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나쁜신앙)

[스크랩] 이단 시비성 논단

수호천사1 2014. 7. 4. 22:11

하나님(성공과 실패)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 죽음을 기다리게 되었을 때, 과거를 돌아보며 성공적이었고 만족한 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이런 질문은 별로 듣고 싶지 않겠지만 일견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공과 실패에 관해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삶을 어떻게 평가하고 그 삶에서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에 대한 도전을 주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의 18∼24세 젊은이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30세가 되기 전 삶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실패자 취급을 당하고 성공에 대한 중압감에 시달리며 건강과 여가를 희생해야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배우자를 찾거나 돈 버는 일 그리고 직장에서 성공하여 집을 사는 것 등에 관한 구체적 계획을 세워놓은 젊은이들이 많았다. 절반 이상 26세에 집을 사고 27세에 결혼하며 29세에 부자가 되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41%는 건강한 식생활이나 생활 패턴을 포기하고 목표 성취를 위해 노력하며, 절반은 성공을 위해 휴식이나 취미 생활 또는 가족과 친구 만나는 것도 포기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이기는 것과 지는 것

성공과 실패는 이기고 지는 것과 관련된다. 이기고 지는 것은 스포츠 세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스포츠가 성공과 실패에 관한 생각에 끼치는 영향력이 학교에서 시험의 중요성만큼 강력하다. 실패에는 엄청난 피해가 따르며 시험에서 통과는 필수이며 높은 점수를 얻어야만 한다. 즉 성공하기 위해 어떤 기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경쟁에서도 이겨야 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성공하면서 동시에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모든 도시의 경쟁 영역에서 작용하고 있다. 누군가 말했듯 이기는 것은 전부가 아니라 유일한 것이다. 단순한 성공은 부적절하며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성공이어야 한다. 한번의 성공으로는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고 최후까지 성공해야 진정 성공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스포츠 세계에도 마찬가지다. 운동 선수에서 정치가로 변신한 세바스찬 코어는 “성공이란 항상 보장되어야 한다. 가장 어려운 부분에서도 계속 성공해야 한다”고 했다. 성공을 위해 어떤 결과를 산출해야 한다면 잠재성과 장기적 관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낫웨스트(NatWest)사 전 회장 밥 알렉산더는 “어떤 사람이 최대한 노력해 이룩한 성공이 다른 사람에게는 일상적인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최근에 운동 선수 로저 블랙은 자신이 은메달을 수상한 것에 대해 “은메달은 나에게 금메달이다. 왜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고 했다.
또한 장기적 관점은 필수적이다. 현대 사회는 위험하게도 즉각적인 성과에만 연연한다. 그러나 좀더 넓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성공이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고 평가할 수 있으며 인정되는 것이다. 세바스찬 코어는 “이겼을 때만 성공적인 결과라고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이제껏 경험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경주는 내가 3등 했을 때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통념적인 성공과 실패

성공이 부나 물질적 번영의 의미로 여겨지는 것은 심각한 문제지만 그것이 우리의 목덜미를 쥐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경향은 미디어나 광고 특히 고용, 승진, 보너스, 각종 혜택 등에서 부끄럼 없이 강조되고 있다. 성공에 관한 신화는 흔한 것이 되었다. 최근 기사로 예를 들어보자.
“지난 12년 간 게리 로빈슨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엄청난 재산, 아름다운 집과 가정을 갖게 되었으며 호텔 경영과 독립 방송국으로 휘청대던 그라나다 그룹을 주요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1948년 로빈슨 씨가 태어나 9남매와 함께 자란 곳은 아일랜드 북동쪽 작은 어촌 마을 던파너기에서도 더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로빈슨 가족은 마을 가장자리 작은 방갈로에 살았으며 자동차도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그가 살던 집은 너무 작아 아이들이 모여 식사하기에도 비좁았습니다.”
이런 자수성가형 성공 신화는 무의식 중에 각인된 전형적인 이야기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잘못된 성공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아름다운 집과 가정이라는 말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마치 재산과 사람이 같은 가치를 지닌 소유물처럼 취급하고 있다. 아마 작가에게 실패란 집과 가족이 아예 없는 사람이 아니라 허름한 집과 초라한 가족에 무게를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은 통념적인 성공과 실패를 암시하는 좋은 예이다. 가난하게 태어나 부자가 되었다면 성공한 사람이지만, 부자로 태어나 가난하게 되었다면 실패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가난하게 태어나 계속 가난하다면 역시 실패한 사람이다. 부자로 태어나 계속 부자로 남았다면 실패한 사람으로 보지 않지만 그렇다고 성공한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다.

21세기 성공은 영적 실체를 경시

21세기 물질적 성공의 개념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 성공에 이끌리고 있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그런 개념은 본질적으로 영적 실체의 존재조차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뜻밖에도 정신적 가치 회복을 주장했던 인물은 무신론자 니체였다. 그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1882년 그 무렵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금주의로 부를 얻기 위해 쉴새없이 일하는 미국인들은 이미 유럽을 무섭게 전염시켰고 영적 실체의 빈곤을 퍼뜨렸다. 사람들은 쉬는 것을 부끄러워하게 되었고 장시간 명상하는 것 등은 양심을 건드리는 것이 되어버렸다. 어떤 사람은 시계를 보면서 골똘히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점심 식사를 하면서 주식 시세의 최근 뉴스를 읽는다. 무언가 얻기 위해 숨가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항상 앞서가려 하고 이기려 한다. 따라서 영적으로 녹초가 되도록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살아간다. 이제 선이란 어떤 일을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끝내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즐거움의 부재

니체가 영성이나 인간 정신에 대해 말할 때 삶의 특정한 영역을 언급하고 있다. 즉 교양, 기호, 약동하는 운율에 민감한 귀와 눈, 정직, 개방성, 사회성, 예술, 친구들과 사색하며 걷는 것 그리고 특별히 즐거움이다. “사람들은 점점 모든 즐거움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다”고 했다. 흥미롭게도 영화 <아메리칸 뷰티>에서 주인공 레스터는 성공에 정신이 팔린 부인 캐롤린에게 “언제부터 인생의 즐거움을 잊기 시작했니?”라고 한다.
오늘날 윌리엄 제임스(미국 소설가 헨리 제임스의 형)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1906년 H. G. 웰즈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공의 여신을 지나치게 숭배한 나머지 무너져 가는 도덕적 관념에 대해 언급했다. ‘성공을 돈으로만 해석하는 썩어빠진 짓은 망국병’으로 규정했다. 그런 종류의 성공은 인간 정신을 갉아먹으며 실패를 의미하는데, 책 제목 「성공의 모순: 직장에서 성공이 삶의 실패를 의미할 때」가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미국 수도회 사제 토머스 머튼은 20세기 후반 작가로서 많은 부와 명예를 얻었다. 그는 미국에서 존 F. 케네디 다음으로 유명한 가톨릭 신자로 불리기도 했다. 머튼은 작가로서 성공에 대해 날카롭게 두 가지를 지적했다. “하나는 개인적인 것이다. 나는 부와 명예로서 성공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성공에서도 실패에 대한 엄청난 부담감을 느끼는 것은 미국이 직면해 있는 일이기도 하다. 머튼도 분명히 성공 중에 실패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성공이란 단어의 금전적 해석은 성공 추종자들을 영적으로 빈곤하게 만든다. 이것은 개인만이 겪는 게 아니라 회사나 단체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기저에 성공은 개인이 만드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환상이 지배적이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고난을 발생한다

성공과 실패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가? 먼저 강조할 점은 오늘날 사용되는 의미의 성공과 실패라는 단어가 성경에 없다는 사실이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번역한 어떤 영어 성경은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계획’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성경에 언급된 성공과 실패에 관한 주제는 성공과 실패로 인도하는 특정한 행동 유형이 있음을 말한다. 최종 결과는 대부분 하나님이 함께 하셨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러나 어느 성경 기자도 개인이 성공자 또는 실패자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성경이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 정반대이다. 특히 구약에서 번영과 고난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에 잘 요약되어 있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 30:19).
모세는 이 말씀에서 성공과 실패에 대한 구약의 이해를 정확히 담아내고 있다. 번영은 하나님이 복 주신 결과이며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하심 그리고 공급의 결과이다. 성경 기자들은 물질적 번영은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해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은 단순히 물질에 머물 뿐 풍요한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과의 단절은 고난을 불러온다. 그것은 분명히 저주 아래 사는 것이며 축복이 아니다. 실패란 하나님이 축복을 거두신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을 잃은 것이고 영적 위축이며 영혼이 작아진 것이다.

