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간의 갈등과 선교
문상철 (한국선교연구원/kriM)
종교는 세계관을 형성한다. 세계관은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주면서 절대적인 타당성을 주장한다. 종교들은 저마다 초월적이고 우주적인 유효성을 주장한다. 이런 종교의 모습은 그 절대성에 대해 주장하는 만큼 상호 갈등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종교간의 갈등은 각 종교가 선교적인 활동을 하면서 더욱 악화되기도 한다. 이 글은 세계화, 다원주의, 평화의 선교의 개념을 중심으로 종교적 갈등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I. 세계화 시대의 종교적 갈등
세계화는 기존의 특정 지역 중심의 종교를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로 만들어 버린다. 과거에 한 지역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했던 종교가 이제는 세계화로 인해 도시 상황 속에서 다른 종교들과 공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과거에는 지역이 종교권별로 구분되었던 것이 이제는 한 도시 안에 다른 종교들이 경쟁적으로 존재하는 가운데 각자가 교리적, 실제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슬람은 더 이상 중동의 종교만이 아니며, 힌두교는 인도의 종교만은 아니며, 불교는 동아시아의 종교만은 아니며, 기독교는 서구의 종교만은 아니다. 세계 종교들은 그야말로 범세계적으로 존재하는 종교들이 되었다.
세계화는 경제적으로 무한 경쟁을 강요하는 한편, 종교들간의 관계가 경쟁적인 관계가 되도록 한다. 과거에도 종교간 갈등이 있었지만, 그 갈등은 교리적이고 이론적인 것이었지만, 세계화 시대에 종교들은 단순히 개념적으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서로 충돌하고 있다. 이러한 충돌의 배후에는 정치적 역학이 작용하기도 하고, 사회문화적 차이점들이 원인 제공을 하기도 한다. 특별히 세계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두되는 종교적 근본주의는 종교를 중심으로 한 유토피아를 저마다 약속하는데, 근본주의 운동은 갈수록 그 한계를 드러내서 인류에게 소망을 주지 못하고 있다.
세계화는 종교적 전통을 재부흥하게 한다. 종교가 세계화로 인해 상품화되는 면이 있지만, 종교는 많은 경우에 전통을 재활성화 한다. 이런 가운데 종교들은 상대화되면서도 전통의 재부흥을 통해서 인간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세계화는 인적, 기술적, 재정적, 미디어적, 이데올로기적 상호 침투를 조장하지만, 전통의 부활을 통해서 종교문화적으로도 상호 침투를 하게 한다. 세계 종교들이 세계화 시대에 재부상하면서 고유성을 주장함에 따라 종교간 갈등이 줄어들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반대로 종교적 갈등이 오히려 심화된다. 그것은 과거에 특정 지역의 종교로 인식되다가 이제는 지역성을 넘어 명실공히 세계 종교들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피터 버거가 말한 대로 모더니티가 홈이 없는 마음(the homeless mind)을 낳는다면, 세계화는 범세계적으로 홈이 없는 마음(the global homeless mind)을 낳는다. 그런 만큼 사람들은 안정성을 잃고 불안하게 산다. 불안하게 사는 사람들은 뭔가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것을 찾는 경향이 있다. 이런 가운데 사람들은 종교에 귀의하는 경향이 농후해진다. 종교는 현대인에게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할을 하는데 있어서 세계 종교들은 저마다 고유한 약속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서로의 존재 때문에 종교들은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이 어렵게 되어 버렸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종교들은 절대성에 대한 주장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세계화에 대한 반작용은 세계화가 문화적 단일성을 내보이는 것만으로 볼 수 없게 만든다. 세계는 세계를 통해 문화적 동질화를 경험하기보다 보다 복잡한 역학을 경험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세계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나는 재부족화(retribalization)는 고유한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이런 현상은 문화적 동질화를 거부하며,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많은 경우에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추구는 종교적 정체성에 대한 추구로 연결된다. 종교적 정체성은 종교가 단순히 개인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적 존재 의미의 문제로 확장되며, 그럼으로써 종교들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절대성을 주장하게 된다. 전우주적인 절대성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 지역, 한 문화권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위상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정체성을 찾으려는 움직임 가운데 종교적 갈등은 더욱 심화될 수 있다. 왜냐하면 한 지역 문화권에서도 복수의 종교들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에 대한 이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문명의 충돌 이론이다. 