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적 설교 작성
설교의 작성에 대하여
(구속사적인)설교의 작성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본 글은 설교를 작성하는데 있어서 알아야 할 필요한 것들을 이론적으로 전개한 것이며, 그리고 설교를 준비하고 작성하는 분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방식과 생각이 있을 것이지만, 설교를 준비해 가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1. 설교 작성 준비
설교하는 목회자가 설교를 작성하는 실제에 들어감에 있어서는 먼저 설교가 올바르고 정확하게 가르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진리인 구원의 원리가 하나님이 계시하고자 하는 뜻(의도) 그대로 설교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설교는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뜻을 온전히 나타내어서 알려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참된 교회의 표식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순전한 선포를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벨직 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는 29장의 참 교회의 특징 및 거짓 교회와의 차이점에서 “참 교회임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다. 만일 복음의 순수한 교리가 전파되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워진 성례가 순수하게 이행되며, 교회의 가르침으로 인해 죄를 징벌(권징)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이는 참 교회에 속하는 것이다. 요컨대, 모든 일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뤄지며 동시에 말씀에 어긋나는 모든 일이 제거될 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유일한 머리되신 분으로 인정됨으로 그 누구도 이 분에게서 벗어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만 참 교회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가르쳐 참 교회됨의 가장 중요한 표식으로 복음의 순수한 교리 선포 곧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함으로 전파되는 것을 말하며 이를 그렇지 않은 거짓 교회와의 구별로 두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하게 전파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뜻에 의해서 나온 것이거나 전해진 것이 아니라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쓰여진 것이기 때문이다(벧후1:21). 그래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순전한 전파에 설교를 두어야 하는데 이는 설교자는 그들 자신 스스로의 원함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은사를 부여하신 데 따라서 봉사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데 설교의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설교의 목적을 둔다. 사도 바울은 만일 사람을 기쁘게 하는데 설교의 목적을 두고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갈1:10). 설교자가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함으로 전함으로써 복음을 바르게 전파하는 것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러니까 주께서 주신 복음이 아닌 다른 것을 설교한다면, 이는 하늘에서 온 천사가 그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으로서 누가 그 설교를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갈1:8).
그렇기 때문에 설교는 하나님이 계시해 주시는 뜻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설교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성경해석의 원리에 의해 성경을 해석하여서 작성해야 한다. 그리고 설교는 성경해석의 원리에 의해서 한 해석을 설명하여 가르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구원의 원리를 사람들이 알아 깨닫게 하여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에 있도록 해야 하며, 이미 이 믿음에 서 있는 성도들에게는 그 지혜의 충만한 상태에 있게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설교를 작성함에 있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은 ‘설교의 본문 선택’이다. 설교를 작성하기 위한 본문 선택은 사실 성경 전체 그 어디에서나 가능하다. 여기에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이 있고 나중에 하여도 될 것이 있고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통일성과 충족성을 염두에 둘 때 설교의 본문 선택에 어려움은 없다. 어떤 것이 더 특별하거나 특별하지 않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말하고 있으므로 성경 어느 곳을 본문으로 선택하여서 설교하여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된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으로서의 설교가 아니라면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
이때 성도들에게 설교하여 가르치는 주된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서 충분히 고려할 필요는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도들의 신앙의 성격과 수준에 따른 교육의 필요성에 의해서이다. 예컨대, 하나님의 복음을 가르치고 믿음의 본질을 가르칠 때 요한계시록을 먼저 가르치는 것에 앞서 공관복음이나 창세기를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성경 이곳 저곳을 예배 시마다 본문으로 선택하여 가르칠 수도 있으나 성경은 통일있는 점진적 계시성을 띠고 있으므로 성경 문구나 절별, 단원이 아닌 장별, 주제별, 사건별로 체계 있게 가르칠 수도 있다. 산과 흐르는 물에는 각기 산맥과 물줄기가 있듯이 성경 또한 계시의 맥이 있다. 가령 헌금(연보)을 가르칠 때에 성경 어느 한 곳에서만 단어나 문장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헌금을 말씀하시기 위해 그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이나 가르친 교훈을 같이 다루고 있다. 가령 헌금을 말할 때 대개 말라기서의 십일조에 집중하고 있는 형편이나, 헌금의 원리에서 십일조를 다룰 때는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비롯해서 야곱의 십일조, 이스라엘의 십일조의 역사 속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설교의 작성에 있어서 정말 설교하는 목회자가 본문 선택에 큰 관심과 깊은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은, 설교가 성경 본문의 해석을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의 뜻과 그 뜻의 계획인 구원의 원리들을 가르치는 것임으로, 성경해석의 원리에 따라 성경 본문을 해석할 수 있지 않으면 안 됨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간과한다고 할 때 설교는 하나님이 계시하여 주셔서 설교자에게 갖고 계신 하나님의 원하심과는 전혀 다른 설교자 임의로 설교하게 되고 만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설교가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설교가 되고 만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사도 삼아 이방인들에게 보내주신 것은 오직 복음을 전하는데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의 지혜로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럼으로써 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고자 하였다(고전1:17).
설교자는 설사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들어 설교하는 노력을 할지라도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설교가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설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현하의 설교하는 목회자에게서 설교를 하기 위하여 본문을 선택함에 있어서 이름난 목회자의 설교를 이해에 대한 아무 소화 없이 단지 설교하기 위하여서 빌리고 설교문을 복사, 편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본문을 선택하여 설교 제목을 정함에 있어서 아무런 생각과 연구 없이 단지 성경을 자기 마음에 맞는 것으로 정하고, 그 제목에 맞춰 설교를 작성하는 것을 또한 보고 있다. 또는 본문에서 말씀하신 의미와는 전혀 상관없이 단지 성도들에게 필요한 설교를 하기 위하여서 본문을 설교하는 것도 보고 있다. 그러나 설교 작성에 있어서 본문 선택과 설교 작성은 설교하는 목회자 자기 좋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문의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것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으로서 선택하여야 하고 해석한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작성하여서 설교하여야 한다. 그래서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구원 얻은 믿음에 지식을 더하고 더욱 지혜 있게 하는 유익을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를 작성함에 있어서 성경을 신중히 생각하고 연구하는, 그래서 마음에 깊은 고민과 시름을 가지며 말씀의 진리를 파악하는데 노동자의 노동하는 수고와 노력을 소요하고 어려움과 힘의 부침을 겪지만, 마치 설교를 작성하는 것을 남들이 안 하는 것을 할 수 없이 한다느니, 어렵고 힘들어 못하겠다느니 라고 하지 않는다. 사실 설교하는 목회자에게 있어서는 설교하는 것만큼 기쁘고 즐거운 것이 또 없다. 설교하는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겁나는 것이 아니라 설교하는 시간을 기다리는 기쁨과 즐거움을 갖는다. 그래서 기다려진다. 정말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성도들이 주의 복음의 진리를 듣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고 있는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설교를 작성하는 설교자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설교자가 주께로부터 받은 복음의 진리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다른 믿음의 지체와 나누고 그래서 그 진리로부터 오는 은혜를 함께 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설교하는 목회자는 성경연구하고 설교를 작성하는 것이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한다. 설교를 준비하지 못해서 예배 때마다 임기응변식으로 대처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늘 설교하는 것으로 목회가 행해져 가고 있어야 한다. 설교 본문을 선택하는데 매번 애를 먹는 게 아니라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는데 애를 써야 한다.
2. 설교 작성에 있어서의 본문 선택
설교는 본문과 결부되어 있다. 설교하는 목회자가 본문을 선택하여 설교한다고 할 때 본문을 인용하여서 설교자가 하고 싶은 말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하고 계신 설교를 설교자는 하는 것이다. 성경 본문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이시오 교훈이시고 권세이시다. 그러므로 말씀하여 교훈하신 그대로 성도들에게 행하시며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인 자에게 구원을 얻게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여 그의 것이 되게 하신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가 본문으로 어떤 자에게는 들리지 않으며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마음에 깨달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설교로 들리지 않는다. 단지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의 사상을 가르치는 철학이요 좋은 교훈을 깨우쳐 주는 학문으로밖에는 인식하지 않는다(행26:24-29). 반면에 그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가 본문으로 어떤 자에겐 감추지 않고 드러나 그 진리가 알려진다. 그래서 설교가 들리며 보이며 마음에 깨달아 진다(마13:11-16). 착한 마음이 되게 한다(눅8:15).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설교는 복음의 진리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서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관한 책이다(계1:12). 계시는 구원의 원리를 담고 있는 무오하고 명료하며 축자적이다. 그러므로 함축적이다. 이 계시는 완전하고 온전하여 더하거나 뺄 것이 없다. 또한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는다(마5:18).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에서 계시하신 뜻을 행하시는 권세로 임하여 말씀하신 그대로 다 이루신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더하거나 감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신실하심이 반드시 다 이루신다.
