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학

[스크랩] 김세윤박사 주기도문 강해

수호천사1 2014. 12. 12. 03:04

김세윤박사 주기도문 강해

 

 

강의 1

 

오늘과 내일, 이틀간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묵상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제가 미국에서 상주하고 있기 때문에 거리감이 주는 커뮤니케이션의 어려움이 있어 가지고 내가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오늘 2시간 강의하고 내일 4시간 강의해서 전체 6시간 강의하는 것으로 알았어요. 그렇게 해서 6시간에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제한된 본문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좀더 심도 있게 묵상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 생각으로 준비해 가지고 왔는데, 와서 보니까. 매 시간이 두 시간짜리 한 시간씩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4시간 내일 6시간 그래서 온 나라가 구조 조정한다고 난리를 피우는데 저도 부랴부랴 제 강의를 구조 조정해서 원래 6시간 할려고 했던 강의를 12시간 자리로 늘리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사이 경제계에서 구조조정은 줄이는 것인데 저는 늘리는 방향으로 구조 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드린 outline은 6시간에 할 수 있는 좀 간단히 묵상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택한 강의였는데 시간이 있다고 하니 제가 모험을 하려고 합니다. 제가 강의를 준비하면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을 몇 가지를 함께 논의하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중심 메시지에 대해서 조금 더 심도 있게 토론하고 묵상을 해 보려고 합니다.

다함께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주의 자녀들로 불러 모아 주셔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며 당신 앞에 나아가는 큰 특권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저희들이 이제 앞으로 함께 상고할 때 주의 성령으로 저희들의 마음을 인도하여 주셔서 이 기도의 가르침을 잘 깨닫고 우리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으며 그래서 우리의 신앙과 삶이 더욱 풍성하게 하여 주시고 우리들의 복음 선포와 봉사가 더욱 큰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우선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우리에게 두 판으로 마태 복음판과 누가 복음판으로 주어진 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마태복음 6장 9-13절까지와 누가복음11장 2-4절에 주어졌습니다. 이 두 복음서들에, 두 공관복음서들의 마태와 누가, 마가에 없는 마태와 누가의 공통 자료들을 보통 학자들은 Q 자료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두 자료가 원래 이른 바 Q 라는 우리가 보통 편리하게 Q 라고 붙이는 마태와 누가에 있는 Q 라는 자료에서 온 것일 수도 있구요. 하나는 마태복음판은 마태의 소위 특수자료 보통 우리가 M 이라고 편리하게 기호를 붙이죠. 누가복음판은 또 누가의 특수자료 보통 우리가 L 이라고 부호를 붙이는데 각기 마태는 자신의 특수자료, 누가는 자신의 특수자료에서 전승을 받아가지고 이 본문에 기록했을 가능성이 하나 있구요. 또 하나는 마태나 누가 중의 하나는 Q 에서 자료를 받았는데, 또 그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특수 자료 M 이든지 L 이든지 자신의 특수자료에서 전승 받았을 가능성이 또 하나 있구요. 마지막으로 누가가 마태에 의지해서 썼을 가능성이 있구요. 이 그리스 바흐 가설에 따라 해결에 따르면 그런 해결책이 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자료를 복잡하게 생각하느냐하면 여기에 여러분들에게 편리하게 나누어 드린 마태복음판과 누가복음판이 보여주듯이 상당부분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 상당 부분 다른 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예요. 이중에 어느 가설이 가장 합당하냐? 그것은 판정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이 네 가능성 중에 어느 것이라도 가능하면서도 그러나 확실하지 않죠. 아마 지금 대다수의 학자들 중에 이 3가지 중에 처음 세 가지 중에 하나의 가능성을 많이 생각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아마 첫 가능성을 많은 학자들이 지지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문학적 맥락을 보면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커요. 우선 누가복음 11장 1-2에서 읽어보면, 본문을 누가 한번 읽어 주시겠습니까? 누가는 주께서 이 기도를 가르치신 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서문을 다냐면은 요한도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으니 선생님도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이것은 어떤 배경을 지금 두고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 당시에 소위 쉽게 말해서 유대인들 중에 유대교 내에 종말을 대비한 부흥운동을 하는 사람들, 단체들이 참 많았죠. 우리가 잘 아는 바리새운동도 그런 운동 중에 하나였고,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제사장 민족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던 중산층 평신도 경건운동도 바리새운동 아니었습니까? 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에센파 운동도 그런 운동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크게 세력을 얻어서 유대 전쟁을 일으키는 열혈당 운동도 그 운동 중에 하나였고. 그 중에 하나가 세례요한 운동이죠 세례요한이 임박한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면서 그 심판에 대비해서 회개하고, 회개를 표징으로 세례를 받는 그런 회개와 부흥 운동을 했었죠.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이 원래는 이 요한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이었죠. 그것은 사복음서에 여러 곳에 그 흔적을 보여주는데, 특별히 요한복음 1장 18절 이후에 그것을 우리에게 잘 암시해 주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원래 요한의 제자로서 요한 운동에 동참하다가 독립을 해서 복음서들은 그의 세례와 더불어 독립한 것을 보여주는데, 새로운 예수의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 운동을 새롭게 시작한 것입니다. 일부 예수와 함께 요한의 제자였던 사람들이 예수와 함께 또는 예수를 따라서 넘어와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을 한 것입니다. 아마 요한은 자기의 회개와 부흥운동을 신학적으로 잘 표현하고 그 운동의 소망과 이상을 잘 표현하는 기도를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그 관행으로 보통 있었던 일이죠. 그래서 예수께서 이제 요한 운동으로 독립해서 새롭게 독립운동을 하니 요한의 가르침과 비슷한 가르침을 하면서 상당히 새로운 가르침을 하시면서 새로운 정신 새로운 강조점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시죠. 요한은 불로 심판을 강조하셨다면, 하나님이 곧 오셔서 하나님이 오셔서 불로 심판하는 것을 강조하셨다면 예수는 무엇을 강조하셨어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 강조하셨습니다. 요한이 그래서 심판에 대비한 극도의 절제적 삶, 금욕적 절제의 삶을 요구했다면, 예수는 그와 반대적인 방향으로 나갔어요. 자신의 하나님 나라 복음에 의한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에 하나님의 용서를 선언하고, 그들과 먹고 마시는 잔치를 많이 벌리시는 그런 것을 한 것을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이렇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비슷한 점과 대조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만은 이렇게 예수께서는 요한 운동에서 시작하시고 독립하여 새로운 정신, 새로운 이상, 새로운 소망, 새로운 태도 이런 것을 표방하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한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이 예수의 공동체가 자신들의 신학과 자신들의 이상과 소망을 담아서 표현하는 새로운 기도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의 가르친 기도가 요한의 신학을 담아서 요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었듯이 예수운동에 있어서도 예수의 가르친 신학과 예수의 이상과 예수의 소망 이런 것을 잘 담아 표현함으로 예수 공동체, 예수께서 지금 새롭게 구성하시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정체성(Identity)을 가장 잘 나타낼 그런 기도가 필요하게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런 기도를 가르쳐 달라 한 것으로 이 기도가 주어진 것으로 되어있어요. 누가복음에 보면,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우리가 요약해서 주기도문이라 하는데 이보다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기도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여 새롭게 창조하고 구성하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의 신앙과 이상과 소망을 가장 잘 담아 표현하는 기도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그런 기도이죠. 그래서 이 기도는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기도로 원래부터 주어진 것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아마 몇 개의 기도들이 유대교에서 공적인 기도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그 중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두 개의 기도를 소개했습니다. 하나는 Kaddish라는 기도로 이 기도는 유대의 회당에서 설교 끝에 함께 낭송했던 기도인데, 짤막한 기도입니다. 또 하나는 18-축복기도(Shemone Esre) 이 기도는 유대인들이 하루에 세 번씩. 아침에, 오후 시작에 , 저녁시작에 하루에 세 번씩 꼭 드려야 하는 기도였습니다. 18번 축복기도야 말로 모든 유대인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기도였죠. 그래서 아마 예수 당시 처음에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18번-축복기도와 함께 드려졌다가 점차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18번-축복기도를 대처하고 교회의 유일한 공통기도가 된 것 같습니다. 그것은 처음에 교회가 이방인 선교를 통해서 교회 이방인들이 많이 늘어나고 그래서 18번-축복기도의 전통을 안 받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특히 A.D. 66-70년까지의 유대 전쟁을 기점으로 해서 교회와 유대교는 이제 분리하게 됩니다. 특히A.D. 66-70년의 유대전쟁 직후, 유대교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자로 규정을 하고 유대 회당에서 많이 축출했습니다. 여기 18번-축복기도의 12번째 기도를 보시면 "배교자들에게는 소망이 없게 하시고 교만한 나라는 빨리 우리의 생애에 뿌리 뽑히게 하소서. 그리고 나사렛 당원들과 이단자들은 빨리 망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책에서 지워지게 하시며, 그들이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교만한 자들을 겸손케 하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여기 18번-축복기도에 무엇이 들어있어요?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는 항목이 들어 있어요. 이것은 벌써 무엇을 반영합니까? 이 무렵에 명백히 예수당, 나사렛당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자들로 규정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유대회당에서 축출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이때 교회와 유대회당이 명백히 분리되면서 교회가 유대교와 공식적으로 관계를 끊게 된 것입니다. 그런 무렵, 즉 이방인들이 점점 교회의 다수가 되어가는 상황, 다른 한편으로는 이 유대인교에서 교회가 분리되는 그런 상황, 그런 상황 속에서 18번-축복기도는 이제 교회의 기도로서는 사라지고, 그 대신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기본적인 공중기도가 된 것을 우리가 알 수 있겠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살펴보면 마태복음 6장을 살펴보면 노트에 간단히 OUTLINE 한 것과 같이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이른바 산상수훈 한 중심에 즉 한 가운데에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싣고 있어요. 여기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16절까지는 소위 팔복의 선언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창조하고 구성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예수께서 복을 선언하는, 축하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백성에 정체성(Identity)에 대해서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제일 먼저 무엇이 되어야 한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내조의 자원으로 자신들의 자기의 생명과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그들의 소망을 거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첫째로, 하나님의 백성에. 둘째로, 지금 이 세상에서 사탄의 악과 고난으로 통치하는 세상에서 애통해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곧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셋째로 온유한 사람들이다. 또 의에 대해서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이다. 등등 8가지로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에게 축하하는 예수의 말씀이 있고, 그 다음에 13절에서 16절에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세상에서 소금이어야 되고 막고 세상에 살맛나게 하는 그런 공동체는 세상에 대해서 빛이 되어야 한다라는 하나님의 빛 곧,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자.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전달자여야 한다. 여기까지가 산상수훈의 서문이라 한다면 5장 17절부터 7장 11절까지가 산상수훈의 본론이겠죠.

 

여기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법, 그래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원리를 주시는데, 자세히 보면 사실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법으로 내세운 사랑의 이중계명,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하나님에 대해 혼신을 다하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사랑, 의지와 순종, 그리고 이웃에 대한 내몸 같이 사랑을 부연 설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순종의 요구로 오는 것이고, 이웃 사랑에 대한 요구로 오는데, 너희가 그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너희가 바로 세상의 소금 노릇한 것이고, 빛 노릇한 것이고 그런 너희에게 복이 있다. 축복이 있다고 지금 산상수훈은 그렇게 구조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그 산상수훈에서 가장 한 복판, 중심에 위치했다 그런 말입니다. 거기 보시면 처음 5장 3절- 16절에는 팔복이 있죠. 17-48까지에 예수의 새로운 법, 모세의 법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 모세의 법은 모세를 통해서 시내에서 계시된 법은 행위의 외형적 최소한을 규제하는 그런 법이었다면 예수께서는 뭐라고 그래요? 반대어법으로 소위(??? statement)으로 예수께서 뭐라고 그래요. 행위의 외적인 최소한이 아니고, 그 행위를 유발시키는 동기의 내면적 최대한을 규제하고 요구하는 그런 법이다. 그래서 가령 "너희가 옛 사람들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말해졌다고 들었다" 옛사람들에게 말해진 법은 무엇입니까?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시내의 법 아닙니까? 시내의 계시 살인하지 말라.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옛사람에게 주어진 말-십계명.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형제를 미워하거나, 형제를 바보 멍텅구리라고 하거나, 형제에게 분을 내는 사람은 어떻다구요? 살인을 한 것이다." 그래서 공회에 잡혀 재판에 넘겨진다. 옛사람들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계명이 주어졌다고 들었다. 그것이 뭐예요? 모세의 법을 얘기하죠? 십계명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예수께서 주시는 새 법은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으면 이미 그 마음속에 간음한 것이다. 살인이라는 외형적 최소한 남의 목을 치지 않으면 살인이 아니라는 옛 법에 대해 예수의 새 법은 그런 살인 행위를 유발시키는 형제에 대한 무시의 태도라든지 증오의 태도라든지 동기의 내면의 최대한을 규제하는 그런 법이다. 간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법을 훨씬 더 모세의 권을 능가하는 권으로 모세법을 훨씬 더 완벽하게 계시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죠. 이것이 5장입니다.

그리고는 6장 1-18절까지의 종교 행위들, 경건 행위들에 대해서 가르치는데 거기에 주기도문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6장 19절에서7장 11절까지는 사실은 사랑의 이중계명 입니다. 제 1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우상숭배를 배격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의 반대말은 그것은 우상숭배인데, 예수께서 가장 절실히 지금 우리 모두에게 위협으로 내세우는 우상숭배의 형태는 Mammonism이예요. 누구도 하나님과 Mammon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Mammonism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그래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한다면, 공중에 나는 새를 보고 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면서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해주시고, 아빠 노릇해주시는 그 하나님께 의지하여 일용할 양식을 그 하나님께로 얻는 그런 자세로 살아야 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6장 19절- 7장 11절까지는 제 1계명 하나님만 의지하고 섬김, 우상숭배 반대에 대한 설교라고 할 수 있고 또는 예수의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한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그 긴 설교가 거기에 이어지고 마지막 결론적 권면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 열매, 행위의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더니, 이 예수께서 새롭게 계시하시는 법을 듣기만 하는 자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요. 이것을 행하는 자라야 반석위에 집을 짓는 지혜 있는 자라는 그 비유로 마지막 권면을 합니다.

 

그 산상수훈을 다섯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그 가운데 부분이 종교행위에 대한 가르침인데 거기에 주기도문이 들어 있습니다. 종교행위에 대한 부분 6장 1절에서 18절까지가 또 세 부분으로 되어있습니다.

세 개의 대표적인 종교행위, 경건행위를 다루고 있는데 거기에는 첫째는 자선,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당시 유대인들과 같이 내놓고 자랑하면서 자선하지 말라고 자선행위에 대해서 가르치고 그 다음에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고, 금식에 대해서 가르치고, 금식도 금식한다 사람들에게 얼굴을 드러내지 말고 금식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습니까? 자선, 기도, 금식. 거기에서 기도를 또 그 가운데 넣어 놓았어요. 기도 부분에서도 또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중심부분에 넣어 놓았어요 6장 5절에서 15절까지 기도에 관한 가르침인데 거기에 보면 6장 5절 - 9절 전반부까지는 그릇된 기도들, 첫째, 유대인들의 그릇된 기도, 둘째, 이방인들의 그릇된 기도를 비판하고는 너희들은 그렇게 기도하면 안 된다고 하시고, 이제 예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고 주기도문의 강조점을 다시 한번 되새김으로 이웃에 대한 죄 용서를 요구하는 강조를 하시고 마쳐요.

 

자! 마태가 이렇게 아주 정교하게 마태복음 사실 굉장히 문학적으로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는 복음서라는 것을 아시죠. 5개의 강론과 5개의 설교와 5개의 이야기들로 되어 있는 강론 이야기, 강론 이야기, 강론 이야기, 강론 이야기, 강론 이야기, 5개의 이야기와 5개의 설교들로 정교하게 교직되어 있는 마태복음이죠. 마태가 그렇게 정교하게 전체를 교직할 뿐만 아니라 산상수훈도 굉장히 정교하게 구성을 했는데, 혹 한 가운데 주기도문을 넣어놓았어요. 이것은 뭘 우리에게 말하려고 한 것입니까? 마태는 기도야 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가장 근본 도리이다. 이 기도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힘을 얻는다 이런 것을 말하고자 함이죠. 우리 제자도의 가장 중심에 기도가 있다. 이런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백성 됨의 가장 핵심에 바로 기도가 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어떤 기도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하나님 백성 됨의 가장 근본에, 중심에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있다. 이렇게 기도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되는 것이고, 예수의 제자들로 살아야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은 6장 주기도문의 바로 위, 아래를 조금 다시 분석해 봅시다. 마태는 거기도 아주 정교하게 구성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6장 9절에서 13절까지가 주기도문(Lord's Prayer)이라면 이 기도를 마태는 6장 8절과 6장 14,15절로 틀을 짜고 그 틀 속 가운데 넣어 놓았어요. 누군가 마태복음 6장 8절 한번 읽어보십시오.1)

네, 거기에서의 핵심이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하나님 너희 아빠께서, 너희들의 필요한 것들을 다 이미 알고 계시다. 그 다음에 6잘 14-15절은 누가 한번 읽어보십쇼2)

 


그러면 그렇게 우리 모두에게 우리 실존에 가장 중요한 양식 청원과 죄 용서의 청원은 우리에게 부수적으로 우리에게 함께 주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이런 것을 마태는 그의 문학적 구조상 우리에게 미리 암시를 해 주고 있어요. 그래서 주기도문을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해석을 함으로써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정확한 이해와 그 강조점에 대한 정확한 음미를 하라. 그렇게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죠. 우리가 주기도문에 대한 서문을 하고 있어요,

 


세 번째, 지금 마태판과 누가판이 있는데, 그것이 많이 다르단 말이예요. 그러면은 어느 판이 더 예수의 원래 가르침에 더 가까운가? 혹 예수의 원래 가르침을 재구성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을 우리가 생각해 봐야합니다. 예수의 원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문자까지 재구성하려는 노력은 이런 자리에서는 할 수 없고요. 중요한 것은 마태와 누가판을 비교함으로써 어떤 것이 추후에 덧붙여졌는가? 어떤 것이 원래부터 있었는가? 이런 것은 우리가 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것을 먼저 해 보겠습니다.

 

자! 마태판과 누가판을 비교할 때에 제일 먼저 원래 사본에는 없으나 우리 교회의 예배 의식에서 항상 덧붙여 나오는 것이 마지막 송영이죠. 송영(doxoiogy). 이것은 원래 누가판에는 일단 없는 것이고, 마태판에도 오래된 중요한 사본들은 안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나중에 덧붙여진 부분임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주기도문이 원래는 송영이 없었던 것인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 유대의 모든 기도는 항상 송영을 답니다. 송영을 "마지막 도장"이라 이렇게 불렀어요. 그래서 유대의 모든 기도는 항상 송영으로 끝남으로 예수께서도 그의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분명히 송영을 다셨을 것이다. 또는 예수에게서 이 기도를 받은 원래 제자들도 이 기도를 할 때 항상 송영을 덧붙여 했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짐작할 수 있어요. 송영이 어떻게 덧붙여졌겠는가? 어떤 내용이었겠나? 그런데 나중 교회 전통에는 지금 우리 정형화된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란 그런 송영이 덧붙여지게 되었나? 그것을 생각해야 되겠죠.

 

이런 것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교부 중에 터툴리안이라는 사람 아시죠? 터툴리안은 "그의 기도"라는 논문에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그러니까 "우리를 악으로부터 악한 자로부터 구출하소서" 다음에 각 개인이 거기까지는 공적인 기도, 함께 하는 거구요. 그 다음에 각자가 자신의 개인적인 기도를 덧붙여진 것이다 라고 가르쳐요. 아마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한 뒤에 고대교회 터툴리안이 속한 서방교회에서는 자기들의 특별한 청원들을 올리고 그리고 송영들을 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런데 동방교회에서는 회중은 "악한 자에게서 우리를 구출하소서"라고 거기까지만 기도하면, 사제가 송영을 함으로 예배의 그 부분을 기도 부분을 마쳤어요. 지금도 그래요. 지금도 동방교회의 예배의식(liturgy)에서는 회중은 "악한 자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소서"까지만 하면, 이제 예배를 인도하는 사제가 "왜냐하면 나라와 영광과 권능이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송영을 덧붙여요. 그래서 이 송영이 동방교회에서는 사제가 하는 것이었는데, 원래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그랬느냐?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 하여간 송영이 없이 이 기도가 드려진 것 같지는 않다.

 


지금 디모데 후서 4장 18절을 누가 한번 읽어주세요. 예, 거기 18절에 "주께서 모든 악으로부터 나를 구출하시고 그의 하늘의 나라를 위해서 나를 구원하셨다". 이것은 지금 주기도문의 요약 아닙니까? 그런데 주기도문의 요약이 무엇과 함께 나와요? 거기에서도 송영과 함께 나오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송영과 함께 나오죠. 그래서 송영이 없이는 처음부터 항상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송영과 함께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왜 송영이 첫 사본에는 없느냐? 아마 이 부분은 사제가 그때그때 적절하게 만들어서, 지어서 했든지 아니면, 기도를 올리는 회중이 그때그때 적절하게 만들어서 했든지, 그래서 자유롭게 지어서 만들 수 있는 것이어서 원래 주기도문 본문에는 포함되지 않았지 않겠나 그렇게 볼 수 있어요. 그러다가 점점 송영이 예배 의식에서 정형화되어 가지고 오늘 마태복음 일부 늦은 사본에 나오는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 하나님께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칭송하는 송영으로 정형화 된 것 같다.

그런데 가만히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칭송하는 것을 보면 혹 이것이 다니엘서 7장 14절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다니엘서 7장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자 같은 이에게 그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위임하죠. 그래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말할 때 이렇게 삼중으로 말하는 것이 다니엘서 7장에서 나오는데, 거기에서 영감을 받아 가지고 나중에 주기도문에 덧붙여진 송영이 이렇게 삼중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그렇게 우리가 말할 수 있겠어요. 또 이 송영은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칭송하는 송영은 이 주기도문의 제일 첫 청원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와 소위 Inclusio를 이루어요. 제일 처음에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기도하죠? 그리고 기도 끝에 하나님의 초월자되심, 거룩하심, 하나님의 우주의 주되심, 그의 영광스러움을 천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김을 서약한다고 하죠. 그래서 첫 청원과 송영이 짝을 이룬다. 이것을 우리는 Inclusio라고 한다. 그런 구조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자! 그 다음에 우리가 토론해야 할 것이 마태가 덧붙인 것인가? 아니면 누가가 생략한 것인가?

그런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겠죠? 거기 보면 누가판에는 어떻게 되어 있어요? "아빠"이렇게 만 되어 있어요. 하나님에 대한 부름이 "아빠", "아버지" 그런데 마태는 "하늘에 계시는" 이라는 절을 달아 놓았죠.

그 다음에 셋째 청원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땅에서도" 이 마태의 셋째 청원은 누가에는 나타나지 않아요.

그 다음에 마지막 마태의 6번째 청원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우리를 악한 자로부터 구출(구원)하여 주소서" 여섯 번째 청원의 두 번째 부분- "악한 자로부터 구출하여 주소서" 그 부분이 또 누가복음에는 없어요. 그래서 이 세 부분에 있어서 누가가 원래 있었던 것을 생략한 것인지, 원래 없었던 것을 마태가 덧붙인 것인지 우리가 따져봐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주석가들이 동의하기는 마태가 덧붙인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누가가 예수의 원래 기도를 전달하고 마태가 확대한 것으로 봅니다. 마태복음의 주기도문판은 그 송영이 이미 잘 보여주듯이, 그리고 하늘에 계시는 이런 문구가 잘 보여 주듯이 주기도문이 교회 예배의식(Liturgy)에 있어서 오래 사용되면서 굉장히 풍부하게 발달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누가에 없는 것들이 마태에 있는 부분은 마태가 확대한 것으로 우리가 결론을 내릴 수 있어요. 그러면 마태가 왜 이런 부분을 더 확대했느냐? 이 주기도문의 뜻을 분명하고 더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 마태가 그렇게 확대한 것이죠. 그리고는 각 질문마다 표현이 다르기도 한데 그런 것들은 하나하나 청원에 대해서 공부할 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또 하나의 질문은 지금 그러면 이 주기도문에 몇 개의 청원들이 있는가? 원래 짧은 시간에 주기도문을 강의하려고 생각해 가지고 그냥 주기도문의 풍부한 판인 마태복음 판을 여섯 개의 청원들을 하나씩 하나씩 묵상해 가는 그런 구도로 하려고 했는데 조금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오늘은 근본문제를 다루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우리가 다루어야 주기도문의 어디에다 강조점을 두어서 해석을 해야 되는가 알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지금 우선 마태와 누가를 비교해 보면 누가는 몇 개입니까? 누가는 5개입니다. 마태는 6개입니다. 누가판에는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도 이루어지이다"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마태가 나중에 교회의 예배 때의 공식기도로 발달된 상태의 주기도문을 반영하는 것 같다는 판정을 이미 우리가 내렸습니다.