형통은 하나님이 주신 성공을 의미

구약의 중요 관점 중 하나는 이스라엘의 가장 성공적인 지도자 다윗의 말을 통해 마치 후렴처럼 반복된다. 다윗은 16세에 골리앗을 물매돌로 쓰러뜨릴 때부터 어떤 성공이든지 하나님의 임재와 복 주심에 의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윗에게조차 성공은 넘어지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스라엘 왕으로 높여진 그는 하나님과 교제를 잃고 자신의 예감을 따랐다. 그 결과 하나님 뜻에 불순종하는 행위를 하였고 하나님의 복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가정과 일에서 연속으로 불행이 닥쳐왔다. 다윗은 성공한 시점에서 실패한 것이다. 물질적으로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지만 그의 영혼과 심령은 상처받았고 가족도 상처받았다.
따라서 성공이란 말보다 ‘형통’이란 말이 더 도움이 된다. 구약에서 이와 관련된 히브리 단어는 65번 나온다. 의도한 것을 효과적으로 성취한다는 의미로도 쓰이며 알맞게 작동한다는 의미도 있다. 형통이란 단어는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공을 주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는 사람이나 사물을 효과적으로 움직이게 한다. 즉 생명의 창조자, 보존자이신 그분의 소망을 만족시켜 드리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평안

성공에 관한 성경의 또 다른 히브리어 단어는 ‘샬롬’이다. 무려 250번 이상 나온다. 샬롬이란 단어는 구약시대 못지 않게 지금도 흔히 인사로 사용한다. 샬롬은 인간이 그토록 갈망하고 하나님이 세상을 위해 작정하신 것들을 간직한다. 평화, 우정, 행복, 복지, 번영, 건강, 행운, 친절 그리고 구원 같은 기본적인 현실을 내포한다.
그래서 샬롬은 우리에게 성공에 대한 집착 대신 대안적인 목표를 제시한다. 모든 샬롬은 하나님에게서 오며 하나님은 샬롬의 근원이시다. 샬롬은 회복된 의로움이며 인간이 죄와 악을 행하는 한 샬롬의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샬롬을 발견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일상 생활과 직장, 가정에서 다른 사람들과 또는 우리에게 샬롬을 확립할 수 있는가? 여기서 성공이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성취할 대상이나 결과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먼저 어떤 사람이 되려 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하나님의 계획, 뜻, 말씀, 방법에 항상 열려 있는 사람이 된다.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평강의 왕이며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 주시는 샬롬이다. 평강의 왕은 온전한 인간이시며 하나님과 하나이신 분이다. 그분은 완전한 인격자로 우리가 나라마다 그분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면 그분은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신다. 개인 차원에서 평화란 성취를 의미한다. 평화롭게 죽는 것은 성취된 삶을 산 것이며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을 이루었다는 의미이다.
평화는 평안이며 걱정이 없는 상태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평화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완전하게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공이란 우리가 삶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 것,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달성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복 주심이 필요하다. 그보다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샬롬은 하나님의 은사이며 오직 그분의 임재를 통해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샬롬이시며 또한 샬롬을 전파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샬롬을 가능하게 하셨으며 십자가의 보혈로 샬롬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으로서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돌보고 계신다. 모세가 아론에게 제사장직을 물려줄 때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 주심의 기도가 있었으며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 6:24∼26).
하나님의 복, 보호, 임재, 은혜, 평강…. 이 모든 것이 성취를 이루며 완전함을 이룬다. 그것이 성공이다. 그 외 다른 어떤 것도 결국은 실패다.

 



하나님의 호감을 사는 비결

에프케이메카테크(FKM)의 심재수 사장(영락교회 집사)은 회사 대표직을 떠맡으면서 너무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려고 일천번제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새벽기도를 비롯해 모든 종류의 예배를 한 번의 예배로 계산해 드렸고 열 번의 예배마다 한 번씩 헌금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일천번제의 예배를 다 드리는 데 꼬박 3년이 걸렸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고 자기 회사와 거래처의 직원들에게 전도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목회자들을 도울 수 있게 해 주시라는 제목기도도 아울러 드렸습니다. IMF 위기 때 살던 집이 경매로 처분되는 아픔도 있었지만 1998년 그가 사령탑을 맡은 회사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업계 최하위였던 은행현금자동입출금기(ATM) 시장점유율이 1위를 다투게 된 것입니다. 그가 FKM 대표를 맡게 됐을 때 직원 80명, 매출액 30억 원에 머물렀던 사세는 2003년 현재 직원 250명, 매출액 750억 원으로 급증했습니다. 그는 끈질기게 기도하는 CEO입니다. 급하다고 몇 번 반짝 기도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매일 기도의 무릎을 꿇습니다. 그가 자랑하는 기도노트만 해도 15권이 넘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일천번제를 좋아하십니다. 일천 번이나 계속 반복해서 기도하고 예배드리는데 어찌 진실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간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백성을 잘 다스리도록 지혜를 주시라던 솔로몬의 일천번제 제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뒤흔들었고 전도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해 주시라던 엄호섭 엘림전도훈련원 원장의 일천번제 기도도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았지요. 계속되는 반복 속에 진실함이 있고 간절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수고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수고 위에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합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신12:7). 우리가 수고하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고 그래서 즐거운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즐거운 인생이 되려면 복이 임해야 합니다. 수고만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복을 받으려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호감을 사야 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호감을 삽니까. 첫째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일천번제를 드릴 정도로 진실하고 간절하면 하나님의 호감을 살 수 밖에 없겠지요. 둘째로 즐겁게 사는 사람입니다. 형편을 초월해서 즐겁게 사는 사람을 당할 재간이 없지요. 셋째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천하무적입니다. 우리가 기도와 말씀과 예배로 하나님께 집중하고 항상 즐겁게 살고 무조건 감사하면 하나님의 호감을 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커먼 구름처럼 우리 시대를 꽉 누르고 있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스트레스와 우울증입니다. 스트레스는 모든 질병의 근원이고 우울증에 안 걸리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이길 수 있습니까. 기도와 말씀과 예배로 하나님께 집중하고 항상 즐겁게 살고 무조건 감사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심령이 강해지고 우리의 육체가 강해져서 그 어떠한 스트레스와 우울증도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생에는 크고 작은 고난이 그치지 않고 불어닥칩니다. 그래서 온갖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시달리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 하나님이신들 호감을 안 가지시고 남인들 호감을 안 가지겠습니까.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시커먼 구름이라면 즐거움과 감사는 밝은 빛입니다. 밝은 빛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에 돈도 있습니다.

오징어잡이 배의 환한 불빛을 보고 오징어들이 몰려듭니다. 편의점의 환한 불빛을 보고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즐거움과 감사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환한 불빛입니다. 아니, 하나님도 즐거움과 감사가 있는 곳으로 그 얼굴을 돌리십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고 항상 기뻐하는 것은 항상 즐겁게 사는 것이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무조건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3가지는 돈을 많이 버는 비결일 뿐만 아니라 행복하고 멋지고 아름답고 존귀한 인생을 사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에 관하여 우리는 무어라 할 수 있을 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일 네가 어떤 일을 한다면,나는 너를 사랑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만일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우리들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행동이나 말이나 또는 외모나 지식, 그리고 우리의 성공이나 인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우리가 죽고 난후에도 존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존재하며 시간이나 환경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들이 어떤 행동을 하든 또는 무슨 말을 하든 하나님께서는 상관하지 않으시리라는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상관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건 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 관심없이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과 관계 맺기를 원하시며 그것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들도 하나님을 사랑해 주를 바라고 계십니다.
두려움없이 하나님과 친숙한 관계를 맺으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항상 더 많은 사랑을 받으리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교회(안상홍 증인회, 이하 안증회),

언론 통해 한기총 '정면도전'

최근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길자연) 이단대책위 부위원장인 진용식 목사(안산상록교회)에 대해 하나님의 교회(안상홍 증인회, 이하 안증회)가 음해 비방의 뜻이 농후한 보도자료를 교계에 배포, '한기총에 대한 정면도전' 양상을 보이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문제의 보도자료에서 하나님의 교회측은 "진용식 목사가 현재 부녀자 세 명을 강제 개종시키려 정신병원 등에 수십일씩 감금했다"고 주장하고, "진목사는 현재 감금 등 폭력행위로 재판에 회부 되었다"며 '진목사에게 문제가 있다'는 내용으로 일관, 의구심을 자아내게 했다.

특히 하나님의 교회측은 " 지난 5월 한기총 전대표회장 김기수 목사가 하나님의 교회 성도들의 아시안게임 서포터즈 공적으로 국민훈장을 받았던 사실이 있다"고 주장하고, "한기총의 부도덕성을 질타하는 여론의 화살을 피하기 위해 진목사를 내세웠다"며 '한기총은 부도덕한 단체이며, 진목사는 한기총이 하나님의 교회를 압박하기 위해 내세운 인물'이라는 '한기총 음모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진용식 목사는 "보도자료의 내용은 2년 전부터 지금까지 진행된 고소사건의 내용이어서 새로울 것이 없다"고 밝히고, "이미 무혐의 무죄판결을 선고 받은 일들에 대해 다시금 문제삼고 있는 것이며, 이번 일 역시 무죄 판결이 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하나님의 교회측은 아직 재판결과가 나오지 않은 시점에서 언론플레이를 함으로써 '진용식 목사를 공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재판결과가 나오기 전 비방성 글을 언론에 유포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또 "(한기총은) 특히 진용식목사의 개종활동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를 표명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비난한 바 있어, 검찰의 이번 결정으로 한기총은 오히려 범죄행위 옹호단체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는 식으로 한기총 공격의 수위를 높여 앞으로 한기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관심의 촛점이 되고 있다.

한편 기독교계 C신문은 진용식 목사를 비방하는 하나님의 교회측 보도자료를 여과없이 기사화 하면서 은근하게 한기총과 진용식 목사를 비방하고 하나님의 교회 옹호하는 듯한 내용의 글을 내보내 '교계신문인 C신문이 이단으로 규정된 하나님의 교회를 왜 감싸고 도는가?'라는 의구심을 갖게끔 만들고 있다.

