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

[스크랩] 하나님의 이름

수호천사1 2014. 10. 4. 22:01

하나님의 이름

 

 

 

1.하나님의 이름 (엘로힘) (םיהלא,)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엘로힘은 여호와와 함께 자주 쓰이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엘로힘은 주로 창조의 주 하나님과 관련 하여 자주 쓰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는데 바로 엘로힘입니다. 이사야 45장과 예레미야 18장 로마서 9장에서 하나님은 질그릇을 빚는 토기장이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무엇이든 자기 뜻대로 빚어내는 것처럼 피조물에 대한 주권이 그에게 있다는 것 입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조의 역사(役事)를 매듭지으실 때 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심미적(審美的)으로 피조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정확하게 창조의 역사가 마무리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순종할 때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분명한 계획과 확실한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2하나님의 이름 (엘 엘리온) ( ןוילצ לא)

“[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7]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9]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1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욥기는 성경의 순서에 의하지 아니하고 아주 오래된 책입니다. 그러나 욥기가 성경책에 들어오게 된 대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욥기는 히브리인들이 죄와 질병에 대하여 갖는 편견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의인은 결코 고통 받을 수 없다는 편견에 대하여 지적하기 위해 서입니다. 또 욥기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일원론에 대하여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인간이 알 수 없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 한다는 것도 아울러 말하고 있습니다.

§욥의 성품에 대하여 언급한 구절에 특별한 표시를 하십시오. 1:1. 1:8. 2:3

§욥은 사단의 두 번째 시험 이후 자신의 태어난 것에 대하여 후회하고 원망했습니다. 첫 번째 시험에서 아들들을 다 잃고도 하나님께 찬양했던 욥입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말하게 했을까요?

§욥기는 당신이 하나님의 역사의 한 가운데 있어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욥은 고통 중에서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녀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그것을 크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당신이 하나님의 역사의 한 가운데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엘 엘리온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지존자, 가장 높으신 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존하시다는 것은 그분이 너무 높이 계셔서 나와 상관이 없는 어떤 곳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피조 세계에는 하나님과 견주어 비교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약해지고 힘이 없을 때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약하게 하는 원인이나 대적에 대하여 당신의 주권을 주장하십니다. 그로 인해서 당신이 어떤 면이 약하든 그것으로 당신이 평가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의지하면 할수록 당신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엘 엘리온의 하나님께 깊은 신뢰와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이름 (엘 로이) (יאר לא)

*묵상* 16:1~14 필기 하십시오.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욥기는 성경의 순서에 의하지 아니하고 아주 오래된 책입니다. 그러나 욥기가 성경책에 들어오게 된 대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욥기는 히브리인들이 죄와 질병에 대하여 갖는 편견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의인은 결코 고통 받을 수 없다는 편견에 대하여 지적하기 위해 서입니다. 또 욥기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일원론에 대하여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인간이 알 수 없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 한다는 것도 아울러 말하고 있습니다.

§욥의 성품에 대하여 언급한 구절에 특별한 표시를 하십시오. 1:1. 1:8. 2:3

§욥은 사단의 두 번째 시험 이후 자신의 태어난 것에 대하여 후회하고 원망했습니다. 첫 번째 시험에서 아들들을 다 잃고도 하나님께 찬양했던 욥입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말하게 했을까요?

§욥기는 당신이 하나님의 역사의 한 가운데 있어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욥은 고통 중에서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녀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그것을 크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당신이 하나님의 역사의 한 가운데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엘 로이살피시는 하나님하갈은 자기의 의지로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브람이 애굽왕을 속이고 부정하게 얻은 재물 중 하나로 여겨졌을 뿐입니다. 그래서 인지 하갈은 여느 첩들이 얻는 지위의 작은 부분 마져 얻지 못했나 봅니다. 하갈은 사래의 학대를 이기지 못하고 사막의 한 오아시스로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함무라비법전에 의하면 도망하는 노예는 사형에 처해지며 오리엔탈의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도망 노예는 최소한 그 국가에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갈이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도주마저 위험하기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하갈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와 사래에게 돌아갈 것을 조언 하면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갈과 같은 처지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부당한 처우,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삶의 환경이 결정되어지고,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일마저 꼬이게 되는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약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여기서 하갈의 행위을 변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갈이 어느 정도 부정한 일을 했다고 한들 그녀가 지금 처해있는 상황이 그녀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 엘 로이의 하나님입니다. 당신이 하갈과 같은 어려움에 빠져 있다면 당신이 있는 그 장소가 하나님이 나타나는 곳이요, 그 시간이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시간인 것입니다

 

§하갈은 애굽 사람입니다.(21:9) 하갈이 어떻게 해서 아브람에게 왔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12:10~20)

§하갈의 이름은"도망자입니다. 처음부터 그녀의 이름이 도망자는 아닌 듯합니다. 도주 후에 그녀에게 붙여진 별명인 듯합니다.

