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교회사
1. 로마 함락 이후의 기독교권(476~590)
서방에서의 로마제국은 점진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제국의 중심지가 서방에서 동방으로 즉, 로마에서 콘스탄틴노플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제국의 상태는 오랫 동안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기독교 내에 영향을 주었다.
야만 민족들은 제국을 침략하여 유럽의 정신에까지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다. 북아프리카에 최초의 왕국을 세웠던 반달족은 아리우스 주의 신봉자들이었다. 이들의 영향은 극히 미미했었다. 스페인에는 비시고트족들이 자리을 잡고 있었다. 이들도 아리우스 주의자였으나 주민들의 정통 보편적 신앙(Chatholicism)을 자기들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고울 지방에서 프랑크 족들에게 축출되었다. 이들은 스페인에 정착한 이후 40년 이상 아리우스 주의를 신봉하고 이 신조에 따른 고트어로 된 예배 의식과 왕권에 의지한 교회 조직을 정비하였다. 고울 지방의 프랑크 왕국은 자신들의 영토를 가지고 오랫동안 살아갈 수 있었다. 이들은 보편 교회의 종교적인 후원 아래 왕국을 세울 수 있었다. 아리안 오스트로 고트족은 이탈리아를 지배하였다. 이들은 아리우스 주의자들이었다. 로마 제국의 초청으로 들어온 이들은 식민자로서 간주되었다. 아리안 오스트로 고트족 출신의 테오도릭은 타종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폈으나 동로마 제국의 정책의 변화로 정통 교회에 핍팍을 가하게 되었다. 6세기에는 정·교가 일치되어 상반되는 종교적 사상으로 하나의 국가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당시 야만 민족들에 의해 세워진 국가들의 생존은 피정복민의 문회에 적응하고 수용하는데 있었다. 이들은 소수이고 대부분의 백성들이 로마인니자 정통 기독교인 이었기 때문이다. 6세기 말까지 프랑크 족과 비시고트 족은 존재하였는데, 이들은 정통 신앙을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고전적 학문들은 보에티우스와 카시오도루스에 의해서 기독교 학문의 명목으로 중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6세기 전반에 일어났던 신학적인 논쟁은 죄와 은혜에 관한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종교회의의 소집없이 교회는 죄와 은혜에 관한 교리로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로마 함락과 대 그레고리 교황 제위 시기 서방에서는 베네딕트 수도원 운동이 시작되었다. 베네딕트는 동료들과 함께 「계율(Rule)」을 작성하고 이를 실험해 본 후 완성하여 이에 따라 수도하였다. 수도사들은 하루 일과를 예배와 노동과 성경 및 독서와 연구로 보냈다. 하루의 생활은 규칙적이며, 검소하고, 정결과 빈곤과 순종 등의 계율을 철저하게 지켰다.
수도원 운동은 그 권위가 더해져 제국 정부와 싸우는 무기로, 혹은 열성파들의 효과적 무기로 사용되었다. 동방 전역에 걸쳐서 있었던 수도원들은 그들의 교리적 입장을 동일시 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 때 단성론자들과 이성론자들 사이의 분재에서 칼세돈 회의를 통해 이성론이 채택되었다. 제노는 482년 통합칙령 혹은 헤노티콘을 발표하여 동방교회는 연합이 이루어 졌으며, 교리적 분쟁은 일단락 지어졌다. 그러나 서방 교회는 이에 대하여 이 칙령에 서명에 모든 주교를 파문함으로 동방교회에 반발하였다. 이에 아카시우스 총대 주교는 동일하게 서방교회의 펠릭스를 파문함으로 이로써 동·서 교회는 분열이 시작되엇다. 아카시우스가 죽고 저스틴이 등극하자 칼세돈 기독론을 인정하고 동방교회에 양성론을 강요하였다.
유스티니안 치하의 기독교는 정치와 일치하여 황제가 마치 교황과 같은 시기였더, 그는 정통적 신앙을 유지하였고 네스토리우스주의를 정죄하였다. 그가 통치하던 시기는 비잔틴 예술과 문학의 황금시기로 이때의 대표적 건물로 성 소피아 성당이 있다. 그는 말년에 아프타르토 가현설 이라는 이단에 빠져 교회에 의해 파문 당하였다. 제6세기 조직과 예배가 동방교회에서는 거의 완전해 졌으며, 서방 교회는 일부 완성되었다.
2. 교황들과 서방 교회의 선교(590~756)
유스티니안 사후 교회는 더이상 제국의 종속에 있지 않아도 되었다. 제국은 거의 파산 직전에 있었으묘, 야만 민족들은 서구 유럽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서방의 쇠퇴기 가운데 로마는 가장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로마 제1의 시민인 주교에게 시민들은 통솔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7세기 이후 주교제도는 교황제도로 바뀌었고 서부 유럽에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기독교의 확장을 가져 왔다.
시대의 요청에 의해 로마 교황이 된 그레고리은 세계사에 큰 영향력을 끼친 교황제도를 창조한 사람이다. 그는 롬바르드 족속들이 로마를 침략하자 공공 생활 문제와 정치적·군사적 측면에서 그의 능력을 발휘하자 시민들은 교회를 국가로 보기까지 하였다. 그는 선교의 필요성을 느끼고 스페인의 아리우스주의자들을 정통신앙으로 전향 시켰다. 그는 예배 의식을 간소화 하고 설교를 중요시 하였으며, 그리고 예배시 스콜라 칸드롬(성가대)을 시작하였다. 그는 설교가로 신학 저술가로 활동하였다.
