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전쟁

[스크랩] 나는 지옥에 떨어졌었습니다. _조용기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

수호천사1 2013. 11. 2. 11:32

나는 지옥에 떨어졌었습니다.

 

 조용기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

(2008. 2. 3. 성찬주일설교 중에서)

 

옥은 어떤 곳일까요?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 태어날 세상 이야기를 해도 이해할 수 없듯이 다가올 영적 저 세상의 일을 쉽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성경에는 온갖 이 세상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말로는 결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옥에 대한 묘사가 10가지 있는데 성경에서 지옥을 묘사한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시편에서는 “고통만 있는 곳”, 전도서에서는 “일과 계획이 없는 곳, 지식과 지혜도 없는 곳”, 아가서에서는 “잔혹한 곳”, 이사야에는 “벌레로 뒤덮인 곳”, 마태복음에는 “꺼지지 않는 불 못”으로 마가복음에는 “벌레도 죽지 않는 곳”으로, “불로서 소금 치듯 하는 곳”으로, 누가복음에서는 “기갈 당하는 곳”으로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영원한 멸망의 곳”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 전에 저는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고 몸 안 인지 몸 밖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지옥은 마치 우주의 블랙홀 같았었습니다. 주위에 있는 별들을 다 빨아 당겨서 삼켜 버리는 지옥인데 엄청난 자석과 같았습니다. 사실은 쇠붙이가 있으면 다 끌어당기는데 별 수 없이 끌려가는 것처럼 지옥은 죄만 있으면 다 끌어 당겨요. 손톱만한 죄로부터 바위 덩어리만한 죄, 모든 죄를 끌어 들이는 엄청난 인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옥으로 사람들이 끌려 들어가는데 막 뒹굴면서 엄청난 인력에 곤두박질치면서 빨려 들어가는데 누구도 막을 수가 없어요. 죄는 큰 죄나 적은 죄나 죄는 쇠붙이가 크거나 적거나 자석에 끌려가듯이 열린 지옥에 끌려 들어가는데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지옥은 사망의 처소인데 캄캄한 곳으로 끌려 들어가는데 저도 회오리바람 같은 그 자석의 힘에 의해서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지옥문에서 들어가자마자 그곳은 시간이 중지된 곳이었습니다. 영원한 곳이었습니다. 영원한 곳에 급속한 속도로 떨어지는데 그 고통은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말로써 비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도저히 말로다 할 수 없어요. 그리고 나는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고 못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기에 떨어져서 고통을 당할 때 생각하기를 '안 태어난 것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고통의 괴로운 세계에 올 바에는 안 태어나는 게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는데 마음속에서 '예수님의 보혈을 부르짖으라. 예수님의 보혈을 부르짖으라.' 저는 원래 예수를 믿고 주님께 기도하는 사람이니까 보혈이 마음속에 있지만 다른 사람은 보혈이 없지 않습니까? 내가 예수님의 보혈로, 예수님의 보혈로.. 아주 모기 소리 만하게 ‘예수님의 보혈로, 예수님의 보혈로’ 하니까 끌려 내려가던 내가 딱 중지를 해요. 그리고 예수님의 보혈을 외치니까 지옥이 끌어당기는 자력선이 없어져 버리고 떠올라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고함을 쳤습니다. “예수님이 보혈로! 예수님이 보혈로! 예수님의 보혈로!” 그러니까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말할 때 마다 떠올라 오고 떠올라 와서 지옥의 세력이 끊어지고 나중에 세상으로 탁 나와서 정신을 착 차렸는데 영원의 세계를 여행하고 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었습니다.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그러한 느낌을 느껴서 제가 수첩을 내어서 간증을 적었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옥은 절대 단절의 처소인 것입니다.