설교하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해석하고 설명한다. 이것이 설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 경륜을 다 나타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신다. 설교하는 목회자가 본문을 선택하여 해석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목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하셨으며, 이를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필요한 직무로 삼으셨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위해서 교회를 섬기는 봉사자로 세움을 입었다. 그러기에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의해서 교회를 섬겨 봉사하는 것에 전무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온전케 세우는 일을 하게 하셨다. 모든 교회의 직분자나 성도 역시 교회 안에서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여 증거하는 일이며, 그에 의하여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그와 하나된 몸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성경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님의 신적 권위가 행사가 되는 설교이나 설교자가 성경 본문을 해서하여 설교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심을 쉽고 자세하게 알아듣도록 유익을 더하게 된다.
트림프(C. Trimp)는 설교 작성에 있어서 본문 선택의 중요성을 말하기를 “성경 권위의 문제는 본문 선택과 설교 준비를 할 때 그 중요성이 나타난다” 라고 하였다. 그의 말대로 성경을 성경 되게 하며,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은 설교 작성에서 나타난다. 본문 선택과 그 본문의 설교를 준비하는 것에서 말이다. 본문을 이탈한 설교는 성경의 권위를 상실하게 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의미와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을 설교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곳을 본문과 연결하여 연관있게 설교하는 것을 배제시키며 하는 말은 아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시고자 한 것과는 상관없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설교자 임의에 의한 설교를 두고서 하는 말이다. 본문을 선택하고 다른 곳을 말씀으로 설교한다 할지라도 사실은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의미나 의도를 벗어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본문과 같거나 연관되었을 때에 가능한 일이다. 트림프는 이와 관련한 말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신다는 확신은 본문 설교에 기초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또 다시 성경의 모든 구절마다- 아주 짧은 본문이나 본문의 한 부분을 본문 선택하는 것에 대해서 - 설교의 본문으로 선택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말하기를 “설교의 본문은 성경의 부요함이 어떤 측면에서 나타나는 성경의 부분이다. 그러므로 설교 본문은 확실히 관련된 전체이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성경을 모토 설교(motto prediking) 화하는 것으로서 설교를 저속한 형태로 전락시키고 만다.
3. 설교 작성에 있어서의 설교 방식
설교작성에 들어갈 때 설교자가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설교를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이냐는 것이다. 흔히들 설교자는 설교의 방식을 믿음의 인물, 기적을 비롯한 성경 밖의 예화 등에서 믿음에 모범이 될만한 것을 다양하게 찾으려고 하지만, 이는 참으로 위험하다. 왜냐하면 설교가 구원의 원리에서 이탈하여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간과하기 쉽기 때문이다. 구속사적 설교방식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보통 모범적 설교방식을 들 수 있다. 소위 모범적 설교방식은 성경에 나오는 역사적 인물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를 경고적 모범으로 사용하면서 그에 따른 적용을 ‘그 사람처럼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기록된 이야기에 어떤 사람이 올바르게 행동했으면 그를 본받을 만한 모범으로 사용하여 그 적용을 ‘그 사람처럼 행하라’는 것이다. 이 방식은 심리적 차원에도 해당되어서 ‘그 사람이 경험하는 심리적 문제는 우리의 신앙에서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범적 방식으로 성경을 접근하면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들을 온당하게 다루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구속사적 방법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신학자들은 역사적 본문에 나오는 인간을 모범으로 사용하는 설교방법에 항거했다.
설교자가 성경 본문을 구속사적으로 설교한다고 해서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을 모범으로 제시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는 믿음에 모범적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인물로서 에녹, 아브라함, 모세, 다윗을 들 수 있다. 야고보는 라합을 행함이 있는 믿음의 모범으로 제시하였다(약2:25). 같은 서신에는 의인의 기도가 역사하는 힘이 만다는 사실의 예로써 엘리야가 제시되었다. 그런가 하면 느헤미야는 솔로몬 왕을 예로 들어서 그가 이방 여자와 결혼한 일을 경고적 모범으로 사용했다(느13:26). 그러나 이 모든 인물은 그들이 모범되는 본을 보였으므로 그 모범을 좇아서 모범적 신앙을 보여야 한다거나, 또는 어떤 결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식의 적용으로 오늘날의 설교에서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성경에서 믿음에 모범을 보였던 인물들에게서 그 인물됨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음으로 지녔던 것에서 말하고자 한 하나님과의 관계성과 하나님이 그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것인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의 원리이다.
설교가 구원의 계시를 말씀해 주시는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때, 설교방식을 ‘구속사적 설교’ 외의 다른 것에서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죄인된 인간에게 말씀해 주시는 의도는 오직 한 가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원의 복음’이다. 그러니 구속사적 설교방식 외의 다른 것으로 설교방식을 삼아나갈 수는 없다.
4. 설교 작성을 위한 본문 해석법
설교를 작성하는데 있어서 성경 본문 선택이 결정되면 일차적으로 고려할 것은, 그 본문의 앞뒤 문맥의 연결 속에서 확실하고도 합당한 관계뿐만 아니라, 해석의 방법과 비교, 비평, 평가를 가져나가는 것에서 성경해석의 원리를 적용하여 본문을 해석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성경해석의 원리에 의해서 해석되는 성경 본문을 성경해석법에 충실하면서 풀어 설명하여 나가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성경해석의 원리와 성경해석법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성경해석의 원리는 성경에 계시하신 ‘구원의 원리’를 밝혀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성경해석법은 그 구원의 원리를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하여서 성경이 기록될 때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는 가운데 그 특성에 맞게 해석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인 영감에 의하여 하나님의 계시하심이 기록되어진 것으로서 계시와 영감이 서로에 대하여 가장 밀접한 가능적 관계(possible relation)를 가지고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인정하는 것은 그 저자들이 하나님에 의해 영감 되었다는 확신에 의거하고 있다. 계시와 영감 그 둘이 동일시될 수는 없으므로 목적과 효과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다. 이에 대하여 하지(Hodge)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계시의 목적과 의도는 지식의 전달에 있다. 영감의 목적과 의도는 가르침에 있어서 무오성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계시의 효과는 그 수령자들로 하여금 더욱 현명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영감의 효과는 그로 하여금 가르침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보존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서로 다른 목적과 효과는 서로의 밀접한 연관성으로 인해서 더욱 성경을 정확무오 하도록 협력한다. 그래서 가감 할 수 없는 참으로 계시의 충족성을 이루고 있어 하나님의 계시하시는 구원의 원리(진리)를 온전히 명확하게 드러내신다.
이때 하나님의 계시하심을 성경 기록자에 영감하여 주심에 있어서는 무지한 자에게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신적 지시에 충만한 자, 은혜와 믿음이 충만한 자에게 또한 성령 충만하셨다.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적 지식이 충만한 자에게 영감을 주셔서 기록하게 하셨다. 그 지식이 인간 자신의 지적 이해를 초월하여서 신적 지식에 붙잡힌 자가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종종 선지자들이 그 백성에게 전할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은(단12:8-9), 그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 무식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가 선지자 자신들이 지식하고 있는 그 의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부, 곧 신적 역사에 의해서 임하였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스가랴서에서 선지자 스가랴는 백성들을 위한 메시지를 포함한 몇 가지 환상들을 보았지만 이것들을 그에게 해석해 줄 수 있는 천사의 도움을 필요로 한 것은 그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사실 성경의 기록자들은 선지자와 사도(사도성을 가진 제자들을 포함)들이었다.