596년 그레고리는 베네딕트 수도사인 어거스틴을 앵글로 색슨족의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로마 교회의 영국 선교는 영국의 7왕국을 지리적 위치에 따라소 잔행되었다. 어거스틴과 그의 동료들은 타네트 섬에 상륙하여 복음을 전했다. 켄트왕 에텔베르트에 복음을 전하자 그와 그의 백성은 개종하였다. 604년 멜리투스는 초대 런던 감독이 되었다. 같은 시기 유스투스는 로체스터의 감독이 되었다. 파울리누스는 625년 켄터베리에서 노덤브리아 왕국으로 가서 에드윈 왕과 그의 각료들을 회심시켰다. 그러나 수년 후 이교도 왕 메시아가 에드윈을 살해하고 파울리누스가 도주하게 됨으로써 그 사역은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노덤브리아를 회심시키려는 다음 시도는 635년 아이오나에 있는 켈트 교회에 의해 이루어 졌으나 켈느 교회에 로마 교회의 차이점 때문에 파울리누스는 이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432년 패트릭이 아일랜드에 도착한 이후 그 지역에서는 복음이 번창하였다. 스코틀랜드 최초의 선교사는 397년 솔웨이 퍼스의 휘톤에 교회와 수도원을 설립하고 픽츠 지역에 복음을 전하여 먼 북쪽 지방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던 니니안이었다. 성 콜럼바는 563년 아일랜드에서 아이오나로 건너와서 전도자로서 정치가로서 수도원장으로 일하였다. 635년 아이단과 그의 친구들은 아이오나로부터 린디스판이라는 노덤브랜드 해안의 작은 섬으로 건너갔다. 30년 이내에 그들은 노덤브리아를 복음화 시켰다. 로마 교회와 켈트 교회의 차이점을 논의한 휘트비 종교회의(664년)에서 노덤브리아의 왕 오스위는 로마 교회측으로 넘어갔다. 그 이후부터 켈트 교회의 영향력은 영국에서 점차 약해졌으나 그들의 업적은 기억되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현재의 벨지움, 네델란드와 북해의 독일 해안 지방으로 복음을 전했다. 네델란드는 윌리브로드의 노력으로 점차 복음화 되었다. 윌리브로드의 동역자이자 조수였던 윈프리드는 독일 복음화에 가장 중요한 존재자로서 보니페이스(선행자)라는 별명을 가졌다. 보니페이스는 기존의 있던 기독교를 하나의 유기체로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그의 전도활동은 완강한 이교도들에게까지 미쳤다. 그가 주로 활동한 지역은 라인 강 동부와 다뉴브 강 북부 독일 지방에서 이었다. 교회는 계속 확장되었던 것은 아니다. 스페인은 이슬람의 손에 들어갔다. 이때 용사 펠라요는 단신으로 지하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계속 전개 되었다. 챨스 마르텔은 모슬렘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쳐들어 올때 투르에서 승리하여 모슬렘을 스페인으로 몰아내었다. 이 승리를 거둠으로 서부 유럽은 모슬렘으로부터 보호되었다.
게르만 족들은 개종으로 새로운 문화와 문명이 발생하였다. 기독교가 전파되자 이교도 신전들은 파괴되지 않고 변형되고 개조되어 그 존재를 계속 유지하였다. 이들은 귀신들과 영웅들을 숭배하였으나 이러한 것은 점차로 성모숭배로 고정되기 시작하였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신자들의 마음에는 성유물, 성직자들 등이 숭배와 성스러움으로 생각하였다. 당시 기독교에는 신화가 익숙하였다. 그리고 미사의식은 매우 중요시 되었다. 그래서 모든 종류의 은혜를 입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신자들에게 고행이 행해졌는데 이는 속죄의 수단이었다. 고기독교는 모든 문회에 침투하여 법률, 결혼등에 그 영향을 주었다. 학문은 서로 유기적이기 보다는 산폐하여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 1세는 어거스틴 주의자였으나 중세의 어거스틴주의를 외곡 변형시켰다. 그리하여 사회·문화의 전반적인 부분에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의 관심사가 종교로 집약되자 로마 교회는 각 주교는 영지들과 사람들 위에 정치적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에 교황은 영적 권위자로 새로운 정치적 군림자가 되었다. 교황은 교황령의 성립이 되므로 신학에 관심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정치가로서의 임무에 더욱 치중하였다.
3. 교리상의 갈등과 동방교회의 분할(565~717)
동방교회의 수도사들은 칼세돈 회의에 의해 성립된 정통 신앙은 이단적인 것이며 이것은 칼세돈 이전의 해석을 통해 올바르게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티베리우스 2세는 단성론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 탄압은 그가 죽자 종결되었다. 네스토리우스주의는 하나의 조직으로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동방교회의 문제가 되었다. 이들은 페르시아에서 동·서방 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단성론보다 발전된 단일의지론은 동방제국이 페르시아와 이슬람을 막아내는 신학적인 시도였다. 제 6차 세계 종교회의에서 이 단일의지론은 정죄되었다. 이 논쟁은 종식된 것이 아니었다. 이 투쟁은 제국과 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또 페르시아의 침략을 막자마자 이슬람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이슬람은 기독교에 중대한 도전이며, 세계 역사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마호메드는 622년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갔다. 그의 도피를 뜻하는 헤지라는 그의 생애의 전환점이었다. 메카로 돌아온 그는 아라비아를 통일하였다. 회교도들에 의해 교회는 수많은 피해를 입었다. 제국의 영토느는 축소되었고 교회는ㄴ 이미 쇠약해 졌다. 이 시대에 나타난 사회의 외형적 모습은 매우 종교적 열정이 강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주민들의 도덕은 지나체게 뛰어나지도 않았다.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의 의식보다 더욱 세련되어 지고 보다 아름다워졌다.