 

옥에는 하나님 생각도 할 수 없어요. 이 세상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생각도 할 수 없고 마음에 보혈이 없는 사람은 교회 아무리 왔다 갔다 하고 형식을 지켜도 소용이 없어요. 지옥은 눈꼽만치 죄만 있어도 끌려 들어갑니다. 우리 눈꼽만큼 죄도 없이 다 정결케 하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밖에 없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자기의 공로가 아니라 십자가 예수님이 보혈 공로로 말미암아 죄가 하나도 없이 마귀가 참소할 수 없는 그런 희고 의로운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지옥에서 떠올라 오는 것입니다. 보혈의 능력밖에 없는 것입니다. 흑암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보혈이 능력밖에 없는 것입니다. 보혈을 모르는 사람은 거기에 내려가서 영원히 올라올 수 없습니다. 단절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것, 세상에 대한 것 완전히 단절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대화도 헛된 것입니다. 공허함 밖에 없습니다. 이웃이 다 그 고통 속에 있는데 대화가 됩니까? 다 곤두박질치면서 몸부림치는데 대화가 됩니까? 지옥에 여러분 불이 나는 바깥에서 타는 줄 알았는데 밖에서 타는 것이 아니에요. 유황불이 속에서 타올라 오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유황불이 타올라 오르고 구더기가 득실거리고 온갖 고통이 다 다가오는데 세상으로, “유황불이다! 무슨 구더기다! 무슨 고통이다!” 그렇게 말하지만 그것은 형식에 불과해요. 표현 못해요. 인간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괴로움은 도저히 인간의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속에서 끌어 오르니까 자기 고통도 감당하지 못하는데 누구 이웃하고 대화를 한단 말인 것입니까? 엄청난 고통 속에 짓눌려 이웃과의 대화가 끊어진 것입니다.

 

가복음 16장 26절에 보면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대로 지옥의 밖에 나갈 수가 없는 강력한 죄악의 자력에 끌려서 지옥에 포로가 되기 때문에 바깥세상하고 대화가 절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옥은 완전 절망의 처소였었습니다.

 

간이 정지 되어 버렸어요. 시간이 있어야 내일의 희망도 현재의 희망도 있는데 시간이 정지되어 버리니까 내일에 희망도 현재의 희망도 전혀 없는 영원한 절망만 있었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1년이 지나갔다. 2년이 지나갔다. 그것이 없어요. 지옥문에 들어가자마자 시간 개념은 없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겠지요? 적막강산입니다. 단절의 세계인 것입니다. 절망의 처소인 것입니다. 희망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괴로워서 이것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그리고 언제쯤 이 괴로움에서 놓여날 수 있다는 기약도 없습니다. 오직 좌절과 절망만 꽉 들어찬 것입니다.

 

가복음 16장 23절로 24절에 보면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불꽃이 그 속에서 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괴로우니까 물 한 방울이라도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외친 것입니다. 물 한 방울이 얼마나 귀합니까? 엄청나게 속에서 불이 타오르는데 영혼의 기갈이 말로다 할 수 없는데 물 한 방울만 있어도 사는데 물 한 방울이 거절되고 만 것입니다. 지옥은 완전한 절망의 처소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혐오스럽고 저주스러워 자살하려고 하나 죽을 수 없습니다.

 

옥은 자살하려고 해도 죽을 수도 없는 곳입니다.

 

마나 내 자신이 밉든지 내가 나를 죽여 버리고 싶습니다. 칼이 있으면 찔러서 죽여 버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저주스럽고 혐오스러워도 지옥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죽을 수가 있으면 큰 축복이지요. 죽을 수가 없는 곳입니다. 자기가 자살을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에 대한 미움이 하늘에 사무치니까 살수가 있어요? 이 세상에도 자기를 비하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하는 것처럼 지옥에는 자살을 할 수 없으니까 괴롭지 않습니까?

 

가복음 9장 48절로 49절에 예수님께서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말이 난 무엇인지 몰랐는데 죽는 것이 없어요. 구더기 같은 죄악의 죄책이 꺼지지도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도 아니하고 모든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고함치고 몸부림치며 소금 치듯합니다. 몸부림칩니다. 저도 막 몸을 비틀고 그냥 앞으로 엎드렸다가 뒤로 누웠다가 옆으로 기었다가 자빠졌다가 온갖 짓을 다 해도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었습니다.

