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학/각 성서비평의 평가정리
전 철
1.
성서비평은 성서의 의미와 가치를 올바로 이해하려는 학문적인 시도이다. 이러한 출발점에 서서, 우리는 본문비평에서부터
경전비평까지 쉴 새 없이 달려왔다. 우선 성서비평의 역사는 장구한 흐름 을 갖고 있다. 그리고 각기 성서비평학의 역사적 발단과 전개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 다. 또한 그 한계도 각 비평학이 태동된 역사적 지점을 넘어서야만 비로소 시야에 드러나게 된다. 본문비평부터 문학비평의
역사적 과정은 "어떻게 하면 본문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려는가?" 하는 물음에서 진지하게 출발한 몸부림이라고 할 때 그 역사적 과정과 변천의
의의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존 비평학의 한계는 더욱 더 고양된 비평학으로 상승되어 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비평부터 문학비평까지, 각각의 비평에 대한 성격과 의 미와 한계를 이해하도록 하자.
2.
<본문비평>은 가장 순결한 본문의 형태를 회복하는 작업이다. 우리가 지금 만나는 본문은 모두 가 사본이다. 이러한 사본을 넘어서서 본문의 원문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일환으로 하는 작업을 본문비평이다. 본문을 회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으로서 가능한 사본들을 많이 비교하여 본 문의 최종적인 형태를 복원해 낸다. 그렇다면 본문비평은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가? 본문비평은 본문의 가장 원형적인 형태를 발굴하는 비평이기 때문에 모든 비평의 가장 중요한 전제와 바탕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본문비평의 의미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자료비평이다. 자료비평은 자료의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지형을 밝혀냄으로서, 본문 '만'을 회복하려 하였던 본문비평의 한계를 넘어선다. <자료비평>은 자료의 배경을 탐구하는 작업 이다. 성서의 본문은 그 본문의 기록자, 기록연대, 기록상황, 기록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배 경을 탐구하여 성서가 어떻게 씨줄날줄로 결합되어 우리들에게 드러나는지를 밝혀내는 방법이 자 료비평이다. 자료비평의 의의는, 그 문서의 신학적 문학적 특징을 밝혀냄으로서 자료와 본문의 의 도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 되겠다.
<양식비평>은 본문의 삶의 자리를 밝히려는 작업이다. 우선 양식비평은 자료비평의 자료의 배 경에 대한 모호한 자세를 양식을 통하여 보완한다. 양식비평은, 본문의 하부구조에는 구주적 전역 사나, 양식들, 그리고 삶의 자리가 베어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러한 양식을 발 견하고 드러내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양식비평은 특별히 본문의 양식을 밝혀냄으로서, 본문의 독 특한 사상이나 교훈을 올바로 드러내주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특히 시편이나 지혜서 연구 에 매우 유용한 빛을 던져주었다. 하지만 양식비평의 한계 또한 만만치 않다. 성서의 모든 본문을 양식으로 구분할 수 없는 점이 양식비평의 가장 큰 한계가 된다. 또한 양식에 대한 명칭의 통일 성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도 한계가 된다.
<전승비평>은 본문 전승 과정의 의미를 발견하는 작업이다. 전승비평은 전승 과정의 깊은 의미 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굴하여 양식비평을 넘어선다. 전승비평은 독특한 전승을 형성한 단체, 지 역, 요소, 동기를 통하여 여러 전통의 전승과정의 추정과 그 의미를 발견하는 작업이다.
<편집비평>은 본문 전승 과정에 삽입된 편집자의 의도를 꿰뚫어보는 작업이다. 편집비평은 전 승비평에서 비교적 간과하였던 편집자의 신학적 의도와, 최종형태에 더 깊은 관심을 보여주면서 전승비평을 극복한다. 또한 편집비평은 본문의 기자들을 고유한 신학자의 자리에 상승시킴으로서 본문의 신학적 의미를 깊이있게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여러 통시적 방법 가운데 가장 유효하고 적절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편집비평의 한계는 본문의 의미를 신학적인 서클 안에서 만 시도하였다는 점이 되겠다.