성경의 계시의 영감은 영감의 성질에 있어선 ‘유기적 영감’이며, 영감의 범위에 있어선 ‘축자적 영감’이다. 그래서 ‘유기적 축자 영감’되었다고 하는 것이 성경 기록에 대한 교회의 정통 사상이며 신앙이다. 성경의 영감의 성질이 유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시하심을 성경으로 기록하시게 함에 있어서 성경 기록자들을 기계적으로 사용하여 기록하게 하시거나 일방적으로 말씀하여 기록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내면적 존재(실유)의 법칙과 조화되는 유기적 방식으로 작용하셨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조석만은 그의 조직신학에서 기록자의 ①인적 요소의 적용 ②문원과 배경의 인용 ③문체와 용어의 사용 ④적재적소에 사용하심을 들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들을 사용하시되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역사 성격, 성벽(기질), 재능, 은사, 교육, 교양, 용어, 말씨, 문체에 의해서 사용하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성경의 영감의 범위가 축자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감 하셔서 기록하게 하신 계시의 말씀이 글자 하나하나에 빠진 것이거나 더한 것이 없도록 정확무오하게 하셨고, 계시하신 구원의 진리에 불충분하지 않도록 하셨다고 하는 것이다.
성경의 축자적인 영감과 그 완전성에 대해서 조석만은 로레인 뵈트너(L .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p.11.)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먼저 축자적 영감설에 대해서 말하기를, “거룩한 성경 저자들에게 영감된 신적 영향은 사상에만 아니라, 저자들이 사용한 문자에도 미친 결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시기로 의도하신 사상들이 정확무오하게 전달되었다는 것과 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를 말하였다는 의미에서 저자들은 하나님의 기관(器管)들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고 하였다. 또 완전 영감에 대해서는, “성령의 충분하고 충족한 감화가 성경의 모든 부분에 확장되어 성경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권위적 계시가 되게 하여 그 계시가 사람의 마음과 의지를 통하여 오게 되며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라고 말하였다.
성경 기록의 계시와 영감을 특성을 이해하고 있을 때 성경해석 또한 계시와 영감 되어진 원리와 원칙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계시하신 구원의 원리를 해석하는 해석의 원리와 영감하신 성질과 범위의 특성을 따라서 해석하여야 한다. 여기에 성경해석의 원리와 성경해석법과의 차이가 있으면서 실은 이 둘이 이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해석을 올바르게 하도록 상호 협력한다. 소위 성경해석의 원리와 성경해석법에 의해서 해석되어진 설교라야 성경적인 해석에 의한 설교라고 할 것이다. 사실 그렇게 한 설교라야 하는 것은 교회와 성경해석과의 관계성을 생각할 때 분명히 그렇다. 개혁주의교회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해석하며 또 보호하는 임무를 위탁받아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해석적 사명을 감당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결정을 성경 위에 두거나 무오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는 성경을 근거로 서 있다. 교회는 성경이 있기 때문에 존재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교회의 권위로서 자리 잡고 있다. 교회가 교회 되고 권위 있는 것은 교회 그 자체의 권위가 있어서가 아니라 성경이 교회 안에 교회의 권위로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여 가르치는 사명을 가지는데서 그 권위를 찾는다. 그렇지를 않고 교회가 성경을 올바르게 가르치지 아니함으로 권위를 잃는다. 그것은 곧 교회의 타락이다. 거기에서 종교 개혁의 필요성이 요구되며, 그것은 곧 교회의 회복을 가져오는 일이다.
설교 작성을 위한 본문의 해석법으로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들이 있다.
1) 문법적-역사적 해석법
성경해석법을 생각할 때 우리는 성경 본문의 중요성을 새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성경의 원리가 성경의 본문으로 계시되어 해석되고 있으므로 성경의 본문에 의해서 성경을 해석해 줌으로 구원의 원리를 가르쳐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성경해석의 방법은 성경에서 계시하시고 있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성경 본문에서 올바르고 온전하게 해석하는 데에 도움과 유익을 준다. 사실 성경은 그 기록이 하나님의 감동하신 영감의 성질과 범위 안에서 성경 자체적으로 해석의 방법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본문을 떠나서는 성경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성경에 계시하신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는 해를 가져온다. 성경 본문에서 성경이 가지고 있는 해석의 방법을 따를 때에 성경해석법은 성경을 해석하는 설교자를 올바르게 인도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제일 먼저 성경 본문을 해석하는 방법을 찾을 것은 ‘문법적-역사적 해석 방법(The Grammatico-historical)'이다. 이 성경해석 방법은 성경의 기록 성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방법은 성경이 기록됨과 동시에 성경 속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문법적-역사적-이란 용어를 성경 해석에서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카일(Karl A.G.Keil) 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문법적-역사적 해석 방법은 성경 본문의 해당 언어의 문법적 법칙과 역사적 사실과 형평을 터득하여 저자가 전하려고 하는 정확한 의미를 찾아내어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문법적’이란 말은 ‘문자적’이라는 말과 본질적으로 같다. 영어에 익숙한 우리들은 문법적이라 하면 단어와 구절을 배열하여 문장을 만드는 것으로 그 뜻을 이해하고 있으나 성경 해석에서 문법적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 사용된 단어와 구절이 쓰일 때 무슨 뜻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찾는 것이다. 여기서 성경 본문에 사용되어지고 있는 어원적 연구의 필요성을 찾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이란 말은 역사적인 형편 가운데서 성경을 기록한 저자가 사용한 용어의 뜻을 찾아내는 것이다. 즉 저자의 시대와 형편을 연구하여 저자가 사용한 말의 참 뜻을 찾아내는 것이다. 여기서 ‘문법적’이라는 말과 ‘역사적’이라는 말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진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언어란 역사적인 형편과 환경에 의해 그 뜻을 달리 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곧 성경 본문에서 사용되어진 문법적 요소는 설교하고자 하는 성경 본문의 기록이 안고 있는 역사적 요소의 일치에 의해서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소위 오늘날에 사용하고 있는 일반적인 문법 규칙과 상충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성경 본문이 기록되어진 그 당시의 영감에 의해 기록되어진 뜻을 현대적으로 맞춰 본래의 뜻을 감하거나 변질, 왜곡시키지 않고 본래의 뜻 그대로 올바르게 해석할 수가 있게 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 기록되어진 문자의 현대적 해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인 계시하심의 본래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와 올바르게 파악하여서 성도들에게 설교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데에 그 의미를 적용시킬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래의 뜻이 달라지지 않고 본래의 뜻으로 성도들이 성경 지식을 갖게 하는데 인도해 주고 삶에 적용시키는 것으로서 이다.
그러므로 문법적-역사적 해석 방법은 단어의 뜻과 역사 이해의 중요성과 함께 무엇보다도 본문 파악과 이해에 있다. 사실 단어나 역사 이해에 치중하여서 단어나 역사를 해석하여 단어 설교, 역사 설교가 될 것이 아니다. 단어나 역사 그 모두는 성경 본문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참 뜻을 찾는데 도움을 주는데 일익을 담당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설교하고자 선택한 성경의 본문 전체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어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성경해석법 중의 하나인 문법적-역사적 해석 방법을 좀 더 일반 원칙으로 분류하여 소개한 사람이 있다. 노튼 스테?(T. Norton Sterrett) 인데, 그는 ‘성경해석의 원리(How to understand you Bible)' 란 저서에서 일반원칙과 특별 원칙으로 구분하여 소개하였는데, 일반원칙으로 여섯 가지를 언급하였다.
첫째, 문맥을 따라서 이해할 것
둘째, 어휘를 이해할 것
셋째, 문법을 이해할 것
넷째,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것
다섯째, 배경을 알 것
여섯째, 성경해석은 성경으로 할 것
이것을 다시 하나씩 소개해 보도록 하면 다음과 같다.
(1)문맥을 따라서 이해할 것
이야기체, 설교, 시, 기타 어떤 종류의 말이라도 이를 해석하는 데에는 일반적인 어떤 ‘원리’나 ‘규칙’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문맥(context)을 따라서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다. 본문은 이것을 진술하고 있는 문학적 문맥 내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의미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 문맥을 떠난 본문 해석은 본문을 빙자하는 행위이다. 문맥은 대개 우리가 읽는 본문의 앞뒤에 있는 부분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문맥은 본문과 함께 붙어 있는 부분이다.
문맥은 주로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본 절의 전 후에 오는 (한 절 혹은 두 서너 절) 가까이 있는 문맥이고 또 하나는 본문의 앞장이나 그 다음 장 혹은 다른 부분에 있는 먼 문맥이다.
문맥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주로 단어의 의미는 한 문장이나 문단(paragraph)에서 드러난다. 이 경우 문장은 그 단어의 문맥이 된다. 구(句, phrase)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문장 자체가 명료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문장을 담고 있는 문단(paragraph)이나 단원(section)이 문맥이 된다.