 

옥에서 회개나 후회나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회개하려고 해도 회개할 수 없고 후회하려고 해도 후회할 수 없어요. 시간이 중지된 곳이라 과거의 일을 회개할 수도 없고 후회할 수도 없어요. 세상에서는 우리가 회개할 수 있고 후회할 수 있지 않습니까? 회개도 못하고 후회도 못하므로 자기의 상황이 변화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회개할 사람은 이 땅에 있을 때 회개해야 돼요. 지옥에 들어가면 회개할 줄 알아도 회개가 없고 후회가 없어요.

 

브리서 6장 6절에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옥에 들어가면 회개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롭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그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데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은 조금 지옥의 가장 맨 밑바닥에서 떠있고 그 죄의 중량에 따라서 흡입력이 달라요. 큰 죄는 강한 흡입력으로 끌려 들어가고 적은 죄는 좀 더 중간에 있지만 고통은 다 똑같아요.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버림받은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여러분 절망, ‘나는 버림 받았다!’ 그것이 영원 속에 꽉 들어찼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버림 받고, 세상에서 버림받고, 이웃에게 버림받고, 전혀 내 자신에게도 버림받고, 보통은 아무리 버림 받아도 자기가 자신을 버리지 않지 않는가. 자기 자신은 자꾸 보호하고 변명하는데 그것도 없어요. 하나님께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버림받아 전적으로 철저히 버림받은 몹시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었었습니다.

 

가복음 16장 27절로 28절에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을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러나 버림받은 그의 기도를 들어줬습니까? 단호하게 “No!”했습니다. 버림받은 처소인데요. 기도가 무엇이며 응답이 무엇입니까?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살로니가후서 1장 8절로 9절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원한 형벌의 멸망이라니까 하루 이틀의 형벌이 아닌 것입니다. 영원한 형벌 왜냐면 시간이 없는 것 지옥은 시간이 중지된 곳이니까 그 고통은 하루 이틀의 고통이 아니라 영원한 고통인 것입니다.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영원히 그 고통 자체 속에 존재하는 삶이란 엄청난 것입니다. 희망이 있어야죠. 좀 지나면 좋아질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면 좀 나아질 것이다. 좀 지나면 변화가 올 것이다.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 극한 고통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 절망과 그 좌절과 그 버림받은 심령과 그 괴로움은 도저히 말로써 표현 못합니다.

 

는 그 때 느낀 것은 뭐냐면 ‘정말 지옥 갈 바에야 안 태어난 것이 좋다. 지옥에 가서 자살이라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것은 살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살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데 살아 있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미꾸라지에 소금 치듯이 몸부림을 치고 발버둥을 치는데 그것이 한 두 시간 하는 게 아니라 영원히 계속하는 것입니다. 자지도 아니하고 쉬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죄가 지옥 불에 타면서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태양이 항상 공중에 떠있어 수억만년 동안 저렇게 불빛을 내는 것처럼 억만년 동안 시간 없이 속에 죄가 불타는 것입니다. 왜, 죄를 씻을 보혈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죄는 영원히 타는 원자핵과 같아서 끌 수가 없습니다. 죄는 이 세상에 예수님 보혈로 끌 수 있는 것입니다. 보혈이 없는 곳에 죄를 끌 수가 없으니까 영원히 불타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자체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합니다. 정말 몸서리치는 곳이 지옥입니다.

 