<경전비평>은, 성서는 그 자체 안에 경전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밝히는 작업이다. 경전비평은 기존 성서비평의 해체적(destructive) 독해를, 경전의 권위를 매개로 하여, 구성적(constructive) 독해 로 새롭게 전환한다. 기존의 성서비평의 날카로운 메스는 성서를 산산조각 내어버린다. 이때 성서 의 경전성과 신앙의 독자성은 산산히 와해되어 버린다. 여기에서 본질적인 질문이 등장한다. 도대 체 성서비평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이러한 진지한 물음과 경전에 대한 끊임없는 고뇌의 질문이 경전비평을 등장하게 한 동인이 되었다. 신앙공동체가 경전 안에서, 경전을 통해서 어떻게 유지되어 왔는가에 대한 과정을 밝혀내는 작업을 이 비평에서는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시 도의 배경에는 성서본문의 경전형태에 최종적 권위를 둔다는 점이 되겠다. 경전비평은 기존의 비 평의 한계인 신앙공동체의 필요성과 권위에 대한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이 가장 큰 의미라 고 할 수 있겠다.
사회학적 비평은 본문이 등장한 정치 경제적 지층을 탐구함으로서 본문의 의미를 더욱 더 명 확하게 확보해 내려는 작업이다. 기존 성서비평들의 한계지점인, 본문과 그 당시의 정치 경제적 함수관계를 사회학적 비평은 새롭게 복원해 낸다. 사회학적 비평은 본문이 처한 현실사회와 정치 경제적 관계들의 의미를 파악함으로서, 구체적이고도 명백한 사회안에서의 신학적 의미를 발견하 는 비평이다. 어떠한 본문이든 그 본문은 본문이 배경으로 하는 사회적 맥락 앞에서 순결할 수 없다는 점을 사회학적 비평은 제1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학적 비평의 한계도 있다. 시대와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역사적 - 계급적 이해관계만을 통하여 제시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결국 사회학적 비평에 대한 만능주의와 신뢰주의는 자칫 위험스러운 결론으로 이어 질 수 도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겠다.
다음으로 구조주의적 비평이다. 구조주의적 비평은 철저하게 공시적인 비평이다. 구조주의적 비평에 있어서 통시적 접근이나 성서본문과
해석의 역사성과 같은 점은 오히려 성서주석의 오독 을 일으킬 뿐이다. 구조주의적 비평은 구조주의라는 인류의 새로운 이념적 사조에 부흥하여 일어
난 듯한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비평학으로서의 자기목소리가 확보된 비평이라 기 보다는 시대적 사조와 여타 학문의 소용돌이에
함몰된 비평학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여 하간 구조주의적 비평은 성서에 등장한 설화나 본문의 내면적 구조를 명확히 이해하는데 많은 도 움을
준 비평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역사성 보다는 본문을 해독하는 독자의 자리에 권위가 부여됨으로서, 더욱더 친밀한 관계로 독자와 본문을
매개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물 론 구조주의적 비평의 한계도 있다. 가장 큰 한계는, 아무래도 통시적 비평의 긍정성과 유용함을
싸그라히 박제화시킨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음으로 문학비평(신문학비평)이다. 문학비평은 본문을 완결되고 독자적인 하나의 문학작품으 로 상정한다. 또한 문학작품 안에 무한하게 담겨있는 이미지, 사상, 주제, 문학적 아우라, 교훈, 신 학적 의도 등이 종합되어 있기에 이러한 본문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끌어낼 수 있는 방법론은 바로 문학비평에서만 가능하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들은 이러한 전체적인 의미를 끄집어 내려 는 의도 하에 수사학이나 비유법, 문체 등등 일반 문학비평의 성과를 최대한 수용하여 성서본문 의 진면모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주석해낸다. 문학비평의 한계라고 할 때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주관주의적 해석 일변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이 되겠다. 이러한 주관주의적 해석을 넘어설 수 있는 토대가 온전히 마련되었을 때에만 문학비평의 의의와 가치는 더욱 더 빛을 발할 수 있으리 라는 전망을 가져본다.
