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신약

[스크랩] 마틴 로이든 죤스의 설교연구

수호천사1 2014. 3. 8. 22:10

마틴 로이드 죤스의 설교 연구

1장 연구의 필요성

신학자와 목회자를 막론하고 지난 세기의 가장 위대했던 설교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설교자에 대한 연구는 미미한 것이 사실이다. 국내에는 정근두 목사가 포체프스트룸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논문인 '로이드 죤즈의 설교론'이라는 책과 토니 사전트 박사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논문인 '위대한 설교자 로이드 죤즈'라는 책이 번역되어 있다. 정근두 목사의 책에서는 로이드 죤즈 목사의 설교의 원리와 방법을 그의 설교를 통해 고찰하고 있다. 또한 토니 사전트 박사의 책은 로이드 죤즈 목사의 성령론에 주시하여, 그의 설교를 고찰하고 있다. 그러나 두 논문 다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주된 특징들에 대하여 별 언급이 없다. 필자가 여기에서 말하는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주된 특징이라 함은 다른 설교자들과 비교할 때 그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설교의 특성을 두고 한 말이다. 정근두 목사의 논문은 좋은 논문이지만, 주로 그의 설교의 원리와 방법에 주안점이 맞추어져 있다. 또한 토니 사전트 박사의 논문도 훌륭한 논문으로서, 그는 이 논문에서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진단적 설교면에 두 장을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 논문에서는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주를 이루는 진단적 설교의 면은 다루지 않겠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주된 특성으로서 전도적 설교, 교리적 설교, 복음적 설교, 현미경적 설교, 송영적 설교, 균형적 설교, 전체적 설교 등의 측면이 실제 그의 설교들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고찰함으로써 로이드 죤즈 목사의 설교의 주된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더불어 논문의 초두에서 필자는 로이드 죤즈 자신이 설교를 어떻게 이해했는가와 로이드 죤즈 설교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성령 하나님에 대한 이해-정근두 목사, 토니 사전트 박사 두 분다 로이드 죤즈 이해에 있어서 그의 성령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를 직접 그 자신의 말을 통하여 들어봄으로써 유익을 얻고자 한다. 우리는 이 논문을 통하여 지난 세기의 탁월한 설교자의 설교의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설교의 방향성과 특성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설교보다 더 중요한 설교자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설교자의 메시지는 설교자 자신의 신빙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로이드 죤즈의 설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로이드 죤즈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므로 많은 지면을 이에 할애할 것이다.

2장 로이드 죤즈의 생애

1. 의사에서 설교자로

  그는 호더 경 밑에서 지도받은 장래가 촉망되는 황실 주치의였다. 그러나 그는 목회에로의 거부할 수 없는 강한 소명을 받고 이러한 모든 세상부귀의 길을 버리고 목회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확실한 소명없이 목회의 길로 들어서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그는 어려서 집의 화재와 형의 죽음을 통하여 세상의 덧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또 어린 시절의 그의 학교 선생님이나 교회의 설교자들도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어려서부터 정직해야 할 것을 그의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그는 정규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의 신학교의 풍토는 자유주의 신학이 활계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존 칼빈이나 챨스 스펄젼 등 걸출한 설교가들이 다같이 신학교를 전혀 다니지 않은 점은 즐거운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그는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 구프린스턴의 신학자들의 책들을 독파해 여느 신학자 못지 않은, 다양하고 해박한 신학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의 설교의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그는 헌 책방에서 구입한 죠나단 에드워즈의 전집 2권을 읽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서 죠나단 에드워즈는 멘토요 스승이었다.
  그는 의사 시절에 배운 치밀하고 세밀한 진단 방식을 그의 설교에서도 활용하였다. 그래서 본문을 주의깊게 파헤치는 그의 설교 방식은 특별한데가 있다. 또한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듯 그의 설교는 철저히 회중을 간파하고 진단한 설교이다. 그의 설교가 그처럼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실제적이고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육신을 고치려는 의사에서 영혼을 고치는 의사가 되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병석에서 그리스도를 믿기를 맹세하다가도 건강해지면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환자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진정한 문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미워하는 영적인 죄의 본성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그의 27세의 나이로 이미 3개의 학위를 갖고 있는 의학박사였다. 평생 그는 박사라는 애칭으로 불리워졌다. 그는 어릴 때부터 교회생활을 하고 주일학교 부장까지 지냈으나 자신이 회심하지 않은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진로의 변화는 주위 사람의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주위 사람들은 바울에게처럼 그를 미쳤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는 평생 의학 서적들을 읽었고, 의학 협회에서 강연하기도 했다. 의학계는 그와같은 인재를 잃은 것을 안타까워했다.