한계시록 21장 8절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째 육체가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나님께 버림받아서 지옥에 떨어진 것은 둘째 사망으로써 그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랍 신화에 지옥에서 고생하는 인물 중에 탄탈로스와 시지프스가 제일 유명합니다. 왕이었던 탄탈로스는 지옥에서 목까지 잠기는 물속에 서 있는데 바로 코 밑에 먹음직한 열매가 달린 나뭇가지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탄탈로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목을 굽히면 물은 순식간에 땅 밑으로 쫙 빨려 들어가고, 과일을 따먹으려고 손을 뻗치면 나뭇가지는 바람에 날려 휙 하늘로 올라가고 탄탈로스는 바로 코 앞에 물과 맛있는 열매가 있지만 영원히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려야만 한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소원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 곳입니다. 소원이 눈꼽만치도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 지옥인 것입니다. 그리고 시지프스는 알베르 까뮈가 소설에도 묘사했는데, 고린도의 왕으로 불의와 부조리를 일삼았던 것입니다. 이제 지옥에서 시지프스는 가파른 비탈길 저 아래에서 커다란 바위를 밀어 올리는데 있는 힘을 다해 꼭대기까지 겨우 밀고 올라가면 바위는 아래로 굴러 떨어집니다. 다시 온 힘을 다해서 이 바위를 밀어 올리면 정상을 코앞에 두고 바위는 또 밑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시지프스는 영원히 이 일을 해야 됩니다. 그것은 말하면 영원한 고통인 것입니다. 벌써 성경이 오기 전에 희랍 신화에서도 지옥을 묘사할 때 이런 고통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탄탈로스와 시지프스가 당하는 고통과 같이 영원히 고통 그 자체 속에 존재하는 삶으로 몸서리 처지는 곳이 지옥인 것입니다.

 

는 일생을 목회하면서 지옥에 대한 설교를 별로 안했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지옥도 있을 만하구나!' 그런 생각이 많이 났어요. '뭐 불타면 좀 피하면 안 되겠나. 벌레가 우글거리면 벌레를 좀 피하면 되겠지.' 별로 심각하게 생각 안했는데 제가 순식간에 지옥으로 떨어져서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은 말로써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깨어나자마자,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지옥에 가지마라고 경고해야 되겠다.’ 불타는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러분, 죄를 지을 때는 이 세상에 일종의 환락이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나중에 엄청난 지옥으로 끌려가는 재료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보니까 큰 죄도 끌려 들어가고 조그마한 티끌 같은 죄도 결국에는 그 자력선에 지옥의 흡입력에 끌려 들어가요. 지옥은 죄를 끌어 들이는 자력선이에요. 그러므로 나 요만큼 죄 지어도 괜찮겠지? 천만에요. 오직 죄를 희게 씻어 버리고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보혈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상태, 그리고 마귀가 참소할 수 없는 상태가 의의 상태인 것입니다. 이 의는 인간의 노력도 안 되고 공부로써 안 되고 수양과 도덕으로도 안 되고 고행으로도 안 되고 무엇으로도 인간의 노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해서 벌거벗고 부끄러웠을 때 인간의 힘으로 무화과 나뭇잎을 가지고 치마를 입었지만 해가 나니 또 말라 버리고 또 앞치마를 해 입었더니 해가 나와서 말라 버리고 아무리 나뭇잎으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앞치마를 해 입어도 부끄러움을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가죽을 벗겨서 반 영구적인 옷을 입혔습니다. 그래서 부끄럼 없이 하나님 앞에 서고 에덴을 나오게 된 것입니다.

 

러분, 사람이 만든 나무잎사귀로써는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만든 수양과 도덕, 고행, 종교를 가지고는 죄악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야 되는데 오늘날 그 짐승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죄 없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잡았습니다. 피를 흘렸습니다. 그 가죽을 벗겼습니다. 그 옷을 공짜로 입혀 주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입혀 주시니까 비로소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고 지옥의 세력을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는 지옥에 안 갈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엄청난 자력선으로 잡아당기는데 자력은 여러분, 나무나 동은 끌어당기지 못합니다. 철만 끌어당기지요. 지옥은 죄만 끌어당기지 용서받은 의인은 당길 힘이 없어요. 자력선이 힘이 없어요. 예수의 보혈을 부르짖을 때 모든 지옥의 세력이 끝나므로 지옥에서 떠나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 이외에는 우리를 희게 하고 의롭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런데 지옥에서 탁 올라오니까 제가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은 '아~ 이곳이 천국이구나!' 예수 믿고 이 세상에 사는 것보고 천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고달프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하고 짜증나기도 하고 싫증이 나기도 하고 그랬는데, 웃기는 소리. 지옥에 잠시 갔다 나오니까 천국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천국이구나.