3.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각기 독특한 지평을 형성하며 역사 안에서 전진한 비평방법을 임의적으로 다른 비평방법을 통하여 비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모든 비평은 서로 긴밀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각 비평이 정확히 어떤 본문을 주석하는데 도움을 주는가 하는 점을 염두해 두면서 비평의 성과와 의의를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각각의 비평은 절대적인 승자일 수 없듯이 그 모든 비평 또한 절대적인 패자가 될 수 없다. 이제 우리의 시선은 어느 비평이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물음보다는 성서본문의 의미를 오늘의 현실에 살려내기 위하여 어느 비평을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우리의 관심의 촉수를 기울이 때라고 여겨본다. 하나님은 비평 자체에 거하시기보다는 비평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구조주의적 비평에 더욱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본문의 의미의 중요성과 더불어 '오늘의 의미'의 중요성은 어느 주석이나 어느 설교에서든지 강조되고 있기 때 문이다. 당연히 오늘의 의미는, 나의 의미이고, 내 안의 내재적 구조가 획득한 의미이기 때문에, 구조주의는 나름대로의 성과와 역할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모든 비평방 법에 대한 깊은 이해, 특히 구조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하여 현실을 통하여 드러나는 본문의 의미를 깊고 넓게 끄집어올릴 수 있기를 기원하며 펜을 놓으려 한다.
철학적 해석학과 해석학(解釋學)의 의미
내용출처 : 리차드 팔머의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김용옥의 『절차탁마대기만성』등
1. 철학적 해석학
해석학은 원래 그 자체로 독립된 학문이 아니라, 문헌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규칙의 규준 내지 규범으로서의 단순한 보조적 학문이었다.
즉 문헌학, 법률학 그리고 성서학 등의 보조 수단으로서, 고전문헌, 법률조항 그리고 성서구절을 올바로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 지켜야 할 ‘이해의
규칙’, 내지는 ‘이해의 기술’이었다. ‘해석학’이란 단어는 희랍어 동사, ‘헤르메뉴오(?ρμηνε?ω)’에서 유래하는 바, ‘진술하다’,
‘선포하다’, ‘번역하다’ 등의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가 다양하다 할지라도, 무엇인가를
‘이해(understanding)하도록 해준다’, ‘이해로 이끌어준다’는 점에서는 하나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이 ‘헤르메뉴오’란 단어는
제우스신의 사자인 헤르메스신과 연관되어 있다. 희랍신화에 의하면 헤르메스신은 제우스신의 뜻과 의사를 다른 신과 인간들에게 전달해주는 임무를 맡은
신이었다. 곧 그는 제우스신의 의도를 다른 신들과 인간들에게 해석해주고 이해하도록 해주는 신이었다는 것이다. 무한한 신의 말을 유한한 인간의
말로 거짓없이 “번역하는” 역할이야말로 헤르메스의 고민이었다. 그 임무를 떠맡으면서 헤르메스는 거짓말은 안 하겠으나 “완전한 진실성”은 보장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즉 그 번역이란 것은 인간에게 ‘이해’되기 위한 것임으로 헤르메스 자신의 “해석”이 개재되지 않을 수 없으며 해석학은 바로
이러한 해석을 문제로 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해석학은 문장의 의미내용의 확인과 언어라는 상징적 형상 속에 담겨 있는 삶의 의미의 발견 등등을
대상으로 하게 된다. 전통적으로 해석학이란 구약과 신약을 대상으로 유다이즘과 기독교 전통 속에서 전개되어온 신학의 주요 과제이다.
그러나 현대철학의 한 주요분과로서 등장하고 있는 해석학이라는 것은 이러한 의미부연을 위한 기술적 방법을 지칭하지 않는다. 주해에 앞서 해결되어야 할 이해의 문제와, 이해와 관련된 인식의 문제다. 이러한 해석학적 전환은 19세기 베를린 조직신학자 슐라이어마허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
슐라이어마허에 의하면 종교라는 것 자체가 느끼고, 생각하고, 행위 하는 개인의 자의식 내에서의 현상으로 이해되고 그러한 개인과 개인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의 역사성 속에서만 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신이란 것도 완전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우리 의식에 나타나는 절대적 의존의 느껴진 관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재래의 문법학적 주석에 심리학적 차원을 도입시키고, 해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저자의 생각의 출현을 그의 삶 경험의 의식의 총체적 관련 속에서 이해하고 또 저자와 저자 당시의 청중이나 독자가 공유하고 있는 언어의 맥락을 중시한다.