 

그런데 내가 관찰해 보기에는 주기도문이 사실은 4개의 청원으로 되어있다 라고 봅니다. 왜 그런가? 첫째로, 마태의 셋째 청원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것은 분명히 바로 앞에 가는 하나님 나라의 청원을 설명하는, 그것을 부연하는 그런 청원입니다. "당신의 나라가 땅위에서도 임하게 하소서" 그래서 "땅위에서도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래서 마태가 덧붙이는 셋째 청원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바로 앞서가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빨리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청원에 대한 부연이라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의 세계관은 세계가 하늘과 땅으로 되어있지 않습니까?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을 하나님께서 그의 대리자로 세웠어요. 아담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창세기 1장 26절, 28절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땅위에 자기 대리인으로 세웠다. 아담을 통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을 통치하시는데 그 대리인이 어떻게 된 거예요? 대리인이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사단의 통치에 빠지므로 아담이 도리어 사단의 통치의 대리인이 되었어요. 그래서 땅이 지금 하나님의 통치에 반란을 일으킨 상황이 됩니다. 그래서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나 땅위에서는 지금 안 일어나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가 하늘에서 땅위에 내려와요. 그래서 땅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와야 된다구요. 다시 말하면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나 땅위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거역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이 되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빨리 땅위에 임하게 하소서. 그래서 땅위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지게 하소서에 대한 부연 설명입니다.

그런데 또 우리가 마태의 셋째 청원을 우리가 부연설명으로 보도록 도와주는 것은 마태복음 7장 21절 보면 됩니다. 누가 읽어보시겠습니까?3)

네, 거기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과 무엇이 동일시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함"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과 하나님의 뜻은 거의 동의어로 쓰여요. 그래서 여기 지금 마태복음에서 연달아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와 "당신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는 사실은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일단 마태의 셋째 청원은 1)누가에 없고, 2) 마태복음 내에서도 동일시 할 수 있는 것이고, 3)유대 세계관에서도 같은 동의어이기 때문에 이것은 원래 있었던 청원이 아니고 마태가 "하나님 나라가 땅에 임하게 하소서"를 더 풍부히 그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부연 설명한 덧붙인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 하나가 줄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그러면 우리가 누가의 다섯 번째 청원이 왔어요.

 

그 다음에 내가 주장하는 것은 첫 청원이라고 하는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소서" 그것이 진정한 청원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의 찬양으로 봐야된다. 진정한 청원이라고 보기보다는 하나의 기도를 처음 여는 부분에 해당하는 찬양으로 봐야한다는 것이 내가 주장하는 바입니다. 자! 여러분들 그 당신의 이름이 "아빠", 그 다음에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소서" 그 이른 바 마태복음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첫 청원이라고 하는, 그것은 누가복음도 마찬가지죠. 첫 청원이라고 하는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하는 말을 여러분 outline에 있는 Kaddish 기도와 비교해 보세요. Kaddish 기도의 첫 line을 보십시오. "그분의 이름이 높여지고 거룩히 여겨지이다" 이렇게 기도를 처음 열 때의 찬양, 그 다음에 18번 축복기도(Tepillah, Shemone Esre)의 - Shemone Esre는 지금 이런 구조로 되어있죠. 이것을 배라코트(영문 모름?)라 하는데 1-3절은 서문의 찬양이고, 4-9절은 나의 일상의 필요에 대한 청원들이고, 그 다음에 10-16절까지는 종말론적인 청원입니다. 그 다음에 17-18절은 결론 부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처음 찬양 부분을 보세요. 처음1-3절까지의 찬양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특히 3절에 보면 "당신은 거룩하시고 당신의 이름은 경외로우시며 당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지금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우리가 보통 첫 청원이라고 하는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것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유대문서에 보면 랍비문서라든지 쿰란 문서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거명하고는 곧 그 이름에 거룩한 또는 그 이름에 복을 선언하는 이렇게 항상 소명과 같이 따라 다닌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명하고는 그의 거룩함을 송축한다든지, 그 이름에 복을 송축한다든지 이것이 유대인들의 어법입니다. 예수님도 그 어법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 "아빠" 그의 이름을 따라 하나님의 초월자에 대한 되심을 선언함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만약에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되심을 받으십시오"라는 것이 첫 청원이었다면 아마 여기 Kaddish 기도의 둘째 line에서와 같이 "그분의 이름이 높여지기를 원합니다" "그분의 뜻과 그분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세상에서"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위에서" 이런 말들이 덧붙여졌을 것이다. 마태가 새로 집어넣는 세 번째 청원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는 말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런 문구가 아마 들어갔어야 맞을 것이예요. 만약에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말이 원래 청원이었다면 찬양이 아니고 그냥 청원이었다면 그 말 뒤에도 "당신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말과 같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런 문구가 들어갔을 거예요. 그런데 "하늘에서와 같이 땅위에서도" 이 말은 그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말을 수식하지 않죠. 왜냐하면 그 중간에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는 말이 때문에 이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땅위에서도" 어디까지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그 말만 수식하는데 이런 저런 것을 볼 때에 그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소서"는 청원이라기보다는 하나님 이름에 대한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마태복음 6장 32절 전반부를 보세요. 누가 읽어주시겠습니까? 이방인 구하는 것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6장 32절 후반부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네, 하늘에 계신 아빠께서 아신다. 이것은 무엇과 Inclusio를 이루어요. 6장 7절과 Inclusio를 이룹니다. 6장 7절에 이방인들은 이렇게 이렇게 기도하는데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 이방인들의 기도는 어떻게 기도한다구요? 이방인들은 중언부언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기도. 6장 32절은 후반부는 하늘에 계신 아빠께서 다 아신다는 어디와 Inclusio를 이루어요. 6장 8절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 천부께서 너희 기도를 미리 아신다"와 Inclusio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6장 7절과 8절이 6장 9절에서 13절까지의 주기도문에 대한 서문 아닙니까? 이것이 서문이죠. 마찬가지로 6장 32절 첫 부분과 32절 둘째 부분이 6장 33절에 대한 서문입니다. 그러면 6장 33절에 뭐라고 해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런 것들이 다 채워진다". 자 잘 보세요. 6장 32절 전반부는 6장 7절과 Inclusio를 이룹니다. 6장 8절은 6장 32절 후반부와 Inclusio를 이룹니다. 6장 7-8절 이방인들의 구하는 것들 먹고 마시는 것 그러나 "너희들은 그런 것들을 염려하지 말라" 왜? 너희 하나님 아버지께서 미리 다 아신다. 그것이 주기도문에 대한 서문이었다구요. 그런데 그것과 완전히 내용과 같이 하는 6장 32절 전반부와 후반부는 6장 33절에 예수에 대한 권면에 대한 서문 노릇을 하고 있어요. 6장 33절 내용이 무엇이예요. 하나님 나라와 이런 것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함. 이런 것들은 지금 본문의 맥락에서 무엇입니까? 양식과 입는 것들. 그래서 이것과 이것이 병행인데, 이 6장 7-8절은 6장 9-13절에 대한 서문이고 6장 32절 a.b는 6장 33절의 서문이니까 자연히 우리가 어떻게 봐야 됩니까? 다시 말하면, 6장 33절은 주기도문의 요약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요약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의예요. 주기도문의 핵심이 뭐예요. 하나님 나라의 청원이다. 이런 것들은 무엇입니까? 양식청원, 죄용서 청원은 이런 것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양식청원과 죄 용서 청원과 이 시험에 관한 청원이라고 할 수 있겠고 또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에 유의를 한다면 이런 것들은 엄격히 양식 청원만을 말하는 것이고 맥락에서 이런 것들은 무엇에 해당해요. 의식 먹고 입는 것, 죄용서와 시험 청원은 하나님의 의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주기도문의 내용을 하나님 나라와 의라고만 요약하고 이런 것들을 양식 청원으로만 요약한 것을 볼 때에 지금 주기도문의 몇가지 청원만? 네 가지 청원만 포함됩니다. 앞에 제일 처음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는 여기에 포함이 안 되고 있음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분석해 볼 때에 이 주기도문에 있어서 중심 내용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청원이고 그 뒤에 나오는 세 개의 청원들. 양식, 죄용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말게 해달라는 청원들은 부수적인 청원이고 그렇게 해서 네 개의 청원이 원래 예수께서 의도하신 청원들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일 처음에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는 유대의 관행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이 거명되는 상황에서 그 이름이 찬양형식인 것으로 봐야 한다.

 

또 이런 결론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관찰은 마태판과 누가판을 자세히 보세요. 마태복음 6장 10절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 11절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12절에 kai;(and) 그리고 "우리의 빚을 사하여 주소서" 12절 거기는 청원이 아니고 서약이죠.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를 사하여 주겠습니다"하는 서약이라고요 설명하겠지만 거기에서도 kai;로 쓰이지요. 13절 또 kai;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게 하소서" 이렇게 "kai;, kai; 연결 그리고 그리고 연결을 보세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주시고, 그리고 우리 죄 사하여 주시고,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그래서 이 세 개의 청원은 서로 연결된 것을 우리에게 보여줘요. 이것은 누가도 마찬가지이다. 누가복음 11장 3절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kai; a[fe" hJmi'n ta;" aJmartiva" hJmw'n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소서" 그리고 반면에 앞에 이른바 전통적인 해석에서 세 개의 청원을 한번 보시겠어요. 거기에는 이런 kai kai 계속 없어요. 마태복음판에 보시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kai 없죠,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kai 없죠, 이 구조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앞의 세 개의 청원은 하나의 청원이고 하나님 나라의 청원이고 그것이 중심 청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기도문의 중심 청원은 이것이예요. 하나님 나라의 청원입니다. 아까 6장 33절을 요약한 것은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예수께서 6장 33절에 뭐라고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요약합니까? 먼저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니까 주기도문의 중심 청원이 뭐예요?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예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러면 이런 것들이 주어진데요. 이런 것들은 일용할 양식, 우리의 죄용서, 악으로부터 구출. 그럼 이런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보세요. 자 그렇게 말해서 두 가지를 결론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주기도문이 네 개의 청원으로 되어있다. 첫째로, 하나님 나라의 오심에 대한 청원. 둘째로, 일용할 양식에 대한 청원. 셋째로, 죄용서에 대한 청원. 넷째로 지금도 완전히 박멸되지 않는 사단의 보호로부터의 청원. 이 네 개의 청원으로 되어 있는데, 그 네 개의 청원이 다 동등한 것이 아닙니다. 그 네 개의 청원이 두 개의 구조로 되어 있다. 중심, 가장 중요한 것이 뭐예요? 하나님 나라의 오심에 대한 청원 그리고 다음 세 개는 서로 같은 것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오심과 함께 오는 우리에 대한 축복 청원들이다. 이렇게 결론을 맺을 수 있겠어요. 조금 설득력이 있습니까? 그럼 조금 쉬고 하겠습니다.

 


강의 2

 

여러분 첫 시간에 우리가 한 것을 간단히 요약하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해서 새롭게 창조하고 구성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공동체의 Identity를 결정하는 주된 기도문이다. 그래서 이 마태는 이 기도를 산상 수훈에 한 중심에, 한 복판에 넣음으로써 이 기도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 제자도의 삶에 원천적인 힘을 제공하는 기도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이 기도의 청원은 4개의 청원들로 되어 있다. 나중에 마태가 이것의 그 뜻을 더 풍부히 하고, 교회의 예배 의식으로 더 균형있게 잘 쓰기 위해서 확대를 했지만 원래는 4개의 청원들로 되어 있다. 4개의 청원들은 첫째로, 하나님 나라의 옴을 청원하는 것, 이것이 주기도문의 가장 중심이 되는 청원이고, 하나님 나라의 옴과 함께 우리가 얻게 되는 축복. 이것이 양식에 대한 것과 죄용서에 대한 것, 그리고 주의 재림때에 완성되는 우리가 아직도 노출되는 사단의 시험으로부터의 보호 말씀을 의미하는 청원들이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중심 부분은 예수의 중심 메세지인 하나님 나라의 옴에 관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주기도문을 강의할 때는 이 하나님 나라의 옴 또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 전체를 음미하면서 주기도문을 강의해야 할 것이며, 주기도문을 드릴 때에 강조점이 하나님 통치가 임하게 하는 것임에 강조를 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유대교와 비교를 해 보면서 주기도문의 특성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유대기도와 비교를 해보심으로 생각해 봅시다. 거기 대표적인 유대기도 두 개를 번역해서 적어놨는데요. 카드쉬기도와 열여덟 번 축복기도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카드쉬기도는 회당에서 설교 끝에 회중이 함께 드렸던 기도이고, 18번 축복기도는 하루에 3번- 아침, 오후의 시작, 석양에 즉 저녁의 시작에 유대인들이 꼭 드려야 했던 의무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한번 그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와 이 기도들을 비교하면 어떤 공통점들이 발견됩니까? 여러분들. 카드쉬 기도는 특히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전반부와 내용이 상당히 비슷합니다. "당신의 위대한 이름이 높여지고 거룩히 여겨지이다", "그분이 그분의 뜻에 따라 지으신 나라 안에서. 그분이 자신의 나라/ 자신의 다스리심이 다스리게 하시길 너희들의 생애에 그리고 너희들의 날들에 그리고 이스라엘 집안 전체의 생애에, 신속히 그리고 조만간. 그분의 위대한 이름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되소서 이에 대해 말하라. 아멘" 이렇게 카드쉬 기도는 주제로 보면 마태판 주기도문의 전반부와 상당히 비슷함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무슨 차이점들이 금방 눈에 뜁니까? 카드쉬 기도는 3인칭 명령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기도는 당신, "아빠" 당신에게 아뢰는 즉 친근감의 도가 상당히 차이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의 기도는 친근감의 도가 상당히 떨어지는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그분의 나라가, 그분의 뜻이 3인칭으로 되어 있다. 그런 반면에 예수의 기도는 2인칭으로 하나님께 직접 아주 친근한 표현이다.

 

둘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카드쉬 기도는 이 3인칭과 함께 그 명사들. 당신의 이름이 높아지고 그분의 나라가 다스려지고 그분의 이름이 찬양되게 하소서하는 표현한 것에 비하면, 예수의 기도는 굉장히 단순하게 되어 있다. 18번 축복기도는 두 판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팔레스탄인 판과 바빌론 판이 있다. 바빌론 판이 더 길고 더 복잡하다. 팔레스타인 판이 더 오래된 판이어서 이판을 여러분들에게 표현했습니다만 그것에 비하면 예수의 기도는 얼마나 단순합니까? 심지어 예수의 기도와 카드쉬 기도와 비교해도 예수의 기도는 아주 간략하고 단순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차이가 뭡니까? 특히 18번 축복기도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1-3절까지는 찬양의 서문이고, 17-18절은 결론부분이고 나머지가 중심 되는 청원부분인데 그 부분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 졌다. 4절에서 9절까지와 10에서 16절까지입니다.

4-9절은 일상적인 필요한 것들. 우리에게 지식을 주시옵소서, 우리를 회개시켜 주시옵소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고난으로부터 구원해 주시옵소서. 슬픔을 종식시켜 주시옵소서. 금년에 농사가 잘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등 일상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것들을 구하고 있고, 그 다음에 10-16절까지는 종말론적인 청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의 해방 종말에 해방을 가져다주시고 흩어져 사는 유대 디아스포라를 모아주셔서 옛 이스라엘의 영광된 역사를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등등 종말론적인 소망을 말한다.

이것과 예수님의 주기도문과 비교해 보세요. 주기도문의 순서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옴을 먼저 구하라 한다. 주기도문을 요약해서 말한 마태복음 6장 33절에 뭐라고 했어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런 것은 다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유대교의 대표적인 일상의 기도인 18번 기도와 순서가 바뀌어졌다. 필요한 것들을 먼저 구하고 종말론적인 소망이 뒤에 나오는데 그런데 주기도문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이 먼저 나온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기도는 바뀌었어요. 하나님 나라의 축복으로써 함께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대조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단순하고, 하나님에 대해 아주 친밀하고, 종말론적인 오리엔테이션이 아주 강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전체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기도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서문을 말할 때 마태복음 6장 7-8절에 유대인들이 외식하는 기도와도 대조를 이루었지만 이방인들의 중언부언하는 기도와도 대조를 이루었다. 그런데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18번 축복기도를 보면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중언부언하는 기도였다. 예수님의 기도는 만약에 4개의 청원들로 되어있다면 얼마나 더 단순한 기도였습니까? 그보다 더 언어를 절약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옵소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그것보다 더 요약할 수는 없습니다.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되나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기도를 어떻게 합니까? 중언부언합니다. 교회마다 대표 기도는 "3분만하라"고 강대상 옆에 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설교하러 교회에 가면 강대상에다가 "기도는 3분만 할 것"이라고 써 있었습니다. 하도 중언부언하며 10분 이상씩 합니까? 철야 기도할 때 가만히 보면 중언부언하려고 철야기도를 하는 가 봐요. 통성 기도할 때 보면 얼마나 중언부언하는지...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라 하십니까?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말을 돌려 복잡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명료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에 강조점을 두라고 하십니까? 그의 나라에 강조점을 두라고 하십니다. 그의 나라와 의에 강조점을 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유대인들과 같이 우리의 먹을 것과 입을 것, 우리의 농사도 모두 잘 되게 하고, 마지막에 가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도 확장되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는데, 예수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런 것을 다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주기도문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보다 더 명료하고 간략하고 하나님께 직접적이고 하나님께 친근한 이런 기도는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유대기도와 비교해 봄으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위대함을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4개의 청원들을 가만히 보면 우리 삶(실존)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하나하나 묵상을 하겠습니다.

 

첫째로, "아빠" 주기도문의 제일 처음 "아빠" 이것을 마태는 풍부히 하기 위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빠"로 확대했습니다. 원래에 예수께서 "아빠" 이렇게 부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름은 예수의 독특한 어법임을 신학교 다니실 때 다 들었을 것입니다. 이 "아빠"라는 말은 우리말 "아빠"와 똑같은 말입니다. 원래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아이 언어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하는 것은 언약 신학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 삼으셔서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을 언약이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가 나의 백성이다" 이것이 구약의 이른바 언약의 형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자기 백성 삼아주셔서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주겠노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언약의 관계를 표현하시기 위해서 구약은 여러 가지 그림들을 쓰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하나님이 왕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백성'이다. 즉 왕과 백성의 그림의 짝,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아들'이라. 대표적으로 출4:23절 '이스라엘이 나의 맏아들이다'. 구약의 곳곳에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하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다. 구약의 곳곳에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이스라엘을 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목자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양떼라'. 또는 '하나님이 농부시고 이스라엘은 그의 가꾸시는 포도원이라'. 또는 '하나님이 군대의 사령관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징집된 군대라'. '하나님이 신랑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신부라' 등 여러 그림의 짝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 언약의 관계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과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으로서 그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의지해서 사는 관계를 나타내는 짝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아버지와 아들의 그림의 짝이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언약의 관계로 나타내는 중요한 사상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어린아이의 언어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부분이 거의 없다. 원래 이 현상을 관찰한 분은 영국의 토마스 월토 맨트 교수였습니다. 1930년대 중요성을 그러나 그것을 독일의 신학학자 요한 예레미아스가 훨씬 더 확대 연구해 가지고 예레미야스는 주장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전후한 유대문서 어느 곳에서도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적이 없다. 사실 유대신학의 틀 속에서는 거룩한 하나님, 초월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졌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이렇게 친근하게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아주 혁명적으로 하나님을 이렇게 "아빠"라고 불렀다.

이것이야말로 예수의 독특한 어법으로 첫째로, 예수에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 됨을 나타내는 것이고, 자신이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이라는 자기 이해를 나타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마찬가지로 "아빠"라고 부르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 마디를 하늘과 땅을 지으신,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한 마디로 "아빠"라고 부르도록 한 이것이 바로 예수의 자기의 사역에 대한 이해임을 볼 수 있다. 자기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로 새롭게 창조하고 모으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주의 부요함을 덧입게 하는 분, 예수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독특한 사역을 자기 이해를 이 한마디로 닫는다." 이렇게 자기가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기도하게 하는 것의 의미를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그것이 너무 강조되다 보니까 추후에 이에 반발하여 예수의 하나님 "아빠"사용이 그렇게 독특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제임스 바(James Bar)같은 사람을 들 수 있다. 이 사람은 상당히 예리한 구약 학자였습니다. 이 사람은 굉장히 예리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남의 풍선에 바람을 빼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학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이론으로 성립된 이론을 그렇지 않다고 바람을 빼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자였다. 또는 온건한 구약학자 한스 리버 같은 사람은 유대문서를 보면, 랍비문서를 보면 5-6곳에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데가 있다고 말한다. 물론 예레미야스도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른 데가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린아이의 언어로 친근하게 부른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 잘 보면 결국 5-6곳에 이렇게 친근하게 부른 흔적이 유대문서에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런 표현이 절대적으로 독특하다고 볼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므로 예레미야스가 크게 바람을 불어넣은 풍선에 약간 바늘을 가져다 넣었습니다. 그러나 풍선의 바람이 다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8장 15-16절,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보면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영이 우리 안에 내주해서 우리 안에서부터 하나님께 "아빠"라고 부르짖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 셈족 언어인 아빠를 먼저 쓰고 이 아빠가 무슨 뜻이다 라는 설명을 위해서 호칭으로 번역해 주기 위해서 아빠는 곧 아버지라는 말이다 라고 써주고 있습니다. oJ pathvr. 우리 번역에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아버지'는 번역어이다. 바울이 구태여 "아빠"라는 셈족 언어를 헬라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에게 헬라어로 쓰여진 편지에 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예수의 독특한 가르침으로 제자들이 따라하는 기도였기 때문에 실제로 헬라어를 쓰는 사람들도 이 예수의 독특한 기도 칭호는 따라 했기 때문에 그 관행을 바울 여기에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만약에 바울이 누구입니까? 유대신학자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유대교에서 보편적이고 독특한 것이 아니었다면 구태여 로마서8장과 갈라디아서 4장에서 셈족 언어로 음역해서 "아빠"라고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독특한 예수의 언어로 인정했기 때문에 그것을 심지어 헬라어을 쓰는 그리스도인들도 따라했기 때문에 쓰는 것이고 그것을 혹시 못 알아들을 것을 염려해서 괄호 속에 "아버지"라고 번역해 준 것입니다.

예수가 이렇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것은 제임스 바나 한스 베터 리버나 이런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이 유대교에 약간 쓰인 적이 더러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아주 드문 것이고 아빠가 유대인들의 호칭으로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것은 아주 독특한 것이고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중심 기도의 첫마디를 "아빠"로 삼은 것은 이 기도를 하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분명한 자기 이해를 가지고 시작하도록 한 것이고 그렇기에 이것은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이다.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로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어 주는 분, 그 속에 자신의 종말의 구원자 되심의 주장이 들어있습니다. 이런 것을 간접기도문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스는 이 "아빠"라는 말속에 예수의 자기 이해즉 신약의 기독론이 다 들어있다고 한다. 이런 기독론적인 함축의미가 있다면 이것은 큰 함축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우리 인간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음. 이것은 아들들, 딸들 하나님의 자녀 됨을 전제하는데 하나님의 자녀 됨의 가장 기본의미는 상속자라는 의미이다. 그의 모든 부요함을 내가 상속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도라는 것이 하나님의 부요함을 끌어 쓰고자 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의 부요함을 끌어 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를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합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 마태는 이 뜻을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하늘에 계시는"을 붙여 놓았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빠"라는 하는 것은 친근감을 강조한다면, "하늘에 계시는"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초월하시나 친근하심 초월과 친근의 변증법적 관계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에서 강조하겠지만 여기에서 친근하심과 초월성 양쪽을 다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심, 우리와 함께 하심, 우리 가운데 내재하심, 우리를 돌보심등 그의 친근하심과 그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일관되게 예수의 하나님 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조점이 강조되어 있다. 왜냐하면 초월하셔야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초월하다는 말은 무한하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약에 우주만 하다면 우주보다 작다면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우주만 하다면 고장난 우주를 고칠 수 없습니다. 우주보다 더 크고 막강하셔야 우주를 고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월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초월하셔서 우주를 고칠 수 있는 분이 즉 구원하시는 분이 우리에게 오시지 않고, 내재하시지 않고, 우리에게 친절을 베푸시지 않고, 우리에게 아빠 노릇하지 않고, 하늘꼭대기에 보좌에 홀로 계시면 구원이 일어납니까? 그러면 구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초월하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에게 친근한 아빠 노릇하셔야 거기에서 구원이 발생합니다.