§도망 노예에게는 몸에 문신을 새겨 넣었습니다.

§이스마엘의 뜻은"네 고통을 하나님이 들으심"입니다.(16:12) 12절에 특별한 표시를 하십시오.

§13"살피시는 하나님"에 특별한 표시를 하십시오.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로 브엘라헤로이가 있습니다. 뜻은 무엇입니까?

살아계셔서 나를 감찰하시는 분의 우물

 

4. 하나님의 이름 (엘 샤다이) (יךש לא)

*묵상* 창세기 17:1~8 필기 하십시오.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본문에서 언약을 세운다는 말은 몇 번 나옵니까? 같은 색깔로 표시 하십시오.

세운다는 말은 새롭게 제정한다는 뜻입니다.

§언약의 주체는 누구입니까?"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란 말은 몇 번 거듭 됩니까?

같은 색깔로 표시 하십시오.

§언약의 중심 내용은 무엇입니까? 아래 구절들에 노란 형광펜으로 표시를 하십시오.

."심히 번성케 하리니"(2)

."열 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니, 열국의 아비"

."너의 후손에게 ...가나안 일경을 주어"

§((는 여호와에도 사용되고 강한 바람을 입 밖으로 내야 발음이 가능한 자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빚으시고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하나님을 연상케 합니다. 헬라어로 프뉴마는 성령인데 숨 쉬고 생활하는 생명체와 관계해서 있는 바람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 3:8) 그래서 은유적으로 (는 아브람의 이름에 덧붙여져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조언*

엘 샤다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샤다이는 가나안 방언 쉐딤에서 파생한 듯합니다. 쉐딤은 가나안의 우상인 아스다롯 나체상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팔레스틴은 세계적으로 나체 테라코타가 많이 발견되기로 유명 합니다. 쉐딤의 극적인 표현으로 아데미라는 여신이 있는데 이 여신은 가슴에 수십개의 유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쉐딤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한 성적인 우상입니다. 그러나 샤다이의 어원이 쉐딤이라 할지라도 그 의미는 창세기 1:28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5대 축복을 주셨는데 그 중에서 세 가지가 생육과 번성에 관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엘 샤다이는 하나님의 창조와 축복에 그 기원을 두고 있고 아브람 때 이르러 엘 샤다이로 구체적으로 계시된 것입니다. 엘 샤다이가 어떤 이유로 해서 유목민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는지 리더에게 듣기 바랍니다. 갈대아 어로는 샤다이가 어원인데 이를 받아들이면 엘 샤다이는 󰡒부어 주시는 하나님 󰡓으로 의미 지어집니다. 입을 크게 열라고 권고 하시는 말씀(81:10)󰡒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 주시는 주님(6:38) 바울은 엘샤다이 하나님을󰡒약할 때 힘주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고후12;9~10)

 

 

5 하나님의 이름 (아도나이- יגךא)

 시편 123편 참조.

 

1.눈을 들어 무엇을 향해 보고 있습니까? (1)

 

2.종이 바라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2)

 

3.(단어)은 몇 번 나옵니까?

 

4.긍휼은 몇 번 나옵니까?

 

5.종의 눈은 무엇을 구하기 위하여 무엇에 주목되었습니까?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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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주의 손으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시편 8:3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욥기 10:8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편 139:10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편 95:7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절의 주는 엘레카로 당신이란 뜻입니다. 2절의 상전과 여주인은 아도나이주입니다. 주는 종과의 관계에서 불리는 말입니다.

§종을 나타내는 히브리말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히브리란 말도 있습니다. 누주의 서판에 "하비루"들이 노예로 팔렸다는 증거도 있고, 여리고 성의 발굴에서 하비루들이 공격해 오고 있다는 다급한 전갈을 애굽으로 보내려던 서판도 있습니다. 이들은 아마 애굽을 도망쳐 나온 노예들 즉, 하비루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출애굽기, 신명기, 예레미야서는 노예를 히브리라고 종종 부릅니다. 이것은 아마 자신들이 히브리인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하여 부끄럽게 생각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종으로 남고 싶은 바람이라고나 할까요?