  2. 샌드필즈의 특이한 설교자

  그는 가난한 광부촌인 샌드필즈의 설교자로 부임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그의 사역을 통해 그 지역사회가 바뀌게 된다. 그의 교회에는 술 끊기를 결심하고 갖다 논 술병도 있었다. 가장들은 가정적이게 되었다. 기도회는 사람들이 모였고, 기이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옛 방식을 굳게 믿었고, 세속적인 방식을 교회에서 제거하고, 설교와 기도에만 힘썼다. 그는 샌드필즈에서 전도 설교를 하였고, 그 지역에서 그는 그의 회중들에게 성자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는 작은 키에 이마가 훤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청교도들처럼 검은색옷을 즐겨 입었다. 강단에서 내려오면 그는 친절과 유머와 따뜻한 인간성을 잃지 않았다. 그는 예전에 있었던 웨일즈에서의 부흥을 다시금 간절히 소망하였다. 그의 설교에 심지어 취재 차 왔던 기자조차도 녹아 내리는 역사가 일어났다. 회심자는 늘어가게 되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기도 했으나, 그것이 습관성이라는 것을 알고는 곧 끊었다. 그의 부인도 그와 결혼 후 그의 도움으로 회심하게 되었다.

  3. 런던의 탁월한 설교자

  그는 늘어나는 직무로 런던으로 그의 임지를 옮기게 된다. 그가 떠날 때 그의 회중들은 너무나 아쉬워했다. 그의 한 회중은 그가 떠나는 이유에 대해 그가 떠나는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그가 자기의 사익을 좇아 떠나지 않는 것과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움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얼마나 그의 회중들에게 신뢰를 받았는가를 알 수 있다.
  런던의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그는 뛰어난 강해 설교자 캠벨 몰간과 동사 목회를 하게 된다. 웨스트민스터의 회중들은 계속해서 늘어가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기념비적인 산상설교와 로마서, 에베소서 설교를 하게 된다. 웨스트민스터 조직신학 교수였던 싱클레어 퍼거슨 교수도 그의 로마서와 에베소서 설교를 수없이 읽었노라고 간증하였다. 또한 그는 그와 다른 신학적 입장을 지닌 사람과도 우의적으로 토론하였고, 신참내기 설교자들에게 늘 따뜻한 격려와 위로를 잊지 않았다. 워런 워어스비도 그의 사역을 통해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그와 의견을 달리하기도 했던 존 스토트나 제임스 패커도 그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는 런던에 있을 때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설교에 대해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영국의 버너 오브 트루스 출판사의 창립 멤버로 일하였고, IVF 총재로도 일하였고, 런던 신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버너 오브 트루스 출판사는 지금 개혁주의적인 책들과 청교도 작품들을 출판하는 많은 독자를 지니고 있는 출판사로 성장하였다. 그의 사역의 열매인 것이다.
  그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는 수많은 신학자들과 신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게중에는 자유주의 신학 노선을 걷던 신학 교수가 그의 설교를 듣고 자유주의 신학을 버리게 된 일도 있었다. 제임스 패터도 그의 설교를 통해 설교를 배웠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채플 사임후에는 그의 저술을 정리하는 지혜를 통하여 지금까지도 설교집을 통하여 우리에게 설교하고 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세계 2차 대전을 겪었고, 이후에도 교회를 강건하게 결속시켜 목회해 나갔다. 그는 전쟁을 통하여 인생의 허상과 자유주의 신학의 허구성을 고발하였다.

  4. 그의 사상

  그는 로버트 멕체인의 성경 읽기표를 통하여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주로 오전에는 신학적인 책을 읽었고, 오후에는 전기를 읽었다. 그는 힘들때마다 청교도 리챠드 십스의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그리스도'를 읽고 큰 위로를 받았다. 그는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천주교에 대해 비판했으며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했으며,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의 연합을 호소하였다. 그는 종말이 그리 멀지 않을 것이라고 고별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지속적이고도 집중적인 연구를 쉬지 않았다.
  그는 칼빈주의적 감리교도였다. 칼빈주의 교리를 신봉하면서도 뜨거운 열정과 신앙을 강조했다. 그는 죽은 정통을 혐오했다. 형식주의를 싫어했으며 설교를 굳게 믿었다. 그는 복음적인 설교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사역을 통해 이를 증명하였다.워런 워어스비는 그와 대화하노라면 위대한 사상가 앞에 있는 느낌이 든다라고 말했다. 그는 위대한 사상가일수록 쉽게 설교한다고 주장했다. 어린 소녀도 그의 설교를 이해했다. 또 무식한 사람도 그의 설교를 좋아했다.
  그는 부흥에 대해 중요시 생각했고, 제임스 패커와 함께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청교도들에 대한 컨퍼런스를 열어 직접 연설하기도 했다. 그는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그자신 부인의 말처럼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그의 사역은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상태는 그가 기도 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로 판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회심을 중요시 생각했고, 회심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5. 그의 설교