4. 카로링가 왕조의 문예부흥(756~882)과 브리튼의 부흥(871~899)
이 시대의 사건들에 정치적 연속성을 주는 것은 신성 로마 제국이다. 제국의 통치는 중세의 봉건제도로 이어졌고, 교회는 샤를마뉴 이후내적인 통일을 유지할 수 있었다.
샤를마뉴 치하의 서방교회는 교회의 관리와 치리에 관한 문제, 수도원 운동의 개혁과 부흥, 각종 교회 건물과 관습, 예배 의식과 예식등의 측면, 기독교의 교리의 측면, 학교 교육의 실시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기독교 책임감을 가지고 이교도들을 무력으로 선교하였다.
샤를마뉴의 종말은 제국의 종말을 의미하고 제국의 약화는 교황의 강화를 의미하였다. 레오 3세 이후 니콜라스까지 7명의 교황들이 교황의 영적권위의 우세를 위해 준비하였다는 점에서 동일하였다. 니콜라스는 교회의 약점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그의 행동은 명백하고 단순하였다. 그리하여 교회는 서유럽의 최고의 위치에 놓이게 하였으며, 교황의 위치는 만민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는 중앙유럽의 슬라브 족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교회의 권위는 하늘을 찌릇듯하여 교황의 권위는 신앙과 신조에까지 미쳤다. 그의 재위기간 그래서 많은 거짓 칙령들이 나돌았다.
9세기 서구사회가 학문과 독창적 사상의 르네상스를 이룩했던 중심적인 인물들은 아달하르드와 왈라가 이끌었던 코르비 사원의 학자들이었다. 신학에 있어서 예정론의 문제는 수도승 곳곳촉크에 의해 제기되었다. 교회는 그으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를 감옥에 투옥하였다. 예정론 보다 더 오래 끌었고 따라서 당시 학자들에게 더욱 심각했던 문제는 성찬식의 성격에 관련한 교리 논쟁이었다. 화체설의 교리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았으나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철학에 있어서는 이 시대의 풍조와 유리되어 있었다. 브리튼이나 아일랜드의 수도원들에서 비롯된 각종 사변들은 요오크의 알퀸의 도움 아래 샤를마뉴에 의해 대륙으로 이식되었다. 이 시대의 철학자들 가운데 현재까지 그 작품이 전해 오는 유일한 존재로 신플라톤주의의 부흥의 대변인인 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가 있다. 그의 기본 명제란 곧 종교란 실제에 있어서는 철학이며, 마찬가지로 철학은 곧 종교라는 것이었다. 그의 이론은 그의 당대인들이 이해하거나 반박하기에는 너무나도 승화된 것이라 당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였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침략으로 브리튼의 문화 문명은 물론 종교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알퀸을 배출했던 요오크를 비롯하여 북학파들은 종족을 감추었고, 무지, 미신, 공포가 만연하였고, 수도사들과 사제들은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 채 치태를 보일 때 알프레드가 출현했다. 그의 뛰어난 두가지 업적은 첫째는 정치, 군사적인 공로이다. 그는 데인족을 몰아내고 서부 색슨 왕실을 중심으로 영국인들의 힘을 모아 국가를 건설하였다. 둘째로 그는 국민들 가운데 학문과 교육을 진흥시키고, 성직자들의 도덕을 개혁시켰으며, 종교 조직과 규율을 다시 세우고 종교의 모습을 되찾아 이를 계속 발전시킬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제5장 8,9세기의 비잔틴 기독교(717-886)
동방 교회는 인문적 수준에서 서방 교회에 비해 앞서 있었다.
동방 교회의 황제들은 교회를 항상 자신들이 돌봐야 할 유산으로 생각하였으며, 스스로들을 교회의 조정관으로서, 신학자로서 간주해 왔다. 이에 따라 성상 논쟁 역시 황제였던 레오 3세에 주도되어 손자 레오 4세에 의해 계속되었으며, 결국 비공개 종교회의에서 일단 막을 내렸는데 이 과정을 통해 황실은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원래 황제및 몇몇 주교들의 진정한 종교적 관심들로부터 비롯된 문제가 곧 가장 중대한 정치 문제로 발전한 것이었다.
우상 철폐론의 시대에는 다마스커스인 죤이라는 동방 교회 최대의 신학자를 배출하였다. 동방교회 최대의 신학자인 죤은 기독론과 인론의 해석 분야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인간의 자유와 그 구원을 위한 피조물인 자신의 책임을 과도하게 강조했으므로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해서는 그다지 강조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구세주라기보다는 우리들에게 좋은 모범을 제공하는 스승으로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그리스도의 위격이 주된 신학적 관심사였고, 그의 구속 사역은 별로 큰 관심을 끌지 않았던 동방의 전통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또 그는 동방 교회의 출신답게 성스런 신비들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의 영구한 처녀성을 주장하였다.
