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교회론
성기호 (성결대 명예총장)
교회론에 있어서 동방교회는 그 교리의 중요성을 별로 강조하지 않았고 교회론의 진술도 매우 미숙한 편이다. 그러나 서방교회는 도나투스(Donatus)의 엄격한 교회론에 대항하여 보편적 교리를 발전시켜 갔으며 특별히 어거스틴에 의해 서방교회의 교회론이 확립된다.
교회의 부패와 세속화를 대항해서 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고자 하여 투쟁적인 태도를 취한 분파들이 2세기 중엽의 몬타너스주의(Montanism), 3세기 중엽의 노바티안주의(Novatianism), 4세기 초의 도나티스트주의(Donatism)이다. 이들은 신자들의 엄격한 금욕과 순결을 강조하는 점에서 공통적이며, 박해 때에 배교한 이들이 교회에 복귀하고자할 때 철저한 회개와 순교적 각오를 요구하였다.
1. 교회의 순결을 강조한 분파들
1) 몬타너스주의(Montanism)
몬타너스(Montanus)는 156년경 소아시아의 브루기아를 중심으로 하여 교회의 개혁을 외치며 활동을 시작하였다. 맥시밀라(Ma.imilla)와 프리스킬라(Priscilla)라는 두 여선지(女先知)와 함께 몬타너스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비하여 엄격한 금욕생활을 주장하였는데 그들이 요구하는 윤리체계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것 보다 훨씬 더 엄격하였다. 이들의 금욕적 훈련은 후에 수도원 제도의 모범이 될만큼 엄격한 단식과 육식의 금지, 재혼의 금지 내지 결혼 그 자체를 금하는 철저한 성별의 요구이었다. 이는 2세기 초의 교회가 해이해지는 것에 대항하여 순수한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노력했던 교회내의 개혁운동이었다.
보혜사 성령님의 성별 요구에 순응한 성도들만이 신령한 교회를 구성하게 되고 이러한 영적인 교회가 죄를 사(赦)하는 권세가 있다고 주장한다. 성결한 신자들만으로 순수한 교회를 구성하려는 몬타너스주의의 금욕주의는 터툴리안(Tertuliian, 160 230)을 매료시켜 가입케했고 가장 유명한 몬타너스주의자가 되게했다.
2) 노바티안주의(Novatianism)
①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회개와 용서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기 위해 회개와 죄의 용서가 요청되는데 용서받을 수 없는 중대한 죄가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 초대교회로부터의 전통이었다. 특히 세례 받은 후에 범한 죄는 용서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일반 교인들의 견해이었다.
②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重罪)
요한일서 1:9에 기록된 대로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죄의 사유를 믿었으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들이 있다고 하는 성경의 교훈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성령을 훼방하는 죄이니 예수님의 하시는 기적을 귀신의 힘에 의한 것으로 돌리는 경우(막 3:29, 30)와 박해 때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성령을 모독하는 죄(눅 12:9, 10),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죄(히 10:29), 진리를 받은 후 다시 타락한 경우(히 6:4 6; 10:26) 등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경우들로 생각했다. 그 외에도 우상숭배, 살인, 음행, 배교 등이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重罪)로 취급되었다.
③ 죄의 회개방법
너무나 쉽게 범죄한 후 너무나 쉽게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죄의 교리는 죄의 심각성을 감소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터툴리안 같은 이는 재차 범한 죄의 용서를 위해서는 공중앞에서 회개하고 단식하며 장로들 앞에서 통곡하며 굴복하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어떤 죄가 용서되며 어떻게 회개할 것인가를 분명히 하기위해 로마 감독인 칼리스투스(Callistus, 217 222 재임)가 성명을 발표하였다. 즉 어떠한 죄든지 합법적으로 회개하면 자기가 사죄(赦罪)할 수 있다고 말했으나 일반적으로 중죄로 취급되는 배교(背敎)에 대하여는 용서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로마 황제 데시우스(Decius, 249 251 재위) 때 극심한 기독교 박해가 일어났고 이 때 많은 기독교인들이 배교하였다. 즉,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고 그 증명서를 사거나, 기독교인이라는 자기의 신분을 거짓으로 진술하는 등 신앙을 배반하는 일이 많았다.