  그는 조직적이고도 성경적인 설교를 하였다. 그는 성경 전체를 설교하였다. 그는 구약도 신약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현대 교회의 설교에서 천대받는 구약 본문으로도 많이 설교했다. 윌버 스미스 교수는 그의 한 구약 본문 설교를 듣고 그 본문을 처음 대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주일 오전에는 주로 체험적인 설교를 하였고, 주일저녁에는 전도설교를, 금요일 밤에는 연속 강해를 하였다.
  그는 반드시 설교라야만 한다고 주장했고, 설교는 정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아무나 설교해서는 안된다고 하였고, 설교자는 지상에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소명으로 여겼다. 그는 설교는 구분되어야만 한다고 말했고, 설교에서 의도적인 예화와 유머를 피했다. 그가 유머를 피한 이유는 천국이야 지옥이냐를 결정짓는 심각한 강단에서 행여 가볍게 보이는 인상을 줄까 우려했던 이유였다.
  그는 설교는 반드시 신학적, 강해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설교는 반드시 성령의 통제 아래서 행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설교에 있어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강조했다. 그래서 제아무리 철저히 잘 준비한다 해도 강단에서 성령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설교자는 무익하게 된다라고 생각했다. 그의 성령관은 개혁주의 성령관과 조금 다른데 그렇지만 오순절의 성령관은 아니다. 다만 그는 성령의 사역을 축소하는 것을 우려하고 늘 성령의 사역에 대해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성령의 주권적이 사역을 중요시여겼다. 그는 설교에 대해서 철저히 준비하고 강단에 올라가되, 올라가서는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했다. 그는 정면을 응시하고 설교했으며 그가 큰 소리를 발할 때는 뇌성이 울리는듯했고, 실감나는 제스처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설교는 웅변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편당이 없는 지도자였으며 가정과 같은 교회로 만들었다. 집에서는 규칙적으로 가정 예배를 드렸고, 자상한 할아버지였다. 그의 독서의 양은 엄청나다. 그의 설교는 무언가 다른 설교였다. 그는 바울 서신들을 사랑했고, 바울 서신들을 또한 즐겨 설교했다. 그는 경건한 설교자였고, 균형잡힌 설교를 하였다. 그는 말로만 아니라 신실한 삶을 살았다. 그의 설교에는 그만의 독툭한 선부정 후긍정이 나타난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주일 설교후에는 상담을 했다. 그의 상담을 통하여 많은 이들의 그들의 문제를 해결받았다.
  그는 한 설교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교리를 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설교 내용과 설교하는 행위 자체를 구별하였고, 회중들을 초청하는 제도를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의 영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십자가와 구속에 대한 일련의 연속 강해를 하기도 했고, 영적 침체에 대해서도 일련의 연속 강해를 했다. 또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연속 강해를 하였고, 부흥에 대해서도 일련의 연속 강해를 했다.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길은 그의 전도 설교를 살펴보는 일이다. 그의 전도 설교는 죄인의 회개를 요청하고, 그의 난제와 곤경, 회심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듣는 이에게 무언가에 영혼이 맞고 있는 듯한 압박을 가한다. 그는 20세기의 영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다.그는 특히 교회의 상태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고, 참 종교와 거짓 종교를 파헤쳐 전하였다.

  6.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설교에 대해 무언가를 알려면 진정한 설교를 들어보아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의 설교를 통하여 우리는 설교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또 이 시대의 한국 교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강단의 개혁이요,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설교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뛰어난 설교자이면서도 겸손하고 소탈했다. 또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는 목회 지망생들에게 개인적인 소명이 확실하지 않으면 절대 목회의 길에 들어서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 그에게 소명에 대해 묻는 한 학생에게 그는 헬라어를 공부할 것을 종용하고, 그것이 그 학생의 소명의 강도를 측정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물론 뛰어난 헬라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진정 하나님께서 낳은 걸출한 설교가이다. 우리는 이 위대한 설교자의 생애와 그의 설교를 시간을 두고 읽으며 주의깊게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유익한 보고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서재에 꽂힌 많은 그의 설교집들을 보며, 한국 교회가 그래도 하나님의 많은 축복을 받은 것을 감사하게 된다. 그의 책은 세계 곳곳의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금도 읽혀지고 있다. 우리는 그의 설교뿐만 아니라 그의 삶도 배워야 할 것이다. 진정 로이드 죤스는 혼탁한 오늘날의 이 교계에 진정한 영적 표상이 되고 있다. 실제로 그의 로마서 강해를 읽고 복음을 알게되었다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또한 그가 스승으로 두었던 훌륭한 청교도들에게서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는 거룩함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없다고 그의 에베소서 강해에서 못박고 있다. 또 그리스도인을 세 부류로 나누는-이러한 가르침은 스코필드 주석성경의 영향으로 유입된 것으로 조국 교회에는 C.C.C의 사영리 교리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광포되었고, 한국 교회의 강단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이 교리에서는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의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성경에서는 바울과 예수 그리스도 모두 사람을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두 부류로 나누고 있으며, 보좌에 그리스도가 앉아있지 않은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 이 진리에 대해서는 양무리서원에서 나온 제프리 윌슨의 '뒤틀려진 복음'이라는 책에 수록된 어네스트 롸이씽거의 '거짓 신자'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을 보면, A.A. 핫지, 스펄젼, 매튜 헨리 모두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의 개념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또한 칭의와 성화에 대해서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우리는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신 이 설교자와 같은 이가 다시금 한국 교회 가운데 일어나서 하나님의 나팔을 불어주기를 소망한다.