이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인하는 신론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범신론이라고 그러는데 인도 종교에서 말하는 힌두교나 불교가 범신론에 있습니다. 그들 종교들의 구원론은 자력구원론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구원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신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초월자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신을 구원해야 되는 것이다.

거꾸로 신의 초월은 강조하나 신의 내재, 우리를 구하러 오시는 신의 면을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신론을 Deism(자연신론)이라고 합니다. 이슬람이 거기에 속한다. 알라가 위대하다. 모슬렘 나라에 가면 하루에도 몇 번씩 그들의 회당 소위 미나레테에서 선포되는 기도의 부름에 첫 마디가 무엇입니까? 알라는 위대하다. 그러나 그 알라는 하늘 저 꼭대기에 홀로 앉아 있어서 이 타락한 세상에 오지를 않는다. 거기에서도 구원론이 어떻게 설정됩니까? 자력 구원론입니다. 첫째로 숙명주의 빠지든지, 아니면 메카의 순례를 하고, 금욕을 하고, 라마단 금식을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를 하고, 동냥을 많이 구해 가지고 적선을 많이 하여야 한다고 하는 자력구원에 빠집니다.

하나님 하늘에 계신 분, 초월자인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아빠 노릇하심. 초월과 내재 또는 거리감과 친근감의 양면이 적절히 강조되는 변증법적 존재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구약적인 배경을 생각해 봅시다. 구약적인 배경에서 "아빠"라는 아들의 언어는 언약의 언어이다. 그래서 이 언어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고,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의존과 순종을 표현하는 언어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의 사랑에 의존심을 표현하는 것이고, 그에게 순종을 서약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를 아빠라고 할 때에 우리의 사랑을 확신하고, 우리의 의지하고, 순종하듯이 이 하나님 '아빠'라고 부르는 언어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일 먼저 강조하면서 우리의 하나님의 대한 의존과 순종을 표현하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특히 구약에 아들과 아버지의 상호 앎.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상호 앎의 관계,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중요한 요소이다. 아마 여러분들도 즐겨 설교했을 이사야서 1장 1-3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에서 전제되는 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당연히 서로 앎의 관계는 서로의 신실함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그에게 의지하고 순종해야 함을 당연히 여겨야 하는데 이스라엘이 그렇지 못함을 하나님께서 탓하는 것이 이사야서 1장 2-3절입니다. 소도 주인을 알고 알아보는데 순종하는데 나의 백성 이스라엘, 나의 아들을 나를 알고 의지하고 순종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나님께서 질책을 하시는 부분이다. 앎은 서로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추상적이거나 객관적인 지식이 아니고 서로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지식을 말한다. 관계를 신실하게 맺음을 통해서 나오는 지식이다. 이런 친근한 관계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라는 것이다. 이 아들의 언어를 주기도문의 서문이라고 할 수 있는 마태복음 6장 8절과 그것을 되풀이해서 6장 32절에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너희의 필요함을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빠이기 때문에 그의 자녀들의 속속들이 필요한 것들을 안다는 것이다. 32절에서 그것을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빠가 우리를 속속들이 아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연약함도 아시고 우리의 필요한 것들도 아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방인들과 같이 중언부언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구할 것은 하나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오심에 관한 기도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표현하는 가장 좋은 가르침은 탕자의 비유이다. 이 탕자의 비유를 내일 자세하게 공부하겠습다만 예수의 탕자의 비유를 당시 유대교의 사상에 비교했을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고 이스라엘을 그의 아들이라 할 때 유대교의 사상과 비교해보았을 때 새로운 것이 무엇이냐? 아들이 아버지를 인정을 안 해도 아버지는 끝까지 신실하십니다. 아버지는 끝까지 아비 노릇해 주심을 신학적인 용어로 '하나님의 의'로 표현된다. 하나님의 의는 아들을 향한 자비로 나타난다. 자기 아들에 대한 신실함이 의롭지 못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용서의 자비로 나타난다. 이 자비가 아들에게 회개를 일으킨다. 즉 자비가 회개에 앞선다. 하나님이 항상 자비를 베푸시기 때문에 유도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탕자의 비유에서 굉장히 강조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아빠 노릇해 주심 그것이 우리에게 자비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강조하겠지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는 종말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 즉 새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데 있었다. 예수께서 왜 오셨습니까? 마가복음 2장 17절에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와 죽음으로 다스리는 사단의 나라에서 불러내어 회개함으로 사단의 나라에서 나와서 의와 생명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믿음으로 들어오도록 부르러 오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공동체를 창조하고 모으라는 것, 그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입니다. 누가복음 12: 32절 그들 그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응한 자들에게 너희의 하늘에 계신 아빠께서 너희들에게 그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이들을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로 창조하고 모음.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의도입니다. 그 선포에 회개와 믿음으로 응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아빠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첫 마디가 "아빠"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43장 1-7절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4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 본문이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아비 노릇해 주심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본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들을 속량하심에 애굽을 대신 희생시키시고 구스를 대신 희생시켜서 그의 백성 그의 자녀들을 속량하고 구속하신다는 하나님이 아버지로서의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주기도문 첫 마디의 아빠는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신뢰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로써 이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뒤따라 나오는 청원들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그렇게 청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이름을 부르고는 이전에 말한 것처럼 유대 관행에 따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천명과 찬양을 하는 것이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이것을 청원으로 봐도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을 청원으로 보지 않고 유대의 기도의 관행상 하나님의 이름이 해진 뒤에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그래야 하나님에 대한 중심으로 보는 것이 자 그런데 청원이라고 구태여 전통적인 해석으로 보는 것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란 말은 카드쉬 기도에도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말했던 것처럼 주기도문의 이 본문과 아주 흡사하게 나온다.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존재의 됨됨이를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이름이란 말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셨다(출애굽기 3:13절).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하는 것이다. 이름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초월성이 인정이 되고 하나님을 초월성을 인정하는 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초월성 거룩이란 말의 원래의 뜻은 윤리적 개념이 아니라 문리적 개념이다. 피조물과는 다른 초월적인 존재를 나타낼 때 거룩이라는 단어를 쓴다. 거기에서 두 번째 윤리적인 말이 나옵니다.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로 살아야 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 거룩한 것은 오로지 초월자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성전이 거룩하다는 말은 성전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거룩해 진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둘째로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하다는 말의 두 번째 원리 윤리적 인 말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거룩하다는 말의 첫 번째 뜻은 문리적 개념이다. 범상의 것으로부터 분리되어서 초월자 하나님께 바쳐진 그래서 초월자 하나님께 속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초월자되심을 나타내는 것이고, 하나님의 거룩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경외함이 생명에 대한 경외심으로 나타난다. '알버트 슈바이쳐의 중심 사상을 생명에 대한 외경심이라고 합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것에 대한 경외심이라고 한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은 궁극적으로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부터 나온다. 창세기 20:12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의 도시 그랄에 갔을 때에 이곳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생명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자기를 혹시 죽일까봐 자기 아내 사라와 사라를 자기 동생으로 하기로 속임수를 씁니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없는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42:1-18에 보면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 앞에 가서 벌벌 떨게 됩니다. 그때 요셉이 무엇이라 합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니까 너희들의 생명을 보전하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생명에 대한 경외심으로 나타난다.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곳에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없어서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함부로 대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다. 출애굽기 1장15-21절도 마찬가지다. 히브리 아들들을 다 죽이라는 명령을 모세의 산파 십브라와 브아가 왜 거역합니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생명을 죽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세를 살리게 된다. 이와 같이 구약은 항상 생명에 대한 경외를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연결시킵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없는 곳에 생명에 대한 경외가 없어 가지고 사람들을 서로 막 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삶이 아주 살벌하게 됩니다. 그러면 인본주의자들과 휴머니스트 같이 하나님에 대한 인정 없이도 우리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서로의 생명과 서로의 인권을 존중할 수 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여러분들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다. 최근 1970년대 미국의 대통령 지미 카터가 인권을 세계국제 외교에 있어서 제일 원칙으로 부상시키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이것을 위대한 기독교적 신앙의 승리라고 본다. 가끔 우리는 기독교 역사를 볼 때 기독교 역사를 가졌던 서양 제국의 역사를 볼 때 도대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전 세계적인 인간의 삶에 공헌을 했는가? 아니면 오히려 해를 가져왔는가? 가끔 생각해 볼 것입니다. 우리가 가령 레닌같이 역사를 읽는다면 기독교 선교라는 것이 순전히 제국주의 앞잡이로서 비서양 민족들을 종속화하고 노예화하는 데만 수단으로 사용된 겨우 아편 노릇한 정도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기독교 신앙이 실패해 가지고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보다는 사실 큰 재앙을 가져온 것이 허다했다. 유럽 역사에서는 기독교 신앙 때문에 벌어졌던 30년 전쟁, 지금도 유럽에 가면 30년 전쟁의 후유증과 아픔이 지금까지 느껴진다. 유럽의 동요들 가운데 30년 전쟁에서 유래된 동요가 꽤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기독교 신앙 때문에 일어난 것이 독일을 황폐화하고 유럽을 엄청나게 후퇴시킨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대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자기를 통해서 와서 실현되다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가 과연 오늘 우리에게 얼마만큼 샬롬을 가져다주는가? 우리 삶을 증진하고 우리의 자유를 확대하고 우리의 의를 확대하고 평화를 확대했나? 등 회의적인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한 예를 들 수 있는데 미국이라는 짧은 나라의 역사 가운데 그 나라가 자기들의 민족에게 그리고 전 세계에 참 죄도 많이 지고 죽음도 많이 가져왔다. 그러나 아브라함 링컨의 노예해방은 이것은 전 세계 인권의 증진에, 자유의 확대와 정의의 확대 또는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미국만의 역사가 아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올슨이라는 대통령은 아주 훌륭한 크리스천이었다. 그 사람의 민족 자결주의 그것은 아브라함 링컨의 노예 해방주의 그대로다. 민족 자결주의는 서양의 18세기 19세기 기독교의 제국주의를 종결지은 것이다. 민족자결주의의 영감을 받아서 우리 한국 민족도 독립투쟁을 한 것이다. 그 정신으로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얻고 자유를 얻고 그래서 민족간에 정의가 확대된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 지미 카터의 인권 선언이 있었고. 인권증진을 제일 목표로 하는 정책이 있었다. 강대국이라고 해서 작은 나라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앞으로 대통령 취임사에서 미가서 6장 8절을 인용하고 있다. 인자야 하나님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사람이 미국에 대통령을 하면서 조그만 나라들을 압제하지 않는 대통령으로서 고약한 대통령이라고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이란이라는 나라가 미국사람을 인질로 잡고 안 놔줄 때 그것을 어떻게 하지 못했다고 욕을 먹었다. 그러나 바로 그런 기독교적 원칙,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그것이 이웃에 대한 존중, 약자에 대한 존중, 생명에 대한 경외심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 땅에 인권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만큼 이 땅이 살맛나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보세요. 동양에 유교철학이 어찌하여 인권의식이 많이 발달하지 못해 가지고 우리가 미국 사람에게 그 문제에 있어서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지 결국 미국 사람들이 원천적으로 잘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이 다 기독교 신앙의 유산이며 기독교 문화의 유산이라고 본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을 때에 인명에 대한 경외심이 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면서 동시에 '하늘에 계시는 이'라고 부르면서 친근감과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경외심이 함께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서'라는 말은 이 찬양의 말은 이 초월성을 한 번 더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한때 어떤 효과를 가져왔는가? 이것이 기도의 첫 머리에 이것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하나님의 경외심이 한번 더 강조 된 것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과 '거룩하다'는 말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경외심 한번 더 강조된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아빠"라고 친근하게 대해도 하나님을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을 경망스럽게 대해서는 안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과 굉장히 친근하게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뭐라고 말하는가? 하나님의 이름을 경망스럽게 올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수시로 하나님과 이야기한다'고 하고, 또 하나님을 마치 자기 옆의 친구같이 대한다는 인상도 주기도 한다. 그리고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경망스럽게 대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 기도의 첫마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함을 강조한 것은 하나님의 경외심 가운데에 그에게 친근감을 느껴야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친근감은 하나님의 이름을 경망스럽게 하기 때문에 옳지 않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 다음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떨어지면 인간이 어떻게 되는가? 바울이 로마서1장 18절에 32까지 잘 보여준다. 인간이 어떻게 된다고 하냐면,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떨어지면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거부하고 인간이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에 빠지게 되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근본 문제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죄악과 혼돈이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경외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우상화 끝에 결국 피조물을 우상화하는데 머문다고 말하고 있다.

오늘 이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럽고 죄악이 관영하고 인간의 인권과 생명이 경시되는데는 결국 초월자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결과이다. 그래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은 자들이 가장 힘써야 할 것이 첫째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함 즉 경외함, 즉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첫마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 다음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이것이 주기도문의 가장 주된 청원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즉 오게 하소서. 당신의 통치가 오소서. 이점에 있어서 유대기도와 예수의 기도를 비교해 보면 하나님의 통치를 18번 축복기도의 10절에서 14절까지를 보면 이 기도를 드렸던 유대인들이 당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우리에게 짐작케 한다. 10절 "우리 민족의 해방을 가지고 오시고 선포하시고 깃발을 들어 디아스포라를 모으소서" 일단 유대민족을 로마제국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하시고 이방에 흩어져 사는 민족을 다시 회복하는 것,

 

그 다음 11절에 보면 우리의 심판관들을 예전과 같이 회복시키시고 우리의 지혜자들을 처음과 같이 회복시켜주소서. 과거 유대역사의 황금기의 회복, 유대의 공의로운 심판 시스템을 회복하고 지혜로운 현군의 통치가 있게 하는 것 등을 말한다.

그 다음12-13절에 보면 우리 순수한 믿음의 공동체가 유지되는 것, 이단자들에 의해서 섞이거나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아주 의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공동체로 지탱이 되는 것 그런 것을 말하고 있다. 14절에도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하고 예루살렘에, 시온에 하나님께서 거하시고, 특히 다윗왕조를 재건하시고, 다윗 왕조에 자비를 베푸는 것 그런 것을 지금 18번 축복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의 구체적인 현시라고 본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의 회복을 하나님의 통치라고 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최근에 역사적 예수의 제3탐구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도 당시 유대교의 맥락 속에서 본다면 예수가 운동한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이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의 제 3탐구의 시발점을 제공했다고 보는 에드워드 P. 센더스의 「JESUS is Judaism」이란 책 이래로 많은 학자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스라엘의 회복의 관점에서 봐야한다. 그것이 역사적 예수의 3탐구의 가장 큰 특징이다. 역사적 예수의 3탐구 운동에 있어서 아마 가장 지금 논란을 많이 제공하는 사람은 니콜라스 토마스 라이트(Nicolas Thomas Wright)이다. 이는 캐나다 출신으로 옥스퍼드에서 가르치다가 영국에서 큰 교회에 우리말로 협동목사로 아주 중요한 책을 많이 쓰는 사람이다. 이 사람의 「Jesus, the Victory of God」이라는 책이 역사적 예수의 제 3탐구에서 가장 크게 논의되는 책인데, 이 사람이 바로 이런 관점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당시 1세기의 유대교적 맥락에서 철저히 해석하는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대해서 소개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과 대조해서 제가 이해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 Thomas 라이트는 유대인들은 예수 당시 자신들의 바빌로니아의 포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지금 계속해서 로마라는 외세의 압제로 있다는 것은 자신들의 바빌로니아 포로상태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진정한 의미로의 성지로의 귀환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본다. 그래서 이른바 제2 이사야 40장에서 제3 이사야 66장까지 선포된 곧 이스라엘의, 유다의 바빌로니아로부터 해방 그리고 성지로의 회복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본다.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유대인들에게 무슨 뜻을 가지고 있었는가하면 바빌로니아의 포로 상태가 드디어 종식이 되고 동시에 재건되는 다윗왕조 하에서 이스라엘이 회복된다는 것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사야서 40장-66장의 약속 본문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의 약속, 이스라엘의 회복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당시 유대인들은 열혈당을 중심으로 해서 무력혁명을 통해서 로마제국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당시 이스라엘이 아직 바빌로니아로부터의 귀환이 안 이루어졌다고 본 것은 당시 유대인들과 똑같이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당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때에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언어는 구약과 유대교의 종말론적 언어로 되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빌로니아 포로상태로부터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 있게 말하고자 하는 그림언어들 이었지 실제로 이 역사의 종말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니콜라스 토마스 라이트는 탕자의 비유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페러다임(paradigm)으로 본다. 여기서 탕자를 유다로 본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서 멀리간 상태, 바빌로니아에서 포로된 상태를 나타낸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이스라엘의 회복 바빌로니아로부터 진정한 회복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당시 유대인들의 운동과 똑같다는 것이다. 다만 그 방법에 있어서 예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주신 사명, 그것이 이방인들에게 빛 노릇하는 것 즉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통해서 이방인들의 빛 노릇을 하므로써 이스라엘이 회복된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열혈당을 중심으로 이방인들을 원수 삼아서 다시 말하면 유대 민족주의를 굉장히 강화시켜 가지고 이스라엘을 회복하려고 하는데 예수는 바로 이것이 당시 유대 민족의 근본적인 재앙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당시 유대민족주의에 대항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헌신된 이방에 빛 노릇하는 것 그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의미했다는 것이다. 끝까지 이스라엘이 민족주의로 이방인들에 대한 배타적인 상황으로 나가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곧 너희들의 성전이 파괴되고 너희들의 민족으로서 끝장이 난다고 예수께서 경고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드디어 A.D.60년 70년에 유대인들이 예수의 말을 안듣고 민족주의적 혁명을 꾀하고 로마의 전쟁을 일으켜서 예수의 예언대로 유대민족이 거기서 끝났다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들은 사람들은 새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아져서 이들 간에 하나님께서 보시고 하나님께서 이들 안에 성전이 되셔서 이들에게 드디어 바빌로니아의 포로 상태에서 해방, 진정한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토마스 라이트의 책을 요약했다. 이 말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습니까? 이 사람의 출발점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철저하게 당시 유대교의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유대교 사람들의 하나님 나라, 하나님 통치하면 상상했던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이었다. 18번 축복기도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해방시키시고 다윗의 왕조를 재건하시고 예루살렘을 다시 구축하시라. 헬라세계를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를 회복시키시라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염원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철저하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언어도 그런 이해의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역사적 예수의 제3탐구의 특징이다. 많은 보수 복음주의자들이 탐 라이트의 예수의 하나님 나라 해석에 처음에 굉장히 호감을 같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책을 보면 이런 관점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말씀, 행적을 해석하니까? 공관복음에 쓰여진 전부 예수의 말들을 탐 라이트는 전부 예수의 진짜 말로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보수 복음주의자들이 무엇인가에 지쳐있을 때 즉 역사적 예수의 제2탐구 운동하는 사람들의 역사 회의주의, 예수 전승의 거의 대부분을 교회가 지어낸 것으로 양식사비평 , 편집비평, 이런 것을 통해서 교회가 그들의 설교로 지어낸 것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 제2탐구의 연장선상에서 지금 아주 극단적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도미니 크로산이라든지(?) 여러 사람이 있다. 그중에 유명한 것이 소위 예수 세미나가 그것이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로버트 훈크(?)라는 사람이 일단의 과격파 학자들과 일부 언론 매체에 종사하는 사람과 영화감독등과 그룹을 형성하여 공관복음에 있는 예수의 말들 그중에서도 공관복음에 전에 언급한 누가와 마태의 공통자료, 마가에서 오지 않은 Q자료의 말들을 중심으로 해서 역사적 예수의 말이라고 믿으면 검은 구슬을 내고, 역사적 예수의 말이 아니라면 하얀 구슬을 내고 역사적 예수의 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하면 붉은 구슬을 내고 이렇게 표하는 과정을 통해서 Q의 몇 마디만 예수의 말이다. 그것을 가지고 자기들이 이른바 진짜 예수의 복음을 회복해 보겠다고 한다. 이것을 이른 바 제 5복음서라고 한다. 이것에 의하면 예수는 메시야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고 지혜의 선생이든지 아니면 도미니 크로산에 의하면 당시 지중해 세계의 냉소주의 철학자 비슷한 시골 농부 철학자였다는 것이다. 우리 보수 복음주의자들이 지금까지 너무 시달려온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과거 불트만 제자들과 그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런 과격파 학자들의 복음서 비평, 역사적 예수의 비평이었다. 그와 맞서서 역사적 예수의 제 3탐구를 하는 사람들은 당시 유대교의 맥락 속에서 예수를 보니까 복음서 전승에 상당부분 역사적 신빙성 있는 것으로 많이 인정을 한다. 그중에 대표적으로 탐 라이트가 그렇다. 공관복음에 있는 모든 말들을 역사적 예수의 진짜 말씀이요, 진짜 행적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복음주의 자들이 탐 라이트의 책에 굉장한 호감을 갖게 되었다. 복음주의자들의 저널인 'Christian Today'지에도 실었었다. 그렇게 함으로 이 사람이 지불한 대가가 너무 컸다. 만약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철저하게 당시 유대교의 맥락에서만 해석되어 가지고 기껏해야 유대 민족주의에 대항해서 싸우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헌신되고 이방인들에게 빛 노릇하는 유대 공동체를 회복하는 정도였다면 우리의 전통 신앙고백, 사도들의 신앙고백은 역사적 예수와 연결점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역사적 예수의 제3탐구 운동이 당시 유대교의 맥락에서 예수를 봐야 한다는 대전제, 그래서 예수도 기껏해야 민족주의를 뺀 유대 공동체를 재건할려고 했다는 것이 합당하냐 그것에 우리는 회의를 할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초월성이 제거되게 되었다. 그런데 보는 바와 같이 마태복음 8장 11-12절에 보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무엇이라고 선포하는가? "그때에 동과 서에서 사람들이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잔치를 베푼 것으로 되어있다. 다시 말하면 부활이 전제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초월성이 전제되는 것이다.

이 역사적 예수의 제3탐구하는 사람들은 부활이라든지 인자의 재림이라든지 묵시문학적 언어를 전부 당시 유대교 상황속에서 정치적 언어로만 재해석하는데 그렇게 되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 초월성이 사라지고, 묵시성이 사라지게 되어서 바울 사도가 대표하는 초대교회의 사도적 케리그마와 연결이 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도 옳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당시 유대교의 맥락에서 해석해야 하지만 꼭 예수께서 유대교에서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만큼만 생각했다는 전제를 가지지 말고 예수께서 유대교의 맥락에서만이 아니라 재해석했을 가능성이 있다. 꼭 민족주의만을 배격하면서 재해석한 것이 아니고 초월성과 보편성을 포함하는 식으로 재해석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것을 염두 해 두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을 재해석했는데 여러분들 내일 강의를 위해서 한마디 던지다면 탐 라이트는 예수는 탕자의 비유를 하나님 나라의 비유로 보는 것은 저와 같지만 그는 탕자를 바빌로니아 포로로 간 유다로 보는데 저는 탕자를 아담으로 봅니다. 예수님이 아담 이야기를 한 것이다. 아담이란 무슨 말인가? 여러분과 나이다. 탕자의 비유는 어떻게 바빌로니아로 간 유다가 다시 회복되느냐 그런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우리 인간이 다시 창조주 하나님께 회복이 되는냐? 훨씬 더 근본적이고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면이다. 그래서 탐 라이트와 저와의 해석이 탕자의 비유를 하나님 나라의 페러다임 비유로 보는 것은 저와 같은 경우이나 다만 탕자를 바빌로니아로 포로로 간 유다로 보느냐? 아니면 아담으로 보느냐? 이것이 차이인데 여기서 차이가 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기껏해야 유대민족의 회복인가? 아니면 이방민족을 포함한 유다민족의 회복인가?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우리 인간이 우리 피조물성을 극복하고 피조물성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초월에 참여하는 것, 성경언어로 말하면 영생을 얻는 것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그것을 추구한 것이냐 아니면 바빌로니아의 포로로부터 회복을 하는 것인가? 그런 것을 토론하려고 합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이 설명은 전 세계적으로 역사적 예수 연구가 이렇게 진행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탐 라이트의 신학에 조심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그의 신학은 너무도 많은 대가를 치루고 있다. 그것에 대항하여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훨씬 더 깊이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내일 강의를 기대해 주세요.