④ 회개자의 교회영입 문제
박해가 끝나고 배교한 신자들을 교회에 다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논쟁이 생겼을 때 칼타고(Carthage) 선언을 발표하여 이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였다. 즉, 타락하고 배교한 자라 할지라도 진정으로 회개하고 공적(公的)으로 신앙고백을 하게되면 다시 교회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회개자의 교회 내 영입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게 된 것은 교회만이 구원을 보증할 수 있다고 하는 키프리안의 가르침에 힘입은 것이다. 즉 아무리 정통적인 신자라 할지라도 그가 교회 밖에 있으면 그의 구원을 보장받을 수 없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현대의 급진적 신학사상에 비해 볼 때 씨프리안의 고전적 교회관이 더욱 돋보이게 된다. 그는 말하기를 "교회 밖에는 결코 구원이 없다. 교회를 어머니로 갖고 있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도 없다(E.tra ecclesiam nulla salus. Si quis ecclesiam non habet matrem, Deum, non habet patrem)."고 가르침으로 타락한 신자들의 참된 회개와 교회로의 복귀를 촉구했다.
⑤ 배교자의 교회영입을 반대하는 엄격주의
그러나 페비안 감독이 순교(250)한 후 교회는 배교자의 처리문제로 분열되어 다수의 온건파와 소수의 엄정파로 갈리었다. 코넬리우스 감독을 따르는 다수의 온건파는 회개하는 배교자를 교회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는 한편 로마의 대 신학자인 노바티안(Novatian)을 따르는 소수의 엄격주의자들은 배교자의 교회 재영입을 거부했다.
신학적으로 정통파인 노바티안은 안디옥회의에서 교회의 순수성을 고조하는 그의 주장을 인정받았으나, 온건파의 코넬리우스 감독이 교황이 된 후 노바티안의 추종자들은 파문되었다. 배교자의 교회내 재 영입을 허락하는 결정이 로마회의(251)와 칼타고회의(252)를 통해 확정되고 노바티안주의는 5세기 까지 계속하다가 그 남은 자들은 도나투스(Donatus)주의에 합류하게 되었다.
3) 도나티스트주의(Donatism)
① 배교자와 교회의 순수성의 대립관계
중대한 죄로 인하여 출교되었거나 배교한 자를 교회에 받아들이는 일은 교회의 순결성을 해치는 일이라는 입장에서 칼타고의 감독인 도나투스(Donatus the Great, 355 사망)는 배교자의 교회 재영입을 반대했다. 도나투스파의 주장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참된 성도의 거룩한 집단이어야 하고, 감독은 사도와 같이 성결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② 타락했던 성직자의 성례집행 유효성 문제
이러한 입장에서 도나투스 주의자들은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284 305 재위) 황제의 박해 때 배교한 신자들을 교회로 재영입하는 일에 찬동하는 칼타고의 부감독 시실리안(Caecillian, 345년 사망)을 감독으로 선출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시릴리안은 박해에 못이겨 성경을 버린 펠릭스(Feli. of Aptunga)에게 안수를 받았으니(311년) 성직 자체의 유효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박해 때에 신앙을 버리고 타락한 성직자에게서 받은 성례는 그 자체가 무효이며 타락했던 성직자를 감독으로 세우든지 다른 어떤 성직에 재임용하는 것도 반대하는 입장에서 누미디아(Numidia) 지방의 감독 70명이 별도로 모여 마조리누스(Majorinus)를 칼타고의 감독으로 뽑았다. 315년에 마조리누스를 이어 칼타고의 감독이 된 도나투스는 배교했던 성직자에게서 받은 세례는 성례의 유효성을 갖지 못함으로 이런 이들에게서 세례를 받은 이들은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③ 도나투스파의 정죄와 운명
이러한 교회 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314년에 아르레스의 종교회의(Synod of Arles)가 소집되었는데 도나티스트(Donatist)의 입장이 거절되었다. 성례?유효성이 안수자의 자격에 있는 것이 아니며 배교했던 성직자들이 집행한 성례들이 합법적 요소를 갖추기만 하면 그 자체가 유효함으로 성직을 위한 안수, 세례식, 성찬식 등이 합법성을 갖는다고 결정하였다. 이에 만족할 수 없던 도나투스파에서 황제에게 호소했으나(316년) 그들의 주장은 거듭 거절되었으며 감독들이 추방되고 교회가 폐쇄되는 박해를 받게 되었다. 도나투스는 추방 중에 죽었고 그의 추종자들도 교회와 황제로 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지만 참 교회를 지키고 교회를 거룩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보존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7세기 까지 계속되었고 회교도가 아프리카 교회들을 전멸시키기 까지 이어졌다.