이해 자체에 관한 연구는 해석학의 범위를 넓히는 결과를 야기하였는데, 이에 슐라이어마허는 ‘현대 해석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러한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은 딜타이의 역사이성비판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딜타이는 칸트의 정적이고 보편주의적인 인식론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소위 자연과학과 대비되는 정신과학의 확립을 위한 인식론적 근거로서의 해석학이 주요관심이 되고 있다. 딜타이는 칸트는 인간정신생활의 요소들을 너무 고립적으로 이해하였을 뿐 아니라 인간의 느낌과 행동에의 욕구를 무시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칸트가 말하는 순수 이성 자체가 바로 생명의 활동의 총체적 경험의 뿌리 속에 뿌리박고 있다고 보고 일체의 플라톤적인 초월조의를 거부한다. 따라서 칸트의 비역사적 접근방법에 반하여 철저히 역사주의적 방법을 취한다. 딜타이의 생철학적 접근방법은 인간의 삶의 경험을 단순한 물리적 사건의 불연속적 집합이 아닌 의미의 체계로서 파악하고 그 의미의 체계는 반드시 그 경험이 일어나고 있는 역사의 지평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또 그 삶의 경험은 철저히 주관적이요, 시공적이요, 역사적이다. 따라서 딜타이의 생철학적 방법은 진리의 절대성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딜타이는 삶의 경험이 깔고 있는 세계관의 다원적 용인을 요구하고 있다. 즉 이러한 다원성의 인식, 다시 말해서 모든 해석과 평가의 상대성의 용인이야말로 우리의 창조적 노력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의 역사이성비판에서 말하고 있는 역사성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1)모든 인간의 표현은 역사적 과정의 부분이며, 역사적 문맥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인간 자신과 그의 창조의 모든 것은 다른 시대에 따라 다른 특징을 지니기 때문에, 추상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2)다른 시대상황과 다른 개인은 그들이 처하고 있는 특수한 시점과 관점 속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입할 때만이 이해 될 수 있다. 즉 한 시대나 개인의 생각의 타당성은 사가(史家)적 입장에서 밖에는 고려될 수 없다.
3)사가 자신은 또 그 자신의 시대의 지평에 제약되고 있다. 과거가 과거 자신을 사가자신의 관심의 세계 속에서 사가에게 제시하는 양태야말로 과거의 의미의 합법성이라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딜타이에게서 중요한 것은 해석을 통한 과거의 객관적 사실에의 도달이 아니라 지금의 ‘나’의 생의 경험을 통하여 과거의 ‘나’의 생의 경험과 만나는 것이다. 이러한 만남이 곧 그에게 있어서는 “이해”다. 이러한 “이해”의 인식론적 방법은 우선 의미가 경험되고 전달되는 인간의 정신적 과정에 친숙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딜타이의 방법은 나쁘게는 심리만능주의, 좋게는 방법론적 개인주의로 평하여진다. 딜타이의 특수용어인 ‘이해’가 후에 막스 베버의 ‘이해’의 개념의 바탕이 되었고, 또 베버의 ‘이데아티푸스’가 딜타이의 생철학적 역사주의를 배경에 깔고 있다. 딜타이는 말년에 가서 이해의 조건으로 다음의 두 가지를 덧붙였다. 첫째는 모든 표현이 성립되고 있는 특수한 구체적 맥락의 연구이고, 둘째는 그러한 표현의 성격을 규정짓고 있는 사회?문화적 제도의 연구이다. 이러한 딜타이의 입장은 베티(Emilio Betti)에 의하여 수정?보완?발전된다. 그는 기본적으로 딜타이의 해석학 계열에 서 있으면서도 딜타이의 주관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생철학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베티에 의하면 딜타이는 이해의 과정과 내면적 삶의 경험 자체를 혼돈하였다고 본다. 