나님은 연단(시련과 갈등)을 통해 사람들을 훈련시킨다.

1) 사랑은 함께 누리는 것(1절)

결혼하면 신랑은 동산(신부를 말함)을 누린다. 몰약과 향재료(아름다운 덕행을 말함)를 누리고 꿀송이와 꿀과 포도주와 젖을 누린다. 이것들은 감미로움과 아름다음과 삶의 윤활유와 위로와 격려와 맛을 상징한다. 하나님나라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결혼하면 혼인잔치를 누린다. 결혼 하객으로 참여한 모두가 사랑 안에서 즐겁고 기쁘다. 천국 잔치에 참여한 자들도 사랑의 하나님 안에서 누구나 복되고 기쁨을 누릴 것이다. 그런데 바로 함께한다는 사실이 미묘한 파장을 일으킨다. 어떤 파장이 생기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

2) 사랑을 함께 누리되 갈등과 시련도 함께 시작되는 사랑의 연단 과정(2-7절)

결혼하면 드디어 사랑하는 이가 도움을 청하는 소리(2절)가 들린다. 문을 열어 달라고 하소연한다. 사랑하는 이는 늘 누이요, 사랑하는 자요, 비둘기 같고, 모든 게 완전한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사랑에는 찬란한 햇빛만 있는 게 아니다. 머리는 이슬에 젖고 머리털은 밤안개에 젖으며, 상대방이 애절하게 문을 열어 달라고 신음하는 아픔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를 부르고 자녀가 부모를 부르듯, 하나님께서도 때로는 사랑하는 자를 문 밖에 서서 부르시며, 반대로 하나님의 자녀도 하나님을 애절하게 부를 때가 있다.

결혼하면 놀랍게도 사람이 조금 변한다. 사랑하는 이가 도움을 청하는 소리를 듣고도 가끔 외면하는 경우가 생긴다(3절). 사랑이 무덤덤해질 때 이런 시련이 찾아온다. 자면서 깨어 있어 사랑하는 이의 간절한 소리를 들었으나 잠을 좀 더 자고 싶고, 옷을 다시 입기가 귀찮고, 씻은 발이 더러워지는 것이 귀찮다. 문을 열 수 없다고 핑계를 대며 게으름으로 우물쭈물하는 신부의 모습을 보라. 마치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실은 대충대충 신앙생활을 하며 이리저리 핑곗거리를 찾고 우물쭈물하는 우리의 모습과 얼마나 유사한가!

이런 사랑의 무덤덤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유가 한 가지가 아니다. 아주 다양하다. 게으름, 따분함, 지루함, 갱년기, 무관심, 냉담, 무사안일, 나태, 신앙의 식어버림, 이기심, 자신의 안락과 편안함 추구 등등이다.

사랑의 나태함은 결국 사랑의 분열을 초래한다. 사랑은 문을 열고 박차고 나갔다. 게으름을 피우다 뒤늦게 문을 열어도 소용없다(“때는 늦으리”). 사랑하는 이가 절대 떠나가는 지경에 까지 이르도록 환경을 만들지 말라! 너무 핑계를 대며 게으름을 피우다 신앙의 때를 놓치는 신자들이 있음을 기억하라.

사랑이 떠나가면 어떤 결과가 올까? 사랑이 떠나면 당연히 시련이 찾아온다. 사랑은 떠나고 시련은 밀려 온다. 때로는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 본문의 주인공은 낯선 야경꾼들과 경비병들에게 봉변을 당하였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신자는 낯선 세상에서 지옥 마귀의 밥이 되는 것이다.

3) 사랑의 회복을 위한 치열한 몸부림

사랑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 세상의 밥, 마귀의 밥, 지옥 자식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연단과 회복 과정이 필요하다. 사랑을 잃으면 이를 되찾기 위한 갈망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고난과 시련 가운데도 놀라운 역설적 은혜가 있다. 때론 시련과 징계도 은혜가 된다.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어 본 사람 치고 그 고통을 다시 겪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고통과 고난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또한 없다.

회복을 위한 갈망이 사랑을 되찾게 만든다. 시련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사랑 회복의 계기가 된다. 술람미 여인은 예루살렘 여자들을 붙들고, 자신의 신랑 솔로몬을 만나면 내가 사랑 때문에 병이 났다고 전해 달라고 애절하게 부탁하고 있다. 신자가 당하는 고난과 시련은 하나님께 애절하게 매달리는 계기가 된다.

시련을 극복하면 사랑은 더 단단해진다. 비 온 뒤 땅이 더 단단하게 굳어지듯. 이 사랑의 회복의 비밀 또한 누구도 막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둘만의 은밀한 비밀이요 사랑의 관계이다. 세상은 사랑하는 두 사람만의 은밀한 사랑을 잘 모른다. 세상은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의 그 은밀한 사랑을 잘 모른다.

사랑은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기 시작한다. 효도가 무엇인지 조금 깨달을 즈음 부모님과 그만 작별하는 것과 유사하다. 신앙적 연단의 유익도 유사하다. 신앙적 시련을 통과할 때 하나님을 더 깊이 묵상하게 되고 비로소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절절히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다(롬 5:4; 히 5:14).

사랑 풍경13- 보고 싶은 서울역 그 친구에게

그 날이 내게는 참 쓸쓸한 서울역 풍경이었다
물푸레나무 같은 한 소년이
쥐똥나무 같은 나를 따랐다
그는 다짜고짜 나를 형이라 불렀고
나는 그에게 그저 교만하게
나를 편한 친구라 부르라 했다
고향이 강원도 원주 산골이라 했고
몸이 아파 귀향하는 길이라 했다
내가 보아도 왜소한
나보다도 약해 보이는 약골 소년이었다
내가 아니어도 분명 그는
낯선 서울에서 운명처럼 외로울 친구였다
쇠말뚝 여러 개 박힌 서울 땅에서
그와 나는 그렇게 그때 꺾인 나무들이었다
그를 격려해 준다는 게 그만
치악산 겨울바람은 숨찬 귀래 엄정 옥녀봉을 거뜬히 넘어
내 고향 예성 중원 땅으로 유유히 불어오는
튼튼한 바람이라 칭찬해주었다
문학적 치기(稚氣)에 빠져있던 내가 저지른
말도 안 되는 참 엉뚱한 실수였다
통금 자정이 가까워지자 순사들은 금속성 호루라기를 불어댔고
사람들은 서둘러 서울역 대합실을 빠져나왔다
일부는 바퀴벌레처럼 총총 어디론가 사라졌고 더러는 익숙하게 양동 쪽으로
우리 둘은 여린 귀뚜라미처럼 남산골로 떠밀려왔다
남산골 쪽방 냄새는 내 호주머니 찌든 돈 냄새보다도 진했다
그래서 사람 그리운 우리는 서로 소중한 친구가 되자고 했다
노숙인도 아니었던 우리는
쪽방에서 얽혀 그렇게 함께 방울뱀처럼 진하게 잠들었다
방값을 치룬 건 물론 가난한 내 호주머니였다 
그날 밤 나는 부끄럽게도 서울 떠나는 그 소년의 새벽이 되었다
예수님이 보고 싶을 때
가끔 나는 그 친구가 보고 싶다
아침밥이나 넉넉히 먹여 보낼 걸
다시 만나자고 처음으로 씩씩하게 약속해놓고
미안하게 그만
이름도 잊어버린 안타까운 친구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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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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