이 현상은 우선 문화의 최대 단위인 문명 단위로 블록화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세계 질서는 문화적 특징을 공유하는 나라들끼리의 연합과 동맹 관계로 형성된다. 이 이론에서 제시하는 것은 문명 단위에서 상호 침투와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이다. 이 블록화에 대한 이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역시 종교적인 전통의 공유이다. 지역별 블록화는 단순히 경제적 유익을 따라서 재편된다기보다 보다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관점에서 추진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종교적인 뿌리는 무시할 수 없는 요소가 된다. 많은 경우에 종교적인 전통은 지역별 블록화에 심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리고 문명간 충돌의 배후에 있는 종교적 정체성과 그로 인한 갈등을 우리는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화의 기술들, 특별히 통신 기술들은 인간의 삶에 획기적인 편의성을 제공한다. 이 편의성을 놓고 문화적 주체들은 무한대의 경쟁을 하게 된다. 과거에는 일부 영역에서 일어났던 경쟁 양상이 이제는 전 영역에서 총체적인 경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종교적인 전제들의 차이는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과거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종교 전통들이 이제는 편리하고도 손쉽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종교간 충돌이 보다 빈번하게 일어난다. 과거에는 교회나 사원이나 사찰에서나 접하던 내용들을 이제는 TV, 인터넷 등을 통해서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모습 역시 종교적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화로 인해서 선교가 쉬워지는 면도 있지만, 세계화 시대의 선교는 전반적으로 과거보다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지는 면이 있다. 과거에는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서 이제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찰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종교적 갈등은 세계화로 인해서 심화되는데, 우리는 세계화의 물결을 잘 이해하는 가운데 선교적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마치 윈드서핑이 바다의 바람과 물결의 흐름을 이용해서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듯이 문화와 문명의 물결들을 잘 이해하는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화적 충돌을 일으키는 복잡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급적 충돌을 피하면서 복음을 지혜롭게 전하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II. 다원주의와 다원성
세계화는 삶의 다원성을 증대한다. 특별히 종교적인 영역에서의 다원성과 다원주의는 심화되고 있다. 우리는 세계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세계화가 불러온 한 중요한 현상인 다원성에 대해 다루지 않으면 안되겠다.
다원주의는 단순한 다원적 상황과는 다르다. 다원성 (plurality)이 실제적으로 종교들이 함께 공존하는 현상과 상황을 말한다면, 다원주의 (pluralism)는 여러 종교들이 있지만 그 종교들이 동등한 정도로 유효하고 진리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상황적 다원성의 문제를 해결하고 여러 종교들이 공존을 모색하며 종교간의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원주의는 다원성에 대한 하나의 대책으로 마련된 것이며, 종교들의 다원적 상황은 다원주의를 통해서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다원주의 개념 속에는 규범적 다원주의(normative pluralism)와 실천적 다원주의 (practical pluralism)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반드시 규범적인 다원론이 아니더라도 실천적인 의미에서 공존을 인정하고 모색하는 프락시스적 다원론은 별도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다원주의와 다원성 자체를 구분해서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
종교다원주의의 배경에는 종교간의 갈등이 전제되어 있다. 실질적으로 공존하지만 항상 긴장과 갈등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 다원주의를 통해 다원적 상황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원주의는 하나의 별도의 세계관을 제시하는데, 그 세계관은 개별 종교의 세계관과의 호환성이 없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즉, 다원주의는 세계 종교의 원형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다원주의는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 주창되기도 했지만, 그러한 종교관이 그대로 기독교적이라는 확신도 없다. 다원주의는 제 3의 종교관이며, 세계관인 것이다.