우리는 내면적 삶의 경험에서 정신과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해석학적 대상, 즉 의미체계의 형상 속에 객관화되고 있는 저자의 정신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때 딜타이와 크게 다른 점은 재구성이 기존하고 있는 나의 경험의 확인이 아니라, 대상 자체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자성과 자율성이 무시된 실존적 해석은 자기집착적 주지주의적 이기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티에 의하면 참된 ‘이해’는 주체의 현실태와 객체의 자율태 사이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변증법적 과정으로 본다. 이러한 변증법적 과정에서 해석의 경과의 상대적 객관성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2. 해석학에 대한 세 개의 현대적 정의
첫째는 방법으로서의 해석학이고, 둘째는 철학으로서의 해석학이며, 셋째는 비판으로서의 해석학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슐라이어마허로부터 베티에 이르기까지의 해석학이 방법으로서의 해석학이다. 철학으로서의 해석학은 객관화된 정신의 해석의 방법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해석의 주체인 존재 그 자체의 구조에 큰 관심을 갖는다. 해석의 방법 이전에 현존재의 자기이해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해석학은 하이데거에 의해 대표되는데, 그에 의하면 재래의 생철학자들이 말하던 생자체가 오로지 현존 속에서만 탐구될 수 있으며, 이 현존의
존재론이야말로 현존의 해석학이라고 한다. 현존은 세계(世界)-내(內)-존재(存在)(In-der-Welt-Sein)일 뿐이며, 해석학적 이해가
“자기투여”라고 불리우는 실존적 구조를 그 자체 내에 가지고 있다. 하이데거의 이해와 해석의 실존적 구조에 관한 설명에 의하면 지식의 습득이란
세계-내-존재로서의 존재의 양태의 가능성의 해석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해는 이미 이해된 것의 이해일 뿐이다. 이러한 해석학적 입장에서는 주관과
객관의 엄밀한 구분이 실존의 총체적 구조 속에서 해소되어 버린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해석학은 불트만에 의해 성서해석학으로 발전하고, 또 그 철학적 측면은 가다머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본다. 전자는 신약의 케리그마에 담긴 신화적 언어의 양식과 그것의 해석자의 실존적 이해와의 사이에서 성립하는 변증법적 교섭의 문제를 파고 들어가 비신화화라는 양식비평의 금자탑을 세웠다. 이것은 더 이상 신화적 언어가 사실로 인지되기 힘든 과학적 세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성서이해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의 공로는 크다고 할 것이다.
가다머는 처음부터 모든 이해는 편견적(偏見的)이라는 입장에서 시작한다. 그는 이해의 구조적 성격에서 도출되는 모든 객관성에 대한 몸부림의 한계를 노출시키고 모든 이해는 전통의 영향이 자기를 드러내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해란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의 끊임없는 대화요 만남이다. 대화는 한 이해의 지평과 다른 이해의 지평과의 융합이다 우리는 우리의 지평을 끊임없이 확대하면서 타의 지평을 융합한다. 즉 이해가 일어날 때는 지평들의 융합이 일어나며, 과거와의 만남 속에서 우리의 편견을 재음미하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형성된다.