진용식 목사는 "하나님의 교회 신도들이 전도함에 있어 C신문을 사용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전하고, "이단 들이 언론플레이를 함에 있어 오히려 교계 신문 몇몇이 도와주고 있다"며 "이러한 신문들을 보는 일반 성도들이 이를 통해 이단에 현혹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면, 교계신문들은 앞으로 경각심을 가져야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진용식 목사는 이어 "이단들이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는 요즘, 한국교회의 이단대처는 아직 많이 미흡하다"고 지적하고, "범 교단적으로 연대해 이단에 대처해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계 C신문에 대해서는 "최근 한기총 회의를 통해 기독교계 신문으로 인정해 주지 않기로 결의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로 말미암아 가정파탄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피해자'들과의 소송에 연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지난 6월 14일(토) 이후 약 3주간 토요일마다 하나님의 교회 앞에서 시위를 하는 피해자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등 큰 충돌이 있어왔다.

이 당시 하나님의 교회 관계자들은 시위 초 피해자들 뒤에서 진용식 목사의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함께 시위를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교회는 지난 2000년 11월 22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당시 회장 이만신)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받았다.

 

하나님은 없다?
고집이 센데다 더 없이 교만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가 즐겨하는 일이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GOD IS NO WHERE" (하나님은 아무데도 없다)
라는 자신의 주장을 지껄이는 일이었다.
하얀 종이를 보면 거기에 또 "GOD IS NO WHERE"를 갈겨쓰곤 했다. 그짓을 평생 동안 계속하고 다녔다.
그런 그에게 다정한 이웃이나 친구가 있을 턱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늙은이가 된 그는 마침내 자신의 외로운 생애를 마감하지 않으면 안되는 때에 이르렀다.
텅 빈 방에서 홀로 누워 죽음을 기다리다가 문득 자기가 아직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들었다.
정신이 가물거렸지만 평생동안 수 천번도 더 익숙하게 써 왔던 글귀이기에 겨우 그것을 써서 유언으로 남길수 있었다.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
며칠이 지난 후 동네 사람들이 그의 주검과 한 장의 종이를 발견하고는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남긴 유언 때문이었다.
"GOD IS NOW HERE!" (하나님은 지금 여기 계십니다).

 


하나님의 휴가
어린아이가 하나님께 한 장의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하나님, 오는 금요일에 우리는 두 주간의 휴가를 떠납니다. 그래서 교회를 빠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교회에 계시기 바랍니다. 참, 하나님은 언제 휴가 가시지요?" 어린이답게 순진한 데가 있어 참 좋다. 하나님을 교회에다 떼어놓고 휴가를 가고, 휴가 갔다 왔을 때 하나님께 서 교회에 계시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하고, 또 하나님도 휴가를 즐기시는 줄 아는 동심 그대로의 표현이다. 어린아이 생각은 어린아이에게 어울린다. 그런 생각이 어른에게 있다면 큰일이다.
신앙생활을 오래해 온 당신이 휴가 때에 하나님을 떼어놓고 가는 줄로 생각할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행위가 그것을 증명해야 하지 않겠느가? 열번 잡아떼도 휴가 떠난 다음에 하나님을 교회에 떼어놓고 나온 사람처럼 산다면 하나님을 더없이 얕보는 것이다. 어찌 휴가뿐 이랴. 교회 밖에서의 당신의 생활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을 떠나지 않으신다. 어디로 가서 하나님을 피하겠는가? 니체처럼 불신앙으로 볼 때 그것은 하나님의 지독한 간섭으로 보일 것이나 믿음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의 표현이다.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면
어느 날 밤 10시경, 세인트 루이스에 사는 젊은 그리스도인 사업 가에게 그의 사무실 옆에 있는 가구점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전화가 왔다. 그는 급히 현장으로 달려갔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36대의 소방차가 맹렬한 불길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속수무
책이었다. 불길은 화염에 휩싸인 건물의 옥상으로부터 하늘로 10미 터 높이로 치솟았으며, 그 사업가의 사무실과 맞붙은 벽에까지 번져가고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폭발성이 강한 화공약품이 보관되어 있는 그의 사무실로 들어가 급히 중요한 서루을 싼 뒤 무릎을 끓고 기도를 한 후, 모든 사태를 하나님께 맡기고 사무실을 나왔다. 다음 날 아침, 그가 사무실에 도착해보니 가구점 건물은 심하게 파손된 다른 건물들과 함께 완전히 타버렸다. 그러나 그의 사무실 창문으로부터 불과 2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까지 소방수들이 수백 리터의 물을 뿜어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무실은 전혀 피해가 없이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가보니 채광창을 통해 들어온 몇 방울의 물이 그가 견본품으로 받았던 소금 봉지에 떨어져 있을 뿐 다른 피해는 전혀 없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의 앞날을 보살펴주신다는 것,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우리의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할지라도 우리가 자신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그분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신다.

 

하나님께 쓴 편지

담임인 위버 선생님은 반 학생들에게 누구에게든지 감사하는 내용의 편지를 쓰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짐은 자기를 제일 사랑해주며. 자기를 위해서 가장 큰 일을 하셨던 분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짐은 드디어 연필을 쥐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안되어 짐과 다른 모든 반 친구들이 편지쓰기가 끝나자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에게 각자의 편지 내용을 소개하도록 했습니다. 학생들은 순서대로 일어나서 자기들이 쓴 편지를 읽었습니다.
끝으로, 짐이 읽을 차례가 되자 그는 일어서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저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저를 매우 사랑하신다는 사실도 압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으므로 저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늘 저와 동행해주세요. 제가 잘못을 행하지 않도록 지켜주세요. 사랑하는 짐으로부터” 짐이 앉았을 때 교실은 아주 조용해졌습니다.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편지를 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담임 선생님은 반 학생들의 편지에 대해 만족하셨으나 특별히 짐의 편지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준 선물들과 은혜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하기를 잊지 않고 있었어요. 그러나 짐의 편지는 하나님께도 우리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도록 잊지 않게 상기시켜주었어요. 성경은 '여호와께 감사함이 좋은 일 이다'(시92:1)말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면...

유명한 앗시시의 성자 프란시스에게 어느 날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이 때 프란시스는 겸손에 관해 참으로 아름다운 정의를 남겼습니다.
"겸손이란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네."
어느 수련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던 목사님이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면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사람, 한사람 대답을 합니다. 어떤 남학생의 차례가 되었는데 그의 대답을 듣고 모두가 웃었습니다. 그러나 그 학생의 대답이 얼마나 진리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을 때 나는... 그야말로 죽일 놈이죠."
인간과 인간과의 상대적인 비교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을 통해서 보았을 때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 하는 사실 앞에서 아무도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계십니다
동독 멕클렌부르크의 한 기독교 가정의 딸인 10세 된 소녀가 지방 공산당 학교에 다니 고 있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모두 일어서라고 해서 자신이 말하는 것을 따라하 라고 시켰다."하나님은 없다." 그 어린 그리스도인 소녀는 선생님께"그렇지만 저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선생님이 시키는 말을 따라하는 것을 거절했다. 그 선생 님은 "너는 오늘 저녁 집에가서'하나님은 없다'라는 문구를 50번 써오도록 해라"라고 아이 에게 시켰다. 어린아이는 집에 돌아가 그녀의 부모와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한 후에'하나님은 존재하십니다'라는 문구를 50번 썼다. 그녀의 선생님은그것을 읽고 크게 분노하면서"내일
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없다'라고 101번 써 갖고 와라. 만약 이렇게 계속 반항하면 내가 경찰에 가서 너와 너의 부모를 신고할 테다"라고 소리쳤다.이것은 빛의 세력과 어두움의 세력의 싸움이었다. 그 어린 소녀의 부모는 주님을 부인하기보다는 차라리 고난을 당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그 어린 소녀는 다시"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계시다"라고 101번을 썼다.
다음날 그 선생니은 그렇게 씌어있는 종이를 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치며 "좋아,이제 내가 경찰에 가서 너를 고발할 것인데 너의 하나님이 너를 도우시나 어디 두고 보자"라고 했다. 이 말을 하고 그 선생님은 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자전거를 타고 길 쪽으로 달려나갔다.그러나 그 선생님은 얼마가지 않아서 학교 정문을 지날 즈음 자전거에서 떨어졌다. 이윽 고 그 선생님은 심장이 멈취 땅 위에 죽은 채로 누워 있게 되었다. 우리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드릴때 그 어떤 사탄의 세력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서는 우리를 구원해주시든지 아니면 그의 이름을 위한 고난을 능히 감당할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계획과인간계획

미국으로 들어오는 배에 한 선교사가 타고 있었다. 그는 거의 40년 남짓한 긴 세월을 각지에 다니며 선교활동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간판도 없는 작은 방에서 피곤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배에는 이웃나라를 방문하고 돌 아오던 그 나라 대통령이 같이 타고 있었다. 배 안에는 당연히 서비스를 최 고로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배가 항구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이 환영을 하느라고 나와 있었고 사진기자들은 사진을 찍느라 여기저기서 후레쉬를 터뜨렸다. 왁자지껄한 환영객의 물결이 빠진 뒤를 따라서 내려서 선교사는 자신
이 묶을 호텔방에 힘없이 들어 왔다. 잠시후 그는 울면서 `하나님! 뭔가 공평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웃을 방문했던 대통령에게는 박수와 환영의 인파가 있었지만 40년 간이나 당신의 일을 했던 저를 맞아주는 환영객도 없었습니다.` 하고 기도를 했다.
그러자 허탈감과 슬픔에 젖어있던 선교사의 귀에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너는 아직 돌아온 것이 아니다` 라는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이렇듯이 하나님의 계획과 인간의 계획은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택하지 않는다

성 구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약 4:6)