  3장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로이드 죤즈의 생각

  그의 설교 이해에 선행하여 그렇다면 과연 그는 설교와 설교자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고찰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인 동시에, 가치 있는 일이다. 그 이유는 그가 설교와 설교자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사상이 필연적으로 그의 설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더 나아가 그의 설교를 이해하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로이드 죤즈 목사의 생각을 가장 잘 이해하는 길은 직접 그의 말을 듣는 것이다.

  설교하는 일이 이제는 크게 직업적인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 설교를 듣는 것보다는 심리학 강해를 전해 듣고 있는 셈입니다. 설교자들은 회중들이 요구하는 것을 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설교자들이나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비극적인 무서움입니까! 다니엘 로우랜드는 랭게이토에서 목회할 때에 지옥을 설교하곤 하였었습니다. 그가 죽은 이후에 그의 설교와 같은 효과를 얻은 설교가 있었습니까? 그 이후에 그러한 설교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사람이 우리 중에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의 상태는 개선되기는커녕 더욱더 가속적으로 침륜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믿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날 강단은 무능하게 되어 효력없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현대의 웨일즈의 비극에 있어서 가장 기막힌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어렵습니다. 흥미없어 보이지만 사활적으로 중요합니다. 목사는 목자이지 하나의 귀여운 어린 양이 아닙니다. 그것이 주도적인 개념이어야 합니다. 그는 멋져 보이고, 인기를 얻고 싶고, 농담을 잘 할려고 노력하는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극히 주의해야 합니다. 목사는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단순히 그가 교회 안에 있거나 어떤 예배를 집례하고 있을 때만이 목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기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목사는 언제나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과 함게 하는 자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의 최고의 목적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필요한 것은 정신이 아니라 성령입니다. 목사가 자신에 대해서 어떠한 사람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목사는 거룩한 삶을 통해서만 그의 직위를 얻을 수 있고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미소를 느끼지 못하고 홀로 강단에 서는 것보다 설교자에게 더 끔찍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설교다운 설교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해 볼 때, 또한 하나님의 대의를 전파할 사역자라고 자인하는 많은 사람의 자질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대의가 이 세상에서 무너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신비스러운 은혜요, 신성한 능력이다. 이 점에서 내 활동은 나를 역겹게 한다. 나는 내 생애 동안 설교를 한 것은 고사하고 설교문을 만들어 본 적도 없으며, 내가 과연 그 일을 할 수 있는 날이 있을 지에 대해서도 절망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 말에 덧붙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설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약간이라도 이해한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자기는 한 번도 설교한 적이 없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언젠가는 설교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

  …오! 바울이 고린도전서 2:1-5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내 사역 속에서 경험하기를 얼마나 원하는지. 나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하여 지쳤다네, 휫필드의 설교를 읽을 때 나는 일생 동안 진정으로 설교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느낀다네.

  나는 내 생애에서 단 두 번 진정한 설교를 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꿈 속에서였습니다. 나는 꿈속에서 그 두 번의 설교를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꼈던 그 무서운 실망감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내가 깨어 있을 때 강단에서 그렇게 설교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는 이전에 하나님에게 쓰임 받았던 어떤 목사들을 계속해서 인용합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강단으로 나아가 그들에게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생길 때까지 감히 강단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도달한 곳은 바로 그 곳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이 능력이 필요함을 깨달았고, 그래서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하게 된 것이 제가 선택한 것이 아님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만약 주님의 부르심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그 부르심을 거부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그 분의 길이었습니다. 그 분은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구별하시며, 그들에게 메시지를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그들에게 임재하여 진리를 조명해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이 교회를 먹이시는 본질적인 방식입니다.

  우리가 일꾼을 밀어 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단지 그들을 보내 달라고 주님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육신적인 열심과 정열을 가지고 사람들을 불러내어 교회의 어떤 과업을 맡기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여러 가지 다른 방법들을 동원하여 그 일을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역해야 한다든지 복음을 전파하거나 가르쳐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바로 여기에 교회가 개입됩니다. 이것은 전파와 가르침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 다양한 직책과도 관련된 신약 성경의 가르침입니다.…따라서 어떤 사람이 설교자로 부름 받았음을 당신이 명확하게 확신하려면, 먼저 교회가 그 부르심을 확증하고 검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하나님이 교회에 선물로 주신 것이며, 교회에 필요한 모든 은사와 도움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우리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힘과 능력만으로는 참되게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말은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유창하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은 설교가 아니며 그것은 아무 결과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사역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언제나 성령을 통한 능력의 '역사' 곧 하나님의 '힘있는 역사'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설교자가 나에게 하나님을 느끼게 해준다면, 만약 그가 내 영혼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제공한다면, 만약 그가 자신은 부적합하지만 매우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무엇인가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면, 만약 그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구주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복음의 위대함에 대해 희미한 빛이라고 던져 준다면 나는 그 설교자의 다른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사로잡힌 사람이며 그는 이것을 의식합니다. 나는 주저 없이 이것을 단언합니다. 내가 방관하고 있는 때에 비로소 나는 설교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알기 시작한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나는 말하고 있지만 실은 구경꾼입니다. 나는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놀랍니다. 나는 아주 깜짝 놀라며 듣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참된 설교가 행해질 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내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처럼 구경꾼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 일 밖에 있을지라도 내가 그 일에 연루되어 있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나는 단지 이 모든 것의 도구요 그릇이며 통로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습니까! 설교자에게, 설교 도중에 성령의 기름부음을 느끼며, 영혼들이 죄를 깨닫고 그 결과 새로운 탄생을 경험한 듣는 것보다 더욱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