셋째의 비판으로서의 해석학은 주로 네오맑시스트들에 의해 옹호된 것으로서 매우 참신한 한 시각을 제기한다. 그들은 재래의 해석학자들의 제시하지 않은 전통화된 의미나 텍스트의 내용 그 자체의 진가에 대한 검증의 검토가 그 임무가 되었다. 위증, 조작, 선전, 사유의 억압, 검열의 끊임없는 존속은 우리에게 진리나 지식의 주장에 대한 무비판적 용인을 거부한다. 모든 이해는 이데올로기로 얽혀 있고,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구조를 밝히지 않는 것은 왜곡된 실재의 왜곡된 성찰일 뿐이다. 이들에게는 권위주의적 텍스트에 대한 무비판적이고 독단적인 용인, 그리고 그것의 도덕적 지적 내용을 의심치 않고, 번역?해석하는 일은 우스운 일이 되어 버린다. 하버마스는 객관적 설명방식과 주관적 해석방식을 종합하는 방법으로서 사회적 주인공들이 왜 그들이 생각한 것을 생각했으며, 왜 그것이 틀릴 수 있으며, 어떻게 그 왜곡이 시정될 수 있는가를 밝히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 자신이 이런 비판적 해석학을 심층해석학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런 심층해석학에도 약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비판가의 관점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3. 해석학이 주는 의미
오늘의 해석학이 주는 의미를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해석학은 마음과 몸, 존재와 행동, 이론과 실천을 그 안에 통할한다.
둘째, 해석학에서의 진리 개념은 이성에 의한 인식론적인 개념이기보다는 우리의 전 주체성이 관여된 존재론적(ontological)인 개념이다.
이에 해석학은 진리의 인식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보다는 이해나 해석학적 경험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선호한다. 셋째, 해석학에서의 이해는 주관과
객관의 상호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 넷째, 해석학은 인간의 이해가 본질적으로 역사성을 갖는다고 한다. 인간 주체는 역사성의 산물로서,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 사회적인 현실에 의해 제한되기 마련이다. 또한 해석은 과거와 현재의 역사적 지평의 융합을 통해 발생한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적인 흐름이 해석학적 이해에 있어 중요하다는 말이다. 다섯째 해석학은 전통적으로 텍스트에 대한 이해로 출발한다. 이에 그 텍스트의 이해는
그것을 감싸고 있는 콘텍스트의 이해를 배제하고 수행되어서는 안 된다. 텍스트는 당시의 콘텍스트의 산물이며, 우리는 그러한 텍스트를 오늘의
콘텍스트에 비추어서 해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섯째 해석학은 언어에 의한 전달을 기초로 이루어지는 바, 그 언어는 그것의 배후에 있는 정신을
지적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자로 된 텍스트의 이해를 위해서는 그런 텍스트를 산출한 저자의 정신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고, 그것은 저자의
심리적인 이해 및 저자의 경험에의 참여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이에 문자와 정신, 빠롤(parole)과 랑그(langue)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일곱째 인간의 행동은 그의 존재에 의해 제약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해와 결단은 그 스스로의 것임과 함께 어느 정도
주변의 환경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의 운명임과 동시에 자유로운 결단으로서 그는 그것을 거스를 수 없으나, 그럼에도 그의
자의지를 새로운 창조를 향한 결단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여덟째, 슐라이어마허가 제기한 해석학적 순환의 문제를 짚고 나가야 할 것이다. 해석학적
순환의 논리는 이렇다. 전제를 모르고서는 부분을 이해할 수 없다고 아스트(Friedrich Ast)는 말한 바 있으며, 그 내용을 슐라이어마허는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려운 철학책을 읽었을 때, 그 책의 전체적 주제를 모르고서 읽게 되면, 내용을 도무지 알 수 없으나,
전체적 주제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을 경우엔 그 책의 부분 부분을 이해하기가 용이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에는 모순이 있다. 부분을 모르고서 어떻게 전체를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전체를 알기 위해서는 부분으로부터 접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 해석학적 순환 관계가 놓이게 된다. 부분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전체를 알아야 하고, 전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부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부분을 통해 전체를 알 수 있을까? 슐라이어마허는
그것이 가능하려면, 일종의 직관적이고 신비적인 요소가 가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부분에 관한 직관을 통해 전체로 비약하는 운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러한 신비가 가능한가? 그것은 청자와 화자 사이의 공유되는 의미 공동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이해의 지평은 궁극적으로
깊이의 차원에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언어 공동체 속에 있으면서, 그러한 전이해(preunderstanding)를 물려받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주관은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으로서의 객관과 교호관계에 있다. 객관이 우리의 주관에 영향을 주며, 그 주관은 다시 객관적인 것으로
대상화하는, 순환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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