 

국은 어떠한가?

 

국은 예수님 안에 있는 곳입니다. 아무리 미사어구로 표현해도 예수님 안 계신 곳에는 천국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갈수록 더 깊은 천국을 체험하게 되며 천국은 지금 여기서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은 황금보석 길, 열두 진주 문. 웃기는 소리 합니다. 황금 보석이 있고 열두 진주문이 있어도 내 속에 지옥이 활활 타면은 그곳이 지옥인 것입니다. 이 지옥 불을 끄고 우리를 구출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있으면 지옥에서도 천국이 돼요. 내가 거기 가보니까 예수님의 보혈을 부르니까 지옥이 아무 힘도 없습니다. 지옥이 예수님의 보혈이 없는 곳에 지옥이 힘을 발하지 예수님의 보혈을 말할 때는 지옥은 아무 힘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천국이 황금 보석길, 열두 진주문이 있어도 예수님이 없으면 그 자리가 지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지옥이 타는 것입니다. 지옥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불탑디다. 나는 밖에서 불이 타는 줄 알았는데 지옥은 속에서 불이 타올라 오고 속에서 구더기가 득실거리고 속에서 소금 치듯 하고 속에서는 이를 갈고 고통을 하게 되니까 피할 데가 없습니다. 다른데 같으면 바깥에 있는 것처럼 피할 수 있잖아요. 속에서 고통이 다가오는데 어떻게 피하는 것입니까? 천당도 마음속에서 시작하고 지옥도 마음속에서 시작하니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벌써 예수 모시고 마음에 천당이 이루어진 것이요, 예수 없이 세속에 살아서 지옥이 마음속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음속에 지옥을 가진 사람이 지옥에 끌려 들어가고 마음속에 천국이 이루어진 사람이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마음에 천국도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교회 왔다 갔다 한다고 형식과 의식을 해서 천당 가지 않습니다. 천당은 마음속에 천당 있는 사람이 끌려 올라가고 지옥은 마음속에 지옥이 있는 사람이 끌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을 보고 난 다음에 천국을 정말 느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난 2004년 조선일보에서는 신앙과 경제의 관계에 대한 의미 있는 기사가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2000년을 기준으로 188개 국가로 구성된 국제연합(UN) 가운데는 부자 나라도 있고 가난한 나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어떤 나라는 잘 살고 어떤 나라는 가난한가? 그에 대한 관심을 갖고 미국 미주리 주에 있는 세인트루이스 연방 준비 은행 연구원들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이색적인 시각에서 그 답을 설명하는데, 결론적으로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가 생기는 이유는 '지옥을 믿느냐 아니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즉 지옥을 믿는 사람이 많은 나라가 더 잘 살고 덜 부패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경제적 원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비경제적 요인들, 특히 각 나라의 종교가 그 나라의 경제에 끼치는 영향이었습니다. 연구팀이 그 부분을 집중 연구한 결과 지옥의 존재를 믿고 사는 사람이 많은 나라일수록 부패 정도가 약하고, 부패 지수가 낮은 나라일수록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갈수록 바로 지금 여기서 천국을 체험하고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축복도 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미국 국민을 조사해 보니까 미국 국민의 60%가 지옥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은 지옥이 무서우니까 그만큼 부패하지 않았었습니다. 부패 안하니까 그 사람들이 잘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옥이 없다고 하는 나라는 마음대로 부패하는 것입니다. 안 보는데 무슨 겁날 것이 있느냐. 늘 마음대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가 지옥을 보고 난 다음에 놀랜 것은 ‘어찌하든지 지옥은 가지 말아야 되겠다. 좌우간에 이 세상에서 거지가 되더라도 지옥만은 가지 않는 것’ 이 세상의 거지는 잠시 동안 지나가는 것 아닙니까? 지옥은 영원한 고통 아닙니까? 잘살고 못살고 높고 낮고 부귀영화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입니다. 내 속에 그리스도가 있느냐. 세상인 죄악이 들어 있느냐가 우리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때부터 심신을 새롭게 하고 말과 행동에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을 목회하면서 내가 그 지옥을 보고 난 다음부터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물론 성령 받았을 때 달라졌지만 내가 지옥을 보고 난 다음에 경각심을 느낀 것은 전에 어떠한 일을 체험해도 그런 경각심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떨리고 무섭고 몸서리가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드러지게 내가 본 것은 죄가 바로 지옥으로 끌려가는 자석의 목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옥을 믿는 나라, 지옥을 믿는 사람들이 죄를 지을 수가 없고 불의를 행할 수 없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국은 정의와 거룩함이 넘치는 곳입니다. 예수님 보혈의 샘에서 씻고 성령으로 충만하니까 용서와 의와 영광이 충만하고 거룩함과 성령 충만이 충만한 것입니다. 천국은 정의로운 곳이고 성령이 충만한 곳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벌써 천국을 체험하는 것은 예수를 믿고 보혈로 씻어 불의보다 정의를 택하고 그리고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 벌써 천국의 시작인 것입니다.