우상 철폐론에 의해 시달리던 동방 교회는 또한 바울 당파라는 분파에 의해 시달리게 되었다. 이 당파의 기원은 확실치가 않으나대적들은 이들 분파가 마니교로부터 비롯하였다고 주장하는데 비해 그들 자신은 제 7세기 중반 프리마 지역의 콘스탄틴이라고 주장하였다. 동방 교회는 그 세력을 확대해 갔으며, 헬라적 기독교의 영향력은 증대되었다. 그 중요한 원인은 수도원주의 즉 수도사들의 헌신과 정열 때문이었다. 이들은 일반 대중들의 인기와 후원을 얻고 있었다. 이 시대의 수도원의 정신과 성격을 잘 대변하는 인물로는 스투디움의 테오도레이다. 그는 개인의 욕망보다는 공동체의 복리를 지향하느는 새로운 규칙을 시행하였다. 그는 수도원은 가능한 한 오직 총대 주교의 지시만을 받고자 하였다. 이 시대의 교회들뿐만 아니라 수도원 역시 주교들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였다. 당시 교회의 대체적인 성격과 정신은 수도원적 경건주의로 표현될 수 있겠다.
이 시대의 동방 기독교가 새로운 지역으로 진출한 주요한 두가지 사건들이 9세기에 발생하였다. 동방 기독교의 활력은 새로운 지역에의 확장및 선교 활동에서 찾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북방에 거주하고 있던 슬라브족들을 향한 헤라클리안 왕조의 관심이 있었다. 모라비아인들은 헬라인들로부터 복음을 요청했으며, 불가리아인들 역시 공식적 선교 활동이 시행되기 이전 기독교에 대한 복음의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모라비아나 보헤미아가 아니라 불가리아가 그 후 슬라브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것은 교회의 관심의 방향이 바뀌었거나 이교도들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선교 복음화에서의 헬라 기독교의 업적은 두 개의 추악한 분열에 의하여 훼손되었다. 이에 따라 발생한 콘스탄티노플과 로마의 분열은 그 후 동방과 서방 기독교의 최고 결렬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건의 장본인은 포티우스였다. 눈 앞의 이익에 눈이먼 니콜라스는 이그나티우스의 입장을 지지하여 총대 주교직에 선출된 포티우스를 탄핵하였고 동방 교회 전체에 대한 그의 판결을 선포하였다. 포티우스의 몰락은 서방 교회와는 무관하며 그것은 정치적 문제로 야기되었다. 포티우스 시대의 두 분열은 단순한 개인의 성격적 대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통일과 질서 로마에 대한 복종을 주장하는 서방 교회의 국가 제도와 교회가 단지 국가의 일부였으며 국민들의 정치적 사회적 갈망이 예배를 통해 표현되었던 동방 제국주의의 대결이라 하겠다. 양자간의 차이들은 교리적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포티우스 이후 동방과 서방의 결렬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제6장 동, 서방 교회의 분열(882-1081)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에 발생한 포티우스시대의 제 2차 분열까지도 외형적으로는 9개월 후 총대 주교의 퇴위와 함께 연결되었다. 교리 및 교회 정치에 관한 결정들은 양 교회의 참석 하에 세계 종교회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 소집은 콘스탄틴 시절과 마찬가지로 동방 황제들이 담당하였으나 항상 로마 교황들의 사후 동의를 받고는 하였다. 1054년은 서로 다른 경로를 따라 너무 오랫동안 흘러오던 기독권의 동·서방 교회는 서로 공개적으로 서로의 상이점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분열을 정당화할 만큼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동·서방 교회는 거의 두 개의 서로 다른 종교처럼 되었다.
세르기우스 3세의 등장과 함께 속칭 “도색 정치(포르노 크라시)”가 시작되어 거의 60년 동안만을 가르키는지는 모르지만 이는 무능과 부패와 실패로 만연하였다.교황의 자리는 귀족의 놀이개로 전락하였다. 이 새의 전형적인 타락의 모습과는 달리 클루니 사원이 생기게 되었다.
독일 황가는 종교 문제의 새로운 국면을 제시하였으며 최소한 처음에는 교황들의 부정 부패를 개선하고자 노력하였다. 실질적인 독일 국가의 창시자인 오토 1세는 교황직을 국제적 위치로 올려 놓았다. 당시 프랑크와 영국은 국가를 위협하는 봉건제도의 몰락으로 시달리고 있었으며, 이러한 생활은 교회 생활에서도 반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라임스 대주교 아달베로 와 켄터베리대주교 둔스탄은 교회 내의 혼란과 성직 매매 족벌주의 도덕적 타락, 수도원의 나태 및 탐욕 기타 이들 국가들에게 기독교를 심각하게 위협하던 부정 부패들에 방파제의 역할을 하였다. 오토 3세의 사망과 함께 교황청에 대한 제국의 고삐도 늦추어졌다. 이러한 로마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서방 교회는 이 시기에 약간의 진보를 경험하였다. 비록 전쟁은 법으로 금지되지 않았으나, 최소한의 기사도를 통해 이를 기독교화 하고자 하는 노력이 행하여 졌다.