아프리카 교회의 분열과 혼란을 염려한 황제는 321년에 도나티스트에 대한 강경조치를 포기했으나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의 엄격한 교회관에 반대하며 그의 생존기간 중 394년에서 부터 420년에 이르기 까지 그들과의 논쟁을 그치지 않았다.
2. 어거스틴의 교회론(도나티스트 논쟁)
1) 어거스틴의 인물과 생애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e, 354 430)은 로마의 아프리카 식민지인 히포의 감독(Bishop of Hippo, 396 430)인데 서방교회의 유명한 지도자요 바울과 종교개혁자인 루터 사이를 잇는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가 회개하고 세기(世紀)의 성자(聖者)로 거듭나기 전에는 어머니인 모니카(Monica, 331 387)의 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게 하던 세기의 탕자(蕩者)이었다.
모니카의 2남 1녀 중 장남이던 어거스틴은 18세 때에 수사학(修辭學) 교수가 되어 초인적 재질을 발휘하였으나 품행이 단정치 못하여 이미 술집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두고 있었다. 40세에 과부가 된 모니카는 타락하고 방탕하는 아들 어거스틴을 위해 늘 울며 기도했는데 담임목사인 암브로스(Ambrose, 340 397, Bishop of Milan) 감독은 그녀에게 위로하고 확신을 주기를 "기도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했는데 과연 어거스틴은 어머니의 기도로 밀란에서 회개(386년)하고 그 이듬해 부활전 전야에 암브로스 감독에게 세례를 받았다.
어머니인 모니카는 회개한 아들을 만나서 "아들아! 나는 이 세상에서 더 바랄 것이 없다. 죽기 전에 네가 신자되는 것을 보고자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망극해서 네가 신자가 될 뿐 아니라 세상 영화를 버리고 주의 종이 되기로 결심했으니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감격해 했다. 어거스틴이 세례를 받은 며칠 후 모니카는 아들과 손자와 함께 고향인 로마로 돌아가던 길에 병을 얻어 오스티아(Ostia)에서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 신의 도성(神의 都城)
어거스틴이 히포의 감독이 된 후에 도나티스트들과 교회론 논쟁을 벌이는데 주로 성례의 유효성에 관한 논쟁이었다. 도나티스트 논쟁이라고 불리우는 이 논쟁에서 어거스틴은 성례의 유효성이 집행자의 내적 자격에 의한 것이 아니고 성례의 객관성에 기초하여 배교했던 성직자에 의해 베풀어진 성례도 유효하다는 주장을 폈다.
어거스틴의 교회관은 "신의 도성(神의 都城)" (City of God; De Civitate Dei)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는 모두 22권으로 되어 있는 역사철학서이며 기독교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기독교를 옹호하기 위하여 13년이나 걸려 완성한 책이다(413 426). 410년 알라릭(Alaric)이 이끄는 고트(Goth)족이 로마를 침공하여 함락시키고 약탈한 일은 전 로마제국을 놀라게 했고 몇 가지 문제점을 제시했는데 로마의 멸망이 전통적 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이교도의 주장을 반박할 필요가 생겼고, 로마를 멸망시키신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이며 알라릭의 침략이 있을 때 정조를 유린당한 수녀들의 문제에 대해 기독교측의 입장을 밝히기 위하여 오랜 기간동안 이 책을 기술하였다.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에서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별하고,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나누어 이중적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 구조는 어거스틴의 깊은 종교적 체험과 신플라톤 사상이 전통적 교회의 신조와 혼합됨으로 오는 모순이라 할 수 있다.