  나에게 가장 큰 위험, 가장 큰 시험은 지난 주일에 내가 이번 주일에 두 번 강단에 올라갈 것이라고 발표했기 때문에 이번 주일에 두 번 강단에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자기가 맺은 계약을 위반하지 않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약속을 어기지 않는 것은 바른 일입니다.…그렇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주일이 다가왔고 내가 두 번 설교를 한다고 광고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일을 한다면 그것은 외적인 봉사입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나는 '심령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 어떤 사람이 심령으로 그 일을 한다면, 그것은 그 일을 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그의 존재 깊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말하는 바입니다. 조지 휫필드는 성령의 능력과 기름부음을 느끼지 못하고 설교한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첼텐함에서 있었던 일은 너무나 예외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기록해 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내려오셨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그들은 하나님이 임재와 복을 누려 왔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려오신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떤 특정한 본문을 택하지는 않았지만 주님이 나에게 말씀을 주시는 대로 자유롭게 설교하였다. 설교 주제는 미리 별나게 생각해 둔 것이 없어도 기이한 방식으로 나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내 기억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영혼 속에 느껴진 직접적이고도 강력한 충동의 결과였다.

  나아가서, 나는 프로그램을 미리 밝히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언제 공부가 끝나게 될지를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나는, 우리가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믿는다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성령은 갑자기 우리 위에 임하신다는 것-그 분은 지성에 빛을 비추시고 마음을 움직이십니다-을 압니다. 나는 성경을 강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령의 능력에 대하여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만약 성령께서 갑자기 설교자에게 임하여 그를 사로잡으신다면 당신의 프로그램에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당신의 프로그램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그는 내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의 대답은 설교자가 화면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바울은 자기가 설교할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으며, 성령께서 자기의 말하는 것을 그들의 마음과 영혼에 깊이 들어 박히게 역사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자기를 변화시켰던 그 능력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큰 확신'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자기야말로 대언자요 통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긍휼하심 속에서 오늘 밤에도 그 일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성령의 능력과 그 복되고 은혜로운 감동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정말 어느 목사라도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역사하고 잇는 이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그리스도임을 확신하게 될 때처럼 기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사용했던 사람들은 가장 많이 연구하고, 성경을 가장 잘 알고, 준비를 위해서 많은 시간을 들였던 자들이었음을 여러분은 언제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상의 그의 말에서 보듯이 그에게 있어서 설교는 매우 높은 기준의 사람이 감당하기 벅찬 놀라운 일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그는 설교자의 중요성에 대하여 너무나도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의 사후 어떠한 모임의 자리에서 사람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던 것을 듣던 그의 아내가 나의 남편의 사역에 있어서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 것은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주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설교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과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영역의 거룩한 일이었으며, 설교자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실존적인 존재였다.

4장 로이드 죤즈 설교의 특징
1. 전도적인 설교

로이드 죤즈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그의 전도 설교적 측면이다. 그는 아예 주일 저녁에는 전도 설교를 작정하고 계속하여 하였다. 그 이유는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복음 전파가 반드시 교회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었고, 또한 교회 안에 있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전도 설교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실제로 교회는 한 영혼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장소일수 있다고 보았다.
요한복음 5:44절을 강해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그의 죽음이 여러분의 속죄를 위한 것임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의로움과 공의로움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공로와 영광스러운 인격을 의뢰하십시오. 여러분의 생활을 그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를 기쁘시게 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도움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유일하시며 진실하시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과 찬사와 영예를 받을 것입니다."
그는 매우 단순하고도 명확하게 전도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는 구약을 사용해서도 전도 설교를 하였다. 그의 창세기 32:24절 강해에서 그는 이렇게 전도하고 있다.
"복음은 단순히 여러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끌어내어 보다 나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분 자신의 본성을 여러분 안에 넣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제가 지금까지 미력하나마 이렇게 애써 설명드린 그 지복의 상속자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망이 더 이상 여러분을 두려움에 떨게 하지 못할거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영화롭게 될 그날을 즐거이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공해 주시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 우리 인생은 실패라는 것, 우리 영혼이 위험하다는 것, 이런 것들을 깨닫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다 받게 될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인생의 오직 유일한 해결책임을 역설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마태복음 11:20-24절을 강해하며 임박한 심판을 피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적하는 핵심적인 요항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독교 이론이나 사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이것 저것에 대한 기독교관이 있으며, 그런 견해가 중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러 일들에 대한 기독교관에 관심이 쏠리기 전에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들의 견해부터 확실히 해두어야 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복음은 철학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체와의 개인적인 만남이며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촉구하는 초청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맺는 이 관계의 문제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바로 이 문제에 관해서 내가 마지막 심판 때에 조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다시 당신에게 간단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어떤 분입니까? 만약 그분이 역사에서 삭제된다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있을 것 같습니까? 그분이 당신의 삶을 지배하고 형성해 갑니까? 이것은 당신이 숙고해야 할 중대한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전도 설교가 필요한가? 사실상 오늘날의 현실은 교회에 출석하기만 하면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이고, 회개나 복음의 핵심에 대하여 피상적으로 강단에서 다루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복음에 노출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오늘날의 설교자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전도 설교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정근두 목사는 로이드 죤즈에 대한 한국 개혁주의 설교 연구원 정기 세미나의 강연에서 한국 교회에서는 주일 오전에 전도 설교를 매주 하는 것이 너무나도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촉구했었다. 조국 교회 안에 팽배해 있는 명목상의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전도적인 메시지가 요청되고 있다.