 


강의 3

 

먼저 어제의 강의를 요약합니다.

어제 우리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대한 서론격으로 주기도문이 몇 개의 청원들로 되어있고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가? 를 살폈다. 간단히 말하면 마태복음에 있는 제3청원-"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것은 누가에 안나오는데 그래서 마태가 이것을 덧붙인 것이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 보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과 하나님의 뜻을 행함과 동일시되는 것을 볼 때에 마태가 그의 복음에 있어서의 제 2청원인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청원을 부연 설명하기 위해서 제3청원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를 덧붙인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마태와 누가에 나오는 첫 번째 청원 하나님의 이름 아빠라고 부른 뒤에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의 청원은 유대기도의 관행상 청원이라기보다는 찬양 쪽에 더 가까운 것이다.

 

마태복음의 구조를 보면 마태복음 32장 전반부인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마태복음 주기도문의 서문에 해당하는 마태복음 6장 7절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기도하지 말라는 말과 Inclusio 를 이룬다. 그 다음에 마태복음 6장 32절 후반부 "너희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희들이 필요한 것들을 다 아신다"는 말은 이방인들에 대해서 옳게 기도하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이 전제하고 시작해야 되는 기도 그래서 마찬가지로 너희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 똑같은 말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래서 6장 32절 후반부는 6장 8절과 Inclusio를 이룬다. 그러므로 6장 7절과 8절은 주기도문의 서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과 내용이 같은 6장 32절 전반부와 후반부는 또 6장 33절에 서문인데 6장 33절은 하나님 나라과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이 덧붙여진다. 그래서 6장 33절은 주기도문의 요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이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청원과 이 모든 것들 그래서 6장 33절 전반부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6장 10절의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는 기도의 요약이고, 6장 33절은 후반부는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이 덧붙여지리라는 것은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옵소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옵소서" 그런 것들이라고 볼 수도 있고,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나라가 오면 다 해결되는 양식, 죄용서, 사단의 시험으로부터의 보호 이런 것들을 요약한다고 볼 수 있다. 또는 어떤 것들은 지금 6장33절의 맥락에서는 먹는 것 입는 것들은 양식을 청원만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죄용서와 사단으로부터의 보호는 하나님의 의에 포함된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또 하나 우리가 관찰할 것은 주기도문을 보니까 마태판이나 누가판이나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는 큰 청원 다음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시옵소서" 이렇게 그리고, 그리고의 연결이 쭉 나오는데 이것을 보면 주기도문의 구조가 크게 두 가지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청원 이것이 가장 중요한 청원이고 그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짐으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죄용서, 사단의 시험으로부터의 보호 이런 것들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에 요청은 하나님 나라의 옴에 대한 청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여기 6장 33절에 말하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과 같이 주기도문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관점에서 해석을 해야 된다.

 


어제 또 유대교의 대표적인 기도인 카드쉬 기도와 18번 축복기도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비교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띤 것이 무엇이었나? 이 기도들이 특히 18번 축복기도는 굉장히 중언부언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굉장히 복잡하고 중언부언하는 기도라고 볼 수 있다. 만약에 예수의 주기도문이 네 마디의 청원으로 되어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옵소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너무나 간결한 기도이다. 유대 기도들은 3인칭으로 되어 있지만, 예수의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아주 가까운 친근감을 나타내는 2인칭 표현을 쓰고 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예수의 기도는 먼저 유대인들이 기도에 사용하지 않았던 하나님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사용하지 않았던 "아빠"라는 용어로 시작하여 친근감을 나타내며, 예수의 기도는 간결한 기도이며, 하나님 나라 옴에 초점을 맞춘 종말론적인 오리엔테이션을 가진 것이다.

그에 비해 18번 축복기도는 처음 4번째 기도에서 9번째 기도는 일상에 필요한 것들을 청원하는 것이고, 10절부터 16절까지가 종말론적인 청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순서도 일상의 것을 먼저 구하고 종말론적인 소망을 나타낸다. 예수의 기도는 그것과 거꾸로 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의 청원이 중심적이고 그것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옴과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질 일상의 필요에 대한 기원

또 18번 축복기도를 보면 잡다한 요청을 한다. 그러나 예수의 기도는 우리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표현만을 구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하나님 나라의 오심, 우리의 양식,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의 죄용서, 우리와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우리가 사단을 유혹으로부터의 보호. 예수의 관계, 이렇게 예수의 기도와 유대의 기도와 굉장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 다음에 주기도문의 첫 절을 보았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름의 의미. 그 누구도 나타낼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친근감을 나타내는 부름 예수께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아들 됨을 나타내시면서 동시에 그가 새롭게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통해서 불러 모아 하나님 나라 백성 되게 하는 우리들에게 즉 그가 기도를 가르친 기도를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그래서 하나님을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아주 친근하게 아빠라고 하게 하는 것을 우리가 거기에서 본다. 주기도가 첫마디인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데 그것에 전체가 다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마태는 "아빠" 친근 언어가 너무 하나님의 언어가 경망스러운 태도로 전환되지 않기 위해서 덧붙이기를 "하늘에 계시는 이"라는 말씀을 덧붙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친근하심 우리에게 오셔서 은혜를 베푸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항상 자비를 베푸는 이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의 친근감 이 두 가지를 아주 잘 균형을 맞추었다. 하늘에 계시는 초월성의 강조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항상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야 함을 나타낸다. 그런 초월에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이 우리 아빠라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그냥 우리가 날마다 아무렇게나 대하는 우리의 친구쯤 되어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될수 없다. 그가 초월하신 분이어서 우리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에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초월자이시기에 우리가 그분에게 기도함으로 나아가는데 그 초월자가 저 하늘 꼭대기에 혼자 고고히 앉아 계시면서 우리에게 대해서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분이 아니고, 우리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하신다. 또한 우리가 그분에게 아빠라 하면서 달려갈 수 있는 분이다. 초월과 친근감, 거리감과 친근감, 이것이 함께 아주 좋은 발란스를 이룬다. 그래서 보통 전통적인 해석에서 첫번째 청원이라고 하는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는 "하늘에 계시는" 그 말을 부연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 말은 청원이라고 하면 청원이라고 할 수 있으나 청원이기보다는 도리어 찬양에 가깝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에 가깝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초월자이시다. 그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인정될 때에 온 세상이 의가 있고, 평화가 있고, 무엇보다도 인명에 대한 존중이 있다. 구약에 몇 부분 예를 들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생명에 대한 경외로 연결이 된다.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없는 곳에 생명에 대한 경외가 없다. 문명사적으로 보더라도 이 인권 사상이 우리 기독교 전통에서 크게 대두되는 미국의 몇 몇 대통령이 링컨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올슨으로해서 지미 카터에 이르기까지 인권의 문제를 국내 정치뿐만이 아니고 국제 관계에 있어서도 가장 큰 관계에 있어서의 기준으로 부상시킨 것은 기독교적 신앙의 하나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적 문화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인권의 증진으로 나타나야 된다.

하나님에 경외가 없는 곳에 바울이 로마서 1장 18절에서 말한 것 같이 자신의 우상화는 곧 피조물에 대한 우상화로 같이 전도가 일어나고, 윤리의 타락이 일어나고, 인명에 대한 경시가 일어나고 그렇게 되어서 혼돈과 암흑과 살벌한 사회가 되는데, 주기도문을 기도하는 사람들은 항상 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그 경외의 대상인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임을 늘 생각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그 하나님 경외함이 온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 다음에 우리가 주기도문의 중심청원을 보면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청원을 보기 시작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라는 언어를 섰는데 구약과 유대교 전통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언어를 썼는데 그 개념이 아주 드물다 구약에서는 아직 한번도 안나온다.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왕이시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왕"이라는 명사와 "다스린다"는 동사가 구약에 여러 번 나오고 특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을 삼았다는 것은 언약 신학의 표현으로 구약의 중심 사상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왕되심.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고 이스라엘을 다스린다는 동사는 여러 번 나온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표현하고자 하는 뜻은 물론 구약의 중심 사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라고 고정된 숙어는 나온지 않는다. 그러나 구약의 후기 전통에 가보면 다니엘서 2장과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왕권을, 그의 통치권을 한 사람의 아들같이 이에게 위임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권 왕권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 구약에도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나온다고 보는 것이 과연이 아니지만 이렇게 고정된 용어로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유대교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그의 메시지의 중심으로 삼았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과 시간적으로 근접하고 내용적으로 근접한 것이 여기 유대회당의 기도였던 카드쉬기도이다. 카드쉬 기도를 보면 3인칭으로 되었다. "그분의 자신의 나라/다스리심이 다스리게 하시길 너희들의 생애에 그리고 너희들의 날들에 그리고 이스라엘 집안 전체의 생애에, 신속히 그리고 조만간" 이 부분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와 제일 근접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썼을 때 당시 유대인들이 무엇을 연상했겠는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언어는 이것이 어느 한 뜻에 고착되는 steno symbol이 아니다 steno symbol은 가령 교통표지판 같은 것들을 말한다. 어떤 한 symbol 은 꼭 한 가지 뜻만 연상시키는, 가리키는 것이다. 가령 교통신호의 빨간 신호등은 위험, 정지만을 가르킴으로 꼭 한 가지 뜻만 나타낸다. 이것을 steno symbol이라 한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그런 steno symbol 이 아니고 tensive symbol이다. 이런 것을 처음으로 말한 사람은 로만페린 이라는 학자이다. 철학자들의 언어를 신학에 적용해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tensive symbol이다. 그래서 이것은 구약과 유대교의 풍부한 배경 속에서 한번에 여러 가지를 연상하게 하는 심벌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하면 연상되는 것이 창조주가 온 세상을 창조하셔서 다스리신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고,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는 말은 하나님의 대리자가 된다는 뜻이다. 즉 부왕이 되었다는 말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위에 아담을 자기의 부왕으로 삼으셔서 땅을 통치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을 생각하게 하고 아담이 그 통치 기간에 잃어버린 것도 생각하게 하고 하나님은 왕이시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 됨 즉 언약의 관계도 생각하게 하고 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다윗왕가를 그의 대리자로 세웠는데 하나님께서 다윗왕조를 그의 대리자로 세우는 사무엘하 7장 12-14절에 이른바 나단의 신탁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인 다윗의 아들을 다윗의 왕위에 앉혀 이스라엘인 자기 백성을 통치하는 자로 세운다. 그런 의미로 다윗의 아들을 "나의 아들"로 선언한다. 그래서 이른바 등극 시와 재왕 시에 다윗의 아들이 하나님의 왕위에 오를 때 "너는 나의 아들"이라고 선언된다. 아들이라는 말의 기본 의미는 상속자란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아 대권을 행하는 자란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다윗 언약, 다윗 왕조를 연상하게 한다.

 

그 다음에 출애굽 구원이라든지 또는 바빌로니아의 포로 상태로부터의 구원이라든지 이런 하나님의 역사 즉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 노릇해주시겠다는 언약을 지키셔서 구원의 역사도 우리에게 생각하게 하고 종말에 사단의 통치를 박멸하고 우리 모두에게 의와 생명의 통치로 구원을 주실 것을 생각하게 하고 이런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하나님 나라는 tensive symbol이다.

예수께서 이런 하나님 나라의 언어를 썼을 때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고 예수의 첫 제자들이었던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에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무엇으로 생각하였겠는가? 예수가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를 썼을 때 그들의 무엇을 생각했겠는가? 여기 지금 카드쉬 기도와 18번 축복기도를 보니까? 카드쉬 기도에서도 조금 나타나는데 그들의 생애와 너희들의 날들 조만간 이것은 주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조금 많이 생각하는 것 같다. 18번 축복기도의 10-16절까지를 보면 제일 먼저 이스라엘의 해방,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흩어진 디아스포라(Diaspora)의 이스라엘로의 복귀, 회복, 11절에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공의로운 심판 제도의 회복, 12-13절의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의 공동체로서 이방인 압제들이 제거되고 배교자, 배신자들이 제거되고 그 대신에 이방인들간에 진정한 개종자들이 덧붙여져서 이스라엘의 의로운 하나님의 공동체로서의 회복, 14절에 보면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여러 제도들, 예루살렘, 시온, 다윗 왕권 이런 것들이 회복되는 것을 기도하는 것을 볼 때에 이런 것을 늘 기도해 오던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가 오게하소서라고 기도를 가르쳤을 때 유대인들이 제일 먼저 생각되는 것들이 아마 이스라엘의 회복, 다윗 왕조의 회복, 이스라엘의 로마 통치로부터의 해방, 이런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생각한다.

그래서 최근에 역사적 예수의 제3탐구를 한다는 사람들은 주로 당시 유대교의 맥락 속에서 당시의 예수의 하나님 나라 메시지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해석하려고 하는 것을 특징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지금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점에 맞추어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해석하고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중에 제3탐구를 한다는 사람 중에 가장 창조적이고 논점을 많이 제공하는 탐 라이트의 이야기를 했다. 철저하게 유대교의 맥락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을 어제 말했다.

그래서 그 탐 라이트는 탕자의 비유를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페라다임 비유로 본다. 탕자를 이스라엘로 보고 탕자의 상태를 이스라엘의 바빌론 포로상태로 본다. 예수는 이스라엘이 아직도 바빌론 포로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교는 유대인들이 아직도 로마제국이라는 외세 밑에 시달린다는 현실은 아직도 그들이 바빌론의 포로상태로 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진정한 이스라엘의 귀환, 해방, 회복은 아직도 안 일어났다고 보았다. 그래서 유대 묵시문학이라는 것이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고 이런 엄청난 그림 언어들을 동원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의 바빌론으로부터의 귀환을 말하고자 하는 그것이 우주적 사건이다. 엄청난 사건임을 말하기 위해서 동원된 그림들이지 진짜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고 그런 묵시문학에서 나오는 그런 그림들이 문자적으로 이른 바 시간과 공간에 우주의 종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묵시문학의 종말의 언어는 사실은 바빌론의 포로상태에서의 이스라엘의 귀환을 말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당시 유대교가 이스라엘이 아직도 바빌론 포로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았으므로 그들에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에서 약속하는 것은 바빌론 포로상태에서의 해방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빌론 포로상태로부터의 귀환과 해방과 회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예수 당시 모든 부흥 운동하는 사람들이 다 똑같이 이것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열혈당등 이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귀환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달렸다는 것이다. 탐 라이트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의 경건주의운동 그리고 그들의 극단적인 정치적 표현이 열혈당운동들은 자기들의 무력을 사용하여 극단적인 반 외세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무력을 통해서 로마제국의 압제를 몰아내고 민족의 해방을 가져오는 것이 이스라엘의 바빌론 포로상태에서의 해방이라고 보았는데 예수는 그것이 바로 사단적 시험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곧 이스라엘의 회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예고했다. 그 하나님의 심판이 성전 파괴와 그 당시 유대교 중심인 성전 파괴를 나타내는 것이며 유대 민족에 대한 심판으로 나타난다고 예고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이 아니고 진정한 이스라엘의 숙명주의 종으로서 모든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와 구원의 전달자가 되어서 모든 이방인들까지 함께 포함한 참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 곧 이스라엘의 진정한 귀환으로 보았다. 그래서 예수의 모든 예언이 66, 70년 유대 전쟁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때 그릇된 이스라엘의 해방, 하나님 나라 운동은 그때 심판을 받아서 성전이 파괴되어 유대민족은 끝장이 났고 그때 그들과 합류하지 않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새롭게 유대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 일단의 제자들(교회)이 예수가 건설한 새로운 성전이 된 것이다. 그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오셨다 또는 인자가 왔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예수의 종말론적인 언어들 "인자가 옴" 또는 "하나님의 옴"등 그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실현이 된 것이라고 탐 라이트는 해석을 한다. 이것이 소위 역사적 예수의 제 3탐구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체적으로 당시 유대교의 맥락에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옳은 일이고 또 탐 라이트가 많은 복음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에게 호감을 갖는 것이 그동안 불트만학파와 그의 제자들의 역사적 예수의 제2탐구 그리고 그들의 연장 선상에 있는 소위 예수 세미나 하는 사람들의 복음서 전승에 대한 회의(이것은 다 교회에서 지어낸 말들이고 참 예수의 말은 드물다)로 굉장히 상처를 많이 받고 또 그들이 재구성한 역사적 예수란 것이 도미니크 상식으로 당시 지중해에 보편화되어 있었던 냉소주의 철학자 비슷하게 예수는 팔레스타인의 농부 냉소주의 지혜 철학자쯤으로 만들어 놓는 전혀 역사적 신빙성이 없는 그리고 사도적 케리그마와는 전혀 접촉점이 없는 그런 역사적 예수를 자꾸 그려내니까? 그런 것에 식상한 보수주의자들은 탐 라이트식의 연구에 혹하게 되는데 탐 라이트의 역사적 예수도 한계가 있다.

거기에 그런 식으로 역사적 예수를 그려놓고 보니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전적으로 바빌론의 하나님 나라로부터의 해방 이런 식으로 해석할려고하면 사도적 케리그마와 잘 연결되지도 않고 우리의 전통신앙과도 잘 연결이 되지 않지만 이것이 예수를 옳게 얘기한 것이냐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탕자의 비유를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에 패러다임 비유로 오랫동안 가르쳤다. 탐 라이트도 이 비유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패러다임으로 보는 것은 동의하는데 문제는 탕자가 누구냐? 는 것에 다른 점이 있다.

탐 라이트는 예수가 누구의 이야기를 한다고 가르치는가? 바빌론 포로간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아버지로부터의 멀리 떠남이 바빌론의 포로로 간 것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그것에 비해 저는 이런 해석은 근본적으로 틀리다고 본다. 여기에서의 탕자는 아담이다. 이것이 왜 이스라엘이 될 수 없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포로를 원해서 간 것이 아니라 억지로 갔다. 그런데 탕자의 비유는 탕자가 자기의 분깃을 아버지에게 요구해 가지고 자기가 간다. 거기서부터 틀리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탕자를 이스라엘로 해석하니까? 탕자의 돌아옴을 이스라엘의 귀환, 회복정도로 해석을 하니까? 기독교 예수의 복음과 사도들의 복음에 있어서 초월성과 보편성을 무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그래서 이 비유의 탕자는 아담을 두고서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 그러면 탕자의 비유를 중심으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요약하고 그 맥락속에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는 청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과 이어지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청원,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청원, 사단의 시험으로부터 보호하소서라는 청원들이 각각 어떤 의미와 위치를 갖는가? 그것을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예수께서 인간의 근본 문제를 아담적 실존으로 보았다. 그것은 부요한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분리된 상태 그것을 인간의 근본 문제로 보았다. 이것은 예수는 창세기 3장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탕자의 비유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패러다임이라면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에 무엇이 전제되어 있습니까? 제일 먼저 창조사상이 전제되어 있다. 그 다음에 타락 사상이 전제된다. 그 다음에 언약 사상이 전제되고 그 다음에 종말 사상이 나타난다. 이런 것들이 구약과 유대교의 중심 사상들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전제들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셔서 땅위에 그의 대리자로 세우셨다. 그래서 땅을 통치하게 하셨다. 그런데 아담이 사단의(악한 자) 유혹에 넘어간다. 주기도의 마지막 6번째 청원인 악한 자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소서라는 말과 같다. 아담의 유혹과 관계되는 것이다. 창세기 3장 5절의 사단의 유혹의 내용이 무엇인가? "네가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담이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된 땅을 통치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함이 없이 자기 스스로 자기에게 하나님이 될 수 있음 다시 말하면 자신의 내재의 자원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도 확보하고 자신의 안녕도 확보하고 자신의 행복도 확보할 수 있다. 즉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이다. 신학으로 말하면 교만이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로마서 1장 18절에서 바울이 말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또한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해야 되나 인간의 마음이 허망해져 가지고 자신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다. 자신을 섬기는 것은 항상 어떤 것으로 귀착이 되는데 즉 자기가 다스려야할 피조물을 신으로 섬기며 그 피조물로부터 자기의 존재 의미와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그런 상태에 빠진다는 것이다. 하여간 아담이 사단의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 가지고 하나님께 등을 돌린 것을 예수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이것을 탕자의 비유에서는 아버지에게 자기의 분깃을 요구해 가지고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난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아담인 탕자는 아버지의 무한한 부요에서 떠난 것이며 자기의 제한된 분깃 속에 갇힌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내재한 자원이 전체이다. 그런데 불행이도 탕자의 분깃은 제한된 것이다. 그래서 아담이 자기의 내재 자원에 갇힌 것이다. 이것은 제한성을 나타낸다. 그래서 우리가 창조주의 전능하심, 전지하심, 영원하심, 무소부재하심등 이런 것에 참여하지 못하고 우리가 시간적으로도, 장소적으로도, 능력도, 지혜도, 사랑도 제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곧 결핍으로 나타난다. 그러기 때문에 인생의 가장 근본문제가 결핍임을 알 수 있다

 


결핍에서 고난들이 나온다. 시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늙고 병들고 죽고하게 된다. 불교적인 용어로 말하면 고난들로 설명되어 진다. 탕자의 비유로 말하면 그의 자원이 곧 고갈되어서 그가 돼지 치는 자의 상황에 떨어지고 돼지가 먹는 주염 열매를 충분히 먹지 못하는 상황에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 아버지는 탕자를 말하기를 죽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중에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돌아온 것을 다시 살았다고 한다.

예수는 탕자의 비유로 아담 이야기를 했다면 바울은 아직도 바울답게 로마서 23절에 신학적인 언명을 한마디로 한다. 죄의 품삯은 사망이라 여기서 품삯이라는 말은 용병에게 주는 월급을 말한다. 누가 우리를 용병으로 부리는가? 사단이 우리를 용병으로 부린다. 어떻게 사단이 우리를 용병으로 부리는가? 우리를 유혹해서 부른다. 유혹의 내용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주장하게 하는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자기가 자신의 운명의 주(Master)가 된다. 자신이 자신을 통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필요없이 자기가 자기 운명의 주가 된다. 자기 존재 의미와 안녕과 행복을 자기 스스로 확보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다.

 

그러면 사단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죽음을 준다. 그렇다면 그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사영리에서 열심히 배우는 육신적으로는 살아있으나 영적으로 죽었다 그런 말이 아니고 그것은 성경적인 언어가 아니다. 무슨 말인가? 실제로 죽음의 권세아래 놓이게 된다. 그래서 죽음의 권세가 고난들로 증세를 나타낸다. 모든 고난들은 우리가 우리를 통치하는 죽음의 증상들이다. 감기에 걸리면 머리 아프고, 관절이 쑤시고, 목이 따갑고 콧물이 나고 기침을 하는 것처럼 증상을 나타내듯이 죽음이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들로 육신적, 심리적, 관계적, 사회적인 고난들로 정치적 압제, 빈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고난들이다. 죽음의 증상들이다. 사단이 우리에게 죄를 짓게해서 품삯으로 주는 죽음은 이른바 영적인 영역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몸의 영역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늙고 병들고 죽는다. 쇄약해진다. 정치적 압제로 나타나고 빈곤으로도 나타나고 인간관계의 갈등으로도 나타나고 이런 것들이 다 이 사단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죽음의 증상들이다. 그래서 그 성경의 언어로 하려면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느냐하면 육신적으로는 살아 있어도 영적으로 죽었다는 그런 언어가 아니고 그것은 인간의 존재론적인 이원론으로 생각해 가지고 피상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진짜 성경적인 언어와 성경적인 사고에 충실하려면 대지로부터 뿌리뽑힌 한 그루의 나무를 생각해야 한다. 생명의 근원인 대지로부터 뿌리뽑힌 나무는 죽은 것입니까? 산 것입니까? 살았다고도 할 수 있다. 한동안 양분이 남아있는 동안에는 삶의 흔적이 영력하다. 잎이 푸르고 가지가 싱싱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뿌리뽑힌 순간부터 더 이상 생명에 필요한 양식과 수분을 공급받지 못한 순간 어떻게 되는가? 잎이 마르고 가지가 시들고 이것이 무엇인가? 이 나무가 죽음의 권세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생명의 근원에서 분리되어 죽음의 권세아래 놓여있음의 증상들이다. 그러므로 이 나무는 죽었다고 할 수 있다. 죽음 병에 걸린 것이다. 죽음이 그 힘을 서서히 발휘한 것이다. 이것이 아담적 인생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 아담적 인생을 양쪽으로 말한다. 살아 있다고도 하고, 죽어 있다고도 한다. 그러면 구원적 생명을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우리 인생을 죽음이라고 본다면 죽음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고난들로 그 증상을 나타낸다. 그러면 성경은 구원의 상태를 죽음에 대항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보고, 우리의 삶으로 본다면 영생이라고 본다.