§히브리인들의 땅은 종들의 천국이라고나 할까요? 도망 노예를 다시 주인집으로 돌려보내지 아니하는 땅이 히브리 땅입니다. 시므이가 도망했던 자신의 종들을 갓의 왕에게서 돌려받은 것을 보면 히브리인들도 다른 나라와 노예 인도 협약을 맺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도망 노예를 돌려보내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신명기 23:16) 이는 블레셋으로 또는 두로와 시돈을 통해 노예로 먼 타향에 팔려갔던 히브리인 노예가 도망쳐올 경우 돌려보내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스스로 되는 종: 자기 동족을 종으로 두고 있는 자는 6년 동안 저를 부리고 해방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종이 주인의 집에서 나가기를 싫어하고 주인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면 맹세의 의식으로 문설주에 귀를 대고 송곳으로 뚫어 문신을 새깁니다. 그러면 그 사람과 그에게서 태어난 자손은 주인의 종이 됩니다.

 

*조언*

아도나이는 하나님의 이름 중에 가장 많이 불리는 이름으로 주인, 주권자, 선생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가나안에는 주인이라는 또 다른 의미의 단어로 바알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알은 주 또는 남편으로 쓰였는데 아도나이와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스라엘이 즐겨 사용 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바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기 위하여 바뀌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스바알(사울의 넷째 아들로 후에 이름을 이스보셋으로 고쳤다.) `므비보셋 (요나단의 아들로 대상 8:34, 9:40에서 므립바알이라고 불리 운다.) 기드온의 별명인 여룹바알이 여룹보셋으로 변화했습니다. 보셋은 부끄러움이란 의미입니다. 이렇듯 의식적으로 바알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한 흔적들이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바알을 하나님과 대응해서 사용하는 것조차 수치스러운 일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아도나이의 주가 세상의 물질 보다 명예보다 우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 바알을 쓰고 있는 이름이 사회적으로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조차 발견 되는 것은 바알의 문화가 이스라엘에서 조차 팽배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아도나이 하나님을 세상 것과 분리하여 사용하는 것은 구분된 자로서의 삶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빌립보서 4:3-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서 전도하며 아시아로 가기를 원했을 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여 기다리던 중에 그는 꿈을 꾸었습니다. 한 마게도냐 사람이 서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 바울은 이것을 성령의 명하심으로 알고 아무 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는 마게도냐로 건너갔습니다.

바울은 루디아성의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 여인의 이름이 루디아 인지 아니면 루디아성의 한 이름 없는 여인 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루디아성의 이름 없는 여인들에 대하여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 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안식일에 기도 처소를 물색하기 위하여 강가로 나갔을 때 루디아성의 여인들을 만났습니다. 당신은 그 부녀들이 왜 강가에 모여 있었는지 알고 계시겠지요. 시편 137:1에서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라고 회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강변은 좋은 기도의 처소가 되었었나 봅니다. 빌립보 교회는 그 여인들을 그루터기로 하여 시작 되었습니다. 그 여인들이 바울에게 어찌나 도움이 되었던지 바울과 실라는 찬양으로 빌립보 감옥을 뒤 흔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디아의 이름은 사도행전 외에 더 이상 언급 되지 않습니다. 이는 그들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자기의 이름을 들내지 아니하고 오직 주의 일을 위하여 헌신하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바울이 주의 복음을 위하여 무시아로 다닐 때에 주의 영이 아시아로 동함으로 막으시고 구원에의 요청을 듣게 하셨습니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마게도냐의 요청은 긴박한 것입니다..당신에게 그 소리가 들리지 아니함은 선교에의 소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깝게는 가정에서부터 지역 사회와 아파르와 아나빔에서 부한 자까지 그리고 이 땅과 전 세계 어느 곳 이라도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외치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도록 많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주의 일꾼으로 가거나 보내십시오. 바울에게는 루디아성의 여인들이 그루터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6. 하나님의 이름 (κυριοs)

*묵상* 마태복음 7;21-27 필기하십시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주는 부르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 정립을 위하여 있습니다.

§"주여 주여"에 특별한 표시를 하십시오.