그런데 문맥을 무시하는 두 가지 사례가 있다. 하나는 성경 구절을 개별적으로 암기하는 것이다. 성경 구절을 암기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나 문제는 암기한 일부분의 성경 요절을 완료된 문장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며 그에 따라서 암기한 성경 요절로 해석(설교)하고자 하는 성경 본문 전체의 의미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큰 과오를 범하기가 쉽다. 또 하나는 성구사전을 단순히 어휘 공부를 위해 사용하는 일이다. ‘은혜’나 ‘인내’같은 단어가 나오는 성경 구절은 쉽게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말들은 문맥에 따라 일일이 공부하기는 어렵다. 문법적-역사적 해석 방법을 설명함에 있어서 언급되었지만 같은 은혜나 인내라고 하는 단어라 할지라도 그 단어가 있는 성경 본문과 다른 본문과에 있어서 전혀 다른 해석일 수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에베소서 1장 2절, 6절, 8절에 각각 ‘은혜’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어떤 의미에서 사용되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2절에서는 은혜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난 신적 기원과 구원론적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6절에서는 은혜가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여서 되어진 것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뜻을 이루셔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곧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반드시 이르게 하시는 은혜 베푸심의 목적론에서 사용되고 있다.
8절에서는 은혜가 믿음은 인간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인간의 육체적 행위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은혜의 베푸심에 의해서 주어진 것으로서 믿음을 말미암아 구원 얻게 하신다고 하는 믿음의 절대성의 근거인 은혜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은혜란 단어를 거론하며 사용한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설교자 임의로 은혜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그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본문과의 관계에서 설명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 예는 창세기 3장 17절과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각각 사용하고 있는 ‘수고’라고 하는 단어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창세기 3장 17절의 수고는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 사망아래 놓여진 인간에 대한 형벌로서 사용하고 있는 반면에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수고는 율법주의자들의 율법아래 놓여져 있는 짐, 그래서 율법(과 전통)으로 말미암아 부과된 짐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에 의해서 구원에 이르려고 하여서 스스로의 행위와 그 수고로 사망에 이르는 짐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법에 있어서의 원칙은 제일 먼저 문맥을 따라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성경 본문만으로도 문맥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면 성경 본문 전 후와 관련하여서 해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를 않고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임의적으로, 주관적으로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2)어휘를 이해할 것
그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단어의 뜻이다. 단어의 뜻에 따라 본문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여 해석하는데 도움을 준다. 문제는 어떻게 정확한 단어의 의미를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먼저는 성경 원어가 지니고 있는 뜻을 알아야 할 것이며, 다음으로는 단어 하나가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역시 문맥에 비추어서 살펴보아야 한다. 같은 단어라도 상이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거나 유사한 의미라 할지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전달하고 하는 내용의 의미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도한 그 단어를 둘러싼 다른 말들에 의해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맥에서 단어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3)문법을 이해할 것
문법이란 문법 학자들에 의하면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단어의 형식과 단어의 관계이다. 이 두 가지가 다 의미에 영향을 준다.
단어는 독립되지 않고 언제나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한 단어가 다른 단어와 연결하여서 본문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밝힌다. 그러므로 단어의 연결을 살펴보도록 해야 한다. 예컨대, 고린도전서 11장 27절이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을 보도록 하자. 여기에서 “합당치 않게”라는 말이 “누구든지” 에 걸리는지 아니면 “먹고 마시는” 데에 걸리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전자의 의미로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럴 경우에 어떻게 해석되는가 하면 “누구든지 합당치 않은 자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게 된다. 그래서 합당치 않은 자는 주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실 수 없다,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해석하게 된다. 즉 스스로 떡을 먹고 마심에 합당치 않다고 판단하고 있는 자는 성찬에 참여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참여하기를 꺼려하게 된다. 그러나 문법을 보면 그런 뜻이 아니다. '합당치 않게'는 부사로서 동사를 수식하고 있는 것이지, 명사를 수식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합당치 않게' 라는 말은 사람이 아니고 먹고 마시는 데에 걸린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신이 합당치 않다고 성찬에 참여하기를 주저하고 꺼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죄를 붙잡고 있으며 행하는 사람까지도 괜찮다며 성찬 참여에 꺼림이 없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 모두가 합당한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주의 죽으심과 그 보혈의 공로가 그리스도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의 죽으심과 그 보혈의 공로를 아는 자, 곧 구원 얻은 믿음을 가진 자인 그리스도인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죽으심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없이 단지 모여서 먹고 마시는 데 즐거움을 두고서 배불리 먹고 마시는 것에 있다면, 사실 성찬을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된다. 그에게는 주가 거하고 있지 않고 다만 육의 욕망으로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것이기 때문에 주의 떡과 잔을 범하게 된다. 그는 떡을 먹을지언정,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새언약의 은혜에 참여하고 있지 않아 주의 구원의 은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오히려 죄를 먹고 마심으로 인해서 정죄에 이른다.
로마서 5장 16-20절을 보면, 바울은 믿는 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의 의를 얻는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생명, 또는 생명 안에서 다스림을 받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계속되는 문맥에서 우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따라서 성령이 믿는 자에게 새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믿는 자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 영원한 생명이란 단지 영원토록 오래 산다는 시간의 길이만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으며 성령에 의하여서 나타내게 되는 새생명의 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문법을 이해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 본문이 지니고 있는 문장의 문법적 요소에 전적으로 의지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아 영감으로 성경을 기록한 저자가 사용한 말의 참 뜻을 찾아내는 것에 있다는 것에 염두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4)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것
성경의 본문을 해석하여 이해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해석 방법은 저자의 의도(혹은 목적)에 따라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앞의 설명들에서 어느 정도 포함된 것이긴 하다. 그러나 성경의 본문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은 한층 더 성경 해석을 올바르게 하게 한다. 예컨대, 요한일서 5장 14절에서 이 목적을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앞의 내용들을 왜 기록하였는가 할 때 사실 그 모든 것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의 모든 기록, 지금까지 기록하여 말한 모든 내용은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한 설명이었으며, 정말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있다고 하는 것에 있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예는 요한복음 6장 40절에서도 볼 수 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이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것이었고, 또한 참 떡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준 것이고,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사람들에게 표적으로 주신 것이고,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어 자신을 나타낸 것이었다. 성경 본문에서 하시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가 하고 저자의 의도, 성경에 기록하여 말씀하신 의도를 이해하는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참으로 중요하다.
(5)배경을 알 것
성경 해석법에 있어서의 한 원칙은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 배경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가나안 땅을 약속의 자녀와 땅으로 모형(표상) 삼으신 것이나, 십자가로 제자의 도를 설명하시는 것,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신 것,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 새 옷과 헌 옷,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찾음, 포도원이나 목자의 양 비유 등은 역사적 요소, 지리적 요소, 문화적 요소의 배경을 이해하고 있는 가운데 해석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6)성경해석은 성경으로 할 것
사실 이 성경해석법의 원칙은 대원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성경 전체적인 원리에 따라 해석되어져야 한다. 성경은 통일성을 이루고 있어서 한 주제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서로 모순 되거나 마찰되지 않는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하나의 진리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하나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전체로서 파악하고 있으면 본문이나 어떤 구절을 엉뚱하게 결론짓는 우매를 피할 수 있다. 이 대원칙을 무시하고 한 부분만을 사사로이 해석함으로서 위험한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소위 이단 사상이나 신비주의 사상, 세속주의 사상을 양산한다. 세상 지식과 도덕적 설교를 하게 된다. 종교적 철학으로 전락한다. 예컨대, 통일교의 원리강론이나 여호와 증인의 교리, 제칠일안식교의 교리, 다미, 다베라, 마라나타 등의 각종 선교회의 시한적 종말론, 교회 속에 일반적으로 퍼져 확산되어 있는 비성경적이며 비복음적인 신앙 사상들, 그 모든 것이 어디에서 왔는가? 성경해석을 성경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읽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성경은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모두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해석되어진 것이 아니다. 앞서 성경해석의 원리에서 언급한대로 분명한 구원의 원리(진리)를 아는 것으로서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시고자 하시는 계시의 뜻을 아는 것으로서 여야 한다.