어느 사회 기반보다도 동방 교회의 경건과 헌신을 대변하고 있는 수도원 운동은 이 시대에 그 세력과 영향력의 절정에 이르렀다. 선교사들을 통한 새신자의 획득이나 혹은 기독교 영향권의 확대 역시 눈부신바 있었다. 비록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황제 사이에 때때로 충돌이 있었지만 이 때문에 교회의 이익이 훼손 당하지는 않았다. 비잔틴 통치자들은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만큼이나 전통 신앙의 수호에 전력하였다. 로마누스 레카페누스황제때 한동안 독립을 유지하던 교회는 다시 국가에 종속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는 제국이 영토를 넓힘으로 그 영역을 넓혔다. 이처럼 헬라 기독교가 급성을 이루었던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면 러시아의 개종을 손꼽을 수 있다. 처음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들 가운데는 키에브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태후 올가였다. 또한 러시아 기독교의 진정한 창시자는 올가의 손자였던 블라드미르라할 수 있겠다.
11세기 중반 경 새로운 지역을 향한 기독교의 확장은 일단 중지되었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이미 고식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최종적 분열의 구실로 양 교회가 제시한 종교적 이유들은 사실상은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인 것이 였고 또 어느 정도는 개인적인 것이기도 했다. 분열을 낳게 한 장본인들은 로마 교황 레오 9세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마이클 세룰라리우스이었는데 세룰라리우스는 동방 교회를 제국 정부로부터 독립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불가리아 대주교가 작성한 선언문을 출판시키고 공개장을 교황에게 발송하므로 이 결과 동·서방교회의 분열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분열 직후 동·서방 교회에 발생한 영향들은 거의 동일하였다. 동·서방 교회들은 자신의 영향권 네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으며 스스로의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을 집중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제한과 감독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서방 교회에 있어서는 이 문제에 관해 일단 성공을 거둔 듯이 보인다.
제7장 용사들의 시대(1073-1124)
이 시대는 진정 용사들의 시대이다. 라틴 역사는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 사이의 투쟁을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헬라 역사는 특히 종교뿐 아니라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극심한 변화를 초래했던 제1차 십자군 원정에 의해 그 방향이 결정되었다.
25년간 힐데브란드는 수도사의 몸으로 서방 교회를 통치하였다. 그의 스승의 이름을 따서 그레고리 7세의 칭호를 선택하였다. 비정상적인 방법에 의해 선출된 그레고리는 기독교권 전체의 개혁이라는 그의 이상을 추호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의 이상은 무엇보다도 성직자들 사이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즉각적으로 상당수의 성직자들의 반발이 있었다. 두번째로는 평신도들에 의한 성직 수임으로부터 교구들 및 교회 기관들을 해방시켜 교회에 대한 세속 권력의 간섭을 방지시킨다는 것에 있었다. 1075년의 로마 종교회의에서 그는 평신도에 의한 성직 수임 문제에 대한 그의 입장을 명백히 밝혔다. 1076년 1월 24일 독일 웜스에서 독일 주교회의에서 그레고리를 정죄하였으며 파문까지 행했다. 그레고리는 헨리왕을 파문시키고 프랑스 국민들에게 그에 대한 충성을 해제시켰다. 헨리 4세와의 대결로 국제 정치 무대에서 그레고리 7세는 중세의 도덕적 영웅으로서 우뚝 섰다.
유럽의 관심은 동방 모슬렘제국을 향한 서방 기독교의 군사 원정으로 옮겨져 갔다. 동방 제국의 변화는 기독교 순례자들에게 고난을 겪게 하였고, 거룩한 나라 이스라엘로부터 이러한 신성모독을 제거하고자 하는 종교적 열정에 불타게 되었다. 1081년에 즉위한 동방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는 서방에 새로운 지원병들을 요청하고 종교를 이용하기 위해 교황에게 직접 호소하였다. 교황 우르반 II는 원정을 위해 서부 유럽이 연합하면 기독 교권의 통일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제 1차 십자군의 원정은 곧 터키인들에 대한 제국 영토의 확장을 의미했다. 알렉시우스는 니케아 함락 후 최 남단 안디옥에 이르기까지 소아시아 지방의 전체 해안을 다시 정복하였다. 그는 그가 판단하였던 교회 및 제국의 이익을 위해 과격한 방법도 불사하였다. 서방인들이 항구적으로 자기들의 영주국들과 국가들을 설치한 성읍들과 지역에서는 동방 교회가 역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기독교권에서 가장 오래되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예루살렘에서는 라틴 예식이 헬라적 의식들을 대체하였다. 제 1차 십자군의 원정으로 인하여 자기와 다른 종교 형태와는 기꺼이 경쟁을 불사하는 보다 적극적 라틴 기독교적 요소가 동방에 유입되었다. 또 로마와 콘티탄티노플사이의 분쟁으로 시작된 동서방 교회의 분열은 동방 제국 전체에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해외에서 십자군 제 1차 전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우르반 2세의 정력적인 11년간의 통치는 이미 서방 국민들의 관심이 교황청과 제국간의 분쟁으로부터 떠났지만 여전히 내부에서는 성직 수임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도 터지기 시작하였다. 최종적으로 평가해 볼 때 그레고리 7세의 원칙들이 승리했다고 볼 수 있다.