다원주의의 의도는 종교간의 불협화음을 제거하고 공존의 틀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실제적으로 다원주의는 전통 종교관을 흔들어 놓고 기존 종교에 대해 폭력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관점을 내보인다. 즉, 다원주의는 다원주의적 기독교관, 다원주의적 불교관, 다원주의적 힌두교관, 다원주의적 유교관을 앞세우고 있지만, 이 다원주의적 세계관들은 원래 종교들의 고유한 자기 종교 및 타 종교에 대한 관점과는 다르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다를 뿐 아니라 다원주의는 다원주의적 관점을 강요하고 전통적인 종교적 관점들을 배척하고 배제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다원주의는 종교간 갈등을 줄이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종교간 갈등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다원주의와 각 종교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면이 있다. 다원주의 자체가 갈등의 해결책이라기보다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원주의는 갈등을 줄이기보다 갈등의 씨앗을 뿌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은 우리가 다원주의 문제에 대해 피상적인 낙관주의보다 보다 현실적인 비평을 해야 하는 원인이 된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규범적 다원주의를 수용할 수 없다.
다원주의 자체와는 달리 각 종교는 다원적인 종교 및 문화적 상황 속에서 존재한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상황적 다원성을 인정하고 실천적 덕목으로서의 다원주의를 수용할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 본 대로 세계는 이미 다원적인 사회가 되었으며, 실천적인 의미에서의 다원성은 부정하기 어려운 존재의 상황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회 속에서 살면서 다원적 상황은 여러 모양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리는 타종교의 상징들을 우상으로 간주해서 파괴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종교의 모든 것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하나의 룰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공존의 틀을 우리는 존중하고 그것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타종교에 대해 공격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다원주의를 전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다원적 상황 속에서 종교들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에티켓을 지키는 입장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우리는 종교적 갈등을 해소하고 줄이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 다원주의 자체는 부정하지만, 종교 및 문화적 다원성은 인정하는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즉 우리는 실천적인 의미에서 다원성을 받아들이면서도 우리 종교에 충실하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종교적 갈등에 대해서도 적극적이고 선교적인 대안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대안은 기독교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타종교에 대해 이해하려는 입장을 견지하고 타종교인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노력을 앞장서서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와 타종교가 자주 충돌하는 지역 상황에서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으나, 타 종교와 타종교인들에 대한 성숙한 화해와 평화의 태도가 필요하다.
더러는 타종교에 대해서 공존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선교를 중지하고 대화만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선교적인 마인드는 세계복음화에 대한 성경의 명령을 받아들이며, 불신자들에 대한 관용적 태도는 선교적 마인드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대화는 상대의 주장을 다 수용해서가 아니라, 상대의 주장에 귀기울이면서도 자기의 주장을 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타종교가 기독교보다 우월해서 우리가 타종교로부터 배울 점이 있어서 대화에 임하는 것이 아니다. 대화를 통해 우리는 타종교인들의 한계를 발견하고 우리 나름대로의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대화 노력도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선교적 대화가 될 것이다. 대화에 있어서도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한계가 있어서가 아니라, 불신자들이 처한 환경과 실존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대화에 나설 수 있다. 다원성에 대한 인정은 이렇듯 대화의 태도로 연결될 것이다.
다원주의 시대의 선교는 세계의 다원적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한다. 현실적으로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상황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실존적 다원성에 대해서는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서 선교적 자세와 접근법은 더욱 조심스럽고도 섬세할 필요가 있다. 종교간 갈등의 시기에 기독교는 평화와 화해의 종교라는 인식을 심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많은 경우에 기독교 역시 타종교와의 갈등 속에서 그 갈등 구조에 뒤섞이는 모습을 보여 준다. 다원주의 시대의 선교는 더욱 유연성이 높고 더욱 섬세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평화를 사랑하며, 인류의 보편적인 선을 추구한다는 믿음을 줄 필요가 있다.