2. 교리적인 설교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교리적인 설교가 필요한 시점이다. 조국 교회 안에는 깊은 교리 설교가 사라져 가고 있다. 또한 교리 교육이 등한시 되고 있다. 또 교리가 혐오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교리라 하면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기며, 교리를 따지지 말고 같은 믿음인데, 연합에 앞장서자고 주장한다. 일찍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구약학 교수였던 에드워드 영은 자신의 이사야 53장 주석에서 이렇게 교리 설교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교리적이라고 불리울만한 설교를 듣는 경우가 매우 희귀하다. 그리고 그토록 가치있는 제도인 요리문답 공부반은 교회들로부터 거의 완전히 추방되었다. 만일 사람들이 교리에 대해 무엇인가를 좀 알았다면, 그들은 교리란 것이 메마르고 흥미롭지 못하고 그들의 생활과 별로 연관성이 없는 것이기는커녕 모든 주제들 가운데서 가장 흥미롭고 연관성을 지닌 것이라는 놀랄만한 발견을 하게 될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주장하기를,
"이 세대에 가장 크게 필요한 것은 교리적 가르침과 교리적 설교의 부흥이다."고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조직 교수로 봉직했던 존 머레이 교수도 '기독교 교리와 삶'이라는 글에서 교리와 생활의 연관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현재 관심사와 관련된 위대한 교훈은 우리 신앙의 가장 신성한 진리들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명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들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결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이것보다 더 중심적일 수 없는, 속죄의 위대한 진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겸손하고 헌신되고 자기 희생적인 섬김에 대한 자극이 된다."
로이드 죤즈도 자신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초청을 받아 행한 일련의 설교에 대한 강의에서 본문에서 교리를 도출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의 설교의 제목과 그 안에 있는 교리는 본문과 그 문맥 가운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본문과 문맥에 의해서 설명되어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설교는 하나의 주제로 시작하지 않아야 합니다. 설교는 교리와 테마를 내포하고 잇는 성경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바로 그 교리는 본문의 특정한 배경 가운데서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직접 그의 설교속에 나타난 교리적인 설교의 면모를 살펴보자.
"본문에서 나타나는 대답은 이것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행해진 어떤 일의 결과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의 결과로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라고 합니다. 그 나무는 누군가가 거기에 심어 놓은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것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합니다. 곧, 자연발생적으로 그 자리에 돋아나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로이드 죤즈 목사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를 통하여 중생의 교리를 도출해내고 있다.
그의 교리적인 설교의 면모는 산상설교 강해에 있어 고전이 되어버린 그의 산상설교 강해에서도 나타난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자만심의 완전한 결여, 자신과 자기 의존의 완전한 결여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의식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낳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마주 대할 때에 느끼는 우리의 철저한 무능에 대한 이 엄청난 인식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심령이 가난하다는 구절을 강해하면서 인간의 전적 타락과 전적 무능의 교리를 끄집어 내고 있다.
왜 우리에게 교리 설교가 필요한가? 교리에 대한 가르침 없이는 기독교는 하나의 도덕 종교로 전락해버리기 십상이다. 또한 교리가 뒷받침 되지 않는 신앙은 사상누각과 같이 되어 버릴 가능성이 많다. 한국 교회에서는 장로 교인이면서도 장로교의 근본 교리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들이 많다. 즉 교회에서 성경에 담겨 있는 핵심적인 교리들을 가르치는 일에 등한시하고, 성경을 이야기 중심으로, 또는 도덕적 강화로 축소시키는 경향이 농후해졌다. 교리가 한국 교회를 핍절시킨 것이 아니가, 교리의 결핍이 무지한 교인들을 산출했다는 것을 목회자들은 기억해야만 한다.