2) 비유-상징적 해석법
노튼 스테?(T. Norton Sterrett)은 일반 원칙과 함께 특별 원칙을 소개하였는데 비사(比辭), 상징(象徵), 표상(表象), 비유와 풍유, 히브리 관용어, 히브리 시, 예언(豫言), 교리(敎理),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들었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따로이 특별 원칙으로 분류하기 보다는 일반 원칙 안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사실 특별한 원칙에 의해서 해석되어질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노튼 스테?이 분류하여 나열한 특별 원칙의 대부분은 특별한 해석을 요하기보다는 그것들이 기록되어 있는 본문이나 또는 그와 관련된 곳에서 해석을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비유와 상징 두 가지, 곧 비유-상징적 해석법이란 명칭으로 붙여서 살펴보고자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기타의 다른 여러 해석상의 방법들은 이 두 가지의 해석 방법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1)비유적 해석법
비유의 경우에 있어서 한 예를 들면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가 있다. 이 씨 뿌리는 비유는 ‘천국 비유’이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제자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비밀의 성질을 지닌 천국에 대한 설명으로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제자들이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를 물어 알고 싶어 할 때 해석해 주었다. 그런데 씨 뿌리는 비유를 대개의 경우는 씨 뿌리는 비유로 해석하지 않고 밭의 비유로 해석한다. 그래서 좋은 밭이 되자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어서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하고 비유를 말씀하였다. 여기서 천국을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으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의 어디가 천국과 같은 것인가 할 때 본론으로 비유를 말씀해 나간다. 그래서 원수들이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는데 결국은 결실 할 때에 가라지도 보인다고 하는 것이다. 좋은 씨를 밭에 뿌렸는데 가라지도 난 것은 씨 뿌린 주인이 한 것이 아닌 원수가 한 것이라고 하는 것과 그 가라지를 뽑는 것으로 곡식까지 피해를 입지 않도록 가만 두게 하여 추수 때까지 같이 자라게 한 후 추수 때에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좋은 씨를 뿌린 자의 곡간에 넣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세상에 복음이 들어와 어떤 자를 결실되게 하지만 동시에 원수도 가라지를 덧뿌린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때에 이르면 분간되어진다. 그 속에서 가라지가 있는 것으로 해를 입지 않도록 곡식을 보호하시나 가라지는 심판의 대상으로 자라게 하신다. 그러다가 추수 때에 구분하여 가라지는 심판하고 곡식은 천국에 들어가게 하신다. 천국은 바로 그렇게 온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천국을 심는 절대 주권적 사역을 좋은 씨를 뿌리는 자로 비유하셨는데 그것은 곧 해석이기도 하다.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감추인 비밀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이 비유 이하의 모든 비유가 다 그와 같다. 그러나 그 비유가 비유 그 자체에 해석되어졌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아는 것은 아니다.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어진 자만 깨달아 안다. 허락되지 않은 자에게는 더욱 감추어져 있게 하시는 것이 또한 비유이다.
비유적 해석법은 비유를 말씀하신 자의 의도가 비유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찾아내어 해석하는 것이다. 비유로 말씀하실 때는 말씀하신 자의 의도가 비유 속에 감추어져 있으나 또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으로서 자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고 하는데서 비유는 그 스스로 해석을 하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서경에 해석되어진 해석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비유에 의해 해석을 품고 있는 것의 범위 밖에서 해석하는 자의 상상을 동원하여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것이 되고 만다.
(2)상징적 해석법
성경에 해석되어진 해석법의 두 번째로서는 상징적 해석법을 들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상징적 계시의 해석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는 상징적 용어가 많이 나온다. 한 예를 들어보도록 한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하신 말씀이 있다. 여기서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를 어떻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가 하면 ‘반석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반석은 그리스도로 가르칠 경우, 모든 반석이 그리스도가 된다.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한 것은 반석, 다시 말하면 돌을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바울은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며, 그 좋은 방법으로서 상징법을 사용한 것이다. 반석을 그리스도의 상징적 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그는 무조건 반석을 그리스도로 상징화한 것이 아니다. 그가 반석을 상징법의 자료로 삼은 데에는 그만한 구원사적 배경 속에서였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고 광야에서 만나라고 하는 신령한 양식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신 것을 상기시키는 것으로서 이다(출16:-17:7).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을 먹인 양식과 마시게 한 음료는 땅에서 그들 스스로의 노력과 찾음으로서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서였다. 양식과 음료는 땅의 냄과 결실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며 주어진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먹고 마셨으니 이는 그들 모두가 따르는 하나님에게서였다. 그것을 신약적으로 바울은 상징화하여 고린도교회에 가르쳤다. 고린도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다 같이 함께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에 의해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이 함께 신령한 양식과 음료를 마시는데 그것 또한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 한 분에게 소속되어 있는 자녀들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상징화한 반석은 무조건 한 사물을 들어서 상징화한 것이 아니라 구약적 배경에 근거해서 이스라엘을 먹인 양식과 마시게 한 음료 ‘그것’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상징화한 반석은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계시의 한 방편, 일시적인 항 방편으로 삼았단 것으로서 당시에 고린도교회의 성도를 가르치는 자료로 삼기 위하여 한 번 사용했던 것이었지 산과 들, 여기저기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바위를 가지고 그것을 곧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으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여기서 상징적 계시와 모형(표상)적 계시의 차이점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상징(symbol)이란 보편적인 의미에 추가된 어떤 의미를 암시하거나 대표하는 일체의 것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비둘기(마3:16), 소금(마5:14), 빛(마5:14), 세마포(계19:8), 숫자(계1:20, 7:14, 13:18), 날(벧후3:8-9, 계20:2-3), 짐승(단7:1-8), 물(요3:5), 불(마3:12) 등 동물이나 사물의 모든 자연적인 것에 다양하다.
상징화한 것에는 그 상징에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하시고자 하시는 진리를 상징화한 것에서 계시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진리를 나타내거나 혹은 진리를 감추기 위해서 사용하시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증거 하시는 계시의 한 방편으로 사용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상징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연적인 것만 보면 상징 속에 담겨진 진리는 감추어지게 된다.
상징은 단지 상징으로 끝나지 않고 계시의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므로 항상 상징적으로 사용된 단어가 본문이나 본문의 문맥 안에서 해석되어 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3장 11절에서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실 것이요”에서 ‘불’은 그 사용된 본문에서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하신 말씀의 문맥에서 해석되어지고 있는데, 성령으로 세례 주실 것이라고 하신 것은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구원 사역으로,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과의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심판 사역으로 있게 될 멸망을 의미하고 있어서 불의 상징적인 의미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마3:12). 그것은 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에서의 ‘물’은 그 용어가 사용된 본문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6절) 라고 하신 말씀의 문맥에서 역시 해석되어지고 있다. ‘물’과 ‘성령’이 각각의 별개의 존재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물, 곧 성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영으로 난 사람이 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의 개념으로 ‘물’을 언급하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으로서는 두 번 태어나는 것이 있을 수 없지만, 설사 모태에서 두 번 태어나는 일을 겪을지라도 육으로 난 것으로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신다는 진리를 계시하시고 있는 것이다(요3:10-11).
다른 하나의 예를 보도록 하자. 요한계시록 7장 14절과 14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14만 4천 명에서의 숫자도 마찬가지이다.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서는 인 맞은 자의 수로서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곧,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는 자인데, 이는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로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자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흘림으로 구원 얻은 자를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4장 1절의 14만 4천은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우뚝 선 자, 곧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기룩되어 있는 자인데 땅에서 구속함을 입은 자로서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을 의미한다(계14:1, 3, 4, 5). 그리고 요한계시록 13장 8절의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라”고 한 666이란 숫자는 짐승의 수이다. 이 숫자는 14만 4천의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14만 4천 숫자 그대로 구원의 수를 말하거나, 666을 바코드의 표시를 가지고 현대의 짐승의 표로 말하는 식의 모든 해석은, 이것이 상징하고 있는 해석에서 벗어난 참으로 위험한 해석이다.