§"선지자 노릇", "귀신을 몰아냄","많은 권능을 행함"이 불법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뜻대로" 행치 않는 자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무엇일까? 요한복음을 공부하십시오.

§선지자 노릇, 귀신을 몰아냄, 권능을 행함에 같은 색을 칠하십시오.

§아버지의 뜻대로와 불법을 같은 색으로 칠하십시오.

§이번 기회에 당신의 주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좋은 진단 방법

.당신의 소유를 임의로 포기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진정한 관리자입니다.

.당신은 직장에서 창조적인 사람입니까? 아니면 시키는 것만 하는 사람입니까?

전자라면 당신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당신은 정말 행복해 보이시는 군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기뻐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아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대답했습니까?"! 나는 요 하나님 때문에 기쁩니다"그렇다면 당신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군요.

 

*조언*

아도나이는 구약을 중심으로 사용 된 언어입니다. 신약에서는 주라는 표현으로 κυριοs가 사용됩니다. 본문에서는 κυριε, κυριε 호격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을 소리 내어 부르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요엘서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2:32)는 말씀과 상충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일치 합니다. 신명기 6장의 쉐마에서 󰡒쉐마 이스라엘 아도나이 엘로헤이누 아도나이 에하드󰡓라고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를 부름에는 항상 듣고 행함이 따라 와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부를 때는 그분에게 근접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며 그분의 표정까지라도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의 참 의미를 알고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전에 주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주님을 부르느라 괜히 소리만 높인 적이 없습니까?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이름으로만 아니라 인격으로 부르십시오!

 

*나눔*

1.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까?

 

2.주님을 이름으로 만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부른 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3.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은 어떤 의미 입니까?

 

7.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הוהי)

*묵상* 출애굽기 6:1-8 필기 하십시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세 번이나 반복되는 "나는 여호와로라"에 특별한 표시를 하십시오.

§언약은 성경의 중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언약에 관계된 구절에는 노란 형광펜으로 표시 하십시오.

§6~7절에 "빼어내어","건지며","구속하여"는 여호와께서 구속의 하나님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구속을 나타내는 붉은 색으로 표시 하십시오.

§6절에 "무거운 짐 밑에서","그 고역에서"는 죄와 죄책과 억압과 질병을 상징 합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항상"~으로부터

구원하다"라는 형식으로 쓰임을 기억하십시오.

§7절에"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는 언약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부모의 함자를 어떤 자를 쓰시는 분으로 소개 하듯이 말입니다. 네 아버지 성함이 어떻게 되느냐? 우리 아버지는요 이짜, 영짜, 식짜를 쓰십니다. 아니야! 오빠~, 우리 아버지는요이짜, 영짜, 식짜, 씨짜예요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요이영식씨예요 우 하하하!

 

*조언*

여호와의 이름은 너무나 존귀해서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이름입니다. 여호와는 히브리어로 발음이 불가능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인간들이 함부로 부르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이름입니다. 그 뜻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여호와는 창세기 124절에서 처음 나타납니다. 여호와는 엘로힘과 대개의 경우 특별한 의미를 두고 구분 되어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엘로힘은 창조의 하나님으로 여호와는 구속의 하나님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 구체적으로 계시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 즉, 약속 인도, 성취(축복)가 그의 이름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섭리의 하나님이요, 경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강한 힘과 지혜로 나의 삶과 모든 인생들의 삶을 주관 하십니다. 이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 따라서 당신이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신뢰하고 의지 한다면 그분은 당신에게 좋은 계획을 곧 나타내실 것입니다.

 

8. 하나님의 이름(여호와 이레)

*묵상* 창세기 221-19절 필기 하십시오.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모리아 산이 어딥니까? 역대하 31절에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전 터가 모리아 산이겠지요.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드리는 예배와 예루살렘 성전의 희생 제사를 평행선상에 놓고 본다면 여호와 이레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hint=사람이 준비한 예물이 아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제물 = 예수님

§8절 말씀은 구속에 관계된 말씀입니다. 붉은 형광펜을 꺼내십시오. 표시하십시오.

§하나님은 사람을 제물로 받으시지 않습니다.

§잠깐! 21장 마지막 절은 아브라함이 블레셋에서 꽤 오랫동안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버덩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있었던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런 경우가 특별한 경우이기 때문일 것이다. 블레셋 그들은 인간을 희생 제사로 드렸는데 맹세의 제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블레셋 인들은 우상에 대하여 거의 맹목적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들에게 뒤질 거야 없지 않겠습니까? ! 제가 불경한 소리를 했군요.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이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 what is your best favorit thing you should offer it to God !