III. 분쟁의 시기에 평화의 선교
분쟁의 시기를 맞아서 우리는 어떻게 평화의 복음을 전할 것인가? 선교의 환경이 어려워질수록 우리는 더더욱 평화를 사랑하는 기독교의 모습을 전할 필요가 있다. 선교는 원래적으로 화해의 행위이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평화가 없는 세상을 향해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선교적 과제이다.
전쟁과 재난의 소식은 인류 역사가 계속되는 한 계속 들려올 것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계속해서 어려울 것이다. 분쟁의 시기에 우리는 더욱 현실을 그대로 이해하는 안목이 필요하며, 문화를 이해하는 안목이 필요할 것이다.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바탕 위에서 우리는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 특별히 특정 세력에 연루되거나 시류에 영합하는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 아편 전쟁 때 일부 선교사들이 영국 편을 들고 영국 군대가 중국에 주둔하는 사태가 오면 선교에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결과는 정반대였다. 선교사들의 경망스런 정치적 몰이해가 중국 선교에 있어서 아직까지도 부담이 되는 민중의 반발심을 사게 되었다. 평화의 선교는 특정 정치 세력과 결탁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
20세기 후반부에 미국 선교계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능력 대결 (power encounter) 이론도 평화의 선교의 관점에서 보면 잘못된 선교적 태도로 이어지기 쉽다. 능력 대결 이론은 영적 능력을 추구하게 만든다. 그러나 진정한 이슈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이며, 대화의 문제이다. 그런데도 능력 전도 이론은 영적인 무장을 하고 지역 악령들을 능력으로 몰아내는 것을 핵심 과제로 인식시킨다. 그래서 불신자들의 세계를 이해할 때 그들을 투쟁의 대상으로 인식하기 쉬운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사랑의 대상이며, 평화롭게 공존해야 할 대상이다. 보다 균형있게 현상과 이슈들을 살펴 보면,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관계이며, 관계 회복에 있다. 특별히 선교 대상자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 과제인 것이다.
더러 전도의 현장에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위협감을 줄 때가 있다. 최근 지진 해일 피해 지역에서 활동하는 기독교 NGO들의 활동이 현지 종교 지도자들에게 위협감을 주고 긴장을 불러 일으킨다는 보도가 있다. 많은 NGO 사역자들이 현지인들의 기독교로의 개종을 바라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상대방에게 위협감을 주지 않는 선교의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할지라도 현지인들에게 반감을 준다면 이는 적절치 않다. 평화의 선교는 상대방의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부드러운 방법을 선택하게 한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나, 분쟁의 시기에 더욱 민감하고도 지혜롭게 복음 전파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평화의 선교는 항상 소프트 파워를 믿는다. 상대방에게 위협감을 주지 않으면서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소프트 파워의 발휘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기독교의 영향력은 항상 소프트 파워를 통해서 일어난다. 무력으로 확장된 종교는 진정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진정한 파워는 겸손과 온유와 낮아짐과 인내의 파워이다. 이런 파워는 우리의 내재적인 능력보다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발견되는 변화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소프트 파워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에 나아갈 때 우리는 우리 능력의 한계로 인한 좌절을 겪지 않아도 된다.
소프트 파워를 믿는 믿음은 결국에는 성령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오직 성령만이 세상과 영혼을 변화시킨다. 하드 파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 같아도 겉으로만 영향을 줄 뿐이다. 성령의 소프트 파워는 세상과 인간의 변화를 내부로부터 이끌어낸다. 인간의 변화는 자발적인 변화를 통하지 않는 한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선교의 소프트 파워는 성육신적 낮아짐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었던 것처럼, 성육신적 사역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길이 된다. 우리가 성육신적 사역의 자세를 가질 때만이 성육신의 비밀을 경험하게 되고, 소프트 파워를 가지게 된다.