서부 유럽은 예배와 신앙의 소박한 꽃을 피움으로 경건의 물줄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그 결과 수도원 운동이 활짝 꽃피게 되었다. 수도원 운동의 진정한 만개는 12세기 초에 이루어졌다. 수도원적 경건성이 미친 영향은 교황청의 조직및 권위를 강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수도원 정신에 의해 일반인들의 세속적 권익까지도 증진되었다. 사제들은 하나님의 평화를 실행하기 위하여 교구들을 조직하였다. 수도원주의는 따라서 사화복음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으며, 결국 이러한 혁명적인 경향은 마침내 봉건제도를 타파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수도원주의의 부흥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스콜라 학파라 불리던 새로운 철학의 발흥과 이 학풍이 신학의 발전 및 기독교 교리의 정립에 미친 영향이다. 이는 처음에는 순수한 방법론으로 시작되었으나 결국 그 경계 내에 시간과 존재를 포함하는 거대한 체제로 발전하였다. 11세기의 Anselm 과 12세기의 피터 아벨라르드의 천재에 의해 변증법은 신학에 이용되었다. 그러나 Anselm은 이를 통해 스콜라 신학의 아버지라 불린 반면 아벨라르드는 이단으로 정죄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Anselm이 기독교를 비합리주의와 비논리적이고 자기 모순적 명제로 인한 부조리로부터 기독교를 구했다는 점만은 평가되어야 한다.
제8장 제12세기(1124-1198)
제12세기에 혁신을 이룬 약 75년간의 기간은 아마도 변동의 시기라고 불릴 수 있겠다. 이 시기에 다음 세기를 장식한 찬란한 문명을 예기할 정치적·문화적 르네상스를 경험하였다.
동방 교회와 제국은 12세기에 두차례의 서방으로부터의 십자군 원정에 시달렸다. 교황 파스칼2세와 알렉시우스 콤네누스황제 사이에 시도되었던 동서방 보편 교회의 재결합을 시도를 위한 회합은 결렬되었고, 12세기 전체에 걸쳐 계속되었다. 재결합 시도는 역시 비슷한 길을 걸어갔다. 1146년 부활절에 행해진 버나드의 설교에 자극을 받아 시작된 제 2차 십자군 원정은 다른 부위기로 흘러갔다. 동방 황제는 이들을 적대시하였고, 군사적, 정치적으로 대외적인 실패였다. 12세기는 비잔틴제국 내에서 문학적 예술적 활동이 고조되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동방과도 대조적으로 12세기의 서방 기독교권은 중세 전체에 걸쳐 가장 절정에 달하기 직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버나드의 시대는 혁명적인 사건들로 점철되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모든 혁명적 경향에 대항하였다. 그야말로 사회·정치·종교적 보수주의의 방파제였다. 그는 교회와 국가에 걸쳐 기성 체제를 유지하였다. 그의 보수적인 신학의 영역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그는 개인적 경건성에도 불구하고 이단들을 끝까지 처치하곤 하였다. 그의 열렬한 설교를 통해 제 2차 십자군의 원정을 낳게 되었다. 그러나 패배로 끝나자 그 결과는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의 결과라고 확신시킴으로써 이러한 군사적 실패를 영적 승리로 전환시켰다.
보나드 이후 절대주의를 부르짖은 두 명의 군주들이 나타나 그가 이룩한 업적을 무효화 시키고자 하였다. 먼저는 독일의 프레데릭바바로싸 혹은 ‘붉은 수염’였고, 다른 하나는 영국 헨리 2세였다. 17년 동안이나 교황과 황제 사이에는 전쟁이 계속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알렉산더 3세가 프레데릭 1세를 물리치게 되었다. 교황은 각 지방인들의 자존심을 자극하고 독립과 자주를 열망하던 도시들을 자극하는 작전으로 황제를 대항하였다. 독일의 강성을 두려워했던 프랑스 역시 교황의 편을 들었다. 비록 프레데릭은 계속해서 3명의 반교황을 선출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다른 군주의 도움은 일체 받지 못하였으므로 알렉산더에 대항한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 독일 황제는 제3차 십자군의 원정을 떠남으로써 38년의 긴 제위 기간을 끝맺었다.
헨리2세는 2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의 집사였던 토마스를 수상직에 오르게 하고 또 켄터베리 대주교에 선출되도록 함으로써 문제는 일어났다. 그는 완전한 권력을 교회에 행사하고자 했고 그는 성직자가 수도사들에게 세속의 법을 적용할 것을 주장함으로 5년간의 분쟁이 야기되었고 왕의 기사가 대주교를 살해함으로 끝 맺게 되지만 왕에 대한 국민들의 원성과 증오가 너무 커서 결국 잉글랜드 헨리 역시 교회의 의지에 고개를 숙였다. 12세기의 교황청은 성공적으로 세속 왕국들의 문을 열므로써 13세기의 교회가 그 안으로 진군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교회는 또한 내부에서 일어난 이단으로 괴로움을 겪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널리 퍼진 것은 그 옛날 마니교와 동방 제국에서 일어났던 바울당파의 중세적 표현이라 볼 수 있는 카타리였다.그들의 모든 선행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순교자로서의 죽음이었다. 카타리파는 기성 성직 체제를 거부하였다. 이들은 교회의 출석을 거부하였으며, 기존 체제를 약화시키기 위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종교 재판은 이 카타리를 분쇄하기 위하여 시작되었는데 종교재판법은 교황 루시우스 3세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그는 이를 통해 위험지역의 주교들이 최소한 1년에 한번씩 교인들을 검사하고 모든 교인들이 선서 하에 그들의 전통성을 고백할 것을 의무화시켰다.