상징적인 계시의 특성은 그것이 제시하시고 있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사용하신 것으로서 필요시에 사용한 것이라는데 있다. 그러므로 필요시에 상징화한 것으로서 상징적 해석으로서 끝나는 것이지 상징화한 것이 의미하고 있는 실제는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상징화한 것이 예언적인 계시를 담고 있는 경우가 있다. 마가복음 14장 22-24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보게 된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여기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먹을 떡은 그리스도의 몸, 마실 잔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공되어지는 몸과 피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누어준 떡과 잔을 통하여 상징화되어 사용되고 있어서 예언적인 계시가 내포되어 있는데‘언약의 피’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하여서 흠 없는 거룩한 자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담긴 뜻을 좇아 십자가에서 헌신제사의 희생제물로 드림으로써 피 흘려 죽임을 당했다. 떡과 잔은 바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서 그들의 죄를 담당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저주하심을 대신 받으신 속죄의 죽음에 의해서 하나님과 함께 화목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진리를 상징하기 위하여서 사용된 것이지, 떡과 잔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실제 살과 실제 피는 아니다. 떡과 잔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적인 죽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것을 먹고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게 하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시행하게 하셨다(고전11:26). 그것이 곧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몸과 살을 먹고 마심을 기념하는 것으로서 떡과 잔을 나누게 하심으로 언약의 표로 삼게 하셨다. 그러므로 언약의 표인 떡과 잔을 나눔 속에 있는 것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분의 고난적인 죽으심을 기념하는 예언적인 계시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으로서는 그리스도인의 몸을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말씀하신 것(그리스도의 몸)에서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진리인 복음을 십자가의 도로서 말씀하신 것에서 또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말씀하신 것에서도 보게 된다. 이때의 상징적인 계시는 점진성을 띠고 있다는데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언적인 계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상징화한 것은 실은 그리스도의 모형적인 것으로서 계시의 언약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오심(초림)으로 개혁되며 또한 그리스도의 오실 때(재림)때까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게 맡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상징화한 것에서 보는 것은 단순한 상징과 모형론과의 차이이다. 상징적인 것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 필요시에 한번 사용된 것이나, 모형적인 것은 계시의 증거를 위해서 온전히 그 뜻이 드러나고 성취되기까지 계속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상징적인 계시에서 단순히 상징화한 것과 예언적인 계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상징화한 것과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상징의 바른 성경해석의 의미를 찾을 수가 있다.
5. 설교의 구조화
설교는 작성 그것만으로도 구조를 갖고 있다. 설교하고자 하는 주제가 있고, 그 주제에 대한 내용의 해석과 설명이 있다고 하면, 그것만으로도 설교의 구조는 훌륭히 성립이 된다. 물론 설교자의 설교 특성에 따라 설교가 여러 분류의 구조를 가진다고 해도 단지 그것은 설교의 구조화의 다양화를 가지는 것뿐으로서 다른 설교에 비해 더 우월하거나 못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각 설교가 얼마나 성경 본문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전달하고 있는가 하는 데 있다. 곽안련은 ‘설교학’ 제9장 제목에서 주제(제목)가 가지고 있는 의의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목이란 무엇이냐, 제목은 본질에 있어서 설교 전체의 그 가장 간단하고 가장 분명한 진술이며 전체의 논술을 구속하고 그 한계를 정하는 것이다. 제목은 모든 설교의 지배적이며 직접적인 머리(頭)이다. 제목은 그것으로부터 설교 전체가 생장하는 씨(종자)가 되는 사상이다. 설교에 있어서 본문은 큰 가치를 가진 것이며 경휼히 제외할 것이 아니지마는 만일 명백한 제목이 있고 설교의 전체가 인간을 구원할 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였다면 본문까지라도 생략될 수 있다.”
1) 설교 작성에 들어가기 전의 기본적인 구상
설교가 합당하다고 이해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진다는 것은 설교자에뿐 아니라 성도에게까지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설교자의 특성에 따라 다양할 수 있지만 설교가 계시의 책인 성경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사역(사명)이 말씀 전파에 있다고 할 때 설교자가 설교하고자 하는 성경 본문을 벗어나거나 흐트러지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예를 두 극단적인 것, 즉 강해 설교(homilie)와 모토 설교(motto-preek)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다.
homilie은 원래 긴 본문을 따라 가면서 간단한 많은 적용을 하는 설교의 형식을 말하는데 오늘날 강해 설교와 비슷한 스타일이기 때문에 강해 설교라고 명칭하였다. 트림프는 강해 설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졌다. “강해 설교는 주로 짧지 않은 긴 본문에 대해서 일반적인 해석을 한다. 그것은 한 단어 한 단어 그리고 한 절 한 절에 대한 해석 방법이며, 여기에 가끔 실제적인 관찰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 방법은 아주 오래된 것인데 칼빈에게서 뿐 아니라 크리소스톰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 설교는 성경 강해의 성격을 어느 정도 포함한다. 즉, 해설하면서 본문을 따라가는 것이다. 또한 설교할 방법을 고려한다면 강해 설교는 비교적 쉬운 편이다.”
그러나 트림프는 강해 설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설교할 방법을 고려한다면 강해 설교는 비교적 쉬운 편이다. 그것은 전체 설교의 구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방법에 많은 반대가 생기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한다는 속담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이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느냐는 차이는 희미하게 되고, 회중은 전체적인 것을 보지 못한다. 설교의 내용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어려운 것이다. 많은 적용이 있지만 그 주제는 불명확하다. 사람들은 배가 부르지만 만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설명은 대개 단편적이고 사고의 흐름이 거의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중들은 설명, 요지, 권면, 위로로 구성된 혼란스러운 메시지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 강해 설교는 17C에 ‘화란식 설교’로 불려졌다.
사실, 강해 설교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설교하자 하는 성경 본문의 단어나 구절에 너무 집착하여서 성경 본문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진리)를 놓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강해 설교를 할 때 단어를 해석하거나 구절을 해석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모든 단어나 구절은 성경 본문 전체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여야 한다. 즉, 성경 본문의 뜻을 보다 정확하고 올바르게 그래서 명확히 드러내는데 도움과 유익을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모토 설교(motto-preek)는 강해 설교의 특성과 비교하여 생각할 때 강해 설교와는 전혀 다른 극단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모토 설교란 트림프의 말에 의하면, 하나의 단어나 개념을 주제로 삼아서 성경의 각 부분에서 찾아 연결해 가는 설교 형태를 말한다. 즉 설교자는 단 하나의 중심점에서부터 설교를 하려고 하지 않고 본문에서 한 주제를 끌어온 다음 그 주제를 취급한다. 그래서 그 설교는 본문 전체가 걸려 있는 ‘옷걸이’ 역할을 하는 한에는 주제 강연이 된다. 그래서 본문이 없거나, 여러 다양한 본문을 언급하는 것과 같은 그런 설교가 되어 나타나고 만다. 이 모토 설교는 18C에 ‘새로운 방법’ 또는 ‘영국식 설교’로 불려졌다.
모토 설교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설교하고자 하는 성경 본문에서 한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를 취급하기 위하여서 주제를 해석하여 설명하거나 또는 다른 곳에서 주제와 관련된 단어, 구절, 본문을 인용, 적용하여 설명한다고 하면, 그것은 설교하고자 하는 성경 본문의 뜻과 연결, 일치되는 것으로서 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트림프의 말과 같이 본문 설교가 아닌 (본문이 없는)주제에 의한 제목 설교가 되어 버리거나 한 주제에 여러 곳의 본문이 한 주제에 다양한 내용 설명이 되고 말아 산발적으로 흐트러지고 만다.
위의 두 설교의 형태를 볼 때 강해 설교는 분석적 방법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이며, 동시에 모토 설교는 종합적인 방법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설교의 형태가 지니고 있는 분석적인 방법과 종합적인 방법은 좋은 장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설교 메시지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단점으로 인해서 설교 작성에 적합하지 않다. 그보다는 설교 작성을 위한 연구에는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여겨진다.
분석적인 방법과 종합적인 방법은 그 형태로서는 각각 장점과 단점을 지니고 있어 독자적인 설교 형태로서 사용하기는 조심스럽고 주의를 요하는 것이나 설교 작성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구조의 특성을 각각 지니고 있는 것으로 해서 두 설교 형태의 양쪽 방법의 조화를 옹호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Hoekstra, Dijk, Schreiner, Trillhaas, Jonker 등과 같은 설교학자들은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분석적-종합적인 방법에 의한 설교’는 설교 작성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구상이라고 여겨진다.
그러한 생각은 트림프의 경우에서도 예외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분석적-종합적인 방법에 의한 설교’를 설교 작성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구상으로 확립해 나가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그의 견해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우리는 설교 준비를 분석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본문의 모든 요소들을 발견하고 주석적 방법에 따라 그 요소들의 기능을 결정한다. 그 다음으로는 종합을 한다. 즉 본문의 주된 사상과 문맥과 비교해서 본문이 제시하는 새로운 아이디어, 본문이 나타내는 그 특별한 요소를 찾게 된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방법은 가장 추천할 만하다. 그것은 주석의 역할을 정당화시키고 주된 사상을 표현하도록 한다. 모든 분석을 통하지 않고 얻은 것은 그 어느 것도 종합의 대상이 될 수 없다.”