 

편 20편 6절에 “야훼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늘은 거룩한 하늘입니다. 보통 하늘이 아닌 것입니다. 거룩한 자 아니면 하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누가 거룩합니까? 성령이 와서야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멀리 떨어져 산다고 해서 거룩하게 되는 것 아닙니다. 성령이 거룩하신 분이고 거룩한 성령이 우리를 성전삼고 있을 때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계시록 21장 10절에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늘에서는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성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은 사람만이 성령이 임하지 교회 왔다갔다하고 의로운 생활 인간의 힘으로 한다고 해서 성령 받지는 못합니다. 천국은 한없는 평화의 곳입니다. 그 불안과 고통이 소용돌이치는 곳에서 세상에 딱 나오니까 그 평안함이 얼마나 큰지요. 예수님이 마음속에 계시다는 그 평안 좌우간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예수님 안에 있어야 되고 그 평안이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진짜 천국에 들어가면 그 평안이 말로다 할 수 없지요.

 

한계시록 14장 13절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는 것입니다. 고통치고 몸부림치고 고함치고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어린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물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편안한 것이 천국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행복도 그렇지 않습니까? 돈 많다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권력 있다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부귀, 영화가 있다고 행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화가 있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평안이 없는 돈이나 지위나 명예나 권세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초가집에 산나물 먹고 살아도 마음에 평안이 있으면 편안하게 잠자고 행복하게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한없는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리고 천국은 슬픔이나 곡함이 없는 끝없는 기쁨의 곳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정지된 곳이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기쁨을 얻었기 때문에 그 기쁨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정지된 곳이 천국이요, 지옥인데 한번 기뻐지면 영원히 기뻐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기뻤다가 슬픔이 오고 좋았다가 또 범상으로 돌아가는데 천국은 한번 기쁘면 영원히 기쁜 곳인 것입니다.

 

한계시록 21장 3절로 4절에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상이 다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옥에 들어가면 세상 것이 다 지나가고 천국도 들어가면 세상 것이 다 지나가서 세상이 생로병사, 곡하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다 꿈에 본 듯 잊어버리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히 사는 곳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국에는 빛만 있고 어두움이 다시없습니다. 빛만 있다는 것은 미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성자가 자기 제자들을 불러 놓고 “아침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그러니까 한 제자가 “빛이 환하면 아침이 옵니다.” “틀렸어.” 또 한 제자가 “선생님 내가 말씀하지요. 나무나 풀이나 꽃이나 나비나 벌들이 눈에 보이면 아침이 온 것입니다.” “틀렸다.” 온갖 사람들이 아침이 오는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을 하는 것입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아침이 온다든지.. “그럼 선생님 어떻게 하면 아침이 옵니까?” “아침이라는 것은 눈 앞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내 친구로 보일 때 아침이 오는 것이다.” 그것 참 올바른 말입니다. 미움이 없어야 천국이 오는 것입니다. 전부 사랑하는 친구들이 되면 천국이 오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요. 빛만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신데 하나님은 사랑이시지 않습니까? 사랑만 가득한 곳이 천국이지 천국에는 미움이 전혀 없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러니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얼마나 좋습니까? 천국은 사랑만이 충만한 곳입니다.