평화의 선교, 소프트 선교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돈의 영향이다. 돈은 현대 사회의 가장 큰 우상이며, 돈이 가진 영향력은 경우에 따라 가장 위험한 힘이 될 수 있다. 돈은 짧은 시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보일 수 있다. 그래서 돈으로 하는 선교는 쉽고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돈 위에 세운 선교는 무너지고 만다. 돈은 선교사의 영향력을 크게 할 수는 있어도 소프트 파워를 대체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모든 선교적 프로그램과 프로젝트는 돈이 아닌 진리와 사랑 위에 세워져야 한다. 이것은 돈이 해롭다는 뜻이 아니라 돈의 영향력도 복음의 소프트 파워를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평화의 선교는 장기적인 관점을 표방한다. 국제적 갈등의 와중에서 단기적인 관점에 치우치면 현지인들에게 위협감을 주는 일을 하기 쉽다. 평화의 선교는 장기적인 관점을 표방하면서 무리하지 않는다. 이라크 전쟁의 와중에서 우리는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게 되면 선교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질 수 있는지 배운다. 우리는 길게 보면서 선교 전략을 입안할 필요가 있다.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가 그렇게 쉽게 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세상은 우리가 단숨에 복음으로 변혁할 만큼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장기간에 걸친 인내와 수고가 있을 때만이 우리는 진정한 선교적 효과와 영향력을 볼 수가 있다.
평화의 선교는 문화적 민감성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문화중심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문화가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문화에 대해서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기 어렵다. 우리가 문화적 동등성을 생각할 때 우리는 다른 문화에 대해서 존중하면서 그 문화적 특징들을 익힐 필요를 깨닫게 된다. 문화적 민감성이 없으면 선교는 일방주의적으로 하게 되고, 위협감을 주게 되고, 거칠게 하게 되고, 부드러움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특별히 여러 문화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문화적 민감성을 기를 필요가 있다. 특별히 문화적인 충돌이 일어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문화적 민감성을 가지고 그런 현상을 이해하고 민감하게 상황에 대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평화의 선교는 역사 의식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선교가 어떻게 이루어져왔고 앞으로 어떻게 되어야 할 지 선교 역사로부터 배운다. 역사로부터 배우는 선교는 역사적으로 수차례 반복되었던 과오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대 선교는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역사 의식이 없는 선교는 활동주의 (activism)에 빠지게 된다. 활동주의는 활동 자체가 곧 일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선교에 있어서 활동주의는 선교적인 생각과 의식을 잃어버리고 지금 당장의 활동만이 세상을 구원할 길이라고 믿는 것이다. 활동주의는 선교를 요란하게 하는 것이다. 요란한 선교는 부드러운 선교보다 효과가 없다. 특별히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 효과는 미미할 뿐이다. 우리는 역사적인 안목을 가지면서 문명충돌 시대의 선교를 할 필요가 있다.
IV. 맺는 말
세계화는 종교적인 충돌을 심화시키는 면이 있다. 세계화는 여러 세계 종교들이 하나의 사회 속에서 경쟁하도록 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종교들은 세계화 시대에 과거보다 더 많은 경쟁을 하면서 각 종교의 수월성을 나타내려고 한다. 종교다원주의는 종교간 충돌을 방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의도와 상관없이 각 종교들의 원래적 특성들을 부정하면서 각 종교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규범적 다원주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실천적인 의미에서의 종교적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다원성을 인정하는 선교는 평화의 선교이다. 평화의 선교는 분쟁의 시기에 특정 정치 세력과 결탁하는 것을 지양하며, 대결적인 마인드를 버리며, 상대방에게 위협감을 주지 않도록 부드러운 힘을 사용하며,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성육신적 자세로 낮아짐의 선교를 하며, 돈으로 선교하지 않으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선교하며, 문화적 민감성을 발휘하면서 선교하며, 활동주의에 빠지지 않고 역사적인 의식을 가지고 선교하는 것이다. 분쟁의 시기에 이런 진정한 선교가 한국 교회에 의해 이루어지길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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