만약 한 회사가 유능한 신입사원을 뽑기 위해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대상으로 인물 분석을 했다고 가정합시다. 회사가 이들의 학력, 경력, 적성을 종합해 컴퓨터에 분석을 의뢰했다면 아마 이런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의 출세만을 위해 사는 매우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를 청탁하려 하였습니다. 도마는 매사에 의심이 너무 많고 부정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성격이 급해서 일을 그르치고 실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드레는 너무나 내성적인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속도가 늦고 추진력이 떨어집니다. 야고보는 혁명가적인 기질이 있어서 회사로서는 채용하기에 좀 위험한 존재입니다. 세리 출신인 마태는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제자들 중 가장 이상적인 신입사원을 뽑는다면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학식과 경험을 겸비한 인물이며 실업가의 감각과 사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기독교 역사를 변화시킨 사람은 실격자로 판정난 제자들이었습니다. 세상적 판단으로 가장 유능한 가를 유다는 배신자로 낙인찍혔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기도에 응답하신다

한 가난한 가족이 생활이 어려워 작은 마을로 이사를 가게 됐다.그런데 일곱살 된 딸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곳에도 예배당이 있나요.주일학교에 못가면 어떻게 하지요” 어머니는 슬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곳은 아주 작은 마을이란다.아직 예배당이 없단다” 가족들이 열심히 이삿짐을 챙기는데 딸이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가보니 딸이 무릎을 꿇은채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저희는 교회가 없는 곳으로 이사를 간답니다.
하나님,안녕히 계세요” 어머니는 딸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함께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이 가족이 작은 마을로 이사를 간 지 두달만에 교회가 세워졌다.
진실한 기도는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하나님은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기도에 가장 먼저 응답하신다.기도하는 자녀를 둔 부모는 가정에 보화를 간직하고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까지 잃어버리면

기독교 방송 드라마에 맹인 목사인 윤인수 목사의 간증 드라마가 방송된 적이 있습니다. 중병으로 앓아 누워 있는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어린 소년 윤인수가 길거리에 나가 신문을 팔고 구두닦기를 시작했습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윤인수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윤인수는 열심을 일을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기뻐하며 그 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돈을 내놓았습니다.
십일조를 내자는 어머니의 말에 인수는 버럭 화를 내었습니다.
"십일조는 무슨 놈의 십일조인가, 하나님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나의 눈은 멀게 했고 엄마는 병들게 했고 공산당에게 쫓겨 피난민 신세가 되게 했고 재산도 다 빼앗기게 한그런 하나님께 무슨 놈의 십일조를 내라느냐"며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병든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손목을 꼬옥 쥔 다음 "인수야 고향 잃어버린 것도 한스럽고 집 잃어버린 것도 원통하고 건강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하나님까지 잃어버리고 믿음까지 잃어버리면 뭐가 남겠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는 건강한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지금 당장 하나님께로 돌아와 잃어버린 믿음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상황에 처한 모든 사람들에게 엄청난 교훈과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우리 모두는 치료받고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눈을 뜨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 심이니이다”-시 61:2,3.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한 여성이 하루는 눈이 아파 안과에 갔습니다. 의사는 “눈이 너무 지쳐 있군요. 당분간 휴식을 취하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업무가 바빠서 한 시도 쉴 수 없었던 그 여성은 다른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만약 일하시는 곳에서 산을 볼 수 있다면, 눈이 피로할 때마다 그곳을 바라다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눈의 피로가 풀릴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문제에만 시선을 두고 있다면 우리의 영적인 눈은 곧 피곤함에 지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안과 의사의 처방대로 산을 바라다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산이란 바로 하나님이 십니다. 우리가 지쳐 그 분을 바라볼 때 그 분은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와 함께 휴식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디교회 교인 가운데 양조장을 크게 짓고 개업 예배를 드리게 된 이가 있었습니다. 양조장 사업이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 설교 그리고 축사를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순서인 축도 시간이 되었습니다. 유명한 무디가 앞으로 나갔습니다. 무디는 두 손을 높이 들고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오! 하나님! 이 양조장이 오늘 예배드리고 내일 문을 열게 됩니다. 이 양조장 문이 열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문이 열리면 엄청난 술이 생산될 것입니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이 술을 마시고 타락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술을 먹고 취하여 제 정신이 아닐 것입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제발 오늘 밤 이 양조장 주인의 마음을 감동시켜주셔서 이 양조장 문이 내일 열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내용의 축복기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예배 후 축하 파티를 하려다가 모두 당황하여 돌아가 버렸습니다. 양조장 주인은 밤새 고민했습니다. 한숨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새벽에 그는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듯이 무엇인지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양조장 문을 열지 않기로 하나님 앞에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건물이 후에 무디 신학교가 되었습니다. 죄와 멀리하면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죄와 가까워지면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죄와 싸워야 합니다.


고난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당신이 괴로워할 때도 하나님은 계시는 걸까요? 그 질문의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당할 때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한가운데 계십니다. 질병과 비극과 재난과 기근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그 분은 그들의 고통을 함께 극복하기 위하여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가며 다가가십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 34:18,19). 고통의 와중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위로를 받아들여본 사람이라면 이 말씀이 진리임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나찌 독일의 악명 높은 수용소인 라벤스부르크에서 죄수로 지낸 바 있는, 유명한 코리 텐 붐 여사는 라벤스부르크의 악몽이 있은 이후 33년 동안 개인의 안식처를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85세의 고령이 되었을 무렵, 몇몇 친구들이 그녀를 위해 캘리포니아에 사랑스런 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그녀의 집에 머물면서 말했습니다. "코리, 너에게 이런 아름다운 처소를 주신 것을 보니 하나님은 선한 분이신가 봐?"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습니다. "내가 라벤스부르크에 있었을 때도 역시 하나님은 선한 분이셨어. "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갈급하라
성경: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잠30:2,3)

한 젊은이가 소크라테스를 찾아왔다.
"선생님, 저는 지혜와 학식을 원합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를 데리고 해변으로 가서 물이 허리에 찰 때까지 바닷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갑자기 그의 머리를 잡더니 물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한참 후 소크라테스는 그를 데려다 해변에 눕히고는 돌아왔습니다. 정신을 차린 젊은이가 소크라테스에게 다시 찾아와 이유를 묻자 대답 대신 그에게 되물었습니다. "물 속에 있을 때 당신이 가장 갈급 했던 게 무엇이었는가?"
"숨을 쉬고 싶었습니다." "자네가 물 속에서 공기를 원했던 것만큼이나 지혜와 학식을 원한다면 그걸 가르쳐 달라고 그 누구에게 물을 필요가 없을 걸세."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인간의 무능력과 무지를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아굴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잠언을 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굴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이 너무나 크시고 원대하시고 심오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너무도 미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무지를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람(겸손한자)을 들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 묵상: 당신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갈급한 심령을 가지고 있습니까?

 

합심기도로 하나님의 기적이..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 할지어다(시150:2)
어느 날 아침에 교회지도자훈련원에 참석한 미네소타주의 한 목사는 갑작스런 응급전화를 받게 되었다. 3살짜리 그의 아들이 풀장에 빠졌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그의 아내는 아이를 풀장에서 꺼내어 인공호흡을 시켰다. 그리고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우리 교회에 모인 4백 명의 목사들은 그 아이를 위하여 기도드렸다. 우리의 집회가 끝날 무렵에 그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나타났다. 그들 모 습을 보고 교회의 모든 사람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예배가 끄난 후 그 목사가 말했다. 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이의 폐속에 물이 찬 것을 엑스레이를 통해 발견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들 4백명의 합심기도로 인해 폐속의 물이 사라졌다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것에 기적이었어요.여러분과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라

이탈리아 앗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본래 부자 집에서 태어났으나,그리스도께로 회심하고 나서는 자기의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혈혈단신 떠돌아다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어느 날 프란체스코는 앗시시의 교외로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한센씨병 환자 한 사람이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 무심코 그 병자 앞을 쓰쳐 지나갔던 그는 그 환자가 생각나서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었다. 그래서 프란체스코는 다시 돌아가서 그 환자에게 가지고 있던 일체의 것을 주었다.
한센씨병 걸인은 황송하여 썩어 진물이 흐르는 손을 내밀었다. 그때 프란체스코는 그 환자의 손을 덥석 잡고 입을 맞췄다. 그 한센씨병 걸인은 더욱 황송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바로 겁없이 주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요일 4:7).