3. 복음적인 설교

로이드 죤즈 목사의 설교는 철저히 복음적이다. 이것은 그의 설교에 나타난 복음의 깊이와 일관성과 전체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복음을 가감하여 전하지 아니하였고, 철저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통로로 사용되기에 힘썼다. 그의 설교에서는 매우 두드러지게 그 설교의 복음적인 요소가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 바로 그것이 기독교 메시지요 기독교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어떻게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께서만이 주실 수 있는 복락들을 받아 누리기 시작할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메시지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철저히 복음적이다. 그는 유치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원색적인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지 아니하셨으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전해야 할 복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구원 사건입니다. 바로 그것은 우리 구원이 성취되는 행위였습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6장 4절 한 구절을 가지고 일련의 연속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26년 동안 웨스트민스터 강단을 지켜오는 동안 참으로 어리석게도 여러 번 모든 것을 설교했으니 더 이상 할말이 없지 않는가 하는 의문에 빠지곤 했었습니다. 마귀는 내게 역시 그러한 생각을 갖도록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시작에 불과하다느 느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 십자가에 대한 영광스러운 메시지에는 끝이 없습니다. 전에 알지 못했던 새롭고 신선하고 황홀하고 감동적이고 심령을 높여주는 어떤 것이 항상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복음의 기초로 돌아가게 된 것을 감사하고 있다. 거기에는 어떠한 지적, 영적 교만의 모습도 없다. 오히려 겸손히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배우는 제자로서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다.
왜 교회에서 복음적인 설교가 필요한가? 교회에는 복음이 실종되었는가? 조국 교회의 강단은 심각한 복음의 불균형의 병폐를 앓고 있다. 많은 설교자들에 의해서 마치 기독교의 복음이 하나의 도덕강령, 또는 기복적인 메시지로 둔갑하고 있다. 죄인에게 회개를 요청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충족성과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설교 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위안하고 성공주의를 부추기는 심리학적 설교가 판을 치고 있다.

4. 현미경적인 설교

로이드 죤즈 설교의 강점은 그 깊이와 철저함에 있다. 그는 결코 본문을 피상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의 에베소서 강해나 로마서 강해, 산상설교 강해 등을 보면 그가 한 구절, 한 구절에 매달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한 그는 한 구절을 가지고 여러번 연속 설교를 하기도 했다. 필자는 여기에서 그가 짧은 구절로 설교한 것이나, 한 구절을 가지고 여러번 설교한 것을 배우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그처럼 주마간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지 아니하고, 그 본문이 의도하는 바를 철저히 추적하여 본문의 의미를 확연히 드러낸 것을 배우자는 것이다.
" '하나님이 없다'라는 말의 어리석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여러 면에서 볼 때 그것은 정말 어리석습니다. 이것을 표현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이해력의 부재입니다. 참 이해와 명백한 사고력의 부재입니다."
그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도 결코 놓치지 아니한다.
"성경 전체를 살펴볼 때 이 단어가 주로 다음의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에는 일반적으로 의견이 일치합니다. '거룩하게 하다'라는 말의 첫 번째 의미는-그리고 항상 우리는 이 의미를 첫 번째에 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경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따로 떼어 둔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그의 모든 설교에서 그의 이러한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면서도, 세부적인 의미를 놓치지 아니한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숲을 보면서도 나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선지자들 자신도 그들 자신이 예언한 모든 것을 전부 다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베드로전서 1장 10절과 11절에서 실제로 베드로가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과 이야기를 그런 방법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선지자 자신조차도 자기가 말한 것을 반드시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어떠한 예언도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확신하고 성경을 경외하며 평생을 산 사람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성경 해석이란 문제는 씨름하는 작업이었고, 하나님과의 교통과 기도 없이는 불가능한 중차대한 과업이었다.
오늘날의 설교자들에게는 로이드 죤즈의 이러한 성경을 현미경적으로 세밀히 관찰하고 깊이 있게 해석하는 작업이 참으로 필요하다. 사실상 오늘날 많은 설교들은 본문이 해석되어지지 않고 있다. 늘상 그 말이 그 말인 설교를 하고 있다. 어느 본문이든지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내려오지, 그 본문이 담고 있는 복음의 광휘와, 그 풍성함을 온전히 전하지 못하고 있다. 로이드 죤즈의 이러한 모습 속에서 우리는 철저한 성경학도가 되어야만 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5. 송영적인 설교

고신대학원대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가르치고 있는 유해무 교수의 조직신학 책의 제목은 '송영으로서의 신학'이다. 로이드 죤즈의 설교는 '송영으로서의 설교' 였다. 이 말의 의미는 그는 설교를 통하여 철저히 삼위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고 드높였다. 그의 모든 설교는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에 그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면은 그의 설교 가운데 두드러진 현상인 찬송시의 빈번한 언급에서도 확인된다.
"주님, 살고 죽는 것은
제가 염려할 일이 아닙니다.
오직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만이
제게 할당된 몫이며
이 일을 위해 주님의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만일 생명이 오래 지속된다면
그만큼 순종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비록 생명이 단축된다 하여도
영원한 세계로 들어감으로 인하여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이전에 통과하셨던 어두운 방보다
더 어두운 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실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 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오소서 주님!
그리고 저로 하여금 그 은혜를 인해
주님의 복된 얼굴을 대할 수 있게 하소서.

이 땅 위에서 주님의 사역이 참으로 아름다웠을진대
그 곳에서의 영광은 어떠하리오?