 

*조언*

하나님의 구속사는 때마다 위기를 만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 위기의 상황을 반전 시켜 구속의 실현을 더욱 구체화 하셨습니다. 본문에는 갈대아우르의 상인으로 살던 아브라함에게 구속의 언약을 주시는 하나님과 그에게서 발생하는 위기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보이지 아니하는 약속에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의 앞에는 굶주림과의 싸움, 목숨의 위협 등 눈앞에 나타난 현실 속에서 선택해야할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아브라함의 선택이 하나님께 불명예를 끼치고는 했습니다. 오늘의 묵상에서는 12절의 말씀이 키워드입니다."네가 나를 두려워하는 것과 네 아들에게보다 내게 애착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12절 직역) 성경은 세상을 사랑하는 단어로는 AHAB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어로는 HESED 0@(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2절에서 사랑으로 쓰인 단어는 AHAB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보다 우선 한다면 그 생각을 꺾으십시오. 그것이 구속의 하나님께 한층 가깝게 다가가는 일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지 않았다면 교회 문을 닫고 그 문에 못을 박고 그 위에 검은 십자가를 붙이고󰡒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목사들이 성령을 받지 않았다면, 설교를 하지 않는 편이 낫고 신자들은 집에서 쉬는 편이 나을 것이다. 성령이 계시지 않는 교회는 축복이라기보다는 저주라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그리스도의 일꾼이여 그대가 성령을 받지 않았다면 그대는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방해하고 있음을 기억하라 그대는 열매를 잘 맺는 다른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곳에 서 있는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다. 이것은 엄숙한 일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사역이 되거나 아니면 성령이 전혀 없는 사역이 되거나 혹은 그보다 나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스펄전

 

 

9 하나님이 이름 (여호와 라파)

*묵상* 창세기 1715-22절 필기 하십시오.

“[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20]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21]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2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사라는 1812절에서 웃고 아브라함은 1717절에서 웃었습니다.

웃는 것이 뭐 대단하다고 그러십니까? 자식에 대하여 마음을 비웠다는 자포자기의 웃음이요, 불신의 웃음이기 때문에 지적해 보는 것이지요. 아브라함 내외는 사실 웃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과 블레셋 땅에서 그 땅의 왕에게 자기의 아내를 욕보일 뻔한 불명예스러운 일 때문에 자손에 대한 약속이 많이 늦추어 졌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생각해 보세요 그들에게 아이를 때를 맞추어 주면 꼴이 뭡니까?

§1619절은 언약과 관계있는 구절입니다. 노란 형광펜으로 표시 하십시오.

§언약의 중심 내용 중에 후손에 대한 약속이 있는데 이것과 전도는 어떤 유사점이 있습니까? 약간 엉성한 논리지만 󰡒전도는 언약이다󰡓라는 등식도 세워볼 수 있겠지요.

§언약이 실현 되는 데 언제나 방해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사라와 리브가(25:21)는 아이를 못 낳는 헨디켑이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고쳐 주셔서 아이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언약의 회복이란 말이죠.

§고쳐주심은 하나님의 성품 중에 하나입니다.

 

*조언*

여호와 라파는 출애굽기 15:26절에 구체적으로 언급 되었습니다. 그 뜻은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칼동사 라파는 로페카 0!9>의 형태로 쓰여 능동적으로 당신을 치료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당신이 복음서들을 읽을 때 예수님은 의사라는 등식을 세워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셨기에 나도 이렇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고치심이 없었다면 사라에게 이삭은 없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구속사도 모습을 달리 했을 것입니다. 언제든지 치료되지 아니한 부분은 큰 문제를 발생시키기 마련입니다. 우리에게 아직 치료 되지 아니하고 남아 있는 부분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더디게 할 뿐 아니라 이웃을 아프게 하고 하나님께라도 비웃음을 던질 수 있는 불신과 악함의 원인이 됩니다.

 

10 하나님의 이름(여호와 닛시)

*묵상* 출애굽기 178-16절 필기 하십시오.

“[8]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트루아 의식이란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나 함성 나팔 소리를 동시에 내는 것입니다. 트루아 의식은 여호수아 62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라비아의 각 종족들에게는 󰡒우트파󰡓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화려하게 장식한 가마로 전쟁터에 메고 나오는 것입니다.