로마의 황제인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까지 기독교인들은 심한 박해를 받으며 예수님께서 속히 돌아오셔서 세상나라를 멸하고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주시기 기다렸다. 그러나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고 기독교가 로마의 보호를 받게 되자 어거스틴은 기독교국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지금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왕국이요 천국이다. 따라서 신자들은 지금도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물론 장차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것도 인정하고 신자들이 왕노릇하는 방법이나 모습이 다를 수 있음을 말했지만 현재의 두 왕국 즉, 세상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구별하여 상호 의존적인 면과 보완적인 면을 언급했다. 눈에 보이는 교회가 "신의 도성"인데 이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나라를 더 다스려야 한다고 말함으로 교황권의 신장을 가능케 했고, 국가는 신자에게 "경건한 아버지"의 역할을 감당하여 평화를 보존하는 일은 물론 하나님 예배를 장려토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중세기 신정국가론(神政國家論)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3) 어거스틴의 교회관
① 참 교회의 기준
도나티스트가 자기들의 교회만이 거룩한 그리스도의 아내로 참 교회라는 주장을 어거스틴은 반대한다. 오히려 그들은 종파분리의 입장을 고수하는 준교회(準敎會, quasi church)일 뿐이며 참 교회는 사도들의 신앙과 성례와 성직을 소유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라고 주장한다. 이 가톨릭 교회야 말로 죄인을 구원하고 타락한 신도들을 깨끗케 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에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도 없다고 한다. 아니, 교회를 떠나는 그 자체를 신성모독으로 간주하였다.
② 이중적인 교회관
어거스틴은 외면적으로 "보이는 교회"에 속한 신자들과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해 성도들의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들을 구분한다. 즉, 현재 "보이는 교회"에 속해 있는 자라 할지라도 가라지와 같은 이는 후일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스릴 수 없다고 말했다. 도나투스는 현재 "보이는 교회"가 거룩한 참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배교자의 교회내 영입을 반대하는 한편 어거스틴은 "보이는 교회" 안에도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하지 않은 이가 있다고 말하며 배교자가 회개하면 교회에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입장은 교회를 현세의 혼합된 교회와 장차 천국에 이를 순결한 교회로 분열시켜 놓았다고 도나투스의 비난을 받고 있다. 어거스틴은 "보이는 교회" 안에 악한 사람과 경건한 신자가 함께 존재하는데 이는 기독교와 이방종교, 선인(천사도 포함)과 악인(마귀 포함),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선택받은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가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어거스틴의 이론에 있어서 이중적 구조를 채택하는 것은 그가 젊었을 때 9년간이나 이원론을 주장하는 마니교에 심취했던 영향일 것이다.
③ 참된 교회의 구성원
어거스틴은 교회안의 예정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한다. 즉, 신실하게 세워진 집단인 "유형적 단체"(e.terna societas sacramentorum)와 예정된 자의 숫자는 같지 않고 예정된 자들만이 참된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하나님의 예정된 은혜위에 세워졌다 하면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얻은 신자가 다시 타락할 수 있는가? 예정에 따라 구원얻은 신자의 집단 중에서 구원의 은혜를 잃을 수 없다면 유형적 단체와 예정된 자의 숫자는 같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불분명한 어거스틴의 교회관은 학설의 모순을 조화시키지 못함으로 후일 각가지 혼란한 주장들의 온상이 되고 있다. 즉, 선택받은 자로 이루어진 교회와 신실한 자들로 구성된 교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참 교회의 구성원인 교회에 아직 회개하지 못한 모든 예정된 자가 포함되는가? 신실한 자들로 구성된 교회에서 버림받을 자도 있는가? 하는 질문 등에 명확한 답을 줄 수 없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4) 도나티스트 논쟁
① 도나투스파의 주장
어거스틴의 도나티스트를 향한 반박을 명료하게 알아보기 위해 도나투스파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해 보자. 첫째는 타락한 성직자가 안수한 것은 무효이며 용서받지 못할 중죄를 범한 이들이 거행한 성례도 효과가 없다는 주장이다. 배교자에게 받은 성례는 무효임으로 교회에 들어오려는 이는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둘째로 배교자의 임직을 거부하는 도나티스트는 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격있는 다른 감독을 세웠었는데 이는 지상의 교회가 흠없고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하는 주장에서 유래한다.