 


사람의 약속...하나님의 약속
어느 젊은이가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없고 아는 집도 없고 해서 주일학교를 다니던 기억을 더듬어 교회로 찾아가 잠을 잤습니다.
저녁이면 교회에서 자고 낮이면 구걸을 하기 때문에 이 친구의 별명은 성씨를 따서 "박거지"라고 불렀습니다.
교회에서 잠을 잤기 때문에 새벽기도는 자연히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서는 부흥집회가 있었고 교회를 짓기위하여 작정헌금을 하였습니다.
가만히 보니 자기 옆에 앉아계신 장로님이 1,500만원을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이 생각하기를 장로님은 교회에 일주일에 몇 번 나오시지도 않았으면서 1,500만원을 하였는데 나는 이곳에서 매일 잠을 잤으니 2,000만원 정도는 해야겠다고 2,000만원을 별 의무없이 적어냈습니다.
적어내고서는 한동안 까맟게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몇개월이 흐른후 새벽기도 때 갑자기 마음속에 충격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에 성령이 마음을 움직여 주신것입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청년은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그 작정한 것을 돌려줄 수는 없겠습니까?"
"글쎄 사람의 약속은 파기하거나 조정할 수는 있겠으나 하나님과의 약속은 지켜야지요."
그 청년은 한참을 깊이 생각한 후에 입을 열었습니다.
"목사님, 오늘부터 제가 고물을 주워 팔아 헌금을 하겟습니다.
작정한 헌금액이 되면 저에게 알려주십시요."
이 청년은 그날부터 고물을 주어 모았습니다.
그렇게 줍다보니 차츰 고물장사에 눈을 떠 1년 반만에 약속한 금액의 작정헌금을 드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이를 지켜보던 장로님이 이 청년을 후원하여 공부를 시켜주었고, 지금은 어느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기적
불신자인 학교 선생이 학생들에게 말했다. "성경의 기적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백성을 끌고 홍해를 건넜다고 하는데 홍해는 그 당시 깊이가 6인치밖에 안 되는 갈대밭이었습니다." 선생의 말이 끝나자 뒤에 앉은 학생 한 명이 "바로 그때 더 큰 기적이 있었으니,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기분이 언짢아진 선생이 "아니, 무슨 기적이 있었단 말이냐?"라고 묻자 학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이 애굽의 전군대를 6인치 깊이밖에 안 되는 갈대밭에 빠뜨려 죽게 하신 일이야말로 더 큰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서전

리로이드 죤 오길비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자서전"에 이렇게 썼습니다. "어느 날 나는 이비인후과 의사를 찾아갔을 때 그는 진찰하기 위해 먼저 나 의 귓속을 소제해 주었다. 그는 강력한 펌프를 사용하여 오랫동안 쌓였던 귓 밥을 빼내 주었다.
나는 의사에게 물었다. '이렇게 많은 귓밥을 담고서 듣는데 별 장애가 없 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군요.'
그랬더니 의사는 나에게 멋진 말을 해 주었다. '귓밥이 조금씩 쌓이고 쌓여서 떡이 되면 그때에는 청력장애가 옵니다. 그렇 게 되면 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크리스챤과 같아집니다.'" 그렇습니다.
크리스챤이 마음에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조금씩 외면하다 가 보면 필연코 양심이 무뎌져서 하나님의 말씀은 아예 귓전에 들리지 않게 된답니다.
그 결과 그는 영적인 귀머거리요 장님이 되어서 몸은 살아 있으나 영은 죽은 자와 같아집니다.

 

하나님을 보고자 한 왕
하나님을 보길 원하는 어떤 왕이 모든 현인들과 사제들을 위협했습니다. 자신에게 하나
님을 보여주지 못하는 자에게는 무거운 형벌을 내리겠다고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일
을 포기해 버렸을 때 왕에게 어떤 목동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왕을 궁전 밖의 정원으로 모
시고 나갔습니다. 정원에서 목동은 태양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태양을 좀 보십 시오." 왕은 고개를 올렸다가 금방 내리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서 햇빛을 가리며 소리쳤습니다. "지금 내 눈을 멀게 하려고 하느냐?"
그러자 목동은 말했습니다. "임금님, 저 태양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저 태양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희미하게 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 태양도
바라보실 수 없으시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성 구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터하시리라 (마 6:33)

기독교 마리아 자매회는 1947년 3월 마더 바실레아와 마더 마티리아에 의해 창설되었다. 이 공동체는 독일 복음주의 루터교회에 속한 개신교 여성독신 공동체이며, 현재 5개 대륙 20여 개 지역에 서 200여 명의 자매들이 심기고 있다. 본부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의 다름스타트에 있으며, 호주, 이스라엘 미국에 지부가 있고, 90개의 언어로 소책자들을 출판하여 다섯 개의 대륙에 배포하는 한편, 라디오와 텔레비전 프로그램들도 23개 언어로 방송되고 있다. 기독교 마리아 자매회는 모든 쓸 것을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믿음의 선교를 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신성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현대 문화와 뉴에이지 등에 맞서 기독교를 옹호하는 문화 사역을 하기도 했다 이곳은 개신교 영성을 추구하는 순례자들이라면 프랑스의 떼제 공동체와 함께 꼭 방문하게 되는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이다. 이 단체의 창립자인 마더 바실레아는 독일과 유대인들 간의 화해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녀는 유대인들에게 독일인이 행한 유대 말살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하며 깊은 상처의 뿌리를 치유하는데 삶을 헌신했다.

 


모든 발명은 하나님의 계시
미국의 유명한 전산 기계 발명가 사무엘 모리스 박사는 위대한 전신기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절망적인 벽에 부딪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빛을 보여 주었다고 고백하면서 "모든 발명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라고 말했다. 발명품이 완성되는 순간 발명자의 최초의 메시지는 "하나민의 역사는 놀랍다."였다. 출애굽기 31장에 보면 하나님이 브사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가지 재주로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출 31:1-11) 그 밖에 목공, 보석 공업, 금속 공학적인 지식을 계시해 주었다.

 

실수했을 때 만나주시는 하나님
1929년, 캘리포니아 대학의 축구 선수인 로이 리글즈는 장미 컵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을 했다.
전반전이 중반에 접어들었을 때 그는 상대편 조오지아 공대가 놓친 공을 가로채서 고울을 향해 갔는데 방향이 틀렸다. 그때 로이의 동료 선수인 베니 좀이 그를 뒤쫓았다. 리글즈가 상대편을 위해 득점을 하기 바로 전에 베니는 리글즈를 쓰러뜨렸다. 조오지아 공대는 고울 라인 지점에서 찬 공을 빼앗아 2점을 얻어냈다.
전반전이 끝나고 탈의실에 들어간 리글즈는 구석에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프라이스 코치는 침묵을 지키며 후반전을 위한 격려의 말도 하지 않았다. 선수들이 후반전에 나갈 채비를 할 때 그는 단지 “전반전을 뛴 선수 전원이 후반전에도 뛴다”라고 말했다.
프라이스 코치는 로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로이, 일어나서 가라. 경기는 반밖에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로이 리글즈는 다시 경기를 하러 나갔고 후에 조오지아 공대 선수들이 말하기를 그는 그때까지 그들이 본 어느 선수보다도 열심히 뛰었다고 한다. 제이 하돈 로빈슨 박사는 「캠퍼스 생활」이란 잡지에서 이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면 나는 ‘대단한 코치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나서 내가 살아오면서 저지른 모든 큰 실수와 항상 기꺼이 나를 용서하시고 다시 해볼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한다.”

 

하나님의 각본
역사의 각본은 다 쓰여져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가가 쓴 것이 아닙니다. 심리학자나 사회학자가 쓴 것이 아닙니다. 경제학자나 군사·정치 평론가가 쓴 것이 아닙니다. 인간 역사의 비밀한 열쇠는 그리스도가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이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통치하고 계십니다. 역사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개인 개인의 운명도 그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의 것입니다. 그 분이 창조했습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그의 허락 없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습니다. 이 역사는 잠정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국가의 역사, 개인의 역사도 모두 하나님의 자본에 의해서 그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람은 역사 속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모략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우리의 이성으로 얼마든지 반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계나 노예가 아니라고 하면서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창조자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인간의 운명을 주관하십니다.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8,9)

 

헬렌 켈러와 하나님

삼중 장애인 헬렌켈러(Helen A. Keller)의 선생님이었던 설리반은 모든 것을 다 가르치고 나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가르쳐야 했다.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가르칠 것인가. 이 어려운 문제를 놓고 깊이 고민하다가 드디어 하나의 방법을 찾아냈다. 선생님은 이미 나이가 많은 헬렌 켈러였지만, 어머니의 젖가슴에 손을 대게 했다. 그리고 몇 마디의 설명을 덧붙이려고 하자 헬렌 켈러는 말했다. "오, 하나님! 내가 벌써 알고 있습니다."


 

기사를 행하시는 하나님

본문 : 시편 9;2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이 시편의 제목은 ‘영장으로 뭇랍벤에 맞춘 노래’라는 감사시입니다. 여기에서 ‘뭇랍벤’은 ‘아들의 사망’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아들의 죽음에 감사하는 시를 쓴 이유는 자신의 아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 갈대사본을 보면 ‘장막 사이로 나간 아들의 사망’으로 다윗이 죽인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승리한 후 영장에게 준 노래가 시편 9편입니다.

1. 찬양(1절)

그는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라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찬양의 모든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첫째 찬양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며,둘째 찬양의 자세는 ‘전심’으로 하는 것이며,셋째 찬양의 감정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며,넷째 찬양의 근거는 주의 모든 기사입니다.

2. 찬양의 이유(3∼6절)

여기에서 나타난 찬양의 이유는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들 때문입니다. 원수들이 물러가게 되었고,물러가다가 모두 넘어져 멸망하게 되었고,주님이 내 편을 들어 변호해주셨으며,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해주셨고,주를 거부하고 대적하는 열방민족들을 꾸짖으셨으며,악인을 멸절하셨고,악인의 이름을 영영 지워버리셨고,원수의 성읍들을 다 무너뜨리셨습니다.