 

한계시록 22장 5절에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세토록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하는 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천국은 지극히 아름답고 조화로운 곳입니다. 천국은 모든 것이 아름답고 조화로운 곳입니다. 조화로운 음악소리가 천지에 퍼지고 모든 것이 조화로운 것입니다. 한번 제가 부흥회 갔다가 밤에 자다가 꿈에 천당 입구에 들어가 보았는데 내가 천당 입구인줄 모르고 있는데 내가 손을 펴보니까 손이 다 방실방실 웃고 있어요. 이상하다. 손등을 보니 손등이 방실방실 웃고 있어요. 그 다음 하늘을 보니까 하늘이 방실방실 웃고 있어요. 주위를 보니까 주위가 다 방실방실 웃고 있어요. 모든 것이 방실방실 웃고 있어서, ‘왜 이러노? 천당은 웃는 곳인가?’ 천당인줄 몰랐는데 천사가 걸어오면서 “네가 지금 천국 대합실에 와있다.” 그랬습니다. 천국은 웃는 곳이에요. 모든 것이 기쁘고 조화롭고 아름다운 것이 천국인 것입니다.

 

한계시록 21장 2절에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해서 단장한 것 같더라.”

 

생에 여자가 가장 자기를 아름답게 단장하는 것은 결혼할 때 아닙니까? 천국은 영원히 영원히 결혼한 신부와 같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사랑이 넘치고요.

 

한계시록 22장 3절로 4절에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리고 천국이 좋은 것은 지치지 않고 피곤치 않고 낡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도 영원히 새로운 곳이다. 여러분 사람들은 새집에 들어가면 좋지 않습니까? 얼마간 좋다가 얼마 안 있으면 낡은 집이 되지요. 새 옷을 사면 하루 기분이 좋지요. 거울 앞에 서서 자기 폼을 대고 포즈를 취해보지만 얼마 있지 아니하면 낡은 옷이 되고 마지요. 새장가 들어서 새신랑, 새 마누라 만나면 좋지요. 그러나 하룻밤만 자고 나면 헌 마누라, 헌 신랑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새것이 하나도 없어요. 우리는 지금 이명박 정부가 들어오니까 새 정부가 들어온다고 기뻐하지요. 얼마 있지 아니하면 이것도 낡은 정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이 새것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처음은 새롭다가 시간이 가면 낡아지는데 천국은 끝없이 새로운 것이니 기분이 좋잖아요. 왜 우리가 여행합니까? 새것을 보려고 여행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경치, 새로운 문화를 보려고 하는데 천국은 여행할 필요가 없어요. 매일매일 영원히 새로움이 꽉 들어차 있으니 그렇게 좋은 곳이 어디 있습니까?

 

한계시록 21장 1절로 5절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하늘도 늘 새롭고 땅도 늘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러분도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낡은 몸이 부활의 몸으로,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추한 몸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죽을 몸이 영원히 살 몸으로 육체적인 몸이 신령한 몸으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서 33세의 젊음을 가지고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그 젊음으로 살게 되는 것이 천국인 것입니다.

 