그 때에 저의 구차한 불평과 지루한 죄악된 날들이
끝을 고할 것이며
여호와를 송축하는 승리한 성도들과 더불어
주님을 찬양하는 무리에 참여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영생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고
이것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도 흐릿하지만
그 대신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심에 만족하며
또한 제가 그 분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족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는 교리적인 로마서 강해에서도 찬송시를 많이 인용하고 있다.
"내 이름 주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으니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으리
지울 수 없는 은혜의 표
주님 마음에 새겨져 있으니

열심히 생겨난 것처럼
나 끝까지 참아 내리라
하늘에 있는 영화로운 영들보다 더 행복하네."
그는 알미니안으로 알려있는 챨스 웨슬리의 찬송시도 자주 언급한다.
"죽음보다 지옥보다 더 크신 주님이 사랑
그 풍성함을 이 세상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네
빛의 아들들로 태어난 이들이 헛되게 세상을 좇네
그들은 그 신비에 이르지 못하네
그 길이와 넓이 그리고 높이를 모르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네
지금 위에서부터 빛이 비추네 가련한 이 마음속에!"
비단 이 뿐만 아니라 로이드 죤즈 설교의 내용 자체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영화롭게 하는 데에 깊은 주안점이 놓여져 있다.
왜 우리에게 이러한 로이드 죤즈의 송영적 설교의 태도가 필요한가?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 모든 혜택들을 받아 누리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설교자들은 하나님께 돌아가야할 모든 영광과 찬송을 자신이 중간에서 갈취하고 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삶이 있었기에, 로이드 죤즈라는 설교자는 존재할 수 있었음을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소요리문답 1문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의 실천 없이는 바른 설교자가 되기는 요원한 일이다.

6. 균형적인 설교

그의 설교의 또 하나의 강점은 복음에 있어서 균형의 문제이다. 그는 공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을 균형있게 강조했다.
"오늘날 심판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이 극히 적은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이라는 것을 분석해 보면, 자기들에게 좋은 몇 가지의 개념들을 구체화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들의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신은 자기들에게 언제나 핑계를 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그를 경배하지 않습니다. 실로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신을 경배하지 않습니다. 소위 그들의 신은 그들의 대화 속에서 전혀 신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은 죄인을 영원토록 심판하신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회개하지 않아도 영원토록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내렸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은 그들이 믿는 대로 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거짓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신 개념입니까! 전적으로 얼마나 비진리이며 얼마나 무가치합니까! 오늘날 존재하는 새로운 이교도는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설교자의 균형에 따라서 회중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적절히 전함으로써 설교의 균형을 이루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7. 전체적인 설교

로이드 죤즈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그가 구약 본문을 사용하여 설교한 것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그의 설교를 통하여 그가 마치 신약 본문을 가지고 대부분 설교한 것으로 오해하지만 그가 아베라본에서 사역했을 때에 설교 본문중 4분의 3정도가 구약이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도 그가 사용한 구약 본문은 430여 개 정도로 비율은 약간 낮았지만 그 본문들을 구약 전체에서 뽑은 것들이다. 윌버 스미스는 1955년 어느 주일 저녁 설교를 들은 다음, 그때 로이드 죤즈가 설교한 본문은 자기가 그때까지 그런 구절이 성경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구절이었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예레미야 17:14-15 말씀이었는데("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그의 주일 저녁 설교가 으레 그렇듯이 그 설교도 복음 전도를 위한 설교였다. 여기서 스미스가 적어 놓은 글을 직접 인용해 보겠다.
"여러분은 그가 설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삼 분도 지나기 전에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인 성경 속에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 그의 말씀은 무오하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진짜로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그의 설교는 정말 내가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하던 설교였다. 그의 설교를 들으며 내 영혼 깊숙이 결심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설교를 하되 정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지 않는 설교는 절대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의 문제는 특히나 구약 복음에 대한 이해의 결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가 있다. 구약을 예화 자료의 하나쯤으로 생각하고, 구약 본문을 사용하는 것을 기피하거나, 성경 전체를 설교하는 일을 등한시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 그리고 스펄젼 같은 지난 세기 설교자들은 성경 전체를 아주 폭넓게 사용했다. 스펄젼이 설교한 성경 본문에 대한 색인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그것을 보면 그의 설교 본문 중 약 반 가량이 구약에서 뽑은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성경 전체를 설교하는 일에 칼빈과 로이드 죤즈처럼 균형을 이루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5장 결론

이 부족한 논문에서 필자한 의도한 것은 로이드 죤즈 설교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더 깊은 연구에로의 동기를 부여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상의 로이드 죤즈 설교에 대한 부족한 연구를 마치면서 필자가 내리고 싶은 결론은 설교자 이전의 성도로서의 로이드 죤즈에게서 더 많은 것을 우리는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훌륭한 신앙 인격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포용력이 있었고, 그들과 친분관계를 맺는 재능이 있었다. 그는 모두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편당이 없는 지도자였고, 연합을 위해 진리를 양보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성도의 연약함과 영적 침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으며, 죽은 정통의 위험성을 인식한 사람이었다. 아마도 오해되고 있는 그의 성령론에 대한 문제도 그의 일생을 걸친 하나님과의 매우 깊고도 친밀한 교제의 결과가 아닌가 한다. 죽어가는 조국 교회에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부음받은 이같은 설교자를 일으키셔서,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에게 생명과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기도하며 본 논문을 맺고자 한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카폐지기 agaser)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Andr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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