예루살렘이 이교들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윌리엄은 성지를 수복할 것을 맹세하였다. 서방에서 제일 강력한 프레데릭이 제 1차로 진군해야 하였다. 그는 역사상 가장 잘 장비를 갖추고있는 대군을 이끌고 동방으로 진군하였으나 그는 죽고, 아들이 이어받았으나 역량부족으로 고국으로 귀환해야 했다. 그 결과 원정의 무거운 짐은 영국과 프랑스 인들의 어깨에 짊어지게 되었다. 제 3차 십자군의 원정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사르트르 학파의 최초의 인물은 길버트 드 라 폴레, 그의 뒤를 계승한 티에리, 샤르트르학파의 마지막 인물인 살리스베리의 죤 이들의 기본적인 개념은 플라톤적이었다. 성빅토의 리챠드는 12세기 신비주의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사랑의 용어로 삼위일체를 해석했다는 점에서 특이한 존재이다. 제12세기에는 또한 상징성이 극도로 중시되었다. 성경의 언어들과 사건들은 그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 이를 통해 보다 은밀한 그 무엇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탐구되었다.
제9장 지상의 전투 교회(1198-1303)
비잔틴 제국의 멸망과 헬라 교회의 몰락을 초래한 중요한 요소들은 서방으로부터의 십자군 운동이었다. 십자군의 원정은 완전히 그 의미를 상실하였으며 반면 이슬람은 그 세력과 그 영향력이 최고도로 부흥되었다. 또한 서방 교회는 최고의 절정을 이루었는데 반해 동방교회는 가장 낮은 위치로 전락하였다.
이노센트 3세는 그의 임무를 크게 네가지로 볼 수 있다. ① 교황령을 내외부적 간섭으로부터 해방하여 직접 감독하도록 하는 것. ② 사회 일반, 특히 신성로마제국을 로마교회의 정책에 맞추어 재구성함으로써 국민들과 아울러 정부들을 로마의 교구의 감독 아래 두는 것. ③ 이단을 물리치고 순수한 교리를 보장하며 올바른 치리를 행하는 것. ④ 모슬렘 이교도들의 세력에 대항하여 기독교 영향권을 확장하는 것 그리하여 이 네가지 범주 모두에서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노센트 3세 시대에 발생한 가장 중요한 사건은 탁발 수도회들의 출현은 당시 사회가 처했던 도덕적 ,영적 욕구에 대한 교회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체의 세속을 떠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를 찾고 남들에게 낭누어 주기 위해 자신의 재산과 명예를 포기 하였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평안을 찾고자 하던 사람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학문을 기초로한 중세 최초의 수도회였다. 각 수도사는 오직 복음에 의해 생활할 것이며, 아무것도 소유해서는 안되었고 처음부터 학문과 설교의 중요성을 부정하였으므로 그 전도의 방법은 교훈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했다. 프란시스와 도미니크는 전세기 수도원 운동에 관련된 제 3종 수도회의 계획을 실행하였다.
어린이 십자가 운동이 이노센트의 치세중 실시 되었으나 이는 커다란 비극을 초래하였다. 이노센트가 계획하였으나, 실제로는 노령의 호노리우스 3세에 의해 실행했었던 제5차 십자군 원정은 실질적으로 두 개의 독립된 원정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5차 십자군의 원정이 실패로 끝났다. 프레데릭 치하의 6차원정도 실패하였다. 국가 정책이기에 어쩔 수 없이 원정을 일으켰고, 교회의 저주를 받으며 출발하였다. 그 원정은 외교로 이루어졌다. 루이 9세의 7차 원정도 역시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이 시대의 라틴 교회의 변천은 헬라 교회와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이노센트 3세는 한창 일하 나이에 객사하고 말았고 그의 뒤를 이은 교황도 나이가 많앗다. 동방 기독권이 분열되는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서방 교회는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였다. 호노리우스3세, 그레고리9세 이후 군주뿐 만 아니라 일반 평민들로부터도 교황은 경원과 미움을 받는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유명한 아나그니 폭행 사건이 발생하였다.
제10장 서방 중세 기독교 문명의 극성(1198-1321)
제 13기의 스콜라 학풍은 완전히 교회에 속한 것이었다. 13세기 철학에 가장 크게 공헌한 것은 탁발 수도회원들이었다. 아퀴나스는 스콜라 철학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고 그의 이후 철학의 주류는 종합을 중요시하는 데서부터 개별에의 경향으로 흘러갔다.
새 철학은 진정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발견이 이루어 가능하였는데 서방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접근을 이룬 최초의 인물은 신학자 오버뉴의 윌리암과 과학자 로버트 그로세테스테였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독교의 지적 동반자로 발견한 것이 아퀴나스의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였다. 중세 라틴 신학은 아퀴나스와 스코투스를 통해 헬라 신학이 제 8세기에 도달하였던 완성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철학과 신학에 의해 대변되었던 교회의 내적 생활은 예술과 음악을 통해 외적으로 표현되었다. 고딕 예술의 가장 뛰어난 모습은 스테인드 글래스 창문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고딕 성당의 가장 큰 특색은 그의 건축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신비 및 도덕극의 형태가 나타났다.
13세기에는 법률이 백성들에 의해서 제정되었다. 공식적 기관으로서의 병원은 교황 이노센트 3세에 의해 13세기에 시작되었다. 나병 전문 수용소도 등장하였다. 각종 전문 직업 길드들은 회원들의 작업 조건을 개서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들은 정치적 특권까지 요구하게 되었다. 상업은 13세기에 지방, 혹은 국가적 차원을 초월하여 발전하였다. 한자 동맹은 중세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국제 교역 기구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또한 13세기에는 법률이 백성들의 손에 의해서 제정되기 시작하였다. 비록 점진적이었으나, 국민들을 위한 크나큰 혜택이 되었다.