 

영생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하면 오는 세대, 오는 세상의 삶이란 뜻이다. 이것은 유대교의 역사관을 전제로 한다. 카드쉬 기도에서 "당신의 나라가 빨리 임하게 하소서 우리의 세대동안에 즉 이스라엘의 세대동안에" 그것도 유대교의 역사관을 잘 나타낸 것이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사단이 하나님의 주권을 찬탈해서 아담에게 통치하는 이 세대는 고난을 증상으로 나타나는 죽음의 세대이다. 그런데 종말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오는 세대, 오는 세상을 하나님이 통치한다는 것이다. 그때의 삶을 오는 세대의 삶을 헬라어로 표현한 것이 ζωε αιωνε 영생이다. 영생 말은 영적인 삶도 아니고 시간적으로도 영원한 삶이라는 말도 아니고 오는 세대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세상의 삶을 말한다. 내용적으로는 이것은 아담적 결핍으로써의 해방된 삶을 말한다. 하나님의 신적 부유함(무한)으로 이루어지는 삶을 말한다. 다시 나무의 그림으로 말하면 우리가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에게로 뿌리 박혀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양식과 수분을 공급받는 삶을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적(신적) 삶이다. 거기에는 결핍으로부터 오는 고난이 없다. 지혜가 부족해서 불안한 것도 없고, 능력이 부족해서 문제에 빠지는 것도 없고, 하나님의 영원에 참여하기 때문에 늙고 허약해지는 것도 없다.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 거기에는 불의, 압제, 빈곤 등 이런 고난이 없는 신적인 삶이다. 하나님의 충만하심, 신학 전문언어인 플레로마(Fleroma)가 된다. 하나님의 무한으로 이루어지는 삶이다. 그것이 영생이다.

 

예수께서는 탕자의 비유로 우리가 지금 아담의 상태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있는가?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되겠다고 주장하므로 바울의 로마서1장 18절 이하로 말하면 하나님이 "그럼 너 잘해봐라" 그렇게 내버려두었다는 말이다. 다시 탕자의 비유로 말하면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나서 자기 분깃, 자기 내재의 자원으로 자기 생명을 얻으려고 하니까? 그런데 그것이 바로 인생의 근본 문제다. 예수께서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탐 라이트의 이스라엘의 바벨로니아의 포로에서의 해방이 인간의 근본문제가 아니고 자기가 하나님 나라 선포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근본 문제가 아니고 보다 근원적으로 아담적 실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을 아담적 운명을 극복해서 다시 한번 창조주와 연합시키는 것 그래서 창조주에 초월에 참여하게 하는 것 그래서 신적 생명 초월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신학 용어로 아포시오소스( )라고 한다. 인간이 참으로 하나님같이 됨 그런 구원을 예수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예수는 유대교의 카드쉬기도와 18번 축복기도와 비교한다. 예수의 기도와 비교하면 간결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간결함은 어디서 오는가? 이 18번 축복기도는 온갖 것을 다 구하는 것에 비해, 예수의 기도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양식을 주시옵소서, 우리의 내재의 자원의 가난함에서 해방시켜서 창조주의 무한함을 덧입게 하소서 그 다음에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아담적 생명을 극복하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과 이웃과의 관계회복(서약), 그리고 사단적 유혹으로부터의 보호" 다시 보면 이런 4 가지는 인간 실존에 가장 기본적인 이것은 이스라엘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가장 기본적 문제해결에 대한 기도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특수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주기도문이 다시 한번 예수가 하나님 나라 복음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기껏해야 이스라엘의 바벨로니아 포로상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아담적 숙명적의 극복보다 초월적이고 보다 보편적인 메시지임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려는데 있다. 그래서 예수는 이런 아담적 상태에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

왜 하나님의 통치가 복음이냐? 이것은 하나님께로의 귀환, 회복 탕자의 비유로 말하면 거지가 된 아들이 부유한 아버지께로의 회복 그것이 이제 가능해 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선포하는 복음이다. 우리 인간의 아담적 숙명의 극복으로 창조주의 하나님께로의 회복 그래서 창조주의 신적 생명 즉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이것이 예수의 복음이다. 어떻게 열렸는가? 근본적으로 예수의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해서 즉 우리를 구원해주시겠다고 하나님 노릇해 주시겠다고 과거에 약속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단의 통치로부터 해방시켜서 자신의 의와 생명의 통치로 회복시키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그 약속이 이 세대 끝에 하나님의 오심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메시야를 보내서 사단의 세력을 꺾고 오는 세대를 여시므로 그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시겠다는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그 약속이 성취되리라는 것을 선지자들이 묵시자들이 예언을 했는데 예수가 지금 그것이 첫째로 임박했다는 것이다. 곧 온다, 그래서 이 구원의 시대가 열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러면서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표현했는가? 예수는 주로 곧 오는 하나님 나라를 기쁨이 충만한 잔치로 그렸다. 이것은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편23편에서도 구원의 상태를 하나님께서 내게 큰 잔치상을 배설하셔서 내 포도주잔이 넘치나이다. 이렇게 나와있다. 그 구원의 잔치가 내 원수들의 목전에서 곧 올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그린다. 예수도 이런 전통을 이어 받아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로 그린다. 잔치를 말하면 머리 속에 그려지는 것은 풍요로움과 배부름이 있다. 그리고 기쁨이 있다. 서로 나누고 권하는 사랑이 있다. 이것이 우리가 잔치를 말하면 그려내는 연상들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단의 나라는 결핍이다. 거기에는 항상 욕구불만이 있다. 거기에는 기쁨대신에 아픔과 불만이 있고 그리고 사랑대신에 아귀다툼이 있다. 다툼과 착취가 있다. 제한된 자원을 서로 많이 차지하려고 만인이 만인을 향해 늑대노릇 하려고 다툼과 착취한다. 그것이 사단의 나라이다. 지금 우리가 아담적 실존에 있다. 사단의 통치아래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자들에게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상속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서 하나님을 아빠라 부름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을 받는다. 그 상속이 제일 먼저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로 나타난다.

이 예수의 탕자의 비유는 잔치의 그림과 상속의 그림을 섞었다. 그 뜻을 풍부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탕자가 아버지에로의 귀환상태를 아버지가 그에게 다시 가락지를 끼우고 예복을 입힘으로 상속자로 회복시킨다. 살진 송아지를 잡고 풍악을 우리는 큰 잔치를 베푼다.그 뒤에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말한다(눅15:25,34).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충만함에 참여함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없는 거기에는 슬픔과 아픔이 전혀 없는 그런 상태를 생명이라고 말한다. 구원을 생명이라고 하고 지금 이 아담적 실존을 죽음이라고 한다면 구원의 상태는 생명이다. 이것도 삶이라 한다면 이것과는 다른 오는 세상의 삶이란 뜻으로 영생이라고 한다. 영생은 내용적으로 신적 생명이다. 이런 구원이 예수께서는 약속을 하면서 그런 구원이 곧 온다고 복음을 선포했다.

 

예수는 곧 온다고만 선포한 것만이 아니라 곧 올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을 통해서 지금 현재 실현되어 가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가령 눅11장, 마12장을 보면 바알세불 논쟁에서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니까? 바리새인들이 바알세불(사단)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니까 예수는 그것이 가당치 안음을 설명하고 자신이 누가복음 판에 의하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마태복음판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한다. 두 복음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초월의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지금 자신의 축사와 치유에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 자신의 치유 활동에 나타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치유 활동이 곧 올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의 증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과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지금 실현되고 있음을 증거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는 치유를 여러 가지를 쓰고 있다. 너무나 예수의 치유를 귀신을 쫓아내고, 육신적 병고를 고치는 것만으로 이해하는데 그렇게 되면 신학적 문제가 발생한다. 예수의 치유를 좁게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다. 예수의 치유를 부정적 언어를 쓰면 인간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의 고난으로부터의 해방, 긍정적인 언어로 쓰면 모든 영역에서 우리를 온전케 함. 이처럼 아주 포괄적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물론 육신적 병고도 치유하시고, 귀신 들린 자를 해방시키기도 하시고,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올바른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이런 것들이 다 치유 활동이었다. 즉 온전케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삭개오를 들 수 있는데 삭개오는 맘몬(Mammon)의 우상숭배 빠져있는 그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을 때 그가 회개하고 맘몬의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았을 때 예수께서 '이 집에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졌다'선언한다. 이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즉 부정적인 언어로 말하면 죄가 용서되고, 긍정적인 언어로 말하면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었다. 과거에는 삭개오가 이웃을 착취하였기에 이웃은 삭개오를 멸시하고 두려워했고, 삭개오는 이웃을 멸시하고 이웃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갈등 속에서 오는 상호증오와 상호 공포에서 해방이 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샬롬이 이곳에 온 것이다. 하나님과 이웃과의 샬롬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치유이다. 이 치유는 육신의 병고 제거로도 나타난다. 이런 삭개오의 상태에 있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데 그렇게 되면 암으로 죽는다. 그런 삭개오가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그 마음에 평화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치유를 병고와 귀신 쫓아내는 것만으로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많은 죄인들을 불러모아 그들에게 하나님의 죄 용서를 선언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그런 치유 활동 이것이 복음서의 근저에 깔린 내용이다.

 

그중에 예수님의 치유활동(병고치유활동) 몇 개를 close up 시켜서 드라마틱하게 표현한다. 주로 육신적 병고를 치유로 나타낸다. 왜 그렇게 나타나는가? 우리에게 신학이 부족한 사람들은 이 치유를 오해하기 쉽다. 그런데 죄인들을 회복시키는 포괄적인 치유가 근저에 있고 그중에 몇 개 육신적 병고 고침을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하나의 특별히 부각시키는데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육신의 병고를 치유하는 것이 증명의 효과가 가장 뛰어나다. 이것은 마가복음 2장 1-12까지 잘 나타난다. 중풍병에 걸린 친구가 들것에 실려왔을 때 예수께서 "너 나았다"라고 치유한 것을 말하지 않고, 예수께서 "너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과 이웃과의 관계회복. 그것이 다시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 하나님의 생명력을 덧입어서 이 중풍병자에게는 자신의 결핍의 상태가 육신적인 병고로 나타났는데 그것이 해결된 것이다. 그것의 가장 근본적인 것이 죄 용서이다.

그런 거기 신학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로 시비를 하니까? 예수께서 죄용서의 이 사람이 근본적으로 치유됨을 무엇으로 증명합니까? 걸음걷는 육신의 고침으로 증명한다. 거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육신의 병고 고침은 그것만 치유가 아니고 죄인들의 아담적 생명의 극복, 창조주 하나님과의 회복, 이웃과의 관계회복이 더 근본적인 치유이다. 이것이 육신의 병고의 회복으로도 나타나고, 사회 궁핍의 해방으로부터로도 나타난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곧 오는데 그 하나님 나라가 자신의 치유를 통해서(치유는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영역에서 결핍으로부터의 해방, 하나님의 충만함에 참여함으로 일어나는 것을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실현되어 가고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이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초월에서 우리에게 은혜로 온 것을 강조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언어가 독특하다. 당시 유대교의 배경에서는 없는 독특한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와 함께 쓴 동사들의 쓰임을 보면 알 수 있다. 항상 "하나님 나라가 온다" 이것은 예수의 독특한 언어이다.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신다". 가령 누가복음 12장에서 작은 양무리에게 두려워 말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인간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받는다". 상속받는다라고도 한다. 자 이런 그림의 짝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초월에서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런데 그 은혜를 초월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은혜성을 강조하셨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를 땅에 이루고", "하나님 나라를 선교사를 보내서 확장한다"라는 이런 언어는 다분히 인본주의적인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땅에 이루고 인간이 자기들의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비극이다. 인간이 이루고 인간이 노력하여 확장한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인간의 나라일 뿐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빙자해서 인간의 나라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당시 열혈당식 신학이다. 예수께서 빈 공간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이 아니다. 예수의 제3탐구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는 것은 당시 1세기 유대교의 맥락인 열혈당 하나님 나라운동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대한 절실한 alternative였다. 이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옳다는 태도였다. 예수도 그런 시험을 여러 번 받는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로부터도 그런 시험을 받는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외치는 것도 베드로를 통해서도 열혈당식 메시야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처음 시험기사인 마 4장, 눅4장, 막1장에 나오는 예수의 시험기사의 내용은 한마디로 열혈당식 메시야가 돌아오는 것이다. 고난이 없이 자기 주장을 통해서 이 세상을 통치하는 자, 유대 민족의 메시야 사상으로 온 세계의 이방 민족들을 정복해서 유대인들을 세계 일류의 통치 민족으로 올리는 그런 발전의 전사 왕 메시야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들의 율법에 충실한 특히 제1계명에 충실해서 무력과 정의를 통해서 자신의 나라를 이룬다고 말한다. 예수는 그런 것을 인간의 언어라고 보았다. 그래서 도리어 이런 언어(하나님 나라와 그 동사들)를 썼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은혜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구원의 두 조건들이다. 구원이 참 구원이기 위해서는 그것은 인간의 제한성 저 밖에 초월의 무한함에서 와야 한다. 인간의 내재의 제한성 속에서는 구원이 가능하지 않다. 그 초월성이 은혜로 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른 바 세상의 고등 종교의 신론을 보면 다 알 수 있다. 인도의 힌두교의 범신론은 신의 초월을 부인하고 내재만 있다고 한다. 세상 전체가 신의 다양한 표현, 현상들이라고 본다. 모든 삼라만상이 신의 다양한 현현이다. 세상밖에 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신론을 가진 종교는 그렇기 때문에 자력구원으로 간다. 우리 밖에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는 신이 없다. 그래서 내가 나를 구원해야 한다.

범신론에 반대되는 고등 종교의 신론은 이신론(Deism)이다. 여기에서는 신의 초월을 너무 강조하다가 내재를 부인한다. 신이 너무 거룩해서 이 타락한 세상에 오지를 않는다. 또 올 수가 없다. 큰 자가 작은 세상으로 올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초월자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이 있긴 있다. 그런데 그 구원할 수 있는 위대한 알라가 저 하늘꼭대기 혼자 고고히 앉아 있기에 이 내재의 세상의 사람들은 알라가 각자에게 정해준 운명대로 살든지 숙명론에 빠지든지 또는 자기가 메카를 순례하고 다섯 번씩 금식하고 선행을 행하고 거룩한 전쟁에 가서 전사하고 이런 자력구원을 해야 한다. 이 자력구원론이라는 말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성 때문에 문제가 있다. 한계된 자원으로 자기의 한계성으로 오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문제이다. 그럴 수 없다. 그러기에 예수의 복음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나몰라라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초월에서 우리에게 은혜로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받는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은 아무 할 일이 없는가? 여기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가 무슨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 봅시다.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

 


강의 4

 

이전에 토론한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 하나님의 초월에서 은혜로 온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은혜성을 강조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구원의 두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 초월성과 은혜성 그 중에 어느 하나 내재성이 결핍된 신론을 가진 종교들에는 자력구원이라는 소망 없는 구원론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신의 초월성이 없는 인본주의 철학 또는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이다. 공산주의의 최근에 가장 큰 실험인 인간이 자신의 내재의 자원을 동원해서 막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에 의하면 모든 사람들이 능력 것 일하고 모든 사람들이 필요 것 쓰는 프로레타리아 유토피아를 만든다고 그랬는데 그것은 도리어 그런 유토피아는커녕 대재앙으로 70-80년 실험하다가 끝난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의 내재의 힘으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초월에서 구원이 은혜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첫째 그런 "하나님의 통치가 빨리 오게 하소서" 그것이 가장 첫 청원이요, 중심청원이다. 곧 이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양식 청원이 있다. 이 양식 청원을 우리가 함께 생각해 봅시다.

 


우선 양식 청원을 해석해 보면 마태복음판과 누가복음판이 다르다4)

. 먼저 마태복음판은 오늘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옵소서 할 때에 "주시다"는 동사가 a[rton 누가복음에는 "주시다"라는 동사가 현재형으로 되어있을뿐만이 아니라 '오늘' 이라는 말보다는 '날마다' '그날에 필요한' 그런 뜻을 갖는 to; kaq! hJmevran이라는 문구로 되어 있다. 그래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to; kaq! hJmevran은 누가가 즐겨 쓰는 표현 양식이다. 그래서 이것은 아마 누가가 자기가 쓰는 숙어로 표현한 것 같다. 여기에서 정확히 ejpiouvsion이 무슨 뜻인가?는 상당한 토론거리이며 중요하다. 복음서와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문서외에는 이 단어가 헬라 문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이 아마 두 마디로 되어있는데 ejpiouvsion은 어원은 무엇이고, 원래 의도했던 뜻은 무엇이냐?에 토론이 많다. 그래서 주석가들이 즐겨 택하는 해결책 하나가 ejpi++++++++++++와 ouvsia의 복합어로써 '삶에 필요한' 그런 뜻이다. ouvsia '삶에 필요한' '삶을 가능케 하는' 그런 뜻이라는 가능성이 하나 있고, 둘째는 '당일을 위한' 이런 뜻이다. ejpiten ousan 당일 여기에 무엇이 생략되어 있느냐하면 hJmevran 이 생략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당일에 필요한, 당일을 위한 그런 뜻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있다. 셋째는 '오는 날', '다음 날'로 해석해야 된다는 입장이 있다. h' ejpiouvsion hJmevran 가 생략이 되어 가지고 이렇게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중에서 가능성이 큰 것은 첫째와 세 번째이다. 왜냐하면 '당일을 위한' 이 말은 마태판에 의하면 shvmeron, 누가판에 의하면 to; kaq! hJmevran 나오는 말이다. 또 당일을 위한 그런 뜻보다는 아마 이중에 '삶에 필요한'이라는 뜻이든지 '오는 날'이라는 둘 중의 하나의 뜻이 적당할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이 둘 중에 하나를 쓴다.

최근에 주석가들은 세 번째로 이렇게 쓴다. 세 번째 뜻일 가능성이 굉장이 큰 것이 오늘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옵소서 청원의 배경이 되는 것은 출애굽기 16장의 만나 이야기다. 출 16장 4절 (alA!ai ytir;/tB] &leyEh} WNS,n"a} @['m'l] /m/yB] !/yArb'D] Wfq]l;w] ![;h; ax;y:w] !yIm;V;h'A@mi !j,l, !k,l; ryfim]m' ynIn]hi hv,moAla, hw:hy] rm,aYOw") 만나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할 때에 매일 그날에 필요한 양식을 주시겠다는 것이 있다. 출16장 4절의 만나에 대한 히브리어 표현을 나타낸 것이다. 만나를 하나님께서 언제 주십니까? 아침에. 무엇을 위해서? 아침부터 전개되는 하루를 위해서 주신다. 아침에 준다는 것은 오는 날이다. 메추라기 고기는 하나님께서 언제 주시는가? 출애굽기 16장에 가면 저녁에 만약에 저녁에 음식을 받았다면 그때에는 다음날에 음식을 받는 것이다. 아침에 받았다면은 아침에 시작되는 그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오는 날이라는 말은 오늘, 지금부터 시작되는 그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이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생명을 가능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즉 생명을 보존해 달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죽음에 임박해서 내일 다가오는 죽음이 우리에게 구원을 위한 우리에게 생명을 줌을 의미한다는 것을 극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그 극을 음식을 재료를 삼아서 표현 하셨다. 내일 다가오는 죽음이 우리의 양식, 생명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양식은 우리의 생명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 우리의 생명을 지탱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말이다. 또는 생명에 필요한 것을 주시옵소서 그런데 그것을 '날마다' 누가식으로 하면, 마태식으로 하면 '오늘 구하는' 이런 식으로 하면 어떤 태도와 대조되는가? 첫째로 출애굽기 16장의 만나 거두는 사람들이 과 대조한다. 그 사람들이 욕심이 많아서 많이 거두워도 하루 먹는 양식만큼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너무 많이 거두웠을 때 그 다음날 부패해서 먹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루 하루 그날 그날 주님께 의지하는 태도 그래서 우리에게 지금 오늘, 날마다 우리에게 그날에 필요한 음식을 주시옵소서라는 뜻으로 '일용할 양식'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매일 그날 필요한 양식을 달라는 것이다. 이것은 출애굽기 16장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매일 많은 음식을 거두려고 욕심을 갖지 말고 그날 그날 하나님께 의지해서 사는 삶의 자세를 갖추라는 것이다. 둘째는 아담과 대조되어서 말한다. 아담의 타락의 내용이 무엇이냐하면 자기 자신이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겠다. 자신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아담은 농사를 해서 즉 일을 해서 그 땀의 열매인 양식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창3장 19절 그런데 그 상황이 항상 결핍의 상황이다. 그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항상 삶만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죽음을 확대하는 것이다. 즉 항상 삶과 죽음의 변증법적 실체를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를 여기 마태복음 6장 19절-34절까지 설교로 확대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 초월에서 은혜로 오는

은혜의 통치를 받지 않는 아담적 상황은 자기 스스로 자기의 땀 흘리는 일을 통해서 그 열매로 삶을 지탱해야 한다. 그것은 항상 결핍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는 그런 상황이다. 그래서 이것은 항상 우리에게 근심과 걱정을 남기는 그런 삶이다. 그러다 보니 인간이 항상 Mammonism의 가치관으로 빠지게 된다. 그래서 물질을 우상화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여기 예수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청원에 대한 설교가 6장 24절 '누구도 하나님과 맘몬을 같이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담적 실존은 Mammonism적 우상적 숭배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Mammonism적 우상숭배에 빠지면 이웃을 착취할 수밖에 없다. 이웃의 것을 착취했기에 이웃과의 갈등을 가져다준다. 우리가 아무리 열매를 많이 맺는 일을 하여도 그것이 진정한 삶이 길이 아닌 것을 말한다.

또 예수는 그 여러 비유들로 누가복음 12장 15-21절 부자 바보의 이야기를 들고 있다. 거기에 보면 12장 22절부터 34절까지는 출애굽기 16장의 만나 이야기에 근거한 설교 바로 앞에 나온 이야기이다. 그런데 만나 이야기에 대한 누가복음 12장 22-34절 설교는 마태복음 6장 24-34절과 병행절이다. 이것은 예수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청원에 대한 설교의 부분이다. 자기 힘으로 자기가 일을 해서 열매로 삶을 얻으려고 하는 태도는 맘몬니즘의 우상숭배에 빠지고 그것은 삶의 길이 아니다. 설령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어 가지고 곡간을 새로 헐고 새로 짓게 곡식을 많이 쌓아 두어도 결국 하나님이 그의 삶을 거두어 가신다는 것이다. 진정한 삶을 우리에게 주실 분은 초월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지 우리의 부가 우리의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태도는 그날 그날 의지해서 사는 것 즉 만나 내려주심에 의지해서 사는, 하나님을 의지해서 사는 그런 삶의 자세로 살아야 된다.

그런 삶의 자세는 첫째로 근심하지 않는 태도이다. 다시 마태복음 6잘 22-34절까지의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세 번 되풀이 한다. 25, 28, 31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어떻게 먹이시나 보라"? 새는 일을 하지 않는다. "들의 백합화를 보라". 그것도 일을 하지 않지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빠가 어떻게 그것을 솔로몬보다 더 화려한 옷을 입히는가? 거기에서 초월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운 하나님 노릇해주심을 배우라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 거기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오소서" 다음에 드리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드리는 기도는 과거 출애굽 백성들이 그날 그날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을 의지해서 살았듯이 우리도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의지해서 살겠습니다는 서약을 담는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옵소서. 초월의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다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옵소서"는 첫째로,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초월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의해서만 나의 생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내가 그런 신앙고백대로 살겠다는 서원이 들어 있는 것이고 또 셋째로 우리에게 그런 양식을 달라는 청원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의 반대는 첫째로 욕심을 내어서 많이 거둔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 사람들 그것이 소용이 없더라는 것이다. 그것보다 근원적인 반대는 아담이 자기의 일로 자기의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데 그것은 가당치 않다.