§회교도들에게 예언자의 깃발(아라비아인들의 공동의 깃발)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여호와 닛시가 있습니다.

§이 번과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입니다.

*조언*여호와 닛시, 󰡒여호와는 나의 깃발󰡓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전쟁에는 신의 가호가 더욱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너무나 쉽게 넘나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에 임하는 각 진영은 그들의 수호신을 앞세우거나 젊은 여인, 환각제, 전투음악등으로 전쟁을 독려 합니다. 르비딤 싸움에서는 모세의 지팡이가 바로 이 역할을 담당 했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사람의 눈을 현란함으로 끌어들이는 그 어떤 치장도 없었다. 단지 목동의 지팡이에 불과 했습니다. 더욱 나는 모세의 지팡이가 전승을 가져다주었다고 믿지 않습니다. 닛시라는 말은 원래 냇세라는 말에서 파생 되었습니다. 이는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높이 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높이 듬 여러분은 애돔 사건을 아십니까? 불평하던 백성이 불 뱀에 불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구리 동상을 만들어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높이 들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날 그것을 본 사람들은 살고 보지 않은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3:14을 기억하십시오. 골고다 갈보리 언덕나무위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 그분은 분명 시간과 공간을 넘어 멀리서도 볼 수 있는 들림이 되셨습니다. 여호와 닛시는 분명 높이 들려서 두려움과 위급에 처한 사람들의 도움이 되십니다. 혹시 삶의 터전에서 고전하고 있는 지체가 있다면 눈길을 돌려 당신에게로 향해 들려있는 여호와의 깃발을 바라보십시오.

 

*나눔*

1.모세의 손에 높이 들려졌던 지팡이는 오늘날 당신에게 어떤 의미로 적용됩니까?

2.당신이 모세의 지팡이를 들고 있다면 언제 어떻게 사용 하겠습니까?

 

 

 

11 하니님의 이름(여호와 삼마)

*묵상* 에스겔 48:30-35절 필기 하십시오.

“[30] 그 성읍의 출입구는 이러하니라 북쪽의 너비가 사천오백 척이라 [31] 그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쪽으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 문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 [32] 동쪽의 너비는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요셉 문이요 하나는 베냐민 문이요 하나는 단 문이며 [33] 남쪽의 너비는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시므온 문이요 하나는 잇사갈 문이요 하나는 스불론 문이며 [34] 서쪽도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갓 문이요 하나는 아셀 문이요 하나는 납달리 문이며 [35]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환난을 당하고서야 죄가 생각나 소를 끌고 하나님의 전에 나왔는데 거기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으시면 어쩌시렵니까? 에스겔서 1~32장은 󰡒하나님이 그곳에 없다.󰡓합니다. 33~48장은 진심으로 돌아오는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고 다시 짓는 성전에 여호와 삼마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변덕으로 있다, 없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곳에 계실 뿐입니다.

§숫자 12는 통치의 완전을 상징합니다. 통치란 주관한다, 다스린다, 누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믿는 자를 성전이라고 합니다.(고전 3:16)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왜 구원 하셨을까요? hint=출애굽기 29:46 = 우리 가운데서 사시려고

 

*조언*

여호와 삼마 "여호와가 거기 계심"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들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발 디뎌 놓으심을 시작하신 이래 한 번도 당신의 뜻을 굽히신 적이 없습니다. 때로는 택하심을 입은 백성들조차 하나님을 배반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고치시고 가르치셔서 당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려는 의지는 성경 곳곳에 퍼져 있는 핏줄과 같습니다. 또한 그 의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정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로써 모든 말씀을 다 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제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내가 그분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머무시는 하나님의 영광 즉 SHEKINAH((4/?)를 갈구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싫어함을 받아 배척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이 성경이 쓰여질 당시 이미 사라진 부족들 몫의 문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또 다른 의미의 문 인줄 압니다. 스가랴 2:10에서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속뜻을 보여 주고 있는 구절이 아닌가요?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남은 자들을 위한 문이 아닐까요? 12문을 가진 예루살렘 성전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고 하나님의 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던 가요? 그런 곳이 여호와 삼마라면 이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당신에게 거할 곳이 많다고 선언 하고 계십니다.

 

 

 

12. 하나님의 이름(여호와 라아)

 시편 23편 필기 하십시오.