3. 기사를 행하시는 하나님(2절)

이 모든 일은 인간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이 이루셨습니다. 칼과 창으로 오는 그는 키가 여섯 규빗(큐빗) 한뼘이나 되는 거구이며,머리에는 놋투구,몸에는 어전갑,갑옷의 중수는 놋 5000세겔,다리는 놋경갑,어깨사이는 놋단창,창자루는 베틀채 같으며 창날은 철 600세겔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거구를 향해 물맷돌로 대적하는 자를 승리하게 하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기사를 행하시는 하나님이며 그 기사를 통해 찬송받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
헨리.모어하우스는 자기가 짊어져야할 어려운 일로 말미암아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그는 아내에게줄 보퉁이를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층계 아래에 있던 딸 미니에게 [어머니는 어디있니?]하고 묻자, 소아마비로 기동을 못하는 딸이 휠체어 안에서 대답했습니다. [2층에요. 그 보퉁이 어머니께 가져 갈거죠. 나로 가져가게 해주세요] [너는 갖고 갈 수 없지 않니?] 아버지가 그만 이렇게 말하자 딸은 말했습니다. [내가 보퉁이를 들고 아버지가 나를 이층 엄마 있는데로 데려가면 되잖아요]
[아아, 그렇군] 그는 그때 구름이 걷힌 듯이 깨달았습니다. [이 모어하우스가 아니다. 하나님이 해주신다. 이 짐을 안은채로 나를 예수께서 짊어져 주시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에게 무거운 짐이 있읍니까? 세상의괴로움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고 부르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당신의 심령의 휴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성 구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 3:23)
지구촌의 식탁은 지금 광우병의 공포에 떨고 있다 초원의 풀을 먹고 자라도록 창조된 소에게 사람들이 동물사료를 먹임으로써 발병한 광우병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그 쇠고기를 사람이 먹으면 광우병에 걸린 소와 유사한 증세를 보이다가 사망한다. 사랑의 대화가 오가는 식탁이 걱정과 근심의 자리로 바뀌게 된 비극적인 현실의 주범은 사람이다. 최근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자크 디우 사무총장은 소의 뼈가 섞인 동물사료가 유럽으로부터 100여 개 이상의 국가에 수출됐다고 공식 발표했고, 한국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더구나 수입 쇠고기를 즐겨먹는 우리로서는 간과할 일이 아닌데, 광우병은 전신 마비와 시력상실에 이어 뇌에 구멍이 뚫려 죽는 병이다. 사망한 후에야 병인이 확인된다는 사실도 공포스럽다 광우병의 인자는 '프리온'인데 이것은 100도 이상의 고열에도 소멸되지 않을 정도로 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다. 아직 치료법이 개발되지 않아 이 병에 걸리면 100% 사망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연의 관리자로 위임받은 인간이 본연의 직분을 망각하고 인간의 욕심을 위해 초식동물에게 동물성 사료를 먹임으로써 무서운 재앙이 초래되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와 명령에 그대로 순종치 않았을 때 얼마나 무서운 재앙이 우리에게 다가오는지 를 광우병은 시사해 주고 있다.

 


공의로 갚아주시는 하나님
본문: 예레미야 39장 15-18절
오늘 본문에는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시드기야 왕에게 간청하여 예레미야의 목숨을 살려 준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하나님이 구원을 약속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를 배웁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몇 가지 살펴볼까요?

1. 항상 의롭고 양심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 내가 가는 길이 소수만이 가는 길이라도 그 길이 정말 의로운 길이라면 의로운 소수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배척하여 죽이려고 할 때 에벳멜렉은 예레미야를 살리는 극소수의 편에 섭니다. 소수가 가는 길에 동참하려면 어렵기에 솔직히 힘 좀 써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소수의 의로운 길로 가려면 갈등도 각오해야 하고, 청빈도 각오해야 하고, 고독도 각오해야 하고, 자기 부정의 아픔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소수가 가는 길이라도 그 길이 정말 선한 길이라면 그 길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진정 복된 사람일 것입니다.
시편 1편에는 복 있는 사람의 정의가 나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에벳멜렉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복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에벳멜렉은 무슨 대단히 큰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보기에 예레미야에게 한 방백들의 조치는 불법적인 태도라고 생각했기에 그는 예레미야를 살리는 길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양심에 충실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자기 양심에 충실하게 살면 됩니다.
보태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양심적으로 살면 그것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비방하는 사람들로 부끄럽게 하실 것입니다(벧전 3:16). 우리가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것은 '불의의 자리'이지 '소수의 자리'가 아닙니다.

2. 선을 행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보상을 해 주십니다.
에벳멜렉이 복을 염두에 두고 예레미야를 살려준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레미야를 살려 준 덕택에 복된 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선으로 행하는 자의 선행을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베드로전서 3장 13-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최선을 다해 선행을 해야 합니다.
구로공단에 있는 어떤 대기업 회장으로 있는 장로님은
일년 동안 성경공부에 개근하고 성경도 많이 읽습니다.
그런데 그 구로공단에서 가장 봉급을 적게 주는 분으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지탄의 대상이 되다가
공단 내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 공장이 가장 시끄럽습니다. 평소에 선을 심지 않는 사람은 어려움을 만나면 외로워집니다. 그러나 평소에 많은 것을 심은 사람은 보통 때에도 적절한 보상이 있지만 특히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는 특별한 돌보심과 보상이 있게 됩니다. LA 폭동 때 평소에 친절했던 가게는 흑인이 스스로 지켜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선을 행하는 자가 될 뿐만 아니라
선을 선으로 갚을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메시지가 예레미야를 통해서 에벳멜렉에게 온 것은 예레미야에게 그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있었다는 증거도 됩니다.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면 감사하게 받고 자기도 최선을 다해 도우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은혜를 항상 잊지 말고 사십시오.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도움 받은 것도 항상 잊지 말고 사십시오. 우리는 선을 선으로 갚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 차원 더 나아가기를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선을 선으로 갚아야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우리 믿은 사람들은 악을 선으로 갚는 모습까지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에 정말 아름다운 말씀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가장 깊고 아름다운 영성은 바로 악을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이와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미운 사람에게 떡 하나 더 주라..."
미운 사람과 싸우지 않고 상대방을 이기라는 영적 병법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매력적인 모습은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3. 항상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느끼며 사십시오.
하나님의 보상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손길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있어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렇게 살면 불평할 것도 없고,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불평과 원망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유익이 된다면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한 점도 유익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한 점도 유익이 없을 수 있습니까? 정말 없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불평과 원망은 정말 시간 낭비요, 인생 낭비요, 정말 내 인생에 하나도 보탬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평과 원망이 마음 속에 생기려고 하면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간섭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생각하지 않으면 인간이 연약한지라 불평과 원망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간섭하신다고 생각하면
기도하고 하나님의 창조적 손길을 기대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에게 한가지 탁월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의 처지와 사정을 보면 정말 할 말이 많을 텐데...
부잣집 앞에서 매일 연락하는 것을 보면서도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천국에 가서도 말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부자는 지옥에 가서도 얼마나 말이 많습니까?
오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말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탓을 많이 하고, 불평과 원망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나사로보다 훨씬 형편이 나은 데도 그렇습니다.
왜 나사로가 말이 없었을까요?
하나님의 섭리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섭리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삶, 나의 인생에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려운 세상에서도 능히 그 환경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생각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자비로운 하나님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바로 전에 그의 보좌 주위에 있는 천사들과 의논을 하셨다고 한다. 정의의 천사는 사람을 만들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사람을 만들면 그가 동료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사악을 자행할 것이고, 또 사람은 강퍅하고 잔인하고 부정직하여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진리의 천사가 반발하며 “사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거짓되고, 그의 형제들을 속일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 당신도 속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거룩의 천사도 “사람을 절대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의 이름을 더럽힐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비의 천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저희의 하늘의 아버지, 사람을 만드시옵소서. 그가 죄를 짓고 정의와 진리와 거룩의 길에서 멀어질 때, 제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감싸고 사랑스런 음성으로 그에게 말하여 다시 당신께 데리고 오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그렇다. 자비의 천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이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허물을 덮어주시고, 실수를 용서해주신다.

 

기적의 하나님은 당신을 사용하신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 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25:1)
어느 주일, 예배 후 나는 타지역에서 예배보로 온 한 가족과 악수를 나누었다.
"목사님.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셨어요."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그때 다섯 살도 채 안되어 보이는 어린아들이 어머니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그래요.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했어요."
그 가족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나는 어린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지.하나님은 너를 위한 계획을 갖고 계시단다."
그러자 소년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를 위한?... 나를 위한?"
"그럼, 너를 인한 것이지."
내 말에 소년은 어머니를 보고 말했다.
"엄마, 나를 위한 것이래!"
소년은 문을 향해 나가면서도 어머니를 올려다 보며 '나를 위한...'하고 연신 되풀이 말하는 것이었다.

'나를 위한...' 이 말로 당신은 오늘 전혀 낯선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다. 당신은 우연한 만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그들의 인생에 기적 을 안겨주길 원하신다. 당신의 전도로 그들의 인생이 변화될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기 위하여 당신을 또 사용하신다.