자기의 일로 자기의 생명을 얻으려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인간은 이것을 문화라고 한다. 우리가 과학을 발달시키고 그 과학을 생산 수단의 기술로 전환해서 많은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 등 소비제를 많이 만들어 낸다. 이것을 소위 산업혁명이라고 한다. 18세기 산업혁명이다. 과학을 생산 수단의 기술로 전환해서 우리의 소비제를 많이 만들어서 우리의 삶이 그 만큼 확대된 것은 사실이다. 그만큼 풍요로워졌다. 농업혁명으로 전에 논 한 마지기(200평)에서 가령 쌀 다섯 가마니가 나왔다면 지금은 그 세배가 나온다. 그래서 아시아의 기근이 해소되어서 우리의 삶이 그 만큼 풍성해졌다. 여러 공산품의 증가로 우리의 삶이 그만큼 확대된 것이 사실이다. 교통통신 수단의 증가로 우리의 장소적 제약과 시간적 제약이 많이 극복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에 와서 놀란 것이 미국에서는 없는 현상 누구나 다 셀로로폰(헨드폰)을 하나씩 들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몇 사람들은 이 전화를 안 가지고 다니는 것 중의 하나가 전화에 노예가 되니까 안 들고 다닌다 말을 들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증진하는 우리의 일의 열매가 즉 과학 기술의 열매가 동시에 우리의 죽음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우리를 더 노예화 한다. 우리의 삶을 증진하는 전화가 우리를 더 노예화한다.

앞으로 지금 여러분들의 가끔 예로 드는데 소위 인간 문화의 양면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로 드는데 통신 수단 이것이 시간과 장소의 제한을 극복하게 함으로 우리의 자유를 확대하였지만 그러나 이런 발달로 우리의 안방까지도 도청장치가 되어 있어서 부부간에도 자유롭게 대화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졌다. 앞으로는 짐작에 미국의 CIA가 머리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읽어내게 하는 장치까지 나오리라고 본다. 그래서 안방은 고사하고 내 머리 속으로라도 자유롭게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만들 것이다. 우리의 소비제와 우리의 삶을 확대한 산업혁명이 오히려 공해와 자연고갈 삶의 물질화 이것으로 인하여 그만큼 죽음을 확대한 것이고 고난을 확대한 것이다.

인생의 모든 일의 열매는 아담은 자기가 양식을 얻을 것이라고 보았다. 자기가 생명을 지탱하고 확대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의 일의 열매는 항상 삶을 확대하는 면이 있지만 죽음도 그만큼 확대한다. 항상 삶과 죽음의 양면을 가진 변증법적 실제를 갖는다. 죽음의 그림자 없는 삶만 확대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이 자기의 일로 자기의 생명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명사적으로 보면 한 동안 한 세대를 문명낙관론에 빠져 가지고 과학을 발달시키고 그것을 생산 기술로 확대해서 삶을 확대한다는 그 길로 달려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것이 삶만 확대된 것이 아니고 죽음도 확대된 것을 발견한다. 과학이 우리에게 삶만 확대한 것이 아니고 첨단 무기로 확대해 가지고 베트남에서의 살상, 온갖 전쟁 때마다의 살상 그리고 지구를 몇 백번 파괴하고도 남을 핵무기로 우리를 위협한다. 죽음을 그만큼 나타낸다. 그것을 깨달은 시점에서는 사람들이 반문명운동으로 비판을 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낭만주의 운동이 벌어진다.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자연에 구원이 있습니까? 거기에도 구원이 없다. 문명사적으로 가장 최근에 낭만주의 운동으로 벌어진 것이 1960년대말-1970년대 초의 히피운동이 그런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거기에 구원이 있습니까? 구원이 없다.

그래서 이 만나의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초월에서 은혜로 오는 양식에 의해서만 삶이 가능함을 보여주는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선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초월에서 은혜로 오는 통치에 힘입어 우리가 참 양식을 얻는다. 즉 하나님으로부터만 우리의 생명이 오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자세로 살겠습니다. 부자 바보같이와 아담같이 나의 일의 열매로 살려는 태도를 지양하고 하나님의 초월의 은혜에서 오는 그 양식으로 내가 살겠습니다. 청원하는 것이고 그러니 오늘 나에게 양식을 주시옵소서 이 태도는 안식일을 지키는 태도이다. 즉 안식일적 삶이다. 이것은 무엇으로 연결되는가하면 예수께서 주로 안식일날 치유하는 것과 연결된다. 치유는 예수가 선포하고 실현하는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실현의 모습이다. 치유는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러스트레이션이라고도 하고 주석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우리를 온전케 한다는 것을 그림으로 그려주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해설서라고 말하고 그보다 더 좋은 말이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의 실제화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 예수께서는 실제로 안식일날 치유하셨다. 그래서 적대자들과 가장 크게 대립하는 이슈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주로 안식일날 하신 것이다.

사복서를 읽어보면 예수께서 꼭 안식일날 치유를 하셨나? 예수님이 성격이 삐딱해가지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도전하기 위한 것이었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깊은 신학적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안식일이란 무엇입니까? 안식일이라는 것이 처음 6일동안 하나님이 완성된 완전한 창조에 대한 축하(celebration)가 참된 안식이다. 심히 좋은 상태에 대한 축하가 바로 안식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더 이상 하실 일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편히 쉬셨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단의 속임수에 빠져서 아담이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양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자기에게 하나님 노릇하겠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일해서 스스로 양식을 얻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진정한 삶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고 기껏해야 삶과 죽음에 변증법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 인생이 이런 상태이다.

 

제4계명의 안식일을 지키라는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로, 태초에 온전한 창조(심히 좋은 상태)를 기념하고 종말에 하나님께서 사단의 나라를 극복하고 다시 한번 심히 좋은 재창조를 이루었을 때에 거기에 진정한 안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 종말에 이루어질 안식(재창조)을 고대하는 의미로 제 4계명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는 태도는 아담적 삶을 중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적 실존이 올바른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하나님 노릇하겠다는 태도는 자기가 자신의 일로 신의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태도는 자력구원이다. 이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올바른 태도가 아닌 어리석은 태도임을 나타낸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지 아니한 타락의 질서 속에서는 매일매일 자기 주장을 하고 일을 하여 생명을 얻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살면서도 그 하루는 우리의 생업(자신의 일로 자신의 생명,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겠다는 태도)을 중단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의해서만 우리의 진정한 생명이 가능함을 신앙고백하는 날이다. 그래서 생업을 중단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엿새 동안에도 내가 설령 내 일로 말미암아 나의 생명을 얻을 수 밖에 없는 타락의 질서 속에서도 나의 일을 절대적으로 우상화하지 않고 물질에 우상화하지 않고 나의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께로서만 온다고 주장하면서 사는 것이다. 즉 엿새동안에도 안식일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다. 우리 일을 상대화하고 우리 일의 열매를 상대화하여 매일 매일 오늘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나의 생명이 하나님께로서 온다는 나의 삶의 신앙고백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예수는 종말에 하나님의 통치를 지금 선포하시면서 그 종말의 재창조 그래서 우리를 심히 아름답게 한다는 것이다. 고장난 우주를 고쳐서 심히 아름답게 하므로 치유를 선포하시는 분으로 여기 벌써 안식일에 치유하심으로 종말에 안식을 가져오시는 분임을 시위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주로 안식일에 치유하시는 것이다. 지금 안식일에 태초에 안식의 온전한 창조를 기념하고 종말에 하나님의 사단의 통치를 꺾으시고 온전케 함 갈망하는 회당의 예배에 모임에 손마른자가 나타난 것이다. 이 안식일에 손마른 자와 38년된 중풍병자는 무엇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인가? 원래 안식일이 더 이상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원래 안식일은 신의 아름다운 창조를 축하하는 날인데 지금 그 안식일에 손마른 자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원래 안식일이 없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지금 손마른 자의 나타남은 빨리 고장난 우주가 치유되어서 다시 한번 재창조가 일어나서 심히 아름다운 상태가 되어 진정한 안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극적으로 갈망한다. 그 순간에 예수께서 손마른 자를 고치심으로 자신이 바로 종말에 온 우주에서 죽음을 몰아내고 모든 인생을 치유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그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오는 분임을 시위하기 위해서 주로 안식일에 치유하는 것이다. 그 시위와 함께 우리에게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삶의 자세는 여기 지금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그래서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응답하게 하소서 그래서 아담적 삶의 자세인 나의 일은 환경에 대한 자기 주장이고 이웃에 대한 자기 주장을 통해서 그 열매로 내가 살겠다는 그 삶의 자세를 지양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초월에서부터 오는 은혜로 그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의해서 살겠습니다. 신앙고백하고 그 신앙으로 살겠습니다. 서약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런 은혜를 내게 베풀어 주시옵소서 청원하는 것이고 오늘 일용할 양식을 나에게 주소서라고 청원하는 사람은 부정적으로 말하면 아담적 삶의 자세, 즉 아담적 실존을 지양하는 것이다. 자기의 일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일의 열매를 우상화하고 그것에서부터 삶을 얻으려는 자세를 지양하는 것이다.

또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의 구약의 직접적 배경은 출애굽기 16장의 만나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하나님의 날마다 내려주시는 양식에 의해서 살도록 훈련받는 유대인들이 더 많이 얻으려다가 그것의 부패함을 체험하는 그런 삶의 자세를 지양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삶의 자세를 가진 사람이 예수에 비유에 의하면 부자 바보이다.

 

오늘 우리가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다시 말하면 아담적 실존을 지양하고 만나에 의지해서 사는 날마다 하나님의 초월에서 오는 은혜를 의지해서 사는 삶의 자세, 안식일적 삶의 자세 이런 삶의 자세를 한다고 합시다. 다시 말하면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와 함께 "오늘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의 삶의 자세를 산다고 합시다. 마태복음 6장에 공중에 나는 새를 보고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을 다시한번 상기하고 들에 핀 백합화를 보고 하나님의 초월의 은혜의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려고 하는 삶의 자세를 갖는다고 봅시다.

그러면 우리의 사회가 어떻게 변모되겠습니까? 거꾸로 말하면 아담적 삶의 자세인 자기 일을 절대화하고 일의 열매를 우상화하는 맘몬니즘에 빠지는 것은 우리의 삶을 지켜주지도 않는다. 우리의 삶과 죽음의 변증법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가 돈을 많이 벌면 그 돈이 우리로 하여금 돈이 많으면 또 속박이 죽음과 공포가 더 많아진다. 항상 삶과 죽음이 온다. 그런데 바로 그 맘몬니즘은 항상 이웃을 착취하게 된다. 그래서 부의 불공정한 분배, 불의, 원한, 복수 이것들이 악순환하게 된다.

 

제가 가끔 아담적 실존을 말할 때 한국의 40대가 전세계에서 가장 죽는 일이 많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죽어라고 일하니까? 죽는 것이다. 특히 미국에 이민 간 사람들은 애들의 교육 때문에 이민한 사람들이 애들은 팽개치고 아침 5시부터 저녁 12시까지 죽으라고 일을 합니다. 그러니까? 다 암걸려 죽고 심장병으로 죽고, 자식들은 다 망가지고 가족도 망가진다. 그런데 왜 죽으라고 일합니까? 일이 자기의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돈이 삶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인리 빌(Hainle Bill?)이라는 노벨상을 받은 독일의 유명한 소설가)이 있습니다. 「젊은 날의 빵」이라는 책을 읽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분의 글 중에서 짧은 글이 하나 있습니다. 이 글을 각색해서 이야기하면 "하루는 독일의 관광객이 저 스페인에 관광을 갔습니다.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햇빛이 적으니까? 여름에 지중해 연안으로 휴가를 가는 것이 1년내내 목표이다. 정말로 독일에 가면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다. 독일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1년내내 열심히 일하는가? 물어보면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로 휴가가기 위해서 일한다고 말한다. 이 사람이 일년내내 일을 많이 해가지고 스페인에 휴가를 갔습니다. 그 아름다운 바닷가에 한 허름한 어부가 테가 큰 모자를 머리를 덮고 배위에서 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관광객이 푸른 바다 넓은 백사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고는 그 뱃사람에게 가서 '고기를 많이 잡았소? 그랬더니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얼마나 잡았소? 대구 6마리 잡고 고등어 25여 마리 잡았소. 10시도 안되었는데 그렇게 많이 잡았소? 그렀다. 아 그럼 지금 당신은 가서 열심히 잡고 있지 왜 쉬고 있소? 적어도 서너번 더 잡을 것인데 훨씬 더 많이 잡을 것이 아니오. 그러면은 곧 당신 아마 훈제 공장도 차릴 수 있고 회사도 차릴 수 있을거요?' 이렇게 물었다. 아예 잡아서 훈제공장 차리고 유통회사를 차리면 뭐합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것예요. 그랬더니 이 관광객이 '그렇게 되면 당신은 직원들에게 다 맡기고 이렇게 이곳에 와서 바다를 즐길 수 있지 않소" 그러니까? 이 어부가 하는 소리가 '내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데 당신 무슨소리요'"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진리가 담긴 아담적 삶의 허황된 꿈입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사단이 내어주는 것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절대 빈곤에 살던 사람들이라 더더욱 이런 아담적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우리 신자들도 날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맘몬니즘의 우상숭배가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하나님에 대한 의지 심지어 공중의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에 나는 백합화를 입히시는 그 하나님에 대한 의지 가운데 날마다 그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대한 의지 그분을 위해서 살려는 그런 안식의 자세가 없고, 날마다 내 일의 열매를 우상화해서 죽어라하고 일해서 결국 죽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 우리 기독교 신자들의 신앙도 물질화되어 가지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하죠? 어떤 사람이 이웃을 착취하든지 말든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웃을 섬기는 직업이든지 이웃에 독을 팔든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웃에게 독을 팔고, 이웃의 가정을 망가뜨리고, 이런 직업을 갖고 이런 짓을 해서라도 돈을 많이 벌면 하나님이 축복했다고, 신앙이 좋아서 하나님이 축복했다고 이렇게 심지어 우리의 영성까지도 물질화되는 그런 상황까지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니까 날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이 기도를 안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의지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습니까?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 같이 되는 것이고 예수님 비유의 부자 바보 같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또 하나의 비유가 있습니다. 누가는 18장에서 어떤 부자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어릴 적부터 모든 계명을 지킨 부자이야기를 하고, 19장의 삭개오의 이야기와 대조시키고 있다. 부자는 어렸을 때부터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하고, 삭개오는 물질주의 맘모니즘에 빠져가지고 자기 세관을 이용해서 이웃을 착취하는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이 두 사람에게 다 함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한 것이다. 너의 맘몬이 너에게 물질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고 초월의 하나님의 아빠 노릇해주심, 그의 은혜 베품, 거기에 구원이 있다고 선포한 것이다. 그러므로 맘몬니즘을 청산하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 누구도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맘몬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맘몬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삭개오는 그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자신이 이제는 맘몬니즘을 청산하였음을 나타내어 자신의 재산의 반을 팔아서 갚아주었다. 맘몬니즘을 숭상하면 이웃착취로 나타나는데 비하여 맘몬니즘 청산은 이웃사랑으로 나타난다. 이웃에게 주고 자기가 지금까지 착취한 것은 신명기에서 보면 2배로 갚아야 하는데 아예 4배로 갚겠다고 말하고 있다. 맘몬니즘을 청산한 것은 이웃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이웃사랑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이중적인 사랑을 받아들인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치유의 형태로 임했다. 하나님의 구원이 그 사람에게는 치유로 나타난 것이다. 전에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회복과 이웃과의 관계회복, 원한과 증오와 복수로부터의 해방등으로 나타난다. 이 사람에게 구원이 자유로 나타난다. 양심의 자유, 관계에서의 갈등으로부터의 자유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부자는 하나님과 맘몬의 갈림길에서 맘몬을 택하고 만다. 그래서 그는 슬피 자기의 맘몬으로 돌아가 버렸다. 자기에게 구원을 약속하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단의 속임수에 불과한 맘몬에 돌아가 버렸다. 바보부자의 비유는 그것은 구원의 길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면서 사는 자세는 이런 삭개오가 결정한 삶의 자세를 말한다. 아담적 실존을 지양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자세이다. 우리의 안녕과 행복이 초월의 하나님 우리에게 아빠 노릇해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옴을 고백하면서 우리가 타락의 질서 속에서 일을 하여 우리가 일의 열매를 인하여 살 수밖에 없지만 우리를 과격히 상대화하여 우리에게 맘몬니즘에 탐욕이 자라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맘몬니즘의 탐욕은 곧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약화된 것이고 맘몬에서 안녕과 행복을 확보할려고 하는 것이고 맘몬은 항상 이웃착취로 나타난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지러워지는 것이고 이웃과의 관계가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에 불의로 나타나고 전에 말한대로 죽으라고 일하다가 죽고 말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기도한다면 이 사회가 변하고 몸도 건강해 질 것이다. 그래서 두루두루 잘사는 사회가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이 먹어서 비대해지고,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이 없어서 죽는 것도 아니고 두루두루 하나님과 우리, 우리와 이웃, 우리와 우리의 환경이 될 것이다. 이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삶의 태도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초월에서 은혜로 오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내가 나의 일로 나의 생명과 안녕을 확보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의지해 살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살때에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이루어 진다.

자 점심 먹고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임하시는가 죄에 대한 청원이 어떻게 되었는지 죄에 대한 청원을 같이 묵상하겠습니다.

 


강의 5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강조하신 하나님의 초월에서 은혜로 온다는 것과 하나님 나라 오심과 그 하나님으로부터 일용할 양식을 얻는 삶의 자세를 생각해 보았다.

주기도문을 드리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는 우리의 아담적 삶의 자세를 지양하고 초월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는 삶의 자세로 살아야 된다. 그것은 만나에 의존해서 사는 삶의 자세를 나타낸다. 아담적 삶의 자세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고 삶을 주는 것 같으나 그것이 바로 사단적 유혹인데 그것은 기껏해야 죽음과 함께 오는 삶을 확대하는 것으로써 궁극적인 구원이 되지 못한다. 바로 그런 삶의 자세 때문에 사회적 불의도 일어나는 것이고, 인간관계가 갈등의 관계가 되고, 우리 모두가 살벌하고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의 삶을 유지하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을 간구하며 하나님께 양식을 구하는 태도 그런 기도를 정말로 드린다면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 바라는 그런 자세로 살아서 우리의 일의 열매를 상대화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 모두에게 적절히 부요하고 적절히 공급되는 그런 삶이 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안식일을 지키는 삶의 자세를 말한다.

 

두 번째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의 우리는 다음 청원인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말을 함께 묵상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의 요구로 온다.

그런데 여기에서 먼저 예수님의 비유들을 생각해봅시다. 겨자씨 비유를 생각해 보자.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겨자씨를 비롯한 많은 씨의 비유들이 다 사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인데 누룩의 비유와 함께 생각해 볼 것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말을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은닉성입니다. 아주 조금만하게 시작해서 신앙의 눈에만 보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감추어진 성격의 것이다.

예수님의 당시에서 함께 생각해 보면 당시 로마제국에 비하여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갈릴리 어부들 몇하고 여자들 몇하고 시작한 이 운동은 정말로 겨자씨 같았다. 큰 반죽덩이에 묻혀진 누룩같이 희미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다.(필연성) 왜? 겨자씨의 생명이 있으니까 자라듯이 아무리 작게 시작해도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들의 반대가 있고 아무리 사단의 방해가 있어도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다. 또 그것은 점진적으로 자란다. 누룩이 점진적으로 퍼져서 온 반죽덩이 전체를 변화시키는 그래서 온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겨자씨는 외연적 성장을 말한다면 그래서 큰 나무가 숲을 이루어서 많은 새들에게(모든 민족들을 나타내는 용어이며 다니엘서 2장에 기초를 둔 랍비들의 숙어라 한다.) 구원의 안식처를 얻게 한다.

누룩의 비유를 말한다면 이 사회를 변화시킨다. 가치관, 관계(하나님과 사람들의 관계, 사람과 사람들의 관계. 사람과 환경의 관계)를 변화시켜서 이 세상을 살 맛나게 한다는 것이다. 즉 소금 노릇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는 묵시문학적 언어를 써 가지고 우리에게 갑자기 당도할 도둑같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노아의 예를 든다). 종말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해서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 제자들과 더불어 성장해 가는 하나님 나라가 이렇게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전제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렇게 온다고 했을 때에 대조하는 것은 하나는 당시 열심당식 신학을 계속해서 반대하고 있다. 무력혁명으로 통해서 갑자기 인간들이 다윗왕조를 재건하고 로마세력을 몰아내고 이 땅에 다윗계열의 왕이 대행하는 신정체제를 이룬다는 당시 열혈당식 이해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런 것은 기껏해야 이스라엘이 통치자가 되고 로마를 위시한 이방인들이 피지배자가 된다면 로마사람들이 통치하고 이스라엘이 피지배자였던 자리바꿈만 이루어진 것이지 억압구조(착취와 착취 당함)가 바뀐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 구원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시 혁명신학에 동조하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시에 있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마리 앙뜨와네뜨 여왕이 한 신하에게 물었습니다. "혁명이란 무엇이냐?" 그랬더니 그 신하가 "마담! 내가 여왕이 되고 당신이 내 시녀가 되는 것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자리바꿈만 일어나고 그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억압과 착취 구조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최근에 공산주의 혁명이 우리에 그것을 잘 보여준다. 프로레타리아 무산대중이 지배자가 되서 거기에 정말 유토피아가 생겼느냐? 그렇지 않고 무산 대중이 이른 바 당원이 새로운 계급이 되어 가지고 과거의 봉건 영주들 지주들보다 더 심하게 되어 버린 것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열혈당식 신학이 오늘날에도 가끔 정치 신학, 해방신학으로 오늘날에도 나타나는데 그런 것을 예수께서는 동조하지 않았다.

또 예수께서 은근히 비판한 것이 바리새식 경건주의적 소극주의에도 반대한다. 율법의 근본 정신은 왜곡하고 율법의 그 문자에 집착을 해서 정결운동(몸가짐을 제대로 하고, 음식을 가리고,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등) 그런 것을 통해서 겨우 하나님의 백성 됨, 하나님의 통치를 받음이 겨우 손 닦고 음식 가리는 것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런 식으로 율법을 지켜도 이 사회에 누룩처럼 변화를 못시키고, 많은 사람에게 구원의 안식처로 주는 겨자씨 같이 자라지도 않는다. 그럼 무엇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제하여 그의 나라가 성장한다고 보았는가? 이 전제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법을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요약하셨다. 마가복음 12장 25-35까지 보면 첫째로 하나님에 혼신을 다한 헌신 곧 하나님에 대한 의존과 순종, 둘째는 이웃에 대한 내몸같은 사랑 즉 이웃사랑이 항상 이 두가지가 같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와 더불어 이 첫 계명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이 첫 계명의 하나님에 대한 반대말은 우상 숭배인데 예수께서 가장 경계한 우상 숭배는 우상에게 절하는 것도 아니고 맘몬니즘(물질주의)이었다. 모든 우상숭배는 파괴력이 있다. 오늘날 이 물질주의는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온다. 물질주의 때문에 심지어 국가간의 전쟁도 나타난다. 물질주의의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면 될 수 있으면 돈을 많이 벌어야 그 돈으로부터 나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한다고 본다면 우리가 어떤 삶의 자세를 갖게 됩니까? 자연히 이웃 착취의 삶의 자세를 갖게 된다. 그래서 물질주의 우상숭배는 이웃 착취하는 반면에 하나님께 대한 의존과 헌신 즉 초월의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라고 하는 것은 아빠로부터 오는 매일 매일 공급해 주시는 생명의 떡으로 살겠다는 삶의 자세는, 무한한 하나님을 덧입어 사는 삶의 자세는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 너그럽게, 관대하게 나를 나눌 수 있는 삶의 자세를 갖게 한다. 즉 이웃사랑의 자세를 갖게 한다.

 

실제로 하나님의 통치는 오늘 나에게 어떻게 오는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가 추상적이고 관념화 되고 무슨 묵시문학적 개념이라 해서 미래로만 연기된다고 여기니까?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상당히 동떨어지게 가르쳐지고 인식이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가 아주 구체적으로 매순간의 가치판단과 윤리적 선택의 순간마다 나에게 지금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매일매일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우리는 가끔 이런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예를 들면, 내가 사업하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래서 좋은 전자제품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사단은 나에게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 제품을 백만원을 받으라"한다. "너 돈을 많이 벌어야 네 안녕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다. 너희 자녀들도 잘 교육시키고 인류학교 보내고 유학도 보내고 ..." 돈을 많이 벌어야 되니까 백만원을 받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더러 이렇게 말한다. "너 10만원을 받으라"고 한다. 생산가 5만원에 정당한 이익 5만원 더해서 10만원을 받으라는 것이다. 정당한 이익이 왜 필요한가하면 이웃 섬김, 서비스, 재투자를 통한 이웃 섬김을 확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정당한 이익이다. 그러면 네가 만든 전자 상품으로 이웃을 섬기고 풍요롭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웃사랑이다.