“[1]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스러워 하는 이유는 아마 아이가 엄마 아빠를 절대적으로 믿어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엄마 아빠의 하는 일은 아이들 또래집단에서 곧 자랑꺼리가 됩니다. 설령 아이의 아빠가 세상에서 힘이 제일 세지 않더라도 아이는 자기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로 힘이 센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확실히 최고입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것 같군요.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자랑스러워하면 되죠? 찬양하세요. 찬양은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후반부에 계속되는 부정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1에 은혜를 받습니다. 그 뜻은 영원토록 NO란 뜻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영원이라는 말을 보증할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은 밥상()입니다.

§지팡이는 공격과 보호의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쪽은 뾰족하여 공격이나 방어용이고 다른 한쪽은 둥글게 구부러져서 양들을 보호 하는데 씁니다.

§양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코파리를 방지하기 위해서랍니다.

 

*조언*

여호와 라아 "여호와는 목자"시편231절의 말씀을 이렇게 보십시오. 높은 산 위에서나 사람들이 많이 모인 시장 통에서 큰소리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 내가 영원토록 부족하지 않으리!"하고 외칩니다. 그러면 다음에 물어 오는 소리가 있겠지요. "왜 그렇습니까?"232절 이하의 말씀은 이 질문에 답하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이 시를 자기 자신에게와 이 시를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슴 벅차오르는 체험된 믿음으로 크게 외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εγω ειμι ο ποιμην)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에고 에이미 라는 말투는 전에 하나님께서 사용 하셨던 왕의 말투입니다. 예수님께서 호(ο)라는 관사를 붙여 여운을 두신 것은 전에 이스라엘이 고백했던 목자이신 여호와가 바로 당신 이라고 주장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좁은 지면을 통하여 나의 목자 되신 하나님을 다 말할 수 없기에 필립켈러의 "양과 목자"라는 책을 읽어 보기를 권합니다. 이 책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한 책입니다. (참고:생명의 말씀사 김만풍 )

 

 

 

13 하나님의 이름

 

 

1. 기본적인 구약의 이름

1) 엘, 엘로힘

'''강한 자'란 뜻을 갖는 가장 단순한 이름으로서, 강하신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나타낸다. 한편 '엘로힘'은 하나님에 대한 가장 보편적 이름이며, 이 이름 어미(語尾)의 복수형은 장엄 복수(莊嚴 複數)로서 그분이 이방신과는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 경외의 대상임을 강조한다.

 

2) 여호와

'스스로 있는 자'란 뜻으로서 오직 하나님에게만 사용되는 고유명사이다(3:14). 이 이름은 하나님의 자존성(自尊性)과 거룩성 및 영원 불변성을 강조한다. 특히 이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의 주체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킬 때 조로 사용된다.

 

3) 아도나이

''()라는 뜻을 갖는 이 이름은 인간에게도 사용되지만, 하나님에게 사용될 때는 인간을 포함한 전()피조 세계에 대한 소유자 혹은 통치자를 가리킨다.

 

2. 복합적인 구약의 이름

 

1) 엘의 복합어

엘 솨다이 전능하신 하나님(17:1;28:3).

엘 엘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14:19).

엘 올람 영원하신 하나님(40:28).

엘 로이 감찰하시는 하나님(16:13).

 

2) 여호와의 복합어

여호와 이레 여호와가 준비하심(22:14).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깃발(17:15).

여호와 살롬 여호와는 나의 평강(6:24).

여호와 라파 여화와가 치료하심(15:26).

여호와 삼마 여호와가 거기 계심(48:35).

여호와 치드케누 여호와는 우리의 의(23:6).

여호와 로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23:1).

여호와 체바오트 만군의 여호와(삼상 1:3).

여호와 마케 멸망시키시는 여호와(7:8).

여호와 엘 게물로트 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이심(51:56).

여호와 메카디쉬켐 너희를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31:13).

 

3. 신약의 이름

1) 데오스

구약의 ''이나 '엘로힘'의 번역어이다. 그러나 ''이나 '엘로힘'은 민족적 종교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과 관계하여 주로 사용되었으나, 이것은 신자 개인과 관계하여 사용된다.

 

2) 퀴리오스

''를 의미하며 구약의 아도나이와 동일하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에게보다도 그리스도에게 더 많이 사용된다.

 

3) 파테르

'아버지'란 의미가 있으며, 신자 개인에게 영적 혹은 육적 도움이 되시는 아버지로서 성부 하나님을 지칭한다(6:6;8:15).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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