하나님이 택하신 까닭
한동안 프란체스코를 진지하게 바라보던 마쎄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어째서 그럽니까? 당신은 어째서 그럽니까?” 마쎄오는 마치 프란체스코를 놀리기라도 하듯 그 말을 반복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서 조용히 물었습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마쎄오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용모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높은 학식도 없으며, 귀족의 혈통도 아닌데, 어째서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듣기를 바라며, 당신에게 순종하고자 하며, 또 당신과 함께 있기를 바라느냐는 것입니다. 어째서 세상 사람들은 당신을 따르려고 애쓰는 거지요?” 프란체스코는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명상에 잠긴 뒤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대답했습니다.
“그 이유는 가장 높이 계신 분의 시선이 그런 일을 하고자 하셨기 때문이오. 그분은 모든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들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계신다오. 그리고 그분의 거룩한 눈은 죄인 가운데서도 더 이상 죄인일 수 없는 작은 사람, 이보다 더 자격이 없고 이보다 더 죄인일 수 없는 사람을 찾을 수 없으셨던 것이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나를 택하신 것이오. 그분은 나보다 더 천한 인간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를 택하셨고, 그분은 이 세상의 고귀한 신분, 위엄, 강함, 미모, 그리고 학식을 깨뜨리시기 위해서 이렇게 미천한 나를 택하신 것이라오.”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

성 구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달리다굼 선교회 김상섭 목사님은 본 선교회를 만들게 된 계기가 자신의 눈으로 본 장애인의 비참한 생활 때문이었다고 한다. 85년부터 88년까지 수원의 한 고등학교에서 교목으로 재직하던 김목사는 86년 2월 봄방학 때 학생들과 함께 강남시립병원 봉사를 갔다가 행려병자 병동을 돌아봤다고 한다. 욕창이 나고 대소변이 몸에 묻어 있는 장애인의 비참한 모습은 자신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자비를 털어 이들에게 생필품을 사주고 보호자 자격으로 5명의 장애인에게 신림동 월세방을 선사하기도 하셨다. 장애인들의 아픔을 생각하며 잠 못 이룬 김목사는 87년 겨울방학 때 경기도 오산리 기도원에 들어가 20여 일 금식기도를 했다. 여기서 그는 장애인과 함께 하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내려오면서 달리다굼 선교회를 창립하겠다고 마음을 굳히셨다고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본문: 잠21:1-6
저자는 20장 전체에서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서 실망하지 말고 오직 선행과 의를 계속적으로 추구해 나가도록 권고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 장에서는 악인과 의인의 행실의 특징을 대조적으로 비교, 서술함으로써 실제적인 삶 속에서 지혜자가 취해야 할 삶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의와 공평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윌리암 바클레이는 '의'란 사람과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져야 할 것을 드리는 것이라고 정의 합니다. 윤동주의 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마음과 행동'도 어떤 의미에서 이것과 일맥상통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자연히 공평이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공평을 무조건적 평등, 차별없는 평등으로 이해하는데, 이것은 무리한 이해라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공평은 '정의'를 전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마땅히 받아야할 사람이 받고 주어야 할 사람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 공평과 의를 상실했을 때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것도 義와 信과 仁의 실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스라엘 평민들과 더 깊은 유대 관계를 가지고 그들을 사랑과 공평으로 지도하길 원하셨고 지도자로서의 모범을 보이시길 원하셨지만 그들은 개인적인 기득권을 누리는데 만족하며 즐거워하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공동체의 비극이 시작됨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2.겸손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자는 그의 교만에 의하여 자신의 도덕적 눈멂을 선언합니다. 그의 눈이 높은 것은 그의 안에 있는 빛이 어두워졌다는 것이고, 자신의 실제 모습을 전혀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이 계실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여기에는 죄에 대한 고백도 없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순종도 없습니다.

3.거짓없는 사람입니다.
하나의 거짓은 다른 거짓을 낳으며, 작은 거짓의 성공은 또 다른 거짓을 연속적으로 낳게 되고, 더 큰 거짓으로 인도하여 물방울이 점점 커지나 막이 엷어져 터지듯이 터지고 나면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이러한 자들은 죽음을 구합니다. 속이는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배웁니다. 그것을 당한 사람은 보복을 합니다. 그는 상대방에게 자기가 당한것과 동일한 또는 그 이상의 속임수를 쓰지 않는 한 만족을 모릅니다. 성공은 수많은 모방자를 만들어 냅니다. 속이고 속는 것이 역전되어 속은 자가 속이고 속인 자는 속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하며, 의와 공평을 행하고, 겸손하고, 거짓을 행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축복이 있습니다.

 


성(性)도 하나님 선물…절제 필요

거짓말 대회가 열렸다. 세상에서 거짓말을 가장 잘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기로 했다. 온갖 거짓말이 난무했지만 일등은 "나는 거짓말을 할 줄 모릅니다"라고 진실을 고백한 사람이 최고의 거짓말장이로 뽑혔다. 타락한 죄성을 유전처럼 이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한 본성을 간파한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거짓말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듯이 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도 드물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성문화가 폐쇄적이며 은폐시키려는 경향 때문에 성욕이 왕성한 젊은이들에게 많은 혼란을 안겨주고 있다. 언젠가 남학생의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쉬 피로하며 집중이 잘 안되고 얼굴이 달아오르며 코피가 자주 나서 온갖 종합 검진을 다해봤지만 원인 불명이요 약을 먹어도 치료가 안 된다고 했다. 동행한 어머니는 아이가 허약해서 공부에 지쳤다고 강조를 했지만 이런 경우 단둘이 터놓고 이야기를 해보면 대다수가 지나친 자위행위로 인한 정기 손상에 의한 질병으로 판명된다. 자위행위란 성 파트너 없이 자신의 생식기나 신체의 민감한 부분인 성감대를 만져 성적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자위행위는 유아기부터 시작되는 자연스러운 성장과정의 일부이며 남녀 구별 없는 인류의 자연 발생적 현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자위행위를 습관적으로 하는 상당수 학생들이 죄의식을 느끼게 되며 초조함과 자책감에 빠져서 심리적인 공황상태에 몰입하게 된다. 성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더럽혀지지 않도록 절제의 은사가 필요한 때이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자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마 12:25.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약 4:1,2.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높이 찬양하기 위해 모인 합창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같은 노래를 부르지 않고 각기 다른 노래들을 불러대어 합창을 망쳐 버리는 경우를 봅니다. 당신은 당신이 속해 있는 그리스도인 모임에서 어떤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까 ? 좀더 우월해 보이기 위해 다른 사람과는 다른 노래를 부르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
아일랜드의 서해안 지방에서 고기를 낚는 어부들은 "키러"라고 불리는 특이한 구조의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다고 합니다. 그 배는 마치 한 사람이 노를 젓는 것처럼 모든 선원들이 한 마음이 되어 노를 저어야 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키러'에 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마음이 되어 저 천국을 향해 노를 저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모임이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길 원합니다."
당신이 속해 있는 모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는 곳에서는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성품

몇년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을 때, 그 얼마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반대해서 싸우고 있는 아프리카 국민 협회(African NationalCongress)와 접촉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던 한 흑인 그리스도인을 만났습니다.
몇달 동안 그는 심문을 받고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갖은 고문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이 사람은 반죽음 상태로 병원 밖의 거리에 버려졌습니다. 내 친구 중의 한 사람이 이 사실을 조사한 결과, 어처구니없게도 이 흑인 그리스도인을 심문했던 책임자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실제로 어떤 확실한 근거도 없이 소문만 듣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형제를 때리고 고문하도록 도운 사람입니다.
나는 이 흑인 그리스도인의 집에서 그와 함께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고충과 그 상황에 저질러진 비인간성을 마음으로부터 해결하고 백인 형제를 용서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는 깊이 흐느꼈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인간의 속성과는 반대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속성과는 완전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살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초인간적인 사랑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 이러한 성품들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열매를 원한다면 그분이 우리의 삶에서 열심히 일하시도록 허락하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택하지 않는다
만약 한 회사가 유능한 신입사원을 뽑기 위해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대상으로 인물분석을 했다고 가정하자.회사가 이들의 학력 경력 적성을 종합해 컴퓨터에 분석을 의뢰했다면 아마 이런 결과가 나왔을 지도 모른다.

“야고보와 요한은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다.도마는 매사에 의심이 많고 부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다.베드로는 성격이 급해서 실수할 가능성이 높다.안드레는 너무 내성적이어서 매사에 추진력이 떨어진다.야고보는 혁명가적인 기질이 있어 위험한 존재다.세리 출신 마태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제자들 중 적격자는 가룟 유다뿐이다.그는 학식과 경험을 겸비한 인물이며 실업가의 감각과 사교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변화시킨 사람은 실격자로 판정난 제자들이었다.세상적 판단으로 가장 유능한 가룟 유다는 배신자로 낙인찍혔다.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택하지 않는다.우리의 겸손과 부족함을 들어 사용하신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예레미아 5:1)


지금 정치개혁을 하라는 국민의 소리가 드높다. 낙천, 낙선운동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시민운동은 낡고 부패하고 줜워주의적인 정치를 타파하고 깨끗하고 민주적인 정치, 저비용 고효율의 정치를 하라는 국민의 요구요, 그것은 이제 시대의 대세가 되고 있다.
국민의 그런 요구를 받고 있는 사람이 누군가. 바로 정치권이요, 그 주에서도 정치지도자들이다. 그들이 답해야 할 당사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을 부르는 국민의 소리는 ㅣ높건만 정작 답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시민운동에 대하 지도자들은 공감을 표가혹 취지 수용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아직은 그럼 말만 있을 분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고치겠다는 방안을 내놓는 사람은 없다.
자기들이 공천을 주고 감투를 씌원준 정치인들이 부패, 저질, 불성실 등을로 시민운동의 배척대상이 되고 있는 사실 자체에 대하 보스들은 스스로 낯을 붉히고 책임을 통감해야 할텐데, 이런 반성의 빛을 보이는 사람도 없다.
정치지도자들은 시민운동을 이용하거나 회피하려 해서는 안 된다. 국민하나의 위선이요, 이중적 형태이다. 지도자란 희생과 헌신을 통해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먼저 하나님께 드려야