2) 주제 설정
주제라 함은 설교하고자 하는 설교의 제목으로서의 주제(Theme)와 함께 설교의 대지(division)도 포함하여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이다. 이 주제는 설교의 구조적 요소로서 실제적으로는 고전적 수사학으로부터 빌려온 한 형식이다. 화란 개혁교회의 설교에서는 설교의 주제와 대지를 제시하는 것이 꼭 필수적이지는 않으나 그럼에도 일반적 관습화 되어있다. 한 주제(그리고 대지)를 형성하는 것은 명령하는 바는 아니지만, 꼭 그래야 하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 유익은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설교의 제목으로서는 주제를 가지는 설교의 대지는 생략하거나 대지 구분 없이 설교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설교의 제목으로서 가지고 있는 주제의 설명을 간결하고 간략하게 전달한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쉬운 용어, 단문, 짧은 문장, 짧은 시간으로 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를 의도적으로 의식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설교의 주제는 대지를 갖춘 주제이든, 대지 구분이 없는 주제이든 문제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설교자의 설교 작성 특성에 따라서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의 주제든지 그것이 설교자나 성도의 편리로 해서 설정되는 것이 되어선 안 될 것이다. 단지 설명하기 쉽다는 것 때문에 주제와 대지 구분을 하는 것이라든지, 성도의 집중이 결여되기 때문이라든지, 성도가 긴 설교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든지, 어렵고 딱딱한 설교를 듣기 싫어한다든지 하는 이유로 해서 편리로 주제 설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보다는 어떤 형태로의 주제든지 그것이 보다 성경 본문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전달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고재수는 “설교자는 주된 사상을 표현함으로써 그가 본문의 내용을 잘 파악하는지를 점검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주제는 설교자에 대하여 점검하는 기능이 있다. 더 나아가서 주제와 대지는 설교에 정확한 조직을 줄 수 있다. 설교자는 여러 가지 조각난 견해들을 제시하지 않고 구조를 가진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청중들은 설교의 핵심과 이를 통해 성경본문의 핵심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중심적 사상이 정확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에 회중은 설교의 흐름을 보다 쉽게 따라갈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트림프는 주제 설정에 대한 주제 설교를 적극 지지하는 견해를 가졌다. “주제 설교를 반대하는 이와 같은 것을 우리가 완강하게 거절해야 한다. ① 주제를 표현하는 것은 우리에게 분명히 관련 있는 메시지를 주는 하나님 말씀을 존경하는 증거이다. 이 밖에도 ② 설교자가 듯 없고 제한 없는 논설(클라이막스 없이 흩어져있는 교훈과 뜻 없고 판에 박힌 표현으로 가득 찬 내용)을 전달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주제는 설교자에게 반드시 필수적인 것이다. ③ 또 회중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회중은 주어진 짧은 시간에 듣고 모든 것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므로 회중은 미리 주된 사상을 들을 권리가 있다. 이것은 설교를 파악하도록 한다. 이 방법에 따라 주제는 복음 전파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도록 한다. 하나의 비논리적이며 불분명하고 혼돈스러우며 관련성이 없는 말은 잘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고 회중의 주의를 산만하게 한다.
설교를 작성하는데 있어서 주제의 설정은 설교의 전체 내용을 파악, 대변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주의를 가지고 생각을 기울여야 한다. 성경 본문 전체 내용의 파악 없이 주제를 설정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는 본문에서 벗어난 설교나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설교를 하는 실수를 범하기가 쉽다. 곽안련의 말을 빌면 다음과 같다. “청중이 경청할만한 가치 있는 참된 설교를 하려고 하면 설교인은 자기의 설교에 있어서 모든 것을 한 점에 집중시키기를 힘쓰지 않으면 안 되며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완전히 정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에 설교하는 사람은 자기가 취급하는 본문을 충분히 알아야 하며 성경 원저자가 말한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설교자의 의무이다.
주제 설정에 있어서 설교의 주제(제목)는 '한 단어 이상'으로 잡는 것이 이상적이다. 어떤 신학자들에 의하면 그것은 명제 (논리학적인 용어로서, 두 가지 이상의 개념을 관련시키는 것)를 포함해야 한다. 또 동사도 포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그래야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자칫하면 도식주의자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교의 주제는 설교하고자 하는 어떤 것을 주장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즉, 주제는 어떤 사실이나 진리를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컨대, 이사야 53장 1-3절의 설교 주제를 “어린양”이라고 정했다고 했을 때 그 주제는 설교의 주제로서 부적합하다. 그보다는 ‘고난 받는 어린양(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 또는 “고난의 종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예표인 어린양”으로 해야 설교하고자 하는 주제의 주체인 어린양의 대한 의미가 뚜렷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어린양이 짐승인 양 새끼에 대한 것인지, 무엇을 어린양으로 비유한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또는 어린양을 알레고리화 하여서 해석을 하게 된다. “어린양의 털은 흰 색이므로 그리스도의 정결(성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도가 정결해야 한다.” 라고 하거나, “양은 털과 고기를 제공하는 유익한 짐승으로서 그리스도의 헌신을 의미하고 있으므로 성도도 헌신해야 한다.”라고 하거나, “양은 눈이 좋지 않아 먼 것은 잘 보지 못하므로 항상 목동의 곁에 있어야 하고 목동의 지시를 받아야 살고 있으므로 성도도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아야 산다고 한다.”는 등등으로 해석하여 설명하게 된다. 모두가 좋은 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러나 그것은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계시하심을 예언적으로 하고 말씀하고 있는 의도와는 전혀 다르다. 다시 말해서 성경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어린양이 뜻하고 있는 바와는 거리가 멀다.
트림프는 주제 설정을 단 한 단어 이상으로 해야 할 주의를 갖는 것으로서 한 단어로 할 경우 주제는 하나의 모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또한 너무 한 단어 이상을 고집하는 것도 염려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자칫하면 도식주의자가 되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주제 설정을 하는데 있어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문제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설교의 내부 골격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며, 거기서 사용한 모든 시간은 설교를 작성할 때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주제(제목) 설정을 하는데 있어서는 성경 본문이 길건 짧건 간에 한 본문 내에 많은 주제(제목)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설교하는 사람은 그 본분에서 진실하게 표현되어 있는 뜻을 변경하지 않고 있는 그 뜻을 그대로 전하여 가르치는 설교의 주제(제목)로 설정하는 것으로 설교자에 따라 자유롭고 다양하게 정할 수 있다. 사실, 설교는 주제에 매이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또한 주의해야 할 것은 설교의 주제는 성경 본문의 주된 사상, 그 가르침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설교의 주제는 설교하고자 하는 성경 본문을 설교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제(제목) 설정은 참으로 신중하고도 성경 본문에 가장 합당해야 한다. 여기에 가장 좋은 것은 성경 본문 안에서 주제(제목)를 찾아 주제(제목)로 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3) 대지 구분
대지 구분은 사실 주제(제목)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지 구분은 주제(제목)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며, 또한 대지 구분의 설교가 주제의 해석, 설명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주제와 대지는 같다. 그리고 주제와 대지 구분을 하여 설교 작성하는 것이나, 대지 구분 없이 주제만 설정하고 그 주제를 해석, 설명하는 것이나 설교하고자 하는 내용의 전달은 같아야 한다. 단지, 대지 구분하는 것은 성도에게 성경을 보다 올바르게 보고 이해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트림프는 말하기를 “대지 구분은 주제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청중이 따라올 수 있도록 하는 조직적인 논설에 대한 보장이 되는 것이다. 대지 속에서는 본문의 주된 사상이 그것이 주제에서 표현된 대로 더 많이 밝혀진다.”라고 하였다.
대지 구분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성경 본문에서 말씀되어지고 있는 절 구분(말 바뀜)에 의해 대지를 구분한다든지, 본문 순서에 의해서 내용 전개에 따라 대지를 구분한다든지, 대지의 주제 설정에 따라서 구분하는 등등이다.
마태복음 21장 17-22절을 가지고 설교한 어떤 교회의 주보에 올려져 있는 경우에서 그 예를 보자.