내가 매일 이 갈림길에 놓인다. 여기서 내가 윤리적 선택을 한다. 사단의 말을 들을 것인가? 사단은 나에게 맘몬니즘으로 유혹을 한다. 돈을 많이 벌어야 네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지! 하나님은 그것은 네가 네 이웃을 죽이는 것이고 그것은 동시에 너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길이다. 이렇게 말한다. 사회에 불의와 갈등과 원한과 복수의 관계를 조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이 생명의 길이 아니기에 10만원만 받으고 한다. 그래서 이웃의 삶을 풍요롭게 하라는 것이다. 내가 이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말은 맘몬니즘의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 하나님은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에 나는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만나를 내려주시는 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내가 이러다가 내가 손해보면 어떻게 하는가? 하고 의심이 올 때도 있다. 이 때도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아빠가 되시는 그 하나님은 너에게 양식을 주신다. 그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신뢰해서 이웃사랑에 삶을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요구한다.

 

이때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사단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해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지고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져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백성의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한 순종으로 이 땅에 실현이 된다.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한 요구로 온다. 순종의 요구로 온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요구로 오는 통치를 받아 순종하면 그 만큼 하나님 나라의 샬롬, 구원이 현실화된다. 그것이 적절한 부의 재분배로, 정의의 확대로, 자유의 확대로, 평화의 확대로, 자연환경의 적절한 이용의 확대로 두루 두루 샬롬이 이루어진다. 그러면 우리의 육신의 건강도 증진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누룩의 비유이고, 소금의 비유이다.

 

자 그러면 처음 하나님의 나라가 초월에서 은혜로 온다는 것과 지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오는 그의 통치에 대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이 된다는 것과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도, 나중의 사도들의 가르침도 우리가 우리 힘으로는 아담적 실존을 방법을 지양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우리 힘으로 못한다는 것이다. 위로부터 오시는 성령에 힘입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할 수 있다. 그것을 한마디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믿음 자체가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믿음 결단 자체가 하나님의 성령에 힘입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기도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그 하나님의 힘주심, 그것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겠습니다"는 청원으로 잘 표현이 되어 있다. 우리가 아담의 죄에 항상 빠져드는 존재인데 하나님께서 그런 삶의 양식을 지양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를 누가판과 마태판을 비교해 보면, 마태 판에는 "우리의 빚들을(ta; ojfeilhvmata hJmw'n)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했고, 누가는 "우리의 죄들을(ta;" aJmartiva" hJmw'n-복수)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한다. 이렇게 복수를 쓴 것은 단순히 크게 '죄의식을 제거해 주시옵소서',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옵소서'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죄의 행위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누가는 왜 '죄들'이라고 하고 마태는 '빚들'이라고 했나? 원래 빚들이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원래 용어이다. 마태가 예수님의 언어를 반영한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판의 두 번째 부분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 모두를 용서합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도 이 청원 두 번째 부분에서는 "빚"이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을 볼 때 마태의 "빚"이라는 언어가 원래 언어이고 이 청원에 첫 부분에 누가가 '빚' 이라는 언어를 의미상 '죄' 라는 말로 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죄를 '하나님에 대한 빚'으로 보았고 또한 '이웃에 대한 빚'으로 보았음을 말한다. 이것은 죄의 엄중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것을 유대인적 숙어에 익숙치 않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서를 쓴 누가는 그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금전적 재무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죄의 문제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누가는 '죄'라는 말로 풀어서 우리에게 써 준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마태의 빚이라는 말이 원어일 것이라고 짐잦할 수 있다.

 

그 다음 누가와 마태의 차이는 무엇인가?

두 번째 부분에 마태는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사해 준 것 같이" (ajfhvkamen) 이것이 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누가는 "우리 모두를 용서해 주니까요" 이렇게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동사의 시제가 다르다. 또 마태는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사해 준 것 같이"에 비해 누가는 "왜냐하면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모두를 용서해 주니까요" 이렇게 접속사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제일 불편한 것은 완료형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주었듯이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할 때 우리의 어감으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모범으로 내세운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한 것 같이 하나님도 우리의 죄의 빚을 용서해 주십쇼". 이렇게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모범으로 내세우는 것 같이 되어 있다. 누가 판에서도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모두를 용서해 주니까요 하나님도 용서해 주십시오". 마치 우리의 우리 이웃에 대한 용서를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용서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 같은 어감을 준다. 그래서 사실은 상당히 주기도문을 해석할 때 원래의 뜻을 잘 모르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부분이다.

유대교적 배경을 금세기에 가장 많이 연구한 요한 예레미야스는 셈족 언어를 가장 잘 아는 이분은 여기 마태복음의 ajfhvkamen을 완료형을 원형으로 보고, 이것을 아람어로 번역해 보면 완료형은 시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이것은 동시성의 완료형(perfectum co-incidentie)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 뜻은 마태 판으로 하면 "하나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겠나이다" 이 두 번째 부분은 죄 용서를 청원하는 것에 대한 부수적인 서약이다. 그러면 왜 이런 서약이 붙는가?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해 준 것이"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다. 즉 이웃사랑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이웃사랑은 마태복음 5장 38절부터 이웃을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께 나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비는 자로서 저자가 나에게 나를 험담하고 나를 못살게 굴어서 내가 저자를 언제가 손을 봐주어야겠다는 그 마음을 품고 이웃에 대한 원한, 복수심을, 증오심을 품고 "하나님이여 나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저자는 내가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죄는 내가 꽉 지고 있기에 그 죄 말고 다른 죄만 용서해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말이 안된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를 빌려면 동시에 자기의 죄를 버릴 각오를 해야 합니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용서가 나에게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죄의 용서의 효과가 나에게 있는데 나는 죄용서 안받겠습니다. 저 이웃에게 원수 갚겠다는 그 죄만은 용서받지 않겠습니다라는 태도와 같다.

 

예수께서는 주기도문을 서문과 결론의 서문에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식으로 하지 말라. 중어부언하지 말라 하신다.

왜 이유는 하나님께서 너의 처지를 다 알기 때문에 그 서문은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청원을 강조하는 서문이었다면 이 주기도문 끝에 마태복음 5장 14-16절 "너희가 사람들이 너희에게 지은 죄를 용서해 주면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요. 너희들이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도 너희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넣음으로 죄용서 청원을 하이라이트하고 그 청원에 뜻을 새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용서 받음과 우리 이웃에 대한 죄용서함이 이렇게 구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이웃에 대한 죄 용서 없이 하나님에 대한 죄 용서 받음이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이웃에 대한 죄 용서를 하나님에 대한 우리 공로를 내세워서 그 반대 부분으로 하나님께 죄용서 받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고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 이웃 사랑이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뜻이라면 그것을 우리가 실천하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 용서를 비는 자들로서 그것을 실천하지 않겠다고 우리 마음속에 가지고 있으면 용서를 비는 것이 헛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비유로 이 설교를 강력하게 하신다.

마태복음 18장 23-35절에 다시 한번 이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의 끝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말은 주기도문 끝의 구절과 같다. 이 비유가 주기도문의 청원에 대한 설교임을 알 수 있다. 이 비유에 의하면 10000 달란트 빚진 자를 왕이 빚을 탕감, 용서해 주었다. 10000 달란트는 예수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 주민 전체가 내는 1년 세금이 200 달란트 밖에 안되었다. 그것을 보면 10000 달란트는 얼마나 큰 돈인지 알 수 있다. 백 데나리온(한 데나리온-장정의 하루 품삯)은 100일 일한 것에 불과하다. 10000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그 이웃에게 조그만 빚을 탕감하지 않으면 그 죄에 대한 탕감이 무효가 된다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 죄 아담적 실존의 죄에 대한 용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욕하고 손해 입히고 한 우리의 이웃에 대한 죄에 대한 10000 달란트와 100 데나리온 정도의 중함과 경함의 관계이다. 그런데 우리는 10000 달란트에 해당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용서를 빌면서 겨우 100 데나리온 밖에 안되는 이웃의 우리에 대한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참용서가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로 말미암아 죄의 용서를 받는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죄 용서가 우리를 통해서 이웃에게 나타나게 해야 한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죄 용서의 은혜를 이렇게 가로막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용서가 우리 이웃으로 전달되게 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주기도문을 우리가 다시 번역한다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었듯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지 말고 이렇게 해야 한다.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겠나이다" 이 청원은 우리에게 주기도문의 각 청원이 청원일 뿐만 아니라 서약임을 잘 보여준다.

지난 시간에 말했듯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청원은 '오늘 우리의 생명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시옵소서'라는 청원만이 아니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양식에 의해 살겠습니다. 우리가 아담적 존재로 살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힘을 우상화하고 우리의 일을 우상화하고 우리의 일의 열매를 우상화 하지 않겠습니다'는 서약을 동시에 포함한다고 했습니다.

그 앞의 "하나님 나라가 오소서"라는 청원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내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습니다는 서약을 동시에 담고 있다.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청원은 나도 이웃에게 죄지은 자에게 죄를 용서해 주겠습니다라는 서약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라는 청원은 내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습니다라는 서약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서약부분을 늘 생각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소서"라고 해 보았자 허구가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와 같이 누룩과 같이 온다고 할 때는 우리 성도들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백성의 적극적인 제자도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바리새적 경건주의의 소극주의가 아니고 신앙생활하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을 기껏해야 음식가리고 손닦고 그릇 닦는 것으로 경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많이 빠진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이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좀 과장해서 말하면 세 가지만 안하면 된다. 1.술 안마시고 2.담배 안피우고 3.제사만 안지내면 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경건주의적 소극주의이다. 그러면 담배 안피우고 술 안마시고 제사 안지내는 사람이 천만이 아니라 4천만 국민 전부가 그래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샬롬이 안 일어난다.

그것을 예수께서는 실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에도 담겨있지만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요구에도 담겨 있지만 예수께서는 실제로 바리새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너희들이 손닦고 그릇닦고 음식 가리는 일은 열심히 하는데 실제로 더러운 것은, 우리를 부정타게 하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즉 부정한 음식을 먹었나 안먹었나 그런 것이 아니고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배설물을 일차적으로 말하나 그것은 무엇을 비유하는가? 우리의 안에 있는 심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하나님에 대한 의존의 거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거부, 이웃에 대한 증오심과 무시함 이것이 다 안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어렵게 하고 우리와 이웃을 어렵게 한다. 그것이 우리를 부정케 하는 것이지 먹는 것은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적극적인 제자도의 요구는 하나님에 대한 혼신을 다한 헌신과 이웃사랑이다. 하나님에 대한 헌신은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는 것을 의지하는 것으로 나왔다. 그런데 우리가 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을 잘 못하기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빌어야 한다. 아담적 살려고 하는 우리의 실존을 자제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로 빌어야 한다. 우리가 아담적 실존으로 빠지는 그 죄를 항상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웃사랑을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힘을 받아야 한다. 나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줄 수 있는 힘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할 때 우리에게 샬롬이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구체적으로 부가 비교적 공정하게 재분배되고 그렇게 되면 사회정의가 일어나고 그렇게 되면 관계들이 원만해져서 평화가 증진되고 스트레스도 없어져서 몸도 건강해 지는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지금 여기에 구체적으로 실행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가 변화되고 공동체가 변화되고(누룩의 비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덕을 입는다(겨자씨의 비유).

이 "하나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청원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습니다라는 서약을 동반하듯이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청원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의 양식으로 살겠습니다는 서약을 동반하듯이, 우리 죄에 대한 청원은 항상 우리 이웃의 죄에 대한 용서를 서약하는 그런 자세로 기도를 드려야 된다.

 


그 다음에 마지막 청원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그리고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출하여 주소서" 누가복음은 그 앞부분만을 사용하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마태가 아마 이 청원을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악으로부터 구출하여 주소서"를 덧붙인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기 peirasmov/"라는 말은 히브리어 마샤(Marsha)의 번역인데, 이 히브리어 마샤와 헬라어 peirasmov"는 둘 다 이중으로 쓰인다. 하나는 유혹이라고 쓰이고, 둘째는 시험으로 쓰인다. 어떤 때는 유혹과 시험이 섞이기도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혹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기는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창22).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고 우리의 믿음을 교육하기 위해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하나, 우리에게 유혹하지는 않는다. 유혹은 사단이 한다. "우리를 peirasmov"'로 끌어들이지 마소서"라고 되어 있다. 문자 그대로 한다면 그런데 여기 '끌어든다'는 말은 '우리가 그 속에 빠져가지 않도록 허용하지 말라' 그런 뜻이기 때문에 peirasmov"는 유혹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사단의 유혹이 전제되는 것이다. 사단이 우리를 항상 유혹을 하는데 사단이 아담을 유혹했듯이 우리를 시시각각으로 유혹을 하는데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는 그 사단의 유혹을 저지할 힘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 사단의 유혹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막아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사단의 유혹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이다. 유혹이 사단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유혹으로부터 막는다는 것은 곧 사단으로부터 보호함을 말하면서 마태는 여기 "악한 자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여 주소서"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기 때문에 주석가들이 노상 토론을 벌이는 "악한 자"와 "악"의 헬라어 tou' ponhrou'가 중성 속격이냐, 남성 속격이냐의 궁금증이 있다. 중성속격이면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여 주소서"라고 해야하며, 남성 속격이면 "악한 자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여 주소서"라고 해야 한다. 여기에서 "악한 자"이면 이것은 아마 사단을 두고 한 말임을 알 수 있다. "사단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여 주소서"를 중성으로 보아야 하느냐? 남성으로 보아야 하는가? 이 문제를 가지고 주석가들이 토론을 많이 벌린다. 그런데 중성으로 볼려고 하는 사람들은 유대교 배경을 가지고 사단을 "악한 자"라 이름하는 것이다. 사단의 이름이 많으나 "악한 자"로 이름하는 것이 별로 없다. 복음서에서도 그렇게 명백히 나오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것을 중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요즘과 같이 사단의 인격적 존재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은 '악으로부터 구출하소서' 이렇게 중성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그런데 우리 복음서 여러 곳에 가령, 마태복음13:19, 38에 "악한 자"라는 말이 나온다. 또 누가복음 22:28-32에 보면 거기에서도 '시험'이라는 말이 바로 사단과 연결이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누가복음 11:26절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복음서 곳곳에 '악한 자'라는 말도 나오지만 사단과 악함을 연결시키는 문구가 여러 번 나온다. 그래서 설령 유대교 배경문서에 사단을 악한 자라고 명백히 부르는 곳이 없더라도 여기 마태복음의 마지막 청원의 tou' ponhrou'는 남성으로 봐야하고 사단을 지칭한다고 봐야 한다.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대로 지금 "우리를 유혹에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라는 말 자체가 그 속에 사단을 전제하고 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밝히 드러내기 위해서 마태가 두 번째 부분을 덧붙인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당연히 '악한 자'를 남성으로 봐야 하고 '사단'을 지칭한다고 봐야 한다.

 


이 악한 자인 사단으로부터의 보호 청원은 앞의 하나님 나라, 하나님 통치의 도래에 대한 청원과 사실은 Inclusio를 이룬다.

첫 청원과 마지막 청원이 사실은 한 청원의 두 짝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항상 사단의 통치의 반대개념으로 본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아주 간단히 말하면 사단은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 통치하고 그래서 죄를 지으면 죽음으로 품삯을 주는 그런 통치를 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의와 생명의 통치를 한다고 나타낸다. 하나님과 창조적 피조물과 올바른 관계 회복을 시켜서 우리를 다시 한번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을 덧입는 올바른 관계를 회복시키는 그런 참된 의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의인되며, 죄 용서를 받는 것이다. 죄용서란 말은 부정적인 표현이고, 의인된다는 것은 긍정적인 표현이다. 이 두 말은 사실은 똑같은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생명, 신적 생명, 영생을 얻는다. 하나님의 무한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께서 하나님의 통치를 잔치나 상속의 그림으로 그려주면서 이런 구원을 약속하면서 너희들이 지금 이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탕자의 비유의 탕자와 같다는 것이다. 사단의 속임수에 빠져 사실은 너희들은 죽음에 빠져서 너희가 스스로 하나님이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천만의 말이다. 사단의 속임수에 빠져 사단의 명령을 받아 가지고 사실은 너희는 죽었다. 그것이 바로 탕자이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회개함으로 나와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 속으로 들어오라 그러면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해 주겠고 창조주 너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창조주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주겠고,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해 주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신적 생명'을 얻게 해주겠다고 약속해 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약속만이 아니라 이 구원을 치유로 시위했다. 자기가 약속한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을 치유(포괄적으로 이해되는 우리를 온전케 함을 나타낸다-육신적 병고치유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회복,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회복 그것으로부터 오는 샬롬과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우리를 온전케 함을 포함한다)로 시위했다. 치유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면서 초청한 것이다. 그래서 가령 마가복음 2:17에 예수께서 "내가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들을 불러내러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을 불러내어서 하나님 나라로 죄인들을 불러오는 일 그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의도라고 말한다.

 

우리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 하나님 나라의 초청에 응해서 회개로 사단의 나라에 등을 돌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면 우리를 예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선언한다. 누가복음 12:32절의 언어로 말하면 "하나님의 작은 양무리"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한 목자가 되어주심을 덧입는 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주기도문의 첫 마디에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어 가나 이 하나님의 통치는 종말론적인 구조 속에 있다. 예수의 초림으로 시작은 하지만은 예수의 재림때 완성이 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 하나님의 나라가 출범하지만 예수의 재림 때에 이것이 완성이 된다. 지금 예수의 재림 때 완성이 될 때까지는 이 사단이 다스리는 이 세상, 이 세대가 즉 사단이 왕노릇하는 이 세대가 계속되는 것이다. 이 사단이 통치하는 세상 속에 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다. 이때 지난 시간에 말한대로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히 일어나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이 첫 번째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주기도문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사단의 통치에서 회개함으로 벗어나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온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도 지금은 사단의 통치가 계속되는 한 사단의 통치에 계속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제일 먼저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이 속히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나라가 오소서, 오게 하소서를 제일 먼저 청원해야 한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빨리 오도록 그래서 사단의 나라가 빨리 종식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빨리 완성되도록 완성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 동시에 지금 우리에게 사단의 통치와 하나님의 통치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는데 하나님의 초월이 은혜로 오는 하나님의 통치가 내게 일어나서 내가 사단의 통치를 저지하고 사단에게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순종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 하나님의 나라가 빨리 완성되게 하소서 미래적인 것이라면, 두 번째 의미는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임해서 우리가 사단의 죄악과 죽음의 통치로부터 지금 여기서 건져냄을 받게 하소서 이런 이중적인 뜻이 있다. 그것과 짝을 이루는 것이 마지막 청원의 "지금 여기서 사단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지금 여기에서 사단의 통치를 꺾고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하소서" 이 기도는 부정적으로 말하면 "지금 여기에서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소서" 그래서 이 하나님의 나라가 빨리 오소서의 청원과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소서(우리를 구출하소서)와 Inclusio를 이룬다.

 

이 기도는 우리에게 지금 종말론적인 유보상태에 있음을 상기시키는 기도이다. 우리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와 그의 십자가 상에서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골로새서 1:13절에 의하면 이미 흑암의 권세에서 구출되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워졌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미 완료된 사건이며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받은 구원은 어디까지나 종말에 완성될 구원의 첫 열매에 불과하다. 이 그림으로 말하면 계속해서 우리는 사단의 주권과 하나님의 주권의 요구에 노출되어 있다. 이 마지막 청원은 우리 스스로 그것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의 책임 있는 제자도를 서약하도록 하는 그런 청원이다.

다시 말하면 엄연한 사단의 현재적 통치에 대해서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청원이다. 첫째로 엄연한 사단의 통치에 대해서 철저하게 의식하게 하는 청원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 것이냐 하면 사단의 엄연한 현재적 통치를 무시하면 열광주의(Enthusiasmus)에 빠진다. 마치 고린도인들과 같이 고린도전서 4장 8절-13절까지5)

에서 거기에서 바울이 냉소적이 되어 가지고 고린도인들에게 너희들이 이미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해서 다 배불러져 버렸다는 것이다. 너희들이 이미 하나님의 부요함을 덧입어 피조물의 결핍을 다 해결해 버렸다. 우리 없이 너희들이 하나님 나라에 다 당도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는 자들이 되었다. 너희들이 이미 다 왕이 되었다. 예수께서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와 함께 왕 노릇할 것임을 말했는데 여기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다. 너희들이 우리 없이 이미 하나님 나라에 당도해서 그의 잔치에 참여해서 배불림을 받고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아 이미 부요하게 되었고 그래서 피조물적 제한성을 극복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는 자들이 되었구나! 그리고 바울은 제발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너희들과 함께 왕노릇 할 것인데라고 굉장히 바울이 냉소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것을 고린도 교회의 열광주의라고 한다.

지금 구원의 첫 열매를 받고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자들이 이미 다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의 구원파들도 이런 종류의 것이다. 고린도인들은 왜 잘못된 구원론에 빠졌는가? 성령의 엄청난 체험(방언, 예언,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일(spectacular)이 나타난 것을 체험)하고 나서는 자신들이 이미 천사들의 상황에 도달한 것으로 보았다. 천사들의 언어를 쓰면서 하늘에 이른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지금 우리의 종말론적인 구원이 아직 유보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우리 구원이 이제 겨우 첫 열매이고 우리가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간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다시 말하면 아직도 사단의 엄연한 유혹이 우리에게 날마다 넘실거린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사단에 대한 경각심이 약해진다. 그래서 실제로 사단의 유혹에 자꾸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의 성령파 열광주의자들이 그 형편없는 죄들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고린도 전서에 쓰여 있는 것이다.

사단의 엄연한 통치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이 아직 완성을 향해서 감.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통치가 오소서 종말이 빨리 완성되소서"라는 종말론적인 청원이라면 또 동시에 "지금 내가 사단의 통치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하소서"라는 이 두 청원을 같이 날마다 하면서 가지 않으면 않된다. 이 기도와 짝을 이루는 것이 "사단으로부터 구출하소서이다" 이렇게 기도해 가지 않으면 우리가 구원론의 열광주의에 빠져가지고 사단의 유혹에 무방비해 가지고 책임있는 제자도를 사는 것이 아니고 아주 죄에 빠지게 된다. 그것이 아주 중요하다. 사단의 통치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우리가 가져야 한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사단의 통치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모든 참됨과 모든 선함과 모든 아름다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 오듯이, 모든 거짓과 모든 악함과 모든 추함과 모든 고난은 궁극적으로 사단으로부터 온다. 신약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그래서 이 거짓과 악함과 추함과 고난이 나타나는 곳에 사단의 역사가 있다. 사단이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런 것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우리는 사단의 통치에 대해서 엄연한 의식을 가져야 되고, 그 사단의 졸개들인 귀신의 역사에 대해서 눈을 번쩍 뜨는 경각심을 가져야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신약 성경은 모든 거짓의 구체적인 상황을 항상 일대일로 사단이나 귀신과 연결시키도록 권장하진 않는다. 그래서 너무 사단 사단 귀신 귀신하는 이런 의식에 빠져들게 권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물론 우리가 배경을 설명하면 요즘 미국에서 우리 한국으로 들어오는 재미없는 사상 하나가 있다. 사단과 귀신의 왕국에 대한 신약성경에 허용하지 않는 만큼의 추측을 해 가지고(speculation) 무슨 자기들의 체계있는 소설을 쓴다. 한 예를 든다면 풀러신학교의 신학자였던 와그너 교수의 최신 이론에 의하면 '세상이 이렇게 시끄러운 이유는 하나님의 왕좌 위에 천상의 여왕이 앉아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싸워가지고 그렇다는 것이다, 천상의 여왕이 누구냐 하면 바울이 선교할 때 고대 에베소의 다이아나 여신이라고 한다. 그 다이아나 여신을 바울이 그때 완전히 박멸을 했어야 되는데 바울이 실패를 해 가지고 다이아나 여신이 계속 살아가지고는 카톨릭의 마리아 숭배로 들어갔다가 작년에 죽은 챨스 황태자의 부인 다이아나와 연결이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상의 여왕으로 하나님과 싸워서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다는 것이다.' 그런 Speculation을 위시해 가지고 이 도시마다 그 도시도 구역마다 통치하는 귀신의 이름을 자기들이 정하고 또 그들이 자기들의 도시를 지배하는 귀신의 이름을 다 안다고 한다, 온누리 교회가 속하는 동부 이촌동에는 귀신 A가 통치하고 강 건너 저쪽은 귀신 B가 통치한다는 말도 안되는 이런 Speculations을 신약성경은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것을 허용하면 부작용이 많이 일어난다.