고등교육의 발전에 의해 혁명적인 단계를 이룩한 대학교들이 출현하였다. 대학교는 구조상 각종 직업 길드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중세가 남겨준 가장 소중한 재산은 대학이라 할 수 있다.
제11장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이전의 기독교권(1303-1453)
보니페이스 8세의 죽음과 콘스탄틴 함락 사이의 150년간은 중세의 최후를 기록한다. 동방에서는 그 파괴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서방에서는 종교개혁과 아울러 여러 국가 및 다양한 교파라는 새로운 형태으 재구성을 기대하고 있었다. 교황청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던 서부의 사회적 통일성은 민족주의의 이름 아래 무너졌으며 여러 국가들은 서로 경쟁하였다.
14세기 15세기 전반의 교회의 모습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는 우유부단과 경솔함 충돌 등으로 일관되었다. 헬라와 라틴의 통일 노력에 공시적인 통일은 이루어졌으나 폭동들이 발생하였고 영적으로는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 제국의 영토 축소로 인하여 콘스탄티노플 주위의 제한된 종교활동은 교회 내부에서 발생한 “열심당”과 “정치파”들 간의 투쟁으로 한층 격화되었다.
프랑스의 민족주의의 발흥과 급속한 교황청의 약화는 같은 시기에 발생하였다. 실질적으로 73년간이나 교황들은 프랑스 왕들의 노리개에 지나지 않았던 이 기간을 가리켜 흔히 교황청의 바벨론 포로 시대라고 불린다. 이 기간에 교황들은 로마를 지키지 못하였다. 그레고리 11세가 교황청을 로마로 귀한 시킴으로 바벨론포로시대는 끝난다.
교황청이 로마로 귀환한지 채 2년도 안되어서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들 사이의 불화로 대분열이 시작되었다. 각국의 이해 관계가 얽힌 정치 외교 문제들이 이에 관련되어 있었다. 그 결과 라틴 기독교권은 크게 양분되어 하나는 로마에, 하나는 아비뇽에 충성을 바쳤다. 교황청 통일의 계획은 대학교들 특히 파리 대학교와 이에 속한 신학자들에 의해 수립되었다. 이는 결국 서방 교회의 보편 종교회의를 통해서 실현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교황청보다 우월한 권위가 교회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나 분열의 해결은 교회의 상실된 건강과 활력을 되찾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 시기의 종교회의 뿐만 아니라 사고 형태들은 교회가 하나의 기관으로서 경험하였던 과정들과 맥락을 나누고 있다. 특별히 독일의 경우 신비주의가 융성했다. 이 시기에 가장 유명한 책이 나타났는데 「그리스도를 본받아」이다. 죄인들의 경험과 예수님의 행동을 본받기를 강조했던 신비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이들과 같은 시기에 성례 중시 주의를 통한 종교의 형식화가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을 포함한 일반 신자들은 성례 중시 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고행을 지나치게 중시하였고 이러한 영향은 죄를 고백하고 약간의 돈만 내면 일체의 형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면죄부가 나타나게 되었다. 13세기와는 달리 이 시기의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이성을 신앙의 동맹자로서가 아니라 그 대적으로 파악했다. 성직 제도의 해석에 있어서 판이하게 달랐으며 기독교권의 회의장에서는 이제 사제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도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당시 기존 교회의 교리,조직 ,치리 등에 관한 영국의 죤 위클리프와 보헤미아의 죤 후스들이 발한 비판들은 비록 당대에 큰 주목은 받지 못했다 할 지 모르지만 후세에 미친 영향은 훨씬더 중대한 것이었다. 위클리프는 교황 제도를 공격하였고 성경적 진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화체설을 부인하였다. 또 그는 가난한 사제들을 보내어 일반인들의 복음화에 노력하였다. 죤 후스는 교회 자체의 교리 개혁을 요구하였고 면죄부에 관한 그의 의견은 종교회의에 의해 이단으로 판결하여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는 당시 발생 초기에 있던 보헤미아 민족주의의 종교적 상징이 되었고 그가 주장한 교리들은 전체 성도들의 교제 속에서 새로운 교파를 형성하였다.
교회의 분열과 고위 성직자들의 부정 부패,철학적 회의주의 그리고 종교 문제에 침투하였던 민족적 이해관계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카톨릭 교회에 기존의 체제 안에서 이루어진 업적은 가히 기록할 만한 것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선교 활동은 중요한 업적이었다. 이 활동들은 13세기와 뚜렷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때의 계획들이 후에 열매를 맺은 것들이었다. 이 시기의 또 다른 업적이라 한다면 플로렌스 회의를 통해 이루어진 일시적 교회의 통일이라 볼 수 있다. 교의로서 정립된 가장 중요한 교리는 성례에 관한 교리들이다. 성례 제도의 정립은 중세 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리의 업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성례의 숫자는 일곱으로 고정되었는데 이들 성례들은 그리스도 사역의 결과이며, 역사 속에서 그의 고난을 계속 지키고 이에 따른 혜택을 신자들에게 베풀어주는 것이다.
중세는 그 시작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 막을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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