셋째는 국가가 그 권력으로 교회의 문제를 간섭하는 것을 반대하며 황제에 의한 교회의 핍박과 강제를 부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교회와 국가를 분리시키는 입장에 서서 "황제가 교회와 무슨 상관이냐?"고 반문하며 국가 권력의 보호를 받으려는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교회의 전통에서 떠나는 일이며 외세에 영합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② 어거스틴의 반박
배교자가 베푼 성례전이라 할지라도 예전 자체가 유효함으로 그들에게 안수를 받은 자들이 교회로 들어오려 할 때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어거스틴은 주장한다. 성례를 베푸는 자나 받는 자의 자격에 관계없이 예전 자체가 스스로 작용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e. opere operato)고 보기 때문에 배교자에게 세례를 받은 자일지라도 그가 세례를 받을 때 고백한 신조를 확인하는 절차로 교회에 영입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이 불분명할 때만 다시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 어거스틴의 입장이다. ) 이러한 어거스틴의 입장은 성례전 자체가 객관적인 유효성을 갖는다고 보는데서 기인한다. 한편 어거스틴은 교회 밖에서 베풀어진 예전도 객관적 유효성에 따라 효과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이 예전이 사죄(赦罪)의 능력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배교자의 안수를 받은 신자가 교회로 들어왔을 때 그가 받은 성례는 비로서 효과를 나타낸다고 본다. 세례 자체가 거룩하고 구원에 유효한 것이지만 교회 밖에서는 그 효력이 정지된다고 보는 것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tra ecclesiam nulla salus)는 키프리안의 견해나 도나티스트의 견해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나티스트들이 주장하는 바 교회의 순결성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반대의 입장을 표명했다. 즉 이 세상에서의 교회는 절대적 성결을 소유할 수 없고 특별히 박해 때 배교했던 소수의 감독들이 신실치 못하다고 하여 교회가 부정해지는 것은 아니며 교회의 성결은 장래에 완성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 도나티스트가 주장하는 바대로 그들의 교회만이 거룩한 참 교회가 아니라 현재 조직된 교회 밖에도 하나님께서 보시는 참 교회가 있다고 주장한다.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정립함에 있어서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기독교인들의 궁극 목표가 지상의 일들이 아니라 할지라도 정치적 국가를 필요로 하며, 국가는 교회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와 복리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특별히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에서 세상나라와 하나님의 나라가 대립하기 보다는 서로 보완하고 협조하여야 한다고 주장함으로 국가의 교회에 대한 간섭과 교회의 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국가관은 중세 가톨릭의 정치 지향적 교회의 성향을 합리화했고 오늘날도 천주교를 중심한 급진적 교회의 사회참여 정치참여를 정당시한다.
역사적 종교로 출발한 기독교는 모든 역사를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로 보았으며 세상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자애(自愛, amor sui)와 탐욕(貪慾, avaritia)으로 쇠퇴하여 가는 데서 부터 돌아서게 하는 것이다. 자애와 탐욕, 소유욕(libido dominandi)에 기초한 세상나라(civitas terrena)는 바벨론(Babylon) 즉 "혼란의 도시"로 쇠퇴해 갈 것이나, 하나님의 나라(civitas Dei)는 지상을 순례하는 동안 지상의 평화(pa. terrena)를 위해 봉사하다가 마지막에는 세상나라와 분리되어 최후 승리와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을 받게 될 것을 "역사의 신학"(theology of history)라고 부를 "신의 도성"에서 밝히고 있다.
2. 맺는 말
교회가 세속화되고 성직자가 신앙을 버리고 타락해 가는 현실을 좌시(座視)할 수 없어 교회내의 개혁운동으로 교회의 순결과 성직자의 성결성을 고조하던 엄격한 소수파의 노력이 어떻게 이어 왔는가를 살펴보았다. 비록 다수의 힘에 의해 정통적 소수가 배척을 받았으나 교회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아내로 준비시키려는 그들의 노력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클 줄 안다.
지상의 평화를 위해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살펴보고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겠으며 지나친 사회참여로 지상의 평화 대신 원치 않는 혼란이 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참다운 교회의 모습이 갖추어져야 하겠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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