주제 : 기 도
대지 : 1.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
2.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은 이유
①길가에 있었다
②열매가 없었다
③잎만 무성했다
3. 기도의 능력
①믿음으로 기도하라
②의심하지 말고 기도하라
③믿고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는다
마태복음 21장 17-22절의 성경 본문은 성전 정화 사건과 함께 가르쳐 주시고 있는 말씀이다. 성전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으로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믿음의 관계에 의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며,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기도하는 일이 이루어지고 해야 하는데 유대인들이 그렇지를 못했다. 다만 종교적 의식과 그 열심의 행위를 나타내며 자기 의를 삼는 것으로서 성전이 이용되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잘못된 성전관을 개혁시키기 위해서 오셨다. 그래서 성전 정화와 함께 성전에서 나오는 자들인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쳐 주셨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와 회복되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그는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고쳐 회복시키시는 권능을 행하심을 그 일로 증거하신다.
또한 어린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들이여!.” 하는 말을 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어린아이들이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자신이 왔음을 증거하신다.
그리고서 무화과나무의 저주 사건을 행하셨다. 그것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예표적으로 제자들에게 보여 주셔서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아 말라버린 것보다 더 큰 일을 제자들이 보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진 자에게, 그 믿음이 거짓이 아니고 진실 된 것이라고 할 때,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믿는 자에게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아 말라 버린 것보다 더 큰 일을 이루실 것임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지 않아 하나님의 성전(나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지 않는 하나님의 성전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하늘로부터 좇아 임할 것임을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표적을 통해서 계시하신 것이다.
그러나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을 것이다.” 이는 기도하면 다 응답해 주신다고 하는 뜻에서가 아니라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은 일보다 더 한 일, 곧 산더러 들려 바다에 심기라고 하여도 심겨지는 일과 같은 참으로 놀라운 일인 큰 권능의 행하심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의 하신다고 하는 의미에서이다. 곧, 앞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실 구속을 통해서 주실 구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심이다.
대지 구분을 하는데 있어서는 성경 본문이 길건 짧건 한 본문 내에 여러 주제(대지)를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 본문에 진실하게 표현되어 있는 뜻을 변경하지 않는 한에서 설교하는 사람마다 각기 주제(제목)을 자유롭게 정할 수(또는 선택할 수) 있듯이 대지 구분 또한 성경 본문의 뜻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으로서 한 본문에서 많은 주제(대지)를 찾아내어 설정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경을 밝히 아는 자로서의 설교의 자유이며 특권이다. 만일 그렇지를 않고 설교가 임의적인 주제(대지)구분이거나, 성경 본문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서 성경을 분해하고 갈라놓는 것으로서 주제(대지)구분을 한다고 하면 이는 필시 설교자의 자유와 특권을 그릇되게 사용하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와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를 끼칠 것이다. 진리의 불분명함과 혼탁함, 어지러움이 진리를 훼방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성경에 대해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쉽게 범하는 잘못으로서, 베드로는 성경을 사사로이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름을 주의시켰다(벧후1:20).
참고로, 트림프는 대지에 대해서 항상 인정되어야 하는 몇 가지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첫째, 대지의 한 부분이 말로나 혹은 내용상 주제와 같아서는 안 된다. 대지는 그 주제에 종속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 자체가 대지의 한 부분에서 다 이루어지고 나머지 부분들은 덜 중요하게 취급하게 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둘째, 대지의 모든 부분은 동등해야 한다. 설교자는 이질적인 자료들을 서로 배열할 수 있으나, 주제에 종속한 대지들이 서로 달라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지 않은 경우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둘째 주의 설교를 가지고 생각해 보자.
주제 :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비참
대지 : 1. 우리의 비참은 무엇인가?
2. 그리스도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했다
3.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이 대지 속에서는 질문과 설명과 표제가 결합되어 있고 불균형적인데, 이것은 적절한 설교를 만드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설교자는 평행적 구조의 대지를 따라 설교를 구성해야 한다. 또한 이때는 단순한 것이 참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셋째, 대지의 부분들은 서로 서로를 배제해야 한다. 그것들은 중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설교 내용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다른 부분이 중복되고 새로운 것을 제시하지 않는 부분은 그 대지에 있어서는 안 된다.
넷째, 대지의 부분들은 주제에서 파생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중 하나는 두 번째 주제가 되고, 그러면 청중들은 사실상 관련되지 않은 두 가지 설교를 이해해야 한다. 대지가 전체 주제를 다 사용해야 한다는 요구는 너무 지나친 것이다.
대지 구분은 반드시 설교하기 위하여 작성하는데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많은 설교하는 사람들이 대지 구분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필자가 생각하기는 그것이 성경 본문을 보다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이거나 보다 잘, 그리고 쉽게 이해시킬 수 있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설교 작성을 하는데 보다 편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설교 작성의 편리를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사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대지 구분하기를 좋아한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설교로서 설교자가 그 설교를 설교다운 설교로 할 것이라는 데에는 미덥지가 않다. 즉, 쉽게 동의(同意)되지가 않는다.
4) 설교문 작성
설교 작성에 들어가는데 기본적인 구상과 주제, 대지 구분이(또는 대지 구분이 없이) 확정된 후에는 설교문 작성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할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글을 잘 쓰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래서 개요, 도입, 적용, 결론을 구상하게 되고, 적절한 예화를 사용하려고 한다. 이는 설교자의 특성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본문의 해석과 그에 따른 설명이 본문의 흐름(내용 전개)을 자연스럽게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예화의 인용과 적용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고 본다. 설교에 들어가면서 바로 예화로 시작하는 경우도 있고, 설교 도중에 필요시에 예화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어느 쪽이든지 간에 성경 본문과 잘 연결, 흡수되는 것으로서의 사용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를 않고 예화의 사용이 특정한 한 내용이나 사건, 용어에 의해 따르는 것이라고 하면 이는 설교를 흐려 놓는다.
설교문의 작성은 될 수 있는 한에는 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설교문의 작성은 설교자의 신학이며, 신앙이며,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을 하는 목회의 집약이기 때문이다. 몇 단어, 몇 줄만 적어 가지고 설교를 하며, 설교문 없이 성령의 영감을 따라서 설교를 한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기까지 언제, 어느 곳에서나 말씀에 전무하며 기도하는 삶을 갖지 않은 한에는 잘하는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렵고 사실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 될 것이다. 설교자는 끊임없이 성경을 공부하는 자세를 갖고 연구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서 항상 좋은 책들을 보려고 해야 하며, 그래서 좋은 신학을 상속받아 계승하고 또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그것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설교문이다. 설교하는 목사가 성경을 배우는 자세를 갖고 시간과 여건이 허락하는 한 끊임없이 연구하는 것은 바른 설교를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 신학에 서있어야 하고, 그 성경 신학은 곧 성경 신앙으로서 자신과 성도들의 신앙의 본질과 뿌리를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글로 나타나는 것이 설교문이다. 설교자는 설교문을 수시로 보며 잘못된 것은 수정하고, 생각이 어리고 얕았던 것을 장성하고 깊은 것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나아가서 그렇게 하여 다듬어지고 마무리된 설교자의 최종적인 설교문은 설교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무(專務)하여 왔는지를 말해 줄 것이다.
설교문을 작성하였으면 그 원고를 그대로 설교할 것인가, 아니면 충분히 숙지하고서 할 것인가, 또는 요약 정리해서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설교하는 사람에게 달려있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에 설교문을 작성한 신앙적 자세와 마음에서 가장 잘 전달하는 것은 아무래도 설교문을 그대로 설교하는 것일 것이다. 한편으로 설교는 성도의 눈과 마음에 가장 잘 합하여 일치되어야 한다는 면에서 설교문을 충분히 숙지하고서 설교문에 충실히 따르는 설교를 하는 것 또한 설교자의 좋은 한 자세요 방법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여부가 어느 것이 설교에 더 좋은 것인가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설교자에게서는 시간이 있으면 언제 어느 때에서든지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여서 항상 설교를 준비해 나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준비되어진 설교는 언제 어느 때에서든지 전할 기회를 갖게 되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확신 속에서 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설교문의 작성과 원고 없이 단지 막무가내 식의 성령의 감화를 말하며, 재주와 기술만을 의지하여서 온갖 기법을 동원하고 사람을 웃기고 울리며 믿음을 이끌어 내는 것으로 하는 설교는 설교가 아닌 강연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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