국은 생명강수가 넘쳐나는 곳입니다. 사망이 없어요. 생명강수가 넘치기 때문에 항상 모든 사람이 생기발랄하고 넘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나이 젊을 때는 생기 발랄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허리도 구부정해지고 팔다리도 아파지고 뼈도 굽어지고 엎드리려고 해도 허리가 돌아가지 않는 모든 것이 늙어지면 생명이 점점 사라지고 나중에는 뻣뻣하게 죽은 송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천국은 그것이 없어요. 생기가 넘치는 것입니다. 새 생명으로 항상 가득 차 있어서 언제나 야들야들한 버들나무 같이 하늘거리는 새로움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한계시록 22장 1절로 2절에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국은 생명으로 넘치는 곳입니다. 강물도 생명이고, 나무도 생명이고, 나무 잎사귀도 생명이고, 열매도 생명이고 사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면 여러분 뭐가 천국 중심이겠습니까? 낙원이 중심입니까? 아닙니다. 천국의 중심은 십자가가 중심인 것입니다. 이 땅에만 십자가가 신앙의 중심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천국은 십자가 밑에서 이루어진 세계가 천국인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천국은 천국이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마음속에 없는 신자는 신자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십자가 밑에서 이루어진 세계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리신 예수님의 은혜와 공로로 사망의 세력을 멸하고 죄악을 멸하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 해 입은 것 다 없애 버리고 영원한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많은 고통이 십자가를 통해서 다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쓴물에 나무를 던지니 달아졌더라. 쓰디쓴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변화 되어서 달아지고 마는 것입니다. 진실로 십자가는 우리에게 천국을 갖다주는 위대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애써도 못하네. 형벌을 줘도 못하네. 살려도 못하네. 죽어도 못하네. 우리를 변화 시킬 수 있는 것은 십자가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가 살면 우리 생애가 완전히 변화되는 것입니다.

 

<결론>

 

와 같은 인간의 말로써는 어림도 없지만 억지로 말해 본 것이 저의 오늘 설교인 것입니다. 바울 선생도 천국에 갔다 온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린도후서 12장 2절로 4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는 이 말을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내가 지옥에 가서 경험한 것은 사실 억지로 오늘 말을 했지 말로써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 고통이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하리라. 사람이 그 심경을 이를 수가 없습니다. 지옥도 그렇거든 하물며 천국에 갔다 와서 천국을 말로써 표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하지 그것은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가 오늘 지옥에 대한 이야기했지만 내 말은 너무나 너무나 표현력이 약해서 억만 분의 일의 표현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 고통, 그 고통.. 저는 고통 많이 당해봤어요. 폐병으로 죽다가 살 때는 숨을 못 쉬어서 밤새도록 낮새도록 고통하는 그 고통도 느껴봤고 군대에 가서 수술하고 6개월 동안 삶과 죽음 사이에 왔다 갔다 하는 고통도 겪어봤고 심장병으로 고통당하고 어지럼증으로 고통당하고 허약으로 고통당해 봤지만 그런 것은 천당이요, 그런 고통은 천당이요, 하~ 지옥의 고통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어요. 어떻게 설명할까요? 이렇더라. 여러분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극도의 고통의 억만 배 더 고통스러운 것이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는 여러분에게 간구합니다. 제발 지옥은 가지 마십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지옥은 피하십시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고 난 다음에는 천국 지옥의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없다고 부인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없다고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아 볼 수 없다. 귀보고 보라고 하면 봅니까? 눈더러 들으라고 하면 듣습니까? 사람은 삼차원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감각은 하나 이성으로는 영적인 세계를 알 수 없습니다.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판단하느니라. 성경에 계시된 말씀으로 영원의 세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외치는 천당과 지옥을 우리는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변화 받아서 십자가를 끌어안고 그 보혈의 능력을 의지해서 천국 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나님 아버지여, 인간의 말로써는 어림도 없는 표현할 수가 없는 그 고통스러운 지옥을 제게 보여 주셔서 이것을 가지고서 성도들에게 경고하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어찌하든지 제가 체험하고 본 것 그 지옥에 한사람도 떨어지지 않게 하여 주시옵시고 예수님이 보혈을 힘차게 의지하고 성령으로 변화된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천국으로 들어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없이 조그마한 죄만 밀알만한 죄가 있어도 지옥의 흡입력에 끌려가고 마는 것입니다. 지옥은 엄청난 블랙홀에 모든 별들이 근처만 가면 끌려들어가 버리는 것처럼 지옥 근처에 들어가는 조그마한 모래알 같은 죄가 있어도 끌려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보혈로써 희게 씻는 길밖에는 지옥을 이기는 길이 없사오니 항상 회개하고 예수 보혈로 씻고 의의 의복을 입고 거룩하고 성결하게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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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병천카페 [성령전인치유목회]
글쓴이 : 이병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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