지금부터 약 3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인데 방학때가 되어 할머니가 계신 시골로 가게 되었읍니다.
그곳에 가까운 도회지까지 고속 버스를 타고 갔었는데 막상 할머니가 계신 지역까지 가는 버스는 2시만마다 있더라구요 그래서 소위 `빵차`라는 걸 타고 갔었읍니다. `빵차`는 빵집에서 5,000원 정도의 빵을 사는 대신 그 빵집에서 집까지 봉고차로 데려다 주는데
그 봉고차를 말하는 것이예요. 하옇튼 맛있게 보이는(울긋 불긋한)빵을 골라서 집까지 잘왔읍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집에와서 할머니랑 같이 빵을 처음에 먹어본 순간
맛이 영 아니더라구요.
빵집에서 볼 때는 제리하며 건포도 크림 별게 별게 다들어 있구나 하며
좋아했는데 막상 먹어보니 역겨워서 못 먹겠더라구요 그래서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에게는 무척 죄송했고 내가 갔다 버리겠다고 했읍니다(할머니께서는 나중에라도 먹겠다고 싸두셨습니다)
그 맛이 없었던 것은 찌끄레기 였기 때문이었읍니다.
비닐을 벗겨서 보니까 여러 빵조각을 뭉쳐 놨었고 다른 여러 맛있게 보이던 것들도 다른 빵을 만들고 남은 것들을 대중없이 꼽아 논 것 같았읍니다
이럴줄 알았으면 곰보빵이라도 신선한 걸로 사오는 건데... 그렇구나 주님도 처음 것을 기쁘게 받으시겠지. 우리가 좋은 시절 다 지내고 하고싶은 하면서 보내다가 나중에 주님과
교제를 하려고 한다면 얼마나 부끄럽고 염치없는 일일까요. 사실 그때까지 대학 1학년 생활을 일락에 빠져 지냈기때문에 무척 후회가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글을 보고 계신 고3 학생들이 있다면 저는 진정 권면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대학에 들어가거나 사회생활을 시작하거나 세상적인 놀음에 관심두지 말고 놀라우신 그분의 사랑에 순복하여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처음시간을 드린다면 주님께서 더 큰 축복을 해 주실 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성탄준비

기약이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다(갈4:4). 구약성서의 페이지 마다 이스라엘의 숨결마다 메시야 대망으로 꽉 차 있었다. 구약 성서에는 456개의 예수 예언이 있다고 한
다.
하나님은 정치적으로 로마제국의 문화와 언어를 통일시켜 예수의 복음전도의 세계화를 준비하셨다. 로마의 주민 세 사람 중 두 명은 노예였던 당시 사회는 신음속에 구세주 대망이 팽배했다.
고대세계는 유대나라에서 세계의 지배자이며 구원자인 왕이 난다는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고 헬라의 극작가들은 인간의 죄와 고통과 죽음과 저주를 풀어주는 구속신에 대해서
말했고, 플라톤은 로고스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사랑의 화신에 대해서 석가는 또 다른 불타에 대해서 중국은 서방에 성인이 난다는 통념과 도성인신 사상이 있었고 세계의 민속
신앙들도 소박한 구세주 사상이 있었다.
동방박사들은 세계의 윤리와 철학과 모든 종교를 대표한 상징적 인물들이었다.

 


공평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 는데 어떤 사람은 부자집에서 태어나 호의호식하며 살고, 어떤 사람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평생토록 고생만 하다가 삶을 마감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태어나 할짓 못할짓 다하며 사는데,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터 남의 도움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장애인인가? 어찌 이것을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라고 말 할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평생토록 찾아 헤매는 것은 "행복" 입니다. 행복하고 싶어서 돈도 벌고 결혼도 하고 지위도 얻고 지식을 쌓습니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해 보면 "행복"은 돈이나 지위나 물질이나 지식으로만 얻는것이 아니라는것을 알게 됩니다. 가난하고 장애인으로 태어났어도 행복할 수 있고, 천하를 다 얻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행복하지 않을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행복을 돈이나 물질로만 얻을 수있다면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물질과는 상관없이 누구든 행복을 얻을 수 있게 하셨으니 그것이 공평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나님 믿고 의지하지만 외로움 많이 느껴요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고는 있지만 살아가는 세상속에서 외로움의 상처가 깊습니다.믿음으로 극복하려고 하지만 마음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외로움의 상처를 치료하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정받고 싶은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자기를 적극적으로 실현하고 타인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는 누구에게나 깃들여 있다.이런 자기실현의 욕구가 분출되는 현대사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심리적 증상이 바로 외로움의 문제이다.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과 텅빈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자아가 흔들리고 있는 취약한 자아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심리학자들은 튼튼하고 응집력이 강한 자아 생성에 어린시절의 경험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본다.
특히 6세 이전의 가정에서의 경험이 가장 소중한 자원이 된다고 말한다.이때 가정에서 부모와 식구로부터 충분한 사랑의 산소를 공급받고 자랐으면 응집력이 강한 튼튼한 자아가 형성돼 자기중심을 지닌 사람이 되는 것이다.타인의 인정이나 칭찬에 굶주릴 필요가 없고 혼자 있어도 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경험들이 칭찬받지 못하고 늘 다른 형제들과 비교되고 부모의 권위적 훈계와 고함소리 가운데 자란 사람들은 자기 존중감을 체험해보지 못하고 굶주린 자아를 형성,취약한 자아 구조를 지니게 된다.늘 누군가의 인정과 칭찬이 필요하고 곁에 사람이 있어도 항상 외롭다.
신앙생활을 해도 언제나 자신의 굶주린 자아를 채우는 목적으로 하나님과 타인들을 활용하기 때문에 진정한 믿음의 기반에 선 참된 만남의 관계를 경험하지 못한다.어린시절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며 칭찬에 인색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의 상처입은 마음이 바로 외로움의 주된 원인이다.인간의 모든 심리적 상처들은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치유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진정한 사랑의 체험만이 텅빈 마음을 채울 수 있다.
신앙공동체에서의 이런 체험도 필수적이지만 좀더 전문적인 상담의 도움을 받아 보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외로움을 그때그때 임시 방편으로 채우려는 무분별하고 이기적인 인간관계에서 탈피하려는 자신의 노력이다.자신의 외로움에 대한 민감한 느낌만큼 타인의 심리적 욕구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결국 우리는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고 그 그물망은 서로 주고받음의 끈을 통해 얽혀있기 때문이다

 

방송을 통한 하나님 사역의 동반자가 되고 싶습니다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 (로마서 12 : 1)

작년 3월부터 프리랜서로 활동중인 전문 방송인 손범수씨, 방송국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때와 비교해보면 시간 사용과 조정면에서 훨씬 자유스로워졌다고, 이렇게 자유스러워진 시간 사용으로 손범수씨는 지난 8월 베트남을 다녀왔다.
기독의료인의 봉사모임인 '글로벌 케어'홍보대사로 이촉되어 그곳 환자들을 돕는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였다. 이웃을 돌아보고 사랑을 베풀어야겠다는 자극과 도전을 받았다고, 사실 방송일을 해오면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들어 사용하고 계시다고 고백한다. 그는 얼마전 교회에서 간증을 했다.
그리고 이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여러 교회에서 간증요청이 왔다. 처음에는 그는 사양을 했지만 '아 저렇게 방송일을 하는 사람도 예수님을 믿는구나'라면서 청소년들에세 도움이 많이 된다는 말을 듣고는 하나님을 위한 기회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런 일들이 자신을 오늘 이자리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일 거라는 마음에서다. 방송을 처음 시작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지금도 프로그램 시작전 기도를 드린다.
오늘도 방송인 손범수씨는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 기도를 드린다. 감동과 사랑과 그로 인한 기쁨이 전달되는 방송이 되게 해달라고 말이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1.예수님의 출생(18,20) 121

성령으로 잉태-성령-생령 인류 시조 아담의 출생=누가 낳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어 그 속에 생기를 불어 넣으므로 생령이 되었읍니다. 인류 시조의 출생이 부모로부터 낳음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생명의 영 호흡,생기를 불어 넣음으로 시작 된 것처럼 제이 아담이신 예수님도 성령으로 잉태되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났읍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전혀 믿을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흙 속에 생기를 넣어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 성령으로 처녀의 몸에서 아들을 낳게 하심은너무 쉬운 입니다.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태어나시므로 죄없으신 상태에서 태어나시어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서 대신 죽으실 수 있었읍니다.

2.이름이 예수-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21)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세상에 오신 것은 죄때문에 죽고 죄때문에 병들고 죄때문에 두려움과 슬픔과 어두움과 싸움과 전쟁과 고통 속에 놓여 있는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서 오셨읍니다.

3.성경에 예언된 말씀을 이루어짐(22)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경대로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성경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시고 성경대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성경대로 하늘과 이땅은 없어지고 성경대로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시고 심판하시고 성영 대로 믿는 자는 영생의 부활로 믿지않는 자는 영벌을 받을 것입니다.

4.임마누엘 하나님(23)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 인간이 하나님을 머리 떠나 고아처럼 버려져서 있기에 외롭고 고달프며,가난과 질병과 슬픔 속에 살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독생자 예수 님을 보내시므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함께 하시고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않으시며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하사 우리와사랑과 구원과 보호와 공급해 주십니다.
인간의 최대의 축복과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예수님은 그 이름대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치료하시고 용기와 소망을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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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예수미션(일어나라!빛을발하라!)
글쓴이 : 영원한축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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