첫째로 부작용이 무엇인가하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신뢰가 약해진다.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감격과 확신과 기쁨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사단과 귀신에 대한 공포 속에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요한 일서는 네 안에 계시는 성령이 세상의 영보다 더 강하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사단의 권세를 이겼다. 그래서 우리가 사단의 엄연한 통치에 대해서 눈 부릅뜬 의식은 갖지만 그 사단과 사단의 졸개들을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을 너무 두려워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Celebration이 약화되며 구원의 확신이 약해져서 사단의 공포증에 걸리게 된다. 그래서 C.S 루이스가 말한 대로 사단 사단 귀신 귀신 하는 사람들은 자꾸 그 귀신의 마력에 빨려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힘으로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귀신에 안 건드린다. 둘째는 이런 식으로 자주 Speculation하면은 지금 하나님의 통치가 매 순간의 가치판단과 윤리적 선택 그 순간마다 사단의 자기 주장과 이웃 착취하라는 요구와 하나님께 의지하고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에 나는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만나 먹이시는 자기 아들을 나의 죄를 위해서 내어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뜻에 순종해서 이웃을 섬기라는 요구, 내가 믿음의 결단을 해야 한다.k

그래서 신약 성경의 윤리적 요구가 하나님을 의지해서 이웃 사랑의 삶을 살아가라는 믿음의 결단을 촉구하는 권면이다. 그런데 너무 이런 귀신론에 빠지면 믿음의 결단을 하는 '주체로서의 나'가 자꾸 약해진다. 다시 말하면 나의 믿음의 결단의 실패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잘못을 항상 사단에게 귀신에게 전가시키게 된다. 그래서 자기 책임이 약해진다. 자기가 죄를 졌는데 뭐라고 말하는가하면 귀신이 역사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신약 성경은 그런 것을 권하지 않는다.

 

좋은 예 중의 하나가 풀러신학교의 교수 중의 하나인 오순절 출신의 맥 로벡 교수(?)인데 그는 오순절 교회 출신이고 전공이 고대교회사중의 성령운동이기 때문에 이런 분야에 정통하다. 그 분의 말이 과거 1920년대와 30년대에 이런 것을 많이 했다고 한다. 사단과 사단의 왕국의 체계에 대한 Speculation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네마다 귀신의 이름을 정하고 귀신 쫓는 일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내적 치유, 영적 전쟁 같은 것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순절 교회가 적어도 지도부에 있어서 신학 교육이 성숙하면서 그런 것을 적어도 지도부는 다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최근에 일부 오순절 교회의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 신학 훈련을 전혀 안받은 사람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영적 전쟁, 가계 저주등의 책을 내가지고 한국에 소개된 사람 마리온 휘키라는 여자와 그 사람의 영향을 받은 한국사람 몇 이런 사람들이 자꾸 이런 것을 퍼트려 가지고 어렵게 한다. 이 분이 한번은 분개해 가지고 교수회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의 한국 학생 둘이 시험을 보는데 와가지고는 시험을 일주일만 연기해 달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왜 그러는지 물어보니까? 자기들이 귀신이 들렸으니까 시험 공부를 못해서 연기해 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좋은 예이다. 귀신 귀신 하는 사람들은 믿음의 결단 즉 믿음과 사랑을 요구하는 신약의 책임있는 제자도의 윤리를 피하는 방편으로 자꾸 사단과 귀신에게 자기의 책임을 전가하는 그래서 기독교적 윤리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사랑의 의무를 방해하고(sabotage) 말아 버린다.

 

우리 신약성경에서 영적 전쟁 언어를 가장 무시무시한 군사적 언어로, 묵시문학적 그림으로 표현하는 책이 요한 계시록인데, 요한 계시록을 잘 읽으면 그 당시 묵시문학의 그림들을 해석할 줄 알고 숙어들을 이해할 줄 알고 요한 계시록에 사용된 구약을 살피면 요한 계시록의 메시지는 온갖 곳에 사단 마귀들이 들끓으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군대 144,000을 동원해서 용과 바다의 괴물과 땅의 괴물과 또 하나의 괴물인 사단의 삼위일체와 맞서서 영적 전쟁을 해야한다.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 그런 것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교회로 하여금 당시 로마 제국에 막강한 군사력을 형태로 팍스 로마는 로마제국의 황제에 순종을 하고 제국의 법에 잘 따르면 온 세상에 평화가 있다는 팍스 로마나 이데올로기등이 사단의 통치가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로 나타나니 그것에 현혹되지 말고 그래서 황제숭배 그런 것에 빠지지 말고 예수의 증언 하나님의 왕 되심과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에 순교를 무릅쓰고 신실하라 그리고 이웃에게 그 복음을 증거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라 그것이 영적 전쟁이다. 어디에 다니면서 이동네 무슨 귀신있고 저 동네 무슨 귀신있다는 것이 영적 전쟁이 아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 영적 전쟁의 언어가 가장 절실히 나타나는 것이 에베소서 6장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마귀의 꾀에 싸워 이겨라. 우리의 싸우는 것은 혈과 육이 아니요. 하늘의 권세를 잡은 정사요 능력이요. 암흑의 세계를 지배하는 세상의 통치자들이고 하늘에 있는 영적 악당들이다. 거기까지만 읽으면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마귀들에게도 계급이 있다고 한다. 그들과 우리가 영적 전쟁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에베소서 6장에는 영적 전쟁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합니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이 사단의 제국과 맞서서 싸워야 하는데 1. 진리로 띠를 떼고, 어디에 다니면서 귀신쫒고 푸닥거리하라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견지하고 그 다음에 2. 의의 흉배를 입고 의를 실천하고 그 다음에 3.평화의 복음의 신을 신고 열심히 다니면서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고 열심히 다니면서 하나님께서 대속의 제사로 받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우리의 죄를 용서하셔서 자기에게 화해시키 이 화해의 복음을 열심히 다니면서 선포하고 그 다음에 4.믿음의 방패를 들고 5.구원의 투구를 쓰고 6.성령의 검을 가지고 그 성령의 검은 복음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영적전쟁을 복음의 진리에 굳건히 서서 구원의 확신 가운데 서서 진리를 실천하고 의를 행하고 전도를 열심히 행하는 것이 영적 전쟁이라는 것이다. 전쟁의 언어는 사용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통치아래 신실히 살고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는 의를 행함 그것이 사단의 통치를 막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 사단의 통치를 무시하면 때로는 귀신들림의 형태도 있지만 그것은 우리를 유혹하고 죄에 빠뜨리고 우리에게 고난을 가져다 준다. 그 현실을 무시하면 열광주의자가 된다. 그래서 사단의 유혹에 무방비 상태가 되어서 고린도 교인들 같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도 안된다.

또 하나의 극단은 사단과 그의 왕국에 대한 열광주의자가 된다. 그래서 사단의 열광주의에 무방비 상태가 되어서 고린도 교인들 같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도 안된다. 또 하나의 극단은 사단과 그의 왕국에 대한 신약성경에서 허용하지 않는 정도의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 결과로 그들의 성경이 말하지 않는 소설을 써서 극도의 관심을 보이면 사단의 권세아래 역설적으로 더 놓이기 쉽고 실제로 해야 될 영적 전쟁을 못하게 한다. 복음의 진리를 천명하고 의를 실천하고 사랑을 행하고 이런 것이 실제로 영적 전쟁인데 이런 것을 하지 못하고 자꾸 사단에게 책임 전가하는 일이 벌어진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구출하소서" 는 또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가하면 누구도 자기의 영웅주의에 빠질 수 없음을 나타낸다. 자기 힘으로 선을 행하고 자기 힘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어 갈 수 없음을 말한다. 오로지 하늘로부터 초월로서 은혜로 오시는 하나님의 힘에 힘입어 우리가 사단을 물리칠 수 있음을 말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오심의 가장 중요한 강조는 초월로부터 은혜로 오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단에 맞설수 없기에 자기 영웅주의를 지양하고 항상 항상 하나님의 힘을 빌리는 그래서 우리를 사단의 궤계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우리를 악한 자로부터 구출하소서라는 청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잠시 쉬고 주기도문을 마무리하고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마무리 하고 여러분들의 질문을 받겠다.

 

 

 


강의 6


여러분들이 좋은 질문들을 참 많이 해 주셨다. 그런데 이런 질문들을 다 답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은 어렵고 몇 개만 답하려고 합니다.

 


첫째 질문이 제가 강조하려고 했던 부분과 연결된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에 대해 이를 유목민적 삶에 있어서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이 맺었던 계약의 일부였던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는 먹을 것의 나눔이라는 구약신학의 계약적 맥락에서 이해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제 결론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이 기도가 우리에게 항상 있다. 우리, 나의 기도가 아니고 우리의 기도라는 사실이 상당히 중요하다. 죄 용서에 있어서 죄용서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있어서 원만한 관계의 회복은 항상 이웃과의 관계 회복을 동반한다. 즉 우리끼리의 원만한 관계의 회복을 동반하지 않는 우리의 원만한 관계회복은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똑같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에서 '우리는' 항상 우리끼리의 나눔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이지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내가 '우리' 속에 누구를 포함하는가? 사실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할 때에 천천히 하면서 '우리'에 내가 누구를 포함하고 있나?를 늘 생각해야 한다. 내 가족, 교회, 지역사회, 민족, 온세상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옵소서에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은혜 베푸시기를 요구하는 우리는 우리 중에 가난한 자, 배고픈 자가 있는 것을 알면 그들과 함께 기도를 하면서 그들에게 내가 나의 것을 나눌 자세가 없으면 하나님께 죄 용서를 빌면서 이웃의 사랑을 거부하는 그 죄는 내가 꼭 가지고 있겠습니다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가 된다. 기도의 주체가 우리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공동체에서 나눔의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두 번째 질문: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유대 18번 축복기도와 비교할 때 얼마나 간결한가?

우리 인간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에 대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단과의 관계속에서, 우리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필요에 대한 간결한 기도임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방인들의 중언부언하는 기도와 대조했다. 그러면 이런 간결한 기도는 반복적 기도와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답변: 사실은 가장 기본적인 우리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에 온당한 삶에 필요한 기도는 반복적으로 드려야 한다. 우리가 매 순간마다 내가 자동차 운전하고 가더라도 이웃이 내게 아주 험악하게 내 길을 막았을 때 사단은 나에게 복수를 하라고 요구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에게 용서해 주라고 한다. 그때 내가 용서해 줄 마음이 없다면 그때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내가 당신의 말을 듣게 하소서 당신의 통치가 내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내게 죄지은 자 이웃을 욕하려고 하는 내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저 사람을 용서해 주겠나이다.하고 기도해야 한다. 이 기도는 반복적으로 드려야 한다. 또 그런 상황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반복적 기도를 하는데 간결하고 명료하게 우리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온당하게 살게하는 그런 기도를 반복적으로 드릴 수 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는 기도에 우리가 부자되게 해 주십시오 기도하는 것은 예수께서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기도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탐욕을 위해서 하는 기도, 원수 갚아달라고 하는 기도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께 합당하지 않는 기도이다.

 


질문: 그 다음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는데 그 의는 무엇인가?

이것이 바울에 있어서 의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답: 본질적으로 그것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 해주심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라는 말과 이 의 라는 말은 동의어이다.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우리 인간에게 신실하심인데 의는 기본적으로 관계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속에서 나는 하나님쪽의 의무 즉 하나님이 인간의 하나님 노릇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창조주로서 약속한 것이며 그것은 언약이다. 우리를 창조할 때 그 창조 속에 하나님 노릇해주시기로 약속하셨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등을 돌려도 탕자의 비유로 말할 것 같으면 아들이 멀리 달아났어도 아버지는 끝까지 아들에게 아버지노릇해주심이다. 그렇기에 의는 관계의 신실함, 언약의 신실하심으로 정의할 수 있다.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하심이다. 그 의는 항상 우리에 대한 자비, 사랑, 은혜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이것이 하나님의 의다. 그래서 바울도 마찬가지로 사용한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 때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신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것의 이야기(Narrative-서술)가 복음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의 서술에 하나님의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 노릇해주심, 창조주 노릇해주심 우리 인간을 끝까지 버리시지 않고 우리에게 아빠 노릇 해주심을 나타낸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이며 사랑이며 은혜이다.

 

질문:주기도문의 Pavter는 호격으로 아버지라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교수님은 아빠 아빠했다고 그러는가 ?

답: 아빠 언어가 호격으로도 번역이 되고 노미나티브 아버지로도 번역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주기도문의 첫 마디 누가복음의 파테르라는 단어 속에 아람어 아빠가 있는 것은 왜냐하면 마가복음 15장 36절 겟세마네 기도의 첫마디가 아빠이다. 그리고 거기에 괄호 아버지라고 한다. 이것은 바울의 로마서 8장 15, 16에서 쓰는 말과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 쓰는 말과 같다.

아빠(아버지)라는 뜻이다. 겟세마네 기도의 언어에 원래 아빠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서 예수께서 아빠라 부르며 기도했다고 하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예레미야스의 책을 보던지 더 간략하게 볼려면 그의 신약신학 서두에 보면 잘 나와 있다.

 

질문:창세기 3장의 아담의 이 일이 언약으로써 우리의 생명의 양식을 얻는 노동으로써 신성한 것이 아닌가? 교수님은 왜 부정적으로 표현했는가?

답: 창세기 3장대로 하면 아담이 농사일 즉 문화를 말한다. 농사를 시작한 이유는 자기가 자신의 운명의 책임자로서 자신이 자신의 힘으로 자기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기로 하나님께 그렇게 주장을 한 것이다. 그것을 바울의 표현대로 한 것은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 그럼 네 마음대로 잘 살아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에게 자기 꾀에 내버려두었다고 세 번이나 말하고 있다. 아담이 자기 주장대로 하게 했다는 것이다. 일이 생명을 확대하는 측면이 있다. 반면에 불행이도 죽음을 동시에 가져오지 죽음 없는 삶만을 가져오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은 결코 자기 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문명낙관론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문명이라는 것이 진보하는가? 어떤 면에서는 진보한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의 삶을 계속 증진하지만 그만큼 죽음도 증진한다.

 


질문: 우리의 일이 우리가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에 제사장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하는 개혁주의적 소명사상과는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답: 우리가 일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 일이 죽음을 덜 띠고 삶을 더 증진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우리가 일을 올바로 할 때 가능하다. 맘몬니즘의 우상숭배에 빠져서 일을 절대화하면 일이 착취의 방향으로 나가서 죽음을 증대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의지하고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안식일적 삶으로 일을 한다면 그래도 그 일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되게 하는 것은 없지만 죽음의 요소가 점점 적어지고 우리의 일을 통해서 삶이 확대되며 우리의 일이 이웃 사랑의 도구가 된다. 그래서 의인들의 공동체는 만인이 만인에게 섬기는 즉 만인이 만인에게 종노릇하는 것이고 죄인들의 공동체는 만인이 만인에게 늑대노릇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의인들의 일이 섬김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할 때 가능하다.

 


질문 : 하나님의 은혜로 날마다 산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안해도 괜찮은 것입니까?

답: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되며 우리는 적극적인 제자도로 하나님께 혼신을 다한 헌신하게 된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또한 이웃사랑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것을 하도록 하는 힘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가 맘몬의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거절하고 사단의 유혹도 거절하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되는 것이다. 손해 볼 것 같은 것을 무릎쓰고 이웃을 사랑한다. 그래서 원수까지 사랑한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야 가능한 것이다.

 


질문: 적극적인 제자도가 하나님에 대한 헌신, 이웃사랑으로 나타난다고 했는데 이 적극적인 제자도를 경건주의적 소극주의와 대조했고, 해방신학과도 대조했는데 때로는 적극적인 제자도가 열혈당식 신학으로 나타날 수 있지 않는가?

답: 적극적인 제자도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추구되려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사람 중에 내가 만일 크리스챤 경제학자라면, 국회의원이라면, 경제기획원 장관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어찌하든지 한국에 경제제도, 세법, 비즈니스 관행이 맘몬니즘의 우상숭배를 지향하고 우상숭배와 거기에 따른 탐심을 지양하고 하나님께 대한 의지와 순종을 앙양하고 이웃사랑을 앙양하게 경제제도도 만들어 보려고 하고 조세법도 그렇게 만들어 보려고 하는 그런 것이 적극적인 제자도이다.

당장의 내 이웃에 있는 사람을 돕는 것만이 아니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상 숭배가 아니고 사단의 죄악스러운 면모인 거짓과 불평등과 우상숭배와 착취 등 이런 것들이 지양되고 하나님의 진리와 의가 앙양 되도록 가난한 이웃에게 내가 돈을 좀 돌봐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가난을 제거하는 구조악을 제거하는 데에 내가 국회의원으로써, 경제학자로써, 시민으로서(선거에 참여할 때도 이런 관점에서 후보를 선택하는 그런 시민) 그리고 구조 자체가 명백히 하나님께 대한 헌신보다는 맘몬니즘으로 이웃사랑보다는 이웃착취로 나타난다면 정당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이웃사랑으로 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그 통치가 우리 사회에서 실현되어야 한다고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이 때로는 교회에서, 거리에서 전도함으로, 학교에서 가르침으로, 글로써, 그림으로써, 음악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모든 방법을 다 쓸 수 있다. 그중에 하나 거리에서 나가 선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데모라고 한다. 특히 데모에서 틀린 조세법 바꾸시오 라고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적극적인 제자도는 우리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에 대한 의존과 이웃사랑이 나타나게 해야 한다.

 


질문 :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를 아담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그 비유에서 첫째 아들은 누구이냐?

답: 첫째 아들도 탕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탕자들의 비유라고 한다. 두 아들이 다 탕자임을 말하고 있다. 둘 다 하나님의 아버지 노릇 해주심에 의지해 살 수 밖에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 둘 다 하나님의 아버지 노릇해주심을 거부하고 자기 주장하면서 사는 것이다.

한 아들은 자기 주장을 하고 명백한 탕자이고 또 한 아들은 아버지 곁에 살지만 아버지의 아버지 노릇해주심을 거부하고 자기의 의를 주장하고 자기 공로로 반대 급부로부터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 첫 아들은 누가복음 15장 맥락에서 예수께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것과 죄인들을 불러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선포하고 그들에게 구원을 확신시켜서 그들에게 먹고 마시는 것을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유해서 맏아들로 비유하는 것이다.

둘째 아들 탕자는 죄인들, 이방인들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다 함께 죄인들이며 다 아담이다. 그것을 분간하여 말하는 것은 이 첫 아들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대표한다.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하나님의 백성 됨을 누리지 못한다. 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여 이웃사랑으로 하지 않고 자기의 일로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질문에 대한 답은 이만하겠습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우리가 같이 묵상을 했습니다. 주기도문은 예수가 시작한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불러모아진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상과 소망을 나타낸 것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Identity를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가장 중심 된 청원이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이다. 하나님 나라의 임함.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함께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모든 청원은 단순히 청원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는 서원을 겸한다. 하나님께 내가 하나님 노릇해주심을 의지하며 살겠다는 것이며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아담적 실존의 방법을 지양하고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의지해서 살겠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에서 살겠다는 서원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된 자로서의 서원, 죄 용서를 받은 자로서 이웃의 죄를 용서해 주겠다는 서원,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가는 자로서 내가 계속 사단의 유혹에 노출되는데 그 사단에 순종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통치가 내게 임해서 실현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나로 하여금 사단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이렇게 서원과 청원이 함께 나온다.

 

결론으로 주기도문의 탁월함(excellence)에 대해서 요약해 보면

 

첫째로, 진짜 기도이다.

청원과 서약을 내포하는 청원이다. 내가 청원한 바를 내가 실천하겠다는 것이다. 내가 청원하는 바에 내쪽에서 해야 할 일은 내가 하겠다는 내쪽에서의 청원을 겸한 진짜기도이다. 이것은 중언부언하는 이방인의 기도와 대조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온당한 삶이 없는 것들을 구하는 이방인들의 삶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또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적 기도와 대조를 했다. 바리새인들의 외식적 기도와 맥을 같이 하는데, 우리의 기도가 가끔 하나님에 대한 설교가 되기도 쉽고 기도를 빙자해서 이웃에 대한 설교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주기도문은 진짜 기도이다. 기도의 자세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청원이다. 또한 청원을 드리는 자로서 내쪽(인간적) 부분은 내가 하겠다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서약을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대한 의지와 순종을 함께 나타내는 진짜 기도이다.

 

둘째로, 주기도문의 짧고 간결함은 마태복음 6장 7절의 요구에 맞다.

우리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하나님의 통치 아래 온전한 삶을 위한 기도이다. 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온당한 삶과 관계없는 기도는 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탐심에서 나오는 기도, 이웃에 대한 증오와 원수 갚음 등 이런 것에서 나오는 기도는 하나님이 안 들어 주신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만 들어주신다. 이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온당한 삶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것에 우리의 구체적인 정황이 있으면 그것을 양식에 대한기도 죄 용서에 대한 기도가 구체성을 가져야 될 것이다. 명백히 무슨 죄를 저질렀다면 그 죄에 대해서 기도하고 내가 형제와 다투었다. 그러면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회개하고 용서의 기도를 하고 그 형제가 나에게 명백히 잘못을 했는데 내가 자꾸 나의 의를 주장하고 복수 갚으려고 하는 그것에 대해서도 반성하기도 하고 용서해 주기도 하고 서원하고 우리의 기도가 구체성을 가져야 한다.

 

셋째로 주기도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늘에 계시는 초월자에 대한 경외심과 그분이 우리 아빠 되심에 대한 아주 적절한 상호 긴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초월자에 대한 경외심은 나중에 송영으로 다시 한번 확인이 된다. 초월자에 대한 경외심이 전제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초월자, 전능한 자, 무한한 자이기에 나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고 나의 문제를 다 아시고 나를 온전히 사랑해 주셔서 내가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분이기에 내가 그분에게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 초월자이며 무한하신 분이 나의 하나님이기에 나는 그의 자녀로서 아빠라고 부르는 자는 하나님의 상속자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모든 부요함을 우리가 상속받는다고 했는데 그 구원이 종말에 예수재림과 더불어 이미 벌써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간 자로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끌어 쓰고자 하는 행위가 부요함이다. 그래서 양식을, 지혜를,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끌어 쓰고자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들도 다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 쓰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기 때문이다.k

 

넷째, 기도의 주체는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것이다.

바울의 서신을 다 읽어보면 항상 우리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어쩌다 한번씩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쓴다.(빌립보서, 갈라디아서2:20) 그럴 때는 자기와 하나님, 자기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관계를 절실히 표현할 때는 나란 말을 쓰기도 한다. 그런 몇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항상 우리라는 용어를 쓴다. 예수의 주기도문도 우리의 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 나에게 죄지은 자들, 나와 함께 있는 가난한 자들, 나와 함께 사단에 얽매인 자들, 나와 함께 있는 자들로 사단의 유혹에 떨어진 자들 그들에게 내가 형제 노릇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받은 하나님의 양식을 나눌 생각을 하고 하나님께로 받는 죄 용서를 나눠주고 전달해줄 것을 생각하고, 사단의 유혹에 빠져 헤매고 있는 형제에게 권면과 위로와 힘을 줌으로 그들이 다시 올바른 길로 나오도록 도울 그런 자세를 가지고 이런 기도를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기도인 것이다.

 

다섯째, 이 기도는 청원 속에 항상 서원이 들어 있기에 이 기도는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 우리가 비는 것이 실현됨에 있어서 우리 쪽에 우리가 하겠다는 서원을 하고 그것을 열심히 하는 그런 기도이다.

 

6시간 강의로 준비했는데 12시간으로 늘려져서 이 기도가 나타내는 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이기 때문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을 조금 살피면서 그것과 기도를 연결시키는 그런 방향으로 강의를 해야 겠다는 구조조정을 했다.

남은 시간에 부록으로 실린 「그리스도의 구원과 고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읽는 것으로 강의를 마치고자 한다.

나누어 드린 책을 참조하세요.

 

1) 마 6: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2) 마 6: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마 6: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3)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4) 마 6:11 To;n a[rton hJmw'n to;n ejpiouvsion do;" hJmi'n shvmeron: !

눅 11:3 to;n a[rton hJmw'n to;n ejpiouvsion divdou hJmi'n to; kaq! hJmevran:

2)고전 4: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4: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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